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워 킬링 문> 보고 왔습니다.
러닝타임이 매우 길어 각오는 하고 갔지만.. 꽤 지치는 영화였네요.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신작으로 이전 필모와 많은 부분이 맞닿아 있습니다.
태평양 건너 타국의 역사지만, 이를 통해 한국의 현 상황이 엿보이기도 하고요.
이에 대한 감상을 풀어내려 하며, 아래부턴 지극히 개인적인 해석임을 밝혀두는 바입니다.
역사적 배경
<플라워 킬링 문>은 1920년대 오클라호마에서 발생한
원주민 대량 연쇄살인을 바탕으로 한 작품입니다.
오세이지족은 북아메리카 남부 지역에 거주했던 원주민으로
미국 정부와의 협상에서 본인들이 거주했던 땅을 떠나는 대신
오클라호마 보호구역의 토지와 자원에 대한 소유권을 보장받습니다.
이후 해당 지역에서 막대한 양의 석유가 발견되며
20세기 가장 부유한 일족으로 부상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미국 사회는 오세이지족을 '문명화되지 못한 야만인'이라 평하며 이들에게 경제적인 자유를 주지 않았고
백인 후견인을 통해서만 금융 활동이 가능하도록 제한했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오세이지족의 재산을 노린
여러 백인 사업가와 부르주아 계층이 오클라호마 주로 유입되었으며
오세이지족이 가진 재산을 자신들의 명의로 만들기 위해
젊은 친척들을 오세이지족과 결혼시킨 후
그들을 독살, 암살하여 재산을 수탈하는 반인륜적 범죄를 자행하게 됩니다.
차후 이들의 행각은 워싱턴 D.C. 수사국의 수사과정을 통해 밝혀졌으며
이는 FBI 설립의 계기가 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지나가듯 FBI의 초대수장인 J.에드가에 대한 언급도 등장합니다.)
작가주의적 해석
아메리칸 드림은 마틴 스콜세지의 필모그래피를 관통하는 키워드입니다.
<택시 드라이버>에서 미디어가 부추기는 성공과 영웅에 대한 조소를,
<갱스 오브 뉴욕>과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로 성공을 쫓는 야심가들의 비정함과 포악함을 담았다면
<플라워 킬링 문>은 이주민의 야심에 짓밟힌 아메리카 원주민의 비애를 그립니다.
스콜세지 뿐 아니라 2010년대 이후로 여러 감독과 작품을 통해 백인 위주의 아메리칸 드림을 재해석하려는 시도가 잦은데
이런 흐름은 잦은 경기 불황으로 인한 미국 중심 자본주의에 대한 회의와
PC(정치적 올바름)로 대변되는 소수자들의 영향력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서사를 풀어가는 방식은 스콜세지 감독의 전작인 <아이리쉬 맨>과 흡사합니다.
<플라워 킬링 문>은 3시간 25분에 달하는 굉장히 긴 러닝타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이리쉬 맨>은 3시간 29분)
때문에 영화는 압축과 생략보단 모든 장면을 담으려고 노력하며,
이야기가 장황해지는 대신, 해당 상황에 들어간 듯한 공간감이 강화되는 효과를 보입니다.
이는 마틴 스콜세지 필모의 후기에 들어서면서 두드러진 특징으로
스트리밍 플랫폼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작품 전반에 감독 개인이 행사하는 힘이 강해졌기 때문인 듯 합니다.
마틴 스콜세지 후기 작품의 또 다른 특징은 '죽음'에 대한 연민입니다.
<택시 드라이버>와 <좋은 친구들>로 대표되는 스콜세지의 초기 영화들에선
미국의 사회상을 느와르의 작법으로 풀어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느와르의 주된 특징은 죽음을 가볍고 돌발적으로 다루는 것으로
극이 진행되는 동안 갑작스러운 폭력이 심심치 않게 발생하며 이 과정에서 이탈된 인물은 프레임에서 벗어날 뿐,
죽어 간 이들에 대한 어떠한 연민도 남기지 않습니다.
('시체를 찍지 않는 것'이 하나의 룰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아이리쉬 맨>과 <플라워 킬링 문>에선 다릅니다.
극을 이끄는 주요 인물들의 주변이 죽음으로 둘러싸인 점은 기존 정치 느와르와 유사하지만
후기 작품들에선 주요 인물들 또한 천천히 죽음을 맞이하며 이를 기억하려는 연출적 노력이 강하게 보입니다.
(<아이리쉬 맨>에선 관으로, <플라워 킬링 문>에선 꽃으로)
여담을 더하면 이런 느리고 진중한 죽음을 통해
<아이리쉬 맨>에선 자신의 전성기를 이끌어 준 갱스터 무비의 쇠퇴를,
<플라워 킬링 문>에선 아메리칸 드림의 반성을 다룬 듯 싶습니다.
감독 본인이 노년기에 들어서며 부쩍 가까워진 죽음에 대한 성찰과 두려움이 반영된 걸 수도 있죠.
한국에게 던져진 시사점
오세이지족의 몰락은 어찌보면 한국의 현 상황과 닮아 있습니다.
오세이지족은 풍부한 석유 자원을 가졌지만
이들을 지켜줄 법적 제도와 문화적 이해 같은
사회 시스템의 부재로 서구 공동체에 포함되지 못한 채 서서히 쇠락하고 붕괴되었습니다.
한국의 상황은 이와 정반대입니다.
자원 하나 없는 척박한 땅이지만 미국의 경제, 정치 시스템을 받아들인 덕에
경제적, 군사적, 정치적으로 많은 지원을 받았고, 단기간에 경제 부흥국으로 부상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시스템을 급격히 이식하는 과정에서
지역 양극화, 세대 격차, 기업과 지도층의 도덕적 해이,
이를 개선할 정치, 경제, 문화적 자정 작용의 부재 등 여러 사회적인 부작용을 떠안게 되었습니다.
근래에 들어선 위 부작용들이 한데 모여 극단적인 저출산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본인들을 보호할 시스템이 부재했던 오세이지족이
각종 질병과 백인 후견 사회의 권모술수로 인해 서서히 멸족되었듯,
인적, 물적 자원과 제도적인 성숙이 부재한 한국은
저출산이란 합병증으로 서서히 말라죽어가는 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감상평
<플라워 킬링 문>은 인상적인 역사적 사례와 메시지를 가졌으나 형식 면에서 새롭지는 않은 작품이었습니다.
장황한 서사와 느린 연출로 영화의 공간감과 체험을 강조하는 형식은 슬로우 시네마 장르에서 활발하게 시도되는 중이나,
본 영화는 긴 러닝타임을 가졌음에도 이런 흐름이 반영되지는 않았습니다.
(슬로우 시네마보단 기성 장르를 길게 확장한 '감독판'에 가깝습니다.)
기성 영화에 가까운 작법이라 신선한 감흥은 받지 못했지만, 노년기에 접어든 스콜세지 감독의 가치관과 연출이 집약된 작품이니만큼 노련한 대작이라는 인상은 충분히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작품은 애플 오리지널 영화라 얼마 안 가 애플 tv+ 스트리밍으로 접할 수 있으나
3시간 반에 달하는 러닝타임으로 극장 밖에선 집중력 있게 감상하기 어려울 수 있어
관심이 가는 분들은 상영 기간 중에 극장에서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암튼 재밌는 영화였습니다.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