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독생자가 왜 영생과 심판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까?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를 안 믿으면 심판 받는다고 하면 뭐라고 할까요?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학교 들어가고 좋은 데 취직하고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걸 인생의 복이라고 여기는데, 완전하진 못해도 착하게 살 가능성이 조금은 있다고 여기는데 이런 걸 다 부정하고 예수가 복의 기준이고 예수를 믿지 않으면 심판을 받는다고 하면 미친놈 소리밖에 듣지 못합니다. 세상은 그렇게 세상의 가치기준이 따로 있습니다.
세상이 생각하는 생명은 ‘힘’입니다. 여기서 힘은 돈, 권력, 건강, 명예,사회적 관계 등을 말하죠.
그런데 성경에는 그런 힘의 반대편에 ‘사랑’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힘’의 반대편에 ‘사랑’이 있다는 말은 사랑이 오게 되면 내가 붙들고 있던 힘이 생명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사랑이 오기 전에는 내가 내 힘만 붙들고 살았는데 사랑이 오게 되면 사랑으로 말미암아 있던 힘마저 털려버립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주체가 털려나가는 거에요.이것을 주가 계시다 라고 하는 겁니다. 요한복음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마침내 베드로는 자기에겐 주님을 사랑할 사랑이 없다는 것을 시인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은 그분의 사랑이 먼저 부어져야 비로소 사랑에 눈이 열린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시나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이렇게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다고 하시고서는 18절 이후에 믿지 않는 자는 독생자를 믿지 않음으로 이미 심판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말은 이 세상에 말씀 육신으로 오신 그분과의 관계에서 영생과 영벌이 결정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는 피조물인 우리가 만들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이름 자체가 비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그 이름을 알려주신 자들에게만 예수님과의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1장 12절에도 같은 말씀이 나오지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와 같이 성경에서 말하는 생명은 이땅을 다녀가신 하나님의 이름을 통해서 주어지는 생명이며 그 생명을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요일1:1)
이렇게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 인생들의 세상살이나 행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람들에게 생명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산자들과 함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성경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중심점이 있습니다.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모든 것이 설명이 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은혜, 믿음, 의, 거룩, 구원, 사랑, 용서, 온유, 지혜 ...모든 단어가 그분과의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그분과 그분의 하신 일을 위한 세상 역사이며 만물의 있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앞서 말씀드린대로 돈이 없는 게 죄가 아니라 그분의 이름을 모르는 것이 죄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들으라 부한 자들아” 라고 하는 것이 그런 뜻입니다. 사랑의 반대편에 있는 세상 힘을 붙들고 있는 자들을 향해 너희 소유의 넉넉함이 생명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눅12:15)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오게 되면 아이러니하게도 자기 목숨부터 부정이 되는 거에요 나의 이 목숨으로 이 몸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가 없구나...나의 어떤 의로도 그 나라는 갈 수가 없구나 ..이게 주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누군가가 외부에서 건져주지 않으면 의로운 재판장게서 나를 죄없다 하시지 않으면 나에게는 어떤 희망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자에게 십자가 지신 예수는 주와 그리스도가 되시는 거란 말입니다. 그렇게 자기가 부정되어진 자, 즉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부한 자들이 가난한 심령으로 바뀌어버린 것을 천국이 너희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인들처럼 예수믿고 부자되고 출세해서 세상 고지에 서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자는 그런 기복주의, 고지론, 성공주의가 바로 사도가 질타하는 울고 통곡해야 할 부자인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주께서 내어버려 두신 자입니다. 그러니까 한국교회는 정확하게 성경과 정반대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는 예수 이름을 아는 자, 내 안에 예수라는 보화를 가진 자입니다. 질그릇 안에 있는 보화로 말미암아 능력의 심히 큰 것이 우리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된 자입니다. 그래서 그 질그릇은 보배만 남기고 장렬하게 깨어져야 합니다. 다시 없음, 티끌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러지 않고 보배를 이용해서 내 질그릇을 더 아름답고 튼튼하게 하려는 자들이 세상 종교인들입니다. 사도는 이런 자들을 향해 저주를 퍼붓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왜 부한 자들에게 통곡하라, 고생하라, 너희의 금과 은은 녹이 슬었다고 하는지 아시겠지요? 사실 금과 은은 성전 제사에 사용되는 기명들의 재료입니다. 율법과 희생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하는 니들의 종교성 그 율법 행위가 녹이 되어서 너희의 살을 먹는 독이 된다는 말입니다.
4절에 보면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4절)
이 말씀을 부르조아 계급의 프롤레타리아 착취로 해석하는 해방 신학이 이 구절을 근거로 하나님은 부의 평등과 노동자들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합니다. 공산주의 이론을 창시한 마르크스도 원래 신학도였습니다. 그러다가 자기 누이가 굶어 죽는 것을 보고 성경을 집어 던져 버렸다고 하지요. 자 이 말씀이 모든 인민이 다 행복하게 잘 사는 그런 사회주의 사상을 긍정하는 본문일까요? 요즘 우리나라에도 사회주의 이념에 경도된 목사들이 통일운동이니 노동운동이니 해서 성경에 사상과 이념을 입혀서 가르치는 것을 종종 보게 되는데요 그렇게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닌 사람의 것으로 가르치는 자들을 데살로니가 후서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심판은 인간들의 의나 선이 기준이 아니라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한 상태가 곧 심판인 것입니다.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난 이후로 세상은 빈부의 격차, 즉 마르크스가 말한 계급투쟁이 계속 있어왔습니다. 우리 속담에도 가난은 나라도 구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인간들의 욕심 때문에 공평하고 정의로운 사회는 세상이 끝날 때까지 불가능합니다. 이미 공산주의 실험을 통해 실패로 끝났어요. 공산주의가 실패한 이유는 인간에 대해서 몰랐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단순히 기계로 착각을 했어요.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을 이용해서 인간들이 행복하고 인간들이 공평하고 인간들이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데 사용하는 것을 악이라고 규정합니다. 생각해보세요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예수님이 오셔서 굳이 십자가를 지실 필요가 없잖아요 성령부터 먼저 보내서 말씀 잘 지키고 서로 사랑하면서 지상 낙원 만들면 되지, 어떤 사람들 말대로 에덴을 회복하면 되지 뭐하러 하나님의 아들이 이땅에 피를 흘려야 하는가 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잘 사는 지상 낙원을 만드는데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럴거면 처음부터 에덴에 선악과가 있고 뱀이 나타나고 그러지 말았어야지요.
그렇다면 성경을 살기 좋은 세상 만들기에 이용하는 자들은 누구일까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영광의 광채를 가리는 악한 영들입니다.
본문이 단순히 일한 품꾼들에게 삯을 주지 않는 것은 나쁜 짓이라는 교훈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가르치는 자들이 악한 영, 세상 영을 받은 자들이란 말입니다. 다시 말해 왜 하나님은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도록 방치하고 있냐는 거지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 나쁜 놈들을 다 청소해서 좋은 세상 평등한 세상 만들자..이렇게 형태는 달라도 인본에서 출발한 모든 사상과 이념은 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탄핵하려는 세상 정신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 다른 이들을 짓밟고 올라서려는 선악열매의 독성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고 싶은 것이 아담에게서 난 죄인들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런 너희들을 내어버려 두신 것이 부자들의 착취며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육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한 것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이 부모의 유산을 공평하게 나누어주는 일을 하러 오신 것처럼 착각한 누가복음 12장의 그 사람과 같은 거에요 예수님은 그런 세상정신에 대해 다른 차원의 것을 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그의 나라와 그의 의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이와 비슷한 것이 ‘과수원 품꾼 비유’입니다. 아침 일찍 온 사람에게나 저녁에 온 사람에게나 주인은 삯을 모두 똑같이 주었습니다. 세상 원리로는 차등이 있어야 하는 거죠.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 하나님 나라를 모르는 자들이 본문에 품삯을 주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석을 하는 주석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모두가 일을 시킨 노동의 대가만큼 지불해야 하고, 특히 기독교인들은 신경 써서 더 후히 줘야 한다는 정도의 해석을 하고 있어요. 말 그대로 표피적이고 육적인 해석입니다.
처음 시작할 때 야고보서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음을 증거하는 책이라고 말씀드렸지요? 오늘 본문도 그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 사랑의 아들의 나라는 세상과 어떻게 다른 것인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절에서 “너희는 의인(예수)을 정죄하고 죽였으나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구절이 생뚱맞게 왜 들어가 있겠습니까? 돈 못 받은 품꾼이 의인입니까? 대항하지 않고 맞아 죽었다는 말이 이교도들에게 순교했다는 뜻입니까? 예수님 이야기란 말입니다. 너희들처럼 율법의 행위로 마음이 부해진 자들, 세상적인 가치로 정의를 판단하는 자들, 자기 의로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서려고 하는 자들이 이 땅에 오신 의로우신 자 예수를 죽였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분은 하나님과의 약속 때문에 너희들을 심판하지 않고 십자가에서 힘없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하는 이야기는 이것입니다.
이천년의 교회 신학이 본문 주석을 그렇게 밖에 내놓지 못했지요. 오죽하면 루터도 야고보서를 성경에서 빼자고 했을까요. 그러니까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는 사람들이 야고보서 전체를 믿음 더하기 행위로밖에 가르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이 진리가 아니라 신학과 교리가 진리가 되어버린 겁니다. 그렇게 된데는 이유가 있지요 우리 속에는 착하게 살아 하나님의 의에 이르고자 하는 탐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양심을 만물보다 가장 부패하고 거짓된 마음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양심이란 게 모두 나를 위한 나 중심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기중심의 선악체계가 바로 선악과의 독성입니다. 아담에게서 난 모든 인간은 이런 선악의 두 마음으로부터 자유 할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적인 생명, 영생 생명나무의 실과에 대한 탐심을 버리지를 못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생명나무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과 길을 찾고 있습니다. 그것이 종교이고 신학입니다. 요즈음은 종교의 자리마저 과학에게 빼앗겨서 과학이 종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런 자신의 선함과 됨됨이 행위의 가능성을 통해 인간들이 원하는 것은 딱 한 가지, 하나님과 방불한 자기 존재의 증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죄 아래 가두어 두시고 인간들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손을 뻗쳐도 그 하늘에 닿을 수 없다는 것과 우리가 불가능한 죄인인 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율법의 정죄를 통해 생명나무이신 예수에게로 인도하는 것이 성도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인 것입니다. 물론 내어버려 두신 자들은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난 길이 없는 것도 율법의 기능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청년에게도 예수님은 먼저 율법(계명)을 들이미셨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자신은 그것을 다 지켰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이 청년에게는 율법을 주신 목적이 전혀 적용이 되지 않은 겁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은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하게 하시기 위함인데 이 청년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뻘쭘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오늘날 세상교회의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아담의 자존심은 불가능을 모릅니다. 이 부자 청년처럼 율법을 자기 행위로 다 지켰다고 하는 상태가 바로 부한 자입니다. 그래서 이 청년은 계명이 담고 있는 사랑과 진리를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셨을 때 줄 것이 없었습니다. 일차적으로 자기 생명 같은 재물을 나누어 주기 싫었고, 또 하나님이 담아주신 보물을 쌓아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줄 수가 없었던 거에요 결국 그는 자기가 보물로 여기는 그것 때문에 진짜 보화이신 생명이신 그분을 떠나게 됩니다.
이것이 빛과 진리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안에다 꼭꼭 숨겨놓고 있어도 빛과 진리로 오신 예수님 앞에선 다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또 우리에겐 그런 거짓과 부정함이 하나하나 모두 발가벗겨져야 합니다. 그런 빛의 비추임이 없이는 그붑ㄴ의 손길이 닿기 전에는 예수님은 진리를 탐구하고 연구하는 대상에 머무르고 맙니다. 당신은 거기있고 나는 여기있고 입니다. 하나됨의 관계는 우리편에서 손을 뻗쳐서 되는 일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자신의 죽음 안으로 불러들이셨을 때만 하나됨이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과 같은 말씀이 마태복음에도 나옵니다. 보통 삯군 목사들이 성전 건축 설교에 많이 써먹는 구절이죠.
(마태복음 6장)
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 하느니라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이 말씀을 그냥 들으면 교회에 헌금하는 것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방법이라 생각하게 됩니다. 세상에선 실패해도 내가 들어 둔 보험이 있으니까 다음 생을 기약하자는 거지요 패자부활전, 불교의 윤회설과 다를 게 없습니다. 다만 교회에선 소망이란 말로 바꾸어 놓았지만
그런데 바로 아래에 보면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보물이 무엇인지 분별할 눈이 네게 있느냐 하는 말입니다. 보물이 무엇인지를 알고 보물을 어디에 어떻게 쌓아야 하는지를 알아야 쌓던지 말든지 할 것 아니겠냐는 것입니다.
만일 교회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헌금을 많이 하여야 천국에 쌓이는 보물이 많아진다면 천국에서조차 빈부격차가 얼마나 심하겠습니까? 록펠러처럼 회계사까지 두고 십일조를 한 사람들은 천국에서도 삐까번쩍하게 살겠죠? 조용기가 말한 것처럼 천국에 가면 100평자리 맨션에 금으로 만든 변기가 있는 집에 사는 사람이 있고 오막살이에 사는 사람도 있고 ...여러분 그런 천국 가고 싶으세요? 그럼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두 렙돈을 헌금한 과부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늘날 교회가 이렇게 유치찬란한 천국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랑의 교회에서 이천억짜리 예배당을 지을 때 교인들의 생각이 어떠했을까요? 여기에서 내가 내것을 쌓은 것만큼 천국에서도 그에 합당한 상급을 받는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바로 천국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 하는 부자들입니다. 천국은 그런 낙타 같은 덩치가 다 해체되고 먼지가 된 자들이 바늘 구멍을 통과해서 들어가는 천국이란 말입니다. 제가 단언하는데 이천억짜리 빌딩 벽돌에 자기 이름 새긴 사람들 그 이름으로는 절대 천국 못 들어갑니다.
천국은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닙니다. 이제 가실 날이 가까운 권사님들 잘 들으셔야 해요. 이 땅에서 천국을 살지 못하면 절대 천국 못 갑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부터 천국을 사는 사람들이에요. 다시 말하면 아무것도 없어도 예수 한분으로 부족함이 없는 상태가 천국인 것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이루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공간적인 이동이 아닙니다. 내가 죽어서 내 영혼이 슝 하고 하늘로 올라갔는데 계시록의 내용처럼 슬픔도 애통도 눈물도 아픔도 없고 내가 바라는 모든 것이 이루어져 있는 그런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이 온전히 이루어져 있는 상태, 즉 하나님과의 온전한 사랑의 관계가 영원한 곳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땅에서부터 그분과의 관계 곧 그분의 섬김을 누리는 그 사귐이 없으면 천국엘 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 잘 믿는 내가 죽어서 천국에서 깨어나는 그런 거 없습니다. 우리 이몸으로 가는 천국 아니란 말에요 우린 이미 창세 전부터 거룩하고 흠이 없는 아들들로 그 나라에 완성되어 있습니다. 그 아들들이 어떤 하나님의 희생과 의와 섬김으로 완선된 하나님 나라인지를 배우기 위해 우리 인생이 있는 거에요 그래서 성도는 지옥에서도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그곳이 천국입니다.
그러니까 천국 갈 사람들은 아무리 애를 써도 지옥을 갈 수가 없습니다. 주님과 한몸된 거룩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오는 이유도 천국 가는 방법을 배우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그의 몸된 교회, 피로사신 교회라는 것을 모일 때마다 확인하고 나누고 찬송하기 위해 교회로 모이는 것입니다.그러니까 그 몸된 교회가 아닌 자들과의 분리와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 세상교회인 거에요
구약에서 말하는 약속의 땅은 이스라엘이 광야를 거쳐서 들어간 가나안 일곱 족속이 있는 그땅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 땅은 나중에 다 빼앗겼고 이스라엘은 쫓겨났습니다. 그것들은 다 모형이란 말이지요. 약속의 땅은 바로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산상수훈에도 보면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고 하죠? 우리가 그 땅인 거예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씨와 땅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통과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어렴풋이 거울로 보는 듯해요. (당시의 거울은 구리로 만든 것이라 거울을 봐도 희미하게 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의 관계는 끊어지지 않습니다. 창세전의 그 약속이 작동되고 있는 상태가 현재적 구원인 거에요. 그러니까 성도는 이 땅에서 시간이라는 역사와 영원이라는 묵시를 같이 살고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우리가 이미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고 완료형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관계가 우리가 그분을 힘서 찾아서 얻은 것이라면 우리의 상태에 따라 취소될 수도 있고 끊어질 수도 있지만 우리가 있기도 전의 약속에 의해 그분의 열심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관계는 절대 끊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 평안이며 자유인 것입니다. 나로부터 믿음의 주요 온전케하시는 예수를 바라보게 된 자들의 자유입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로 탈취된 사람들, 여호와의 전쟁에서 적군으로부터 전리품으로 탈취당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가 된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 약속의 땅이라고 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그 땅은 그리스도 예수를 말하는 것이고 그 예수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이 약속의 땅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약속의 땅이 되었다는 말은 우리 안에 있던 가나안 일곱 족속, 일곱 귀신이 멸망 당했다는 말입니다. (물론 구약의 이스라엘은 철 병거 때문에 그들을 다 내쫓지는 않았지요.) 그러니까 우리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 정신 악한 영과 싸우는 기간이 우리의 신앙생활 전체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 안에 있는 가나안 일곱 족속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속성들이 모두 멸망당하고 하나님 나라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의 말씀 “복이 있다 너희 온유한 자여”... 에서의 온유한 자도 성품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악한 속성들이 말씀 앞에 복종 된 상태를 말하는 거에요 하나님이 마침내 우리를 이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격 별로 좋지 않은 모세를 온유한 자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되어 언약을 이루게 되는 자가 이스라엘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대표적으로 뽑혀 나온 자가 모세인데, 그 모세의 온유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건이 구스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대표한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보잘것 없는 흑인 노예를 아내로 삼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임을 보여준 것이에요.솔로몬 왕이 게달의 장막같은 술람미를 사랑한 아가란 말입니다. (그런데 누이 미리암은 이것을 보고 지적을 하다가 문둥병에 걸렸죠.) 왕궁의 수많은 어여쁜 여인들을 두고도 게달의 장막 같은 술람미를 택한 것은 그 사랑의 조건이 우리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가르치시는 거에요
이렇게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폭력적으로 나를 찾아오셔서 나를 자기 소유로 삼으시고, 나는 어떤 저항도 할 수 없이 그분에게 항복되고 포기 되어지는 것이 우리가 죄인의 인생을 사는 이유와 목적입니다. 그게 예수님의 온유를 배우기 위함인 것입니다.
미리암이 구스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모세를 나무란 것은 그녀가 하나님의 온유, 긍휼과 사랑을 모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온몸에 감각이 없어지는 문둥병에 걸렸어요. 그렇게 같은 통점을 가지지 못한 문둥병자는 이스라엘이 아니기 때문에 진 밖으로 쫓겨나야하는 자인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 마음에 무감각한 세상정신 가치로는 절대 천국을 갈 수 없다는 겁니다. 이것이 부한 자들이 울고 통곡해야 한다는 본문의 말씀입니다. 미리암의 생각은 모세가 이스라엘의 대표로 하나님으로부터 계명을 받아온 자이면서 이스라엘을 축복의 땅으로 인도할 자인데 어떻게 검둥이 노예와 살 수 있겠느냐는 것이에요. 이것이 바로 통곡해야 하는 부한 자들의 생각입니다. 세상적 가치기준으로 하나님을 판단한 것입니다.
진짜 온유하신 한 분 예수님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그 땅이 저와 여러분입니다. 산상수훈에서 말하는 온유한 자에게 주어진 땅이 성도들이며 그들이 곧 하나님의 기업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된 우리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도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 안에 쌓은 보물은 그리스도 예수 그분이 우리의 보물입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을 통해서 진리를 알면 우리 안에 보물이 쌓인 것입니다. 그런데 보물을 보물로 알아보지 못하고 이 땅에 갇혀버리면 그게 지옥입니다. 그들이 땅의 부자입니다.
그래서 흙으로 지어진 우리의 실존인 질그릇 안에 있는 보화를 알게 되면 이 질그릇은 더 이상 질그릇이 아니라 하늘로 체화 되어버립니다.하늘에 속한 형상인 것입니다. 오직 안에 들어있는 보배 때문에... 이것이 감추어진 비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어진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늘적인 생명을 가지게 되고 그들도 하늘로 변화됩니다. 그래서 그 하늘들 안에 보화가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예전에 자기 삶에서 가장 가치로 여겼던 율법행위의 의를 나중에는 배설물로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자기 자아를 통통하게 살찌우는 것임을 알았던 겁니다. 장농 안에 있는 좀들이 집을 지을 때 지들 똥으로 짓는답니다. 이것이 원어로 파리세인데 바리새인과 어원이 같습니다. 자기 똥으로 집 짓고 사는 거죠. 오늘 본문이 말하는 부한 자들이 그들입니다. 그들이 힘으로 알고 생명으로 알아서 소유하고 쌓으려고 했던 재물들은 다 썩게되고, 자기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서 무화과 잎으로 만들어 입은 옷은 다 좀이 먹는다는 겁니다.
육적 이스라엘이 목숨을 바쳐서 지켰던 성전에 사용했던 종교적인 열심, 금과 은으로 된 기명들이 그들을 죽이는 뱀독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을 향해 야고보사도는 자기 소유를 가지고 사치한 자들, 열락한 자들, 마음을 살찌우는 자들이라고 한 것입니다.
단순히 돈이 많아서 사치하고 열락하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 종교적인 사치와 열락이 더 무섭습니다. 셀프 경건에 빠져서 자기를 정말 하나님의 성도로 여기고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나대는 사람들은 그 중독에서 스스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그게 죽을병이에요. 이들이 품꾼에게 삯을 주지 않는 자들입니다. 세상 것으로 자기 배만 채우는 자들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신은 배라고 합니다. 땅에 속해 땅의 일만 생각하는 자입니다. 그 반대편에 하나님으로 배부른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6절에 보면 그들이 의인을 죽였으나 그 의인은 그들에게 대항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율법의 의를 탐하는 자들은 반드시 의인을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경건한 자라고 하는 율법사 바리새 제사장이 예수를 살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다. 왜 우리가 당신의 은혜로만 구원이 가능하냐는 반발에 의해 십자가사건이 터져 버린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가 세상에 있는 이상 이 세상엔 구원받을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이 폭로되어 버린 것입니다.
다른 복음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사람을 위해서 사람을 좋게 하기 위해 복음을 변개하는 것이 다른 복음입니다. 이 다른 복음이 자기사랑의 형태로 우리 안에 감추어져 있는 본질적인 죄입니다. 복음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데, 다른 복음은 예수도 있고 나도 있음이에요. 하나님도 좋게하고 인간도 좋게하려고 하는 모든 시도가 다른 복음입니다. 오늘날 세상교회라고 보면 되겠지요 이렇게 우리 속에 감추어져 있는 그 악한 본성, 예수를 살해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죄성을 향해서 야고보 사도는 들으라 부한 자들아 하면서 꾸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부한 자들에게 더 부한 자가 되라고 설교하는 것이 오늘날의 교회들입니다. 그러나 참된 교회는 우리가 도저히 예수를 믿을 수 없는 이러한 세상현실로부터 불려 나오고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는 죄의 권세로부터 탈취되어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가 된 이 놀라운 은혜의 영광을 서로 확인하고 나누기 위해서 모이는 곳입니다. 교회가 세상 속에 있는 이유는 그 한 가지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아직 세상 속에 있습니다. 주께서 눈동자처럼 아끼시고 보살피시는 그의 몸된 교회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 놀라운 은혜를 모일 때마다 나누고 찬송할 수 있기를 기도합시다. 사도는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모이기에 힘쓰라고 합니다. 우리 이름들이 다 빼앗기고 예수 이름으로 모이는 그 교회가 된 것을 감사하고 찬송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에서 부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부가 우리를 해치고 우리를 죽이는 부이어서
그 땅의 부를 우리에게서 빼앗으시고 참 하늘의 부를 부어주심을 감사합니다. 이런 귀한 것을 분별하는 눈이 우리에게 있게 하시고 그로 인해 진짜 가난한 자들에게 하늘의 것들을 나누어줄 수 있는 교회가 되게 하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첫댓글 말씀 좋아요 ㅎㅎ
들을 귀를 주시니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