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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5월 31일 월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제1독서
<이스라엘 임금 주님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신다.>
▥ 스바니야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14-18
14 딸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크게 소리쳐라.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5 주님께서 너에게 내리신 판결을 거두시고 너의 원수들을 쫓아내셨다. 이스라엘 임금 주님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니 다시는 네가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16 그날에 사람들이 예루살렘에게 말하리라. “시온아, 두려워하지 마라. 힘없이 손을 늘어뜨리지 마라.”
17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
18 축제의 날인 양 그렇게 하시리라. 나는 너에게서 불행을 치워 버려 네가 모욕을 짊어지지 않게 하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9-56
39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46 그러자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47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48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49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50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51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52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53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4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55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56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021년 5월 31일 동정 성 마리아 방문 축일 <성사적인 만남>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성사적인 만남>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조금 유치한 얘기일 수도 있는데 프란치스코와 클라라가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 엇갈리는 증언이 있었습니다.
봉쇄 수녀처럼 집밖을 나오지 않고 살아가는 클라라에 대한 얘기를 듣고 프란치스코가 먼저 클라라를 찾아가 만났다는 증언이 있는데 향기는 상자에 담아도 그 향기가 퍼지는 것처럼 클라라의 성덕이 그렇게 프란치스코에까지 전달돼 프란치스코가 찾아와 만났다는 얘기입니다.
다른 하나는 프란치스코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던 클라라가와 주기를 프란치스코에게 청하여 만나게 되었다는 증언인데 클라라의 사촌 오빠인 루피노가 그 다리 역할을 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런 주장들이 있음을 의식한 때문인지 성녀 클라라의 전기 작가인 토마스 첼라노는
두 사람의 만남은 성령께서 두 사람의 움직인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한 축일에 이 얘기를 길게 한 것은 당연히 두 분의 만남도 성령에 의한 만남이라는 것을 얘기하기 위함이고 우리의 만남들도 이런 만남이 되어야 함을 얘기하기 위함이지요.
어제 삼위일체 축일 강론에서도 성령의 인도를 받음에 대해 얘기했지만 우리의 많은 만남이 성령에 이끌려야지 그 만남들이 성사가 됩니다.
우리의 많은 만남이 성사가 되지 못하고, 그저 좋아하는 사람끼리 만나는 계모임이나 친목회가 되거나 또는 좋아하는 것이 같은 사람끼리 동호회가 되거나 심지어 다른 사람을 같이 험담하는 모임이 되는 것은 비록 악령에 이끌리지 않더라도 성령에 이끌리지 않기 때문이지요.
성사란 무엇입니까?
성사적인 만남이란 어떤 것입니까?
성사란 하느님이 그 일 안에 있는 것이고, 그 일을 통해서 하느님이 발생하는 것이니 성사적 만남도 그런 거지요.
오늘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만난 것은 하느님이 자기들 안에서 이루신 일들 곧 은총을 같이 확인하고 같이 기뻐하며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기 위함이었지요.
이런 뜻에서 우리의 만남들을 돌아보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우리의 만남 중에 이런 성사적인 만남들은 얼마나 되고 그저 그런 만남은 어떤 만남들인지.
또 어떤 만남은 은총이 발생하는 성사적인 만남이고, 어떤 만남은 죄악이 발생하는 만남인지.
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1년 5월 3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성모성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 미사의 말씀은 강생하신 창조주와 인간의 만남을 기쁨에 찬 어조로 전합니다.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루카 1,39)
예수님 탄생 예고 때 노령의 사촌인 엘리사벳의 임신 소식을 듣게 된 마리아는 "서둘러" 그녀를 방문합니다. 당시 교통 여건이나 사회적 안전망은 소녀가 홀로 여행을 하기에 썩 적합하지 않았지만 마리아는 참 적극적이고 용감해 보입니다.
혹자는 이 방문에 대해 출산을 앞둔 노령의 사촌에게 봉사하려는 마리아의 착한 심성을 주목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천사의 전언을 확인하려는 발걸음으로 보기도 합니다만, 저는 이 순간을, 강생하신 창조주를 인간의 무리가 환대하는 첫 만남의 자리라 보고 싶습니다. 사실 인간적 의도가 무엇이었든 모든 지향은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움직이고 있으니까요.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어놀았습니다."(루카 1,44)
마리아의 인사말이 들리자 엘리사벳 태 안에서 아기가 기뻐 뜁니다. 훗날 예수님의 오실 길을 마련할 세례자 요한은 어머니 태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요르단 강가 광야에서도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기뻐할 "신랑의 친구"입니다.(요한 3,29 참조)
마리아가 남모르게 성령으로 잉태한 뒤 이토록 기쁨 충만한 축하와 격려를 받은 순간이 있었을까요! 또 마리아의 순결한 태 안에 자리하신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이토록 열렬히 환대를 받으신 적이 있었던가요! 지금 이 자리가 바로 그 때이고 그 순간입니다.
엄마 엘리사벳은 뱃속 아기의 움직임에서 창조주를 맞이하는 영광에 찬 기쁨을 감지하고, 있는 그대로 마리아에게 전합니다. 이를 듣는 마리아의 마음에서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찬미의 기도로 터져 나오지요. 그 기도가 바로 우리가 사랑하고 즐겨 부르는 '마니피캇'입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 태아 요한의 기쁨에 찬 환영을 받으신 마리아 태중의 아기는 당신의 마음을 어머니에게 그대로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마니피캇 안에는 고통과 슬픔에 찬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마음이 생생히 녹아있는 겁니다.
하느님은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이, 불의한 통치로 제 잇속이나 채우는 권력자, 자기만 누리는 부유함에 도취된 이들을 내치시는 혁명가 같은 분이시지요. 동시에 그분은 비천하고 굶주리는 가난한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끌어 올리시는 보호자이십니다. 마리아의 입을 통해 창조주 하느님께서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계시하신 것이지요.
제1독서에서도 예루살렘 한가운데에 오시는 주님과 그분을 맞이하는 백성의 기쁨을 노래하며 복음의 장면을 준비시킵니다.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스바 3,14)
이제 이스라엘은 한껏 기뻐하고 즐거워해도 됩니다. 승리의 용사이신 주님이 원수들의 손에서 예루살렘을 구하시고 영영 불행을 치워버리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누구의 눈치를 볼 것 없이, 느닷없이 닥칠지도 모르는 또 다른 역경을 염려할 것 없이 이제로부터 영원히 이어질 주님 현존의 축복을 마음껏 누리라는 위로입니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스바 3,17)
우리와 주님이 서로를 향해 환성으로 올리는 이 장면을 관상합니다. 우리 안에 거처를 정하신 주님의 기쁨이 그런 주님으로 인해 느끼는 우리의 기쁨을 압도합니다. 하느님이 비천하고 가난한 우리로 인해 이토록 행복하시다니요! 이토록 열락에 차 어쩔 줄을 모르시다니요!
스바니야 예언서의 이 행복이 마리아와 엘리사벳, 태아 예수님과 태아 요한에게로 이어졌지요. 이 복되고 신비롭고 유쾌한 만남이 이루어진 유다 산골은 이 순간 이스라엘 전체, 온 세상 전체를 품고 있는 작은 우주일 것이고, 이 축제는 영원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위로의 어머니 마리아는 버겁고 힘겹고 슬프고 아픈 우리를 방문하십니다. 그분은 홀로가 아니라 항상 예수님과 함께시지요. 예수님을 빼고는 마리아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마리아는 태중에 모신 하느님의 마음을 투영해 우리를 격려하고 어루만져 주시며 힘을 북돋우시는 어머니이십니다.
개인적으로, 공동체적으로, 사회적으로 여러 기쁨과 슬픔의 궤적을 지나온 오월을 마무리하며, 우리에게 하느님을 선물하신 마리아를 깊은 감사와 사랑으로 환대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마리아와 함께 예수님을 맞이하는 우리는 복됩니다. 이 행복을 잘 간직한 채, 뜨거운 예수님의 성심으로 더욱 깊이 파고드는 6월을 향해 나아갑시다. 지난 한 달 수고 많으셨습니다.
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5월 3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주님께 감사하고, 그분의 이름을 외쳐 불러라
위례성모승천성당 이기양 요셉 신부님
루카 1,39-56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찾아보심을 묵상합시다."
묵주기도 중 환희의 신비 2단의 지향입니다. 바로 오늘 축일의 내용이지요. 오늘은 성모 마리아께서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날입니다. 교회 전례력에서는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한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3월25일)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6월24일) 사이인 5월 31일에 이 축일을 지내도록 하고 있습니다. 환희의 신비 2단을 잘 묵상하기 위해서는 주님을 잉태하신 마리아께서 왜 친척 엘리사벳을 찾아가셨으며 거기에 어떤 의미가 숨어 있는지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묵주기도는 매 단마다 깊은 의미를 담고 있지요.
성모 마리아께서 친척인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을 찾아간 곳은 유다 산골로 멀고도 험한 산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성지순례 중에 그 곳을 다녀왔는데 참으로 조용하고 아늑한 동네로 기억됩니다. 마을에는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는데 두 분의 위대한 어머니들이 배가 부른 모습으로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재미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그 험한 길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왜 산골 마을로 가셔야만 했을까요? 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가질 것이라는 천사의 아룀을 받은 마리아는 깜짝 놀라서 이렇게 반문했지요.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1,34)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1,35-37)
천사의 대답에 마리아가 대답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혼자가 된 마리아는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였겠습니까?
"정말 내가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으며 정말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는 것일까?"
그 뿐만이 아니지요. 약혼자인 요셉과의 관계는 물론이요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터이고, 또 율법에 따르면 극형을 면할 길이 없는 이 놀라운 사건을 놓고 얼마나 두렵고 고민이 되었겠습니까? 아직 어린 처녀였던 마리아의 두려움과 고민이 짐작되고도 남습니다.
그 때 마리아는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1,36-37) 하신 천사의 말을 기억하고 엘리사벳을 찾아보기로 마음먹습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이 세례자 요한을 잉태했을 때 아버지 즈카르야가 벙어리가 되었으며 엘리사벳 또한 나이가 너무 많은 처지에 임신이 되어 주위를 깜짝 놀라게 했던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루카1,65-66)
천사가 떠나가고"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루카1,39-40)를 드립니다. 이 모든 일이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일어나는 일인지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아니나 다를까 마리아의 방문을 받자마자 엘리사벳은 성령을 가득히 받아 큰 소리로 외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루카1,42-45)
마리아의 모든 고민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순간입니다. 엘리사벳의 증언을 통해 마리아는 자신이 천사의 예고대로 주님과 함께 있음을 확신하게 되지요. 마리아는 자신의 잉태가 우연히, 혹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어쩌다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하느님의 계획 하에 이루어진 사건임을 확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확신하게 된 마리아가 성령에 충만하여 노래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루카1,46-48)
오늘 우리가 들은 마리아의 찬미가 '마니피캇'이지요.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을 가져다 주시는 하느님을 찬양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찬미가입니다.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한 이 일은 이렇게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지만 실은 두 여인만의 내밀한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두 여인은 하느님의 섭리가 자신들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서로 격려하면서 석 달 가량 함께 지내다가 헤어집니다.
오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을 지내며 두 가지를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시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인간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지만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사고를 넘어서서 이루어진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많은 경우에 신앙까지도 인간의 지식과 경험에 의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그것을 넘어서지요. 오늘 복음을 통해 하느님의 섭리는 인간의 지식과 경험을 넘어서 이루어짐을 확인하게 됩니다.
두 번째 생각해 볼 것은 우리 삶에 있어서 믿음의 동반자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놓고 과연 이 일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지 갈등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또 어떠한 일을 해야 되는지, 말아야 되는 지에 대해서 고민합니다. 이럴 때 우리에게는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 같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 즉 동반자가 필요하지요. 믿음의 동반자는 아주 중요합니다. 좋은 동반자는 엘리사벳과 마리아처럼 서로간에 신앙을 상승시켜줍니다.
중요한 것은 친구도 잘못 사귀면 같이 망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비신자와 어울려 놀러 다니며 가정이 있는 주부가 남자 친구를 사귀는 등 어처구니없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같이 망하는 지름길이지요. 친구도 만나지 말아야 될 친구가 있고 만나야 할 친구가 있습니다. 나쁜 사람과 만나면 나쁜 짓을 하게 되어 있지요. 좋은 사람과 만나면 좋은 일을 하게 됩니다. 신앙의 동반자는 반드시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서로 행하는 사람끼리 만나면 신앙은 서로 상승 작용이 되지요. 어떤 사람은 혼자서 열심히 미사를 다니고 성체조배를 하고 기도합니다. 바람직하지 않지요. 신앙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대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법적인 효력은 두 사람 이상의 증언이 있을 때 발생하는 것이지요. 혼자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는 꼭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습니다. 서로 보완해 나가는 것이 필요했지요. 신앙 생활은 혼자 해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소승불교에서는 깊은 암자에 들어가서 혼자 깨우치는 시간을 중요시합니다. 그러나 천주교 신앙은 공동체가 함께 나아가는 것을 지향하지요. 반 모임에도 나가고 단체 활동도 해야 합니다. 서로 보완해 줄 수 있는 신앙의 친구가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오늘 복음을 통해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받아들였듯이 나의 경험과 지식을 떠나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일 때 더 큰 섭리가 이루어짐을 알 수 있었고, 두 번째로 우리에게는 신앙의 동반자가 아주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공동체의 일원으로써 이웃과 함께 신앙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성모 성월을 마무리하는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 방문 축일'입니다. 하느님의 놀라운 일이 두 여인을 통해서 일어나지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일은 나의 지식과 경험을 넘어서는 놀라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결단입니다. 신앙은 내가 확인했을 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비록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어렵더라도 하느님의 뜻이라면 받아들일 때 하느님의 섭리가 이루어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2021년 5월 3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저희의 목소리를 들어주십시오. 저희와 함께 걸어주십시오. 바로 그것 뿐입니다!>
살레시오회 세계 총회 때의 일입니다. 청소년 사목을 주로 하는 저희 살레시오회이기에, 당사자인 청소년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10명의 청소년들을 초대했습니다. 청소년들은 전 세계 각국에서 온 대의원 살레시오 회원들과 함께 모임에 참석하고 대화도 나누었습니다.
청소년들이 떠나는 날, 자신들이 쓴 편지를 총회 석상에서 공개했습니다. 대표 청소년이 낭독한 편지글을 들으면서,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살레시안들은 집단적 성찰과 회개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살레시오 회원 여러분, 솔직히 저희는 지금 두렵고 혼란스럽습니다. 저희들의 삶은 하루 하루 힘겨운 투쟁의 연속입니다. 저희에게는 살레시오 회원 여러분의 사랑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저희는 여러분의 손을 잡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길을 걸어가고 싶습니다.”
“존경하는 살레시오 회원 여러분, 저희에게 다가오는 것을 제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저희가 여러분에게 바라는 것은 그 누구도 풀지 못할 인생의 어려운 문제를 풀어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저희와 함께 있어 달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외로워 울고 있는 저희 옆에 그저 현존만 해주셔도 충분합니다.”
“친애하는 살레시오 회원 여러분, 저희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편안하고 쾌적한 사무실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저희가 지금 서 있는 이 거리, 이 운동장으로 나와주십시오. 저희의 목소리를 들어주십시오. 저희와 함께 걸어주십시오. 바로 그것 뿐입니다.”
오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을 맞아 청소년이었던 마리아를 따뜻하게 환영하고 위로했으며, 격려하고 동반했던 엘리사벳의 지혜로운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자렛에서 아인카림으로 며칠이나 걸리는 여행길이었는데, 서둘러 걸어온 나자렛의 마리아를 엘리사벳을 극진히 환영하고 환대합니다. 혼전 잉태로 인해 혼란과 당혹 속에 힘겨웠던 마리아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마리아가 자신의 집에 들어서는 것을 발견한 엘리사벳을 나이에 걸맞지 않게 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삿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복음 1장 42~45절)
아인카림에서 있었던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참으로 어색하고 당혹스런 만남이었습니다. 그러나 루카 복음사가가 묘사하고 있는 만남의 장면은 무척이나 흥겹고 기쁨에 찬 분위기입니다. 마리아를 맞이하는 엘리사벳은 환희에 찬 목소리로 마리아를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환대를 받고 있는 마리아 역시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참으로 비극적인 동시에 희극적인 만남이었지만, 그 만남이 기쁨과 환희, 축복과 감사로 가득 차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계시는 주님께서 현존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가끔씩 우리네 인생도 정말이지 어처구니 없는 상황 앞에 설 때가 있습니다. 참으로 이해하지 못할 만남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노력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영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입니다. 인간의 마음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 주님의 현존 안에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글쓴이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2021년 5월 31일 나해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루카1,39-56) - 전삼용 요셉 신부님
<참 기쁨의 삶을 위해 꼭 필요한 세 요소>
오늘은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찾아보심을 묵상하는 날입니다. 성모님은 엘리사벳을 방문하시고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라고 기도하십니다.
기쁘고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성모님은 엘리사벳을 방문함으로써 참 기쁨의 삶이 무엇인지 알려주십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을 잉태하신 어마어마한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온 인류에게 이 행복을 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기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늙은 사촌 누이와 그 태중의 아기를 기쁘게 했다는 것만으로 기뻐하십니다.
이를 볼 때 참 기쁨을 위해 필요한 것이 세 가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는 줄 것이 있어야 합니다.
EBS 다큐프라임, ‘가족쇼크’에서 김용준(21세) 씨는 말기 암으로 죽어가는 엄마의 전화를 계속 받지 않습니다. 엄마는 아들과 단둘이 살았는데, 아들이 호스피스 병동에 찾아오지도 않고 전화도 안 받으니 혼자 고통을 견뎌야 할 뿐입니다. 어버이날 카네이션도 자신이 직접 만들어서 방에 놓습니다. 그러며 전화를 안 받는 아들을 원망합니다. 아들은 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어머니의 전화까지 외면하는 것일까요? 김용준 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연락을 안 하면 싫어할 수 있겠다.’ 생각은 하지만, 전화해서 목소리 들을 때마다 진짜 현실이 눈앞에 딱, 있다는 느낌? 엄마가 저보고 살았고 저도 엄마만 보고 살았으니까. 엄청 소중하죠. 아직은 함께 할 게 많았는데! 제일 하고 싶은 건 엄마가 만들어주는 밥 먹는 거.”
김용준 씨는 아직 엄마의 사랑이 더 필요한 상태입니다. 더 받아야 하는 상태인데 이제 엄마를 위로해야 하는 상황을 감당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결국, 엄마 임종 직전에야 엄마를 볼 용기를 내어 찾아갑니다. 그러나 울기만 합니다. 엄마는 정신이 혼미한 중에도 아들을 위해 머리맡에 숨겨 두었던 5만 원 지폐를 쥐여줍니다.
엄마는 주고 싶은데 줄 수 없는 상황이 안타깝고, 아들은 받아야 하는 나이인데 주어야 하는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무언가 주어야 하는데 아직 가진 것이 없어서 사랑하면서도 죽어가는 엄마를 볼 힘이 없는 것입니다. 주고 싶은데 줄 것이 없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요?
두 번째는 내가 주는 것을 기쁘게 받을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참 기쁨의 삶은 누군가를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것에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신 후 당신의 능력으로 누구를 가장 기쁘게 할 수 있는지 아셨습니다. 늙은 나이에 아기를 잉태한 엘리사벳에게 가시면 가장 좋겠다고 생각하셨습니다.
내가 아무리 은총이 있더라도 그 은총을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면 그것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의 원인이 됩니다.
레오파드 증후군이라는 병 때문에 태어나면서 눈이 보이지 않고 귀가 들리지 않는 상태로 자란 이예지 양. 검은 상자 속에 갇혀 사는 예지 씨는 부모의 존재도,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먹으면 좋고 배고프면 화를 내는 동물과 같은 상태입니다.
부모는 그녀와 소통을 할 수 없어서 예지가 짜증을 내며 손으로 자기 머리를 때리고 자해를 해도 무엇을 원하는지 도저히 알아낼 길이 없습니다. 주고 싶어도 받을 능력이 없는 자녀를 둔 부모의 마음은 미어질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런 말을 하면 안 되겠지만 딸이 자신보다 먼저 죽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누구도 그녀에게 자신들처럼 대해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성모 마리아에게는 당신을 받아들이고 이해해 줄 능력을 지닌 엘리사벳이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달려가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행복일까요?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는 것이...
그러나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이 세 번째가 가장 중요합니다. 사실 사랑하면 누구나 줄 것이 있고 그 줄 것을 받을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행복할 수 없는 이유가 있는데 ‘겸손’이 없다면 그렇습니다.
제가 예전에 사순절 동안 특강을 같은 내용으로 17번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강의를 많이 하는 것이 사순절 때 주님께 바치는 희생으로 여기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17번째 강의를 마치고 많은 감사와 박수를 받으며 집으로 향하는 자동차 안에서 커다란 공허함을 느꼈습니다.
‘이게 다인가?’
저는 저도 모르게 저 자신의 영광을 위해 강의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저 남을 기쁘게 하는 것만으로 행복하려면 겸손해져야 합니다.
나는 누군가를 기쁘게 할 능력이 없는데 내가 기뻐지라고 주님께서 나에게 그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누군가를 기쁘게 했다면 그것만으로 기쁠 수 있어야 합니다.
김용준 씨는 엄마를 기쁘게 해 드리고 싶었어도 아직 힘이 없었습니다. 그 한 명을 기쁘게 할 힘도 받아야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무언가 줄 수 있다면 그것 자체로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전에 ‘가장 작은 학교’라고 하는 제목으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중국의 한 시골 학교인데 선생님이 한 명이고 학생도 한 명입니다. 선생님은 그 한 명에게 매우 고마워하고 아이도 선생님에게 참으로 고마워합니다. 그 한 명이 없으면 자신은 선생님일 수 없고 아이는 학생일 수 없습니다.
교실에 선생님 한 분, 학생 한 명이 수업하는 사진을 보며 ‘하느님께서 세상에 말씀을 주실 때도 이와 같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늘에서 하느님께서 주시려는 것은 ‘말씀’,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원죄 없으신 ‘성모 마리아’뿐입니다.
하느님은 얼마나 다행이셨을까요? 들어줄 성모 마리아가 없으셨다면 말씀은 아버지 입에서 나오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도 당신의 말씀을 받아줄 성모 마리아 한 분을 보며 기뻐하셨고, 오늘은 성모 마리아께서 엘리사벳 한 분을 보시며 기뻐하셨습니다. 더 바란다는 것은 교만입니다.
저도 유튜브를 하면서 가장 기쁜 것은 내가 가진 것이 있고 그 가진 것을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은 조회수에 신경이 쓰입니다. 교만의 병이 도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내가 할 말이 있고 한 사람만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있어도 기쁠 수 있는 성모님의 겸손을 본받으려 합니다.
이것만 있으면 기쁘고 행복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것, 그 다음은 내가 줄 것을 받을 그 누군가가 있다는 것,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은 주님께서 이루시는 것이니 줄 것이 있고 받아주는 한 사람만 있어도 기쁘게 감사해야 할 겸손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강론
2021. 5. 31.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루카 1,39-56) -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내 주님의 어머니>
“그 무렵에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39-45)”
1) 우리 교회는 성모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일을 중요하게 여겨서 그 일을 기념하는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일이 왜, 무엇이 중요한가?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이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전해진 일이라는 점 때문에, 그리고 그것을 믿은 엘리사벳의 증언 때문에, 그 일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 마리아를 찾아와서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하고, 또 성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성령으로 잉태하신 일은, 본 사람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는, 성모 마리아 혼자만 알고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엘리사벳은 성모 마리아에게 일어난 일은 하느님께서 직접 하신 일이라고 증언했고, 바로 그것을 증언한 첫 증인으로서 중요한 인물입니다.
<복음서에 표현되어 있는 대로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가득 차서, 성모 마리아께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말씀하시기도 전에 그 일을 알게 되었을 수도 있지만, 성모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실 때 인사만 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직접 말씀하셨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면 성모 마리아는 ‘기쁜 소식’을 사람들에게 알려 준첫 선교사가 되는 셈입니다. 어떻든 엘리사벳은 성모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예수님 탄생을 예고한 존재가 하느님의 천사라는 것과 천사가 한 말들은 모두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과 성모 마리아 태중의 아기가 메시아라는 것을 믿고 증언한 첫 증인입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의 증언은 메시아께서 이미 세상에 오셨음을 확인하고 선포한 첫 증언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2) 성모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것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알려 주기 위해서, 또 엘리사벳의 임신을 축하하기 위해서, 그리고 엘리사벳의 출산을 도와주기 위해서라고 생각됩니다.
복음서의 표현만 보면, 성모 마리아와 엘리사벳만 만난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옆에 즈카르야도 있었을 것이고, 다른 가족이나 친척이나 이웃도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다른 사람들 모르게 엘리사벳만 몰래 만나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시에 즈카르야는 말을 못하는 상태였고, 아마도 듣는 일도 못했던 것 같습니다(루카 1,62).
그래서 성모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대화에 직접 참여하지는 못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어머니의 대화에서 완전히 배제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즈카르야는 엘리사벳의 임신을 알게 되면서, 천사가 전해 준 말을 믿게 되었을 것이고, 성모 마리아에게 일어난 일을 알게 된 뒤에는 더욱 깊이 확신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3) <성령으로 가득 차>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가득 차서 말을 했다는 것은, 자유의지 없는 로봇처럼 되어서 말했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믿게 되었고, 그 믿음을 자신의 자유의지로 말했다는 뜻입니다.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 놀았다는 말은, 엘리사벳의 믿음과 기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물론 천사는 세례자 요한이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찰 것이라고 예고했었습니다(루카 1,15). 그래서 아기가 뛰 놀았다는 말은, 세례자 요한 자신의 기쁨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4)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여인들 가운데에서’ 라는 말은 뜻으로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에서’입니다.
성모 마리아가 모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신 이유는, 메시아의 어머니로 선택되셨기 때문이고, 하느님의 은총을 가득히 받으셨기 때문이고,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루카 1,28). 태중의 아기가 복되신 이유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복을 충만히 받으셨다는 점에서 복되신 분이고,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복을 주실 분이기 때문에 복되신 분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5)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여기서 ‘내 주님의 어머니’ 라는 말은 대단히 중요한 말인데, 뜻은 “우리를 구원하실 메시아의 어머니”입니다. 엘리사벳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은 첫 번째 인물이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 첫 번째 인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라는 말은, 기쁨, 감사, 겸손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말을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메시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기뻐하는 사람들을 대표해서 한 말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구약시대 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메시아를 갈망하면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언제, 어떻게 오실지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메시아 강생은 ‘뜻밖에 주어진 큰 은총’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6)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여기서 ‘주님’은 ‘하느님’이고,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예수님에 관해서 천사가 한 말들을 가리킵니다. ‘행복하십니다.’ 라는 말은, 뜻으로는 ‘복되십니다.’입니다.
엘리사벳이 성모 마리아의 믿음에 대해서 찬양하는 말은, 사실은 성모 마리아의 순종과 응답을 찬양하는 말입니다.
(순종과 응답은 믿음에서 나옵니다.예수님께서 하실 일에 관해서 천사가 전해 준 말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에 관한 말이지만, 성모 마리아께서는 그 일이 틀림없이 이루어진다고 믿으셨고, 믿으셨기 때문에 응답하셨습니다.)
7) 엘리사벳의 찬양에 대해서 성모 마리아께서는 ‘마리아의 노래’로 화답하십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메시아를 보내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는 찬미가이고, 그 하느님에 대한 신앙고백이고, 메시아께서 하실 일에 대한 예언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루카 1,39-56 - 박상대 마르코 신부sla
두 여인의 노래에 담겨진 세상과 하느님의 만남
가장 아름다운 계절 5월, 성모성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엘리사 벳 방문을 기념하는 축일이다.
이 축일은 주님을 잉태하신 마리아께서 세례자 요한을 잉태 중에 있는 친척 엘리사벳을 찾아가신 루카복음의 보도(1,39-56)에 근거한다.
엘리사 벳과 마리아의 만남은 그들의 태중에 있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상봉(相逢)이기도 하다. 성모 마리아의 문안으로 세례자 요한이 엄마의 뱃속에서 성화(聖化)된다.
이 상봉 을 보도하는 성서의 이야기는 많은 신자들에게 큰 감동을 주게 되었고 이 사건을 전례 안에서 기념하려 는 움직임이 있었다.
우선 5 세기경 비잔틴 동방교회가 "성모님의 거룩한 옷" (블라쉐르느)을 안치 한 것을 기념하는 미사에서 성모님이 엘리사벳을 방문한 복음을 봉독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 동방교회는 세례자 요한 탄생 대축일(6월 24일)의 팔일축제 다음 날인 7월 2일을 축일로 지냈다.
서방교회에서는 1263년 보나벤투라(1221-1274) 성인이 성모님의 중재로 시대적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의도 를 가지고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이 축일을 도입하면서 파급되었다.
100년 후 우르바노 6세(1378-1389) 와 보니파시오 9세(1389-1404) 교황에 의해 축일이 공인되었고, 바젤 공의회(1431-1447)는 축일 고유미사 기도문을 제정하여 더욱 장려하였고, 비오 5세(1566-1572) 교황을 통하여 가톨릭교회의 공식 전례축 일로 자리를 잡게 된다.
17세기에 와서는 이 축일이 "성모의 엘리사벳 방문 축일"이라는 정식 명칭 을 얻게 된다.
1969년 개정된 로마 전례력은 이 축일을 시기적으로 합당한 "주님 탄생예고 대축일"(3월25 일)과 "세례자 요한 탄생 대축일"(6월 24일) 사이에, 즉 성모성월의 마지막 날인 5월 31일로 옮겨 놓았 다.
두 여인의 만남을 보도하는 오늘 복음은 두 곡(曲)의 아름다운 노래를 담고 있다.
하나는 마리아의 문안을 기뻐한 엘리사벳이 성령을 가득히 받고 마리아를 칭송하는 노래와
이에 응답하는 마리아의 노래 (마니피캇, Magnificat) 이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문안을 받고 다음과 같이 칭송한다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 주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 문안의 말씀이 내 귀를 울렸을 때에 내 태중의 아기도 기뻐하며 뛰놀았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42-45절)
이 노래는 예수의 탄생을 예고하던 가브리엘 천사의 인사말(1,28)과 함께 후에 가톨릭교회의 주요 기도문 중 "성모송"의 첫 부분으로 자 리를 잡게 된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 며, 태중의 아들 예수 또한 복되시나이다."
엘리사벳의 마리아에 대한 칭송은 구약성서에도 같은 유형으로 발견된다.
(신명 28,4; 판관 5,24; 유딧 13,18 참조)
"마리아의 노래" (막니피캇, Magnificat)에 대한 학설은 분분하다.
신약성서 학계의 통설은 "마리아의 노래"가 실제로 마리아의 노래라기보다는 루카복음이 집필되던 시기 에 유행하던 노래라는 것이며, 내용상 많은 구절이 구약성서를 본 딴 것이라고 한다.
마리아의 노래(Magnificat)의 전체적인 구조는 한나가 사무엘을 야훼께 바친 후 불렀던 감사찬양 노래와 흡사하다.
그때에 한나가 이렇게 기도를 올렸다:
"내 마음은 하느님 생각으로 울렁거립니다. 하느님의 은덕으로 나는 얼굴을 들게 되었습니다.
이렇듯이 내 가슴에 승리의 기쁨을 안겨 주시니 원수들 앞에서 자랑스럽기만 합니다.
하느님처럼 거룩하신 분은 없으십니다.
당신밖에는 없으십니다.
우리 하느님 같은 바위는 없으십니다.
잘난 체 지껄이는 자들아, 너무 우쭐대지 말아라.
거만한 소리를 입에 담지 말아라.
야훼님은 사람이 하는 일을 다 아시는 하느님, 저울질하시는 하느님이시다.
힘 있는 용사의 활은 꺾이고 비틀거리던 군인 은 허리를 묶고 일어나게 되리라.
배불렀던 자는 떡 한 조각 얻기 위하여 품을 팔고 굶주리던 사람은 다 시 굶주리지 않게 되리라. 아이 못 낳던 여자는 일곱 남매를 낳고 아들 많던 어미는 그 기가 꺾이리라.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생사를 쥐고 계시어 지하에 떨어뜨리기도 하시며 끌어올리기도 하신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가멸지게도 하시며 쓰러뜨리기도 하시고 일으키기도 하신다.
땅바닥에 쓰러진 천민을 일으켜 세우시며 잿더미에 뒹구는 빈민을 들어 높이셔서
귀인들과 한 자리에 앉혀 주시 고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
땅의 밑동은 하느님의 것, 그 위에 세상을 지으셨으니 당신 을 따르면 그 걸음걸음을 지켜 주시지만 불의하게 살면 앞이 캄캄해져서 말문이 막히리라.
사람 이 제 힘으로는 승리하지 못하는 법, 하느님께 맞서는 자는 깨어지리라.
지존하신 이께서 하늘에서 천둥소 리로 우렁차게 호령하신다.
하느님은 땅 끝까지 심판하신 분, 당신께서 세우신 왕에게 힘을 주시며
기름 부어 세우신 임금의 이름을 떨치게 하신다."(1사무 2,1-10)
이와 같이 "마리아의 노래"는 구약성서에 기록된 "한나의 노래"를 그 기 본구조로 하고 있다.
나아가 "마리아의 노래"는 이스라엘이 처한 시대적 위기상황을 안타까워하면서도 하느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신실함과 그분의 종말론적 통치에 의한 도덕적(51절), 사회적(52절), 경제적(53절) 혁명을 신앙하고, 이스라엘의 남은 "가난한 이들"(아나윔)의 구원을 희망하는 노래라고 볼 수 있겠다.
"마리아의 노래"는 내용상 전편(46-50절)과 후편(51-55절)으로 구분되는데, 전편은 개인차원에서의 감사 찬양이며, 후편은 집단 차원에서의 감사 찬양이다.
루카복음사가는 이스라엘 백성의 마지막 신앙과 희망을 "엘리사벳 - 세례자 요한"을 통하여 "마리아-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될 것을 내다보며 마리아의 입에 담아 노래로 불렀던 것이다.
마리아는 석 달 가량 엘리사벳의 집에 머물면서(56절) 이미 만삭이 된 엘리사벳에게 봉사하였을 것이다. 만삭이 된 여인이 필요로 하는 것이 어디 한, 두 가지이겠는가.
그것도 한 번의 출산 경험이 없는 엘리사벳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렇다고 동정녀인 마리아가 무슨 경험 이 많아서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래서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상봉은 인류의 역사 안에 더 큰 의미를 가진다.
마리아의 엘리사벳에 대한 봉사는 그녀의 뱃속에 있는 요한에 대한 봉사이기도 하다.
이는 예수를 잉태하심으로써 하느님의 어머니가 된 마리아와 인간이 되실 하느님 스스로의 인간에 대한 봉사이기도 하다.
얼마 있지 않아 요한은 하느님이신 예수께 빚진 은혜를 되갚을 것이다.
결국 찬미 의 노래로 엮어진 두 여인의 만남은 세상과 하느님의 만남, 죽음과 생명의 만남, 파멸과 구원의 만남, 절망과 희망의 만남을 의미하며, 이 만남은 세상의 구원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다.
부산교구 박상대 신부
2021년 5월 31일 월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 야고보 아저씨
한국인의 행복 조건
사랑하며 행복한 삶을 소망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행복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사랑하며, 돈을 벌고, 공부를 하고, 건강한 몸을 가지기 위해서 운동도 하고, 아귀다툼도 하고, 신앙도 가지며, 결혼도 하고, 자식을 낳아 기르고, 청춘을 불사르며 일하기도 하고, 젖 먹던 안간힘까지도 다 쏟으며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것이 진정한 사랑인지, 행복인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사랑과 행복을 추구하고, 각자의 인생을 도박을 하듯 쏟아 붓고 있습니다. 모든 노래와 모든 드라마의 주제가 사랑과 행복이며, 모든 종교의 주제가 바로 사랑과 행복입니다.
삼성경제 연구소와 성균관대학교는 10년 전 18세 이상 남녀 160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국종합사회조사(KGSS)’를 토대로 한국인의 의식을 분석한 연구결과로 발표한 내용을 요약한 기사를 읽으면서 새삼스럽게 참으로 독특한 행복에 대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인이 생각하는 행복의 조건은 유럽이나 미국과 많이 다른 것으로 조사되었다고 합니다. 나는 이 연구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아니지만 참고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행복에 대한 견해를 같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행복한 한국인의 7가지 조건
1. 젊어야 행복하다.(2-30대가 가장 행복하다. - 유럽은 30대가 불행하다고 생각)
2. 남보다 잘 산다고 느껴야 행복하다.(스스로의 가계경제 만족도는 비슷하다.)
3. 많이 배워야 행복하다.(학위와 만족도는 비례)
4. 남과 사회에 대한 신뢰감이 높아야 행복하다. (신뢰가 높으면 경제도 발전)
5. 종교행사에 자주 참석해야 행복하다. (종교의 종류보다 출석빈도가 중요)
6. 가족과 여가를 중시해야 행복하다.(돈을 최고 가치로 여기는 사람 만족도는 낮아)
7. 결혼하나 안하나 하는 것은 행복과는 무관하다. (유럽은 기혼자가 더 행복)
30대가 가장 불행하다고 느끼는 유럽인과 달리 한국인은 20∼30대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라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40대가 넘어서면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점점 낮아진다고 합니다. 절대적인 소득보다는 남보다 잘 산다고 느낄 때 삶의 만족도가 높으며, 고학력일수록 행복하지만 결혼 유무는 행복의 조건과는 상관이 없다고 합니다.
절대적인 소득 수준은 만족도 차이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것은 전혀 예상 밖의 결과로 보였습니다. 월 평균 가구 소득 100만원 미만은 만족도가 2.23 이고 700만 원 이상도 2.22로 비슷했다고 합니다. 그걸 보면 한국인은 확실히 양반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미국인은 소득 수준이 높을수록 만족도 지수는 올라간다고 합니다. 반면 한국인의 경우 남보다 잘 산다고 느껴야 행복했다고 합니다. 그 것은 한국인의 자신의 소득을 남과 비교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많이 배울수록 한국인의 행복감은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졸업자의 만족도가 1.97이지만 학벌이 높을수록 만족도는 올라가 박사 학위 소지자의 만족도는 2.71로 가장 높았다고 합니다. 어느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하느냐는 가치척도를 묻는 질문에 종교(2.48), 가족(2.28), 여가(2.23)에 두는 사람은 아주 높은 만족도를 보였으나 돈(2.05)을 최고 가치로 두는 사람은 만족도가 낮았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경향은 선진국과 비슷한 결과를 보이고 있습니다. 또한 이색적인 것은 종교 종류보다는 종교 행사 출석 빈도가 행복감을 더 좌우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실태를 보여주는 것 같아 아주 씁쓸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착한 한국인의 심성을 나타내는 것은 타인과 사회를 신뢰하고 잘 믿는 사람의 만족도가 높았고, 행복을 더 많이 느낀다고 하는 것입니다.
위의 연구조사 결과에 따라서 우리민족의 행복조건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고, 정확한 연구결과라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그 것이 우리 민족의 행복조건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참고할 뿐입니다. 그러나 행복의 조건으로 제시된 것을 우리는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위의 조사결과가 잘못된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 속에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은 성모님께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이라고 인사말을 합니다. ‘행복하신 분’이라고 합니다. 그 인사의 말씀은 바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모님은 마니피캇(Magnificat)이라는 가장 아름다운 찬가로 응답하십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행복의 원인이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큰일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한국인의 행복 조건하고 엘리사벳과 성모님의 행복조건이 다릅니다. 우리 민족과 유럽이나 미국 사람들의 행복조건이 다르듯이 전혀 다릅니다.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행복조건은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과 성모님의 마니피캇에서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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