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날마다 김치찌개 김칫국 날마다 날마다 콩나물국 콩나물 날마다 날마다 두부찌개 두부국 날마다 날마다 된장찌개 된장국"
이 노래는 이승만 대통령이 4.19이후 스스로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 난 후 하와이로 건너가 교포가 내 준 30평짜리 낡은 아파트에서 5년여를 궁핍하게 생활을 하면서 고국 음식을 그리워하자 프란체스카 여사가 서툰 우리말로 노래를 만들어 불러주고 대통령도 따라 부르던 노래다.
프란체스카 여사 친정에서 보내 준 옷가지를 담았던 박스를 옷장으로 쓰고 이발비를 아껴 고국행 여비를 모은다고 프란체스카 여사가 직접 이대통령의 이발을 해주었다. 교포들이 조금씩 모아주는 돈으로 연명하며 늙은 부부는 손바닥만 한 식탁에 마주 앉아 고국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렸다. 우리 자유대한민국을 세운 건국 대통령이 말년을 보내신 모습이다. 1962년, 꿈에 그리던 귀국이 좌절되자 하와이 공항에서 쓰러져 어느 요양원에서 1965년 7월19일 9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 건국대통령,
해방 후 김구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좌우 합작을 해서라도 통일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공산주의의 실체를 이미 파악한 이승만은 ‘공산주의자와 타협하면 결국 공산주의 나라가 된다’ 라는 확고한 신념으로 남로당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1948년 제주 4.3.무장 폭동, 같은 해 10월에 일어난 여수 순천 군 반란 사건 등을 진압하는 등 좌익들의 온갖 방해공작을 물리치고 1948년 8월 15일 자유대한민국을 건국하기에 이른다. 이승만에게는 공산주의의 실체를 알고 미국의 잠재력을 내다보는 혜안이 있었다. 어지러운 구한말 모두가 중‧일‧러만 바라보고 있을 때 청년 이승만은 수평선 너머의 먼 나라 미국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를 19세기. 한국의 콜럼버스라고 부른다.
이승만의 건국이념은 무엇인가? 1. 「자유민주주의」 제일 먼저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고 나섰다. 제1의 소중한 가치다. 2. 「자유시장경제」를 들고 나왔다. 3. 「한미동맹」을 큰 가치로 여기고 건국이념에 담았다. 굳건한 한미동맹을 바탕으로 자유 시장 경제체제를 유지 하였기에 오늘날 세계경제 10위권에서 풍요롭게 살고 있는 것이다. 4. 「기독교입국론」이다. 자유민주주의 종주국이라 할 수 있는 미국과 함께 하기 위함이고 이승만이 한성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이미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1883년부터 1887년에 이르기까지 한성에 미국 공사관을 설치하고, 선교사들의 의료 및 교육 선교 활동으로 캄캄했던 조선을 개화와 문명의 세계로 이끌었다.
그는 위 네 가지의 가치를 건국이념으로 삼아 나라를 세운 것이다.
이승만이 아니었으면 「대한민국」이 생기지 않았거나, 그 당시 정치 상황으로 보아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공산주의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다. 국민 직선에 의한 대통령 중심제의 자유대한민국을 건국하였다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 이외에 건국 후 그의 혁명적인 업적을 살펴본다.
한반도에서 여성에게 투표권이 처음 주어진 것이 1948년도였다. 서구의 여성들은 투표권을 획득하기 위하여 거리로 나가 긴 시간을 투쟁했다. 하지만 한반도에서 여성의 투표권은 마치 선물처럼 부여됐다.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민주주의, 남녀평등 사상이 기반이 된 획기적인 조치였다.
농지개혁을 들 수 있다. 조선은 지주제에 골병든 농노農奴들이 농사일을 도맡아 하는 농업국가였다. 1946년 농지개혁을 먼저 시행한 북한은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이었다. 그러나 소작농에게 소유권을 주지 아니하고 경작권만 주어 결국 공산주의 체제하에 집단농장에서 혹독하게 일만 하는 체제인 반면에 이승만의 자유대한민국에서는 1950년 3월, 유상매입, 유상분배 원칙 분할상환 방식의 농지개혁법을 공포‧시행하였다. 소작농이 소유권을 취득하여 지주가 되었고 이때 사실상 지주와 농노가 없어진 것이다. 농지개혁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함께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양반과 상놈이 겸상을 하지 못했다. 농지개혁으로 매년 양곡 약 480만석을 농민들이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러면서 자녀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게 됐다.
다음, 이승만 대통령의 철학인 '교육입국론'으로 교육개혁을 단행, 1950년대 정부 예산 중 절반이 국방 예산으로 책정되는 상황에서도 교육 예산은 20% 정도 유지 하였다. 의무교육제를 실시하고 중등 및 고등교육과 대학교육 제도를 대폭 확대 하였다. 이로 인해 1945년 80%가 넘던 문맹률이 1959년에는 15%까지 낮아졌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들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6.25 전쟁 중 미국이 휴전을 추진하는데 반대하고 북진통일을 강하게 주장하였으며, 1953년 6월 미군 지휘 하에 있던 반공포로를 일방적으로 석방하는 과감하고 전격적인 조치를 취했다. 지금 생각을 해봐도 적화 위기에 빠진 한국을 구하러 온 미국에 맞서 어떻게 이런 대담한 조치를 취했을까? 이승만이 아니고서는 누가 우리를 도우러 온 강대국 미국에게 맞서고 저항할 수 있었을까 놀라운 일이다. 한국의 동의가 없어도 미국은 휴전을 추진할 수 있는 당시의 상황이었다. 그러함에도 불고하고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휴전 제안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을 것을 강력하게 요구 하였다. 미군이 철수한 후 북한이 다시 남침을 할 것으로 내다 본 탁월한 선택이었다.
결국 미국으로부터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의 약속을 받아내고 1953년 8월 8일 가조인을 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1일 워싱턴에서 정식 조인이 이루어졌다. 미군은 이 조약에 따라 휴전선 일대에 미군을 배치하여 북한의 재 남침 의지를 봉쇄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굳건한 한미 동맹을 기반으로, 국제사회의 원조를 헛되이 쓰지 않고 교육과 경제 개발의 주춧돌을 놓기 시작했다. 경제 발전을 위한 레일을 이승만 대통령이 깔아 놓은 것이다. 이 레일 위를 박정희라는 기관차가 힘차게 달리고 달려 한강의 기적을 이루고 오늘날 우리는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유일하게 원조를 하는 나라로, 세계 경제 10위권에서 국민들이 풍요롭게 살고 있는 것 아닌가. 이러함에도 우리나라는 건국절이 없으며 건국대통령 기념관 하나 없는 나라다. 제대로 된 나라 같으면 광화문 광장을 이승만 광장으로 명명하고 이승만 광장을 비롯한 전국 주요도시에 건국대통령 동상을 세웠어야 했다. 부디 국민들이 깨어나기를 바라며 1월 25일에 열리는 영화 『건국전쟁』 시사회에 청소년을 비롯하여 많은 시민들이 보기를 기대한다.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건국이념과 업적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The Birth of Korea)" 가 「당신이 지금까지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대한민국 건국의 역사! 그 역사의 중심에 있었던 이승만 대통령의 땀과 눈물, 투쟁」이라는 주제로 '24. 1. 12. 서울에서 시사회가 열린데 이어 전국 각 도시에서 시사회가 계획되어 있다. 대전에서는 1월 25일 저녁 7시에 메가박스 대전점에서 시사회가 열릴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