申鉉俊
1915년 경북 금릉 출생. 봉천군관학교 졸업. 1946년 귀국 후 조선해안경비대 입대해 인천기지사령관·진해특설기지 참모장 역임. 해병대 창설 초대 사령관(1949~1953), 해병 제1여단 창설(여단장·1953), 해병 중장으로 예편(1961). 駐모로코 대사, 세계반공연맹 사무총장, 駐바티칸 대사 역임.
孔正植 前 해병대사령관·성우회 부회장
1925년 경남 밀양 출생. 마산공립商高, 해군사관학교 1기 졸업. 미국 해병지휘참모대 졸업. 해군 경주함 함장, 해병대 제3 전투단장, 韓美 해병 연합상륙 여단장, 해병 제1여단장, 해병 제1사단장, 해병대사령부 참모장, 제6代 해병대 사령관, 제7代 공화당 국회의원, 성우회 부회장.
80만 해병 가족의 아버지1915년 경북 금릉 출생. 봉천군관학교 졸업. 1946년 귀국 후 조선해안경비대 입대해 인천기지사령관·진해특설기지 참모장 역임. 해병대 창설 초대 사령관(1949~1953), 해병 제1여단 창설(여단장·1953), 해병 중장으로 예편(1961). 駐모로코 대사, 세계반공연맹 사무총장, 駐바티칸 대사 역임.
孔正植 前 해병대사령관·성우회 부회장
1925년 경남 밀양 출생. 마산공립商高, 해군사관학교 1기 졸업. 미국 해병지휘참모대 졸업. 해군 경주함 함장, 해병대 제3 전투단장, 韓美 해병 연합상륙 여단장, 해병 제1여단장, 해병 제1사단장, 해병대사령부 참모장, 제6代 해병대 사령관, 제7代 공화당 국회의원, 성우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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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해병대 초대 사령관에 임명된 申사령관은 그해 4월15일 병력 380명을 모아 해병대를 창설했다. 그 해병대를 거쳐간 해병가족이 80만을 넘었다.
지난 10월18일 인천공항, 보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고인의 유해가 빈소인 국군수도병원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나를 비롯해 해병전우회의 후배 해병들이 도열해 申鉉俊 사령관을 경건하게 맞이했다. 머나먼 이국에서 고국이 그립고 후배 해병들이 보고 싶어 어떻게 눈을 감으셨을까.
申鉉俊 사령관과 나의 인연은 60년 전인 194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조선해안경비대 진해특설기지의 참모장(중령)이었고, 나는 해군사관학교 훈육관(중위)이었다.
1949년 10월1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조선해안경비대가 해군으로 정식 발족됐다. 20일 만에 여수·순천지역에 주둔해 있던 육군 제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나는 300t급 302정장으로서 우리 영해를 침범하는 일본 어선 두 척을 나포해 여수세관에 인계하다 여순반란사건을 맞았다.
해군진해통제부 사령관 金一秉(김일병) 대령은 申鉉俊 진해특설기지 참모장에게 반란군 진압임무를 맡겼다. 내가 이끄는 302함도 申鉉俊 참모장 휘하에 들어갔다.
孫元一(손원일) 해군참모총장과 申鉉俊 참모장이 旗艦(기함)인 충무공함을 타고 여수로 달려왔다. 해상에서 경계임무를 수행하던 나는 孫元一 참모총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申鉉俊 참모장에게 브리핑을 했다.
『반란사건 당일부터 여수항을 순찰하는 임무를 수행하면서 육군 5연대 1대대를 상륙시켰다. 하지만, 일본의 陸戰隊(육전대)나 미국의 해병대와 같은 부대가 있었다면 반란은 훨씬 더 빨리, 그리고 효과적으로 진압할 수 있었다』
孫元一 참모총장이 『원자폭탄에 의해 일본의 항복이 앞당겨지긴 했지만 美 해병대가 본토상륙작전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 서둘러 항복한 것』이라고 동의했다.
여순반란사건이 진압된 후, 나는 申鉉俊 참모장과 함께 해군의 상륙작전 임무를 수행하는 부대, 즉 「해병대」의 창설필요성을 附記(부기)한 「戰鬪詳報(전투상보)」를 제출했다.
孫元一 총장은 申鉉俊 참모장을 해병대 초대 사령관으로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에게 천거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해병, 申鉉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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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10월 해병대 1여단장으로 취임한 申鉉俊 사령관이 李承晩 대통령으로부터 은성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고 있다. |
申사령관은 먼저 준하사관 교육대에서 함께 일했던 金聖恩(김성은) 중령에게 도움을 청했다. 만주 하얼빈 農大(농대)를 졸업한 金聖恩 중령은 滿軍(만군)출신으로 판단력이 뛰어났다. 신설하는 해병대에 비전이 없어 보였는지 金聖恩 중령은 쉽게 수락하지 않았다. 申사령관은 부인 咸惠龍(함혜룡) 여사와 함께 三顧草廬(삼고초려) 끝에 金중령의 승낙을 받아 냈다. 「두 번째 해병」이 탄생한 순간이다.
신바람이 난 申鉉俊 사령관은 신병 교육요원으로 일할 하사관 모집에 나섰다. 진해에 주둔하고 있던 해군 각 부대들은 모범적인 하사관들을 제쳐 놓고, 정의감이 강하고 용감하지만 가끔 부대 안에서 말썽을 일으키는 하사관들을 차출해 보내 주었다. 이들이 해병대 창설의 주역이 됐고, 오늘날 해병대 특유의 기질과 전통을 만들어 냈다.
1949년 장교와 하사관 80여 명을 확보했고, 4월 초 해군 신병 제13기 중에서 300명을 선발해 총 380명으로 해병대가 창설됐다. 申鉉俊 사령관은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 바로 해병대의 전통이 될 수 있으므로 어떤 일이든 신중하게 처리했다.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을 것이다.
『해병대가 대한민국의 체면 살렸다』
申鉉俊 사령관이 지휘하는 해병대는 6·25 전쟁을 맞아 진가를 발휘했다. 1950년 8월 해병대가 마산의 진동리 지구전투에서 4개대대 병력으로 인민군 제6사단 정찰대대에 기습공격을 감행해 敵(적) 6사단의 예봉을 꺾자 「뉴욕 타임스」 기자는 「귀신 잡는 해병대」라고 대서특필했다.
「낙동강 방어선 구축」이라는 戰功(전공)을 세운 해병대 全장병은 1계급 특진했다. 한국 해병대의 戰功에 놀란 美해병 1사단장 제럴드 토머스 소장은 한국 해병대 4개 대대를 美 해병대에 배속해 인천상륙작전에 선발대로 투입시켰다.
한국 해병대는 서울 탈환의 선봉에 서서 중앙청에 태극기를 올렸다. 한국 해병대가 美 해병대와 함께 수도 서울을 탈환하자 李承晩 대통령은 『해병대가 대한민국의 체면을 살렸다』며 기뻐했다.
나는 인천상륙작전 기간 중 704함 함장으로 해병대를 지원했다. 한국군이 보유한 15척의 소형함정(PC함)이 월미도 300m 전방까지 접근해 함포사격을 했다. 인천상륙작전을 마치고 귀대하던 중 해병대 참모장 金聖恩 대령을 진해에서 만났다.
그가 『孔소령, 내가 해병대 1연대장이 됐으니 같이 싸우자』고 했다. 나는 즉석에서 승낙했고 곧바로 해병대 1연대 1대대장으로 발령이 났다. 대한민국 해병의 전설적 인물인 申鉉俊·金聖恩 두 분과 나의 인연은 이렇게 맺어졌다.
申鉉俊 사령관은 1936년 봉천군관학교 5기생으로 軍과 인연을 맺었다. 丁一權(정일권) 前 국무총리, 金錫範 前 해병대사령관, 宋錫夏(송석하) 예비역 소장, 金白一(김백일) 1군단장(중장) 등이 동기생이다.
申鉉俊 사령관은 『공산주의 군대인 八路軍(팔로군)에게서라도 우리가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면서 滿軍 시절 팔로군과 싸우던 경험을 막 걸음마를 시작한 우리 해병대에 접목시키려고 애썼다. 오늘날 해병대가 계급에 구애받지 않고 장교·사병 가릴 것 없이 선·후배로 연결되는 전통을 만든 사람이 申사령관이다.
申鉉俊 사령관이 1944년 9월 滿軍 보병 제8團(단) 6連長(연장)으로 근무할 때의 일이다. 河北省(하북성) 遵化縣(준화현)에 위치한 그의 부대가 好女塔(호녀탑) 고지를 점령하다 전사자 3명, 행방불명자 2명이 생겼다. 팔로군은 행방불명자 2명을 붙잡아 치료해 준 뒤, 인근 농민들을 시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