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고모님 흔적>
고향마을 생가 아래는 고모님 댁이 있다. 나에게는 어머니 다음으로 아쉬움을 해결해 주는 집이다. 코흘리개 시절 주전부리가 생각나 고모님 집 토방에서 얼쩡거리면 고모는 “야? 연식아 들어와” 하면서 야구공처럼 둥글게 긁어놓은 깜 밥을 손에 쥐여 준다. 바로 먹고 싶지만, 고모 집 형 과 누나들의 눈치를 보면서 아직도 온기가 남아 있는 깜 밥 껍데기의 밥풀때기를 살짝 떼어서 맛을 본다. 아버지한테 무서운 야단을 맞아 부리나케 달려가면 고모는 치마폭으로 감싸주어 아버지의 무서운 얼굴을 모면할 수 있었다.
아버지 형제는 10남매 중에 고모는 3분 계셨지만, 고향마을에는 아랫집 고모가 유일하다. 고모는 손끝이 야물고 음식솜씨가 좋아서 집에는 언제나 먹을 것이 넉넉했다. 늘 쓸고 닦아서 집 안팎은 티끌 하나 없이 반질반질했으며, 특히 장독대 항아리들은 언제나 햇빛에 번쩍번쩍 눈이 부셨다. 고모는 성품이 수더분하고 붙임성이 좋아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집에는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고샅길에서 조카들을 만나면 앞치마 꼬리로 콧물을 닦아주면서 엉덩이를 토닥거리며 예뻐해 주기에, 고모를 만나면 공연히 어리광 같은 응석을 부리기도 했다. 그때마다 색다른 음식을 숨겨 뒀다가 입에 넣어 줬다. 나는 어머니 어린 시절에 외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얼굴도 모른다. 그래서 외할머니로 착각할 때도 많았다.
어렸을 때 기억으로는 여름날 태풍 폭우로 우리 집 지붕이 일부 무너져서, 고모 집 별채로 임시거처를 옮겨 집수리가 마칠 때까지 고모 댁에서 숙식을 잠깐 같이했었다. 그때 어린 마음으로는 그냥 같이 살았으면 하는 간절했던 심정이 지금도 또렷하다.
고모집 형은 수덕(手德)이 좋아서 시냇가에만 가면 민물고기를 많이도 잡아 왔다. 고모는 그 많은 물고기를 간장에 조려 햇볕에 말려 예비 찬거리로 저장해 둔다. 가끔은 그 조린 고기로 시래기 매운탕을 끓여 우리 집에 가져온다. 어린 시절에 맵고 짜지만, 땀을 뻘뻘 흘리며 콧물을 닦으면서 맛있게 먹었던 얼큰한 고모 집 매운탕이 입가에 맴돈다. 고모 집 텃밭은 널찍하고 기름져서 푸성귀가 언제나 풍성하여 여름 상추쌈은 대놓고 먹었다.
우물가에는 아주 오래된 어른 장딴지 굵기의 매끈한 백일홍 나무가 봄부터 늦가을까지 꽃이 피어, 꿀벌이 잉잉거리고 단내가 끊이지 않았던 고모 집 볼거리였다. 여름날 황토 먼지 땟국물로 얼굴이 범벅된 나를 고모는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퍼 올려 얼굴을 씻어주고, 소름이 끼치도록 차가운 물로 등목을 해주었던 우물이다. 어느 날 와보니 우물은 미어지고 백일홍 나무는 없어져서 주인 없는 빈집을 실감하게 한다.
고모가 돌아가신 지도 20여 년이 지났다. 그 뒤 자녀들은 직장 따라 객지로 나가 살거나 모두 고향을 떠나서 빈집 혼자서 지키고 있다. 고향을 들를 때마다 고모 집도 빼놓지 않고 꼭 들린다. 지붕의 기왓장과 슬레이트는 바람에 날려갔거나 무너져서 그곳에는 언제 날아왔는지 풀 씨앗이 움을 터서 지붕에도 잡초가 무성하여 폐허 그 자체이다.
방치된 집터에는 잡초가 무성히 웃자라서 어린이들은 키가 파묻힐 정도이다. 집터 음산한 곳에는 뱀 허물도 걸려있고, 인근 야산에서 내려와서 밤을 새우고 나간 고라니 잠 구덩이에는 영락없는 검은콩처럼 똥이 수북하게 쌓여있다. 처마 끝에는 텃새들이 집을 짓는지 들랑날랑 야단법석이다. 황성 옛터를 돌아보는 나그네의 심정이다.
방문 때마다 마루 밑이나 헛간에서는 갑자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면서 들 고양이들이 쏜살처럼 줄행랑을 친다. 고양이들 보금자리를 내쫓으려고 온 것이 아니고 둘러보기 위한 것인데, 낯선 사람들에게는 무조건 경계심의 발로에서 온 고양이들의 오해인 것 같다.
고모 집이 빈집으로 변해버리자, 이웃 주민들은 쓰레기 소각장으로 사용하거나, 각종 고장 난 전기제품이나 폐기된 가재도구 등을 마구 버려 폐기물 처리장을 방불케 한다. 주인이 없는 것이 아니고 관리 못하는 것뿐인데, 고모가 계셨을 때는 그렇지 않은 이웃들이 양심을 숨기고 살아가는 토박이 주민들이 더 밉다.
고모 집 뒤에는 작은 언덕이 있는데 그곳에는 토굴이 있었다. 토굴에는 종자로 쓸 고구마와 생강을 저장했다. 그리고 겨울에 굴 풋 할 때는 토굴에 저장한 고구마를 꺼내다가 깎아 주면, 가을부터 겨울 동안 토굴에서 숙성기간을 통해서 고구마의 약간 떫은맛은 사라지고, 적당한 수분과 당분을 함유하여 생밤 못지않은 상큼함이 고모의 얼굴처럼 좋았다. 그 토굴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고모가 평생 들락거렸던 부엌을 가 보았다. 그런데 온갖 세간들은 모두 내팽개쳐 있고, 쓸 만한 것은 누군가가 가져갔음을 느낄 수 있었다. 부뚜막의 가마솥 뚜껑을 보니 손잡이를 만들었을 때 그렇게 만들었을 테지만, 손잡이 중심이 유난히 움푹 패어져서 십수 년 간 식구들을 건사하고 때로는 이 조카를 위해서도 애쓰셔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진다.
가장 가슴 아픈 것은 내가 공직을 따라 객지에 있을 때, 우리 집에는 어머니 홀로 계셔, 고모는 손아래 올케인 어머니를 위해 저녁을 일찍 드시고 우리 집에 올라오셔서 어머니를 위로하고 잠자리를 보살펴 주시면서 같이 자셨다. 그러던 어느 날 고모는 노환으로 돌아가셔서 그것이 가슴이 아프다. 고모 집터를 들릴 때마다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네,’ 보다는 ’온고지신’으로 고모님의 정취를 더듬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