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독교 신앙은 '약자 배려의 원칙'에 준한다. ■
☛ 당신은 진정한 기독교인인가?
☛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긍휼로 자신보다 어려운 상황에 놓인 약자를 배려하고 있는가?
☛ 우리는 삼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하며, 올바른 성경적 정의를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아래의 순서를 통해 구원의 은혜를 공유하여 보자.
1. 세상의 정의란 무엇인가?
2. 예수 그리스도께서 설명하는 하늘 나라의 정의란 무엇인가?(마 20:1-16)
3. 마태복음 20:1-16의 포도원 비유는 세상의 정의와는 분명히 다른 정의를 보여주고 있다.
4. ‘구원’과 ‘하늘나라의 정의’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겔 18:5-9; 마 7:22-23; 25:31-46)
5.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하늘나라의 정의’에 부합되어 살아가고 있는가?(고전 13:1-13)
▶ 1. 세상의 정의란 무엇인가?
세상의 정의를 가장 잘 규정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년∼B.C. 322년)가 말하는 ‘정의’는 ‘동일한 경우를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 (to treat the like alike), 즉 ‘서로 주고 받는 것’(give and take)에 입각한 올바른 배분법을 의미하고 있다.
배분적 올바름은 정치 권력, 재화, 명예 등 나눌 때 적용하는 기준이다.
예를 들어 여기 정치적 능력이나 업적이 동등한 사람이 있다. 그렇다면 이들에게는 동일한 정치 권력이 배분되어야 한다. 하지만 만일 두 사람의 능력이나 업적 등에서 차이가 난다면 당연히 이 둘에 배분되는 정치 권력에도 차이가 있어야 한다. 이때 그 유명한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가 적용되는 게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배분적 정의이다.
▶ 2. 예수 그리스도께서 설명하는 ‘하늘나라의 정의’란 무엇인가?(마 20:1-16)
삼위 하나님의 속성의 핵심은 사랑과 긍휼과 은혜를 통해 나타내신다(요 3:16; 롬 8:39; 15:30; 고후 13:13; 요일 4:8, 10)
⚫ 사랑이 바로 여기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자기 아들을 화목제물로 삼아 이 세상에 보내 주신 것입니다.(요일 4:10 쉬운말)
마태복음 20:4의 '적당한, 상당한’의 ‘디카이오스’(G1342 δίκαιος dikaios)는 ‘의로운’(righteous) 뜻을 가진다. 형용사 디카이오스 (Homer. 이래)는 ‘디케’(G1349 δίκη 옳음, 공의, 정의 justice)에서 유래했으며, '디케’를 준수하는 의로운 하나님과 인간의 법을 지키는 '그의 의무를 이행하는 자'를 뜻하고, 구약의 ‘미슈파트’와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구약에서 ‘공의’는 대체로 “정의”로 번역되는 히브리말 ‘미슈파트’(H4941 מִשׁפָּט mishpat)이다. ‘미슈파트’의 기본적인 의미는 ‘재판’이다(참고로 이 명사는 ‘재판하다’를 의미하는 ‘샤파트’(H8199 שָפַט shaphat) 동사에서 파생한 것이다). ‘재판’이라는 기본인 의미 외에, 규례, 판결, 심판, 정의 등의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확장된 의미는 서로 연관되어 있다.
이때 ‘재판’의 근거는 ‘규례’이며, 그렇게 내려진 ‘판결’은 악한 이들에게는 ‘심판’이며 억울한 이들에게는 ‘구원’이 될 것이다. ‘재판’을 통해 올바로 상황이 바로잡혀질 때, 이러한 세상은 ‘약자 배려의 원칙’에 따라 ‘정의’가 구현되는 세상이다.
하나의 단어로 상당히 많은 의미를 담고 있지만, 이 모든 것이 ‘재판’이라는 기본적인 의미에서 유추될 수 있다.
재판에서 내려지는 판결의 근본적인 근거가 하나님의 법도로서의 규례라는 점에서, “미슈파트”는 하나님의 법도인 사랑과 긍휼에 근거해 이루어지는 올바른 사회 질서이며 ‘약자 배려의 원칙’을 실행하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 개념’이라고 요약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 3. 마태복음 20:1-16의 포도원 비유는 세상의 정의와는 분명히 다른 정의를 보여주고 있다.
본 절에서 포도원 주인과 관리인은 ‘A 품꾼’(오전 9시에 온 품꾼), ‘B 품꾼’(정오와 오후 3시에 온 품꾼), ‘C 품꾼’(오후 5시쯤 온 품꾼)들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 일당을 지급한 것으로 나타난다.
참고로 헬라어 ‘데나리온’(de-narion)은 로마의 은화 ‘데나리우스’(denarius)이다. 한 데나리온은 무게는 약 0.125온스(트로이형으로), 즉 3.89그램이다. 그것은 일반 노동자의 하루 임금에 해당되었기 때문에 상당한 구매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당시의 하루 노동 시간은 동틀 녘부터 해 질 때까지였다.
먼저 아래 마태복음 20:1-16의 내용을 읽어보자.
⚫ [1] “하늘나라는 또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느 이른 아침, 포도원 주인이 자기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구하려고 나갔다. [2] 포도원 주인은 하루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고, 일꾼들을 포도원으로 들여보냈다. [3] 또 오전 9시쯤에 시장에 나가 보니, 몇 사람이 일거리를 얻으려고 서성거리고 있었다. [4] 포도원 주인은 그 사람들도 포도원으로 들여보내면서 말했다. ‘당신들도 내 포도원으로 가서 일하시오. 끝날 때 적당히 품삯을 계산해 주겠소.’ [5] 또 정오와 오후 3시쯤에도 포도원 주인은 이렇게 일꾼들을 찾아 자기 포도원으로 보냈다. [6] 그날 오후 5시쯤에 포도원 주인이 다시 시장에 나갔다가 몇몇 사람들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포도원 주인이 그들에게 물었다. [7] ‘왜 당신들은 하루 종일 빈둥거리며 서 있소?’ 그러자 그들이 대답했다. ‘우리에게 일거리를 주는 사람이 있어야 말이죠.’ 포도원 주인이 그들에게 대답했다. ‘그러면, 당신들도 내 포도원으로 가서 일하도록 하시오.’ [8] 날이 저물어 저녁이 되자, 포도원 주인은 관리인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사람부터 처음 온 사람까지 모두에게 품삯을 주라고 지시했다. [9] 오후 다섯 시쯤에 온 사람들이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10] 그러자 아침 일찍부터 온 사람들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이 받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받은 품삯 역시 한 데나리온씩뿐이었다. [11] 일찍부터 온 사람들이 포도원 주인에게 투덜거리며 말했다. [12] ‘아니, 이게 뭡니까? 온종일 뙤약볕에서 일한 우리들을 어째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들과 똑같이 대우하십니까?’ [13] 그러자 포도원 주인이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이보시오, 나는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아무것도 없소. 하루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받기로 애초에 나와 약조하지 않았소? [14] 그러니 당신 품삯이나 가지고 돌아가시오.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똑같은 품삯을 주기로 한 것은 어디까지나 내 마음에 달린 것이오. [15] 내 돈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하는 것이 뭐가 문제란 말이오? 내가 인심을 베푼 것이 당신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16] 이와 같이 나중 된 사람들이 먼저 되고, 먼저 된 사람들이 나중 될 것이다.”(마 20:1-16 쉬운말)
☛ 위 말씀을 읽고 당신은 포도원 주인의 임금 지불에 대한 생각에 동의하고 있는가? 아니면 반대하고 있는가?
☛ 포도원 주인의 이러한 배분 계산법이 과연 맞다고 보여지는가?
당신은 위 포도원 주인이 관리인을 불러 A.B.C 품꾼들에게 시간과 관계없이 일당을 똑같이 준 부당한 사례를 통해 목격하고 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권위있는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공정한 배분을 의미하는 정의의 규정이 근본적으로 뒤집어 진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 당신은 지금 위 성경 구절에 불만을 가질 수도 있다. 그 이유는 세상의 공정한 정의에 대한 개념이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안타까운 것은 우리는 세상의 유명한 사람들의 생각과 말에 지배당하고 있다.
그러나 당신은 성경의 진리는 세상의 법칙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1) 다 함께 포도원 주인의 ‘하늘나라 정의’의 개념을 알아보자.
☛ 먼저 여기 “포도원”을 천국(교회)에 비유함은 구약에서부터 내려오는 어법이다.
☛ 왜 포도원은 그렇게도 많이 천국에 대한 비유로 사용되었을까?
그 이유는 아래와 같다.
① 예로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무엇보다도 포도원이 많은 까닭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시 보편적인 문화적 개념을 도입하여 설명하고 있다.
② 포도 농사는 자연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그것을 심은 자 곧, 농부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마치 ‘교회의 설립자’(하나님 아버지)와 ‘교회의 청지기 관리인’(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인도자’(성령 하나님)의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③ 포도원의 농사법은 목재를 얻으려 하는 목적이 아니고, 열매를 얻기 위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심은 영적 열매를 얻으려고 하시는 까닭이기 때문이다.
☛ 포도원에 대한 비유를 이해하였다면, 본절의 비유를 하나씩 살펴보자.
1) A 품꾼(오전 9시)은 누구인가?
먼저 아침 9시에 온 A 품꾼들은 자신들이 더 크게 희생하였고 더욱 부지런히 일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 나은 대우를 기대하고 주장하는 자들을 대표한다(‘한 데나리온’은 로마의 화폐이기에 노동자의 하루 품값이 될만한 품삯이다).
여기서 더 나은 품삯을 받는 대우의 의미란 ‘약속(언약)을 받고 천국 사역에 들어간 자로서 복음의 초청에 선참한 이스라엘을 가리키고 있다’고 설명할 수 있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그분의 포도원에서 청지기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일하라고 가장 먼저 부름을 받은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스라엘 민족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다(요 6:29).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처럼 천국 사역에 선참하게 되었다고 해서 그 사역을 독점하게 된 것처럼 교만해지면 안 될 것이었다.
그들이 비록 삼위 하나님과 ‘언약 관계’(고용 관계)로 천국 사역에 들어간 듯하나, 그것 역시 그 근본에 있어서는 삼위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된 줄 알아야 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 이버지께서 능력이 부족하여 그들을 고용하심이 아니며, 그들을 그런 사역으로 훈련시켜 축복을 받을 만한 그릇이 되게 하시고자 한 것이다(참고_출 19:6 제사장 나라). 또한, 안 주셔도 될 보상을 사랑과 긍휼로 주시기 위함이다(눅 17:7-10).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진리를 모르고 교만하였으니 그릇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포도원 주인’이신 하나님 아버지와 ‘포도원 청지기 관리인’인 예수 그리스도를 ‘원망’(불평)하였다(마 20:11). 이것은 자기 스스로 ‘먼저’(참조 마 18:1) 온 자라고 생각하는 이스라엘 민족과 제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두고 ‘원망’(불평)하는 사람들이라고 언급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참조_마 19:27, 30).
2) B 품꾼(오후 12시, 오후 3시)과 C 품꾼(오후(5시)은 누구인가?
마태복음 20:5-6의 ‘육시’는 오늘날 우리 시간의 12시이며, ‘구시’는 오후 3시를 가리키고, ‘제 십일시’는 오후 5시를 가리킨다. 이렇게 포도원 주인은 장터에 여러 차례 나아가서 포도원 일군을 찾아 얻으려고 애썼다.
이에 대한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많은 사람, 즉 이방인에게도 주시어서 복음의 사역을 시키시는(믿게 하시는) 삼위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복음 사역을 위해 전도자를 사용하시는 삼위 하나님의 경륜에 적용시키는 경우에는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곧, 삼위 하나님은 어떤 특정한 민족, 그리고 일정한 시대와 시기에만 일군을 세우시는 것이 아니며, 이방인민족이라도 지속적으로 복음을 전할 사역자들을 세우시어 충성된 일군을 보시고 그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주신다는 것이다.
3) A, B, C 품꾼을 통해 깨닫는 성경적 정의란 무엇인가?
여기서 성경적 정의는 포도원 주인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동등한 것이 아니라 약한 자, 즉 여기서 약한 자의 규정은 고아, 과부, 객,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 등 사회적 약자를 의미하기도 하며, 복음으로 환산하자면 이방민족 또는 죄인들이라 칭할 수 있다.
따라서 성경적 정의는 ‘약자 배려의 원칙’에 의하여 이들에게 더 많은 혜택, 즉 ‘사랑과 긍휼’을 주는 것이 성경적인 정의라 의미할 수 있다.
이로써 성경적 정의는 그 백성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려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가리켜 “정의의 하나님”(“엘로헤 미슈파트”)이라 부르고 있다는 점(사 30:18)도 정의와 사랑 혹은 자비가 전혀 상반되는 개념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준다. 사실, ‘미슈파트’(H4941 מִשׁפָּ mishpat)의 짝인 쩨다카(H6666 צְדָקָה tsedaqah)의 의미의 핵심에 있는 것이 이러한 ‘사랑, 긍휼, 자비’이다.
이웃에 대해 정의를 행한다는 것은 단지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함만이 아니라, 다른 이의 어려운 처지에 대한 사랑과 긍휼과 자비가 우선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쩨다카’는 사랑과 긍휼과 자비가 포함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칠십인경에서는 ‘쩨다카’를 많은 경우 ‘자비’와 연관된 단어로 번역하고 있기도 하다. ‘쩨다카’와 자비 혹은 긍휼은 분리될 수 없다. 또한, ‘쩨다카’와 사랑을 구분하여 이해하는 것은 성경과 전혀 맞지 않는 이해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서도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 11:4-5).”가 정의로 나타난다.
▶ 4. ‘구원’과 ‘하늘나라의 정의’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겔 18:5-9; 마 7:22-23; 25:31-46)
(1) 에스겔서 18:5-9에서는 삼위 하나님의 뜻에 부한된 정의를 실현하는 자들은 반드시 구원받는다고 증거한다.
⚫ [5] ○ 가령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가 의로워서 언제나 공법과 정의를 따라 살아간다고 하자. [6] 즉, 그 사람은 산 위에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지 않고, 이스라엘 족속의 우상들에게 한 눈을 팔지도 않으며, 이웃의 아내를 범하여 욕보이지 않고, 월경 중에 있는 아내를 가까이 하지 않고, [7] 다른 사람들을 학대하지 않으며, 빚을 진 가난한 자의 담보물을 돌려주고, 누구에게서도 강제로 무엇을 빼앗지 않으며,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고, 헐벗은 자에게 옷을 입혀 주며, [8] 돈을 빌려줄 때 이자를 받지 않고, 돈놀이를 해서 부당하게 이자를 취하지 않으며, 악한 일에는 삼가서 손을 대지 않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공정하게 판결하며, [9] 나의 율법을 성실히 따르고, 나의 규례를 충실히 지켜서 정직하게 실천한다면, 이런 사람이야말로 정녕 의로운 사람이므로, 그는 반드시 살 것이다. 이는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겔 18:5-9 쉬운말)
위의 말씀에서 정의를 행한다는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을 이웃에게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의미하고 있다. 결국 공법(공의) 또는 정의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셨던 공생애의 삶과 분명히 연결되어 있음이 발견된다.
(2) 마태복음 7:22-23과 25:31-46의 말씀을 통해 ‘구원’과 ‘하늘나라의 정의’의 연관성을 이해하여 보자.
위 에스겔서 18:5-9의 내용은 마태복음 7:22-23과 25:31-46의 재림에 나타날 구원과 정의에 대한 깊은 연관성을 제시하고 있다.
한편 위 마태복음 25:31-46의 말씀은 주께서 수난당하시기 전 단지 3일 전에(마 26:5, 17) 하신 말씀이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이 예언적 메시지가 지니는 참된 하나님으로서의 신적 탁월성을 통해 심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차고 넘치는 기대감으로 엿볼 수 있다.
이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자 자격만이 아닌 왕으로서(마 25:34) 오실 것을 확실히 제시하고 있다(마 19:28). 특히 그의 ‘보좌’는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권세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행사될 것을 가리킨다(마 28:18, 고전 15:25, 히 12:12).
아래의 성경 말씀을 읽을 때 중요한 것,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십자가에 봉헌하여 이루어 놓으신 ‘구원의 근원’(히 5:9)으로서의 ‘믿음과 행위’는 절대로 나누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을 꼭 기억하여 읽어보자.
⚫ [22] 장차 심판의 때에,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주님,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전하였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입니다. [23] 그러면, 나는 그들에게 분명히 대답하기를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썩 물러가라, 이 악한 자들아!’ 할 것입니다.”(마 7:22-23 쉬운말)
⚫ [31] ○ “인자가 영광에 둘러싸여 모든 천사들을 거느리고 와서,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을 때, [32] 모든 민족이 그 앞에 모일 것이다. 그러면,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이 인자는 사람들을 둘로 나누어, [33]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둘 것이다. [34] 그리고 나는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아, 천지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해 준비해 둔 나라에 들어가라. [35] 너희는 내가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너희 집으로 따뜻하게 맞아들였다. [36] 내가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갇혔을 때 나를 찾아와 주었다.’ [37] 그러면, 내 아버지께 복 받은 의로운 자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이 배고프신 것을 보고 음식을 드렸으며, 주님이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38] 저희가 언제 주님이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주님을 도와 드렸으며, 주님이 헐벗으신 것을 보고 주님께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39] 또 저희가 언제 주님이 병드셨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주님을 찾아뵈었습니까?’ [40] 그러면, 왕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내 형제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곧 내게 해준 것이다.’ [41] 그런 후에, 나는 왼편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 마귀와 그 졸개들을 위해 준비해 둔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42] 너희는 내가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지 않았다. [43]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나를 따뜻하게 맞아들이지 않았고, 내가 헐벗었을 때 내게 입을 것을 주지 않았다. 내가 병들었을 때나 감옥에 갇혔을 때도 나를 찾아와 주지 않았다.’ [44] 그러면, 그들도 내게 대답할 것이다. ‘주님, 주님이 언제 배고프고 목마르셨으며, 주님이 언제 나그네 되고 헐벗으셨으며, 주님이 언제 병들고 감옥에 갇히셨습니까? 언제 주님께 그런 일이 있었기에, 그런 주님을 보고도 저희가 주님을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45] 그러면, 왕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있는 내 형제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 [46] 그리하여, 왼편에 있는 악한 자들은 영원토록 벌 받을 곳으로 쫓겨날 것이고, 오른편에 있는 의로운 자들은 영원토록 생명을 누릴 곳으로 들어갈 것이다.”(마 25:31-46 쉬운말)
특히 위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리스도의 신앙의 삶을 기준으로 하여 구원받은 자들(양)과 받지 못한 자들(염소)을 불러 모아 판결문을 선포하는 내용이다.
☛ 당신은 위 성경 말씀을 읽고 어떠한 생각이 드는가?
☛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구원의 판결문을 선포하신 내용, 즉 하늘나라의 정의를 실현한 자들과 개인주의 적이며, 교만한 신앙생활을 한 자들의 개념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는가?
▶ 4.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하늘나라의 정의’에 부합되어 살아가고 있는가?(고전 13:1-13)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세상에 실천하신 복음적 사랑은 세상의 착한 일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사랑이다.
우리는 ‘사랑’을 착한 일(봉사, 헌신, 구제)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사랑’은 하늘나라의 통치 개념인 ‘공의’ 또는 ‘정의’와 분명히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곧 성령 하나님의 충만한 인도하심으로, 성령 하나님의 인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고 닮아가며, 제자도의 삶을 실행하는 것이다(엡 1:13; 4:30; 빌 1:19; 살후 2:13; 딛 3:5).
이럴 때 ‘하늘나라의 공의이며 정의’가 된다.
이러한 복음의 개념과 뜻을 알아야 올바른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살아갈 수 있다. 비로소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온전한 믿음이 되는 것이며, 온전한 복음으로 구원이 이루어진다.
아래의 성경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자.
⚫ [1] 내가 사람의 모든 방언과 천사들의 언어로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단지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2] 내가 예언의 은사를 받아서 모든 비밀들과 모든 지식들을 다 통달할지라도, 또 산을 능히 옮길 만한 큰 믿음을 지녔다고 할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3] 내가 나의 모든 소유를 가난한 이들에게 다 나누어 주고, 심지어 내 몸을 불사르도록 기꺼이 내어 준다고 할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다면, 나는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습니다. [4] ○ 그러면 사랑은 무엇입니까?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5] 사랑은 무례하게 굴지 않고,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내지 않고, 마음속에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6]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7]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변함없이 항상 믿어 주며, 언제 어디서나 소망을 품고, 모든 것을 견딥니다. [8] 사랑은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언도 사라지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없어집니다. [9] 지금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또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10] 그러나 모든 것이 온전해질 때가 오면,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것들은 다 사라질 것입니다. [11] 내가 어렸을 적에는 말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나 판단하는 것이 모두 어린아이와 같이 어렸지만, 어른이 돼서는 어렸을 때의 것들을 다 버렸습니다. [12]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자기 모습을 들여다보는 것같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날이 오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분명히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 날이 오면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13]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이지만, 그중에서도 으뜸은 사랑입니다.(고전 13:1-13 쉬운말)
☛ 세상이 매우 악하다. 이러한 말을 생각해보자.
“현재의 신앙이 미래의 신앙을 담보한다.”
☛ 우리가 현재 어떻게 기독교 신앙을 겸비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자.
▶ 끝으로 조심해야 할 것은, 현재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하여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미래의 신앙도, 성화도, 변화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