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 대합실
신준수
남편과 아이들이 각자의 자리로 떠나고 난 어수선한 집안을 정리
하다 문득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어졌다.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들
고 목적지도 없이 집을 나섰다. 터미널에 가서 가장 생소하고 촌스러
운 지명을 찾아 마음가는 어느 곳이든 한 바퀴 돌아올 요량이었다.
터미널 안으로 들어서는데 인천공항이라고 쓰여진 버스가 광장으
로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문득 오래 전 텔레비전에서 특집으로 방영
되었던 공항이 생각났다.
내·외부 공간이 아름답고 쾌적한 자연 환경에 가까운 공항으로
만들기 위해 공기, 소리, 빛, 조명을 반영하여 환경 친화적인 공간으
로 지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꼭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
다. 모든 것을 가까이에서, 투명하게 보고 가슴으로 느끼고 싶었다.
청주에서 매 시간마다 출발하고 돌아오는 차편도 확인을 한 후 공
항버스에 몸을 실었다.
스쳐 지나가는 산야에는 아직 잔설이 남아있다. 앙상한 나무들은
아담과 이브처럼 벌거벗은 몸으로 잔바람에도 웅웅거리며 세월의
인내를 배우는 것 같다.
새벽부터 부슬거리던 가랑비는 좀더 굵은 빗방울이 되어 창을 부
딪히며 강렬한 파열음을 내며 부서졌다.
세 시간의 시간이 지날 무렵 버스는 인천 송도를 지나 연육교로 접
어들었다. 시원하게 뚫린 도로는 등이 훨 것 같은 내 삶의 무게를 쓸
어 내리기라도 하듯 답답한 마음에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인다.
옆으로 끝이 없을 듯 펼쳐진 갯벌, 그 칙칙하고 비릿한 냄새가 창
틈으로 스며들 때는 열정으로 부딪쳐오는 파도에 시달릴 때가 오히
려 아름답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채꼴 모양과 돔 형식으로 웅장하게 지어진 건축물은 따뜻하고
아늑하게 다가왔다 높이 솟은 관제탑과 공항의 등대를 뒤로하고 대
합실 안으로 들어섰다. 넓은 커튼월과 천창으로 유입되는 자연채광
은 천장일부가 그라스로 되어있어 고개를 들면 흐르는 구름도 볼 수
있으며, 옆으로는 밖에서 살랑거리는 나뭇가지와 갯벌, 그리고 잔잔
한 바다를 볼 수 있다. 밤에는 하늘의 별과 달빛도 볼 수 있을 것 같
다.
조명 또한 건축의 형태를 효과적으로 살려 아름답고 편안한 분위
기를 연출하고 직접조명과 간접조명의 적절한 배치로 시각의 편안함
을 주는 것 같다.
넓은 실내 공간에는 돌 소나무 동백, 대나무 등 우리나라의 특성
을 살려서 이곳 저곳에 깨끗하고 아름답게 가꾸어져 정서적인 휴식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간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의자마다에 촘촘이 박힌 얼굴들을
바라보았다. 누구하나 같은 이가 없고 표정 또한 복잡한 세상사만큼
이나 다양하다. 모래시계가 쉼 없이 내려 오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며 자신들의 행선지를 향해 종종걸음 친다. 깍지발을 하
고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며, 눈물을 훔치곤 하던 예전의 공
항 대합실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젊은 연인들은 남에 이목 같은 것
은 안중에도 없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허리를 감싸 안은 채 볼
을 부비며 입맞춤을 하고는 헤어졌다.
나의 행선지는 어디인가? 가야할 곳도, 보내야할 사람도 기다리는
사람도 없으면서 순간순간 바뀌는 전광판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오
랜 날을 목마름으로 갈등하며 살아야 했던 지난날을 돌이켜 본다. 지
금은 소식조차 모르지만, 한 때는 인연이라고 여겼던 수많은 사람들
이 내 가슴속에서 아슴아슴 살아나 잠들지 못하는 저녁 별들처럼 내
마음에 환한 등불을 건다. 떠나는 사람들 틈에 끼여 또 다른 어디론
가 떠나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누구의 아내, 누구의 어미도 벗어
놓고 햇살처럼 쨍쨍한 맨몸으로 새의 날개를 달고 싶었다. 그 곳에는
꿈에서나 그리던 늘 푸른 초원과 언덕위의 하얀집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것만 같다. 하지만 지금에 나는 너무 지쳐있고 또 다른 길을 선
택 할만한 용기도 없다. 앞으로도 내 삶의 길은 늘 두 갈래로 펼쳐져
있을 것이고, 그 앞에서 갈등하게 되겠지만 나는 내가 선택한 길에
최선을 다 할 것이며 또한 사랑하리라.
어느덧 천장으로 바라보이는 하늘에는 흐린 노을이 지고 있다.
대충 요기를 할까 하다가 오늘만큼은 나 자신이 최고이고 싶었다.
보기에도 좋아 보임직한 한식 식당을 찾았다. 고급 식당답게 정갈하
고 아늑하다. 멀리 바다가 바라보이는 창 쪽으로 둥근 원탁을 중심으
로 앉았다. 원탁에 앉으니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평등해 지는 것
같다. 실내에는 감미로운 정조를 가진 "해변의 길손" 이 클라리넷 연
주로 흐르고 있었다. 음식을 날라주는 아가씨의 아슬아슬한 짧은 치
마는 음률에 맞추어 살랑거린다. 메뉴판에는 한식이라고는 하지만
이름도 생소한 것들로 가득하고 음식값도 상상외로 비싸다. 순간 내
지갑에 들어있는 지폐의 장수를 머리 속으로 헤아려 보았다. 평소에
즐겨먹던 비빔밥에 몇 배쯤 되는 가격의 비빔밥을 아주 우아한 듯한
모습으로 먹었다. 후식인줄 알았던 커피 또한 별도의 돈을 지불하여
야 했다. 나오는 뒤통수가 따갑고 뭔가 홀린 듯 빛도 소리도 차단된
무중력 공간으로 두둥실 몸뚱이가 떠오르는 듯했다. 그래도 오늘만
큼은 기쁜 마음으로 나를 최고로 대접하자 마음먹지 않았던가 어느
덧 천장으로 보이는 하늘에 희미한 노을이 지고 있다. 내리는지 피어
오르는지 모를 안개 같은 가랑비가 내 마음을 흐르게 한다.
긴장과 흥분이 어우러졌던 하루 아이들과 휴식, 그리고 꿈이 있
는 둥지를 향해 버스는 달린다. 일상의 권태가 밀려난 자리에 새로운
희망이 훌쩍 앞으로 다가왔다.
내일도 어제처럼 청소를 하고 식구들의 식사 때를 챙기며 일상의
틀을 지키겠지만 어쩐지 어제와는 다른 미래가 손짓하고 있을 것 같
다. 작은 일탈이 이렇게 큰 새로움을 주다니, 조금 모자라면 어떠랴.
행복의 척도는 필요한 것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에 있지 않고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나는가에 있는 것 같다. 남보다 적
게 갖고 있으면서도 그 단순함과 간소함 속에서 삶의 기쁨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2003. 16집
첫댓글 내일도 어제처럼 청소를 하고 식구들의 식사 때를 챙기며 일상의 틀을 지키겠지만 어쩐지 어제와는 다른 미래가 손짓하고 있을 것 같다. 작은 일탈이 이렇게 큰 새로움을 주다니, 조금 모자라면 어떠랴.
행복의 척도는 필요한 것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에 있지 않고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나는가에 있는 것 같다. 남보다 적게 갖고 있으면서도 그 단순함과 간소함 속에서 삶의 기쁨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의 행선지는 어디인가? 가야할 곳도, 보내야할 사람도 기다리는
사람도 없으면서 순간순간 바뀌는 전광판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오
랜 날을 목마름으로 갈등하며 살아야 했던 지난날을 돌이켜 본다. 지
금은 소식조차 모르지만, 한 때는 인연이라고 여겼던 수많은 사람들
이 내 가슴속에서 아슴아슴 살아나 잠들지 못하는 저녁 별들처럼 내
마음에 환한 등불을 건다. 떠나는 사람들 틈에 끼여 또 다른 어디론
가 떠나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누구의 아내, 누구의 어미도 벗어
놓고 햇살처럼 쨍쨍한 맨몸으로 새의 날개를 달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