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부천개혁교회에서 2024년 겨울사경회를 부천개혁성경신학교의 '종교개혁사' 강의를 병행하여 '종교개혁시대의 신학과 신앙 : 종교개혁 이야기' 주제로 1월 13일(토요일)-14일(주일)에 가지며 강의한 내용입니다. 강사는 고경태 목사님(주님의 교회, 조직신학 교수)입니다. 두 번째 시간인 2강은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자들'입니다.
.................................................................................
종교개혁시대의 신학과 신앙
- 종교개혁 이야기 -
목 차
1. 우리가 생각하는 종교개혁 진영이란
2.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자들
3. 종교개혁 대략
4. 때가 찬 종교개혁
5. 루터의 종교개혁
6. 칼빈(Jhon Calvin, 1509-1564)의 종교개혁
7. 잉글랜드의 종교개혁
8.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
9. 재세례파와 신령주의(신비주의)
10. 로마 카톨릭주의와 세르베투스주의(소시니안)
11. 도르트 총회(1618-1619: the Synod of Dordrecht (Dort) in 1618-1619)
12. 웨스트민스터 총회(1643-1649)
※ 주일설교
........................................................................................
- 겨울사경회 첫째 날 : 두 번째 시간 -
2강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자들
모든 있는 것에는 있음을 있게하는 계기가 있다. 해 아래에 새 것이 없다(전 1장). 모든 있는 것은 옛 것의 조합으로 형성된 다른 산물이지, 무에서 유가 되는 창조가 아니다. 16세기의 종교개혁도 한 사건이 아니라 연속적이고 불연속적인 사건이다. 종교개혁은 오류와 부패에서는 불연속(단절)이고, 진리에서는 회복하고 연속하려는 지향성이다.
종교개혁은 마틴 루터, 존 칼빈 그리고 쯔빙글리를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성찬 이해에서 세 신학자의 견해가 대조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스스로 신학을 형성한 것이 아니고 그들이 있게 된 신학 훈련의 배경이 있다. 종교개혁이 되기 위해서 종교개혁을 사모하는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가들은 이단으로 판정받거나 순교당하기도 했다. 교회가 진리를 이단으로 판정한 사례는 의외로 있다.1)
사람들은 종교개혁 하면 루터나 칼빈 그리고 쯔빙글리를 연상하게 된다. 그러나 루터와 칼빈과 쯔빙글리 등이 행한 종교개혁 이전에 먼저 개혁을 주도한 선각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시기상조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위력에 눌리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단으로 몰리거나 순교당했다. 그러나 그들의 희생이 있음으로 종교개혁의 기운은 싹터 성공할 수 있었다. 그들을 세 종류로 분류한다면 다음과 같다.
1. 신비적 개혁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Meister Eckhart, 1260-1327), 하인리히 수소 (Heinrich Seuse, 1295-1366), 요한 타울러 (Johannes Tauler, 1300-1361) 등은 하나님과 일치를 도모하는 신비적 신앙으로 교회갱신 운동을 전개했다.
2. 실제적 개혁자- 발도(Petrus Waldus, ?-1218)와 사보나롤라 (Girolamo Savonarola, 1452-1498)는 도덕과 윤리적 실행의 혁신을 시도했다.
3. 교리적 개혁자- 존 위클리프 (John Wyclif, 1329-1348)와 존 후쓰 (John Huss, 1370?-1415) 등으로 교리와 신학면에서 로마교회에 대항하여 불복했다. 신비적 개혁자들에 대해서는 목원 신학 연구소 편의 [신학과 현장] 제 5집 237-264 쪽을 참고하기 바라며 본 논문에서는 실제적 개혁자들과 교리적 개혁자들을 중심으로 다루기로 한다.
종교개혁 전 개혁자
1. 피터 발도(Petrus Waldus, ?- 1217)
피터 발도(Petrus Waldus, ?- 1217)는 프랑스 리용 지방의 부자 상인이었다. 발도는 과감한 결단력을 가진 사람으로 자기 전 재산을 팔고 성경대로 살려고 매진했다. 발도의 영향권에 있는 무리를 “리용의 빈자(貧者, Poors of Lyon)”라고 불리는 발도파(Waldenser)이다. 발도는 성 알렉시오(St. Alexio)라는 사람이 결혼하는 저녁에 신부(新婦)와 부모를 작별하고 수도사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읽고, 또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부자 청년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읽고 난 뒤에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뜻을 모으는 동료들과 함께 복음을 전할 목적으로 1170년에 “리용의 빈자”라는 단체를 조직했다.
리용의 빈자(Poors of Lyon)들이 펼친 왈도파 신앙 운동은 그리스도인의 절대권위를 교회라는 외형적 교회 조직이 아닌 오직 성경에서 찾았다. 이는 다가오고 있는 교회개혁운동의 여명이었다. 당대의 성직자들은 전도 활동을 하는 순회설교자들을 푸대접했다. 그리스도의 생명력 있는 복음이 단순성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그런데 왈도파 신앙운동이 부패한 자신들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었음을 간파하지 못했다.
리용의 빈자들―왈도파 신앙인들은 복음진리를 단순하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설교했다. 원시 기독인들의 소박하고 단순한 모습을 재현하고 싶어했다. 단순한 것은 언제나 강렬하다. 왈도파 신앙인들의 설교는 강한 호소력을 지녔다. 단순한 언어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참회, 선행, 자발적인 윤리적 삶, 헌신을 추구했다. 또한 성직자들의 방종, 타락, 교회의 부패 그리고 이단 카타리파(Catharism)2) 사상을 질타했다.
발도는 성경과 교부들의 문서를 지역 언어로 번역하려고 했다. 성경을 번역하려고 한 최초의 시도자이다. 발도파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지팡이나 주머니를 가지지 않고 복음을 전하려 나섰고 시골에서, 도시에서, 거리에서 그리고 광장에서 설교하고 토론했다. 발도파의 설교는 단순하여 당시 대부분의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전했다. 발도파는 사회에서 고난받는 자, 압박당하는 자, 병든 자에게 동정했고 모든 사람을 형제로 여겼다.
발도는 로마 카톨릭 교회 제도를 유지하려고 했다. 그런데 교회의 성직계급주의와 충돌했고, 설교가 없는 미사 제도와 충돌했다. 발도파 사람들이 행하는 설교는 리용의 대주교와 사제들에게 발각되었고, 설교중지를 명령했다. 그러나 발도는 거부하고, 1170년 제 3차 라테란 회의에 참석 중인 교황 알렉산더 3세(Alexander III, 1159-1181)에게 설교할 수 있도록 청원했다. 그러나 리용의 대주교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발도파는 설교할 수 있는 권리가 거부되었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거역하는 인간의 음성이라 생각하고(행 5:29) 계속해서 거리에 나가 설교했다. 결국 발도파가 리용의 대주교와 교황의 명령에 불복종함으로 리용 교구에서 추방당했다. 그리고 1184년 교황 루키우스 3세(Lucius III, 1181-1185)는 교서 “아드 아볼렌담”(Text of Ad abolendam)으로 발도파를 이단으로 정죄했다.3) 결국 발도파는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분리되었다. 그런데 왈도파의 세력이 급속히 확장되었고, 로마 카톨릭 교회가 큰 문제로 여길정도 강성해 졌다. 발도파의 영향력은 남부 프랑스와 알프스를 넘어 남부 독일과 이탈리아 그리고 스페인까지 확산되었다.
“리용의 빈자들”은 신성하지 않거나 모독적이거나 경박스런 말을 피했다. 독일어권의 왈도파 사람들은 ‘진실로,’ ‘참으로,’ ‘진정으로,’ ‘솔직히 말해서’ 따위의 표현을 삼갔다. 자신들이 하는 말 모두가 진실하고 정확함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그 무렵, 로마교회의 신자들은 의도적으로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험악한 언어를 자주 사용했다. 발도파는 이러한 것이 십계명 중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와 관련된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발도파는 모두 동일한 모습을 같지는 않았다. 일부 리용의 빈자들은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 자기들이 살고있는 지역의 윤리, 사회 활동, 언어를 거부하여 로마교회의 신자와 같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결혼 대상자를 발도파 신앙공동체 안에서만 찾았다. 구성원들 가운데는 자아의식이 높고 우월감을 가진 자들이 많았다. 자기의 신앙에 대한 자긍심, 우월감, 배타적 의식을 갖기도 했다. 발도파 교회가 사도 바울의 스페인 여행길에 세워졌다고 하고, 기독교가 로마화 되기 전에 발도파가 존재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기존 교회에 대한 강한 불신을 드러낸 알프스 지역의 발도파 사람들은 우월감을 가지고 주변 지역 사람들을 얕잡아 보았다고 전해진다.
로마교회는, 교황과 감독이 사도의 유일한 계승자라고 하는 배타적 직분 체계를 근거로, 평신도 무리의 설교 곧 복음 전도 사역을 금했다. 발도파 신앙인들은 달리 생각했다. 예수의 사도들처럼 살아가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설교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나님은 사도들에게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설교하라고 했고, 발도파 사람들은 그러한 사도적 명령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리용의 빈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복음증거와 말씀 사역을 하라고 부름 받았다는 강한 소명의식을 가졌다. 이는 그들이 자신들이야 말로 진정으로 사도직을 계승한 자들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발상은 교계(敎階)를 절대시하고 교황과 감독만이 사도직을 계승했다고 하는 로마교회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다.
발도는 1217년 보헤미아에서 죽었다. 그 무리에 대한 로마교회의 금지는 1215년 제 4차 라테란 회의에서 이노센트 3세에 의해 반복되었다. 이 회의에서 발도파와 카타리파를 탄압하기 위해 도미니크 수도회에게 이단 심문(종교재판)을 주관토록 결정했다. 로마교회는 1229년 발렌시아(Toulouse 혹은 The Council of Valencia) 회의에서 평신도가 성경을 읽는 것을 금하는 법을 제정해서, 발도파 현상을 이단적 행위로 단죄했다. 발도파는 오직 한 마음으로 성경에서 가르친 대로 지키고 사도들의 삶을 지향했다. 발도파는 성경에 근거한 설교와 함께, 연옥 교리와 죽은 자를 위한 미사와 기도를 거부했고, 평신도라도 선한 사람이면 성례전을 집행하는 것을 허용했다. 발도파는 교리나 사상보다도 윤리적 실행을 중요시하여 산상수훈을 엄격히 준행하도록 힘썼다.
리용의 빈자들은 복음전도와 설교 활동이 교회생활의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설교는 신적 소명이다. 그들은 복음전도와 설교활동을 하나님에게서 받은 절대적 사명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교회가 이를 금함은 옳지 않다. 교황, 교계(敎階), 교권보다 하나님의 말씀 전파의 사명 수행이 더 우선적이다. 성직자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성경에 부합하는 어떤 것을 명령하면 ‘비록 그들이 나쁜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그 지시, 명령에 복종한다”고 했다.
로마 교회가 발도파 신앙인들의 활동을 강력하게 제재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추종자 수는 증가했다.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도 수는 점차 많아졌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앞장에서 지적했듯이, 발도파 신앙인들이 성경 애독, 설교, 복음전도만이 아니라 스스로 빈곤을 선언하고 같은 시대에 같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발도파 기독인들은 수도사처럼 청빈하게 살았다. 성직자나 수도사가 아닌 자들이 마치 성직자나 수도사처럼 사도적 빈곤을 실천하면서 복음전도에 전념했다. 이는 당시의 교회제도와 수도원제도와 일치하지 않았다. 발도파 사람들의 사도적 청빈과 순결 이미지는 대중만이 아니라 기득권을 가진 자들의 존경심을 불러일으켰다.
종교개혁 전 개혁가의 시초격은 12세기에 형성된 발도파이다. 이들의 영향력에서 잉글랜드의 존 위클리프, 체코의 얀 후스등이 있다.
2.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lola, 1452 - 1498)4)
사보나롤라는 종교개혁 이전의 종교개혁의 도래를 예언한 예언자였다. 그는 마틴 루터가 출생하기 약 30년 전인 1452년 9월 21일 이탈리아 북부 페라라(Ferrara)에서 태어나 1498년 5월 23일 플로렌스에서 순교했다. 그는 소년 때부터 침착하고 고독한 사람이었다. 그의 부모가 그를 의사로 만들려고 했으나 사보나롤라는 그 당시 사회의 타락과 불의를 보고 뜻한 바 있어 신학을 택했다. 그는 22세 무렵에 볼로냐(Bologna)에 있는 도미니크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는 수도원에 들어가게 된 이유를 아버지께 다음과 같이 편지했다: "나는 이탈리아의 사악함에 눈 먼 백성들을 더 이상 보고 참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덕이 도처에서 경멸되고 악이 추앙되며 경외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도미니크 수도원에서 사보나롤라는 어거스틴과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해 공부하였고 성경에도 정통했다. 1481년 그는 플로렌스에 있는 성 마가 수도원으로 옮겨갔다. 10년 후 사보나롤라는 그곳 성 마가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그는 수도원장으로 있으면서 플로렌스에서 대담하게 죄악을 통박하는 설교를 했으나, 세상 영화(榮華)에 취한 시민들은 그의 설교에 귀 기울이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실패에도 불구하고 옛 예언자와 같이 열심을 다하여 절규함으로 차츰 반응이 일어나 그가 설교하는 곳에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 많은 사람이 사보나롤라가 플로렌스 대성당에 도착하기를 몇 시간 동안 기다렸고 강변 설교에서는 만명에서 만 이천명이 모이기도 했다. 그의 메시지는 도시에 가득한 부패를 가차없이 공격했고 성직자들이 영적인 생활보다 성직록과 재물과 외적 의식에 치중하는 탐욕과 형식을 책망했다. 사보나롤라는 교회와 세상의 멸망에 대해 설교했는데, 구약의 예언자적인 자 의식과 요아킴의 묵시(Joachim of Fiore, 1135-1202)에 따른 무시무시한 심판이 교회에 임박함을 느꼈고, 따라서 교회의 갱신을 촉구했다. 그는 로마의 고위성직자들의 위선을 정확하게 지적했다. 사보나롤라는 성경의 권위를 역설했다. 즉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서 새로운 터전을 제공한 것이다. 그는 노아의 방주, 출애굽기, 학개, 에스겔, 아모스, 호세아, 요한계시록 등을 주제로 설교했다. 사보나롤라의 설교에 힘과 기운을 준 또 다른 요소는 예언자적 자의식이었다. 그는 "보라, 땅 위에 급하고 속히 임할 주님의 칼"에 대한 환상을 보았다(Ecce gladius Domini super terram cito et velociter!, Behold the sword of the Lord, swift and sure, over the earth). 그는 메디치 가문의 쇠퇴와 프랑스의 찰스 8세가 플로렌스를 침공할 것을 예언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현실로 이루어졌다. 플로렌스의 지배자인 메디치 가문의 로렌조가 병으로 죽게 되어 플로렌스는 사보나롤라가 주도하는 공화적 신정정치가 수립되었다. 1494년부터 사보나롤라의 명성은 높아갔고 정치적 영향력은 확대되었다. 프랑스 군대가 플로렌스의 국경에 다가오고 있을 때 사보나롤라는 찰스 8세와 협상을 통해 프랑스군을 순순히 퇴각시켰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플로렌스의 모든 거리가 피로 물들었을 것이다. 이제 플로렌스에서는 사보나롤라의 이상적 통치체제, 즉 주님을 머리로 하는 신정정치가 시도되었다. 1494년 학개서를 주제로 한 설교와 1495년 시편 설교에서 그는 왜 자기가 정치에 관여해야 하는가를 반문했다. 사보나롤라는 플로렌스 공화정(共和政)의 제일의 통치자 자리를 하나님에게 맡겼다. 그런데 교황 알렉산더 6세는 한편으로 그를 회유하고 또 한편으로 위협을 가하고 탄압했다. 사보나롤라가 교황의 설득에 불응함으로 1497년 5월 12일 교황은 결국 그의 설교 행위에 대해서 금지 명령을 내렸고 그를 이단자로 파문하여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했다. 사보나롤라는 도덕적 신념, 조국에 대한 사심 없는 사랑, 의로운 일에 대한 헌신 등 실로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는 중세의 한 교회를 부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교회의 형식보다는 그리스도의 근본적인 가르침에 뿌리를 두었고 영적 거듭남을 촉구했다.
3. 존 위클리프(John Wyclif, 1324?- 1384)
3-1. 존 위클리프의 생애와 활동
위클리프는 1320년과 1324년 사이에 잉글랜드 요크셔(Yorkshire)에 있는 리치먼드 (Richmond) 근처 위클리프-티즈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가 약 16세 때에 옥스포드 대학에 입학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그의 경력중 상당히 많은 부분들이 옥스포드 대학과 깊이 관련되었다. 위클리프는 1345년 옥스포드 대학에서 특대생으로 학사학위를 받았고 1360년 옥스포드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이후 옥스포드, 켄터베리 및 발리올의 교수로 활약했다. 그는 1372년 옥스포드의 발리올(Balliol)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유창한 화술로 논리학과 형이상학에서 큰 명성을 얻었다. 위클리프는 당시 지배적이었던 유명론(Nomialismus) 보다 실재론(Realismus)을 주장했다. 그는 1361년 필링햄 교구 소속의 교회 목사로 임명되었다가 1368년에는 리저살 교구로 옮겼다. 위클리프는 1361년 이후에 얼마 동안 발리올 대학의 학장으로 일했으며 1365년에는 켄터베리 대학의 학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교황은 선출된 위클리프를 파격적으로 면직시켰다. 그후 위클리프는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의 배려로 1374년 루터워드(Lutterworth) 교회의 주임 사제로 전보되었다. 여기서 그가 별세할 때까지 교회를 지켰다. 그의 주요 경력은 신학대학 교수, 교구 목사, 교리적 개혁자였으며 영국과 로마 카톨릭 교황과의 세금 등의 문제를 조정하기 위해 왕실 사절로서 외교 임무도 수행했다. 처음으로 위클리프가 개혁운동에 나선 것은 로마 교회의 권력 남용에 관한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부터이다. 그의 전생애에 심혈을 기울여 바친 투쟁의 목표는 신적 진리 (der g ttliche Wahrheit)와 인간의 자유(der menschliche Freiheit)의 확립이었다. 위클리프는 조국과 복음 그리고 신앙과 자유의 양극의 조화를 위해 헌신했다. 1374년 위클리프는 왕의 사절단의 한 사람으로 교황 그레고리 11세(1370-1378)의 사절과 만나기 위해 부르게 (Bruges)를 방문했다. 거기서 "성직 임명법" 문제와 교황의 봉토로서 영국의 지위에 대한 문제를 다루게 되었다. 40년 동안 프랑스와 싸워 온 영국은 프랑스 왕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아빙뇽 교황청 (1309-1378)에 대항하여 영국의 성직자에 대한 교황청의 임명을 반대했다. 또한 영국은 아빙뇽 교황의 통치 및 영국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했기 때문에 교황이 세속 왕권에 간섭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미 1366년 잉글랜드 의회는 잉글랜드 왕 존(John)이 1213년 교황에게 행한 봉신(封臣) 인정을 거부했다. 위클리프는 신학적으로 교황권과 교회의 재산에 대해 관심을 두었다. 1376년에 위클리프는 교황이 잉글랜드 교회의 재산과 잉글랜드의 정치에 간섭하는 것에 반기를 들었다. 위클리프는 이미 1370년대 초에 "어떤 특정한 상황들 아래에서는 국가가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는 것이 정당하다"라는 국가의 주권과 통치권을 주장했다. 그리고 "모든 합법적인 통치권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하여 위클리프는 왕실 근무와 루터워스 교구를 맡을 수 있었다. 위클리프는 더 나아가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규정하고 "가장 저주받은 도둑이요 사기꾼이며 교만한 로마의 사제"라고 비난했다. 고위 성직자들과 토지를 가진 수도원들과 로마 교황청은 위클리프의 가르침을 공격했다. 1377년 2월 위클리프는 자신의 견해를 밝히도록 런던의 주교 윌리암 코티나이(William Courtenay)에 의해 런던에서 모인 주교들 앞에 출두하도록 소환되었다. 그러나 곤트의 존(John von Gaunt)과 왕실과 귀족들의 보호로 그 소송이 흐지부지 되었다. 같은 해 5월 교황 그레고리 11세는 교서를 발하여 위클리프를 잡아 심문하도록 명령했다. 1378년 1월 런던의 주교가 소송을 제기했으나 왕실의 보호와 민중의 후원으로 켄터베리 대주교와 런던 주교의 위클리프에 대한 체포, 심문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1378년 교황청의 대분열(1378-1417) 사건으로 위클리프 자신의 견해가 더욱 급진적으로 진행되어 궁극적으로 중세 교회의 전 구조 전체를 거부했다. 그러나 위클리프가 탁발 수도회를 "가인의 자식들"이라 비난한 것과 또 1379년 로마 카톨릭의 화체설을 공격함으로 왕실과 그의 동조자들의 지원을 상실했다. 1348년-1450년 사이에 흑사병으로 야기된 심각한 경제적 혼란으로 하층민의 불안이 점점 높아 가다가 1381년에는 진압하기 어려운 농민반란이 터졌다. 농민전쟁이 절정에 달해 위클리프의 대적들은 그의 이단적 행동과 그의 동조자들에 의해 폭동이 일어나게 됐다고 그를 고발했다. 그리하여 1382년 새로 켄터베리의 대주교가 된 윌리암 코티나이는 런던회의를 소집하여 위클리프의 저술 중 24개 명제를 골라 정죄했다. 그러나 위클리프를 소환하지는 않았다. 이제 왕실은 위클리프를 포기하였고 코티나이는 이 정죄된 명제들의 옹호자들은 누구라도 구속할 권한을 얻었다. 그 사이 위클리프는 1382년 11월에 중풍에 걸려 쓰러졌으나 자신의 교리들을 13권으로 된 "신학대전"(Summa Theologia)을 집대성했다. 1384년 12월 24일 위클리프는 미사 참석 중 두 번째로 쓰러지고 사흘 후 세상을 떴다. 그는 로마 교황을 상대로 싸웠으나 운 좋게도 루터워스 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 위클리프가 세상을 떠난 후 위클리프 운동, 곧 롤라드 운동은 박해를 받게 되었다. 1401년에 이단에 대한 대책이 의회에서 채택되고 법령 "이단자 화형에 대해"(De haeretico comburendo)를 통과시켜 롤라드파가 다수 화형당했다. 1406년에는 롤라드 운동을 반대하는 법안이 통과되었으며 1409년 주교 회의에서는 위클리프의 교리를 정죄하고 성경번역 사업과 거리 순회 전도 운동을 금지했다. 1415년 5월 4일 콘스탄스 공의회는 위클리프의 글에 나오는 260개의 명제들과 함께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그의 뼈들이 가까이 묻힌 기독교인들의 뼈들과 구분될 수 있도록 성별된 땅에서 파헤쳐 던져버리라"는 명령과 또 그의 모든 저서를 불태우도록 명령했다. 위클리프의 유해를 파헤쳐 던져버리라는 이 명령은 위클리프가 죽은 후 44년 동안 유예되다가 1428년 링컨의 주교 플레밍에 의해 유해를 신성한 땅에서 파내어 화형시키고 그 재를 스위프트(Swift) 강에 뿌렸다. 17세기 바로크의 수사학자인 토마스 훌러(Thomas Fuller)는 위클리프의 유해의 최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시적으로 표현했다: "그 조그마한 강은 그의 재를 아본(Avon) 강으로 옮겼고 아본강은 세베른(Severn) 강으로, 세베른은 메렌(Meerenge) 강으로 옮겼으며 거기서부터 더 넓은 대양으로 나아갔다. 그리하여 위클리프의 재는 전 세계로 번져나간 그의 교리의 상징이 되었다."
3-2. 존 위클리프의 사상
A. 하나님의 말씀의 재발견 성경관
1) 성경의 진리에 대하여(De veritate sacre scripture) - 위클리프는 학자로서 크리스톰, 어거스틴, 라틴 교부 그리고 중세 신학자 안셀름부터 둔스코투스까지 그들의 작품들을 읽고 인용하였지만, 그의 주장을 최종적으로 성경에 근거를 두었다. 성경 연구를 통해 그는 중세신학의 오류를 발견하였고, 그 잘못을 지적했다. 위클리프는 그의 저서 [성경의 진리에 대하여]에서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한 최고의 권위이며 신앙의 기준이고 모든 인간적 완전함의 기준이다"라고 말했다. 위클리프는 성경의 최고의 권위는 성경의 내용에 있고 그리스도의 증거를 통해 나타나게 된다고 보았다. 위클리프의 신학에 있어서 주요한 원리는 성경 곧 하나님의 법이었다. 위클리프의 주장은 성경은 생명의 책(liber vitae)이요, 하나님의 법이요, 만일 교황과 공의회의 결정이 성경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들은 인간적인 교리로서 무가치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은 흠이 없고 참으로 완전하고 최상의 구원" (lex domini immaculata....verissima, completissima et saluberrima)이다. 위클리프는 성경 안에 구원에 대한 모든 대답이 들어 있다고 하였고 성경이 크리스챤의 신앙이요 설교의 토대가 된다고 보았다. 또한 그의 저작 [Trialogus]에서 위클리프는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의 주장이 서로 맞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만약에 양심과 교회의 권위가 서로 충돌한다면 사람들은 양심에 순종해야 한다고 보았다. 위클리프는 믿음에 의한 칭의론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끊임없이 그와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이 생명이라고 말한다. 그는 공적 (功積)의 교리를 부인했다. "믿음이 최고의 신학이다"(fides est summa theologia) 라는 그의 사상은 오히려 종교개혁자들에 가깝게 접근했다. 오직 성경을 연구함으로 한 사람의 크리스챤이 되도록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위클리프에 의하면 성경이야말로 모든 논리의 시금석이요, 기준이다. 다른 논리들은 자주 변하게 되지만 성경의 논리는 결단코 변하지 않고 영원히 서 있다(Aliae logicae saepissime variantur logica scripturae in eternum stat). 발도파를 근절하기 위해 로마 교회는 1229년 툴루스(Toulouse) 회의에서 평신도들이 성경을 갖는 것을 금했다. 성경은 오직 성직자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다. 이와 대조적으로 위클리프는 평신도들도 성경을 소지하고 또 읽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위클리프는 교황과 교회법을 잘 아는 사람만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성경은 모든 크리스챤들에 의해 읽혀지고 연구되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이유는 성경은 완전한 진리이기 때문이다(illum librum debet omnis Christiananus a discere cum sit omnis veritas). 위클리프는 성경에 반대되는 것이 이단이라고 보았고 자신은 필요하다면 순교할지라도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겠다고 말했다. 위클리프는 성경은 자기 고유의 언어로 읽혀지고 해석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평신도들에게 성경을 금하는 것은 근본적인 죄라고 단정했다. 그리하여 위클리프는 평신도들이 성경을 자유로이 읽도록 하기 위해 그의 동료들의 도움으로 불가타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다. 그는 성경을 모국어로 번역하여 그의 민족에게 소개한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이렇게 번역된 성경은 그의 추종자들이 필사하여 휴대하고 전도했다.
2) 목회직 - 목회의 직무에 대하여(De officio pastorali) 위클리프는 그의 논문 [목회의 직무에 대하여]에서 사제의 최고의 직무를 설교로 보았다. 주교들이 설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행하지 않는 것은 예수를 죽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사제들은 주어진 이 특권에 따라 설교할 의무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설교는 성찬 집례보다 더 중요한 사명으로 보았다. 이것은 분명히 위클리프의 개신교적 복음 사상이다. 사도시대에 교회가 생성되고 성장된 것은 복음의 선포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황 지시 또는 수도원의 규정이나 모든 의식보다 특별히 그리스도의 말씀에 더 높은 권위를 두는 것이 중요하다. 위클리프는 교황의 지위는 교회 안에서 차지하고 있는 신분이 교황의 지위를 결정하는 기준이 될 수 없고 오직 성경의 가르침과 교황이 가르치고 행하는 모든 것에 얼마나 일치하고 조화하고 있느냐에 기준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상적인 성직자의 직무는 성직자가 기도나 소망이나 생각에 있어서 항상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 성직자는 참되게 가르쳐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내적으로 체험해야 한다. 성직자의 주 임무 중 하나는 참으로 회심의 경험을 한 신앙인으로서 그의 이웃을 하나님에게로 인도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산상수훈은 인간의 전통보다 더 중요한 이웃사랑의 길잡이다.
B. 교황청에 대항하여
1) 통치권 - 하나님의 통치권에 관한 3권의 책(De dominio divino liblis tris), 시민 통치권에 관한 논문(Tractatus de dominio civili) 위클리프는 1374년 4월 7일 에드워드 3세로부터 루터워스의 주임사제로 임명받은 무렵부터 신학자로서 정치에 관심을 보였다. 그는 이미 1370년대 초 어떤 특정한 상황 아래에서는 국가가 교회의 재산을 몰수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했다. 이 견해는 그가 왕의 신하로 들어간 시기에 쓴 두 논문 [하나님의 통치권에 대하여] 와 [시민 통치권에 대하여]에서 충분히 자신의 입장을 발전시켰다. 이 논문에서 위클리프는 첫째, 교회가 십일조와 소작료 등으로 치부(致富)한 것을 비난했다. 둘째, 교황이 세속권을 간섭하는 것을 비난하였고 셋째, 교황권과 세속권에 대해 진술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일체의 합법적인 통치권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이다. 통치권은 하나님의 대권이며 하나님 이외에는 누구도 소유할 수 없고 어느 누구도 세상을 다스릴 권리가 없다. 그 이유는 죽을 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님은 은혜로 모든 소유와 권력을 청지기로서의 시민과 교회에게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시민 지배자들에게는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통치권을 주셨고 교회에게는 영적인 것들에 대한 통치권을 주셨다. 그것들은 영구적 재산이 아니라 신실한 봉사의 조건에서만 유지되는 일시적인 하나님의 위탁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와 교황이 절대적인 행정치리자로서 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그 반대로 성례전의 수행자로서 사용되기를 원하신다.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완전한 종이 되셨다. 통치권은 자신의 것이 아니고 위임된 것이므로 오용할 때는 빼앗기게 된다. 옳은 자들만이 통치권을 정당하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죄 지으며 살아가는 사악한 성직자들은 세속적 재산에 대한 모든 권리를 상실한다. 교회의 재산이 무익하게 잘못 사용된다면 세속정부에 의해 빼앗길 수 있다. 왕의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주어졌으며 왕은 영광을 받으시고 세상을 다스리는 그리스도를 대표한다. 사제는 고난을 겪으시고 복종하신 그리스도를 대표한다. 왕은 하나님의 의지를 대표하며 사제는 하나님의 사랑을 대표한다. 왕은 모든 죄를 조사할 수 있으며 죄 속에 있는 성직자들로부터 재산을 몰수해야 한다. 그 당시 교회는 영국 땅의 삼분지 일을 소유한 막대한 부를 누리고 있으면서 면세를 주장하였는 데 위클리프의 교리는 프랑스와의 전쟁비용을 위해 정부가 성직자들에게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좋은 구실을 제공했다. 교회재산의 행사권에 대한 이 이론은 교회에 세금을 징수하는 것과 교황들의 세속 지배 문제로 교황청과 분쟁을 일으켰던 영국의 세속 권력자들에게 기쁘게 받아 들여졌다. 직접적으로 에드워드 3세의 아들인 랭카스터(Lancaster)의 공작 존(John von Gaunt)과 그의 귀족들을 기쁘게 했다. 그들은 교회의 재산을 빼앗아 치부하기를 원했다. 그것은 또한 오랫동안 탐욕스런 교권주의에 불만을 품었던 평신도들에게 만족을 주었고 "사도적 청빈"을 옹호했던 탁발수도회 또한 불쾌하게 하지 않았다.
2) 교황권 - 교황의 권력에 대하여(De potestate papae) 위클리프는 자기의 사명으로 알고 수행할려고 했던 두 가지 임무를 가지고 있었는 데 첫째, 그의 조국 영국이 정치적으로 교황의 간섭과 지배로부터 벗어나 국가의 통치권을 확고하게 세우는 것이고 둘째, 영국이 경제적으로 카톨릭 교회의 돈에 대한 탐욕으로부터 보호되는 것이었다. 위클리프는 그의 신학대전의 마지막 책 "교황의 권력에 대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만일 그가 진정으로 사도적 순전함과 청빈으로 베드로를 본받으려 한다면 보이는 교회는 한 사람의 지상 지도자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런 교황은 아마도 선택된 자들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권력을 거머쥐고 부(富)에 혈안이 된 교황은 아마도 선택된 자가 아닐 것이며 그러므로 적그리스도이다. 교황직은 그 기원에 있어서 인간적- 즉 그리스도가 아니라 콘스탄티누스의해 창설된 것-이며 그것의 관할권은 엄밀히 영적 문제에 국한된다"라고 강조하면서 교황제도의 폐지와 교회 재산의 몰수를 요구했다. 위클리프처럼 교황권을 깍아내리고 교황들을 모독한 자는 없었다. 그는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추기경들을 악마의 종들로 묘사했다. 위클리프는 교황과 추기경들이 그들의 이욕(利欲)에 따라, 그들의 세속적 향락의 추구로 그들의 양들을 잊어버린 것을 비난했다. 그는 교황제도에서 인간의 죄의 계시를 보았고 교황제도는 절대적으로 유해하다고 믿었다: "교황은 교회에 꼭 필요한 것도 아니고 또 교황은 무오류(無誤謬)하지도 않다. 교황은 성경을 가르치거나 하나님의 법을 선포할 특별한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 교황은 사면하거나 파문시킬 권한이 없다. 많은 교황들은 저주받았다 (multi papae sunt damnati)." 위클리프는 이런 언급으로 교황제도를 없애려고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황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도록 촉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마태복음 16장 18절 주석에서 위클리프는 베드로와 모든 신실한 크리스챤들을 반석으로 묘사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열쇠 (천국열쇠)는 금속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영적 능력"으로 되어진 것으로 열쇠는 베드로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모든 성자들은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3) 교회론 - 교회에 대하여(De Ecclesia) 위클리프가 [교회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작성하게 된 동기는 교황청이 추기경 회의를 통해 위클리프를 조사하고 "교회가 위클리프를 정죄했다"라는 것 때문이었다. 도대체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가 무엇이길래 자기 (위클리프)를 정죄한다는 것인가? 위클리프는 교회의 중심은 흔히 로마교회 사람들이 생각하는 교황이나 추기경들이 아니라 어거스틴의 예정론적 교회관에 따라 교회는 "지금 살아있는 자나 이미 죽은 자들이나 또한 아직 태어나지 않은 모든 예정된 자들의 총체"(Ecclesia est totus numerus predestinatorum, presentes, preteriti et futuri)라고 보았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요 교황은 다만 자기 지역교회인 로마교회의 머리일 뿐이다. 로마 카톨릭 교도들은 교회란 교황과 추기경들이 대표하는 것이요 그들에게 순종하는 것이 영혼구원에 필수적인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위클리프는 그의 생애의 마지막 작품인 "그리스도에 대하여"(De Christo)에서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표현했고 베드로는 교회의 머리도 아니고 그리스도를 대리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따라서 교황은 그의 권한의 유래를 베드로에 둘 수 없다고 주장했다. 영어로 된 전단(傳單)에서 위클리프는 말하기를 사람들이 교회를 주교, 사제, 수도사 등 Tonsur 모자를 쓴 사람들로 이해하나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과는 정반대로 살고 있다. 그와 반대로 평신도들은 교회의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으나 그들은 하나님의 법에 따라 신실하게 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 교회의 지체자(성직자들)이 천국에서 복을 받게 되고 그밖에는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이같은 잘못된 표현 즉 마치 교회와 성직계급을 동일시하는 것을 반대하는데 위클리프의 교회론의 목적이 있다. 그것은 교회란 "영원 전부터 구원으로 정해 놓은 모든 이의 총체"라는 것이다. 교회는 예정된 자의 전체 회중(congregatio omnium predestinatorum)이다. 비록 위클리프가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 사이를 구분하지는 않았지만 경우에 따라 이 구분을 지지했다: "사도는 두 종류의 고기를 구분했다. 일부는 그물에 남겨두고 일부는 버린다. 교회 내의 일부는 구원으로 일부는 정죄된다. 교황이 비록 그 자신이 예정된 자라고 말하나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가 선택되었는지 아닌지를 누가 선택되고 누가 버림받았는지는 하나님의 결정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교황도 저주받은 자일 수 있다" 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위클리프의 하나님의 절대 주권 사상과 예정론의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4) 성찬론 - 성찬에 대하여(De Eucharistia) 위클리프의 성찬론은 그의 신학과 사상에서 핵심이 될 뿐만 아니라 교황청을 공격하는 가장 중요한 무기가 되었다. 그는 초기에는 화체설을 주장하였으나 도중에 바뀌었다. 1215년 제 4차 라테란 회의에서 화체설의 교리를 선언한 바 있었는데 위클리프는 고대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화체설의 교리를 비논리적이고 비성서적이며 비신앙적이라고 거부했다. 위클리프는 화체설에서 중요하게 여긴 문제는 떡과 포도주가 되는 본질 요소인 실체가 없어져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 모양과 맛, 냄새, 색깔은 그대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하느냐였고 더 구체적으로 외부적 형태가 본질이나 속성이 되는 원실체로부터 어떻게 분리되어질 수 있는가였다. 그는 성찬에서 떡은 가시적으로 보이는 바와 같이 단지 떡일 뿐이며 그 이상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실재론자였던 위클리프는 만일 떡과 포도주의 본질이 없어진다면 존재도 없어진다는 이유로 화체설을 거부했다. 그리하여 위클리프는 화체설은 지어낸 거짓말이요 화체설을 숭배하는 것은 가장 불순한 우상이요, 또 모든 이단 가운데 가장 불경스런 것이라고 공격했다. 위클리프는 화체설보다 오히려 공재설 또는 영적 임재설을 주장한다. 위클리프는 화체에서 떡의 본질이 파괴되지 않고 떡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한다고 주장하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장에 반대하고 모든 외부적인 형태는 반드시 주체에 속한다고 역설한다. 그는 물체나 사물의 모양이나 색깔, 냄새나 맛 같은 외부적인 본질은 변하지 않으면서 속성, 즉 본질만 변형된다는 것은 철학적 논리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떡의 외형은 그대로 있으나 떡의 본질만 없어진다는 것은 모순일 뿐만 아니라 거기에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만약 사제가 떡을 뗄때마다 그리스도의 몸을 쪼개는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히 신성 모독죄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빨로 그리스도의 몸을 찢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영적으로 받는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몸을 육체적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먹는 것이다. 그분의 살을 육적으로 먹어야 하고 그분의 피를 육적으로 마셔야 하는 것보다 더 무시무시한 일은 없을 것이다." 성찬에 대한 위클리프의 기본 사상은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이다. 그는 물이 얼음으로 변화되듯 외형은 변형될 수 있으나 실체나 본질은 변형이나 변화될 수 없다고 보고 성축후에도 떡은 떡으로 그냥 남는다는 원리를 주장했다. 즉 물리적 떡의 실체는 성화된 성찬에 그냥 떡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떡은 변화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바로 거기에 그리스도의 몸이 더하여져 공재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에 계시는데 성찬에 임재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그대로의 몸이 아니라 성례전적으로, 영적으로 그리고 사실적으로(sacrametaliter, spiritualiter et virtualiter) 그리스도의 몸의 대리적인 상징으로 임재한다는 것이다. 위클리프는 그리스도가 떡에 계신다는 것은 마치 국왕이 그의 통치권의 어디에 있는 것이나 영혼이 그의 몸 안에 거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리하여 위클리프는 그리스도의 몸이 성찬에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함을 역설했다. 위클리프가 화체설을 반대하고 공재설을 주장함으로 영국 왕실과 귀족들과 탁발 수도사들 그리고 옥스포드 대학의 동조인들의 지원을 상실했다. 그러나 그의 성찬론은 후에 루터의 공재설을 뒷받침했다.
C. 위클리프의 애국적 관심
위클리프의 작품에서 그의 애국적인 면을 살펴보기로 한다. 위클리프는 영국의 애국자로 그의 조국을 교황청의 정치적 간섭과 경제적 착취로부터 보호하려고 시도했다. 그의 설교와 논문에서 교황이 세속의 문제에 대해 간섭하고 교회의 돈을 로마로 가져가는 것에 대해 비난했다. 더구나 영국에서 걷어간 소작료나 헌금이나 교회의 세금 등이 아빙뇽 교황청으로 들어가 영국과 전쟁중인 프랑스의 전비(戰費)로 쓰여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위클리프의 반교황적 독설(毒舌)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교황은 무장한 기사(騎士)다. 영국은 칼에 의해 정복되었다. 교황은 칼로 그의 요구를 관철할 수 있었다. 둘째, 공세(公稅)는 다만 바쳐야할 사람에게만 내야 한다. 교황은 공세를 받을 자격이 없다. 그는 그리스도의 후계자여야 한다. 그리스도는 무력으로 지배하는 세상통치를 원하지 않았다. 셋째, 교황은 신도들의 종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는 우리 나라에 어떤 봉사를 하였는가? 그는 다만 그의 개인적 목적과 그의 정부(情婦)들을 위해 우리를 착취한다. 더 악한 것은 돈과 계교로 우리들의 적인 프랑스를 지원한다. 넷째, 교황은 모든 교회의 소유주이다. 우리나라 땅 삼분의 일이 그의 소유이다. 세상 통치권에 있어서 두 주인은 있을 수 없다. 하나는 주인이고 또 하나는 봉신이다. 우리는 우리의 왕이 그 어떤 사람 (교황)에게 신하 노릇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다섯째, 존 왕은 파문에서 면제되려고 영국 땅의 일부를 교황청에 희사했다. 그 희사는 영원히 유효해서는 안 된다. 그 조건들은 효력이 없다. 그것들은 파렴치한 성직매매요, 독직(瀆職)이다. 여섯째, 면죄받기 위해 해마다 수 많은 돈이 지불된다면 그것이 기독교적인가? 그러면 그 돈은 누구에게 부담되는가? 죄있는 왕이 아니라 잘못이 없는 백성에게 떨어진다. 그 돈은 차라리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데 쓰여져야 한다. 일곱째, 실수 많은 존 왕에 의해 잘못 체결된 협정은 유지될 수 없다. 그 땅의 협정에 대해 국민이 찬성해야 한다." 위클리프의 이 같은 애국적인 관심이 그의 종교개혁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3-3. 존 위클리프의 영향
위클리프의 영향 위클리프의 저작을 통해 많은 추종자들이 생겨났는데 그들이 곧 롤라드파이다. 롤라드(Lollards)라는 말은 "중얼거리다"라는 뜻으로 네델란드에서 유래된 비웃는 말로 네덜란드에선 오랫동안 베긴회와 베가드회에게 적용되었다. 위클리프와 그의 전도자들 곧 롤라드파는 교회와 성직자들의 부패를 과감하게 공격했다. 그러나 1401년 반이단법령(De haretico Comburendo)이 채택되었다. 그 법령 아래에서 많은 롤라드파 사람들이 화형당했다. 1406년에는 [반롤라드 법적 조치]가 취해졌고 1409년 런던 교회 대회에서는 위클리프의 교리들과 허가받지 않은 성경번역을 정죄했으며 허가없는 전도자들의 전도를 금지시켰다. 1417년에는 롤라드파의 지도자인 존 올드케슬(John Oldcastle)경이 정죄되고 모반으로 몰려 처형되었다. 이때 이 운동에 참가하였던 상류 계급층의 지지를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급 계층이 지하에서 계속 활동하였고 그 성격 또한 극단적으로 변했다. 계속되는 박해속에서도 롤라드파의 운동은 근절되지 않았으며 후에 영국의 프로테스탄트 운동에 큰 힘을 주었고 그 영향은 유럽대륙의 보헤미아 지방까지 이른다. 위클리프의 사상은 그가 태어난 영국보다 오히려 더 멀리 떨어진 보헤미아 (체코)에서 더욱 영향을 끼쳤다. 1382년 보헤미아 왕 벤첼 (Wenzel)의 누이동생인 앤(Anne) 공주와 영국왕 리처드 2세가 정략적인 결혼을 함으로써 보헤미아와 잉글랜드 간에는 밀접한 교류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보헤미아의 학생들이 옥스포드로 유학하였고 거기서 위클리프의 저서와 사상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곧 위클리프의 사상을 프라하 대학으로 전했다. 위클리프의 사상을 잘 전수받아 보헤미아 교회의 개혁에 앞장 선 사람이 얀 후쓰(Jan Huss)이었다. 그는 보헤미아의 민족적 열망들을 열정적으로 대변하였으며 위클리프의 종교개혁의 이념을 받아들여 본격적인 보헤미아의 교회 개혁운동을 전개했다. 위클리프는 후쓰와 함께 일반적으로 종교개혁의 선구자로 규정되어 왔다. 그들은 로마교회의 악폐에 대한 반항과 성경의 권위를 높이고 결국에는 교회의 개혁을 몰고 온 선구자 역할을 수행했다. 위클리프의 개혁 운동은 루터가 종교개혁 운동을 하기 한 세기 이전에 일으킨 종교개혁이었다. 만일 위클리프가 종교개혁의 여건이 성숙한 독일에서 태어나 활동했다면 루터보다 더 먼저 종교개혁에 성공했을 것이다. 어쨌든 위클리프는 "종교개혁의 서광" 또는 "종교개혁의 샛별"이라고 말할 수 있다.
4. 얀 후쓰(Jan Huss, 1371- 1415)
4-1. 얀 후쓰의 생애와 활동
얀 후쓰는 1371년 남 보헤미아의 Husinec에서 출생했다. 후쓰의 이름이 그의 고향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1386년 프라하 대학교에 입학하여 1393년에 학사 학위를 받았고 1396년 석사 학위 취득과 함께 프라하 대학교 철학부 교수가 되었다. 1400년에 그는 대학에서 계속 가르치면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후쓰는 1401년에 철학부장이 되었고 1402년에 프라하에 있는 베들레헴 성당의 설교자로 임명되었다. 1409년에 프라하 대학교 총장이 되었다. 후쓰는 중세 로마 교회의 부패에 대항하여 새로운 사상적 대안으로 등장한 위클리프의 종교개혁의 이념을 받아들여 본격적인 개혁운동을 전개했다. 모국어인 체코어로 하는 그의 열띤 설교는 열렬한 지지자들을 얻었다. 찬송가도 회중으로 하여금 체코어로 된 예배 찬송가를 부르게 하는가 하면 자신이 직접 새 찬송가를 작곡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대주교였던 츠비네크 차이익(Zbynek Zajic, 1401- 1411)의 지지도 얻었다. 그러나 후쓰가 1404년 교황정치의 부패를 공격하고 위클리프의 사상을 옹호함으로 점차로 대주교 츠비넥과 불화하게 되었고 1408년 프라하의 성직자단은 후쓰의 설교를 금지했다. 그는 결국 1410년 설교 금지에 대한 불복종의 혐의로 로마에 소환되었지만 응하지 않자 1411년 파문당했다. 이러한 가운데 후쓰는 피사측 교황청에 점점 과격한 입장을 가지게 되었다. 즉 그는 자격없는 교황에게는 복종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렇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후쓰의 입장은 아직 교황청에 대해 정면 대결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그러나 1411년 요한 23세가 대립 교황인 그레고리 12세의 지지자인 나폴리의 라디슬라브를 무력으로 굴복시키기 위해 십자군을 소집하면서, 십자군에 직접 참여하거나 기부금을 내는 사람에게 면죄부를 발급하자 후쓰는 그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더구나 1412년 7월 후쓰는 위클리프의 사상은 이단이 아니고 오류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1412년 10월 18일 후쓰의 반대파는 후쓰에게 보다 강력한 파문을 내리도록 촉구했다. 후쓰는 반대파의 압력에 의하여 벤첼 왕의 피신하라는 권고로 프라하를 떠나야만 했다. 왜냐하면 후쓰로 인해 프라하에는 성사금지령이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한편, 콘스탄츠 공의회(1414- 1418)는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지기시문트와 교황 요한 23세의 동의로 이루어졌다. 세 가지 의제가 중요한 문제로 상정되었다. (1) 교황청 대분열의 종식 (2) 위클리프와 후스의 사상으로부터 교회의 보호 (3) 로마 교회의 개혁이었다. 후쓰는 프라하 시 밖의 은신처에서 지기시문트 황제가 그를 초청하여 공의회 석상에서 그의 입장을 변호하겠다는 것과 황제가 직접 후쓰의 안전 통행권을 보장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꺼이 그 제안을 수락했다. 마침내 후쓰는 1414년 10월 11일 길을 떠나 11월 3일 콘츠탄츠에 도착했다. 그의 출현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많은 군중 사이를 뚫고 마을로 들어왔다. 교황은 후쓰에게 미사를 집전하는 것을 금했다. 그러나 후쓰는 매일 자기 처소에서 미사를 집전했다. 이에 격분한 추기경들은 황제와의 약속과는 달리 후쓰를 체포하여 12월 6일 도미니크 수도원의 토굴 속에 감금시켰다. 후쓰는 토굴에서 3개월간 비참한 생활을 해야만 했었다. 그의 감옥은 화장실 옆에 있어 견디기 어려웠으며 구토와 열이 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지기시문트 황제와 보헤미아와 폴랜드 제후들이 후쓰의 무죄를 주장하고 석방을 촉구하였으나 추기경들의 눈치를 살피며 기회주의적 태도로 일관했기 때문에 결국 후쓰는 석방되지 않았다. 마침내 후쓰는 1415년 6월 5일부터 8일까지 추기경, 대주교, 주교, 신학자들로 구성된 이단 심리위원회 앞에 서게 되었다. 이 위원회에서는 후스의 저서에서 30가지의 교리를 이단으로 기소했다. 후쓰는 이러한 기소에 대해 모두 자신의 저술임을 인정하였으나 그것들을 이단으로 해석하는 위원회의 견해에 반박하고 자신의 입장은 정통적이라고 주장했다. 드디어 심판 날짜가 다가왔다. 지기시문트 황제의 요청에 따라 다이이 추기경과 자벨라 추기경이 마지막으로 감옥을 방문하여 후쓰의 주장을 철회하도록 설득하였으나 후쓰는 단호히 거부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후쓰는 1415년 7월 6일 콘스탄츠 대성당으로 끌려갔고 그곳에 모인 공의회 석상에서 최종판결을 받았다. 판결은 사형이었다. 사형 집행은 그날 정오였다. 후쓰는 손을 뒤로 묶였고 그의 목은 쇠사슬에 의해 기둥에 묶였다. 다시 한번 철회의 기회가 주어졌으나 후쓰는 거부했다. 결국 화형이 집행되었다. 이 사건이 원인이 되어 11년에 걸쳐 보헤미아와 독일을 불안과 공포로 몰고간 후쓰 전쟁(1420-1431)이 발발했다.
4-2. 얀 후쓰의 사상
1400년에 사제 서품을 받은 이래 후쓰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을 자신의 주요한 과업이라 생각했다. 이것은 그가 평신도 대중의 영적 각성을 불러 일으키게 하는 복음적 개혁사상을 가지고 있었음을 뜻했다. 1402년 후쓰는 베들레헴 성당의 설교자로 부임하였고 모국어인 체코어로 설교했다. 후쓰의 강점은 그의 대중설교에 있었다. 그는 그의 불 같은 설교로 많은 추종자를 얻었다. 후쓰는 이미 초기부터 위클리프의 사상을 전수받아 그의 청중들에게 소개했다. 위클리프의 중심사상은 주권 사상, 성서론, 성찬론, 교황권, 교회론으로 요약된다. 그중에서 후쓰에게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이 교회론이다. 후쓰 역시 위클리프처럼 그의 "교회론"(De ecclesia)에서 어거스틴의 교회 개념을 인용하여 교회를 예정된 자들의 모임으로 정의했다: "거룩한 카톨릭 교회는 우주적이며 모든 예정된 자들 공동체, 곧 과거나 현재나 미래의 모든 예정된자들의 총체이다" 후쓰는 [선택받은 자들]을 그리스도의 신비적 몸의 지체로 묘사하는 것과 비교하여 [버림받은 자들]을 악마의 지체(corpus diaboli)로 묘사했다. 후쓰에 의하면 [버림받은 자들]은 참으로 그리스도의 교회의 일원이라 보기 어렵다: "비록 많은 사람을 교회의 머리요, 교회의 지체자라 말할 수 있으나 그러나 실상은 하나님 앞에서는 악마의 지체들이다(multi secoundum famen seculi vocantur ecclesia capita vel membra, licet secumdum dei prescienciam sunt mebra diaboli)".교회를 이렇게 이해할 때 교황제도 뿐 아니라 가시적 교회의 권위까지 부정될 수밖에 없다. 후쓰는 주장하기를 "교황이나 주교는 결단코 교회의 이름으로 칼을 잡을 수 없고 전쟁을 수행해서는 안된다. 세속권이나 세속적인 보화(寶貨)에 관심을 두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로마 교황청은 영적 감화력이 없었고 신앙적인 지도보다는 유럽의 정치적, 외교적, 군사적인 이익을 위해 전심전력을 다했다. 그 당시 통계를 보면 요한 22세 하의 아빙뇽 교황청은 유럽에서 가장 큰 금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교황청의 일 년 수입이 약 2백만 금화였는데 63.7 %가 외교정책과 전쟁 수행에 쓰여졌고 다만 7.2 %만 구제와 교회건축과 선교를 위해 쓰여졌을 뿐이었다. 후쓰는 교황이나 주교의 허락 없이 설교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파문당하고 심판날에 배교자로 취급된다고 말하는 것은 이단적이라고 공박했다. 후쓰와 후쓰파의 또 하나의 특징은 성찬에서의 이종배잔이었다. 후쓰는 콘스탄츠에서 미사드릴 때 평신도에게 잔을 주었고 후쓰파들은 1414년부터 평신도들에게 잔을 주기 시작했다.
4-3. 후쓰 전쟁(1420-1436)
후쓰가 콘스탄츠에서 피살되었다는 보도가 보헤미아에 도달하자 백성들은 크게 분개하여 452인의 귀족이 콘스탄스 회의의 결정을 반대하고 후쓰 파는 1420년 프라하에서 로마 교황측에 반대하여 4개 조항을 선포했다. 첫째, 성경에 의하여 자유로이 설교할 것, 둘째, 성찬에 잔도 베풀 것, 셋째, 교직이 국가 정치권을 겸행(兼行)함이 불가함, 넷째, 교직의 여러 죄와 부패를 방지할 것 등이었다. 후쓰가 죽은 후 후쓰파에는 두 파가 급속히 일어났는 데 곧 온건 귀족파와 과격한 민주파였다. 온건 귀족파는 보헤미아의 수도인 프라하를 중심한 귀족들로 구성된 중용파로 성찬에서 떡과 잔을 다 베푸는 것만으로 만족하였기 때문에 떡-포도주파 또는 배당(盃黨)이라 하고 양형색설(Utraquists, 兩形色設)주의자라고도 말한다. 이들은 성경이 금하는 의식만 금지하며 복음의 자유와 평신도들에게 포도주 잔을 주는 것과 교직자의 사도적 청빈과 엄격한 교직생활을 요구했다. 과격 민주파는 로마교회의 교리 개혁까지 요구하였고 성경으로 증거할 수 없는 모든 교리를 다 금지시켰다. 이들은 오직 성경만이 기독교인들의 신앙과 실행의 유일한 기준이 되며 화체설은 오류이며 고행과 종부성사는 폐지되어야 하며, 연옥과 죽은 자를 위해 성자에게 드리는 기도, 성상 및 성유물에 대한 예배 등은 모두 미신이라고 규정했다. 이들은 타보르(Tabor) 고원을 그들의 근거지로 삼았기 때문에 타보르파라 부른다. 두 파 간의 논쟁은 격렬하였으나 외부의 공격에는 두 파가 연합전선을 펴서 방어했다. 교황측이 일으킨 십자군의 공격으로 후쓰전쟁이 일어났다. 이 후쓰 전쟁의 성격은 지그문트(1419-1437) 황제를 왕으로서 인정치 않고 제도적인 왕조를 뒤엎고 환상적이고 종말론적인 천년왕국의 건설을 목표하고 있었다. 보헤미아의 영웅인 타보르파의 소경 장군 요한 지스카(John Zizka, 1376-1424)가 보헤미아를 잘 방어했고 그의 후계자인 프로콥 (Prokop, ?-1434)은 보헤미아의 국경을 넘어 교황측과 전쟁했다. 불리한 교황측에서 타협을 제시하였고 1433년 바젤회의에서 교섭끝에 떡-포도주파(온건 귀족파)는 성찬시 잔의 사용을 인정받고 교황측과 휴전했다. 타보르파는 계속 항쟁함으로 떡-포주파와 내전이 벌어졌다. 타보르파는 1434년 Lipan 전투에서 떡-포도주파에게 거의 전멸당하고 프로콥은 전사했다. 승리한 떡-포도주파는 바젤회의에서 합의한대로 1436년 명목상 로마 카톨릭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1462년 교황 피우스 2세(1458-1464)가 그 합의를 무효화 시키자 떡-포도주파는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하였고 보헤미아 국회는 1485년과 다시 1512년에 로마카톨릭과 동등됨을 선언했다. 종교개혁 때 상당수가 개혁사상을 받아들였고 소수는 로마교회로 돌아갔다. 위클리프-후쓰의 사상의 참 대표자들은 떡-포도주파라기 보다는 타보르파였다. 1458년 경부터 타보르파와 떡-포도주파 그리고 발도파가 합해 보헤미아 일치형제단(Unitas Fratrum)을 조직하였는데 그것이 후쓰 운동의 핵심적 요소를 흡수하여 후대 모라비안 경건주의의 정신적 조상이 되었다. 이 모라비안파가 영국의 요한 웨슬레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우리가 종교개혁 전 개혁가들을 살피는 것은 교회 역사 이해에서 중요한 요소 때문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와 영광이 결코 쉼이 없음에 대한 이해이다. 이단 종파들의 심각한 맹점은 자기들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계시의 쉼을 주장한다. 우리는 구약과 신약의 중간기 400년을 주장하는데, 그것은 계시의 쉼이 아닌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위한 준비로 생각한다. 그러나 계시사가 아닌 교회사에 그러한 기간이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중세기 1,000년을 암흑기라고 해도 하나님의 역사는 결코 쉼이 없었다. 거룩한 교회와 거룩한 백성이 있었으며 그들의 믿음의 계승도 있었다. 그런데 교회 시대에는 인간적 전승에 의한 계시 전달이 아닌 성경에 근거한 계시 전달을 기본으로 하는 것이 차이이다. 루터는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라는 표어를 세웠는데, 개혁 전 개혁가들이 순교하면서 세운 가치이다. 로마 교회의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과 말씀없는 성례전을 비판했다. 로마교회에서 주장하는 교황의 절대권이나 계급화된 성직제도를 거부하고 잘못된 가시적-제도적인 교회관을 비판하며 성경에 합당한 교회 이해로 개혁했다.
종교개혁가들의 개혁운동은 로마 교회의 강한 저항과 박해에서 좌절된 것처럼 보였지만, 교회를 세우기 위한 거룩한 백성들의 쉼없는 순종이었다. 복음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갈 1:6-10)
.............................................
1) (참고) 최덕성, 『위대한 이단자들: 종교개혁 500주년에 만나다』(부산: 본문과현장사이, 2015)에서 최덕성은 교회가 이단으로 정죄한 사례들을 모아, 진리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의 열정과 교회의 부패와 부당한 독단을 소개한다. 종교개혁 이전에 교회로부터 박해받은 사람을 “4. 피터 왈도 5. 리용의 빈자들 6. 존 위클리프 7. 롤라드 신앙운동 8. 얀 후스 9. 기롤라모 사보나롤라”로 제시했다.
2) (참고) 카타리파는 11-12세기 중세 유럽(프랑스 남부, 이탈리아 등)에서 발생한 기독교의 이단으로, 어원은 '청정한 것'을 뜻하는 그리스어 '카타로스 καθαρὀς = katharos'에서 유래했다. 카타리파는 이원론적 사고를 가진 이단으로 당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세력을 떨쳤다. 카타리파는 그들의 신학보다는 그들이 가졌던 신앙과 삶의 관계이다. 카타리파 지도자들은 당시 로마 카톨릭 사제들과 다르게, 금욕과 절제, 검소함으로 자신들의 말을 행동으로 실천했다. 카타리파는 남부 프랑스에 있는 그들의 중심 무대, 알비시의 이름을 따라 ‘알비파(Albigensians)’로 불리기도 했다. 이들 중 일부는 마니교적 이단으로 불가리아에서 일어난 보고밀(Bogomils)파와 만나기도 했는데, 마니교의 이원론에 영향을 받아 물질과 영혼이 대립 관계에 있다고 여겼다. 권현익 선교사는 알비파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시했다. “저는 “알비인”이라 표현하는데, “알비인”이란 특정 교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알비파”는 “프랑스 알비 지역에 활동했던 개혁교회와 일부 이단들을 하나로 뭉쳐 표현한 로마교회의 표현”입니다. “알비인”은 “알비-발도인들로 알비 지역에 대표적으로 활동하였던 개혁교회 그리스도인”으로, 곧 “발도인”이라는 등식이 성립됩니다. 그런데 알비 지역에는 알비-카타르인(협소적 카타르인으로 이원론적 이단 집단)들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발도인들이 더 많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협소적 의미의 카타르인”들은 발도인 안으로 개종되어 수용되었습니다. 한국 교회에서 알비인에 대해서 이단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로마 교회가 이단으로 규정한 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나 학계에서 알비인에 대해서는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프랑스 개혁교회가 알비인들을 자신들의 신앙 선조로 수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인터뷰 중에 권현익 선교사의 답변 -
3) (참고) 2015년 6월 22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이탈리아 토리노에 있는 발도파 교회를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과거에 우리들 관계를 되돌아보면 우리는 신앙의 이름으로 저지른 폭력과 갈등을 보면서 슬퍼할 수밖에 없다. 우리 모두는 죄인임을 인식할 수 있고 서로가 어떻게 용서해야 할지 알 수 있는 은총을 주시도록 주님께 청해야만 한다”고 했다. (중략) “교황은 그간 가톨릭교회와 발도파 사이에 진행된 교회일치 대화가 공통의 뿌리를 많이 확인했다고 높이 평가하고 앞으로도 이 대화를 계속하겠다고 다짐했다.”(출처: NEWSM)
4) (참고) 당시 이탈리아 북부에는 『군주론』(Il Principe, 영어 The Prince)을 저술한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 1469-1527)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