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5월17일에 비상계엄 강화조치를 취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하여
5월초부터 눈에 띄게 발생한 학생시위는 5월15일 서울역 앞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서울역의 10만시위대가 보여준
폭동은 규모로 보나 폭력의 극렬함으로 보나 국가안보의 기강을 흔드는 것이었고, 경찰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시위가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진다면 국가는 그야말로 치안부재의 무정부상태로 돌입할 것임은 누구의 눈에나 자명한 것이었다. 더구나 휴전선 이북에는
남한을 무정부상태로 몰아가기 위한 공작을 멈추지 않는 북한이 있었다.
당시 시위정국을 주도하던 국민연합과 전국총학생연합회는
5월22일 정치권과 학생계를 연결하여 자기들의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으면 전국적인 폭력시위를 벌여 국가를 전복시키겠다는 협박을 가하면서 정부에
최후통첩까지 보냈다. 이에 최규하 대통령이 중동외교 순방길을 멈추고 긴급히 돌아와 비상계엄전국확대를 결심하게 됐다. 재판부의 판결에는
5월22일의 전국적 봉기는 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이므로 계엄군이 나서서 막지 말았어야 한다는 의미가 함축돼 있다. 재판부는 5.17
전국비상계엄선포 조치에 대해여는 사법부가 나서서 그것이 당연했다 아니었다 하고 따질 문제는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그 비상계엄전국화대
조치를 내란음모를 추진 중인 전두환 일당이 취한 것이기 때문에 내란행위라고 했다. 결론적으로 재판부는‘5.17비상계엄전국확대’그 자체가 폭동이고
내란이라고 판결했다. 5.17조치를 취했을 당시 전두환의 마음속에는 이미 집권야욕이 들어있었기 때문에 5.17이 내란이라는 뜻이다. 증거와
법리로 재판한 것이 아니라 관심법으로 재판을 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는 대목인 것이다.
“내란죄는 폭동을 전제로 하고,
폭동은 폭행 또는 협박을 전제로 한다. 외포심(공포심)을 생기게 하는 것도 협박이다. 비상계엄전국확대는 민간인인 국방부장관, 국무총리,
국무회의의 기능을 배제하는 것이어서 국무위원들을 협박하는 행위이고, 폭동이며 내란행위”라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법조인들과 상식인들이 여기에
동의할지 참으로 알고 싶어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2) 신군부가 집권의 명분을 마련하기 위해 광주사태를 의도적으로 야기
시키려고 계엄군의 발포를 배후에서 지휘했다는 주장에 대하여
신군부가 집권의 명분을 사회소요에서 찾으려 했다면 5월22일의
가공할 봉기가 발생하도록 방치한 후, 5월22일에 소요가 발생하면 그것을 계기로 전국비상계엄을 선포하는 것이 더 쉬웠을 것이다. 구태여 가만
두면 소요가 발생할 텐데 그것을 5.17비상조치로 차단한 후 새롭게 광주소요를 힘들게 만들어 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집권을 원하는 세력이라면
국민의 호응을 얻어야 한다. 그런데 신군부는 거꾸로 국민의 원성을 살 수 있는 광주사태를 의도적으로 야기시켰다는 것이다.
당시
정부는 국가의 중심지인 서울에서 대규모로 발생한 극렬시위에 초미의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5월22일에 계획됐던 전국시위에 대해 주목하고 있었지,
광주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이에 따라 5.17에 따른 계엄군 배치에 있어서도 수도권에 치중돼 있었다. 병력 13,773명, 장갑차
123대가 수도권에 집중 배치됐고, 부산, 경남지역에는 병력 2,508명, 장갑차 2대, 경북지역에는 병력 2,251명, 장갑차 21대,
강원지역에 병력 1,261명, 장갑차 10대, 충청지역에는 병력 1,100명을 배치한데 반해 광주지역에는 겨우 7공수 2개 대대 688명만
배치했다. 광주에 배치한 계엄군 병력수가 가장 작았으며 그 규모는 다른 지역에 비하면 비교조차 안 될 만큼 현저하게 작은 것이었다. 광주사태를
의도적으로 야기하려 했다면 불과 688명을 배치할 것이 아니라 6,000명 정도를 배치했어야 말이 될 것이다.
또한 광주에서의
작전은 정식 지휘계통에서 주도한 것이다. 신군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으며 신군부가 정식 지휘계통에 개입한다는 것은 군의 상식으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마타도어에 불과하다는 것이 필자의 시각이다. 계엄군의 발포를 배후에서 지휘한 사람이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었던 위급상황에서 장병들은 정당방위를 위해 발포를 했을 뿐이다. 군인이 국가임무를 수행하는 과장에서 생명에 위협을 가해오는 존재가 있다면
정당방위를 해야 하며 그 정당방위의 수단은 발포인 것이다. 발포에는 실탄이 필요하다. 빈총으로 발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세상에 실탄을 주지
않고 보초를 서라 할 지휘관은 없다. 국가의 주요 전략목표를 지키라 하면서 실탄을 주지 않는 지휘관도 없다. 살인무기를 가지고 벌이는 폭력시위를
빈총으로 진압하라는 지휘관도 없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광주에서 발포를 명령한 사람은 없어도, 발포를 유도한 사람들은 많다. 바로
살인적 차량돌진을 연출했던 사람들, 불타는 짚단을 장갑차 속에 집어넣으려 한 살인미수자, 광주교도소를 6차례씩이나 공격한 사람들, 그리고
5월20일 오전과 밤중 2차에 걸쳐 총 26정의 카빈총을 탈취하여 발사하고 다녔던 사람들인 것이다.
3) 전교사령관 윤흥정이나 31사단장 정웅의 요청이 없었는데도 특전사 병력을 증파한 것이 부당하다는 주장에
대하여
7공수여단의 광주출동은 광주를 포함한 후방지역 계엄분소장인 진종채 2군사령관의 특별건의에 다른 것이었다.
1980년5월에 들어서면서 부산, 대구, 대전, 광주, 전주 지역에 학생사태가 점점 악화됨에 따라 진종채 사령관은 5월7일, 포항의 해병사단과
전북 금마의 7공수여단을 후방지역 소요진압 작전에 투입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계엄사령관에 건의했다(1980.5.7자 ‘소요사태진압준비상태
점검결과’).
광주에서의 학생시위는 그 후 확산되어 5월14일에는 2천여 명이 계엄해제를 요구하며 가두시위를 벌였고,
5월15일에는 전남대, 조선대, 전문대 7,000여명이 도청 앞에서 가두시위를 벌였다. 5월16일에는 전남대, 조선대등 1만 여명이 도청 앞
광장에서 시국성토 대회를 가진 후 비상계엄 해제 정치일정 단축 유신잔당 퇴진 등의 구호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전개했고 야간에는 고교생들까지 합세한
1만5천여 명의 군중이 횃불시위를 벌였다.
광주시 계엄당국은 5월16일에 1천여 명의 경찰을 시위 진압에 출동 시켰으나 광주는
완전히 치안마비 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저녁에는 KBS와 MBC, 전일방송국 등의 경비를 위해 31사단 병력을 급파 하였다. 광주소요가 이처럼
심각해짐에 따라 계엄사령관은 2군사령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5월18일에 특전사 7여단을 2군에 배속시켜 줬다. 또한 특전사 11여단, 3여단,
20사단의 출동도 광주의 소요 사태가 확대됨에 따라 계엄사령부가 2군사령관과 협의를 거친 후 결정한 일이였다. 그리고 계엄사령관은 계엄군을
출동시킬 때마다 청와대와 국방부장관에게 즉시 보고했다. 이 과정에서 소위 신군부 세력은 전혀 관여 할 수 도 없었고 관여한 바도 없었다는 것이
필자의 분석이며, 장교들이라면 모두가 가지고 있는 상식일 것이다.
각 지역별로 계엄군을 얼마씩 파견할 것인가는 그 지역에 보호해야
할 주요 국가시설들이 얼마나 있는지 그리고 각 지역별 상황이 어떠한지를 놓고 병력을 통제하는 계엄사에서 소위 자원배분(resource
allocation) 차원에서 판단하는 것이다. 말단 사단장이 우리는 필요 없다고 해서 안 할 일이 아닌 것이다. 계엄군을 얼마나 증파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병력자원을 배분할 권한이 있는 계엄사에서 판단할 일이다. 예하 지휘관들은 단지 건의를 할 수 있을 뿐이다. 위와 같은 주장은
군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허무맹랑한 주장이거나 영혼을 팔아버린 사람들의 거짓말일 것이다.
4) 통신두절로
작전지휘권이 이원화되어 정웅이 지휘하지 못했다는 주장에 대하여
광주지역 진압작전을 지휘한 정웅 31사단장과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은 1988년12월에 있었던 국회특별위원회 증언 과정에서 광주지역 시위 진압작전 당시 특전사 3개 여단이 가지고 있던 무전기와 31사단 및
전교사가 가지고 있던 무전기는 주파수가 상이하기 때문에 교신이 어려워 출동부대를 직접 지휘할 수 없었고 자기들은 온건진압 작전을 지시했는데도
출동부대들이 강압진압 작전을 수행했다고 진술함으로서 과잉 진압이 자기들의 책임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군에서는 작전배속이 밥 먹듯이 이루어진다. 자기 휘하에 들어오는 피 배속부대에 대한 통신수단 확보는 작전지휘권자의 기본임무다.
따라서 3개 여단과의 통신 교신이 불가능 했다면 이에 대한 책임은 정웅 사단장과 전교사 사령관에 있는 것이다. 도대체 이 세상에 어떤
작전지휘관이 예하부대와의 통신대책을 확보하지 않은 채 작전을 수행한다는 말인가? 통신수단이 있어야 부하들에게 명령도 내리고 상황보고도 받을 것이
아닌가? 따라서 작전지휘관이 작전명령을 하달할 때에는 작전 중에 사용할 통신기의 주파수를 명시하도록 시스템이 짜여있다. 위 주장대로라면 이 두
호남출신 지휘관들은 기본적인 작전지식도 없고 시스템과 책무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병장과 소위에게도 이런 정도의 상식은 있을
것이다.
또한 특전사 2개 여단의 본부들은 각기 전남대와 조선대의 학훈단 사무실에 있었다. 그 곳에는 상무대 군용전화가 가설되어
있었다. 따라서 특전사 2개 여단장들과 31사단장 및 전교사 사령관 사이에는 유선전화도 개통되어 있었다. 또한 특전사 2개 여단장들은 전교사
상황실에 연락장교를 파견해 놓고 있어서 상황보고나 작전지시 전달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여단장들도 수시로 31사단장과 전교사 사령관을
방문하여 작전상황을 논의 했다. 따라서 통신이 여의치 않았다는 주장은 참으로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억지로 보인다.
정웅
사단장은 5월19일 작전회의에서 11여단장, 7여단의 33및 35대대장에게 무혈진압을 지시 했는데도 공수여단장들이 강경진압을 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군의 시위진압 작전지시에는 무혈진압, 유혈진압, 강압진압, 온건진압이라는 용어 자체가 없다. 당시 31사단 작전 보좌관인 임정복은
89년1월26일 국회특별위원회 증언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5월19일에 하달한 작전명령은 내가 직접 작성한 것입니다. 그 작전
명령은 정상적인 충정작전명령이지 무혈진압 작전명령은 아니었습니다. 만약에 사단장이 나에게 무혈진압 작전명령을 작성하라고 지시하였다면 이 상황은
상당히 중요한 상황이기 때문에 작전명령을 작성하는 구성요소 중에서 가장 중요한 지휘관의 작전개념에 집어넣어야 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세부지침을
별도로 만들어서 하달해야 하는데 내가 그런 명령을 작성한 기억이 없고 5월17일부터 5월27일 사이에 내가 작전명령을 수차례 작성할 때 유혈진압
작전 명령이네 무혈작전 명령이네 하는 말을 쓴 기억이 없습니다. 또 군대상식으로 볼 때 사단과 같은 큰 부대의 문서화된 작전 명령에 오늘은
무혈진압을 하라, 내일은 유혈진압을 하라 하는 말을 쓴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곤란 합니다. 이는 한마디로 정웅의 증언이 허구라는 것을
말해줍니다”(1989.1.26 국회 5.18광주민주화 운동 진상조사 특별위원회 제25차 회의록 35-36쪽).
더구나 정웅은
5월18일 7여단 33및 35대대를 방문하여 ”목숨을 걸고 시위를 진압하고 주동자를 체포하라“고 지시한바 있다(1988.12.20 국회 5.18
광주민주화 운동 진상조사 특별위원회 제20차 회의록 126쪽). 또한 정웅은 출동 부대장들에게 거점 경비를 철저히 하여 도심지에 시위군중이
집결하지 못하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여기에는 지위군중을 물리력을 동원해서라도 시위를 저지하라는 강한 뜻이 포함돼있는 것이다.
5) 북한의 남침위기를 의도적으로 조작했다는 데 대하여
10.26이후 정부는 우방국들로부터 여러 차례
남침정보를 입수했고, 10.26 당시 대부분의 국민 역시 남침야욕을 가장 우려했다. 이런 시기에 중앙정보부가 일본으로부터 남침정보를 입수했다.
안보에 가장 민감해 있는 이 시기에 이를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는다는 것이야말로 매우 위험한 직무유기인 것이다. 당시 대통령은 중동에 가고
없었기에 대신 신현확 총리에게 보고한 것이다. 계엄당국은 민심의 동요 때문에 이를 국민에게 알리지 않았다. 남침위기를 의도적으로 확산하려 했다면
곧바로 이를 국민에 알려 여론의 지지를 이끌어 내려 했을 것이다. 또한 전두환 중앙정보부장서리는 이 정보를 액면그대로 신뢰할 바가 못 된다고
보고했지 부풀리지 않았다. 또한 이 정보를 가지고 시국을 위험하게 부풀려 악용한 증거는 없다. 당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도록 강요한
핵심요인은 무법천지로 달려가는 대규모 시위와 5월22일을 기해 전국적 민중봉기를 감행하겠다는 김대중의 최후통첩 때문이었지, 남침정보 때문이
아니었다.
6) 계엄군의 출동이 신군부세력에 의해 불법적으로 취해진 조치라는 데 대하여
계엄사는
5월17일 1900시 전 계엄군에게 관할지역의 모든 중요대학 및 국가시설에 계엄군을 투입할 준비를 갖추라 지시했고, 5월18일 새벽2시를 기해
전국 136개 주요시설과 31개 주요대학에 계엄군 2만5천명을 배치했다. 그런데 고소인들은 5월18일 0시 이전에 출동명령을 하달한 것을 들어
신군부가 대통령의 승인을 받지 않고 행한 불법조치라고 주장했다.
79년10월27일에 선포한 계엄은 제주지역을 제외한 지역계엄이고,
5월17일의 전국비상계엄은 제주도까지를 포함한 것이다. 지역계엄과 전국계엄의 차이는 단순하다. 지역계엄에서는 계엄사령관이 국방장관의 지휘감독을
받는 것이고, 전국계엄에서는 계엄사령관이 국방장관과 국무총리를 뛰어넘어 대통령의 직접적인 지휘감독을 받는다는 것만 다를 뿐, 계엄사령관의 권한은
지역계엄 하에서나 전국계엄 하에서나 동일한 것이다.‘지방계엄’하에서의 지취체계와‘전국계엄’하에서의 지휘체계는 5월17일을 기해 새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예전부터 규정돼 있던 지휘체계였다. 제주도를 계엄구역에 포함하느냐 또는 제외하느냐의 차이가 아니고, 계엄사령관에 대한 통제를
국방장관이 하느냐 또는 대통령이 직접 하느냐에 대한 차이인 것이다. 전국계엄 하에서는 지휘체계에서 총리와 내각이 바이패스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계엄업무에 대해 생소했을 당시 신현확 내각의 마음이 상한 것이고, 그래서 5월21일에 총사퇴를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전국계엄 하에서도 대통령, 국무총리, 국무위원들의 기능은 그대로 유지됐다. 그런데 어째서 전국계엄을 구태여 선택했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아주 긴급을 요하는 사항에 대해, 그리고 보안을 매우 요하는 사항에 대해 결재과정을 대폭 줄임으로써 급박하게 돌아가는 위험시국에 속도 있게
대처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경우를 상정했기에 전국계엄 하에서의 지휘체계가 옛날부터 규정돼 온 것이고, 5.17조치는 이미 규정돼 있던 그
규정을 선택했을 뿐인 것이다. 시간은 급박한데 국방장관을 거치고 총리를 거쳐 대통령에 가게 되면 이미 버스는 지나가 버리는 것이다.
또한 시급히 취해야 할 조치에 대해 국방장관이 시비를 걸 수 있고, 계엄업무에 생소한 국무총리를 설득하려면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추가해야 한다. 어차피 한국에서의 국무총리는 군대의 부지휘관처럼 곁가지요 상징적인 존재였다. 그래서 국무총리를 대독총리라 했던 것이다. 청와대
비서실이 써준 원고를 대통령 이름으로 읽는다는 뜻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긴급 업무와 고도의 비밀 업무 그리고 고도의 판단을 용하는 업무에
개입한다면 시간만 지체되고 비밀이 누설되어 일을 그르치게 하고 일하는 사람들을 지치게 만든다. 그래서 계엄법을 그렇게 제정했던 것이다. 따라서
“지역계엄으로도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었는데도 구태여 전국계엄으로 확대한 것에는 집권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은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주장인 것이다.
계엄사령관은 지역계엄이든 전국계엄이든 지역 내의 행정과 사법을 관장하고 계엄군법회의를 운영하고 계엄군 운용을
포함한 특별조치들을 취할 수 있다(당시 계엄법 5조, 11조, 13조 14조, 16조). 따라서 계엄사령관은 전국비상계엄선포와 상관없이 계엄군에
대한 출동명령을 내릴 수 있는 것이었으며, 이는 대통령의 승인 사항이 아니었다. 또한 최규하 대통령은 전국비상계엄선포를 결정한 다음 5월17일
17시에 신현확총리에게 임시국무회의를 소집하라고 지시했다. 계엄군 출동명령을 내린 것은 이로부터 2시간 후인 19시였다(육본작명 제18-80).
그리고 계엄군 배치는 18일 새벽 2시였다. 또한 이희성 계엄사령관의 계엄군 출동명령은 이미 사전에 대통령과 국방장관의 승인을 득한 것이었으므로
군통수체계를 따른 적법한 행위였다. 이는 불법도 아니며 신군부가 개입할 수 있는 성격의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계엄군 출동이 불법이었다는
주장은 그야말로 생트집으로 보인다.
7) 계엄군이 국회를 점거 봉쇄했다는 주장에 대하여
고소인측은
계엄군이 황낙주 의원 등 300여명에 대해 출입을 저지하고 국회를 봉쇄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전국비상계엄이 선포되면 군부대에는 사전에 계획돼
있는 주요 국가시설에 대해 자동적으로 출동하여 경비임무를 수행하도록 되어있다. 수도권에 위치한 33사단에는 국회의사당, 송신소, KBS,
경인에너지, 인천항만. 인천교도소, 인천유공, 호남정유, 부평발전소, 선인학원, 서울농대 인천대 등 13개 시설에 대한 경계목표가 주어져
있었다. 국회의사당에는 33사단 101연대 제3중대 129명이 5월18일 오전 8시30분에 출동했다. 이들의 임무는 시설의 경비이지, 출입을
봉쇄하는 것은 아니었다. 시설을 경비하기 위해서는 불순 출입자를 막아야 하기 때문에 국회에서 출입을 인정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만 출입을
허용했다.
5월20일, 신민당 국회의원 황낙주와 신민당 평당원 37명 그리고 300여명의 기자들이 국회의사당 정문에 몰려왔다.
자료에 의하면 당시 황낙주 의원은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병사들로서는 신분을 알 수가 없었다한다. 더구나 혼자만 들어가려는 게
아니라 300여명의 군중을 인솔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누구라도 허락할 수 없는 성격의 것이었다. 이는 계엄포고 제1호에도 어긋날 뿐 아니라
평상시의 국회출입규정에도 어긋나는 것이었다. 출입이 저지되고 있던 10시40분경, 민관식 국회의장직무대행이 현장에 나와 상황을 파악했고 그 결과
그는 신민당 당원들의 집단행위가 부당했음을 지적하면서 해산을 종용했다(육본작전상황실,‘5.20.수도권부대이동상황보고’중‘신민당국회의원동향’).
이를 놓고 고소인들은 신군부가 국회를 점거 봉쇄하여 5월20일 개원하도록 되어 있던 임시국회를 무산시키기 위해 병력을 출동시킨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5월20일로 예정됐던 임시국회가 개원되지 않은 것은 병력 출동 때문이 아니라 민관식 국회의장대행을 위시한 정치권의 결정이었다.
8)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범죄사실이 조작되었다는 주장에 대하여
김대중에 대한 내란음모
및 계엄법위반 혐의사실은 1980년5월17일에 수사기관에서 수사를 개시하여 적법한 공소가 제기됐고, 육군본부 계엄고등군법회의와 대법원에 의해
유죄가 인정됐다. 이를 뒤엎겠다는 것은 일사부재리 원칙을 규정한 헌법을 뒤엎겠다는 것이다. 고소인들의 주장에 절제와 한계가 없는
것이다.
9) 국보위가 사실상의 혁명위원회라는 주장에 대하여
고소인측은 신군부세력이 전국비상계엄으로
행정과 사법 사무를 장악하고 다시 국보위를 설치하여 내각의 권한을 박탈했기 때문에 국보위를 사실상의 혁명위원회라고 주장한다. 이 역시 억지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대통령과 장관을 자문하기 위해 400여개의 각종 위원회가 설치돼 있는 것처럼 당시의 국보위도 대통령을 자문하기 위한 이런
종류의 위원회였다. 국보위는 대통령 직속기구로 설치되었고, 위원들은 대통령이 직접 임명했다. 계엄 하에서도 대통령, 국무총리, 국무위원들의
기능은 그대로 유지됐고, 대통령은 국보위의 자문과 보좌를 받아 내각을 통해 국정을 폈다. 국보위가 내각을 대신한 것이 아니었다. 국보위는 민간
출신 대통령으로서는 생소한 비상계엄 하에서 대통령을 효과적으로 보좌하기 위해 설치된 매우 건설적인 위원회였지 혁명위원회 하고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김재규가 박대통령을 살해한 후 시도했던 것이 바로 혁명위원회였던 것이다. 국보위는 최규하 대통령을 위해 존재했다. 최규하 대통령이
혁명위원회를 운영했다는 것인지 도대체 그 뜻을 헤아릴 수 없다.
10) 신군부의 집권시나리오에
대하여
고소인측은 신군부가 처음부터 집권시나리오를 가지고 12.12로부터 5.17, 5.18을 위시하여 대통령에 취임할
때까지의 모든 조치들을 의도적으로 취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필자의 눈에는 집권시나리오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중앙정보부장서리의 겸직,
전국비상계엄확대, 계엄군출동, 국보위 설치 등은 그 어느 것이나 당시 집권세력인 대통령, 내각 그리고 계엄당국의 승인이 없으면 절대로 실현
불가능한 것이다. 또한 전국 비상계엄 확대 조치는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자의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 위기상황이 존재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당시 대통령, 총리, 내각, 계엄사령부 중 그 어느 존재도 신군부 세력에 지배하에 있지 않았다. 이런 상황 하에서 소수의 신군부 세력이
집권 시나리오를 구상하다는 것은 상상 밖의 일이다. 집권 시나리오에 가장 핵심적 내용은 전국비상계엄선포와 국보위설치였고, 이 두 가지의
전제조건은 극심한 사회혼란이었다. 만일 집권 시나리오가 있었다면 신군부 세력은 의당히 혼란사태를 조장하고 방관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 그러나
신군부 세력은 오히려 정치권의 선동으로 조성된 학생 소요를 진정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내란은 국가의 기본질서를 파괴하는
생사를 건 범죄다. 따라서 내란에 모의는 극비리에 이루어지고 그 집행 과정은 폭동이라는 거사를 통하여 집권세력을 일거에 제거하는 것이 고금동서의
패턴이다. 신군부가 내란을 꾀했다면 최규하 정부를 폭동에 의해 뒤엎었어야 했다. 하지만 신군부는 폭동을 일으킨 바도 없고, 정권을 뒤엎은 일도
없다. 오직 온갖 아이디어를 짜내서 최규하 대통령을 모셨을 뿐이다. 그래서 최규하 대통령은 전두환에게 반말을 사용할 만큼 가까이 했다. 전두환은
5월22일을 기해 전국 폭동을 일으켜 최규하 정부를 뒤엎으려는 김대중 등 국민연합과 전국학생회의 기도를 사전에 분쇄한 최규하 정부의 충신이었다.
이를 놓고 “대통령의 승인을 전제로 한 다단계 내란시나리오”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협지에서다 나옴직한 괴변이라고 생각한다. 정말로 5월22일의
폭동을 통해 과도정부를 전복하려 했던 김대중에게는 죄가 없다 하고, 그 내란의 기도를 제압한 애국자에 대해서는 내란세력이라 하는 것은 국가의
정체성이 바뀌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11)전두환의 중앙정보부장서리 겸직이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정치권의 주도권을 장악하기위해 이루어졌다는 주장에 대하여
전두환 합수 부장은 1979년10월27일에 공고된 계엄포고 제5호
제3항의 규정에 따라 중앙정보부에 대한 조정 및 감독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김재규의 대통령 시해사건 여파로 수장이 없는
상태에서 그 기능이 사실상 마비된 상태였다. 누가 봐도 이러한 상태는 오래 허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1980년 3월에 접어들면서 무장간첩 침투
사건이 잇달아 일어나고 북한이 심상치 않은 군사 동향을 보이기 시작함에 따라 중앙정보부의 정부수집기능 정상화가 시급한 과제로 대두 되었다.
상황이 다급해지자 대통령은 중앙정보부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합수 본부장을 1980년4월14일부로 중앙정보부서리로 임명하여
기능을 정상화 하라고 지시하게된 것이다. 왜 하필 전두환이었을까? 아마도 극도로 침체됐던 중앙정보부의 분위기를 일신하고 생기를 불어놓기 위해서는
가장 강력한 수장이 필요했을 것이고, 특수 전문기관인 중앙정보부의 틀을 다시 형성하기 위해서는 그 분야에 정통한 전두환 밖에는 대상자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인재는 많다” 하지만 막상 책임자 입장세서 보면 인재가 없어 보이는 것이다. 시켜 달라 한 적도 없고, 그 자리를 빼앗은 적도
없다. 오직 낭중지추였기 때문에 발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2)이른바 K공작계획서가 집권 시나리오의 일환인 언론공작
이였다는 주장에 대하여
비상계엄이 선포되면 보안사에는 보도검열단이 발족하여 언론검열을 실시해 왔다. 이는 군의 계엄계획에
의거한 것으로서 제3공화국부터 실시해온 것이다. 1979년10월27일 지역 비상계엄이 선포되자 보안사령부는 당일부터 언론반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른바 K공장계획서는 1980년3월초 선동호 소령의 후임으로 언론반장에 취임한 이상재 준위가 작성한 문서였다. 이상재 준위가 언론반장에 취임한
시기는 지역비상계엄이 선포 된지 4개월이 된 시점이어서 그동안에 언론반의 검열에 대하여 언론계에서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행정부 내에서도
비난이 쏟아지고 있던 때였다. 이상재 반장은 이런 잡음이 언론검열기준이 애매하고 언론계와 대화가 부족한데에서 온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이상재는 언론계 실무자와의 회동을 위한 소요예산을 포함한 언론 반 운영계획서를 작성하여 주무처장인 권정달 정보처장에게
보고하게 되었다. 만일 이것이 집권 시나리오의 일환이었다면 언론 반장은 이른바 신군부 세력의 핵심 인사가 맡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또한 이상재
준위는 신군부 세력과 전혀 무관한 사람이고 계급도 낮은 준위였다. 이런 취지에서 일개 준위가 작성한 언론반 운영계획서가 집권 계획의 일환 일
수는 없는 생각이 든다. 또한 언론반은 전두환 사령관에게는 보고도 하지 않고 권정달 선에서 전적으로 알아서 운영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를 놓고
전두환의 집권시나리오였다고 하니 도가 참으로 지나친 것이다. 2008.11.11.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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