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결혼한 남편은 곧바로 동경으로 건너가 대학까지 졸업한다. 어린 아내는 신혼 초부터 그 긴 시간을 바느질 등을 하며 독수공방해야 했고, 속절없는 세월 속에 마음이 너무도 아렸다. 하지만, 신랑의 공부가 ‘부자 방망이’라도 되는 듯 세상에서 제일 좋고 귀한 것으로 여겼고, 남편이 돌아오면 꽃가마를 탄 채 떵떵거리며 살아갈 줄 알았다.
마침내 남편이 기나긴 학업을 마치고 돌아왔다. 헌데 당초 기대와는 달리 하릴없이 빈둥거리니 갈수록 집안 곳간마저 줄어든다. 남편은 자주 술을 마시고 귀가하는 시간도 늦어졌다. 어느 날에는 인사불성이 된 채로 문을 두드리자 행랑 할멈이 이를 보고 대문을 열어줬다. 가까스로 몸을 부축해서 방으로 데려왔는데, 대체 왜 이리 상황이 꼬여가고 있는 것일까?
술 취한 남편이 몇 마디를 내뱉는다. “이 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권한다오. 조선 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권한다오. 알았소? 팔자가 좋아서 조선에 태어났지, 딴 나라에서 났다면 술이나 얻어먹을 수 있나…….” 일제 치하 속에서 1920년대를 살아가는 남편. 이방인의 핍박도 싫은데 조선 사람끼리 좌우 이념 대립으로 갈라져 싸우니 괴로움만 쌓인다. 현실은 고단하고 특별히 배운 지식을 써먹을 일도 없으니 이 유학파 인텔리는 술 먹는 날이 늘어만 간다. 근대 단편소설의 선구자인 현진건이 지은 ‘술 권하는 사회’의 대략적인 줄거리다.
인터넷 뉴스를 다루는 필자는 매주 월요일 아침이면 지난 한 주간 네티즌들이 가장 많이 읽은 기사가 무엇인지 살펴본다. 이를 통해 관심이 큰 뉴스를 비중 있게 다루고, 그렇지 않은 소식은 일부 축소하게 된다. 회사 인터넷 사이트를 찾는 네티즌들이 많아지면 광고단가 등을 올려 받기에 유리하고, 반대인 경우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결국 언론사도 일종의 기업이어서 수익을 내야 하는 곳이기에 네티즌들의 발걸음을 더 많이 유도하려고 주목을 끄는 내용을 자주 취급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사회를 훈훈하게 만드는 따뜻한 뉴스가 비중이 크면 좋으련만 주로 성폭행이나 살인 등 사건 사고나 연예소식 등에 대한 검색비율이 높게 나타난다. 실제로 지난 6일엔 ‘제부 성폭행범으로 몬 처형에 실형’, 7일에는 ‘꽃놀이패 조세호, 도 넘은 막말태도 논란’, 8일엔 ‘14세에 살인 누명 쓴 미국 흑인 청년, 진범 잡혀 9년 만에 석방’, 9일엔 ‘장애인 노예처럼 부린 악마 부부...부인과 성관계 해보라’는 제목이 요일별 최고 관심뉴스로 올라왔다. 기타 경제나 문화 관련 뉴스 등도 적지 않지만, 네티즌들의 눈길은 대개 성관련 소식이나 자극적인 내용으로 향하는 게 일반적이다. 이런 경향은 포털이나 다른 매체들에도 비슷하게 나타나 그런 뉴스들이 검색어 상위권을 차지하다보면 우리 사회가 험악한 사건이 터지고 살아가기에 매우 불안한 곳이란 오해마저 주게 된다. 마치 ‘술 권하는 사회’를 연상시키는 것처럼….
특히 언론의 자살보도와 관련해서는 사회적 파장이 상당한데, 몇 해 전 모 연예인이 차 안에서 번개탄을 피워 세상을 등졌다는 소식이 널리 알려지면서 유사한 사례가 잇따랐다. 실제로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언론의 자살보도는 자살률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각각 특정한 시기에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을 썼던 핀란드와 오스트리아는 ‘자살’이라는 표현 자체를 삼가거나 희망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언론의 적극적인 참여로 자살률을 절반으로 줄이는데 성공했다. 앞으론 우리나라도 이런 자율규제 지침을 적용하면서 자살보도에 좀 더 신중을 기하도록 한다는 방침이다.
솔직히 아침에 눈을 뜨고 신문을 접하거나 늦은 오후 잉크가 덜 마른 채 건네받는 다음날 조간신문을 보면 대개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기사들이 그리 유쾌하지 않다. 14일자 매일경제신문 1면을 보면 ‘신격호·동빈, 계열사서 받은 돈 300억 논란’ “과감한 구조조정 없인 全산업 미래 기약없다” ‘브렉시트 공포에 아시아금융 화들짝’ ‘MS, 링크트인 31조원 샀다’라는 기사가 비중 있게 실렸다. 또 다른 신문을 살펴보니 1면에 ‘총선 참패 두달…與之不動’ ‘신격호 비밀금고 찾아내 현금 30억·돈장부 압수’ ‘한국 상위권 대학들 순위 줄줄이 추락’ ‘플로리다 총기 난사범, IS에 충성 맹세’ 등의 기사가 떴다. 결국 이들 활자를 분석해보면 국가·사회적으로 파장이 큰 뉴스가 신문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어지간한 ‘굿뉴스’가 아니면 특별한 관심을 끌지 못하기에 자극적이고 파급력이 강한 내용들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결국 언론 보도의 속성상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인 소식들이 구미에 더 당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현실을 너무 비관적으로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 즉 매스컴에서 다루는 소식들이 마치 이 세상의 핵심을 반영하는 것처럼 문자 그대로 인식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흔히 신문이나 방송은 독자와 시청자의 이목을 끌어야 하기에 독특하고 자극적인 뉴스를 선호하는 편이지만, 오히려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은 따뜻한 소식들이 더 많다. 그래서 지면을 넘기다보면 경영을 잘하는 기업들에 대한 소식도 담겨 있고, 훈훈한 미담(美談) 사례도 발견할 수 있다. 문득 또 다른 신문을 보니 “백사장 사진 내밀던 정주영 회장의 패기가 내 맘 움직여”라는 기사가 큼지막하게 눈에 띈다. 현대중공업의 오랜 고객인 그리스 선엔터프라이즈사의 조지 리바노스 회장이 방한해 새로 선박을 주문하면서 격려한 소식이 실렸는데, 경영 환경이 어려운 조선업체들에게 힘을 실어주려는 희망적인 뉴스다. 이처럼 우리 주변에는 의리를 잊지 않고 꾸준히 교분을 나누는 경우도 있고,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자신보다 열악한 사람들을 도우며 모범적으로 살아가는 분들이 적지 않다.
얼마 전 프랑스 동남부에 위치한 리옹 푸르비에르 언덕에서는 늦은 밤임에도 4000석이 넘는 원형극장 야외무대에 3000여 명의 관객이 들어찼다. 비가 흩뿌리는 을씨년스런 날씨 속에서 한국의 전통 춤사위가 펼쳐졌고, 이를 본 이방인들은 “최고급 프랑스요리 같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여기에 한국의 묵향(墨香) 영상을 본 그들은 전통과 현대가 적절히 녹아 있으면서 섬세함과 유연함이 조화를 이룬 장면에 깊이 매료됐다고 한다. 현장에서 직접 보고 소감을 전한 한 무용칼럼니스트는 K팝 외에 한국 전통 문화에 대한 외국인들의 놀라운 반응을 느끼면서 한국 문화의 지류가 얼마나 다채로운가에 대해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연 인원 500만 명이 찾는 ‘유교 문화의 본산’ 안동은 한동안 급격한 인구 감소에 시달렸다. 경제개발 붐을 타고 사람들이 서울로 몰리면서 1974년 27만 명에 달하던 인구가 2009년엔 16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이런 배경엔 딱딱한 유교문화가 지배하는 ‘고루한 도시’라는 달갑지 않은 이미지도 일부 작용했다. 하지만, 수 년 전 새롭게 지역경제를 살릴 방안을 찾다가 안동발전의 걸림돌로 여겨지던 유교문화를 대표브랜드로 키우는 역발상 전략을 내세웠고, 결국 지난해 517만 명이 찾는 동북아 최고 유교 관광도시로 거듭났다. 안동에는 세계문화유산인 하회마을과 도산서원, 그리고 고택(古宅)들이 산재해 있는데, 관광객들이 숙박하며 머물 수 있는 체험지로 개방하고 종갓집 전통음식을 브랜드로 육성하면서 관광객 수가 불과 6년 만에 200만 명 가까이 늘어나는 성과를 보였다.
우리나라는 비좁은 반도국가임에도 유구한 역사 속에 찬란한 문화를 꽃 피우고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해왔다. 6·25전쟁의 폐허를 극복하며 지구촌 경제발전 스토리인 ‘한강의 기적’을 일궜고, 유엔사무총장과 WHO사무총장 등 세계기구 수장을 여러 명 배출했다. 골프와 양궁, 야구, 유도 등 다양한 종목에서 괄목할만한 성적을 내며 스포츠강국으로도 자리매김했다. 또한 K팝을 위시한 한류 콘텐츠는 대한민국의 문화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키고 문화강국의 위상을 재정립시키고 있다.
사실 국토가 작고 인구도 많지 않은 나라가 이 정도의 성공 이야기를 썼다는 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기적이자 그 유례를 찾기도 힘들다.
하지만, 그럼에도 날마다 쏟아져 나오는 뉴스들은 경기침체, 실업난, 살인, 성폭행, 기업 수사, 구조조정 등 암울한 소식들이 대거 등장한다. 과연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이 바람직한 것일까.
교육부총리를 지낸 김우식 전 연세대 총장은 최근 펴낸 ‘세월이 내게 가르쳐 준 것들’이란 저서를 통해 ‘더러는 현실에서 벗어나야 또렷이 보일 때가 있다’고 고백한다. 그렇다. 말처럼 쉬운 건 아니지만, 잠시 뒤로 물러나 우리네 일상을 제3자의 시각에서 바라보자. 다른 나라 사람들은 대한민국을 부강한 국가이자 모범적인 성공 모델로 인식하고 있다.
[김종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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