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hief's Diary : 대재앙-
#14.변화(變化)
그때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 듯 하다.
“더 빨리 뛰어!”
격한 숨소리, 달음박질, 차가운 빗방울, 그리고 아득함.
“지금쯤 스무 발은 더 맞았을 거다!”
빗방울이 얼굴을 때린다. 아버지의 손바닥 같다.
“저기 기둥까지 선착순!”
메아리다. 나무들의 합창이 날 몰아세운다. 그러나 그것은 아버지의 호령이었다.
내가 왜 이런 훈련을 받아야 하는지조차 모르고 있던 시절.
7살의 나이에, 장난감 대신 붙잡아야 하는 것은 10kg의 저격 소총이었다.
달려가서 총만 쏘면 어떻게든 이 지독한 매일을 벗어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 끝에 도착한 우리는…….
비가 올 것 같진 않았지만 구름이 가득 태양빛을 가린 5월 말의 아침이었다. 시은은 왠지 노곤하다는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창문을 쳐다보았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초여름 치고는 쌀쌀한 바람이 조심스레 새어나왔다. 뭔가 옛날 꿈을 꾼 것 같다며 시은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몸이 무거웠지만 그럭저럭 견딜 만한 아침이었다.
“쳇. 하필이면.”
다시 돌아온 월요일. 새로운 한 주의 아침이 구름만 가득 꾸물대는 게 싫었는지 시은은 세수를 하며 중얼거렸다. 뭐 어느 월요일에는 새 한 주의 시작이 맑다고 기뻐하던 때가 있었냐마는, 사실 그런 월요일에 날씨라도 맑으면 좋지 않겠냐는 의미였다. 머리를 감은 그는 이윽고 교복까지 차려입은 뒤 부엌으로 내려왔다. 변함없는 아침식사. 이른바 된장찌개와 김치 일색의 아름다운(?) 아침. 아무리 엄마가 된장찌개밖에 할 줄 모른다지만…….
“엄마, 아침마다 찌개 먹기는 싫은데…….”
“시끄러. 아침 7시부터 밥을 짓는 엄마의 맘은 생각도 못하냐?”
이러니 또 할 말이 없어진다. 그러고 보니 엄마가 할 수 있는 음식은 단 세 가지 뿐. 밥, 라면, 된장찌개. 그래도 아빠 말씀을 들어 보면 결혼 당시에는 된장찌개도 못 끓이셨단다. 몇 년을 갈고 닦아 겨우 여기까지 온 거지. 다른 음식을 만드는 건 또 몇 년이 걸려야 한다는 말일까?
쿵쿵
그때 위층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어제부터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심지어 저녁 먹으러 내려오지도 않던 시란의 발소리였다. 시은과 엄마는 계단 끝을 숨죽여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일동은 경악했다.
“어라? 너, 너 머리가 왜…….”
“안시란, 머리…….잘랐니?”
하지만 시란은 아무런 말없이 식탁으로 다가와 앉기만 했다. 그 뒤를 잇는 일련의 행동, 즉 엄마가 밥 한 공기를 떠 주고 시란이 숟가락으로 부지런히 밥을 먹는 행동은 이어지지 않았다. 기어코 시란이 입을 떼었다.
“엄마, 밥.”
“어? 아, 그래, 줄게.”
겨우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한 엄마의 톱니바퀴. 하지만 눈동자는 여전히 시란을 향했고, 시은도 그녀에게 자초지종을 물어보려 했지만 평소보다 한층 더 쌀쌀맞은 그녀의 태도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놀람으로 가득 찬 식사가 끝나고, 그들은 집을 나섰다. 웬일로 시란은 시은의 자전거를 타고 싶다며 짐받이에 몸을 실었다.
“……무슨 결심이라도 선거야?”
자전거를 타고 나아가며 시은이 조용히 물었다. 어제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그가 아니었지만 직접 말했다간 엄청난 눈초리를 면하지 못하게 될 것 같아 그 이상은 물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말 저변에 깔려 있는 사실까진 가리지 못했던 걸까.
“내가 어떤 일을 당했는지 알고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무, 무슨 말이야. 난 그냥 순수하게 네가 어떤 결심이 서서 머리를 자른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을 뿐이야.”
시란은 안 믿긴다는 눈초리로 한 차례 그를 흘겨보더니 다시금 멀거니 앞을 바라보았다. 시은은 시란이 어떤 대답을 해 주길 바랐지만 그녀의 입은 도통 열릴 줄을 몰랐다.
그러는 동안 자전거는 학교 앞 대로변까지 나섰다. 확실히 시란의 인기도 많이 사그라졌는지 평소 그녀에게 인사를 해 주던 그녀의 친구들은 물론 팬클럽(?) 남자들까지 쭈뼛쭈뼛 그녀를 지나쳤다. 그렇지만 모두들 시란의 달라진 머리칼을 보고는 하나같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양쪽으로 묶어 내리던 탐스러운 긴 흑발 대신 자그마한 단발머리만이 남겨졌으니까. 사실 이 편이 더 귀엽기도 했지만, 중요한 것은 머리 모양이 아니라 머리를 자르게 된 계기인 만큼, 그녀를 본 모든 사람들의 표정엔 한결같이 호기심이 번뜩였다.
“오늘은 일이 없어. 알고 있지?”
“아, 그래. 알았어.”
시란은 일이 없다고 알려주곤 이내 휙 돌아섰다. 그녀를 기다리는 사람 따윈 아무도 없었으나 그것이 오히려 시란의 특별한 변화를 더욱 도드라지게 해 주는 것 같았다. 시은은 그녀가 어떤 결심을 한 게 아닐까 고민하며 자전거를 매었다.
그때 누군가가 뒤에서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시은은 슬쩍 뒤를 바라보았다. 두 손을 들고 시은은 놀라게 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오던 이라는 이내 뒤돌아서는 그를 보곤 김샜다는 표정으로 두 손을 내렸다. 대신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쳇, 어떻게 알아차린 거야?”
“후훗, 내 직업이 뭔지 몰라서 하는 소리는 아니겠지?”
“알아, 알지만……. 흥, 됐어.”
이라는 토라진 척 하며 시은의 관심을 사려 했지만 시은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아무 표정, 아무 반응 없이 자전거를 묶어놓고는 교실을 향하기 시작했다. 무심한 그에게 이라는 입을 삐죽 내밀다 이래봐야 어차피 자기 손해라고 여기며 곧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진 것이 있어 시은에게 물었다.
“그런데 말야, 시란이 머리를 자른 것 같은데, 왜 그런지 알아?”
“후우, 그것 때문에 집안이 발칵 뒤집혔어. 아무리 물어봐도 대답을 안 하고……. 아니, 그 이유는 네가 더 잘 알 것 같은데? 독심술이 있으니까.”
“엄밀히 말하면 독심술이 아냐. 그리고 눈을 마주쳐야 한다고 몇 번을 말해?”
“두 번째일걸. 그래도 이미지는 잡아낼 수 있지 않아?”
“그거야 그렇지. 그런데 심각한 것들만 가득 차 있었어.”
심각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고? 시은의 의문에 답하기라도 하듯 이라는 자신이 느낀 모든 것들을 솔직하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일단 이미지로 본 것만 얘기하자면, 굴욕, 패배, 머리, 리본, 실패, 걱정, 계획, 자전거, 암담함, 구름, 어두움, 골목길, 피로, 활기, 피, 달, 긴장, 엄마, 기회, 전투, 초능력, 두려움, 공포, 경악, 승리, 지형, 변화, 친구, 권총, 짜증, 복수, 부정, 신념, 고집, 죽음, 서늘함, 빛, 연습, 간절함, 살인, 미래, 이기심, 충실함, 학교, 상대, 눈빛, 능구렁이, 잔인, 상처, 마지막으로 검.”
“……그거 아무리 봐도 어제 이상한 금발 남자에 대한 원한 같은데?”
“네가 봐도 그렇지? 어쩌면 저 머리도 그 남자 때문에 자른 걸지도 몰라.”
동감이라며 시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으로 그는 이 짧은 순간에 저 수많은 이미지들을 읽어낸 그녀의 독심술에 놀라워했다. 아, 독심술이 아니랬지. 하지만 누가 봐도 독심술인데.
“……아참, 그런 소문도 나돌던데.”
“무슨 소문?”
“친구 이름을 갖고 자신을 매도했다고 시란이 어떤 여자애 목을 움켜잡았대.”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온(?) 시란이니까 여자 목을 움켜잡는 거야 아무 일도 아닐 것이다. 희한한 것은 시란이 학교에서 본성을 드러냈다는 점이었다. 얼마나 그랬으면 시란이 사람을 잡으려 들었을까. 여하튼 그것이 원인이 되어 친구들이 사라진 것일지도 모른다.
하루 종일 흐릴 줄 알았던 하늘은 조금씩 개더니 이윽고 반짝이는 태양과 그 하늘 가득 구름이 떠다니는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놓았다. 오후 4시. 누구에겐 즐겁겠지만 누구에겐 피곤한 체육시간.
“달리기로 무슨 수행평가를 하냐.”
시은은 자신의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면서도 이 때 아닌 수행평가 날림을 향해 투덜거렸다. 엄밀히 말하면 수행평가도 아니었다. 태도 점수 5점짜리를 달리기로 채점해 상위 6명을 5점, 그 다음 6명을 4점, 그 다음 3점, 2점, 1점으로 하겠다는 게 선생님의 설명이었는데, 그 달리기를 하기 위해 모두들 자신들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만이라면 수행평가에 대해 투덜대지 않았을 것이다. 이유인즉…….
“왜? 시은은 달리기 싫어해?”
……이라와 같은 조가 되어 달리기를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달리기가 딱히 싫은 건 아냐. 귀찮을 뿐이지. 하지만…….”
시은은 고개를 돌려 반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여자들은 사흘 전 일어난 유엘 남매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남자들은 안시은과 이라의 커플 달리기를 기대하며 킥킥거리고 있었다. 번호순으로 서로 맞닿아 있다지만 어떻게 된 게 같은 조냐. 이라를 만나고서부터 만사가 묘하게 그녀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 시은은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왠지 달리기가 두려워진다.’
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다며 이내 마음을 비우는 그였다.
“와아~.”
그때 뒤에서 요란한 함성이 들려오자 모두들 고개를 돌렸다. 시은도 그곳을 바라보았다. 피구를 하고 있는지 밀가루 흰 선을 따라 한 반 여자애들이 공을 갖고 경기를 벌이고 있었는데, 상대편이 던진 공에 맞은 여자애 하나가 나오고 마지막으로 남겨진 단 한 명의 여학생만이 차갑게 상대편을 노려보고 있었다. 가만히 보니 시란이었다. 상대는 여섯 명이나 남아 있어 그 아무리 뛰어난 그녀라도 쉽게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야, 저 애 안시란 아냐?”
“맞아. 머리 잘랐다더니 정말이네.”
시은 좌우에 앉은 남자들이 시란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유난히 찰랑이는 단발머리를 가진 시란이 눈에 띄었다. 더군다나 아직 그녀의 팬들이 완전히 돌아선 것은 아니었으니, 그들은 혼자 남은 시란이 저 난관을 어떻게 타개해 낼지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하긴 그녀의 본성에 대해서 들은 게 별로 없으니 그들의 머리에는 아직 가녀린 시란의 이미지만이 남겨져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란은 예상 외로 잘 해 주고 있었다. 앞에서 날아오는 공을 재빨리 피해낸 그녀는 이어진 뒤쪽에서의 공격을 붙잡은 뒤 앞을 향해 내던졌다. 쉽게 허물어질 거라 생각했던 그녀의 행동에 대한 예상이 빗나갔는지 아이들은 모두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도둑일 때의 실력까지 발휘하며 열심히 피구를 하는 걸 보니 뭔가 각오가 다져지긴 한 모양이었다. 나름대로 다행이라고도 할 수 있겠고.
“그 다음!”
그때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시은과 이라가 출발선에 섰다. 길이는 100m, 자세를 잡고 출발 신호를 기다렸다. 작년엔 15초 수준으로 뛰었는데, 올해는 13초 기록까지 당겨 볼까, 하며 시은은 제 멋대로 상상을 계속했다.
타앙
잠시 후 신호탄이 울리자 시은은 재빨리 발을 놀리기 시작했다. 주변 풍경은 빠르게 스쳐 지나갔고, 바람이 세차게 불어 몸 앞을 가로막는 것 같았다. 그러나 폭발적인 움직임은 골인점에 닿는 것과 함께 천천히 줄어들었다. 뒤이은 선생님의 목소리.
“1, 12.95……?”
‘이런, 너무 빨리 달렸나.’
시은은 자신을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는 선생님을 마주 보며 은근히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시은은 뒤를 바라보며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와 동시에 잠시 후 이라가 도착했다.
“흠, 흠. 19.06초. 두 사람 차이가 많이 나는구나.”
시은은 어색하게 웃고는 그 자리를 벗어났다. 이라가 한 마디를 했다.
“뭐야, 시은. 너무 빠르잖아. 우리 반 1등일걸?”
“13초를 노리고 달렸는데 12초가 나와 버렸네. 근데 내가 그렇게 빨리 달렸나?”
“마치 몰랐다는 것처럼 이야기하지 마. 도둑 일을 하는데 그 정도는 당연한 거지. 안 그래?”
도둑일 때문이라……. 그 때문일지도 모르겠다고, 반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며 그는 생각했다. 잠시 고개를 돌려보니 시란은 저 혼자 팀의 승리를 일구어 내곤 다른 아이들과 함께 웃고 있었다. 다음 주자들이 그들 곁을 스쳐 지나갔다.
“이래저래 평화로운 하루구만.”
시은이 저 먼 태양을 바라보며 중얼거리자 이라가 그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느껴지는 감정은 평화, 고요, 아름다움, 편안. 자신의 세계를 바라보며 편안함을 느끼는 인간의 감정에 이라도 이유 모를 박동을 느꼈다.
하지만 준비는 이미 끝난 것을…….
“……안시은.”
“왜.”
“만약에……. 정말 만약에, 이 세계가 사라진다면 넌 어쩔 거야?”
“세계가 왜 사라져? 지구가 폭발한대?”
“아니, 그냥 한 번 물어보는 거야.”
그냥 한 번 물어보는 거라며 이라가 말하자 시은은 잠시 곰곰이 그녀의 과제를 풀다 가만히 대답했다.
“뭐, 인간이니까, 나라면 일단 내가 살 수 있는 곳 어디까지라도 도망갈 테지. 도망가는 것도 숨는 것도 여의치 않다면 누군가랑은 같이 있을 테고. 그래도 충분한 시간이 있고, 지구 멸망이라는 게 엄청나게 거대해서 우주선을 타지 않는 한 도저히 도망갈 수 없다면, 오히려 난 변함없이 학교에 나오고 싶어. 평상시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면 언제 죽어도 그리 억울하지 않을 테니까. 너는 어쩔 건데?”
“나? 난 그땐 이미…….”
“……아참, 넌 인간이 아니지.”
아니야, 그 때문에 내가 없을 거란 의미가 아니라고. 이라는 말하고 싶었지만 다시 굳게 입을 다물었다. 인간을 단죄하고자 하는 생각은 이미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던 결심이었다. 단순한 죽음이 아닌, 온갖 방법을 통한 괴로운 죽음을. 하지만 그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이 시은이라는 걸 알았을 때엔 그 어떤 때보다 길고 긴 회의와 갈등의 그녀의 마음속을 헤집고 있었다. 마지막 ‘실험대상’으로 정한 것이 시은이었는데도.
“자자, 그런 생각 그만 하고, 나 오늘 너 네 집에 가도 돼?”
이라가 일부러 밝게 소리치며 시은을 부르자 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순간 눈이 마주친 이라는 그의 생각을 읽어낼 수 있었다. 왜 하필 오늘이냐는 등, 왜 그렇게 서두를 일이냐는 등, 다음으로 미루면 안 되냐는 등.
“왜? 오늘 무슨 일 있어?”
“아니, 굳이 그런 건 아니지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시은은 염려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하필이면 오늘이 아빠가 돈벌러 나가지 않는 날이라는 점이었다. 물론 어제 안 사실이었으니 변동 가능성이 있지만, 사실 하루 쉰다고 했으면 그 어떤 의뢰가 들어와도 나가지 않는 아버지였다. 고로 집에 있을 거란 이야기인데…….
‘정말 데려와도 괜찮은 걸까? 엄마가 알아서 해 주시겠지?’
결국 모든 걸 엄마에게로 돌려버린 시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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