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까지 그를 4번 만날 수 있었다.
린 램지는 1969년생이다.
4. 유 워 네버 리얼리 히어 You Were Never Really Here (2017) : 선명해질 수 없다.
'Here'에 대비되는 단어는 'Where'이다. 단 하나의 알파벳 'W'가 첨가되었는데도 이 두 단어 사이의 간극은 심연 그 자체다.
감상적인 표현들을 이끌어내어 그 안에서 미혹되는 쾌감을 제어할 수만 있다면 능히 '어디에'라는 단어의 자아도취성을 넘어설
수 있다. 영화는 혹은 예술은 끊임없이 'Where'를 진술하는 것으로도 부족하여 여기에 다시 'NO'를 추가시킨다. 마치 그래야만
직성이 풀린다는 듯이 혹은 그것이야말로 유일한 진리라는 듯이 포스트 모던의 우울하고 부정형의 숲으로 주체를 밀어버린다.
마지막 대사는 "날씨가 좋구나"이지만, 관객은 그것만으로 만사형통이 될 수 없음을 이미 알고 있다. 애당초 '밖'은 있을 수 없다.
장르로의 퇴행이라는 표면 진술에 주둔하지 않는다면 무엇보다 폭력에의 응징이 선명하지 않은 이면이 기이한 시선을 요구한다.
장르이면서 왜 장르의 쾌감을 거부하고, 조는 그의 친애하는 망치로 정확히 적의 머리를 가격함으로서 관객을 열혈화시키지
않는 것인지 모호하다. 물론, 전혀 폭력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총격도 전시되는데 조의 모친은 눈을 관통 살해당한다.
어쩌면 이것은 아주 작은 사소한 차이일 것이지만, 관객이 포털에서 줄거리를 읽고 기대할만한 바로 그 장면들을 외면함으로서
자신을 장르 바깥으로 외출시키고싶은 욕망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Here'는 'Where'와 'Nowhere'을 방황한다.
이유는 분명하다. 조가 망치를 동원해서 분명하게 분쇄하는 이들은 모두 허상이다. 관객들은 물론 이 정도는 능히 가늠하거니와
조가 구원하려는 소녀가 역시 조의 분신임도 즉각적으로 인지한다. 본편이 성장드라마이므로, 이 성장의 궤적 안에서 적으로
배치되는 이들은 모두 허상이다. 하지만, 그들은 동일한 맥락에서 실재이여야만한다. 이것이 조의 모친이 죽어야하는 이유다.
그녀는 장르를 위해서 기꺼이 희생당했다. 그녀가 처음 프레임 안에 등장했을 때 카메라는 그녀가 시청하고 있는 TV를 허락하지
않는다. 조와의 대화에서 관객은 그녀가 '싸이코'를 시청했음을 인지하고, 조의 영화 속 살인범 흉내가 모친을 향함을 감내한다.
물론, 모친을 조가 살해하지는 않는다. <싸이코>에서 살인범은 모친을 살해했는가가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이유는 살인범이 여전히
엄마의 그늘 안에 존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조가 모친을 존속살해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모친이 눈을 관통당했다는
사실이다. 조는 모친의 눈을 피할 수 있게되었고 오직 그 사실이 중요하다. 가장 머물고싶지 않은 자장은 모친의 것이다. 그녀는
조에게 구조와 도피의 이중적인 장소를 지칭하는 육체화다. 조는 이제 (거의 보여지지 않는)부의 얼굴과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무자비한 폭력으로 승계함으로서 동일화되면서 동시에 이질화시켜야하는 시간 위에 서 있다. 그건 유통기한 지난 '크림치즈'다.
그것은 여전히 냉장고에 보관되어 있다. 모친이 아직도 조의 20년전 여자친구 이름을 기억하듯 말이다. 애석하게도 TV 속 영화는
다시 보여지지 않지만, 관객은 이후 영화 <쇼생크 탈출>를 인지할 수 있다. 멕시코인들이 태평양을 '지와타네호'라고 호명하며
'기억이 멈추는 곳'이라 말할 때, 그것은 조의 내면에서 소용돌이쳐 '멈추는 것'을 넘어서야함을 요청한다. 하지만, 엔딩으로 다시
되돌아가서 반문하건대 이는 과연 가능한가. 누가 능히 스스로를 넘어설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건 고루한 포스트 모던의
정체성 균열이나 고정의 불가능성만을 지시하는 바가 아니다. 뜬금없지만, 이건 주체를 공산품화해버린 자본 너머의 문제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99377B3A5ADF38C137)
무척 관습적이라 비판받을만한 엔딩임에도 불구하고 거기 하나의 동작이 있음은 믿음직스럽다. 조는 자신의 머리를 관통시킨다.
하지만, 이것은 당연하게도 끝이 될 수 없다. 자신에게도 핏방울이 번졌음에도 불구하고 종업원은 전혀 상관하지 않고 평소대로
행동한다. 거기에는 요금 계산서가 놓인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인물에게서 대사가 조의 시신 위로 던져진다. "좋아 보인다"
이 문장은 의문문으로 위장된 강조문이 아닌 단언이다. '죽음은(정확히는 자살은)좋아보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그는 죽은
삶을 지속했고 그 경로 안에 허상들을 망치로 해결했지만, 교차편집과 인서트 장면의 나른함으로 충분히 자기포박을 행했다.
관객은 성장 장르극 엔딩의 쾌감이 제대로 실현되지 않은 조와 니나의 '떠남'을 목도시키지 않는 본편의 현명함과 마주하게된다.
조니 그린우드의 탁월한 선곡을 방음화한다해도 관객이 볼 수 있는 조의 마지막 모습은 그가 음료를 빨대로 들이키는 행위다.
조와 니나가 요금을 계산하고 어디로 가는가 따위는 중요하지도 않거니와 관심사가 아니다. 본편은 잠시의 암전을 배치하고
텅 빈 자리만 응시한다. 이것이 본편의 엔딩이라는 것을 망각하지 말자. 사람이 나갔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공허'가 중핵이다.
장르극이지만 도저히 장르극일 수 없는 본편의 좌표는 이로서 생성된다. 액션도 없고 성장도 없다, 잔여물은 죽음 이후의 無다.
영제에서 'NEVER'만으로 부족했는지 간곡하게도 'REALLY'을 추가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일종의 부여잡음의 호명. 엔딩에
이르러 비로소 관객은 'Here'가 어떻게 ''Nowhere'가 되는지 인지하게 되었다. 물론, 친절하게도 영화는 'Where'도 추가한다.
사라짐을 곧 성장이라고 할 수 있을까를 뒤집자면 성장은 결국 보여질 수 없는 것이 된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성장은
보여지지 않음을 넘어서서 존재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이제 본편의 속내를 들여다봐도 좋을 지점에 도착했다. 이제 '케빈'을
말해야할 때라는 의미다. 전작에서 관객은 '케빈'과 그의 '모친' 중 누구도 혹은 그 둘을 동시에 승인함을 중지하게 된다.
<케빈에 대하여>는 단순히 모성애의 본질주의에 대해 발악하며 부정하려는 광기의 반론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은 지금
바깥으로 나갈 수 있습니까?'라고 묻고 세계 지도를 펼치고 동시에 아들의 자리를 포개어서 공제될 수 없는 부채 의식을
공개하는 난지도였다. 전작의 결말부가 교도소의 면회라는 장소성에 배정됨을 기억한다면, 본편의 엔딩에서의 두 인물의
부재로부터의 공허를 겹칠 수 있을 것이다. 갇히거나 혹은 아무도 없거나 중에 당신은 어느 쪽을 선택하기를 원하는가?
여기에는 해답이 없다. 린 램지는 장르 안에서 액션을 허락하지 않고 성장도 자결로 웃어넘겼다. 여전히 숨쉬기는 불가능하다.
조가 집으로 돌아와 모친이 잠자는 것을 발견하고 안경을 벗겨낼 때, 모친은 '속았지'라고 말하고 두 사람은 웃는다. 본편에서
거의 유일한 화기애애함은 거짓으로부터 돌출된다. 그리고 모친이 실제로 죽었을 때 조는 안경을 다시 벗겨낸다. 대답은 그리
중요하지 않지만, 모친은 <싸이코>가 무섭다고 말했고, 조는 암살자에게 모친이 '무서워했나?'라고 물었다. 실제 무서운 것은
영화이고 진짜 죽음은 잠으로 인해 감지할 수 없다. 조의 자살 역시 그렇다. 본편은 <케빈에 대하여>를 거슬러 <모번 켈러의
여행>에 이른다. 그 여행의 끝이 어디이고 무엇인가를 알 수 없듯이 본편은 조를 성장-구원할 의사가 없다. 본편은 아마도
페미니스트들이 그토록 폄하하는 바처럼 로리타 컴플렉스를 경유하는 아저씨들의 못난 퇴행기가 되고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유 워 네버 리얼리 히어>는 보여질 필요가 없는 폭력이라는 장르 하에서 가능하지 않은 성장을 지속적으로 부인한 채로
너에게 혹은 나에게 남겨진 진정한 장소가 어디일 수 있는가를 반문하는 'Nowhere'의 빈터 혹은 무인지대 인증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