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은 죽지 않았다.
언제, 어느 목욕탕에를 가나 마주치는 장면이 하나 있다. 엄마 손에 붙들려 목욕탕에 울림을 만들어내는 아가들, 서럽게 울며 길게 악을 쓰는 아이들이다.
아이는 이제 울어대는 데 힘을 모두 빼버렸는지 동굴처럼, 둥그런 물방울이 곧 떨어질 듯한 목욕탕의 높은 천장을 가만히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내고 있다. 잘 익은 석류 터지듯 눈물방울이 똑똑 흐르는 아이의 빨간 눈두덩이를, 엄마는 깨끗한 물을 받아 슥슥 닦아낸다. 적어도 네 다섯 살은 됨 직한 꼬마아이는 수년간 목욕을 해오면서도 아직 적응되지 못하는, 어떤 괴로움에 저리도 몸을 떨고 있을까. 자신의 머리카락이 빨래조각처럼 빠르고 억세게 씻겨지는 것이 싫은 것일까, 아니면 이깟 몇 가닥 머리카락조차 제 손으로 감지 못하고 이렇게 붙들려 머리만 내놓고 바둥거리는 내 꼴이 이게 무언가 하고 한탄하는 건가. 깨끗이 머리가 감겨진 아이는 본래 대로 뒤집어진 후 바닥에 내려진다.
- 아빠 보고싶어 흑, 아빠
엄마가 밉다는 소리는 차마 할 수가 없는지 여탕에서 아이는 아빠를 찾기 시작한다. 엄마 옆 칸 플라스틱 의자에 엉덩이를 잠시 대보더니, 다시 한 칸 더 옮겨 손을 모으고 앉아 힉힉 숨 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패자의 눈물을 삭이려 애쓰고 있었다. 엄마는 늘 어려운 머리감기를 해치운 보람과 애써 씻겨놓자 아빠를 찾는데 대한 약간의 서운함이 섞인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몸에 물을 휙 끼얹고, 초록색 타월을 손에 끼워 팽팽하게 힘을 준다. 수줍게 몸을 움츠리고 때를 밀던 어린 이모가 빨개진 볼로 비실비실 웃으며 아이를 이리 오라고 손짓한다. 하지만 아이는 세상이 뒤집혔던 외로움을 조금만 더 견뎌보고 싶은지 그대로 앉아 한숨처럼 작고 길게 으앙 소리를 내뱉는다.
착. 착. 하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대중목욕탕에 나를 처음 이끈 것은 엄마도 이모도 아닌 외할머니의 손이었다. 우리 외할머니는 참 무서운 분이셨다. 나에게만 엄격하셨던 것일 수도 있다. 나는 할머니께 어떻게든 잘 보여서 나에게 그어놓으신 엄격함의 선을 운동장의 선 지우듯 발로 슬금슬금 지워나갈 작정이었다. 그렇게 하면 포실포실 솜사탕이 생각나는 할머니의 새하얀 스웨터에 포근히 안겨서 토닥토닥 자장가를 들으며 잠들 수도 있겠지. 하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했던 것은, 본래 말수가 없고 지레 겁을 먹기 십상이라서 보통 꼬마들처럼 애교부리고 떼쓰는 일은 강아지를 내 품에 안는 일처럼 아무것도 잡지 않고 계단 내려가기처럼 내가 할 수 없는 일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나를 앉혀놓고 만지며 귀애하시지도, 심지어 머리 한 번 쓰다듬거나 볼 한 번 꼬집지도 않으셨다. 물론 혼을 내신 적도 거의 없다. 사내아이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라고 미리 체념해 버렸던 나는, 그런 마음이었기에 누구의 사랑 없이도 크게 설움을 느끼지 않고 그저 늘 그렇구나……하며 자랐다.
우두커니 어딘가에 앉아 있다가 할머니가 뭐하시나 궁금해서 고양이 새끼처럼 할머니 방이나 거실에서 살곰살곰 서성이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나는 방안에서 서툰 가위질에 열을 올리며 종이인형 옷 갈아 입히기에 골몰해 있었고, 지겹도록 읽은 동화책을 들고 책 읽는 시늉을 하며 놀기도 했다. 낮잠을 조금 자고, 한쪽 팔에는 곰돌이를 매달고 다른 팔로는 미미 인형을 따라다니며 온 세상을 돌아다니다 보면 하루는 금방 저물고 먹을 시간과 잘 시간은 금세 다가와 있었다. 인형들이 감기에 걸리거나 피곤하다고 호소를 하면 나는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하루종일 스케치북 한 권을 죄다 그림으로 채우고 그것도 모자라 그림일기를 몇 장씩 쓰고 잤다.
울음이 그친 듯 해 돌아보았더니 꼬마아이는 어느새 물장수가 되어있다. 생수통과 빈 요구르트 병에 물을 채우고 대야에 야심 차게 담아 흥정을 시작했다. 한 아주머니의 그거 파는 거야? 하는 장난기 어린 말로 개시된 장사는 매상이 오르자 팔만 구천 원 이예요 하는 어마어마한 가격으로 치솟기 시작했다.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지켜보던 아줌마들이 아이구 그거 너무 비싸네 하고 말참견을 해가며, 때 미느라 웃느라 정신들이 없다. 물장수는 그저 가닥가닥 젖은 머리로 해해거리며 웃고만 있다. 나도 히죽 웃으며 머리를 감기 시작했다. 물을 받아 대야 속에서 춤추는 머리카락들을 헹구어 내고, 귀의 앞 뒤, 목 뒷부분과 이마 선을 따라 씻고 머리칼 한 올이라도 놓칠세라 최선을 다해 씻어냈다. 아까 꼼꼼히 씻어놓은 빗으로 머리를 빗어 꼭 눌러 짰다. 어느새 내 옆으로 온 물장수 꼬마는 코를 훌쩍훌쩍 마셔가며 손으로 물을 떠서 요구르트 병에다 정성스레 담고 있다.
일로 안 올래! 하는 여자의 고함소리가 탕 안에 쩌렁쩌렁 울렸고 물장수와 손님들의 고개가 일제히 모아졌다. 왜 이렇게 고집을 부려 어! 안 들어 갈려면 따라오지를 말았었어야지. 얼른 일루와. 말 좀 들어봐! 어? 50세는 훌쩍 넘어 보이는 덩치 좋은 아주머니가 백발의 할머니에게 호통을 치고 있다. 저렇게 화를 낼 수 있는 것은 분명 친딸이라는 것이다. 마르고 조글조글한 아주머니의 어머니는 말 없이 바닥에 앉아 꼼짝하지 않고, 가끔 팔을 들어 마른 다리를 미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열이 나는 듯 연신 벌건 몸에 물을 퍼부어 대는 아주머니나 딸 쪽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 할머니나 그저 끔찍이 사랑하는 가족처럼 보인다.
-참 좋아 보이는 가족이네요.
아주머니에게 이런 말을 건넨다면 아줌마의 얼굴과 몸은 더욱 벌개져서 아주 냉탕으로 첨벙 들어가 버릴지도 모르겠다.
수건으로 몸을 대충 닦아내고 머리를 돌돌 말은 채 젖은 수건 같은 탈의실 공기를 맡았다. 천천히 옷을 펴서 입고 머리카락은 물만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닦았다. 초가을에 벌써 내복을 입고 바닥에 쭈그려 앉아 계신 어느 할머니가, 손가락으로 대충 빗은 내 머리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운동화를 내어 꺾어 신고 유리문을 쭈욱 밀며 밖으로 나왔다. 어깨에 소름이 춤을 추며 돌았다 사라졌지만 나는 이렇게 목욕탕에서 나와 생전 처음 맞닥뜨리는 듯한 세상의 냄새와 시원함을 좋아한다.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목욕을 하면서 이 기분이 나중에 주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별로 해본 적이 없다. 항상 예상치 못한 행운을 맞은 것처럼 들뜬 기분이 들 뿐이다.
하지만 이 공기는 곧 익숙해져 버리고, 타박타박 목욕탕에서 집까지 걸어가는 길은 배가 고프고 졸리고 시끄럽다. 컵라면을 사 가지고 들어왔다. 끓여먹는 라면조차 피곤하다. 열쇠고리를 빈 싱크대 서랍에 소리나게 떨어트려 놓고, 먹을 것이 든 검은 봉지를 침대 옆에 던졌다. 봉지에서 나온 라면이 데굴데굴 구르는 소리를 들으며 작은 주전자에 물을 부어 가스레인지에 얹었다. 나는 라면처럼 툴툴 침대로 가 머리를 베개에 뉘였다. 주전자 표면에 묻은 물이 털석털석 불을 향해 주저앉는다. 붉은 불꽃이 툭툭 터지는 소리를 내며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을 침대에 누워 가만히 보고 있다. 주먹만한 불덩이는 저렇게 작은 물방울에도 붉은 핏줄을 세워가며 성을 낸다.
배가 고프다. 오늘 한 끼도 먹지 않았다. 어떻게 점심도 먹지 않고 목욕탕에서 그렇게 때를 잘 밀었는지 내 몸에 위가 있다는 사실을 깜빡했었나보다. 아니면 내 몸이 노폐물 걷어내기에 온 힘을 쏟은 나머지 영양 공급을 잠시 잊었나보다. 아무튼 지금은 식도에서부터 위까지 박하를 붓에 발라 칠해놓은 것 같다. 입에서 박하 향이 났으면 좋겠지만 쩝쩝 입맛을 다셔봐도 입안은 쓰기만 하다. 할머니가 가끔 해주시던 동글동글하게 생긴 작은 튀김이 생각난다. 할머니 댁에서 살면서부터는 식사시간에는 절대 말을 할 수 없도록 하셨기 때문에, 요리의 이름이 궁금하면 혼자 이름을 지어보고 재미있어했던 기억이 난다. 식사시간이 끝나고는 항상 묻는 걸 잊어버렸고, 내가 지은 이름이 벌써 붙여졌으니 새 이름은 필요가 없었다. 탱탱볼이라는 통통 튀는 작은 공 이름을 따서, 탁탁 튀겨지는 옥수수 튀김을 옥수수 탱탱볼이라고 이름 지었었다. 달콤한 옥수수 튀김. 안에 들어있는 재료로는 옥수수 밖에 생각이 나지 않는다. 배가 고프고 옥수수 탱탱볼이 너무 먹고 싶다. 가엾은 위만 초 긴장상태이고 나머지 피곤한 몸은 나른하게 침대 사이사이에 폭 안겨있다.
세상에서 나를 편하게 대해 주는 것은 군데군데 푹푹 꺼진 이 침대 하나 뿐이다. 팔을 뻗어 슈퍼에서 남은 동전까지 탈탈 털어서 산 과자봉지를 꺼냈다. 당장 내일 학교 갈 버스 비도 없는데 무슨 마음으로 은행에도 들르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비닐 한 귀퉁이를 입으로 찢어 과자 몇 개를 아작아작 씹었다. 나는 이 작은방에서 평생 과자부스러기나 쩝쩝거리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가락에 묻은 과자기름이 혐오스럽다. 하지만 나는 배가 고플 뿐이다. 봉지를 더 길게 뜯어서 한 움쿰 집어 우물거렸다. 원래 목욕을 하고 온 날이면 방이 답답하고 지저분하게 느껴져 방 정리를 하고 그것도 싫으면 온통 문을 열어놓고 침대에 가만 누워 환기라도 시켰다. 내 몸이 깨끗하니 너희들도 깨끗해져라 하는 식으로 그렇게 가만 누워 있으면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오늘은 침대 속으로 몸이 쭈욱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사실 어느 날은. 그래, 아주 가끔은 너무 심심하기도 하다. 인형말고, 정말 살아 있는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다. 할머니에게 말을 시키고 싶다. 할머니가 주름 가득 웃으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지는 않으신다 해도, 뭐, 조금은 마음 아프겠지만 그래도 동화 속 할머니처럼 얘야…얘아…하는 그런 할머니의 말투-할머니 말투를 들을 수 있을까. 두근두근 대는 마음으로 할머니 방문 앞에 선다. 갈비뼈 사이에 동글동글 무언가 꽉 막힌 것 같다. 고민 끝에 방문을 빼꼼히 연 나를 할머니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바라보신다. 어깨에 찬바람이 휭휭 불어서 견딜 수가 없다. 결국 나는 한마디를 툭 던진다.
-100원만 주세요.
'주세요' 하는 소리는 거의 입 속에 들어와 있다. 할머니는 몸을 돌려 동전지갑을 뒤적인 뒤 100원을 내미신다. 손가락이 안 닿도록 잘 받아서 밖으로 뛰어나간다. 할머니는 내가 용기 내어 달라고만 하면 언제든 돈을 참 잘 주신다. 친구들의 엄마 아빠는 돈을 이렇게 잘 주시지 않으신다고 한다. 과자를 먹으면 이가 썩어서 시커먼 벌레들이 기어다닐 거라고 혼내신 단다. 나는 달리기를 잘 하지 못한다. 조금만 달려도 다리가 내 것이 아닌 것 같고 숨이 막혀서 견딜 수가 없다. 세상에는 견딜 수 없는 것이 참 많은 것 같다. 도망치듯 슈퍼마켓으로 줄달음질쳤다.
슈퍼구경은 몇 개 없는 나의 일과 중에 가장 흥미 있는 일이었다. 집 앞에도 작은 가게가 하나 있었지만 나는 한참 달려가서 골목이 여러 개 나오는 곳에 빨갛고 커다란 간판을 달고 있는 슈퍼를 다녔다. 그렇게 큰 곳이라면 내가 요리조리 구경 다녀도 아저씨가 눈치를 주지 않는다는 걸 알아버린 것이다. 그 많은 물건들이 똑같은 것들끼리 놓여있는 걸 보면 참 기분이 좋았다. 네모난 상자에 들어있는 세제 중에 '하모니'라는 이름이 있었다. 꼭 말 배우는 아기가 할머니, 할머니 부르는 것 같은 이름이다. 50원 짜리 과자를 하나 사서 거스름돈 50원과 함께 손에 꼭 쥐고 폴폴폴 나비가 된 것처럼 뛰어와서는 까치발을 하고 초인종에 그려진 음표를 꾸욱 눌렀다. 그 순간부터 찰칵 하고 할머니의 예. 하는 소리가 나오기 전까지 하모니, 하모니하고 중얼거려 보았다. 어차피 찢어질 듯한 '엘리제를 위하여' 소리 때문에 작은 내 목소리 같은 것은 하나도 들리지 않을 테니까.
100원이 굴러간다. 바퀴가 달린 듯 순식간이다. 또르르르 하수구 구멍에 쏙 몸을 내던진다.
몸을 굽혀 하수구 안을 들여다보아도 안은 깜깜하기만 하다. 100원이 없는 나의 하루는 적막하다. 50원짜리 과자를 사먹을 수도 없었고, 빈손으로는 슈퍼 구경을 하기도 창피했다. 나의 오후 일과는 엉망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차마 할머니에게 돈을 잃어버렸다는 말을 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하루에 꼭 한번씩 금으로 된 알을 낳는 거위처럼 할머니의 작은 지갑에서는 하루에 100원씩 밖에 만들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보다 안타까운 것은 인경이 에게 50원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인경이는 가난한 아이가 아니다. 그리고 내가 빚을 진 것도 없다. 웅웅거리는 마이크 소리에 정신 없던 초등학교 입학식 날 내 옆에 서서 너는 혼자 왔니? 하고 말을 걸어준 아이가 바로 인경이다. 인경이가 사준 50원 짜리 아이스크림을 빨며 집으로 돌아오는 언덕길에서 그 아이는 보물처럼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불쑥 내밀었다.
-너 이게 뭔 줄 알아?
-…….
-엄마들 화장할 때 쓰는 거야. 우리 엄마가 그랬어, 여자는 살아갈수록 마음 속에 괴물이
생겨서 그걸 감추려고 화장을 하는 거라고 말야.
립스틱 바를 때 쓰는 작은 솔이었다. 엄마에게 갖다 주라고 했다. 너희 엄마도 잘은 모르지만 화장을 할 거라고 했다.
작은 버튼을 위로 올리면 솔이 가만히 나오는 신기한 이것을 만지작만지작 거리며 천천히 난초를 닦고 계시는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다물어진 입술에는 예쁜 루즈가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 아니, 할머니 마음 속에 괴물은 이미 죽어 없어져 버렸을 것만 같다. 나중에 엄마가 오면 줘야지 하고 빨간 색종이에 싸두었다.
삐익 하는 긴박한 소리가 들린다. 무슨 소리일까……하다 눈을 번쩍 뜬다. 공기가 따끈따끈하고 주전자에서 하얀 김이 풍풍 솟아나고 있다. 달려가 가스불을 껐다. 곧 힘없이 주저앉아 과자기름이 묻은 미끌미끌한 손으로 라면비닐을 벗기면서, 자꾸 속에서 뭔가 치밀어 오른다. 이 답답한 컵라면 속 같은 쪽방에서 지겹고 지겹게 끓어오르는 꺽꺽 울고싶은 마음. 누가 뭐래도 자유롭고 즐거워 질 수 있을 것 같았던 열 일곱, 나의 모든 것은 왜 이 방과 나 자신 일 수 밖에 없을까. 늘 이래왔는데 새삼 나에게 화라는 것도 숨어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마에 아무렇게나 날리는 숱 많은 잔머리털 같은 무심한 아이이므로 나를 신기하게 생각하는 친구, 친구의 부모, 동네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인터뷰에도 무심히 응하던 나였으므로.
컵라면이 듣기 싫은 마른 소리를 내며 내동댕이쳐졌다. 김이 풀풀 나는 주전자도 내던지고 싶다.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무작정 옥상으로 올라왔다. 이렇게 뛰쳐 나와봤자 결국 옥상이다. 기다렸다는 듯 가볍게 열리는 문을 거칠게 밀어버리고 대자로 누워버렸다. 으악 하고 길게 소리를 치고 싶었지만 철푸덕 몸이 이미 힘을 놓고 누워버려 입 밖으로 나와보지 못한 고함은 그대로 옥상에 스미고 만다.
다 써 가는 두루마리 화장지처럼 하얗고 숱이 없는 머리를 늘 정갈하게 쪽지고 계셨던 외할머니. 할머니는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할아버지를 참혹한 교통사고로 먼저 보내시고 오랫동안 혼자 사셨다. 언젠가 외할머니 집에서 가져온 건데 참 좋다며, 아빠가 나를 한 팔로 안고선 약쑥을 그릇에 담아 불을 피워놓았었다. 마른 쑥이 타 들어가며 기침이 나도록 풍기는 독한 쓸쓸함의 냄새가 나는 몸서리치게 싫었다.
마른 쑥 같은 외할머니에게만은 절대로 가기 싫다고 울며 떼를 쓰다 지쳐 잠들었던 저녁, 잠에서 깨 엄마를 부르며 올라왔던 옥상. 그 날이 마지막이었다. 문을 열면 바로는 잘 보이지 않는 물탱크 쪽 후미진 곳에서 엄마가 난간을 붙잡고 서 있었다. 인기척을 듣고도 엄마는 돌아보지 않았고, 나는 슬그머니 내려가는 수밖에는 없었다. 다가가서 엄마의 고민을 묻거나 그 눈물을 받아낼 용기는 나에게 없었다. 어른의 울음은 아이들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하늘이 커다란 부채를 들고 있는 것처럼 시원한 바람이 오른팔에서 왼팔로 머리에서 발끝으로 분다. 가만히 눈을 감았다 떴다. 눈을 굴려봐도 온통 하늘이다. 군데군데 있는 별들도, 신기하게 밤에도 하얀 저 구름도, 앞다투어 내 품에 안겨들 것만 같다.
-친구는 손 붙잡고 있을 때만 친구인기라.
벙어리 같기만 하던 할머니의 경상도 억양이 내 귓가에서 잠시 머뭇거린다. 선생님이 할머니께 전화를 하셨나보다. 나한테는 부모님이 되어주겠다고 하셔놓고 치사하게 할머니께 이르다니. 하루 종일 선생님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잘해준다고 모두 친구가 아니다. 친구는 절대 많은 정을 주어서는 안 된다. 결코 진심으로 믿어서는 안 된다. 벌써 몇 가지 째인지 모른다. 이렇게 긴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흔한 옛날 이야기 한번 들려주시지 않으시는 할머니의 입이 빠르게 열렸다 닫히는 것을 보며, 할머니 입 속에는 온통 그런 이야기만 들어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할머니는 또 옆집 아저씨의 동생이 친구를 믿었다가 망해버려서 숨어 지내고 있다는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시더니 아이고, 또 아이고. 하고 한숨을 쉬시고 내 방을 나가버리셨다.
선생님이 뒤에 계신 줄 몰랐다. 이제 누가 보는 것이 신경이 쓰이지 않을 정도도 되었다. 립스틱 바르는 솔을 네가 잃어버렸으니 매일 50원씩 내놓으라는 인경이 말에 저항도 해보았다. 그건 나에게 준 것이 아니냐고. 하지만 인경이는 내 팔목을 틀어잡고 화장실까지 끌고 갔다. 친하기만 했던 인경이가 왜 이러는 지 알 길이 없었다. 나보다 키는 더 작았지만 그 힘과 무서운 눈매에 나는 그만 기가 죽어버렸다. 다음날부터 나는 할머니께 용기를 내어 돈을 받을 때마다 인경이 에게 주어야 할 돈을 미리 계산해놓았다. 처음에는 깡패처럼 나를 화장실로 데려가 손바닥을 척 내밀었던 무서운 인경이는 점점 전과 같이 상냥하게 대해주며 당연한 절차인 듯 50원을 내밀면 가볍게 웃으며 고맙다는 말을 던지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나중에는 교실에서조차 당당하게 손을 내밀기 시작했는데 친구들이 뭐야? 그거 왜? 하고 물으면 우리끼리 비밀이라며 나를 향해 눈웃음을 치기도 했다.
결국 그 행동을 종종 발견하시고 의아해하시는 선생님께 불려 가는 -그때는 불행한 일 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오히려 다행이었던- 사건이 일어났다. 우리는 눈물 콧물 짜며 다시는 안 그러겠노라고 빌고 눈물에 콧물이 범벅이 된 손으로 화해의 악수를 나누었다. 거기다가 나는 따로 남아 바보 소리를 들어가며 한참을 더 혼나고 또 이렇게 무릎꿇고 할머니 앞에 앉아 퉁퉁 부어버린 눈을 비벼대고 있는 것이다.
겁을 잔뜩 집어먹고 집에 왔는데 크게 혼나지 않아 다행이다. 하지만 오늘 하루 동안 너무 놀란 탓인지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코가 막혀서 숨쉬기가 힘든데도 멈춰지지가 않는다. 항상 단정하고 다정한 우리 선생님에게서 바보라는 소리를 듣고 나니 부끄럽고 힘이 빠져서 기운이 하나도 없다.
어느새 방안에 다시 들어오신 할머니가 나를 일으켜 세우셨다.
할머니 손에는 작은 가방이 들려있다. 할머니가 이끄는 데로 따라 가는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나는 아빠에게로 보내지게 되는 거구나.'
나에게는 어쩜 잘된 일일지도 모르는 이 순간에 나는 할머니 손이 부드러운 것에 놀라 또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보드라운 할머니의 손이 나에게 말을 하고 있다. 따뜻한 할머니 손바닥에서 괜찮다, 걱정하지 마라. 하는 할머니의 소리가 전해져왔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앞으로 쏟아질 것만 같은 눈을 질끈 감고 울음을 참으려고 했지만 끓어 넘치는 주전자처럼 이상하게 뜨거운 눈물이 철철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간 곳은 다름 아닌 목욕탕이었다. 빨간 글씨로 '열탕'이라고 쓰여진 곳 안에는 까만 머리카락이 해초처럼 꼬불꼬불 머리에 얹혀져 있는 아주머니들 중 한 명이 우리가 들어서자 감았던 눈을 살짝 떴다. 아주머니는 씩 웃으며 할머니에게 목을 수그려 인사하고 탕 안의 물을 팔로 휘휘 저어내며 나를 쳐다본다. 퉁퉁 부은 내 눈이 안돼보이기라도 하는지 작은 한숨을 내뱉고 다시 눈을 감았다. 우리가 자리를 잡은 한쪽 구석에는 단발머리를 한 언니 두 명이 나란히 앉아 쌍둥이처럼 팔의 때를 밀어내고 있었다. 나는 실컷 울고 기운이 다 빠져버려 할머니가 씻기면 씻기는 데로 가만히 팔과 다리를 내밀고 언니들 씻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앉아있었다.
'아빠는 어디에 있을까…엄마는 내가 저렇게 단발머리를 한 중학생이 되면 약속대로 마당이 커다란 집으로 날 데려갈까…….'
어느새 남은 건 등을 미는 것뿐이다. 내가 등을 돌리려는데 할머니가 내 등 쪽으로 와 앉으셨다.
-다시는 그라지 마라. 느거 아빠 닮을라카나.
할머니도 아까 내 손을 잡았을 때 나도 몰래 나와버린 내 마음을 알아 채 버리신 것이다.
시원한 바람에 구름이 흘러가는 걸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으려니 누워서도 어지럼증이 생긴다. 어릴 적에는 바람이 부는 날은 사람들이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많이 쉬어서 그렇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엔 하늘에서 울음처럼 비가 내리는 거라고. 나 때문에 비가 오는 것은 원치 않기 때문에 한숨을 후우 하고 크게 꼭 한 번만 쉬었다.
가끔 나와 할머니의 집에는 후줄근하고 색이 늘 바래 보이는 옷을 입은 아저씨가 울상을 하고 무릎을 꿇고 있었다. 한번, 슈퍼를 가는 길에 아저씨를 만난 일이 있었다. 물론 할머니께는 비밀이었다. 아저씨는 내가 먹고 싶었던 초코바와 맛있는 과자들을 잔뜩 사주고서는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내 손을 꼭 잡고 울먹울먹 했다. 거칠고 끈적끈적한 아저씨의 손 때문에 나는 내내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아빠가 있는 곳을 물었고, 아저씨는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었다. 가끔 울리는 초인종 '엘리제를 위하여' 소리에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가는 내가 어쩌다 아저씨에게 문이라도 따주는 실수를 저지를 때, 할머니는 늘 마당의 큰 빗자루로 아저씨를 때렸다. 할머니는 무시무시한 욕설을 세상 어디에선가 끊임없이 끌어올리며 '우리 딸, 우리 사위'를 되풀이 하셨다. 아저씨는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할머니가 두들겨 패는 데로 흔들면 흔드는 데로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 엉엉 울고있었다.
'고분'이라는 이름처럼 고운 할머니 손바닥에는 두꺼운 빗자루에 찔린 상처가 그렇게 가끔씩 나곤 했다. 그런 날에 비가 올 거라는 것을 마룻바닥에 앉아 눈알을 굴리며 불안해하던 나는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한숨을 따라 바람이 불고 바람을 따라서 비가 오는 날이면, 할머니는 바람 부는 방향으로 떠나야만 하는 슬픈 집시처럼 한 손에는 우산을 한 손에는 내 손을 잡고 비바람 속을 나서곤 했다. 그리고 우리는 있는 힘을 다 해 때를 밀었다. 탕으로 들어갈 때는 꼭 하얗고 앙상한 팔로 나를 들어 안고 발을 딛으셨다. 흐트러짐 없이 조금씩 물 속으로 발을 내미는 알몸의 할머니. 할머니에게 꼭 안겨 불편해 하는 내 어깨로 탕 속에서 튀어 올랐는지 천장에서 떨어졌는지 뜨거운 물이 자꾸만 내려앉았다.
눈에 안약처럼 빗방울하나가 똑 들어왔다.
손바닥을 펴고 비를 받아보려 하는데 비는 전혀 내리지 않는다. 바람도 거짓말처럼 살랑살랑 조심해서 불고 있다. 커다란 부채 같던 바람이 비까지 날려 버렸나보다. 잠시 눈을 감은 동안 꿈을 꾸었는지 머리가 멍하고 무겁다.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가면서 버럭 화를 내고 나온 나의 방에게 문득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문 앞에서 잠시 옥상의 공기를 털어 내고 조심스레 들어간 나는, 방을 보고는 어리둥절해졌다. 컵라면과 과자봉지 그리고 침대와 싱크대 모두 깨끗이 정리가 되어있다. 침대 위에는 웬 짙은 파란색의 가방이 놓여있다. 내 방에 찾아올 사람이 누구인지, 이 가방이 누구의 것일지 곧 알아차렸지만 나는 새로운 이 기분을 최대한 오래 끌고 싶어 가방을 끌어안고 어리둥절하려 애쓴다.
오늘은 오지 않았으면 했다. 다행히도 옥상에 간 사이에 다녀간 모양이다. 그것도 옥상에 온갖 감정을 식히고 온 뒤여서 이 가방은 던져지는 수모를 겪지 않게 되었다. 진심으로 믿고있는 유일한 내 친구의 가방 안에는 몇 개의 도시락통과 종이 쪽지가 들어있다.
'밥은 먹었니? 선생님이랑 하루종일 너 찾는다고 얼마나 돌아다녔는지 몰라. 집에는 들어온 것 같아 다행이다.
아무에게도 버림받으신 게 아냐. 예전부터 떠나고 싶으셨던 길을 곱게 떠나신 것 뿐이야. ……내가 네 곁에 없었더라면 네가 반항하게 될 이유도 없었을 테고, 할머니와 네가 서로를 잃게 될까 지레 겁을 먹고 서로 손을 놓아버릴 일도 없었을 텐데……. 혹시나 네가 나에 대해 그렇게 생각을 할까봐 종종 두렵기도 했다. 나의 별것 아닌 우정이 피로 이어진 끈끈한 사이를 떼어버린 것만 같아서.
하지만 아니더라. 어제는 비가 한 방울도 오지 않았어 -인경'
형광등에게 양해를 구하듯 스위치를 붙잡고 한참을 바라보다 불을 끄고 누웠다. 집 앞 가로등이 나갔는지 방은 아주 깜깜하다. 형광등의 잔영만 눈에 남아 하얗고 길게 깜빡깜빡 인다.
어느샌가 나는 긴 횡단보도 한 가운데 떨어트려져 있었고, 건너편 길에는 할머니가 서 계셨다. 나는 자동차가 쌩쌩 달려가지나 않을까 할머니와의 만남에서 불편함과 떨림을 어떻게 견딜까 무서워 길을 나서지 못했고, 할머니는 엄마 아빠와 같이 오지 않는 나를 맞이하고픈 마음이 들지 않으셨다. 그저 위험하니까 더 멀리 떨어져 있으라고 손짓으로 신호하실 뿐이었다. 이런 나에게 단 하나의 친구가 생겼을 때 할머니는 모두를 없애버릴 괴물이라며 횡단보도의 하얀 선을 미친 듯이 달려와 나를 끌어안았고, 나는 이 어색한 포옹 앞에 그만 그것의 손을 잡고 도망치고 말았다. 밤낮동안, 약속을 어긴 엄마를 기다리던 나는 말라죽은 난초처럼 시들시들해져 드디어는 스스로 외할머니를 떠났다. 그러나 모든 것은 나에게서 떠난 듯 떠나지 않고 김빠진 사이다처럼 끈적끈적하게 말라붙어 있었다.
할머니가 바란 것은 나의 끝없는 외로움이었을 것이다. 달리는 차안의 즐거운 가족을 보며, 손잡고 뛰어다니는 친구들을 바라보며 혼자 있는 자신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 할머니는 나를 위해 말을 걸지 않으셨다.
외로움은 유전형질의 하나로 우리들을 관통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를 외면해야 했는지도 모른다. 할머니는 방문을 스르륵 열고 말 없이 나를 보고 있지 않은 척, 쪽진 머리와 느린 걸음으로 내 방과 나의 관계를 속속들이 뒤지고 계셨다. 나의 외로움을 뒤져내어 휴지통에 구겨 넣고 싶으셨는지, 당신의 외로움을 책갈피처럼 끼워 넣고 싶으셨는지 나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한참 뒤에 립스틱 바르는 솔이 들어있던 할머니 스웨터를 뒤졌을 때 코 속 깊이 퍼지는 마른 쑥의 냄새 때문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었다.
그러나 어떤 날, 각자의 외로움이 단단히 물집 잡히는 비가 내리는 날이 오면 할머니는 나의 손을 잡고 나를 씻기셨다. 우리는 숨막히게 뜨거운 탕 안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여자들의 시끄러운 소리들을 숨죽이며 듣고 있었다.
그녀가 나를 씻기고 머리를 빗기는 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내 귀에 그녀의 손가락과 빗과 내 머리칼이 차례로 톡톡톡 닿는 것 같다. '고분'은 미지근한 물에 내 머리를 천천히 쓸어 담고 꼼꼼한 손끝과 부드러운 손바닥으로 비누거품을 구석구석 문질렀다. 피부가 얇고 주름진 그녀의 손은 보드랍고 따뜻했다. 한 쪽 손에 물을 담아 나의 뒷머리를 닦는 소리, 촤르르 물 버리는 소리. 대야가 타일 바닥에 몸을 조금 비트는 소리 또 다시 물이 담기는 소리. 목욕탕의 공기는 온통 그녀의 손이 물방울들을 만나 내는 소리들로 가득했다.
나는 온통 물에 폭 젖어버린 비 맞은 동물처럼 '고분'의 손을 느끼며, 비처럼 멍하니 쪼그린 다리를 요리조리 조금씩 움직여 볼 뿐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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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완성해 보았었던 소설입니다.
완성된 하나의 소설 구성이 예전에도, 지금도 엉터리입니다.
첫댓글 처음으로 완성한다는 긴장감 탓에 첫부분은 글의 호흡에 힘이 잔뜩 들어갔어요. 하지만 그 뒤로부터는 문장들이 안정감이 있네요. 어린 시절을 추억을 새록새록 떠올리는 게 과거형의 문장으로 잘 표현하신 것 같아요. 잘 봤어요^^
첫부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말을 듣고 계속 신경썼더니만...앗 감사합니다~~~지적할 게 굉장히 많을텐데...자꾸 읽어서 보이지가 않네요
제가 아는 어떤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글을 쓰고 난 후 수정을 할 때 골백번도 더 읽어봐라. 그럼 네가 쓴 글도 식상해지고 그때부터는 미흡한 점부터 시작해서 잘못된 부분들이 눈에 띄일 것이다." 라구요. 골백번 더 읽어 보시면 보일 거예요^^
골백번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가봐요..^^
어제 졸리면서 봐서 내용을 모르겠다는.......-_-;;;;;; 다시 봐야할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