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2월 12일 북한 김정일과 당 간부들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국제부 비서 황장엽 선생(1923~2010)의 망명소식에 대경실색하였다.
북한은 처음에는 황 비서가 일본에서 개최한 주체사상국제연구토론회에 참석하고 돌아오다가 중국에서 한국의 정보기관에 의하여 납치되었을 것이라고 떠들었다. 망명할 것 같으면 자본주의 나라인 일본에서 망명하는 것이 편하지 굳이 북한과 관계가 좋은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 망명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하여 김정일의 특별지시를 받은 국가안전보위부의 대외반탐국(3국) 성원들과 인민군 정찰국 산하 특수부대 요원들, 재중국 요원 등 거의 500명이 실제로 베이징의 한국대사관 쪽으로 파견됐다. ‘납치된’ 황 비서를 구출하는 작전이었다. 당시 평양의 이 작전 책임자는 “여차하면 1000명을 더 파견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베이징에 파견된 북한 요원들이 한국대사관을 포위하고 습격을 단행하기 직전 중국 당국이 강력히 반발했다. 자국 영토에서 그런 상황을 허용하지 않겠다며 무장경찰부대를 동원, 북한 요원들을 포위하고 압박한 것이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북한 고위간부들은 중국과의 관계가 나빠질 수 있기 때문에 한국대사관을 습격하는 것은 무리라고 김정일에게 말하였다. 그러나 김정일은 중국과 관계가 악화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전쟁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중앙당 비서가 납치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황 비서가 납치된 것인지, 망명한 것인지를 빨리 확인하라고 하면서 책상에 앉아 망명?, 납치? 라는 글을 수백 번도 더 썼다고 했다. 그러다가 중국주재 북한대사관 안전참사(국가안전보위부 3국에서 파견한 보위부 요원)로부터 황장엽 비서가 납치된 것이 아니라 본인의 의사에 의해 망명한 것이라는 보고가 들어왔다.
북한은 처음에는 황 비서가 일본에서 개최한 주체사상국제연구토론회에 참석하고 돌아오다가 중국에서 한국의 정보기관에 의하여 납치되었을 것이라고 떠들었다. 망명할 것 같으면 자본주의 나라인 일본에서 망명하는 것이 편하지 굳이 북한과 관계가 좋은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 망명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하여 김정일의 특별지시를 받은 국가안전보위부의 대외반탐국(3국) 성원들과 인민군 정찰국 산하 특수부대 요원들, 재중국 요원 등 거의 500명이 실제로 베이징의 한국대사관 쪽으로 파견됐다. ‘납치된’ 황 비서를 구출하는 작전이었다. 당시 평양의 이 작전 책임자는 “여차하면 1000명을 더 파견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베이징에 파견된 북한 요원들이 한국대사관을 포위하고 습격을 단행하기 직전 중국 당국이 강력히 반발했다. 자국 영토에서 그런 상황을 허용하지 않겠다며 무장경찰부대를 동원, 북한 요원들을 포위하고 압박한 것이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북한 고위간부들은 중국과의 관계가 나빠질 수 있기 때문에 한국대사관을 습격하는 것은 무리라고 김정일에게 말하였다. 그러나 김정일은 중국과 관계가 악화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전쟁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중앙당 비서가 납치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황 비서가 납치된 것인지, 망명한 것인지를 빨리 확인하라고 하면서 책상에 앉아 망명?, 납치? 라는 글을 수백 번도 더 썼다고 했다. 그러다가 중국주재 북한대사관 안전참사(국가안전보위부 3국에서 파견한 보위부 요원)로부터 황장엽 비서가 납치된 것이 아니라 본인의 의사에 의해 망명한 것이라는 보고가 들어왔다.
- 2005년 12월 8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북한인권국제대회'에서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가 연설을 하고 있는 모습.
이 단계에서 황 비서 망명에 대한 북한 당국의 설명은 다음과 같이 달라진다. ‘남조선 정보기관에 매수된 간첩인 로동당 국제부 산하 무역회사 사장이 황 비서가 일본의 주체사상토론회에서 발표할 연설문을 주체사상을 부정하는 내용으로 몰래 수정하였다. 황 비서는 이 사실을 모른 채 토론회에서 연설문을 그대로 읽는 실수를 저질렀고, 평양으로 복귀하기 위해 중국에 도착해서도 돌아가 문책받을 것을 고민하고 두려워하였다. 이때 마침 남조선으로 가자고 유혹하는 간첩의 홀림수에 넘어가 한국대사관으로 간 것이다. 중앙당 비서가 자기 의사에 의해 넘어간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황 비서가 자유의사로 망명했다는 사실들이 속속 드러나면서 간부들과 인민들을 더 이상 속이기 어렵게 되자 이런 설명도 포기했다. 결국 황 비서가 사상이 변질돼 달아났다고 선전하기 시작했다.
그후 북한에서는 간부강연과 근로자강연을 통하여 ‘황장엽은 대지주의 아들로 일제식민지 시기에 일본에서 호의호식하면서 공부를 하였지만 김일성 주석과 당에서 믿음을 주었다. 다른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미국의 침략전쟁에 맞서 싸우던 6ㆍ25전쟁 시기에도 그는 소련에서 공부만 하였지만 당에서 신임하여 중앙당 비서까지 되었다. 그러나 지주출신의 계급적 야망을 버리지 못하고 70이 넘은 나이에 가족을 버리고 도망친 비열한 자이다’라고 비평하였다. 또 김정일은 혁명가요의 가사처럼 ‘비겁한 자는 갈라면 가라, 우리는 붉은 기를 지킬 것이다’ 라고 하면서 전국적으로 자본주의 황색바람 숙청 돌풍을 일으켰다. 특히 황 비서와 관련된 중앙당 국제부와 평양시 만경대구역에 있던 주체과학연구원에서 근무하던 사람들에 대한 대대적인 피의 숙청을 단행했고, 주체과학연구원은 건물 자체를 폭파시켜버렸다.
황장엽 비서의 가족은 그날부터 즉시 외출이 금지되고 국가안전보위부의 철저한 감시 하에 자택감금되었다. 황 비서가 공개성명을 발표하였기 때문에 북한에서도 약 6개월가량은 가족을 건드리지 않고 감시만 하였다. 세계인권단체에서도 평양시 보통강구역 서장동에 살고 있는 황 비서의 가족 안부를 위해 2차에 걸쳐 공식 방문을 하였다고 하였다. 황 비서의 사택은 당시 중앙당 비서들인 전병호, 한성룡, 계응태, 김기남 등이 살고 있는 독립가옥 주택에 있었다.
하지만 조만간 숙청될 것을 직감한 황 비서의 부인은 아들 황경모만이라도 살리려는 일념으로 보위부의 감시를 늦추기 위하여 매일 새벽 온 가족이 함께 서장동에 있는 김일성사적비를 청소하는 것처럼 하면서 외부와 연락을 취하며 만단의 준비를 했다. 결국 황 비서 망명 8개월 뒤인 1997년 10월 말에 아들 황경모를 탈출시키었다. 그들을 감시했던 보위원들은 모조리 해고됐다. 황경모의 탈출과 관련하여 전국의 보위부와 보안부에는 황경모의 사진이 배포됐고 특히 국경지역을 철저히 봉쇄하라는 지시가 하달되었다.
후에 판명되었지만 황경모는 평상시에 친하게 다니던 이경두와 같이 탈출을 하였었다. 이경두의 형 이성두는 보위사령부 잠샘무역회사의 부사장이었는데 중국에 가서 한국으로 탈출하려다 보위사령부에 잡혀 총살되었다. 이에 북한 당국에 원한을 품은 이경두는 황경모의 탈출을 도와주면서 같이 도주를 하였던 것이다.
- 1997년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 망명 당시 중국 경찰이 베이징 한국대사관 영사부 건물 앞을 삼엄하게 경비하고 있다.
그 후 11월 말, 보위부에 잡혀간 황경모와 그의 어머니 외에 황장엽 비서의 온 가족은 함경남도 요덕군에 있는 보위부 15호 관리소에 이주민으로 잡혀가고 황경모와 그의 탈출을 주모한 어머니는 12월 말경 보위부에서 비밀리에 처형당했다.
이렇게 김정일은 독재와 폭압정치를 반대하며 모든 것을 버리고 단호히 한국으로 망명하였던 황장엽 비서를 민족반역자로 낙인찍으며 온 가족을 숙청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