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디까지나 외전으로써 원작의 바깥부분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당연히 원작을 보지 않았다면 내용의 이해와 재미가 많이 떨어집니다.
2. 원작을 보면서 이해되지 않는다거나 모르겠다 싶은 것들의 해답이 이 외전에 있습니다.
3. 사실상 이 부분은 두개의 외전 가운데서도 하세현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분량이 상당합니다.
(상+중의 분량)
4. 이것으로 외전 하나를 끝네는바 시마도사 아르샤편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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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며칠 뒤…
꿈에서 만났던 노인은 내 앞에 실제로 나타났다.
물론 소스라치게 놀라는 나였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꿈에서 있었던 일이 실제의 상황으로 재현되고 있으니...
“생각은 해보셨습니까?”
역시나 그의 물음은 지난번의 그것과 그대로 직결된 것...
그전부터 느끼는 것이지만 자신이 할아버지이고 나는 그 손녀 뻘의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높은 사람을 대하는 마냥 존댓말을 아끼지 않는다.
왠지 어색한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생각이라뇨?”
절반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마치 모르는 것처럼 대꾸해줬다.
뭔지 모를 꺼림직한 기분…
왠지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선뜻 반길 수만은 없는 사람이었다.
“당신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들어줄 수도 있습니다.”
한 구절 흐트러짐 없이 말을 이어나가는 노인이었다.
전혀 망설임 없이…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그것을 위해 당신의 영혼을 절반만큼만 주십시오.”
이러고 보면 뻔뻔한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확실한 건 모르겠지만 뭔가 굉장히 어려운 것을 요구하는 듯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에게 말하고 있다.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나를 바보 취급 하는 것만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를 무시하고 그냥 지나치려 했다.
그런 나를 붙잡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그는 마치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딱 한마디의 말을 건 낼 뿐이었다.
“그럼 다음에 뵙지요.”
웃기지도 않는다고 생각했다.
다시 만나고 싶지도, 내가 그런 제안을 받아들일 리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그 다음날이 지나고…
‘만약 내가 살아있었더라면…’
그런 생각을 마음에 두는 경우가 많아졌다.
특히나 혼자 남겨진 낙영을 바라보다 보면 미칠 지경이었다.
‘승낙해 버릴까?’
내가 마음만 먹으면 나의 오랜 바램을 이룰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애당초 그런 것을 알아버린 게 실수였다.
시간이 갈수록 나는 그 노인의 제안에 이끌려 가고…
결국 그것을 견디다 못한 나는 미현이 언니에게 모다 털어놔 버렸다.
그런데 그런 나를 대하는 언니는…
“너 미쳤니? 제 정신이냐고!!”
이제껏 언니와 꽤 오랜 시간을 지네 왔다고 자부했지만 이렇게나 흥분하고 화를 내는 언니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지? 네가 그 쪽에 마음을 둘 이유가 뭐가 있길래”
말 그대로였다. 내가 그 쪽에 마음을 둘만한 이유는 딱히 하나뿐이었다.
“설마… 낙영이… 때문이니?”
그리고 그것을 들켰을 땐 뜨끔해야 했었다.
“낙영이 때문이라면 더더욱 안돼, 낙영이가 철이 없다고는 하지만 네가 그러는걸 원치는 않을 거야.”
마지막쯤 가서야 나를 타이르듯 한껏 누그러졌다.
하지만 나는 언니가 화내는 모습을 이미 봐버렸다.
그것은 충격이었다.
내가 알고 있던 누나와는 다른 모습이었기에...
덕분에 내가 생각했던 일이 얼마나 위험하고 해서는 안될 것인지도 충분히 납득이 갈 만도 했다.
앞으로는 그런 생각 따위 안 하기로 마음 먹었다.
하지만 그런 나의 결의를 산산조각 내버린 작은 사건 하나가 있었으니…
나는 아직도 그날의 기억을 잊지 못 한다.
아니, 어쩌면 결코 잊을 수 없는 게 당연한 것일까.
그때의 그 설레임…
막연한 두근거림…
잔뜩 찌푸린 하늘이 있었다.
겨울이 머무는 계절…
태양이 없기는 했지만 바람이 분다거나 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럭저럭 견딜만한 날이었던 거다.
그날도 나는 어김없이 미현이 언니의 집으로 향했다.
‘그래도 조금 춥긴 하네’
그저 단순한 기분 탓일까…
어찌된 일인지 집을 나와서 길을 걸으면 걸을수록 몸에 스며드는 한기가 심해지는 것 같았다.
‘달리다 보면 괜찮겠지…’
그래서 미현이 언니네 집까지 뛰어가기 시작했다.
세찬 바람이 나를 막아 세우려 들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달려나갔다.
생각했던 대로 몸이 꽤 따뜻해졌다.
뛸 때마다 새하얀 입김이 눈앞에 아른거리고…
숨이 목까지 차올라 힘들 지경이었다.
‘조금만 더 가면…’
사실 목적지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그때…
쿵!!
정신 없이 달려가던 내가 무언가와 부딪친 채 바닥에 쓰러져 앉아야 했다.
숨이 차서 힘들었기 때문인지 앞을 잘 살피지 못했나 보다.
하지만 드문 일도 아니고 있을 수 없는 일…
생각해보면 내가 무언가와 부딪쳤다는 게 이상했다.
‘뭐지…?’
그리고 이내 정신을 챙긴 내가 주위를 살폈을 때…
역시나 나와 부딪친 충격에 밀려 넘어진 사람이 있었다.
‘누구지?’
곧 ‘탁탁’ 옷의 먼지를 털어내며 나와 부딪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내가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채는 데에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던 거다.
다름아닌 낙영이었으니까.
꿈에서나 가능한 일…
나는 이게 꿈이 아닐까 의심했다.
“죄송합니다.”
내가 어찌된 영문인지도 모른 채 멍한 눈으로 낙영이를 보는 사이 그는 사과 한마디만을 던져 놓고 가던 길을 가버렸다.
‘가버렸다…’
하지만 그는 몰랐을 것이다.
그때의 내 기분을…
지금껏 동경해 왔고 소원해 왔던 것을 잠시나마 맛보게 된 나의 기분…
등을 돌린 채 걸어가던 낙영이의 모습이 점점 작아지다가 마침내 사라졌다.
내가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는 무언가 차가운 감촉을 느끼고 나서였다.
‘눈이네…’
찌푸린 하늘 아래 새하얀 눈이 어울려 나선의 곡선을 따라 춤을 추고 있었다.
회색 빛 하늘…
새하얀 눈…
나름대로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와 함께…
이제껏 낙영이를 바라만 보았던 것…
화가 난 언니를 바라보며 다졌던 결의...
이제껏 쌓아 올린 모든 것들이 허물어졌다.
결국 그날 나는 일전에 있었던 그 노인의 제안을 받아 들였다.
…………………………..
고등학교 2학년의 새 학기가 시작된 첫 시간…
마치 당연스레 정해진 순서라도 되는 듯이 한 사람씩 앞으로 나와 자기 소개를 하는 것이었다.
자기 차례가 되자 마지못해 앞으로 나와 자기 소개를 하는 낙영…
“정낙영 입니다, 잘 부탁 드립니다.”
자기 소개라고 할 것도 없이 내뱉은 단 한마디였다.
역시 그에게 있어 입이라는 것은 꼭 필요할 때만 쓰여질 뿐인가 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중에 마침내 내 차례가 오고…
많이도 떨리는 순간 이었다.
하지만 차분히 마음을 가라 앉히고…
“하세현 입니다. 잘 부탁 드립니다.”
결국 그와 마찬가지로 딱 한마디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다른 사람에게는 나에 대해 소개할 것도, 필요도 없을 테니까…
나는 어디까지나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해 왔으니까…
‘저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 왔습니다.’
단지 그를 멀리서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그렇게 말해주었다.
…………………………………………….
오래 전부터 낙영이에게 묻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있었다.
그 중에서 으뜸가는 질문은…
‘왜 그때 오지 않았지?’
하지만 막상 그를 대하고 보니 이런 정도의 질문을 내밀 여건이 못 되었다.
오히려 가장 기본적인 질문으로 바뀌어야 했다.
‘정말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
‘잊어버린 거야?’
어찌된 영문인지 낙영이는 나에 대해 기억을 까마득히 잊어버린 상태였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으니...
일단 나는 그가 잊어버린 나에 대한 기억을 다시금 되찾게 하는데 주력했다.
내가 그의 앞에 서자마자 다시금 이야기를 정답게 주고받고 하리라는 기대는 이미 물 건너간 지 오래였다.
…………………………………………….
부단한 나의 노력이 있었다.
낙영이의 옆자리에 앉기 위한 계획…
한 달에 한번씩 제비를 뽑아 자리를 정하곤 했다.
‘낙영이가 앉을 옆자리의 제비를 뽑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운을 바라기에는 터무니없는 확률이었다.
고로 나는 낙영이 옆자리의 제비를 뽑은 사람을 찾아 제비를 바꾸곤 했다.
비록 그것이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상대방이 순순히 바꾸어 주었다는 거다.
대부분의 경우 낙영이 옆에 앉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으니…
한번의 우연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우연이 계속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우연이 아닌 필연적인 것…
계속해서 낙영이의 옆자리를 내가 차지하게 됨으로써 누가 보더라도 의도적인 것임을 알만도 하다.
낙영이 역시 그것을 눈치 챘겠지만 그다지 신경 쓰는 기색은 없었다.
역시나 그는 현실과 동떨어진 곳에서 사는데다 주위의 일을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어떻게 보면 느긋하면서도 나쁘게 말하면 정이 없는 사람인 것이다.
………………………………………………………………
아침마다 낙영이를 기다렸다가 함께 학교로 향하곤 했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역시나 아침엔 잠이 많은 그였다.
어쩌면 어렸을 적의 시간 그대로 멈추진 채 지금에 이른 것일지도…
그도 그럴 것이 내 눈을 통해 들어오는 그의 모습은 아직도 어린아이 같기만 하다.
어쩌다 보니 담임으로부터 부탁 비슷하게 받아 등교를 같이 할 수 있었다.
문득 어렸을 적 낙영과 함께 학교에 가는 것을 소원한 적이 떠올랐다.
‘그때의 소원이 지금에서야…’
아침에 학교를 같이 가다 보면 한두 마디의 대화 정도는 있을 법도 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쉽지 않았으니...
오히려 그에게 말 한마디 거는 것을 생각조차 하는 것이 망설여졌다.
막상 대하고 보니 내가 예상하고 생각했던 것보다 그는 훨씬 더 어두운 존재였던 거다.
………………………………………………………
학교가 끝나고서도 몇 번인가 같이 돌아가자고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듣는 척도 없이 물리쳐 버리는 낙영이였고…
그럴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부숴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
‘나는 왜 여기에 온 걸까.’
그것은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었다.
이왕 이렇게 온 것 후회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래서 나는 낙영이가 나를 무시하고 외면하더라도 웃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힘들어져 가는 것이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고 내가 노력을 해도 그는 마음을 열 생각을 안 하니까…
봄에서 여름으로 계절이 바뀌도록 그는 그대로였다.
‘나는 저 사람을 위해서 온 건데…’
돌에 걸려 넘어지는 아픔은 참을 수 있지만 그가 나를 차갑게 대하는 것만큼은 견디기 힘들었다.
시간이 갈수록 힘들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내가 힘들어 할 때마다 유난히도 비가 자주 내렸으니까…
단지 그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
여름이 시작 되고 언젠가부터 낙영의 모습에서 일련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 정도라면 척 보고서 대강 짐작할 만도 했다.
‘나는 누구보다도 낙영을 유심히 관찰하는 사람이니까.’
항상 어둡기만 하던 그의 얼굴이 조금 밝아진 것 같았다.
말하는 횟수도 전에 비해 눈에 띄게 늘었다.
단순한 착각이 아니기를 바랬다.
그것이 그저 한 순간 지속될 뿐인 변화가 아니기를 바랬다.
하지만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그는 서서히 어두운 수렁에서 멀어지는 듯 했다.
정말 다행이었다.
낙영이가 밝아진 사실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기쁘고 즐거웠는지 모른다.
‘오길 잘했구나.’
그때,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
하지만 며칠이 지난 뒤…
심하게 비가 내린 그 다음날 아침이었다.
항상 그래왔듯이 학교 갈 시간에 맞추어 낙영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 낙영이를 부르기 위해 초인종을 눌렀을 때…
“누구시죠?”
문 너머로 들려온 것은 낙영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처음 듣는…
아니, 생소하다고 하기에는 언젠가 들은 적이 있는 것도 같은 여자의 목소리…
문을 열어서 나를 맞은 사람은 과거에 보았던 금발의 여자였다.
어쨌든 나는 그녀의 인도를 받아 집안으로 들어섰고 자신의 방에서 깊은 잠에 빠져있는 낙영이를 볼 수 있었다.
“낙영이의 상태가 저러니 오늘 학교 가는 건 무리일 것 같네요.”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지금 상태에서 낙영이를 깨워서 학교에 갈수는 없었다.
“하지만…”
왠지 나 혼자 학교에 가는 것이 망설여졌다.
여기에 더 남아 있고 싶었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눈앞에 서있는 금발의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거다.
그 사이 나를 힐끔힐끔 바라보던 그녀의 미간이 약간 찡그려진다.
마치 뭔가 싫은 것을 보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을 눈치라도 챈 듯이…
“잠시 거실에서 이야기라도 할까요?”
문득 나와 이야기 하고 싶어졌나 보다.
나 역시 그것을 은근히 바라던 것이기에 그녀를 따라 방을 나섰다.
거실로 나가던 중 방문을 닫으면서 보여진 낙영의 얼굴엔 평온함이 감돌 뿐이었다.
일단은 거실의 소파에 그녀와 마주보고 앉았다.
하지만 그녀를 바라 볼수록 이해가 서질 않는 것이었다.
‘수수께끼의 금발의 여인…’
전에도 그랬었지만 지금도 알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게다가 내가 그녀를 본 것은 아주 오래 전의 일인데도 그녀에게서는 나이를 먹었다든지 하는 변화가 없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정체 불명 수수께끼...
그래서 어떠한 식으로 이야기를 꺼내야 하나 망설였었다.
하지만 내가 미처 이러한 생각들을 정리하기도 전에 상대 쪽에서는 이미 준비가 되었다는 마냥 나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하기 시작했다.
“왜 그런 짓을 하신 거죠?”
그녀가 무엇을 의도하는 것인지는 불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구석에 무언가 찔리는 것이 있었다.
“당신은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일을 벌인 건지 모르는 것 같군요.”
그리고 확실해 졌다.
그녀가 나의 존재에 대해 뚜렷이 알고 있다는 사실이…
어째서 그녀가 나에 대해서 손바닥 보듯이 알 수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러고 보니 할말이 없어졌다.
묵묵히 입을 다물 수 밖에 없는 거다.
그녀는 내가 저지른 부정을 알고 있으니까.
애당초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앞서 놓인 전제 자체가 뒤집어져 버렸다.
‘
‘나는 저 사람을 본적이 있는데 저 사람은 나를 모르니까.’
하지만 그녀는 나를 잘 알고 있었다.
내가 그녀를 아는 것 보다 그녀는 나를 잘 알고 있던 거다.
그녀의 정체가 무엇인지 따위를 물으려고 했었지만, 이제는 그것도 어렵게 되었다.
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죄책감이며 자괴감이 나를 공격하고 있었다.
사실 전부터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던 거다.
단지 그녀를 통해 새삼 건져 올려졌을 뿐…
“당신의 행위가 낙영이를 위한 것이라지만 막바지의 당신은 낙영에게 크나큰 상처만 줄 겁니다.”
그렇게 이제껏 정당하게 여길 수 있었던 나의 유일한 위안처 마저 무너져 버렸다.
그녀의 말이 틀리지 않는다면 나는 그녀의 말대로 마지막 가서 낙영이에게 상처만 준다는 것…
사실상 그녀가 한말들 가운데 어긋난 것은 없었다.
그래서 더 두려웠다.
“…한가지 약속해 주실래요?”
이야기가 끝나갈 쯤의 그녀가 한층 더 진지한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 ?”
내가 아무 말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자 이내 그녀가 이야기를 계속 했고…
하지만 나는 이미 그녀의 입에서 나올 이야기를 지레 짐작했었다.
그래서 차마 이야기를 듣기가 두려웠던 거다.
나도 모르게 몸이 떨고 있었다.
“오늘 이후부터 낙영에게 신경 쓰지 말아주세요.”
그래도 그것만은….
그것 하나만은 아니기 바랬는데…
나는 그 사람을 위해 온 거니까.
내가 저지른 잘못도 그 사람을 위해서였으니까.
그것 하나만은 안 되는 건데…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 일수도 긍정의 표정을 지어줄 수도 없었다.
거짓으로라도 그녀의 뜻에 따라줄 자신이 안 선다.
“사실 제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수도 없는 거죠, 당신의 자유니까.”
내가 아무런 화답도 없이 굳은 표정으로 앉아있자, 이런 나의 반응을 거절의 의미로 받아 들였는지 그녀가 눈을 한번 탁 한번 감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이내…
“하지만 저는 낙영이로부터 당신을 떼놓도록 하겠어요.”
감겨졌던 눈이 떠지며 이제껏 보도 못한 차가운 눈동자를 꺼내 들었다.
…………………………………………….
그날 집으로 가면서 생각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지를…
어째서 내가 그런 질책을 받아야 하는 지도…
생각을 해보니 요 며칠 새 낙영이에게 있었던 변화는 그 여자로 인한 것이었다.
그것이 무척이나 분하고 억울했다.
‘나는 그녀에게 진 것이다.
내가 몇 달을 노력해도 움직이지 못한 낙영이의 마음을 그녀는 단지 몇 일 사이에 움직여 놓은 것이었다.
그래서 엉뚱한 생각마저 들어버렸다.
‘그녀에게 만은 질 수 없다’ 라고…
결국 그날 이후 나는 오히려 더 집요하게 낙영이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낙영이에게 접근을 하면 할수록 나의 마음은 쓰라릴 정도의 아픔을 느껴야 했다.
그와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그가 나란 존재를 잊어버렸음을 깨닫게 될 뿐…
조금 생각하면 기억날 정도로 잊은 게 아니었다.
아주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다시는 기억해낼 리 없을 것만 같았다.
아마도 나 같은 건 전혀 기억할 가치도 없었나 보다.
‘왜 기억하지 못해?’
라고 마음속으로 수없이 원망을 하였다.
하지만 차마 입으로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 외에도 그가 나를 대하는 태도이며 그가 행하던 몇몇 행동들…
이따금 나는 슬프고 슬퍼서 견딜 수 없을 지경에 빠지곤 했다.
모든 것을 내던지고 싶고 포기하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낙영이에게 신경을 쓴다거나 하는 것을 그만둘까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생각에만 그쳐야 했다.
어디까지나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그를 위해서라고 생각했었기에……
내가 존재하는 한 그것은 바뀔 수 없는 진리 같은 것이었다.
………………………………….
하늘에 먹구름이 낀 날이 많았다.
지금껏 나의 슬픈 마음에 동조라도 하듯 비가 자주 내렸다.
아직 여름의 시작인데도 불구하고 꽤나 많은 비가 내렸구나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그날도 아침부터 비가 내리기 바쁜 날이었다.
‘어라...?’
나는 불분명한 위화감 비슷한 것을 느낀 채 잠에서 깨어야 했다.
왠지 모를 꺼림직한 기분…
그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은 것은 세수를 하면서 거울을 확인하던 도중이었다.
그것을 인정하기 싫었기에 몇 번이나 거울을 닦았는지 모른다.
믿기 싫었으니까…
거울 안에 있는 물에 젖은 내 모습이 빛 바랜 사진 마냥 희미해 졌다는 사실을…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지만 신경 써서 본다면 알아차릴 만도 했다.
그것은 한 순간 일어날 수 있는 변화가 아니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대강 추측할 수 있었다.
‘…막바지의 당신은 낙영이에게 크나큰 상처만 줄 겁니다.’
문득 전에 들었던 말이 생각나 몸에서 힘이 주욱 빠져나갔다.
내가 낙영이에게 줄 상처의 의미를 이제는 확연히 알 것도 같았다.
그와 함께 왜 그 금발의 여자가 나에게서 낙영이를 멀리하도록 당부했는지 까지도...
하지만 나는 정말 구제 불능 이었다.
‘딱 오늘 하루만…’
나는 오늘 하루만 그에게 매달리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이 수평을 이루고 서있는 양팔 저울과 같아서 내가 하는 행동이 그대로 마음의 상처로 가중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상처를 입는 것이 나 혼자에 국한되지 않는 것도…
나중 가서는 낙영이에게 안겨줄 상처만 불어날 따름이었다.
그날 하루가 다 가도록 참으로 여러 가지 부탁을 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계속해서 거절을 당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끈질긴 나의 노력은 계속 되었다.
‘아마도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나도 모르는 사이 그가 나의 상태를 이상하게 여겨주기를 바랬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쩌면 낙영이에게는 내가 하는 부탁을 거절하게끔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아니라고 하기에는 너무 하다 싶을 정도의 거절이었다.
내가 그토록 부탁을 해대는데…
아니, 어쩌면…
‘저는 낙영이로부터 당신을 떼놓도록 하겠어요.’
그녀의 영향일지도 모른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어디에서 오는지조차 불분명한 확신감…
그것을 자각할 때마다 느끼는 절망감…
나는 결국 비가 내리는 교문 앞에서 그를 붙잡고 말았다.
그것이 처음 있는 일이구나 싶었다.
낙영이에게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거절 당해왔지만…
내가 거절을 당했는데도 재차 그에게 매달리는 것은 확실히 그때가 처음이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다행인 일이었다.
그에게 지금껏 못 전해준 선물도 건넬 수 있었으니까.
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예쁘장한 머리핀도 답례 겸으로 해서 받았으니까.
하지만 나는 거기에 그치지 못하고 그에게 보여서는 안될 모습을 보인 것이었다.
쏟아지는 빗줄기 만으로도 간신히 대신할 수 있을 것이었는데…
결국 그의 눈앞에서 울음을 터뜨려 버렸다.
그것도 모자라서 차가운 빗물이 고인 바닥에 주저 앉아 나의 심정을 토로했다.
매일 거절 당해도 좋으니까…
무시 당해도 괜찮으니까…
아직 더 여기에 남고 싶다고…
그런 나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며 당황스러워 하던 낙영이였다.
그리고 이내 나를 달래기에 바빴다.
그날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낙영이의 따스함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거다.
그가 본래 다정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러기에 나는 나의 행위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낙영이가 가진 본연의 따뜻함을 끌어올리려 했을 뿐이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대해 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 정도의 아쉬움이 남을 따름이었다.
………………………………
집에 도착하고 내 방에 들어서자 마자 쓰러지듯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꽤 피곤했었나 보다.
빗물에 절은 옷이었지만 미처 갈아입지도 못하고 누워버렸다.
어쩌면 끝으로 치닫는 나의 운명을 막연하게나마 느낀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포자기...
어차피 끝난다는 절망감…
어쩌면 내가 눈을 감는 것이 모든 것과 작별하게 되는 시발점 일런지도…
그렇게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방안의 전경을 새겨볼 여유조차도 없이 잠이 들었던 거다.
그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르겠다.
어둠이 스며든 내 방의 한가운데서 정작 내가 잠이 깼다는 게 중요했다.
그것이 그리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나라는 존재가 아직까지 남아있다고 해서 기쁘거나 다행스러워 할 것도 없으니까…
그렇다고 그것을 싫어하고 불행으로 여길 필요도 없었다.
어느 쪽으로든 좋은 것이었다.
너무 깊이 파고들어 생각을 하기에는 내가 너무 지쳐버렸다.
이러고 보면 아예 눈을 뜨지 않는 편이 좋았을 뻔했다.
아직은 깊은 밤…
일어나기에는 한참이나 이른 시간…
창가에서는 전해지는 불빛도 없이 나약한 빗소리만이 들려졌을 뿐이었다.
그것이 비록 나지막하기는 했지만 깊은 밤의 정적을 깨기에는 충분했기에…
그래서 단지 그 빗소리에 불리어져 일어나버렸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너무 깊이 파고들면 피곤하니까’
마땅히 다른 이유를 생각할 필요조차도 못 느꼈다.
나를 감싸고 있는 이불의 포근함이 마냥 좋다는 정도만 느끼면 되는 것이었다.
‘어라…?’
문득 무언가 부자연스러운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내 그것이 내가 입고 있는 옷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젖은 몸을 이끌고 그대로 잠이든 기억이 분명하게 남아있다.
아직 완전히 마르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잠이 들기 전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무의식 중에 갈아입은 것일까.
그것보다도 더 납득이 갈만한 이유를 찾던 중…
그제서야 침대의 머리맡에 엎드려 잠이 드신 어머니에 생각이 미쳤다.
‘내가 잠든 사이에 갈아 입혀주셨구나’
생각해보면 내가 한 행동의 동기는 하나같이 낙영이를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숨어 있었던 나의 바램…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어머니와의 행복한 일상이 이제껏 이어져 왔었다.
어머니에게 있어 나란 존재는 지금껏 죽지 않고 자라온 소중한 딸…
일전에 노인과 계약을 하면서 들었었다.
내가 가진 영혼의 절반을 사용하여 거짓을 만드는 것이라고…
앞으로 모두가 그 거짓 안에서 살아갈 것이라고…
그렇게 9년 전의 죽음을 배제한 것이 현재의 일상...
당연하다는 듯이 아침이 되면 시계의 알람소리에 눈을 뜨고 어머니가 차려주는 아침밥을 먹고서 학교에 갔다.
줄곧 그래왔다는 마냥 학교에서 전념해왔던 공부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주위 사람들과 어울리고 어머니와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결국 노인의 말대로 눈앞의 모든 사람들이 내가 만들어낸 거짓에 동조해 주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오직 딱 한 사람 아닌 경우도 있었지만…
그리고 이내 또 한번의 예외를 맛봐야 했던 거다.
다름아닌 얼마 있어 나의 기척에 의해 잠이 깬 어머니에 의해서....
잠이 깨자 마자 나를 품에 안고 우시는 어머니였기에 이유도 모른 채 놀랄 따름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 이유를 깨달았을 때는 더 놀라야 했다.
네가 또 죽을 것 같아서…
그래서 걱정했노라고…
이제껏 나의 거짓 안에 맞물려진 일상이었다.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전혀 이상하지 않게 나를 대해왔던 어머니…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던 거다.
언제부터인가 어머니는 깨달았던 거다.
무언가 어긋나 있다는 것을…
자신의 딸이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다는 사실마저도…
단지 그것을 알면서도 나를 아무렇지도 않게 대해왔던 거다.
행여나 그 사실을 드러내면 내가 사라져 버릴까봐…
행복하고 소중했던 딸과의 일상이 그걸로 깨질지도 모르니까…
그제서야 내가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버텨온 것이 어머니의 온정에 의한 것임을 절실히 깨달았다.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집에서 지네는 동안의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을지도…
하지만 나는 결과적으로 어머니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두 번이나 안겨준 꼴이었다.
내가 저지른 행위 자체가 어머니를 염두에 두고 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낙영이만 생각했었지 애당초 나는 어머니를 거의 생각하지도 배려하지도 않았던 거다.
그래서 마음이 아플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죄송할 따름…
하지만 그날 불안해 하시는 어머니께 나는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해야 했다.
“괜찮아요 엄마, 앞으로도 계속 같이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이제 그만…”
그것이 사실은 너무나도 괴롭고 어려웠다.
“정말이지? 그 말이 정말이지?”
하지만 몇 번이고 확인하려 드시는 어머니였기에 수도 없이 그것을 반복해야 했다.
결국에는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할 것인데도 계속 거짓을 말해야 했던 거다.
나는 정말 나쁜 딸이었다.
어쩌면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한 업보일지도 모른다.
……………………………
다음날 아침…
다름아닌 오늘에 해당하는 아침이다.
창 밖의 내리는 빗줄기가 따사로운 아침의 햇살을 대신하고 있었다.
어제와 그다지 다를 것 없는 풍경...
그에 반해 전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해져 버린 나의 몸이었다.
‘이제 누가 보더라도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어렴풋이 나마 내가 곧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날 나는 학교에 가려는 생각을 깨끗이 접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속 집에 있을 수도 없는 노릇...
전날 밤 모처럼 이라며 내 옆에서 잠이든 어머니였으니까.
‘그런 어머니가 일어나서 지금의 내 모습을 보신다면…’
생각이 그렇게 되자 서두르듯 집을 빠져 나와야 했다.
결국 내가 마지막으로 확인한 어머니의 모습은 불안과 안도 섞인 얼굴로 잠이 드신 모습이었다.
……………
사납게 내리치는 비...
쉽사리 그칠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내일까지 존재할런지는 불분명하지만 어쩌면 지금 내리는 비는 내일하고 그 다음날까지 지속될지도 모른다.
아니, 비록 얼마 안 가 멈추고 그치겠지만 언젠가는 다시 내리기 시작하겠지.
왠지 모르게 분하고 슬픈 생각이 들어버린다.
그리고 이내 그 영원의 존재에 나의 몸을 맡긴다.
차갑다 못해 몸이 시릴 정도지만 그걸로 된 것이다.
어차피 우산도 없이 나선 집이었다.
‘이제 곧 없어져 버릴 사람한테는 없어도 되는 것이니까…’
그래서 굳이 챙기고 나올 필요도 못 느꼈다.
오히려 아무것도 들지 않는 편이 걷기도 편할 것 같다.
그리고 이제는 비를 피해야 한다거나 보다는 어디로 가야 할지를 생각해야 했다.
‘이제 어디로 간다...?’
집을 나서긴 했지만 딱히 정해진 목적지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나마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자는 생각 정도가 들었을 뿐…
그렇게 빗속에서 몇 시간이나 이리저리 헤맨 끝에 가까운 공원에 도착했다.
평소에도 한산할 오전 시간의 공원…
공원 중앙을 차지한 연못의 주위를 한 바퀴 빙 돌았다.
연못에 고인 물에선 떨어지는 빗방울에 의해 수도 없이 동그라미가 그려졌다 사라지곤 한다.
아무런 의미도 부여 받지 못할 하찮은 광경…
하지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기에 소중했다.
그것을 넋이 나간 듯이 바라보다가 이내 질려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곧 질서정연하게 그 주변에 놓여진 공원의 벤치들에 시선이 멈추고…
일단 그 중 하나를 골라 앉았다.
평소에는 상상도 못했을 행동…
왠지 우스운 생각마저 들어버릴 정도다.
하지만 뒤집어보면 그것이 마지막이라는 전제 아래 벌어진 행동이어서 마냥 웃을 수 만은 없었고...
그새 슬프고 서글픈 생각이 들어 차가운 비의 감촉에 모든 신경을 돌리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고 보면 비가 내리는 덕분에 그나마 있을 법한 사람들도 없을 따름이었다.
정말 잘 된 일…
이곳에 있으면 되겠구나 싶었다.
사람과 마주치는 게 두려운 지금 아무도 없는 이 장소가 나에게 걸맞았다.
그렇게 앉았던 벤치에서 하염없이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었다.
꽤 피곤했었나 보다.
비단 그것만이 아니더라도 내 마음은 이미 충분히 지쳤으니까…
이제는 편히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잠을 잘 공간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잠이 들어 버렸다.
시간이 지난 후…
“이봐요, 괜찮은 거에요?”
나를 흔들어 깨우는 사람이 있었다.
덕분에 얼마만큼이나 잠을 잔 건지는 모르겠지만 벤치의 딱딱함을 느끼며 깨어야 했다.
시커먼 먹구름과 어둠이 뒤섞여진 하늘…
이미 주위는 어둑어둑한 것이 영락없는 밤이었다.
하지만 비는 그 새기가 조금 약해졌을 뿐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여기서 잠들면 큰일나잖아요”
그리고 나를 깨운 사람…
우산 너머로 힐끔 보여진 모습은 내 또래의 소녀였다.
우연히 길을 지나다가 나를 발견한 모양이다.
어쨌든 비상식적인 나의 행동을 다그치기에 바빴다.
“어째서 여기에서 비를 맞고 있는 거죠?”
보통 깨우기만 하고 그냥 지나칠 법도 한데 질리도록 따지고 있다.
그에 반해 나는 나대로 딱히 이렇다 할 말도 없어서 벙어리마냥 침묵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 또래의 소녀…
대강 짐작되는 키도 나와 비슷할 것 같다.
이내 그녀를 보면서 알 수 없는 복잡한 기분에 휩쓸렸다.
‘어째서 나는 그때 죽은 걸까…
내가 만약 죽지 않았더라면…’
지금까지 지속되어온 거짓된 일상.
그것이 싫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너무 짧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어째서 나는 짧게 지속된 거짓을 구해야만 했을까.
내 또래의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데…
어째서 나 하나만…
그 이유를 거슬러 올라갔지만 내가 죽었다는 사실 하나에 부딪칠 뿐이었다.
이러고 보면 그 사실 하나가 한없이 억울하다.
‘내가 그때 죽지 않고 살았더라면…
지금의 나는 어떠한 삶을 살고 있을까.’
한동안 이런저런 생각에 가려 바로 앞에 서있는 여자의 말을 흘려 들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던 중…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가장 듣기 곤란한 말을 들어버린 듯 했다.
이제 나에게는 돌아갈 집 따위는 없으니까.
집으로 돌아갈 수는 있어도 차마 어머니를 마주 대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지금의 내 몸은…
“자, 이제 그만 일어나야죠.”
내가 들은 척도 안하고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자 못 기다려주겠다는 마냥 내 팔을 잡아 일으키려 한다.
아마도 상당히 적극적인 성격인가 보다.
하지만…
“에…? ”
잡았던 팔에 가있을 시선이 이내 몸의 이곳 저곳으로 이어진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뻔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몸이…”
가장 두려운 사실이 들추어지려 했음을 직감했다.
그것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결국 그녀의 말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그녀를 밀치고 도망치듯이 그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
숨이 차서 쓰러질 정도로 달린 것 같다.
그나마 공원 주변을 두르고 있던 나무들 사이를 지났던 기억이 있을 뿐…
정신 없이 뛰었던 터라 내가 어디를 향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는 생전 와본 적도 없는 숲 속의 어딘 가였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에 이른다.
달도 없이 시커먼 구름의 하늘…
아귀처럼 쏟아지는 빗줄기…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
그것에 흐트러지는 나뭇가지며 나뭇잎 소리…
그리고 그 안에서 헤매는 나란 존재…
어쩌면 지금의 내가 내딛는 한 발짝 한 발짝의 발걸음 조차도 무의미한 것일지 모른다.
사실 이 숲을 빠져나가야 한다거나 하는 생각 따위는 없으니까.
내가 왜 쉬지 않고 무작정 목적도 없이 걷고 있는 줄을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를 생각하기에는 얼마 남지 않았을 시간들이 너무나도 아깝겠지…
머리 속에서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이 한 장면 한 장면 슬라이드처럼 지나가곤 한다.
즐겁고 행복했던 일…
슬프고 괴로웠던 일…
이제 와서는 한낱 오래된 추억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사람은 대체 누구였을까’
오후의 햇살을 받아 찬란히 빛나던 금발 머리의 여자…
문득 그녀에게로 생각이 멈춰져 버렸다.
결국 나는 마지막까지 그녀의 존재를 알지 못할 운명인가 보다.
일전에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적이 있었지만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생각해보면 그때가 유일한 기회였던 건데…
‘지금에라도 만난다면 물어볼 수 있을까?’
아무리 그래도 이제는 불가능한 것이겠지…
우연이 아닌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런 일은….
하지만 다음 순간…
“다행이네요, 아직 있어서”
분명히 낯선 목소리였지만 처음 듣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친숙하다는 느낌마저 들어버릴 정도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방금 까지 생각한 사람의 목소리…
“하늘에서 여기 있다는 기척을 잡아냈지만 몇 시간 전이었거든요.”
정체 불명 수수께끼 금발의 여자…
다름아닌 그 사람이니까…
그것을 깨달은 순간 나도 모르게 이유 없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저, 사실은… 오래 전에 당신을 본 기억이 있어요”
그리고 이제는 궁금했던 사실을 물을 수 있다.
곧 끝나니까.
이제 마지막이니까.
“저도 오래 전에 낙영이로부터 당신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어요.”
쓸쓸한 어조의 목소리…
츄스스…
그녀의 말에 동조라도 한 듯이 주위의 나무들을 가볍게 스치고 간 바람이 있었다.
‘역시 알 수 없는 사람…’
어느새 나에게로 다가와 들고 있던 우산 안으로 나를 잡아 이끈다.
하지만 힘이 없던 탓인지 스스럼 없이 당겨진 몸이 균형을 잃고 부자연스레 그녀에게로 기대어진다.
하지만 이내 자세를 가다듬고…
“당신은 대체 누구죠?”
“아르샤 라고 해요, 당신은?”
내가 한 질문의 의도를 잘못 짚었는지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름을 말할 뿐...
그녀의 대답을 듣는 순간 몸에서 맥이 탁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솔직히 그다지 만족할만한 정도의 것은 아니었던 거다.
수많은 의문에 비해 이제 와서 얻은 것은 고작 그녀의 이름…
하지만 더 이상 캐묻거나 할 용기 같은 것도 없었다.
괜스럽게 그녀의 기분을 불쾌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하세현 이에요.”
그저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나의 이름 정도만 밝힐 따름이었다.
비록 그것이 그다지 의미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진 않았지만…
그러던 중 그녀를 보다 보니 문득 낙영에게 생각이 미쳤다.
“낙영이는 지금…”
그래서 그녀의 표정을 찬찬히 살피며 조심스레 말을 꺼내려 들었다.
그녀가 낙영이에 관해서는 각별하기 때문이다.
“지금쯤 잠들었을 거에요”
하지만 내 말이 채 완성 짓기도 전에 가로채듯이 말을 막아버린 그녀였다.
아마도 내 입에서 그러한 말이 나올 것을 알고 있었나 보다.
그도 그럴 것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온 답변이다.
“그렇군요…”
그럴 리는 없겠지만 어쩌면 한번 더 낙영이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너져버린 지금…
새삼 서글픈 생각마저 들어버린다.
결국 나는 마지막 까지도 낙영이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
나란 존재는 정말 어찌할 도리가 없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자, 이걸 받으세요”
그런 나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가 나에게로 건넨 물건…
탁상 시계였다.
“뭐죠?”
“이걸 안고 당신의 생각을 정리하세요.”
“… …?”
영문도 모른 체 일단은 그녀에게서 시계를 건네 받았다.
흉하게 깨져나간 앞면의 유리…
엉망으로 부서져 버린 귀퉁이…
받고 나서 알았지만 평범하다고 보기에는 너무 엉망인 물건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녀가 이것을 나에게 건넨 이유가 이해되질 않았다.
“지금의 당신의 심정을 그것에 담아 낙영이에게 전해주겠어요.”
설명은 그러했지만 나로써는 도무지 이해 불능…
하지만 이내 긍정하기로 했다.
그녀가 시키는 대로 해서 나쁠 건 없을 테니…
게다가 그녀의 표정이 진지하기만 하다.
결코 장난이라거나 허튼 짓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거다.
“그래요... 그럼 저도 보답을 해야겠네요”
“괜찮아요, 보답 같은 건…”
딱히 줄만한 물건은 없었다.
내가 그녀에게 건넨 것은 어젠가 낙영이가 사준 머리핀 이었다.
그래서 더없이 소중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어차피 저한테 있으면 필요 없어질 물건이에요, 그러니까…”
인정하기는 싫지만 어쩔 수 없는 사실...
말 그대로 조만간 사라져버릴 나에게는 필요 없는 것이었다.
“고마워요, 예쁜 머리핀 이네요”
나를 바라보는 슬픈 눈동자…
쓸쓸한 시선…
그녀 역시 내 말의 의미를 헤아린 모양인지 더 이상 여러 말 않고 머리핀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그때 마음속으로나마 그녀에게 부탁하고 있었던 거다.
‘앞으로 낙영이를 부탁합니다.
저를 대신해서 항상 낙영이 옆에 있어주고 지켜주세요.’
내가 조금의 용기만 더 있었더라면 그녀에게 직접 말을 하였을 테지만…
소심하고 겁쟁이인 나는 이렇게 마음속으로 간절히 외치는 정도였다.
‘그래도 다행이야, 내가 없더라도 그녀가 있으니까…’
우산을 때리는 소리가 아까보다 요란해졌다.
한층 더 강해져 버린 빗줄기…
나는 그녀가 일러준 대로 건네 받은 탁상 시계를 가슴에 안았다.
어느 샌가 새하얀 빛이 내 주변을 둥그렇게 감싸고 있었다.
이내 눈을 감자 수많은 생각들이 교차 하고…
특히나 낙영과의 추억들이 계속해서 떠오르는 가운데 온갖 슬픔이며 안타까움 들이 물밀듯이 밀려들어 왔다.
‘이대로는 안돼…’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의 내 심정 그대로가 낙영에게 전해져 버린다.
하지만 나는 나로 인해 낙영이가 슬퍼한다거나 괴로워하는걸 원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나는 슬픈 생각이 떨어져 나가도록 안간힘을 써야 했다.
오로지 즐거웠던 추억…
그것만을 떠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당신을 만나서 행복했습니다.
비록 결말은 이렇지만…
저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서서히 서서히 멀어져 가는 의식을 느꼈다.
피곤해서 잠이 밀려드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나는 직감했다.
다음 순간 모든 것이 끝난다고…
그래서…
‘행복했어요… 그러니까 이제 안녕…’
그렇게 마음속으로 서둘러 작별을 고해야 했다.
너무 갑작스럽고 빠른 이별...
그래도 마지막 순간, 혼자가 아니라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비록 그 사람이 아직까지도 의문 투성인 존재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