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삶과 목적 사도행전 2장 43-47절 이성희 목사 “43.모든 혼 위에 두려움이 임하고 사도들을 통하여 이적들과 표적들이 많이 일어나더라. 44.믿은 모든 사람들이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45.자기 소유와 재산을 팔아 각 사람의 필요대로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며 46.또 날마다 한마음이 되어 성전에 거하고 집에서 집으로 돌아가며 빵을 떼면서 단일한 마음으로 즐겁게 자기들의 음식을 먹고 47.[하나님]을 찬양하며 온 백성에게 호감을 얻으니 [주]께서 구원받아야 할 자들을 날마다 교회에 더하시니라.”(행 2: 43-47) 우리 민족을 배달민족이라 부릅니다. 배달민족이라 배달 안 해 주는 게 없지요? 원래 배달이란 ‘밝달’이란 말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이 말은 밝은 땅을 의미합니다. 우리 민족은 본래 밝고 따뜻한 삶을 추구한 민족이었습니다. 한(韓)이란 말도 환(桓)이란 말과 같은 말이라고 합니다. 밝고 환하고, 크고 하나인 삶을 추구했던 한국인입니다. 그런데 오래전 일이지만 우리 사회의 인륜은 추락하고 극악의 상태에서 헤매는 것 같습니다. 어머니를 무참히 살해한 뒤 방치하고도 훔친 로또 복권이 1등에 당첨돼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30대 남자가 얼마 전 무기징역을 받았습니다. 젊은 어머니를 살해하고 아기를 유괴해 자기가 낳은 아기로 위장하던 여인과 살해와 유괴를 맡았던 해결사들이 붙잡혔습니다. 이런 무참한 인륜의 파괴를 충격 없이 보고 사는 우리입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3장에서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부모를 거역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라고 하더니 그 말대로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인륜의 파괴, 인면수심의 사태는 극단적인 물질 지향적 삶의 결과입니다. 이 모두가 삶의 목적을 상실한 세태 때문입니다. 이런 때에 우리라도 삶의 목적을 상실하지 말아야 합니다. 분명히 사람의 본문을 찾아야 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을 확고하게 지향해야 합니다. 아브라함헤쉘은 “삶이란 우리 자신의 재산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이다. 삶을 성스럽게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그 소유권이다”라고 했습니다. 삶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 삶의 목적을 되찾는 것입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가들은 그림을 그리기 위하여 매우 큰 화폭이 필요하였습니다. 그것은 묘사하는 장면들 속에 종종 사물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수많은 천사들도 포함시켰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들은 삶을 보다 넓은 안목에서 바라봄으로써 중세의 암흑시대로부터 빠져나올 출구를 찾았다고 합니다. 우리도 넓은 안목에서 나의 삶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심장으로 세상을 바라봄으로 현대의 암흑시대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네로의 스승이었던 세네카는 삶 전체를 통해서 사람들은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인생을 통해서 죽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삶은 그 자체로 이미 어렵습니다. 엉뚱한 방향으로 가면 훨씬 더 어렵습니다. 우리는 삶의 목적을 가지고 분명한 방향으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에 하나님의 목적이 우리를 통하여 성취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 과정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다시 확인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예배입니다. 사도행전 2장의 마지막 부분은 초대교회 성도들의 모범적 삶을 일러줍니다. 행2:46에는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라고 합니다. 47절에는 “하나님을 찬미하며”라고 합니다. 이들의 모범적인 삶은 예배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이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성전 예배였습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배는 그들의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교회란 말의 어원은 ‘에클레시아’입니다. 불러 모았다는 뜻입니다. 모이면 여러 가지 일을 합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입니다. 모여서 예배만 해도 문제는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일을 한다고 해도 예배하지 않으면 그 모든 일이 아무 가치도 없습니다. 또 다른 어원은 쉬나고게'(συναγωγη)입니다. 이 말은 함께 모인다는 뜻입니다. 교회의 어원은 모인다는 뜻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도 모임으로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모여 예배함으로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교회가 있는 곳에 예배가 있습니다.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최대의 삶의 목적입니다. 구원이란 새로운 삶은 예배를 위한 새로운 시작입니다. 출애굽기 5:1에는 “내 백성을 가게 하여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위해 명절을 지키게 하라, ”고 합니다. 5:3에는 “우리가 사흘 길쯤 사막으로 가서 {창조주} 우리 [하나님]께 희생물을 드리게 하소서”라고 합니다. 이집트 탈출의 구체적 목적은 제사였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였습니다. 예배는 중요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목적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예배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자는 반드시 예배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자는 예배하기를 즐거워해 합니다. 구원받은 자는 예배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예배란 문자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입니다. 예배는 어떤 예배이든지 하나님을 높이고 섬기고 찬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예배가 오히려 사람에게 시험이 되기도 합니다. 가인과 아벨은 똑같이 하나님께 제사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은 성스런 제사의 일로 가장 가증스러운 살인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제사가 그에게 시험이 된 것입니다.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가 시험이 될 수 있습니다. “왜 순서를 이렇게 하나? 왜 이런 찬송을 하나? 왜 기도를 저렇게 하나? 왜 설교시간에 나를 꼬집어 말하나? 왜 십일조를 해야 하나?” 이런 모든 생각들이 예배를 통한 시험입니다. 예배가 우리에게 시험이 되지 않도록 늘 영적으로 삼가야 합니다. 나아가서 예배가 오히려 저주가 되기도 합니다. 아론의 아들들인 나답과 아비후는 제사장의 직이 세습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제단에 다른 불을 드리다가 그 불로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없는 제사였습니다. 영이 없는 예배입니다. 다른 영을 통하여 예배합니다. 이런 예배가 오히려 저주가 됩니다. 영이 없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다른 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배가 영이 아닌 몸만 와서 앉아 있는 육의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닌 악령이 지배하는 예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문선명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예배도 있습니다. 다른 계시, 다른 명령으로 설교하는 예배도 있습니다. 이런 예배가 다른 불의 예배입니다. 이그나티우스 로욜라는 그의 책 ‘영신수련'에서 “모든 좋은 선택에 있어서 그것이 우리의 손에 달려 있는 한, 우리의 목표는 단순한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오직 우리가 창조된 목적인 우리 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우리의 영혼이 구원받는 것만을 고려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단순한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구원받은 목적인 하나님 찬양입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입니다. 둘째, 교제 입니다. 사도행전 2:44에는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라고 합니다. 46-47절에는 “믿은 모든 사람들이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자기 소유와 재산을 팔아 각 사람의 필요대로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며”라고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지난 교제의 모습입니다. 교제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다른 목적입니다. 교제는 자신의 희생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것을 줄 수 있어야 교제도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거룩한 교제하기 위하여 자신의 몸과 피를 친히 주셨습니다. 이것이 교제를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교제는 성도들의 필수과목입니다. 교제가 없는 예배, 교제가 없는 성도의 삶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옆에 앉아 있는 성도가 없이는 우리의 삶도 그 목적을 성취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 옆에 있는 성도들은 참 귀한 분들입니다. 신약성경에는 교제란 단어를 18회 사용하고 있습니다. 요한서신에 3회, 히브리서에 1회, 그 외는 바울 서신에 사용된 바울의 용어입니다. 18회중 하나님과의 교제로 사용된 것이 7회입니다. 사람과의 교제로 사용된 것이 8회입니다. 연보란 이웃을 돕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 3회입니다. 연보도 소중한 교제라는 것입니다. 교제란 말은 라틴어에서는 코뮤니오(communio)라고 합니다. 뜻은 함께 됨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어도 컴뮤니언(communion) 혹은 fellowship이라고 합니다. 나아가서 교제란 참여하다(participation)란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십자가의 종교라고 합니다. 수직과 수평의 관계가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와 더불어 사람과의 교제가 있어야 참 기독교의 삶입니다. 빌립보서 1:4-5에서 바울은 “너희 모두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항상 기뻐하며 간구함은 첫날부터 지금까지 너희가 복음 안에서 교제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절을 개역성경에서는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고 합니다. 교제를 참여하고 합니다.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는 것이 복음에서 교제하는 것입니다. 교제는 복음의 사역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하나님과의 교제와 사람과의 교제가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찬송과 기도 그리고 묵상을 통하여 가능합니다. 사람과의 교제는 대화와 위로와 친밀한 인간관계를 통하여 가능합니다. 존,오트버그는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랑 이야기’라는 책에서 “사랑받는다는 것은 선택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선택을 받을 때 나는 무언가 기여를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인식됩니다. 선택을 받는 것, 그것은 누군가가 나를 원한다는 의미입니다”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엄청난 파워를 가지고 사역에 동참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6에는 “거룩한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인사하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2:9에는 “또 기둥같이 여겨지던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은 내게 주신 은혜를 깨닫고 나와 바나바에게 오른손을 내밀어 교제를 청하였으니 이것은 우리는 이교도들에게로 가고 그들은 할례자들에게로 가고자 함이라.”라고 합니다. 성경은 교제를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교제는 중요한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교제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탈무드에는 “하나님 앞에서는 울고 사람 앞에서는 웃으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울음과 사람 앞에서의 웃음이 다 교제입니다. 최근 교인들의 성향은 교제를 굉장히 강조하고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예배 공간, 교육 공간도 중요하지만 교제 공간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교회마다 교제 공간을 확보하느라 애씁니다. 교회가 이젠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긴 탓도 있겠지만 이제는 교제 공간이 없고 쉴 자리가 없으면 교회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차도 마시고, 얘기도 하고, 쉬고, 부모와 아이를 기다리고, 아기를 돌봐주는 공간이 필수적이 되었습니다. 교제의 자리는 참 중요한 자리입니다. 교제가 중요하듯이 교제 공간도 중요한 것입니다. 셋째, 전도 입니다. 행2:47절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온 백성에게 호감을 얻으니 [주]께서 구원받아야 할 자들을 날마다 교회에 더하시니라.”고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은 결과적으로 전도가 되었습니다. 또 다른 사도 행전적인 삶은 삶 그 자체가 전도였습니다. 초대교회는 전도하는 교회였습니다. 복음전파는 예수님의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입니다. 우리의 책임이며 소명입니다. 복음전파는 절대로 놓칠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의 끝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아멘”(마 28:20), “말씀을 선포하라. 때에 맞든지 맞지 아니하든지 긴급히 하라. 모든 오래 참음과 교리로 책망하고 꾸짖고 권면하라.”(딤후 4:2), “이 일들 중 어떤 것도 결코 나를 움직이지 못하며 또한 내가 나의 생명도 내게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니 이것은 내가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님께 받은 사역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기쁨으로 끝마치고자 함이라.”(행 20:24). 그 외에도 전도에 대한 말씀은 무수히 많습니다. 전도에 대한 사도들과 성도들의 열정을 느낄 수 있는 성경 구절들이 무한히 많습니다. 그만큼 전도는 성경이 강조하고 있는 일입니다. 전도는 성경이 가르치는 강력한 명령입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해야 하는 지엄한 명령입니다. 전파하라는 말은 헬라어로 여러 단어입니다. ‘케루소'(κηρύσσω)란 단어가 있습니다. 이 말은 선포하다, 공포하다란 말입니다. ‘유앙겔리조’(ευαγγελιζω)란 단어가 있습니다. 이 말은 복음을 전하다, ‘기쁜 소식을 말하다‘ 입니다. ‘카타레고(καταλεγω)’란 단어가 있습니다. 이 말은 남김없이 말 하다는 말입니다. ‘라레오’란 단어가 있습니다. 이 말은 얘기하다는 말입니다. 복음 전파는 다양한 단어로 명령하고 있습니다. 담대하게 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좋은 소식을 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알뜰하게 얘기해 줘야 할 때가 있습니다. 자근자근 풀어줘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전도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방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잔해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에 빚 갚는 자세로 전도에 열심을 다했습니다. 좀 거부하고, 좀 반대하고, 좀 핍박하고, 좀 박해한 사람들이 믿으면 전도 잘 해요. 왜냐하면 복음에 빚이 있거든요. 미안한 생각에서 더 열심히 전도하게 됩니다. 그런데 누가 제일 전도 못하는지 아십니까? 예수임을 열심히 믿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주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밖에 없기 때문이랍니다. 그런데 아직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최근에 나온 ‘한국교회 미래 리포트’란 자료집이 있습니다. 저도 이 책에 관련했고 글도 썼습니다. 이 책에 나온 자료에 의하면 전도는 가족이나 이웃, 친구를 통하여 거의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던 사람이 제 발로 걸어오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소위 관계전도가 중요한 것입니다. 나아가서 이미지 전도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이미지 관리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성장하고 성숙한 교회는 끊임없이 전도열에 불타는 교회라고 합니다. 전도열정은 복음열정입니다. 우리 교회도 이런 열정이 불타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전도의 불꽃이 튀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전도는 목숨을 거는 일입니다. 헬라어에서 증거라는 말은 순교라는 말입니다. 증거와 순교는 같은 단어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전도하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목숨을 걸 일도 없으니까 전도의 열정도 약한 것 같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사실이 아닌 거짓된 일에 목숨을 걸었습니까? 세상에 거짓에 목숨을 걸 사람은 없습니다. 무슬림들은 살려고 전쟁하는 것이 아니라 죽으려고 전쟁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전쟁은 끝이 없고 무서운 것입니다. 알라 신을 위하여 죽으면 천당에 가고 천당에 가면 일곱 부인을 준다고 한답니다. 그래서 목숨을 걸 수 있습니다. 이런 데도 목숨을 거는데 복음은 사실인데도 목숨을 걸지 않으면 되겠습니까? 오래전에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가 화제였습니다. 이런 적 그리스도, 반 그리스도적인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진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인간으로 묘사하고, 그리스도교를 거짓된 사기 집단으로 묘사하는 소설이 인기를 얻습니다. 저는 이런 일을 볼 때마다 그리스도교야말로 참 종교이며 진리라고 확신합니다. 여러분, 살만 루시디란 작가를 아시지요? 영국국적의 인도인 소설가입니다. 이 사람이 ‘악마의 시’라는 소설에서 알라를 모독했다고 이란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호메이니는 살해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는 지금도 도피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어느 신문사에서는 루시디를 지지하는 사설을 썼다가 폭파당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 댄 브라운을 살해 명령을 받고 있습니까? 생명에 위협을 받고 있습니까? 오히려 그는 지금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돈방석에 앉아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만 봐도 기독교가 참 종교가 아닙니까? 그리스도를 잔해하는 소설로 자신의 명예를 얻습니다. 물질을 얻습니다. 초대교회 영지주의라는 이단이 있었습니다. 영지주의(Gnosticism)란 ‘그노시스(γνωσις)’란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지식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지식을 최고의 가치로 여깁니다. 영지주의적 해석은 이렇습니다. “인간의 문제는 죄가 아니라 자기 인식의 결여라는 것이 핵심이다”고 합니다. 죄사함이 아니라 자기교화가 목적입니다. 그런데 ‘다빈치 코드’는 영지주의 복음서들을 신약성경보다 더 신빙성을 두고 쓴 소설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하여 딸을 낳았다고 합니다. 그 후손이 프랑스 메로빙 왕조를 세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카톨릭의 시온수도회가 이 사실을 알고도 은폐하고 있었습니다. 시온수도회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아이작 뉴턴, 빅토르 위고 등이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최후의 만찬에 사용되던 성배는 사실이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의 시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가 교회를 계승하기를 원했지만 베드로가 시기하여 마리아를 창녀로 선언하여 지도자의 역할을 박탈하였다고 합니다. 시온수도회는 이런 비밀을 숨겨왔는데 회원인 다빈치는 이 비밀을 그림에 표현하였다고 합니다. 최후의 만찬 그림의 예수님 곁의 예쁘장한 얼굴은 막달라 마리아라는 것입니다. 카톨릭의 ‘오푸스데이’라는 단체는 이 사실을 은폐하는데 총력을 기울인다는 소설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복음에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반 기독교적 소설에 대하여 분명한 잘못을 알아야 합니다. ‘다빈치 코드 깨기’라는 책을 보세요. 참 명확하게 기독교의 거짓을 파 해친다는 다빈치 코드의 거짓을 파 해치고 있습니다. 지금 인터넷에도 반기독교 사이트가 많이 있습니다. 반기독교 서적과 소설이 많습니다. 기독교 흠집 내기에 결사적인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의 전도는 너무 미온적입니다. 전도는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결사적이어야 합니다. 위에서 말한 ‘한국교회 미래 리포트’를 보면 교인들 89%가 교회의 존재 목적을 교인들의 가족을 돌보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11%만이 불신자를 인도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반면 목회자들 90%가 불신자를 인도하는 일이라고 했고 10%만이 교인들을 돌보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교회의 목적을 묻는 질문에서 교인들과 목사들의 대답이 크게 다르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목회자들은 90%가 전도하는 일이라고 하지만 성도들은 자신들을 관리해 주기를 바라고 전도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이 보입니다. 제가 오래 전에 전도왕이란 별명을 가진 어느 집사님을 만났습니다. 이 분은 예수그리스도를 믿은 지가 얼마 안 된 TV 카메라맨이었습니다. 이 분이 친구의 전도로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원래 술을 좋아하고, 예수님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집안에서 자란 사람인데 친구가 얼마나 끈질기게 밥을 사주고 졸라대는지 결국 친구에게 밥 얻어먹은 죄로 한번 나와 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자기가 아주 끈질긴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방송국 사람들이 이 사람에게 걸렸다 하면 교회에 안 나오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게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그를 만나면 피해 다녔다고 합니다. 저와 함께 식사하다가 이분이 중간이 일어났습니다. 어느 방송국 기사가 방송 끝날 시간이 되어 문 앞에서 그를 만나 전도해야 한다고 미리 간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그가 배운 대로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것입니다. 전도는 열심히 하는 것 밖에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전도의 요령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령은 열정입니다. 끈기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에 충실한 거듭난 삶은 전도에 열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전도는 그 대가도 멋집니다. 다니엘서 12:3에는 “지혜로운 자들은 궁창의 광채같이 빛나고 많은 사람을 의로 돌아서게 하는 자들은 별들과 같이 영원무궁토록 빛나리라.”고 합니다. 전도는 큰 보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결론입니다. 이집트 카이로市 중앙에 우뚝 솟은 산이 있습니다. 마치 서울의 남산 같이 올라가면 카이로 시내가 다 내려다보이는 산입니다. 이 산을 ‘모카탐’이라 부릅니다. ‘모카탐’이란 말은 아랍어로 베어냈다는 뜻이랍니다. 그 산의 반대편에 바위가 움푹 파인 천연 동굴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의 이름은 구두쟁이 성 사만(St. Samaan) 교회입니다. 성 사만은 10세기 사람입니다. 이 사람과 다른 여럿이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라는 뜻의 ‘키리에 엘레이손’을 기도하는 가운데 바위가 떨어져 나갔습니다. 이 때 떨어져 나간 바위가 100톤 이상이 되었답니다. 산에서 바위가 떨어져 나가서 생긴 동굴에 교회를 세워 동굴 교회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참 아름다운 천연 동굴인데 이집트가 이슬람 국가이기 때문에 이 교회를 명물이 되지 못하기 위하여 들어가는 좁은 입구가 완전히 쓰레기 동네가 되었습니다. 성 사만은 구두를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구두를 고치러 온 어느 여인이 다리를 올리면서 여인의 맨다리를 보았습니다. 성 사만은 여인의 다리를 본 것이 가책이 되어 자신의 칼로 한쪽 눈을 찔렀습니다. 성경에서 눈이 범죄 하면 한 쪽 눈을 가지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는 말을 실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성 사만은 자신의 전 삶을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는 예배하며, 경건하게 일하며, 전도하며, 섬기며 살아서 성자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에 자신의 삶을 올인 한 것입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이런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에 너무 소홀합니다. 말씀대로 문자적으로 사는 것도 우습게 생각합니다. 의미만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하지만 의미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런 점들이 참으로 안타깝고 아쉽습니다. 이제 우리 다시 일어나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을 향해 전력투구합시다. 목적을 향해 질주합시다.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답게 목적을 향해 올인 하는 성도가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