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비 오는 강천사 숲속 길>/구연식
서울에서 막내딸이 외손자와 시댁 어른들도 뵙고 피서 겸 다니러 내려왔다. 마침 아들이 방학이어서 인근의 순창 강천사 계곡에서 외손자 위주로 발을 담그고 오기로 했다. 아내는 간식거리를 준비하고 아들은 김밥집에서 김밥을 주문하여 가볍게 순창으로 내려가고 있다.
출발할 때 전주에서는 구름만 하늘 중간에 걸쳐 찌뿌둥하더니 임실 부근에 가니 빗방울이 제법 굵어졌고 차창을 따닥따닥하면서 때리니 금방이라도 큰비가 내릴 것 같아 공연히 나왔나 하는 느낌이 든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순창은 광주와 전주의 중간지점 휴양지로 사람들이 언제나 많이 몰리는 곳이다. 자동차 전용도로에 들어서니 자동차들이 꼬리를 물고 달려서 모두 다 순창 강천사로만 가는 것 같아서 은근히 걱정된다. 순창이 가까울수록 먹구름이 더 낮게 내려오면서 사방은 어두컴컴해지면서 소나기를 퍼부어 지척을 분간할 수 없다.
임실에서 순창 진입로에 들어서니 그렇게 장사진을 치던 자동차는 어디로 갔는지 뜸해져서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길가에는 덩굴성 식물들이 기를 쓰고 아스팔트 도로까지 기어 오고 있다. 순창군 경계부터는 배롱 나무가 순창 고추장 단지에 듬뿍 적셔서 건져 냈는지 빨간 고추장 색깔의 배롱 나무 꽃들이 틈새 없이 빼곡히 양쪽 길가에 서서 순창 고추장이 그렇게 좋다고 웃어준다.
순창 시내에 도착하니 가로수가 어느 사이 모두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고 친근한 소나무로 전부 바뀌어서 근위병처럼 부동자세로 서 있어 환영하고 있다. 우리는 태어날 때 대문 금줄에 솔잎과 숯을 매달고, 명절에는 송편, 소나무로 만든 가구와 생활 도구를 사용하다가, 소나무 관에 누워 이승을 떠난다고 하니 소나무는 평생을 같이한 가족이며 이웃이다. 소나무의 수명은 대략 500~600년이라고 하니 과연 순창은 장수마을인 것 같다.
시내를 우회하여 강천사로 들어가고 있다. 메타세쿼이아 길로 전국적 명소로 알려진 이웃 담양에 못지않게 순창에도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가 꼬불꼬불 시골의 정취를 길옆 벼들과 어울려서 더해주고 있어 더위와 근심·걱정은 순간 모두 빼어가고 있다.
순창은 전국적으로 장수마을로 부각되면서 힐링 여행코스로 입소문이 났다. 그래서 관광객이 증가하는 추세라고 한다. 오늘은 일요일인데도 아침부터 비가 오고 코로나 후유증으로 관광객이 줄어든 것 같다. 매표소 주차장에 도착하니 제1주차장은 텅 비어있다. 제2주차장도 마찬가지다. 최종 주차장도 거의 비어있었다. 주차 여유가 있어 좋은데 해당 관청의 관광 수입이 그럴 것 같아서 좀 그렇다.
정문에서 매표 검사를 한다. 신분증을 꺼내려하니 나이는 먹고 빗물에 젖은 시골 수탉처럼 초췌했는지 신분증을 빼기도 전에 ‘아이고 그냥 들어가세요.’라고 한다. 그 말이 고맙기도 하고 내가 벌써 이렇게 되었나 하며 초라한 자신이 불쌍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관리사무소 담당자가 외모를 보니 비옷 준비도 없이 타국에 와서 고생하는 것 같아 허락했는지, 관리사무소 뒤 널찍한 처마 끝에는 다문화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간신히 비를 피하고 옹기종기 앉아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어느 외국인은 하염없이 처마 끝 빗방울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자기 나라에도 흔하게 떨어지는 빗방울에 이것저것을 떠올리며 생각하는 것 같다. 지역과 사람은 달라도 비는 같을 테니 말이다.
길을 따라 올라가니 주룩주룩 내리는 빗물을 잎이 비교적 넓적하고 큰 벽오동나무가 받아서 더 큰 빗방울을 만들어 땅으로 쏟으니 낙숫물 흔적에는 작은 구멍이 패어 있다. 연한 나뭇잎에 떨어지면 갈기갈기 찢어 놓기도 한다. 꽃무릇 사촌 격인 연분홍 상사화가 숲 속에서 잎사귀도 없이 홍학 떼 머리처럼 꽃대만 삐쭉 쳐들고 무더기로 피어있다. 가을에 피는 꽃무릇을 생각하니 벌써 가을을 앞당긴 기분이 든다. 또 다른 숲에는 듬성듬성 비에 젖은 함초롬한 참나리꽃이 진분홍 색깔에 애교스러운 주근깨 얼굴을 하고 있어 귀엽기도 했다.
비가 계속 쏟아지니 다른 곳 구경은 신경이 쓰이지 않고 눈앞의 경치에만 몰두하여 집중력도 있고 차분해져서 평상시에 등한시했던 곳을 유심히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진화가 덜된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두꺼비가 엉금엉금 길가로 기어 나오더니 사람과 마주치면 다시 숲 속으로 못생긴 얼굴이 미안했는지 숨는다.
도로 옆 골짜기를 보니 황토물이 제법 불어서 수위가 높아져 가며 급류가 되어 위압감을 주어 5살짜리 외손자는 들어갈 수가 없다. 조금 더 올라가니 병풍바위 앞에 발 씻는 곳 겸 어린이들에게 물놀이를 할 수 있도록 경주 포석정처럼 시설을 해놓아서 외가댁에 와서 물놀이를 했다고 이름 지을 수 있어서 좋았다, 빗방울은 아랑곳하지 않고 외손자는 입술이 퍼렇고 앞니를 벌벌 떨면서도 계속 물놀이를 하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점심때가 되어서 김밥을 빗물 내리는 우산 속에서 한 입 한 입 베어 먹는 기분도 쏠쏠했다. 거기에다 간식까지 먹으니 어느 출장 뷔페 부럽지 않다. 비구름이 태양을 모두 가려 밝음 정도로는 때를 구분할 수 없다. 시계를 보니 오후 2시 조금 넘었다. 아마도 시계가 없다면 해 저문 저녁때로 알았을 것이다.
오는 길에 시간이 조금 이른 것 같아 아들이 권하는 옥정호 부근 ‘비밀의 정원’ 카페에 들어갔다. 자몽 주스 한 잔과 빵 한 조각으로 가성비 아깝지 않은 빗속에 젖어가는 옥정호에 눈을 떼지 못했다. 5살짜리 외손자도 어린이용 스튜디오 등을 두루 살펴보더니 ‘엄마 참 좋다! 우리 여기서 살자’라고 나이는 달라도 좋은 분위기 느낌은 같은가? 보다. 빗속의 강천사 하이킹을 마무리하고 전주에 돌아오니 날씨가 언제 그랬냐? 하듯이 시치미를 떼면서 맑은 하늘을 보여준다.
오늘은 비 때문에 평상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곳에 눈여겨보면서 그들과 대화할 수 있어서 좋았다. 비가 와서 제대로 된 피서를 못할지언정 우리는 농자천하지대본의 자손들이다. 가뭄 때문에 가슴이 타들어가는 농부들을 위해서 고마운 비 감사한 비로 천지신명께 감사해야겠다. (2022.8.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