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7월 11일 시흥군 동면 신림리(현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에서 태어났다. 면암 최익현의 부대원으로 을사의병에 참여했으며,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16]의 손자이며,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한 김재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큰어머니 고귀현을 통해 동아일보 가문과 연결된다.
다섯 살 때(1944년) 아버지를 잃고 할아버지 손에서 컸다. 할아버지 김병로는 ‘너는 아버지가 안 계시지만 그래도 너를 돌봐 줄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시지 않으냐. 조금도 외로워하지 말고 공부 잘하여 세상을 떳떳하게 살아가면 밥 굶는 일은 없는 법’이라고 가르쳤다.관련 기사
광주서중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1959년 서울 중앙고등학교(49회)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어과에 입학해 1963년 졸업했다.[17] 그해 제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통합[18]을 주도하던 조부 김병로의 비서 역할로 정계와 연을 맺는다.
1964년 조부가 별세하고 나서 독일 뮌스터대학교에서 유학했다. 1969년에는 뮌스터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1972년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세부전공분야는 재정학(공공경제학)으로 알려져 있으며, 미국과 달리 사회민주주의가 발달한 독일에서 공부한 덕에 경제민주화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1973년 3월 귀국해 불과 32세로 서강대학교 경제학과 조교수가 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김종인의 강의를 수강한 적이 있다고. 이 때문에 서강학파로 분류되나 선성장 후분배, 재벌 육성을 중심으로 한 압축성장을 주장해온 남덕우 등 서강학파 선배들과는 입장을 달리하는 2세대로 구분된다.[19] 유신 때부터 박정희 정부에서 정책자문역할로 경제개발계획 수립에 참여해, 김재익과 함께 서독의 부가가치세를 배우러 출장을 다녀와 연구보고서를 올렸다. 이미 35세 노총각이던 김종인은 십수번 선을 봤으나 인연을 만나지 못하고, 이듬해에 김재익의 중매로 김미경(金美經) 교수와 결혼했다. 서로 말이 잘 통했다고 한다.
김미경은 김정호 전 한일은행장의 딸로 2018년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식품영양학과 명예교수이고, 처삼촌이 박정희 정부에서 재무부장관과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이다. 본인의 4촌 처남으로 노태우 정부 시절 건설부 장관과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낸 이진설이 있고, 대법관과 헌법재판소장을 지낸 윤영철이 있으며, 신민당 국회의원을 지낸 이택돈이 있다.관련기사
1977년 당시 보건사회부 장관이었던 신현확의 반대를 무릅쓰고 의료보험제도를 최초로 도입하는데 기여했다. 김종인은 자신이 했다고 자신하고 있고, 직접 당사자인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 역시 김종인이 제안한 게 맞다고 확인해 주고 있다.
김종인은 훗날 『지금 왜 경제민주화인가』 등에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역대 대통령 가운데 스스로 경제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갖고 있었던 유일한 대통령"이라고 평가했으며, 2016년 1월 더불어민주당 대표로 전직 대통령 묘소를 참배하는 자리에서 “이러고저러고 말이 많지만 그분이 오늘날 산업화를 성공적으로 이끈 공로만큼은 누구도 부인을 하지 못한다”고 평가했다.관련기사 김종인은 물론 그가 주장한 경제민주화는 시장경제를 주장하는 보수주의론이다.
1980년 국보위에 자문위원으로 참여하고 전두환, 노태우의 민주정의당 창당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이 점 때문에 전두환의 소위 부역자 취급을 받고 진보측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재미있는 점은 보수인사들 역시 김종인과 더불어민주당을 싸잡아 비난하면서 국보위 인사를 용인하다니 내로남불 운운했다는 것.
그 후 1981년부터 1988년까지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제11대, 제12대 전국구 국회의원을 지낸다.
1987년 민주화 개헌 당시 경제민주화 조항을 직접 작성해 관철시켰다. 노태우 정부 때 청와대 경제수석으로서 기업구조조정과 체질개선을 진두 지휘하는 한편, 재벌의 폭주를 견제하는 등 균형 잡힌 경제적 성과를 이뤄내려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정의당 후보로 서울 관악구 을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낙선[20]한 후, 1989년 1월부터 7월까지 국민은행 이사장을 지냈다.
그러다가 1989년 7월부터 1990년 3월까지 제24대 보건사회부 장관을, 1990년 3월부터 1992년 3월까지 2년간 청와대 경제수석을 역임했다. 청와대 경제수석을 그만둔 후 1992년 제14대 국회에서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러다가 1993년에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21] 결국 징역 2년 6개월 집행유예 4년으로 형이 확정되었다.
그 후 정치와는 거리를 두며 오랜 기간 동안 야인으로 있다가[23] 2004년 3월에 새천년민주당에 영입되며 정계에 복귀했고,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소속으로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되면서 원내로 돌아오게 되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행적으로 2007년 제17대 대선에서는 당적은 유지했지만 대통합민주신당의 정동영 후보를 지지했다. 그냥 단순한 지지가 아니라 정동영의 대선 후보 등록 회견 때부터 손잡고 옆에 서 있었다. #
이후 2008년 정권이 교체된 뒤 김종인은 경제정책에서 우클릭만 거듭한 채 끝난 참여정부에 대해 쓴소리를 쏟아냈는데, '좌파신자유주의? 말장난이냐. 신자유주의는 실패한다. 노무현 정부가 무슨 좌파 정부냐? 기업한테 정부 기능을 기대하지 말라'고 인터뷰한 후 딱 두 달 만에 세계금융위기가 터졌다.
2008년에 국회의원 임기를 마치고 다시 야인으로 있다가, 2011년 12월에 중도 확장을 노린 한나라당-새누리당과 박근혜 대선 캠프에 영입돼 경제민주화 공약 설계를 맡기도 했다. 이준석은 한때 박근혜 정부의 정도전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당시 이회창, 이한구 등으로부터 김종인의 경제민주화는 좌클릭, 포퓰리즘이라는 공격을 받으며 당내 갈등이 불거지기도 했고[24], 이어 박근혜가 집권하자마자 팽당하고 경제민주화 공약은 바로 폐기됐다. 이용만 당했지만 그는 인터뷰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비난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이번에도 쿨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2012년 9월부터는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2012년 12월 사임한 후, 2014년 12월에는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이후 야인으로 지냈다. 안철수 바른미래당 대표의 경제 멘토였다는 보도도 있었는데 2016년 1월 자신은 그런 적이 없으며 언론에서 지어낸 얘기라고 확인했다. 2016년 1월 20대 총선을 목전에 두고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영입 제안을 받았다. 곧 비상대책위원장 겸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추대돼 2월부터 더불어민주당의 수장이 된다. 더불어민주당은 9년간 패배만 거듭해 빈사상태에 빠져 있었고,[25] 안철수 전 공동대표가 2015년 11월 말 문안박 연대를 거부하고 혁신 전당대회를 역제안해 내홍에 빠졌다. 결국은 국민의당으로 안철수 이하 소속의원 21명이 나갔다. 문재인 대표는 '친노패권주의'란 명목으로 사방에서 공격받고 있었다.
2016년 1월에는 더불어민주당에 영입되어 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약 7개월 동안 활동하였다. 당시 분당사태의 여파속에서 치른 20대 총선에서 많은 표를 얻어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만 특정계파의 의원들만을 대상으로 한 공천 컷오프나 민주당이 우세한 지역에 측근을 공천했다가 패배하는 등 문제점이 많았다. 비대위 초기에는 김현종 전 통상교섭본부장, 박경미 홍익대 교수, 주진형 전 한화증권 대표 등의 인재들을 영입하면서 어수선했던 당을 잘 정비하는 듯 했으며, '친노패권주의'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데에 도움을 줬다. 하지만 비대위, 선대위를 모두 거머쥐고 절대적인 공천권을 휘둘러 문제를 일으켰다. 정청래와 이해찬을 직권으로 공천 탈락시켰다. 친노의 손발을 자르고 자신은 비례 대표 2번에 공천하는 모습으로 큰 반발을 불렀다. 셀프 공천, 칸막이 공천으로 큰 욕을 먹었다.
2016년 4월 20대 총선에서 국회 1당을 차지한다. 수도권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하지만 호남은 국민의당에게 의석 대부분을 내준다. 대신 더불어민주당은 호남당이란 이미지를 벗고 전국 정당으로서 이미지를 얻었으며 경남에 발판을 마련한다.
2016년 5월 24일에는 대우조선해양 노조위원장을 만나 “대형 국영기업이나 대우조선해양처럼 1만 명 이상 고용하는 업체는 노동자가 경영을 감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종국에 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26]을 다시 한번 하게 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총선 후 그는 의원내각제 또는 이원집정부제 개헌을 제기하면서, 추호선생[27], 전권노인네(...)[28] 등의 별칭을 얻는 등 전통적 민주당 지지층과 친문 성향 지지층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다. 당대표에 출마하려고 했으나 실패한데다가 반기문 추대설, 안희정 충남지사 탈당 권유설 등이 퍼지면서 급속히 당내에서 힘을 잃는다.(김종인/2016년 참조)
더이상 할 일이 없다고 판단한 그는 2017년 3월 7일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하면서 국회의원직이 박탈됐다. 비례대표는 당에서 출당시켜 주지 않으면 탈당하는 순간 직을 잃는다.
2016년 8월 27일 새로 선출된 추미애 당대표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직에서 퇴임하였다. 최근에는 페이스북 계정을 신설했다고 한다. 요즘 정치권의 SNS 대세에 본인도 동참하기로 한 듯하다.
2017년 3월 27일 대선 출마를 기정사실화 했다. #
2017년 4월 5일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그의 대선 목적은 내각제 개헌과 자신의 정치 활동의 최종 목표인 경제민주화임을 밝혔다.# 그러나 일주일 뒤인 12일. 국민들이 자신의 뜻을 알아주지 않는다며 불출마를 선언하게 되었다.#
2017년 4월 30일 대선 레이스의 종반부에서 갑작스럽게 김종인은 내각구성권을 약속받고, 안철수 대선후보에 대한 지지 입장을 밝혔다. 대선 후보중 안철수, 홍준표, 유승민 후보를 모아 ‘반문재인 연대’를 구성하려는 모습으로 보였지만 3명 다 서로와의 연대를 거부했고 대선 결과는 문재인의 승리로 끝났다. 대선이 끝난 뒤에는 국민의당 비대위원장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이것도 박주선이 선출되면서 소문으로 끝났다.
경제민주화라는 만화 출판 행사 때 안철수가 방문하여 김종인을 만난 것을 볼 때, 국민의당과의 끈은 이어가고 있는 듯하다.
2020년 3월, 미래통합당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반감과, 본인이 문재인 정부 탄생의 기틀을 마련 했던 것에 대한 죄책감이 크다고 한다.# 그러나 총선을 고작 1달정도 남겨놓고 영입이 된지라 너무 늦게 영입되었다는 평이 많았다. 제아무리 김종인이라 할지라도 1달 안에 민주당으로 기운 대세를 바꾸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리고 아직 미래통합당에 완전히 적응하지는 않은듯 자신을 더불어민주당이라고 자주 실수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
결국 이에 대한 우려가 현실이 되어 2020년 4.15 총선에서 미래통합당의 패배를 막을수는 없었다.[29] 개표 결과 103석으로 개헌저지선을 겨우 넘기며 김종인이 이끈 선거로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참패하였다. 다만 선거 2주 전에서야 겨우 합류해서 선거전략가로서의 면모보다는 선거운동원으로서의 역할이 더 많았다.[30]총선 후에는 황교안을 비롯한 당내 지도부가 낙선으로 인해 공석이 되자 당내에서는 김종인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일각의 반발도 있었지만 원내지도부가 의원들의 여론을 수렴한 결과 찬성이 더 많았다며 강행했고, 김종인이 이를 수락했다.
4월 28일, 미래통합당 전국위원회에서 177명의 찬성으로 김종인 비대위 구성을 가까스로 추인했지만#[31] 당내에서 자꾸 나오는 반발에, 임기가 고작 4개월로 제한당한터라 자존심이 상한 탓인지 김종인 전 위원장이 사실상 취임을 거부했다.# 하지만 결국 5월 22일, 내년 재보선까지 비대위원장을 맡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당선인 84명이 찬반 투표에서 내년 재보선까지 비대위 체제를 운영하는 데 '압도적 찬성'을 보였으며, 김종인 본인도 "최선을 다해 당을 정상 궤도로 올리는 데 남은 기간 열심히 노력해보려고 한다"며 "당을 살리고 나라를 살리는 데 온 힘을 쏟겠다"고 비대위원장직을 수락했다. #
4.15 총선 패배 이후 미래통합당에 대해 대대적 혁신이 필요하다고 일갈하며 1970년대생 가운데 경제 전문가가 보수의 대권주자로 나서야 한다고 하며 40대 기수론을 공식 선언하였다. 이에 처음엔 김종인 비대위에 대해 찬성하던 홍준표가 김종인 반대파로 태세를 전환하여[32],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을 언급하여 비판하였다. 정진석 21대 총선 당선인은 $ 페이스북으로 총선 직후 홍준표 본인이 직접 전화로 “김종인 만한 사람이 없다. 비대위원장으로 모셔야 한다. 정 대표가 김종인을 띄워달라”고 요청했었다는 것을 밝히며 “그때는 김종인 씨가 동화은행 비리 사건에 연루됐던 사실을 몰랐나”고 비판했다.
정치에 잔뼈가 굵은 인물답게 현재 대중들이 원하는 젊고 개혁적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기성 정치인보다 젊은 정치인을 중용하고 최대한 협상의 자세로 있다. 다만 장제원, 김태흠, 박대출을 비롯한 당내 일부는 행보에 상당히 반발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33] 한편 비대위원장 취임 후 계속 파격적인 이슈를 꺼내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진보 의제로 꼽히는 기본소득제를 꺼내들었고 박근혜 탄핵. 구속 및 이명박 구속에 대한 대국민 사과 검토와 호남 구애,장외투쟁 자제 등 이전의 자유한국당이나 김종인 체제 이전의 통합당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며 기대를 높이고 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리얼미터의 지지율 집계에서 박근혜 탄핵 이후 처음으로 민주당을 뛰어넘는 성과를 이뤘다. # 민주당의 지속적인 문재인 정부/평가/경제/부동산 정책로 인한 반사이익이란 지적도 있지만 황교안 체제에서도 조국 사태를 필두로 하는 각종 권력형 비리 의혹 들의 호재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의 지지율을 기어이 넘지 못했던 것을 고려하면 김종인 체제의 중도 구애 및 좌클릭, 강경투쟁 노선 배격이 다소 성과를 보고 있다는 것이 대체적인 의견이다. 그리고 이러한 행보들에 대해 보수정당의 정체성이 희석된다고 반대하는 당 내부 의견도 상당하다. 하지만 얼마 못 가 8.15 집회에 미래통합당 현역의원, 지역당협위원장들이 참가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다시 지지율이 추락했다.
이후 결국 9~11월간 두 달 정도의 침체기를 겪으며 당 분위기가 많이 다운됐다. 오히려 그의 과도한 좌클릭이 기존 보수층 이탈을 불러온 것은 물론이요, 그렇다고 더이상의 유입도 없는 등[34] 당이 침체 되었다. 이로 인해 지지율은 오히려 황교안 체제 이전 수준으로 역주행했다.[35]
그런데 12월이 되자 분위기가 반전되기 시작했다. 더불어민주당의 실책이 부각되며 문재인 정부에 대한 심판론이 탄력을 받으며 2021 보궐선거와 대선 승리 기대감이 한층 높아졌다. 다만, 이낙연과 이재명 등 선명한 색깔을 가진 쟁쟁한 후보들이 많은 더불어민주당과 달리, 재보선과 대선 모두에서 국민의힘의 후보들이 빈약한 상황이다. 심지어 이들은 안철수나 윤석열에게도 여론에서 밀리고 있다.
이런 와중에도 김종인은 자신이 데이터를 가지고 있다며, 단일화를 하더라도 국민의힘 소속이 후보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보수 및 중도 성향의 유권자들이 취할 수 있는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부정적 시선과는 별개로, 국민의힘 자체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팽배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주장을 여전히 하고 있는 것은 현재 여론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들이 당면한 목표가 정권 교체임에도, 야권 단일화를 수단으로 자신들의 이익에만 몰두하는 것처럼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3월 23일 야권 단일후보 선출 결과 국민의힘 오세훈 후보가 선출되면서 자신의 뜻을 이루는데 성공했다. 동시에 국민의힘을 중심으로 한 야권개편에도 힘이 실릴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4월 7일 2021년 재보궐선거에서 국민의힘이 압승을 거두는데 성공함으로서 다시금 킹메이커로서의 능력을 입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