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산1구,율리(栗里) 마을은 군청소재지에서 동쪽으로 약 18㎞, 면 소재지에서 동쪽으로 2㎞지점에 위치한 해발 100여미터의 중산간 마을이다. 목포~여수간 국도 2호선이 마을 앞을 통과하여 교통이 매우 편리하며 마을 주변에 밤나무가 울창하게 둘러싸이니 전원마을로 1966년에 축조된 저수지가 있고, 초지의 조성이 용이하여 목축이 발달한 마을이다.○ 1800년대초에 밀양박씨가 입촌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하지만, 확실한 고증은 없다.○ 마을의 동북쪽 골짜기에 지경터와 괴석골이란 마을이 있었는데 지금은 과수원만 남고 율리 마을로 모두 이거하여 폐촌이 되었다. 괴석 위에 입상의 부처가 새겨져 있었는데 폐촌이 되면서 장흥교도소로 옮겨 관리하고 있다.○ 배산의 동쪽에 새로 형성된 마을로 새터라 불린 적이 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우봉, 신배산과 더불어 배산리가 되었다.○ 1910년에는 이 마을에 인천이씨와 수원백씨가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본마을 金順壬씨가 생존에 내가 죽으면 마을 자산으로 논을 희사 하겠다고 하여 사망 후 딸 金春丹과 金玉丹자매가 그 유언을 받들어 1985년 10월 20일 배산리 답 488번지 820평을 마을에 기증하였다. 마을에서는 이 뜻을 기려 비를 세우고 매년 4월 18일 전주민이 모여 제사를 지내고 그 뜻을 기리고 있다.○ 괴석(怪石)골본 마을의 동북쪽의 작은 마을로 괴석(怪石)위에 입상(入象)의 부처가 새겨져 있다. 현재는 ‘율리’로 이거하여 폐촌이 되었다.○ 장승ㆍ입석ㆍ솟대마을의 서남쪽에 ‘외장성 모팅이’라는 모롱이 있는데 그 곳에 장승 하나가 있었다고 전한다.
◆ 장동면 배산리 2구마을
○ 우봉마을은 군청소재지에서 동쪽으로 약 17㎞ 지점에 위치하고, 면 소재지에서는 동쪽으로 1.3㎞거리에 있는 해발 약 102m의 중산간 마을이다.○ 마을의 ‘게재’에서 보성강의 발원지가 시작되어 물이 풍부하고, 넓고 비옥한 농토가 펼쳐진 마을이다. 또한 면소재지와 인접하여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 1600년대 이전부터 안모실(안쪽마을)에 마을이 있었다고 전해온다. 지금도 기왓장, 그릇 등의 파편이 출토되고 있으나 정확한 연대를 추측하기 어렵다.○ 1757년에 보성은 대야리 강산마을에 살던 죽산인 안경조가 이곳에 나왔다가 점심을 먹고 낮잠을 청했는데 신몽(神夢;돼지꿈)을 꾸고 나서 정착하기 좋은 길지(吉地)로 여기고 터를 잡아 성촌(成村) 되었다고 전한다.○ 1747년(정묘지)에는 흥덕장씨가, 1910년(경술지)에는 죽산안씨와 영광정씨ㆍ위씨가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우봉 향우회2001년 3월 30일에 결성된 모임(주관: 안병우)으로 타지로 떠난 사람과 마을 주민이 전북 무주구천동에서 첫 모임을 갖고 매년 4월에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있다.○ 안춘섭 가옥기와지붕의 7칸 한옥으로 1800년경에 지었다. 사랑채를 뜯어다가 안양면 경로당을 축조하는데 사용하였다. 선대에 천석궁을 지내 마을에서는 이 집을 천석궁 집이라 한다.○ 경모각 (敬慕閣) 마을 입구에 위치하여 죽산안씨 청은 (淸隱) 규용(圭容)의 기적비이다.
◆ 장동면 배산리 3구마을
○ 행정구역으로 배산3구에 해당하는 신배산 마을은 장흥군청에서 북쪽으로 약 16㎞와 면소재지에서 북동쪽으로 500m거리에 위치하는 중산간 마을이다.○ 제암산의 줄기가 동쪽에서 불쪽으로 휘어감고 있으며, 황추산이 부드럽게 감싸고 있는 마을로 장동면소재지와 인접하여 행정ㆍ문화 등 각종 편의시설을 이용하기가 편리하다.○ 국도 2호선이 마을의 중앙을 지나고 있으며 교통이 매우 편리한 마을이다.○ 예전에는 신배산을 잔메라 불렀는데 마을의 주산이 금반옥배 형국 이어서 한자의 잔(盃)과 메(山)의 훈(訓)을 차용해서 배산으로 부르게 되었다. 마을의 이름에서 연유한 까닭인지 세상이 어렵던 시절이라, 흉년 때에도 마을의 주막은 사람들로 북적거렸으며 지금도 장동면의 주조장이 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임진왜란을 전후해서 촌락이 형성되었다고 전하지만 확실한 고증은 없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이전에는 현재의 북교리1구를 ‘응달’이라고 부르고, 배산3구를 ‘양달’이라 하여 같은 마을이었으나 응달은 신북, 양달은 신배산으로 나눠졌다.○ 행정구역을 개편하였던 초창기에 면사무소와 경찰주재소가 마을에 위치하였으나 사무실의 개축과 더불어 신북 마을로 이관되었다.○ 배산산성배산마을 뒷등에 둘레 1㎞ 높이 4m의 석성으로 언제 축조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때 개축하였으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서 활약했던 반곡 정경달 장군의 군마 조련장이었다고 전해온다. 당초에는 석성이었으나 지금은 토성으로 남아있다.○ 고인돌면사무소에서 남동쪽으로 500여미터 떨어진 배산마을에 3기가 있다. 이곳은 제암산에서 북으로 내려오는 줄기의 가장 마지막으로 주위에 청주김씨 묘가 있으며, 1,2호는 묘의 서쪽에 3호는 묘의 동쪽으로 5미터 떨어진 곳에 묻혀있어 상석의 윗부분만 보인다. 또 다른 고인돌은 장동초등학교에서 동쪽으로 50미터 떨어진 조동희씨 선산에 1기가 있다. 이곳의 지형이 옷감을 짜는 베틀모양이고 고인돌은 베틀의 채에 해당하며 ‘채바위’로 부른다고 한다.
◆ 장동면 반산리 1구마을
○ 반산1구, 외반마을은 장흥읍에서 남동쪽으로 약 16㎞ 면 소재지에서 동남쪽으로 약 2㎞떨어진 해발 약 150m의 중간산 지대에 위치한다.○ 제암산 줄기의 ‘큰산’밑이어서 서리가 빨리 내린다고 하여‘서리산’ ‘雪山’‘霜山’또는 반산(盤山)이라고 불렀다.○ 마을 앞에 1970년에 준공된 저수지가 있어 농업용수가 풍부하여 농사짓기가 매우 편리한 마을이다.○ 산 밑에 위치한 마을로 표고버섯을 생산하여 농업외 소득을 올리고 있다.○ 외반마을의 지형은 금쟁반(金盤위에 옥잔(玉杯)의 형국으로 전해온다. 쟁반처럼 넓은 들이 있고, 산 밑이어서 잔(杯)처럼 오목하게 분지를 이루고 있는 마을이다. ○ 구전에 의하면 차씨, 장씨, 안씨 등이 살았다고 하나 차씨나 장씨가 입향 한 사실은 확인되지 않는다.○ 서기 1000년 초에 보성은 대야리 강산마을에 거주하던 죽산인 안습독이 입향하여 살다가 그 후 영광정씨가 입향하여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의하여 내반, 외반, 원촌리를 병합하여 반산리라 칭하였으며 마을의 안쪽을 내반, 바깥마을을 외반이라고 칭하며 현재는 반산1구로 부르고 있다.○ 1747년 반산에는 영광정씨ㆍ수원백씨ㆍ광산김씨ㆍ남평문씨ㆍ한양조씨 ㆍ영광김씨ㆍ청주김씨가 세거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입석마을앞의 ‘독성거리’라 하는 곳에 입석이 있었으나 1986년 도에 경지정리를 실시하면서 없어졌다. 그 이후 본 장소와 가까운 곳에 다시 세웠다.
◆ 장동면 봉동리 2구마을
○ 봉동2구는 해발 487m의 황추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데 진곡마을과 장곡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장곡마을은 유유히 흐르는 양자강을 따라 장평명 녹양리, 보성군 노동면 금호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진곡마을은 고려말엽에 김해 김씨 성진이 벼슬을 그만두고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물이 맑고 산세가 좋아 며칠을 묵다가 정이 들어 정착 하였다고 전한다.○ 마을 뒤쪽으로는 황추산이 자리하고 앞으로는 웅장한 용두산이 위치하며 마을 앞으로는 양자강이 흐르는 진기한 골짜기라 하여 ‘진실’이라고 불렸으나 지금은 진곡이라 부른다.○ 마을이름이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르는 골짜기가 매우 길고 경치가 수려하다 하여 ‘쟁이실’ ‘장실’이라 부르다가 큰 인물이 출현할 마을이라 하여 장곡이라 고쳐 불렀다. ○ 1747년에는 진곡에 남평문씨와 김씨가, 1910년에는 장곡에 평산 신씨와 김해김씨가 살았다고 전하고 있다 .○ 진산사(珍山祠) : 김해인 김구와 김응룡을 모시는 사당으로 무술년에 건립하여 당시에 김구가 세워 시를 읊었다는 만하정 터가 있고 두 사람이 강회하던 양회당이 있다.○ 청계당(聽溪堂) : 평산인 신상규가 당기문을 받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의 자부 김씨가 시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최원식에게 글을 받아 당에 걸었다.○ 1983년, 1984년, 1994년에 범죄 없는 마을로 선정되어 전라남도지사와 검찰청장의 표창과 메달, 그리고 현판을 수여 받았다.○ 2004년 깨끗한 마을로 지정, 시상금 1천만 원을 받음
◆ 장동면 조양리 1구마을
○ 인구수 97, 48세대의 작은 마을로 논 50㏊밭 20㏊임야30㏊ 인구 대 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조양1구는 관호마을과 마흘(말메)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북쪽으로는 황추산이 있고, 동남쪽으로는 제암산이 보인다. 서쪽으로 는 장평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내양리, 마흘리의 일부와 장평면 탑동리 의 일부, 보성군 옥암면 묘령리 일부를 병합하여 조양리라 하였다.○ 마을 앞으로 지방도 839호선(장흥~광주)이 통과하여 교통이 편리하 고, 보성강의 상류가 흐르고 있어 농업용수가 풍부할 뿐 아니라 토지가 비옥하여 농사가 발달해 있다.○ 관호마을은 300년경 진주인 정재환이 남외리에 거주하였으나 동학란에 가담했다가 화를 피하여 처가인 양곡마을 옆인 본 마을에 정착하여 촌락을 이루었다고 한다.○ 말메 마을은 서기 1400년경에 진주인 정희장이 장흥군 남면 계산리 에 거주하다가 분가하여 보성으로 가던 중에 이곳에서 쉬다가 보성강 상류인 이곳의 물이 좋아 농사짓기에 편리해서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해온다.○ 1747년(정묘지)에는 관호마을에 진주정씨와 위씨가 살았다고 전해지며, 1910년에는 진주정씨와 보성 선씨가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민풍진흥회사건 : 1938년에 발행된 「장흥지」와 故 홍연수씨의 증언에 따르면,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마을에 105명으로 구성된 민풍 진흥회란 모임이 있었다. 1932년에 일본 경찰은 이 모임을 불순세력으로 간주하고 임원 7명이 연행되어 목포형무소, 대구형무소에서 6개월간의 옥고를 치른 후에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관호정 : 보성강 상류인 관호마을 서쪽에 있는 정자로 석대 밑으로 강물이 흐르며 앞이 트여있어 경치가 아름다워 진주인 정재환이 장흥군 부서면 남외리에 거주하다가 이곳에 관호정을 짓고 평생 학문에 정진 하였다고 한다. 현재 건물은 1970년에 중수 하였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건물 정면에 연못이 있고 좌측의 용바위 중턱에 공의 적덕비가 있다
◆ 장동면 조양리 2구마을
○ 양곡마을은 장흥읍에서 동서쪽으로 약 19㎞, 면 소재지에서 동서쪽으로 약 3㎞의 거리에 위치하는 해발 약 130m 의 중간산 마을에 위치 한다.○ 사방이 야산으로 둘러싸여 따뜻한 골짜기 마을로 봉동리로 내려가는 재와 보성읍 대야리의 ‘수미재’로 넘어가는 ‘양곡재’가 있으며 관호마을, 진곡마을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일제시대 때 축조한 저수지를 보유하고 있어 농사짓기에 편리한 마을이다.○ 서기 약 1000년경에 장흥읍 남외리에 거주하던 해남윤씨가 주거지를 찾아다니다가 들이 넓고 물이 좋아 농사짓기에 편리하여 정착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마을의 인근에 윤씨의 묘소가 산재해 있다.○ 이름들 떨친다는 뜻으로 ‘드랫골’ ‘揚谷’ ‘골안(內揚)’으로도 불리었다.○ 1747년에는 위씨와 파평윤씨가 세거했다고 하며, 1910년에는 진주 정씨와 위씨가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외지인이 마을을 방문할 일이 있으면 마을의 초입에서 “천석꾼 보 입시다”하고 크게 외치고 들어왔다고 한다. 그 이유는 마을에 천석꾼이 살고 있어 도움을 받고 자신도 천석꾼이 되기를 바라는 바람의 성격이 강했다.○ 도내미샘마을의 동쪽에 해당하는 ‘골안’에 있는 도내미샘은 그 수량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여름에도 손이 시려울 만큼 시원하다. 각 가정의 우물의 물이 줄어들면 도내미샘에서 물을 길러 자신의 샘에 부으면 샘물이 솟아난다고 한다.
◆ 장동면 봉동리 1구마을
○ 군청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약 20㎞, 면사무소에서 북쪽으로 약 5㎞의 지점에 위치한 봉동 1구는 마을입구에 선돌이 세워져 있으며 군보호수인 500년 된 능수버들이 휘엉청 늘어져 있다.○ 이웃마을 연동에는 방죽이 있어 운치를 더해주며 마을 앞으로는 보성강의 상류인 양자강이 유유히 흐른다. 밤실마을과 연동마을로 나뉘어지는 봉동1구는 경지정리가 완료된 들판이 펼쳐진 전원마을이다.○ 남자42명, 여자 39명 총 81명의 인구로 구성된 봉동 1구는 농가 29가구, 비농가 5가구로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 밤실 마을은 조선 중종 때 김해김씨가 보성에서 이주한 후 장흥위씨, 수원백씨 등이 입주하면서 마을을 이루었다.○ 황추산의 밑에 위치하여 마을이름이 봉동(鳳洞)이라 하며, 밤나무가 많이 자생하였다 하여 ‘밤실’이라고도 불려오다가 한문 표기로 율곡(栗谷)이라고 부른다○ 연동마을은 고려말기에 의녕남씨, 장흥마씨, 진원박씨 등 삼성이 거주하였다고 구전되나 서기 1859년 인천인 이병호가 이주하면서 촌락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종전에 살았던 씨족으로는 의령남씨, 장흥마씨, 인천이씨, 창녕 조씨, 여산송씨, 청주한씨, 천안전씨, 평산신씨, 인동장씨, 죽산 안씨 등이 있다○ 밤실재 전설 : 마을의 뒤편 밤실에서 장곡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있는데 이재를 시체가 넘어가면 마을에 재앙이 생긴다 하여 넘어가지 못하게 하며, 이 고개를 헐게 되면 또한 재앙이 발생한다 하여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양강사(楊江祠)장동면 봉동리 548지에 소재하며 조선 숙종 26년(1700)에 건립하였다. 송정 김경추와 그의 아들 서암 김기서 부자를 배향하는 사우○ 황강사(凰崗祠) 율파 김득추와 송와 김기해를 배향하기 위하여 1987년에 건립하였다.○ 마을의 사장나무 아래서 매년 음력 1월 15일에 풍년 및 무병 장수를 기원하는 제를 올린다. 제관은 고령자 중에 선출하여 동계에서 비용을 충당한다.
◆ 장동면 반산리 2구마을
○ 군청에서 북동쪽으로 약 16㎞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1㎞의 지점에 위치한 반산2구는 내반마을과 원촌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평균적으로 해발 160m의 중산간 마을이다.○ 내반마을은 1967년에 축조한 저수지를 보유하고 있어 수리시설이 편리하여 농사짓기가 편리하다.○ 원촌마을은 제암산 준령을 이은 산 밑에 평평한 분지를 이루어 함장등이라는 넓은 평야가 있어 농업이 잘 발달했다.○ 울창한 숲을 이용한 영지버섯과 표고버섯을 생산하는데 품질이 우수한다. 또한 인삼의 재배가 이루어져 농외소득을 올리고 있다.○ 내반마을은 금쟁반에 옥잔의 형국으로 전하는데, 금소반이 반상 (盤床)혹은 반산(盤山)이라고도 한다.○ 원촌마을은 금반옥배의 지형으로 금소반에 해당하며 특히 반곡(盤谷) 정경달 장군을 보신 반계사에서 관망하면 봉추산이 우뚝하고 그 중심부의 옥녀봉이 멀리 무등산과 맞닿아 있다.○ 내반마을은 삼한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전하나 확실한 고증은 없고 통일신라ㆍ고려시대에는 차씨, 장씨 등의 세거지라 전하여 왔고, 고려 공민왕 이후 광산김씨, 수원백씨, 영광정씨가 입향하여 성촌되었다.○ 원촌마을은 1590년경 영광인 반곡 정경달이 벼슬에서 물러나 조회지의와 시례를 강학하던 곳이라 하여 강당이라고도 불리웠고 정경달을 추모하기 위하여 1714년에 반계사를 중건하면서 원촌이라 부른다.○ 1914년에 있었던 행정구역의 통ㆍ폐합에 따라 반산리2구로 병합하여 장동면에 편입되었다.○ 반계사원촌마을 중앙인 반산리 339번지에 소재한 사당으로 조선 숙종 40년(1714년)에 건립하였다. 충무공 이순신, 안항 정인걸, 반곡 정경달, 제암 정명열, 모헌 임영림, 송은 정남일 등 모두 여섯 분을 봉안한 사당이다. 영재를 양성하는 서실로서 반룡재가 있는데 시례를 강수하던 곳이다.○ 수문정마을 입구에 있었다고 전해온다. 나이 든 동네 어른들에 의하면 수문정이 있었다고 전해오는 장소에 수문정수라는 큰 나무가 있었으나 현재는 고사하여 없어졌다고 증언하고 있다.
◆ 장동면 북교리 1구마을
○ 신북마을은 장흥읍에서 동쪽으로 약 16㎞거리에 위치한 해발 약 150m의 평야마을이다.○ 1977년 국도2호선의 확ㆍ포장으로 여수~목포, 장흥~광주간을 통과하는 교통의 요충지이며 각종 행정기관이 밀접해 있는 마을로 농촌지역 이면서 상가들이 형성된 복합마을이다.○ 마을 중심도로변에 벚꽃나무가 심어져 있어 봄이면 흰구름처럼 벚꽃이 화려하게 만발한다.○ 마을의 형국이 거문등, 또는 봉죽(방죽)골이라고 하는데, 만석군의 터가 있다고 전한다. 거문등은 거문고를 뜻하는데 마을에 학교가 자리하여 풍금소리가 끊이지 않으며 농협창고가 건립되어 만석군의 터가 현실로 나타났다. 또한, 마을 건너편에 채바우가 있는데 그 바위와 마을에 위치한 고인돌 사이에 베틀의 잉아가 걸려있는 베 짜는 형국이라 한다. 실제로 마을에서 베를 많이 짰으며 현재 베짜는 공장이 들어서 있다.○ 마을 부근에 지석묘가 산재해 있어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다고 추정된다.○ 장동방 때 북자문의 부분촌으로 성촌되어 1955년 행정구역 개편 때 반산리 일부를 흡수하여 북교리에 새롭게 형성된 마을이라는 뜻으로 자연마을 이름으로는 신북이고, 행정구역 이름은 북교1구이다.○ 1963년에 신북청년회에서 마이크 및 엠프시설을 설치하였는데, 이 때 장동면 전체마을에도 엠프시설을 설치해 주고 그 비용을 신북청년회의 김태기씨가 부담하였다.○ 후기구석기시대 유물 발굴2003 ~ 2004년 신북리 거문고등에서 후기 구석기유물 300여점을 발굴하여 그 중 1점은 중앙박물관에 보관하고 나머지 는 조선대박물관에 보관중이다. 약 4만여 평의 발굴조사는 추진 중에 있다. 현재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문씨열행비노정짓들 위쪽 길가에 조병학의 아내 문씨의 열행비○ 장택고현성지장동면 북교1구 신북마을에서 장평과 보성군의 경계 지점인 국도 2호선 분기점에 위치한다. 이 성은 표고 80~90m의 구릉성 야산에 축성된 퇴뫼식 토성으로 축성연대는 백제시대 혹은 그 이전으로 추정된다.
◆ 장동면 북교리 2구마을
○ 북교2구는 학산마을과 북동마을로 이루어져 있는데, 군청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 16㎞, 면사무소에서 북서쪽으로 약 1.5㎞의 지점에 위치한 해발 약 110m의 중산간 마을이다. 학산과 북동마을은 약 1㎞를 사이에 두고 위치하며 농토가 넓고 비옥할 뿐 아니라 면소재지와 인접하여 각종 편의시설의 이용이 편리하다.○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보리, 마늘 고추, 담배들을 생산하고 있다.○ 학산마을은 산세가 학의 형국이라고 전한다 학(鶴)자(字)에서 뜻을 빌려 새산으로 불리웠고 표기할 때는 세산으로 사용하다가 지금은 학산으로 부른다.○ 북동마을은 뒷산이 주마형으로 북마지세(北馬之勢)라 하는데 옛날에는 말(馬)에다 북을싣고 오다가 주마산에서 떨어뜨렸다 하여 북실 또는 북동이라 불렀고, 중동(鐘洞)으로도 표기했다. 그 후 다시 북(北)으로 변천되어 북동이라 부른다. ○ 학산마을은 조선말기에 청풍김씨가 입주하면서 촌락이 형성되었고, 그 이후에 광산김씨가 입촌하였으며 신씨, 오씨, 장씨, 염씨 등 여러 성씨가 입촌하였다고 한다.○ 북동마을은 조선중기에 원씨가 살았고, 그 이후에 여산송씨, 밀양손씨가 살았다고 전하지만 고증은 없으며 약 1680년경부터 청풍김씨 형오가 부산면 내안리에 거주하다가 선산을 구하던 중 마을이 좋아 안주 하였다고 전하며 마을에 둘레 3m, 높이 30m 정도의 감나무가 있는데 조선중기에 밀양 손씨가 심었다고 전한다. ○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방이리, 석교리, 북자리, 신월리, 세산리를 병합해서 북교와 석교의 이름을 따서 북교리로 부르고 있다.○ 1747년의 세산에는 광산김씨가, 북자문에는 김씨, 강씨가 살았다고 함, 1910년에는 청풍김씨가 세거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용화사 약사여래좌상장동면 북교리 산 43번지에 위치하며, 높이 235㎝, 어깨폭 145㎝, 머리부분 92㎝, 얼굴 크기는 65㎝, 석불이다. 조성연대는 9세기말에서 10세기 초로 추정되며 지방유형문화제 46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석재북교리 산 16-4번지에 소재하고 있는데 1941년에 건립하였으며, 청풍김씨 형조참판 형오 및 오세를 배향하고 있다. 현재는 10대 후손인 김만재씨가 관리하고 있다.
◆ 장동면 북교리 3구마을
○ 북교3구는 석교(石橋),정동(正洞),방이(芳耳)마을로 형성되었는데, 장흥군청에서 동쪽으로 약 30㎞, 면소재지에서 약 6㎞에 위치한 해발 230 ~ 260m의 산간마을이다.○ 석교마을은 물이 석간수로 매우 깨끗하고 맑아 몸에 좋다고 전해오며, 정동마을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사람들이 장수하는 마을로 알려져 있다. 또한 방이마을은 중방이와 하방이가 합하여 이뤄진 좁은 산골 마을로 물이 맑고 평화로운 곳이다.○ 석교마을의 풍수지리는 소의 꼬리에 해당된다고 한다. 그래서 ‘쇠꼬리’라 하였으나 말의 변천과정에서 쇠꼬리→석꼬리→석교리가 되었고,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石橋‘가 되었다. 고산 윤선도가 이 곳을 지나면서 有牛年洞이라 하였다 한다.○ 마을에 고인돌이 산재해 있어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석교마을은 조선중기 1623년에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고산 윤선도가 의금부도사가 되었으나 사직하고 해남으로 내려가던 중에 이곳을 지나다가 지세를 보고 ‘方竹之上 石橋之下 東半月 間 有牛年洞'이 있다.고 하였기에 조선말엽 청주한씨가 장평면 용강리에서 마을로 이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고산이 얘기한 ’방죽‘은 어디인지 알 수 없다.○ 정동마을은 조선시대 말엽에 광산인 수암 김모씨가 부산면 호계리에서 거주하다가 마을 뒤 용두산 줄기인 ‘베바우골’에 머문 것이 성촌의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본해 장흥군 장동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방이, 석교, 북자, 신월, 세산, 정암리를 통합하여 북자와 석교의 이름을 따서 북교리가 되었다. 그 후 석교, 정동, 방이를 북교3구로 구분하였다.○ 구시방죽 밑 고인돌석교마을의 장동면과 장평면의 경계부근 도로변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인 구시방죽 밑에 10기가 도로 좌우에 타원형으로 밀집해 있다. 원래 17기가 있었으나 마을진입로 공사로 파괴되어 현재는 10기만 남아있다.○ 방이마을에 처음으로 터를 잡았던 평산인 신원균씨가 실명이 되어 산제를 지내다가 영감이 떠올라 묘지 두 곳을 잡았는데, 한 곳은 의식은 무난할 곳이고, 또 한 곳은 자손이 번창할 곳이라고 한다. 그 중에 의식을 걱정하지 않을 묘지를 만년리 인천이씨에게 넘기고 나머지 한 곳에 조부를 안장하였다.
◆ 장동면 만년리 1구마을
○ 군청소재지에서 동남쪽으로 약 11㎞와 면소재지에서 서남쪽으로 4㎞의 거리에 위치한 중산간 마을이다. 동쪽으로 만년제가 있으며, 북쪽으로는 장평면으로 넘어가는 몰궁글재와 연결되고 동남쪽으로는 만년천이 유유히 흐른다. 마을 앞으로는 목포~여수 간 국도가 통과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고 농토가 비옥하다.○ 만년마을은 말의 형국이라고 한다. 주산을 매봉이라 부르지만 원래는 마봉이 아닌가 싶으며, 달리는 말채(채찍)라 하여 만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고산 윤선도가 유배생활에서 풀려나 의금부 도사를 제수 받았으나 사양하고 여생을 기거할 곳을 찾아다니다 이 마을을 지나면서 만년대지라 하였기에 만년 또는 만년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1600여 년 경에 칠원윤씨가 입주하여 세거했다고 전하고 있으나 확실한 근거는 없고 그 후 죽산안씨, 인천이씨, 함안윤씨 등이 입촌 했다고 한다. 지금도 마을의 뒷산에는 죽산안씨들의 묘소가 남아 있다.○ 마을 서쪽은 효자가 났다하여 효자골이라 하고, 동쪽밖은 옛날에 도둑들이 살았다하여 도둑골이라 했는데 1950년대 이후에 저수지 (만년제)를 막은 이후 뱀장어와 토하(새우)잡이꾼이 즐겨찾는다.○ 1747년의 만년동에는 인천이씨ㆍ김씨가, 1910년에는 인천이씨ㆍ 죽산안씨 ㆍ함안윤씨ㆍ성산이씨가 세거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석묘만년리 251번지의 청룡들 일대의 논에 지석묘 13기가 산재해 있다.○ 별신제터마을 건너편 새터뜸에 1960년대 까지는 재물을 차렸던 상석이 남아있었으나 새마을운동이 전개되면서 제상이 파손되고 현재는 상석만 남아있다.
◆ 장동면 만년리 2구마을
○ 해발 약 50m의 평야 마을로 군청소재지에서 동남쪽응로 약 10㎞, 면소재지에서 동남쪽으로 약 4㎞거리의 용두산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앞으로는 넓은 들이 펼쳐져 있고, 저수지가 축조되어 물이 풍부하고 농토가 비옥하다.○ 또한 목포~ 국도 2호선이 통과하여 교통이 편리하다.○ 유치면 국사봉의 기운이 마을로 뻗어내려 지세가 좋은 곳으로 전해온다. 햇볕의 비침이 좋아 땅에 따스한 기운이 넘친다고 전해온다.○ 처음에 천씨들이 거주하다가 어디론가 집단으로 이주했다고 전한다.○ 만수마을은 약 1700년경 인천인 이민기가 벼슬길을 마치고 장흥읍 건산리에서 말년에 노모를 모시고 후학을 가르치고자 심산유곡을 찾다가 처음으로 만수리 서당골에 이주하여 서재를 짓고 거주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 후 자손이 번창하고 장수하는 사람이 많아 만손 또는 만수라 하였으나 나중에 만수동으로 고쳐 불렀다.○ 1914년 4워 1일 군ㆍ면 통폐합에 따라 당시 용계면 지역이던 만수마을 등 11개 마을이 통폐합 되면서 만년리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른다.○ 만수사만년리 45번지에 위치하고 있음, 1946년에 건립되었다. 안유 등 6인을 배향하며, 여경재란 현판이 걸려있는 강당은 안씨문중의 재실로 사용했던 건물로 건물의 전면의 경무문과 함께 1925년에 건립되었다. 만수사는 문화재자료 제71호로 지정되어 있다.○ 해동사만수사가 위치한 경내에 위치하는데, 1955년에 건립하여 안중근 등을 배양하는 사당이다.○ 호계사남강 김영간을 모시는 사당으로 남강선생은 단경왕후의 복위를 논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1515년에 장흥으로 유배되어 장흥읍 건산리에 낙육재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다가 여생을 마쳤다. 1831년에복관 및 가선대부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이에 1842년에 부산면 호계리에 사우를 건립하여 학행과 절의를 기렀으나 1868년,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1931년에 남강선생의 묘소가 있는 장동면 만년리로 이건하였다.
◆ 장동면 만년리 3구마을
○ 장항마을은 장흥군청에서 동북쪽으로 약 8㎞, 장동면소재지에서 서남쪽으로 약 8㎞의 지점에 위치한 해발 약 50여 미터의 평야지대로 부산면 호계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본래 장흥군 용계면의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만수리, 장항리, 만년리와 함께 장동면에 편입되었다.○ 마을 앞으로 일반국도 2호선이 통과하여 목포~여수 간 차량의 왕래가 빈번하므로 교통이 편리하다.○ 마을의 지형이 마치 노루의 모가지형이라 하여 노루목이라 불리었으며 처음에는 장항(障項)으로 표기하였다가 나중에 장항(獐項)으로 고쳐서 표기한다.○ 마을에 지석묘가 분포하고 있어 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 조선 숙종 때 인천인 이인룡이 부산면 금자리에 거주하다가 분가하여 마을에 임촌하여 마을을 이루고 농사에 전념하며 살기 시작하였다.○ 그 후 10여년이 지나서 청주김씨 등이 입촌하여 성촌을 이루었다.○ 1910년(경술지)의 장항에는 인천이씨ㆍ청주김씨ㆍ낭주최씨가 세거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백정마을 옆으로 흐르는 부산천 강가의 소나무 숲이 우거진 동산에 위치한다. 조선조 의정부 좌찬성을 지낸 동촌 김린 선생이 가정사를 짓고 은거하였다. 이후 후손인 김성장이 선조의 뜻을 기려 1584년 정자를 짓고 선조라 심었던 뜰 앞의 동백나무 이름을 따서 동백정이라 하였다. 정면 4칸 건물로 도지정 문화재 자료 제 169호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영로제동백정 위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음력 10월11일에 조선조의정부 좌찬성을 지낸 동촌 김 린 선생의 조부인 학지의 제사를 모시는 곳이다. 제실의 앞에는 밭이 있고 좌대는 바위인데, 바위의 위에 세장비가 위치하고 있다.
장동면 만년리 4구마을
○ 삼정마을은 장흥군청에서 동쪽으로 약 12㎞,면소재지에서 약 4㎞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해발 약 150m의 평야지대이다.○ 논ㆍ밭이 평야지대에 해당하며 풍부한 물과 평탄한 땅으로 경지의 90%가량이 2모작을 이용하고 있으며 해비침(일조량)이 좋아 시설 농업이 발달하였다.○ 서기 1750년경 함양임씨가 집안이 어려워 영암읍 구림리에서 처가살이 형식으로 처음 마을에 입주하였다고 전해오는데 정확한 고증이 어렵다.○ 1770년경에 인천인 이재길이 만년동에서 분가하여 마을에 입주하면서 성촌되었다.○ 마을이 삼계리(만년ㆍ하산ㆍ용곡)에서는 가장 뒤늦게 형성되었으며, 마을 앞에 정자목이 세 그루 있어서 삼정이라 하였다고 한다.○ 원래 장흥군 용계면에 속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만수, 삼정, 장항을 병합하여 장동면에 편입되었다.○ 1910년(경술지)의 삼정에는 인천이씨, 죽산안씨가 세거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탑거리삼정마을 앞 정자나무에 4층석탑 1기와 만수마을 쪽 200m지점에 4층석탑이 있었는데 1945년경에 도난당했다고 전해 오고 있음○ 다수정마을안에 있는 초당으로 인천인 이원근이 공부하였던 곳이다.○ 정암 바위전설조선 중기에 마을에 거주하던 광산김씨와 영광정씨 사이에 마을 앞에 있는 바위 때문에 분쟁이 계속되자 그 수습책으로 마을 이름을 김정암(金丁岩)으로 부르던 것을 ‘金’, ‘丁’두 자를 합하여 정암(釘岩)으로 부른다고 한다.○ 정(釘)바위전설정암마을 남쪽 냇가에 있는 두 개의 큰 바윗돌로서 풍수설에 의하면 보검출갑지형이라 하여 장군이 탄생하여 갑옷을 입고 보검을 숫돌에 갈면 왜군이 전멸한다는 설에 그 바위에 정으로 구멍을 뚫었고 김씨와 정씨의 세수암이라 하여 백세유손지라고 전한다
◆ 장동면 하산마을
○ 하산리는 척동마을과 산동마을로 이루어져 있는데 척동마을은 장흥군청에서 동쪽으로 약 12㎞거리의 목포~여수간 국도 2호선과 인접하고 있다. 또한 산동마을은 척동마을에서 서쪽으로 약 4㎞를 거슬러 올라간 제암산 기슭의 산간마을이다.○ 산동마을과 척동마을이 상당히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오히려 척동마을은 용곡1구의 교촌마을과 냇가를 경계로 인접하고 산동마을은 용곡1구의 거개마을과 더 가깝다.○ 산동마을은 마을 중앙으로 맑고 깨끗한 계곡이 관통하고 있으며, 척동마을도 마을 앞으로 제암산에서 맑고 시원한 물이 흐르고 있다.○ 척동마을은 임금이 사용하는 자(尺)의 형국으로 전하며, 산동마을은 큰 뱀이 물을 먹으려는 형국이라 하는데, 특히 뱀의 머리부분에 해당한다고 한다.○ 척동마을의 입구에 지석묘가 산재해 있고, 산동마을의 최봉선씨가 소유한 밭에서 돌칸이 출토되었다는 증언 등을 따르면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산동마을은 통일신라때 「금강사」란 절이 있었던 관계로 마을이 형성 되었다고 구전될 뿐 입향시조등 자세한 유래는 고증하기 어렵다.○ 척동마을은 조선 중기에 경주최씨, 경주이씨가 머물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해 오지만 역시 고증은 어렵다.○ 척동의 북쪽에 연하동이 있었는데 지대가 높아 항상 안개가 많은 지역이라 하여 ‘연하동’이라 하였다.○ 산동마을은 6ㆍ25전쟁 이전에는 70호 정도가 터를 잡고 살았으나 전쟁 때 마을이 불타고 전쟁이 끝나고 새로운 사람들이 입주해 들어왔다고 전해온다.○ 산동마을과 척동마을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이전에는 장흥군 용계면의 노산리에 속했다.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산동, 연하, 척동을 병합하여 연하와 산동의 이름을 따서 하산리라 부른다.○ 제암산 형제바위마을에 효성이 지극한 형제가 늙은 아버지를 모시고 단란하게 살고 있었는데 어느해 아버지가 앓아눕게 되었고, 흉년까지 겹쳤다. 형제는 제암산으로 산나물을 캐러 갔다가 동생이 험한 산길에 미끌어졌는데 형이 아우를 구하려고 손을 내밀다가 함께 떨어져 죽었다. 동네사람들이 시신을 발견하고 양지녘에 묻어주었는데 며칠 후 형제가 죽은 장소에 새로운 바위가 솟아났다.그 모양이 죽은 형제의 다정한 모습과 너무 닮아 ‘형제바위’라고 불렀으며, 그 이후 제암산에 나물을 캐러 다니다 사람들이 다친일이 없다고 한다.
◆ 장동면 용곡리 1구마을
○ 용곡1리는 거개, 교촌, 월곡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거개마을은 장흥군청 소재지에서 동쪽으로 약 13㎞, 면 소재지에서 약 5㎞의 거리에 위치한 중산간 마을이다.○ 교촌마을은 목포~여수간 국도 2호선이 인접한 마을로 거개 마을의 진입로 입구에 해당하는데 군청소재지에서 동쪽으로 약 9㎞, 면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약 3㎞의 거리에 위치하는 평야마을이다.○ 월곡마을은 장동면 용산, 두료룡마을의 뒤편에 해당하는 제암산의 경사면에 위치한 마을이다. 군청소재지에서 동남쪽으로 약 12㎞, 면소재지에서 남서쪽으로 약 6㎞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거개마을은 ‘옥녀단장’형국으로 전해온다. 즉, 여인이 예쁘게 단장 하고 있는 모습이다. 닭의 머리형국이라는 설도 있지만, 그것은 마르의 주산인 ‘당메’가 ‘당목’으로 불리다가 닭목으로 발음되면서 된 것으로 추측된다. 다만 용곡리와 하산리 사이에 위치한 ‘당메’에 동제를 지내는 당집이 있었기에 그렇게 불리었을 가능성이 높다.○ 거개마을은 삼한시대 마한고기에 강상서가 있어서 이름은 알 수 없지만 마을터를 마련하고 살았다는 뜻으로 거개라 하였다고 동국 여지승람에 기록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때에는 장씨, 노씨가 거주 하였고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장 노장군이 득량만 싸움에서 공을 세웠다고 전해온다.○ 또한 동국여지승람에 마을이름이 ‘거개’라 되어있고, 고려 때에는 ‘거개소’가 있었으며 마을 앞에서 사기를 구운 흔적이 있는데 지금은 ‘거개’로 부른다.○ 1789년(정조13년)에 만들어진 「호구총수」에 따르면 용계면에 속하여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장동면이 되었다.○ 교촌마을은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1900년 대 초까지 주막이 한군데 있었다고 하는대, 장흥읍과 장동면 소재지의 중간 지점이면서 주막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1935년경에 인천인 이병두가 ‘원만년’에서 거주하다가 청룡주 근처에 집을 짓고 살았으며 차츰 마을이 형성되어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 장동면 용곡리 2구마을
○ 용곡2구는 두룡마을과 용산마을로 이뤄져 있는데, 두 마을이 약 200m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위쪽의 서쪽은 암벽으로 되어있고, 수심을 헤아리기 어려운 장엄한 ‘용문소’가 있다.○ 제암산에서 맑은 물이 흘러내리고 마을 앞으로는 넓은 들이 펼쳐져 있어 풍요로움이 넘치는 마을이다.○ 마을의 주산에 용이 머물다가 승천하였다고 전해온다. 마을 위쪽에 용추라는 폭포가 있는데 여기서 용이 나와 머물다가 승천한 산이 있다하여 마을이름도 그렇게 부른다. 다만 두룡마을은 일제시대 한자의 표기가 斗龍으로 개칭되었으나 해방직후 다시 頭龍으로 개칭하였다.○ 두룡마을은 서기 1600년경에 평산인 신수신이 곡성군 석고에서 살다가 심산유곡의 좋은 터를 찾아다니던 중에 제암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맑은 물과 마을 앞에 펼쳐진 넓은 들과 한 폭의 그림같은 용추를 발견하고 이 마을에 안주하여 터를 닦아 벼 1,000석을 곡수로 받으며 살았던 곳이라 전한다.○ 용산마을은 조선 초 중기에 장씨, 노씨가 살았다 하나 정확한 고증이 없어 알 수 없고, 마을에 와서 안주하여 살다가 장흥 위씨의 딸을 맞아 정착하였다.○ 두 마을은 조선 정조 14년에 발행된 인구총수에 따르면 용계면에 속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도 용계면에 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