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 일기
조 흥 제
오랫동안 수고해서 만든 작품이 분실되었다면 얼마나 가슴 아플까. 거기에 대비해 두면 환란 때 보존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없어진다.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읽으면서 그 시집이 어려운 과정을 거치면서 세상에 나온 것을 알았다.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 3학년 때 시집을 만들려고 이양하교수에게 원고를 갖다 주었다. 이교수는 이 책이 나오면 큰일 난다고 반대했다. 윤동주는 일본으로 유학 가면서 같은 방에서 유숙했던 후배 정병욱에게 그 원고를 주었다. 정병욱은 학병에 끌려가게 되어 시골에 있는 어머니에게 윤동주 시집 원고를 주면서 내가 올 때까지 꼭꼭 감추라고 했다. 어머니는 마루 밑을 파고 항아리에 담아서 묻고 그 위에 뒤주를 올려 놓았다. 윤동주가 검거되고 나서 불온 문서를 찾고자 정병욱의 집까지 형사들이 와서 뒤졌지만 마루 밑까지 보지는 않았다. 광복이 되고 정병욱은 왔지만 윤동주는 죽었다. 정병욱은 윤동주의 원고를 꺼내 책으로 만들었다.
우리 동네에 도서관이 새로 문을 열었는데 이름이 ‘내를 건너서 숲으로’다. 그 도서관 이름을 괴상하게 지은 것은 윤동주의 시에 ‘내를 건너서 숲으로’가 있기 때문이다. 그 도서관 이름을 윤동주의 시에서 따온 것은 이웃에 숭실중고등학교가 있는데 그 학교가 평양에 있을 때 윤동주가 다녔기 때문이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그보다 더 어려운 과정을 거치면서 명맥을 유지한 책이 조선왕조실록이다.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부터 철종까지 427년(1392~1849)동안 쓴 기록이 훼손되지 않고 원본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1893권으로 국보 151-1로 지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까지 등재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사관(史官)이 왕 앞에서 왕의 동정을 기록한 책이다. 사관 8명이 교대로 24 시간 왕 앞을 떠나지 않았다. 왕이 누구를 만나 무슨 말을 했는가를 적고,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했다. 심지어 화장실 가는 것까지 적었다. 왕이 보여 달라고 해도 보여 주지 않았다. 성군 세종대왕도, 폭군 연산군도 자기에 대해서 어떻게 썼는지 궁금했지만 법으로 금지 되어 있는 걸 억지로 뺏어 볼 수는 없었다. 사관은 퇴근하여 정서(精書)하고 월말에는 기록청에 넘겼다. 기록청에서는 사실여부를 조사해 책으로 만들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4부를 만들어 궁중에만 두는 것이 아니라 전주, 충주, 성주 등 지방에도 보관했다.
기록청의 예상대로 임진왜란 때 다 불 타고 전주 본만 남았다. 전주본도 무사했던 것은 태안의 손홍록과 안의 두 선비에 의해서 내장산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두 선비는 조선왕조실록 806권을 56개의 궤짝에 넣어 말에 실어 내장산 석벽 동굴에 숨겼다. 왜란이 끝나고 조정에서는 전주 본을 근거로 다시 만들어 강화 정족산, 무주 적상산, 전주, 평북 묘향산에 사고(史庫)를 짓고 보관했다. 세계에서 4백 년 이상 왕의 동정을 기록한 나라는 조선이 유일하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보다 더 큰 단일 기록물이 승정원일기다. 승정원은 오늘날의 대통령 비서실이다. 태종(1400)때부터 왕조가 망한 해인 1910년까지 510년 사이의 기록이다. 왕의 하루 일과와 지시 내용, 각 부처에서 보고한 내용, 신하들이 올린 상소문을 기록한 것이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은 1623(인조)년부터 1910(순종)까지 287년 사이를 기록한 3,243권에 이르는 방대한 양으로 국보 303호로 지정되어 있다. 태종 때부터 인조 때까지의 기록은 분실되었다. 승정원일기는 한 부만 만들어 궁중에 보관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리라 추측된다. 선조 때는 임진왜란 뒷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광해군 때는 정변 때문에 질서를 잡지 못하다가 인조 때에야 질서가 잡혀 승정원 일기를 다시 쓴 것으로 추측해 본다. 승정원 일기가 287년 간 쓴 분량이 3243권이라면 분실된 223여 년까지의 기록을 합하면 배에 가까우리라. 조선왕조실록은 네 부를 만들었지만 승정원 일기는 왜 한 부만 만들어 위기 때 보존하지 못한 것이다.
난리가 나면 문화유산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나는 한국 전쟁을 체험한 세대여서 잘 안다. 3년여를 끌면서 세 번을 오르락 내리락 하는 전쟁에 언제 죽을지 몰라 자기 몸 지키기도 힘든데 어떻게 문화재를 챙기나. 그 실례가 성북동에 있는 간송 미술관이다. 간송 미술관은 전형필이 사재를 털어 일본으로 반출되려는 문화재를 사서 보관한 미술관이다 6․25 사변 때는 피란 못 가고 1․4 후퇴 때 중요한 문화재는 기차에 싣고 피란 갔다. 수복되어 와 보니 서가에 보관한 희귀본들은 인근 주민들이 가져다 땔 감으로 사용했고, 문화재들은 아동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 되었다. 몽고의 난, 임진왜란 때는 얼마나 많은 문화재가 훼손되었을까. 경주의 황룡사 9층탑이 몽고의 난 때 소실되었다. 며칠 전 경주에 갔을 때 높은 탑이 있어 알아보니 황룡사 9층탑을 다시 만든 것이라는데 지나가면서 보아도 엄청 컸다. 한국 전쟁 때 합천 해인사에 공비들이 숨어 있어 미군기들이 폭격하려는 것을 동승한 한국군 장교가 막았다는 기록이다. 거기에 팔만대장경이 보존되어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가 아니었으면 해인사는 물론 팔만대장경도 소실되었을 것이다.
앞으로 전쟁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 북한이 핵무기를 계속 만들고 ICBM, SLBM 같은 미사일을 계속 쏘고 특히 핵무기를 테러 조직에 팔면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 한미방위조약이 있어 전쟁을 일으키려면 한국의 동의가 있어야 하지만 한국이 계속 비협조적이면 한국을 뺀 쿼드 동맹군만으로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다. 한미 방위 훈련을 한국이 반대하자 미국 독자적으로 북한 영해에 들어가 훈련했다는 미확인 보도다. 북한에선 그걸 확인할 방공시설이 없단다.
우리의 문화재는 국립중앙박물관과, 각 지방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노출되어 있다는 말이다. 갑작스레 전쟁이 일어나면 문화재들은 어떻게 보관할까? 국립중앙박물관측에 알아보려고 전화했더니 대외비라 답변해 줄 수 없다는 담당자의 말이다. 지하에 안전하게 보관할 창고가 있는가 보다. 일반에게 알려지면 유사시 도난 맞을 염려가 있어 대외비인 것 같아 마음을 놓았다.
93년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수필가협회 회원
국제 펜 한국본부 회원
소월문학회 회원
수필집 삶의 여울에 서서, 장단 가는 길, 연탄의 공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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