11. 소통의 정신 - 태(泰)
인간관계의 친목이나 더 나아가 한 사회의 건강 여부는 사람들의 상호 소통 여하에 달려있다. 좌우로든 상하로든 소통이 활발할수록 그 관계(사회)는 안정적이고 밝을 것이며, 단절과 대립이 심할수록 답답하고 혼란할 것이다.
그러므로 일상의 어느 자리에서든 자타 간의 소통은 삶의 행복과 사회의 평화를 추구하는 데 깊이 유념해야 할 과제다.
특히 의사의 소통에 그치지 않고 더 깊이 상호 간 생명정신을 교감하고 상통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단적인 실례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쁨에 찬 얼굴에서 발견한다.
앞서 인간관계를 매개해 주는 규범으로 예의의 중요성을 말했지만, 사실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예의는 그 자체에 형식성을 강하게 띤다.
그러므로 예의만으로 맺어지는 인간관계는 문자 그대로 ‘의례적인’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예의에 공경의 정신이 강조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예의를 차리기 이전에 공경의 정신으로 서로 인격을 소통하고 생명을 교감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자는 말한다. “사람들이 예의를 지키면서 서로 소통이 되어야 편안함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리(履)>에서 <태(泰)>로 이어졌다. ‘태’란 소통을 뜻한다.[履而泰 然後安 故 受之以泰 泰者 通也]”(「서괘전」) 그리하여 <태>괘는 갖가지의 소통을 주제로 한다.
<태>괘는 상괘 ‘곤’과 하괘 ‘건으로 이루어졌다. 땅이 위로 올라가 하늘의 자리에, 하늘이 내려와 땅의 자리에 있다. 자리가 서로 뒤집어졌으니 대혼란과 파국이 예상될 법도 하지만, 공자는 오히려 거기에서 소통의 정신을 읽었다.
그것은 음양의 이치에 입각한 것이었다. 이미 여러모로 살핀 것처럼 만물은 음기와 양기의 상호 교감과 소통 속에서만 생성, 발전한다. 생명의 쇠멸은 양자의 교감(소통)이 막히는 데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음양의 교감과 소통은 생명 활동에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
<태>괘는 이러한 하늘과 땅의 위치를 바꿈으로써 교감의 이치를 밝히려 한다. 하늘을 아래에, 땅을 위에 둠으로써 위로 오르는 하늘의 양기와 아래로 내려오는 땅의 음기가 서로 만나 교감하는 영상을 이끌어 내고 있는 것이다.
만물의 생성은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다. 물론 하늘과 땅이 항상 교감하는 것만은 아니다. 양자가 각자 본래의 자리에만 머물러 있으면 상호 소통이 막힌다. <태>괘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비(否)>괘가 그러한 경우이다.
괘사卦辭
소통 속에서 작은 것이 올라가고 큰 것이 내려온다.
화합하여 일을 성취하리라.
泰 小往 大來 吉 亨 (태 소왕 대래 길 형)
[周易 上 김기현 著 민음사 P.241]
“작은 것이 올라가고 큰 것이 내려온다.” 말이 너무 함축적이고 짧아서 도무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공자는 말한다. “하늘과 땅이 교감하여 만물이 생장하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소통하여 뜻을 함께 한다. 안으로 빛이 들어오고 어둠이 밖으로 물러나며, 안으로는 굳건하고 밖으로는 관대하며, 군자가 등장하고 소인은 물러나니, 군자의 정신이 지배하고 소인의 정신은 사라진다.[天地交 而萬物通也 上下交 而其志同也 內陽而外陰 內健而外順 內君子而外小人 君子道長 小人道消也]”(「단전」)
이를 풀어보면 자연의 관점에서 작은 것과 큰 것은 땅과 하늘을 은유하며 역시 음양론적 사고가 깔려있다. 땅의 음기가 위로 올라가고 하늘의 양기가 아래로 내려와 서로 교감하여 만물이 생장한다.
사회적 관점에서 작은 것과 큰 것은 상하 계층,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은유하며 자신이 내려와 그를 올려주면서 교감하고 소통해야 화합하여 성취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작은 것과 큰 것은 개개인의 인격의 차원으로 작은 것은 음효가 상징하는 어둠이요 큰 것은 양효가 상징하는 빛이다. 그러므로 어둠을 밖으로 몰아내고 빛을 안으로 키울 것을 교시한다.
괘상卦象
하늘과 땅이 서로 교감하는 모습이 <태>의 형상이다.
임금은 이를 보고서 하늘과 땅의 이치를 헤아려 실행하고
하늘과 땅의 일을 도와 백성들의 삶을 성취시켜 준다.
天地交 泰 后 以 財成天地之道 輔相天地之宣 以左右民
(천지교 태 후 이 재성천지지도 보상천지지선 이좌우인)
여기에서 하늘과 땅은 만물을 생성하는 천지의 이치, 즉 자연의 섭리를 뜻한다. 만물이 생장 쇠멸하는 것은 하늘과 땅의 이치, 달리 말하면 양의 이치와 음의 이치가 작용한다는 것이다. 경복궁 안에 있는 왕비의 침소인 교태전(交泰殿)은 이러한 이치에 따라 남편이 부인을 위로 받들어 올림으로써 잘 교감하고 소통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천지교태(天地交泰)를 줄인 말이다.
그러므로 하늘이 땅 아래로 내려와 땅과 교감함으로써 만물을 생육하는 것처럼, 구성원들을 위로 받들어 그들과 소통하면서 그들이 삶을 성취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그것이 이 세상에 인간과 만물을 낸 “하늘과 땅의 일을 돕는” 길이다.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과제도 사실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효사爻辭
初九
뿌리가 얽혀 있는 띠 풀을 뽑는다.
무리와 함께 나서면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으리라
拔茅茹 以其彙 征 吉 (발모여 이기휘 정 길)
초구(初九)는 양효로서 강한 힘과 밝은 지혜로 무언가 일을 도모하려는 뜻을 갖고 있다. 하지만 괘의 제일 아래에 있어서 어느 누구도 알아주지 않으므로 그는 사람들을 규합할 필요가 있다. 마치 띠 풀에 얽힌 뿌리처럼 “무리와 함께 나서야” 한다. 같은 하괘의 두 양효가 그 ‘무리’다. 그들은 동지일 수도 있고, 하층의 민중일 수도 있다. 여기에서 “뿌리가 얽혀 있는 띠 풀을 뽑는다.”는 말은 그들과의 소통을 통해 그들의 뜻을 취합해야 한다는 은유다.
소통은 힘을 낳는다. 소통의 범위가 넓고 그 정도가 깊을수록 그것이 지어내는 힘은 커질 것이다. 지도자가 훌륭한 치적을 이루기 위해서 국민과 부단히 소통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도자의 참다운 정치력은 국민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국민은 마치 “뿌리가 얽혀 있는 띠풀”과도 같다.
재야에서 사회의 변혁을 꿈꾸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사회의 저변으로 내려가 민중과 끊임없이 소통하면서 그들의 힘을 규합해야 한다. 마치 “뿌리가 얽혀 있는 띠풀”처럼 민중과 긴밀하게 연대하고 소통하면서 “(민중의) 무리와 함께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그의 주장과 노선이 민중의 동의를 얻지 못한다면, 그는 그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말 것이다.
공자는 말한다. “뿌리가 얽혀 있는 띠 풀을 뽑듯이 나서면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테니, 그의 뜻이 무리 속에 있기 때문이다. [拔茅征吉 志在外也]”(「상전」)
九二
몽매한 사람까지도 끌어안으며, 벌거벗은 몸으로 강을 건넌다.
멀리 있다 해서 저버리지 않으며, 친구라 해서 봐 주지 않는다.
삶의 중심을 여기에 두어야 한다.
包荒 用馮河 不遐遺 朋亡 得尙干中行 (포황 용풍하 불하유 붕망 득상간중행)
구이(九二)는 양효로 하괘의 가운데에 있으므로 공명정대한 정신을 상징하며, 그러한 정신으로 상괘의 육오와 음양으로 호응하므로 <태>괘의 중심적인 효에 해당된다. 말하자면 소통 정신의 전형이다.
소통은 상대방과 의기가 투합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올바른 정신을 그 핵심에 두어야 한다. 같은 집단의 사람들이 끼리끼리 지어내는 소통은 그 집단 밖의 사람들에게는 단절과 불통일 뿐이다.
소통은 열린 마음을 필요로 한다. 상대방의 취향이나 생각, 신념, 신앙이 나와 다르다 해서 그와 담을 쌓으려 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차단의 벽에서 불통이 비롯된다. 그러므로 “몽매한 사람까지도 끌어안는”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리하여 진정한 소통의 정신은 “벌거벗은 몸으로 강을 건너” 사람들을 만나려 한다. 여기에서 ‘벌거벗음’이란 우리의 현존 자아를 규정해주는 성별이나 사회적 신분, 지식, 재물, 권력 등 모든 외재적인 사항들을 떨쳐내 버림을 은유한다.
“벌거벗은 몸으로 강을 건넌다.”는 말의 은유적 함의가 여기에 있다. 존재의 외피를 벗고 순수 인격으로 상대방에게 다가가 서로 소통하고 교감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존재의 환희를 알게 해 줄 것이다.
우리는 “삶의 중심을 여기에 두어야 한다.” 그러한 소통의 정신으로 삶에 나서야 한다. 자타의 소통을 가로막는 갖가지 존재의 외피를 벗어 던지고 “벌거벗은 몸”으로 사람과는 물론 나아가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에게까지 따뜻한 눈빛으로 다가가 대면하면서 교감할 필요가 있다. 사람과 풀(벌레)이라는 존재의 외피를 벗어던지고 다 같이 존엄한 생명으로 말이다.
물론 이는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하늘’과도 같이 높은 지혜와 ‘땅’과도 같이 넓은 도량의 수행을 쌓아야 한다. 공자는 말한다. “몽매한 사람까지도 끌어안을 삶의 중심은 빛나는 지혜와 큰 덕에 있다.[包荒 得尙于中行 以光大也]”(「상전」)
九三
평평한 것은 기울어지는 법이요, 지나간 것은 되돌아오는 법이다.
조심스럽게, 올바르게 처신해야 한다.
그러면 허물거리가 생기지 않을 것이요,
염려하지 않아도 원하는 바를 얻을 것이다.
행복을 누리리라.
无平不陂 无往不復 艱貞 无咎 勿恤 其孚 干食有福
(무평불피 무왕불복 간정 무구 물휼 기부 간식유복)
구삼(九三)은 하괘 양효들의 마지막에서 상괘 음효로 이동하는 자리에 있다. 이는 그동안 원활하던 소통이 그 정점에서 점차 불통으로 발전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즉 “평평한 것은 기울어지는 법이요, 지나간 것은 되돌아오는 법이다.” 그러므로 이때야말로 “조심스럽게, 올바르게 처신해야 한다.”
모든 일은 변한다. 변화의 역정을 벗어나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낮과 밤, 계절의 순환이 그러하며, 모든 생명의 생장 쇠멸이 그러하다. 젊음도 순간순간 늙어 가고 있으며, 사는 것 자체가 죽어가는 것이다. 그야말로 “평평한 것은 기울어지는 법이요, 지나간 것은 되돌아오는 법이다.”
공자는 말한다. “지나간 것은 되돌아옴, 그것이 자연의 이치다.[无往不復 天地際也]”(「상전」) 그러므로 이 순간의 행복을 영원한 것인 양 착각해서는 안 되며, 불행에 절망할 필요도 없다. 세상만사가 그야말로 ‘새옹지마’다.
이를 소통의 관점에서 살펴보자. 어떠한 인간관계에서든 소통은 행복을 낳고, 단절과 불통은 불행을 초래한다. 그런데 지금 서로 소통이 잘되고 있다 해서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남녀의 사랑이 잘 보여 주는 것처럼 그렇게 다정하던 사이도 어느 순간에 깨질 수 있다.
그러므로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상황이 계속 변하는 만큼 그에 따라 소통의 길을 끊임없이 새롭게 추구해야 한다. 그래야만 행복도 새로워질 것이다. 구태의연한 태도는 식상함을 불러일으키고 관계를 권태롭게 만든다.
六四
떼를 지어 돌아다닌다.
허전한 마음속에서 서로 이웃하면서 말없이 무리를 이루는구나.
翩翩 不富以其隣 不戒以孚 (편편 부부이기린 불계이부)
육사(六四)는 하괘의 양효들을 지나 상괘의 음효로 진입했으므로 소통이 막혀 가는 상황에 처해 있다. 그는 아래의 양효들과 소통하려 하기 보다는 위의 음효들과 “떼를 지어 돌아다닌다.” 그리하여 내면(하괘)의 건강한 정신을 알지 못하는 그는 “허전한 마음속에서 서로 이웃하면서 말없이 무리를 이룰” 사람들을 밖(상괘)에서 찾아 헤맨다. 철학이 빈곤한 대중의 한 모습이다.
공자는 말한다. “떼를 지어 돌아다니며 허전한 마음을 갖는 것은 모두 삶의 참가치를 잃었기 때문이며, 말없이 무리를 이루려는 것은 그러한 마음에서 발로된 것이다. [翩翩不當 皆失實也 不戒以孚 中心願也]”(「상전」)
이것이 오늘날 대중의 소통 방식이다. 그들은 삶과 세계에 관해 진지하게 성찰하면서 자아를 확립하려 하지 않고, 그저 남들의 이목이나 의식하며 유행을 뒤쫒아 살아간다.
그들은 남들과 동떨어져 혼자 머물러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떼를 지어 돌아다닌다.” 고독에 침잠하여 자기 자신을 대면할 용기와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들이 집에서 설거지를 하면서도 TV나 라디오를 켜 두고,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휴대 전화에 몰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서로 이웃하면서 말없이 무리를 이룸으로써” 외로움을 잊으려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들은 고유의 인격과 주체성, 독립적인 판단력을 상실한, 이른바 “익명의 인간”이다.
六五
제을의 딸이 시집을 간다.
복을 받을 것이며, 집안이 크게 번창하리라.
帝乙歸妹 以祉 元吉 (제을귀매 이지 원길)
육오(六五)는 하괘 구이와 음양으로 서로 호응한다. 이를 상하의 자리 상에서 살피면 “제을(임금)의 딸이 (하위의 신분에게) 시집을 가는“ 것과도 같다. 결혼 생활의 ‘복’과 ‘집안의 번창’은 그녀가 마음을 비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육오가 상괘의 중심인 데다가, 음효의 가운데가 비어 있는 모습에서 착안된 것이다.
옛날 임금이 딸(공주)을 시집 보낼 때에는 아래의 신분 계층에서 사위를 고를 수밖에 없었다. 같은 왕족끼리는 동성이라서 결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부부간에 신분의 차이로 인해 불화가 생기는 일이 잦았을 것이다. 부인이 여전히 공주의 신분 의식을 갖고서, 앞서 말한 대로 존재의 외피를 떨쳐 버리지 못하고 남편에게 오만을 부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부의 불화와 집안의 시끄러움은 이의 당연한 결과다. 그러므로 신데렐라의 꿈은 그저 꿈일 뿐, 그녀와 왕자의 성장 배경이나 사고방식은 결혼 생활에서 수많은 문제를 야기할 것이다.
제을(帝乙)은 중국 고대 은나라 시절 현명했던 임금이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위와 같은 폐단을 고치기 위해 예법을 처음 제정했다고 한다.
공주를 비롯하여 높은 신분의 처자들은 시집을 가면 반드시 남편을 공경히 받들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는 <태>괘의 정신에 부합하기도 한다.
저 위의 하늘이 땅보다 더 아래로 내려와야만 상호 교감과 만물의 생장이 가능한 것처럼, 상하의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공주가 자신을 낮추고 남편을 높이 받들어야만 상호 간 힘의 균형과 아름다운 교감(소통)을 이룰 수 있다. 부부 생활의 행복과 집안의 번영이 여기에서 비롯됨은 물론이다.
공자는 말한다. ”복과 집안의 큰 번창은 마음속 깊은 염원 속에서만 가능하다.[以祉元吉 中以行願也]“(「상전」) 여기에서 ”마음 속 깊은 염원“이란 ‘벌거 벗은’ 존재로 상대방과 교감하고 소통하고자 하는 뜻을 말한다.
上六
성벽이 무너져서 해자가 메꾸어졌다.
군대를 동원해도 소용없다.
백성들에게 호소하면서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운다 하더라도
치욕을 면치 못하리라.
城復干隍 勿用師 自邑告命 貞 吝 (성부간황 물용사 자읍고명 정 린)
상육(上六)은 <태>괘의 마지막 음효이므로, 소통의 인간관계가 이미 무너진 상황에 처해 있다. 이를 정치의 일로 예시하면 그는 권력의 토대인 고을 사람들(하괘)과의 소통을 외면함으로써, “성벽이 무너져서 해자가 메꾸어진” 성의 성주와도 같다. 그러한 통치자는 흔히 겉으로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 “백성들에게 호소”하려 한다. 지난날 우리 사회에서 독재자들이 내세웠던 ‘유신’이나 ‘정의 사회 구현’의 구호들이 그것이다. 그들은 그러한 명분 뒤에서는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공권력, 이를테면 “군대를 동원한다.” 하지만 그들의 말로는 “치욕을 면치 못한다.”
『맹자』에 “여민동락(與民同樂)”이라는 말이 있다. 통치자는 삶의 즐거움을 혼자 누리려 하지 말고 백성들과 애환을 함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백성들의 말에 귀를 귀울이고 그들의 삶 속으로 내려가 그들과 끊임없이 소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민심을 헤아릴 줄 모르고 권력의 성안에 갇혀 독단을 부리는 통치자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맹자는 그를 ‘외로운 사내’라고 칭하면서 혁명의 대상으로 여겼다. 민심을 이반한 그는 더 이상 임금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 성 쌓기에 비유해 보자. 옛날 사람들은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을 쌓고, 나아가 성을 둘러싸는 물길(해자)까지 만들었다.
하지만 만약 성주가 백성들과 소통하지 않고 그들의 고통스런 삶은 외면한 채 독단의 정치나 일삼는다면, 그러한 방어책이 얼마나 유효할까? 백성들은 오히려 성주가 망하기를 바랄 것이다.
이는 외적을 막아 줄 백성들의 정신적 ‘성벽’이 무너지고 그 ‘해자’가 메꾸어져 버렸음을 뜻한다.
공자는 말한다. “성벽이 무너져서 해자가 메워지면 그가 어떤 명령을 내려도 혼란을 막을 수 없다.[城復于隍 其命亂也]”(「상전」)
결국 그는 ‘외로운 사내’가 되어 권좌를 박탈당하는 “치욕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는 역시 그가 최고의 자리에서 군림만 하면서 국민과 소통하지 않은 데에 기인한다.
[周易 上 김기현 著 민음사 P.238-P.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