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백하게 알고 싶은 욕망
여러 달이 지나자 나는, 나르 매혹하는 이 네 번째 단계를 더 세밀하게 알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이것이 나의 인생의 압통점에 자리잡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에이.에이.그룹의
방법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용감하고 치밀하게 우리 자신의 정신적, 도의적 재고조사에 착수했다."
그렇다. 마음속 은신처의 문을 조금이나마 열기 위해서, 그 속에 희미하게나마 보이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용기이다.
에이.에이.그룹이 없었다면(이 사실은 내가 아무리 되뇌어도 못다할 것이다) 나는 처음부터
아예 마음속 은시처의 문에 빗장을 걸어 잠그고 도망가려 했을 것이다.
내가 어리석은 짓을 얼마나 했나, 그 해위를 헤아리는 것이 예는 문제가 아니다. 사실 그런
행동은 숫자상 한계가 있다. 알콜이라는 독을 품은 꽃이 피어날 수 있는 정신적, 심리적 풍토를
아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불안저의 풍토이다. 그리고 그것은 유년 시절부터 시작된다.
생활의 불안도 아니고 육체적인 고통의 불안도 아니고 국민학생의, 먼 통학길의 추위에 대한
불안도 아니고 끈으로 묶은 내 초 나막신에 대한 불안도 아니다.
그런 불안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나는, 잘 웃으시는 우리 어머니의 언정감을, 우리
아버지의 굳건함을, 여부우(글, 옳아,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처럼 아름답고 순한 눈을 가진 우리
암소의 부드러움을, 양들의 온순함을 물려받았다. 우리집은 위헙이 업속 너무나 안전하여 어떤
문도 열쇠를 걸어 잠그지 않았다. (열쇠라는 것이 없었다. 독일산 양치기 개만 있으면 됐으니까.)
내가 겁냈던 것은 생활 그 자체가 아니었다. 이웃집의 초상도 아니었고 우리 사촌집에 있었던
화재도 아니었고(그 집 아이들, 사촌들을 반갑게 모두 맞아들였었다.) 우리 밀밭을 엉망으로
뒤엎은 폭풍우도 아니었다. 이런 것들은 한 인간을 알콜중독자로 만들 수 없다. 그리고 사람의
영혼을 해치지 않는다.
내가 무서웠던 것은 생활이 아니었다. 그것은 도회지였다. 무엇보다도 도회지의 이상야릇한 것
들이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학교 변소에 변기용 물통이 있었다. 나는 거기에 달려 있는 쇠사슬 줄이
당기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도 그 줄을 잡아당기는 것이 무서웠다. 나는 물이 쏴 하고
내려오는 소리나 물이 끊임없이 좔좔 흘러내리는 것이나 모두 껌뻑 질리도록 무서웠다. 물이란
넓은 목장으로 자유롭게 흘러가는 것인데 그 물이 가엾게도 반쯤 녹이 슨 통 속에 갇혀 있다는
이상한 생각을 했다. 물통에는 "돼지 치는 사람"이라는 상표가 있었다. 돼지 치는 사람과 이
물통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아무 관계가 없다. 돼지를 씻어주기 위해 물이 필요한 것 외에는.
가엾게도 물이 갇혀 있다는 이상한 생각은 왜 했을까? 그 당시 우리집에 두 개의 커다란
옹달샘이 있었는데 1740년이라고 새겨진 주춧돌이 놓인 그때부터 지금까지 밤낮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우리집이나 주위환경에 없었던 것들이면 무엇이나 내 눈에 괴이하고 위협적으로
보였다.
내가 국민학교 시절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매주 금요일다 에이.에이.모임에서) '불안정'이라는
낱말이 빠짐없이 입에 올랐다. 그러면 에이.에이. 회원들은 머리를 끄덕였는데 "무슨 말인지
알겠소" 하는 하는 것 같았다.
국민학교 때, 나는 운이 나쁘게도 하필이면 시골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선생님으로
모시게 되었다. 내 친구들은 나를 퍽 좋아했는데 우리 선생님은 시골뜨기인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어린 내가 8킬로미터나 되는 겨울길을 걸어서 통학을 해도 기특하다든가 하는
용기를 주는 말 한마디 한 적이 없었다. 어린 소년의 가느다란 다리에는 8킬로미터가 짧은 길이
아니다.
선생님이 내게 무관심한 것을 어린 나는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런 선생님에게
반항하려고 공부를 하지 않았다. 덕분에 언제든지 우리 학급에서 꼴찌를 해 등수가 42등이었다.
영하 30도로 내려갔던 1982년 겨울만은 예외였다. 그때 나는 38등을 했는데 그 이유는 네 아이가
유행성 감기를 앓았기 때문이다. 38등을 해서 아버지가 몹시 기뻐하셨는데 죄송하게도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봄이 돌아와 다음 학기가 되자 나는 도로 미끄러져 제자리로 돌아가 42등을
했으니까.
알콜중독자들의 유년 시절을 샅샅이 뒤져보면(거의 반드시) 얼느들이 자기네 연륜의 권위를
남용해서 생긴 이야기들이 있게 마련이다.
선생님은 오후 자습시간(그는 감시만 했다)이 끝나면 나보고 손짓으로 명령했다. 그것은 이런
뜻이었다. "가서 더운 물 한 병 가져외." 선생님이 자기 손을 더운 물에 담그고 매니큐어로 잘
다듬어진 손톱을 손질하면서 열심히 씻는 것을 보면 화통이 터졌고 창피했다. 바로 같은 시간에
암소의 젖을 짜고 계실 우리 어머니의 두 손이 머리에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나는 남자가
매끈하게 손을 다듬은 것을 보면 싫어했다. 특히 그 남자가 고맙다는 말을 할 줄 모르는 그런
사람이면 더 싫었다. 왜냐하면 우리 선생님이 나에게 한번도 고맙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신사께서 반드르하게 차리는 예의는 우리 집안이 지키는 예의와는 달랐다.
이상야릇하고 불안했다.
더욱더 이상야릇한 것은, 특히 나를 겁나게 하는 사람들이었다. 어느 날 선생님이 교리문답책을
사오라고 우리들에게 말했다. 나는 손에다 내게 있던 동전을 쥐고서 랭보 서점에 갔다. 책가게
안에서 좋은 냄새가 났다.(그루풀의 향긋한 냄새와는 달랐다.) 그리고 책들이 전부 새 책이었다.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번쩍거리는 안경을 쓴 키 큰 아저씨가 내게 물었다.
"얘, 너 뭘 찾니?"
"교리문답 책 주세요." 나는 구리빛 동전을 한움큼 쥐고 있던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 그랬더니,
그는 고약한 비웃음(아이들이 그런 것은 더 잘 느낀다. 정말 아이들 말을 믿어도 된다)을 입가에
띄우더니, 그 잆술에서 말을 뱉았다.
"그래, 너 요걸 갖고 천당에 가려고 하니?"
나는 당황해서 말문이 꽉 막혀 그만 눈에서 눈물부터 나왔다.
"아, 네. 아저씨."
어른이 어린아이를 이런 식으로 공격하면 아이는 그 무안을 결코 잊어버릴 수 없이, 자라서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마저 무의식중에 거부하게 된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달이 떠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겠다. 만약 달이 하늘 위에
떠 있었다면 나는 틀림없이 슬픈 눈으로 쳐다보았을 것이다. 집에 돌아와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어미니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어너미 마음이 상하실 것이기에, 아버지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당장 마을로 내려가셔서 그 아저씨에게 따귀를 한 대 먹이실 것이기에. 나는 이 일을 누
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나 혼자 간직하고 있었다. '어째서 어른이 되면 저렇게 나쁠 수 있을까?'
혼자 머리를 갸우뚱거리면서. 이상야릇하고 불안했다>
같은 무렵이다. 나는 데르발 씨의 식품가게 진열장(그 시기에는 식품가게에서 온갖 것들을
다 팔았다.)에 있는 파란 빛깔의 손전등을 보았다. 그 진열장 앞을 지날 때마다 그 손전등을
쳐다 보았다.
'밤이 길어지는 가을이 될 때까지 손전등이 팔리지 않고 있다면...' 나 혼자 생각했다. 가을이
되어 수확하고 남은 포도를 거두어들이는데 내가 심부름을 많이 했기 때분에 손전등을 살 만큼
돈이 생겼다.
"손전등 사고 싶습니다."
"어는 것 말이니?"
"파란 색 손전등을 주세요."
주인 아저씨가 그 손전등을 집더니 걸레로 한번 문지르고는 전구를 끼웠다. 아저씨가 손전등에
불이 켜지도록 만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너무 기뻐 사실로 믿어지지 않았다. 전구를 나사로 꼭
죈 후에 그는 먼저 건전지를 골랐다. 그런데, 그런데, 맙소사, 전지통에 알맞는 커다란 건전지
대신 통에 반도 차지 않는 조그만 거전지를 집었다. 통 안에 많지도 않는 건전지가 그 안에서
왔다갔다하니까 움직이지 않도록 신문지를 뭉쳐서 빈 곳을 메웠다. 그러나 접촉이 잘 안되었다.
그러니까 그는 신문지를 도 집어넣었다. 그래도 여전히 전지알이 움직였다. 마침내 그는 속에
있던 건전지와 신문지를 전부 끄집어내고는 구리로 된 접촉 스위치를 비틀어 휘게 한 다음
빼냈던 것을 다시 집어넣었다.
"자, 됐다. 얘야, 이걸 너무 흔들지 마라. 그런데 불이 잘 안 오면 조금 흔들어줘라."
집으로 돌아올 때 어두워진 길에서 나는 미친 애처럼 손전등을 갖고 장난을 했다. 내
학생작업복 앞치마 주머니에 그걸 집어넣고서 천에 환히 비치는 불빛을 보았다. 또 손바닥을
전등 위에다 갖다 댔더니 손바닥이 장미비으로 빨개져 깜짝 놀랐다. 또 그것을 길바닥 위에 놓고
10미터쯤 뒷걸음으로 물러났더니 내 쪽으로 뻗어오는 삼각형 불빛이 너무나 멋있어서 나는
감탄했다. 그러더니 그만 불이 가버렸다.
이야기의 요점은? 이야기의 요점, 그것은 가게 아저씨가 어린아이의 신뢰심을 죽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는 오래도록 혼자 생각했다. '어른이 되면 어떻게 해서 정직하지 않은가?'
어린 시절의 이런 일들을 들여다보면 내 병의 원인이 이미 씨앗을 뿌렸다. 부모 곁에서
변함없는 애정을 충분히 받고 자란 이 어린아이는 어른들과의 접촉에서 자신의 행복을
노략질당했다. 그러니까 아이에게는 출구가 두 가지밖에 없다.
즉 모든 마찰을 피하기 위해 그런 사람들을 인정한다면 아이는 자라서 짐승처럼 잔인하게 되어
가능한 한 독재적인 인간이 될 것이다.
또는 그런 사람들이 그런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그런데 내 경우에, 결론을 얻는 데 네
시간이 걸렸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것으로 돌려버리고 아이는 달의 애정 속에서 달과 더불어
장난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똑같은 이 지구덩이 위에 최소한 두 개의 다른 세계가 존재함은 분명하다.
이 두 세계의 경계선에, 그들의 유례없는 행위를 참고 견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나의
알콜중독이 흘러갈 수 있는 도랑이 있다. 나의 알콜중독은 자아방위 조처의 반사작용이며 도주의
반사작용이다. 도주, 도주, 도주, 달에게 도주했다. 술한테 도망갔다.
어느 6월 아침, 학교에 지각을 하게 되었다. 선생님이 꾸짖을 생각을 하니 무서워서 늑장을
부렀더니 더 늦어졌다. 그래서 클로동 농장을 지나자 숲속으로 깊숙히 들어가서 학교를 까먹었다.
우리 고향 지방 사투리로 말하듯 '여유 꼬리'를 만들었다*(역주.학교수업을 빼먹는다는 뜻인 듯함)
도회지 사람들을, 건방진 우리 선생님을 피해 멀리 나와 있으니 얼마나 마음이 편하던지.
어머니는 내 책가방에 점심 도시락으로 빵과 초콜렛을 넣어주었다. 그때는 풍뎅이가 날아
다니는 계절이었다. 풍데이와 나는 서로 어울려 장난치며 재미있게 놀았다. 온종일, 그리고
일주일 내내.
학교를 까먹고 도망 나와서 매일 똑같은 짓을 했다.
선생님은 내게 벌을 주었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뉘우치지 않았다.
"당신은 학교를 빼먹은 데 대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천만에 말씀. 그것이 내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졸업날이 왔다. 졸업장을 못 받은 아이는 나 하나뿐이었다. 나는 다른 아이들의 학부모들과
성적표를 들여다보는 학생들 속에 끼어 있었다. 우리 선생님은 거기에 섞여서 축하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학부모들이 아니꼽게도 우리 선생님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선생님이 내게 가까이 오는 것을 보았다.
"너 졸업장은 못 받았지만 그래도 할 말은 있겠지? 넌 앞길이 창창하니까 그만해도 괜찮다.
그게 전부 네 잘못은 아니지." 우리 아버지가 거기 계셨더라면 내게 이렇게 말했을 것인데.
그 대신 선생님은 학부모도 없이 혼자 있는 아이에게, 졸업장을 못받아 이미 슬픔에 젖어 있는
아이에게 말했다. "너 이 녀석, 졸업장 못 받았지. 그럴 줄 알았다." 내 마음속 저 깊숙한 곳은
기뻐서 웃고 있었다. 손이 계집애 같은 우리 선생님과 번쩍거리는 안경을 쓴 책가게 아저씨와 내
꿈을 짓뭉개놓은 식품점 아저씨들을 훌훌 떠날 수 있었기 때문에. 내가 그들을 더 보지 않아도
되니까.
나는 마지막으로, 울퉁불퉁하게 포장이 되어서 내 나막신(그 다음엔 내 구두)을 다 닳게 만든
로마식 도로를 걸어갔다. 그러나 나는 이 통학길에 대해서는 아무 원한이 없었다. 나는 혼자서 이
길과 더불어 많은 시간도 더 보냈었다. 내가 사람들한테서 당하고 참아왔던 것과 내가 바라던
세상을 꿈꾸고 있던 것과의 경계선에 파여 있는 도랑은 이때부터 이미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나의 통학길에는 아무 원한이 없었다. 왜냐하면 알콜중독자가 되는 것은 사물 때문이
아니라 인간들 때문에 되는 것이니까.
이런 이야기들을 입밖으로 뱉아내니까 마음이 가볍고 즐겁다. 내 기억 속에서 이것을 뽑아내어
버리니까 그 당시의 고로움을 참을 수 있게 된다. 이 이야기들은, 나의 용기를 갉아먹고 쏠아대던
자기네의 이빨을 잃어버린다. 꼭 새앙쥐 같다. 방 안을 환하게 밝히기만 하면 새앙쥐들은
달아나니까.
내가, 다정한 우리 어머니를 생각해보면, 어머니는 내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한번도
말씀으로 가르치신 일은 없다)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을 가르쳐주셨지만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가르쳐주시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그렇다고 나를 미워하라고는 가르치시지 않았다.
오늘에 와서 나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 인간에 대한 사랑, 나 자신에 대한 사랑, 이 세가지
사랑은 똑같이 강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을 사랑하지 않고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맹복적이며 편협되고 고집스런 신앙이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서(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정신의
부조리며 모순이다.
타인을 사랑하지 않고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착한 사람들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폭력이 그나마 살아 남은 사람들의 목을 졸라 죽일 것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서 인간을,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의 질병이다. 이 질병은
인간을 술로 이끌어간다.
술을 끊은 지 어언 14년, 지금에 와서 나는 알고 있다. 나의 행복은 조화있게 균형잡힌 이 세
가지 사랑에 기인한다는 것을.
불안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된다.
인간을, 타인을 살아겠다는 욕망을 갖고서 나는 열여덟 살에 예수회 수도원에 들어갔다. 나는
수련소에서 나의 형제 수사들과 함께 사는 것이 몹시 즐거웠다. 그러나 수도원 원장이 달에 얽힌
내 이야기와 사물의 감추어진 면에 대한 나의 이야기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해서 섭섭했다. 내
생각에, 그는 종교문제에 한해서는 좋은 도매상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 있어 2년
동안의 수련기간은 슬프고 불안한 기쁨의 기간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정신적인, 교훈적인
권위로써 나에게 공포심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하느님의 이름으로 명령했다. 그러나
내 속에 계신 나의 하느님은 수도원 원장님과 똑같은 것을 나에게 명령하시지 않았다. 상호간의
몰이해였으며 전적인 몰이해였다.
우리 아버지께서 나의 수련기 시절, 나를 면회하러 오셨을 때 원장 신부님이 우리들과 함께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정원을 거닐면서 그는 우리 아버지 팔을 자기 팔 밑에다 꼈다. "에 그런데
뤼시엥 아버님", 그는 우리 아버지 손을 탁탁 두드리면서 말을 꺼냈다. 그런데 다정하게 보이는
신부님의 이 행동이 왠지 나에겐, 상대의 호감을 사기 위한 의도적인 것으로 생각되어 좋지 않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우리 아버지에게 말을 하고 싶었다. "원장신부님의 말을 듣지 마십시오.
그 사람은 나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우리 같은 사람을 이해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는 한마디도 못했다. 원장신부님은 우리 아버지에게도 정신적인 권위자였기 때문이다.
나는 분명 '정신적'이라고 말했다. 나는 원장신부님의 명령이 지닌 권위 외의 다른 모든 명령이
지닌 권위는 아무것도 무섭지 안핟. 내 속에 한쪽 눈은 잠자고 있는 무정부주의자가 있다. 나는
재산도, 나의 동기생 주교들도, 군대의 나의 사령관도 무서워해본 일이 결코 없다.(나는
사령관에게 고약한 쌍욕을 해서 15일간 영창생활을 했다)
그러나 우리 원장신부님은 정신적인 권위, 그가 제것인 양 가로챈 하느님의 권위를 행사했고,
나는 다만 미소지으시는, 해방시켜주시는(나는 그렇게 느껴진다) 예수님의 권위만을 인정했다.
몇 년이 지난 후 내 친구 브라상이 '부아뒤노르'(역주.'북쪽의 소리'라는 뜻) 신문에서 기자의
질문에 대답하기를 "나는 신앙이 없다. 그러나 그런 나 자신이 옳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뤼시엥은 신앙이 있다. 그러나 그도 또한 그런 자기 자신을 옳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우리 원장신부님은 내 말을 꼬투리 잡아 말썽을 일으켰다. 내 말이라고는 했지만 사실상
그것은 브라상이 도식적으로 아주 간략하게 갖다 붙인 것일 뿐이었다. 그런데 원장신부님은
그것이 진실 여부를 가려보지도 않고서 문제화했다.
2년의 수련기가 지난 후 서원날이 다가왔다. 원장신부님이 나의 서원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또 한번, 나 자 낙제생이 되어 외토리로 떨어졌다. 그러나 나는 어린아이처럼 순종했다.
그래서 나는 구리로 된 고상(바로 이 십자가가 내 침대 머리맡에 걸려 있다)을 군복에 고이
간직하고서 시리아로 떠났다. 혼자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멋졌다. 또 한번 나는 알레프*(역주.
시리아의 도시)의 성채 위로 달이 지는 것을 쳐다보았다. 내 나이 스무 살이었다.
내가 불란서로 돌아왔을 때 수도원 원장이 왜 내가 자원해서 시리아로 떠났는가를 물었다.
나는 감히 원장에게 솔직하게 대답을 못했다. "왜냐하면 저는 원장님의 권위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원장님과 저는 서로 수만 리 떨어져 있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이다.
소심하고 겁이 나니까 경계심이 생긴다. 경계심이 생기니 그 자리를 피하게 된다. 피해서
도망가니 경계심, 불신은 더 커지게 마련이다.
예수회 수도원에서 신학 공부(과거의 이단설에 대해 정확한 논쟁을 할 수 있도록 내게 가르쳐
주었으나 현대의 온갖 증상을 풀이하는 데는 별 것이 아니었다)를 4년 한 후, 나는 수련기
3년째에 들어갔다. 관구장의 허락을 받으면 어떤 학생들은 수련기의 마지막 해를 외국에 나가서
공부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영어를 완전하게 하기 위해 관구장에게 영국으로 보내달라고
청했다. 그는 내게 아무말도 없이 거절했다. 또 한번 나 혼자 당해싿. 지금은 내가 거부당한
이유를 알고 있는데, 그것은 비스트로*(역주.속어로서 커피와 술을 파는 싸구려 선술집 같은 곳)
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데는 영어가 필요없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모욕을 당해
자존심이 상했고 말할 수 없이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내게 다른 방법으로
길을 열어주셨다. 나는 영국에서, 미국에서, 일을 하며 산 영어를 배웠다.
방금 비스트로라고 얘기했는데 내가 이런 장소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중요한 인생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의 인생의 두 해를 보낸 것은 사실이다. 나는 거기서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을 배웠고 사람들이 신앙을 갖는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도 배웠다. 나뿐 아니라 내가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들도 거기서 배웠다. 자신의 신앙에 대해 겸손하게 털어놓는 신부를
존경하는 것을.
내가 만든 샹송(나는 나의 기쁨과 피곤을 모두 노래에 실었다)을 부를 수 있는 요행이 우연한
기회에 왔다. 1959년 나는 관구장 신부님으로부터 너무 냉혹한 편지를 받았다. "바라건대 오전
8시 이후에는 미사에 참여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이 조처는 당신이 예수회에 계속 머물 수
있는, 내가 제시하는 절대적인 조건이니 잘 알아서 처신하시오." 그때는 이미 그의 허락을 받고서
유럽 네 구석을 누비며 수많은 콘서트를 하던 시기였다. 나의 의식구조와 그의 의식구조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이해결핍의 담벼락은 자꾸만 더 놓이 올라갔다.
나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라틴어로 된 구절을 읽고 또 읽었다.
"만약 너의 양심의 명령이, 너의 윗사람의 명령과 충돌을 일으킨다면 순종해야 하는 쪽은 너의
양심의 명령이다."
지금의 나는, 이 이해결핍의 담벼락을 종교의 법이라는 커다란 대포로 헐어버리려 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라는 공기를 들이마시면서 행복의 네잎 클로버를 입에 물고서*(역주. 천하태평,
유유자적을 뜻함.) 그 담벼락을 우회한다.
나는 연주여행을 하기 위해 오토바이가 필요했다. 새로 부임하신 관구장 신부님께 청했더니
그것을 사라고 허락하셨다. 나는 운전면허(자동차 운전까지)를 받았기 때문에 250스포르*(역주.
대형 오토바이의 하나)를 샀다.
오토방이를 수도원 뜰에 두었을 때 원장신부님이 곤란한 표정으로 오토바이를 살피고 있는
것이 내 눈에 띄었다.
"이게 오토바이요?"
"네. 퀼뷔테 모터*(역주. 특수 모터), 22마력입니다."
"퀼뷔테?.. 그런데 관구장 신부님은 자네보고 모터가 달린 자전거를 사라고 허락했네."
"아닙니다. 오토바이입니다."
"관구장 신부님께 편지로 문으해야겠군."(그는 아주 세련된 불어로 말을 했다. 일평생 그것만
연습했으니까.)
"제가 사실대로 말씀드렸다는 것을 믿으셔도 됩니다."
오토바이와 모터가 달린 자전거와의 차이점도 모르는 어른을 원장으로 모시고 있으니 얼마나
유감스런 일이냐?
"그럼 지금쯤은 그분이 그 차이점을 아시오?"
"아실겁니다. 그런데 돌아가셨소."
"믿어지지 않는 일이오. 당신은 변명할 수 없었소?"
"그분들은 하느님의 권위로 말씀하셨소. 거역한다는 것은 어려웠소."
"그분들이 당신을 짓눌러 으깬다는 것을 그분들이 알고 있었서?"
"아니오. 나는 그분들이 거북했고 그분들은 나를 거북해했소. 내가 나를 인정하고 또 그분들을,
약간의 익살을 섞어가며 인정하기 위해 나는 술이라는 탈출구가 필요했소."
그러나 그 당시 나는, 그분들 옆에서 오들오들 떠는 산토끼처럼 불안했기 때문에 그리고
샹송을 부르는 나의 활동에 그분들이 무관심하기 때문에 그리고 샹송을 부르는 나의 활동에
그분들이 무관심하기 때문에 고민하며 괴로워했다. 예를 들면, 모스크바와 바르샤바에서 사람들이
내가 작사 작곡한 샹송을 부르고 있는데(나는 에스에이엘이엠*(역주.에술가협회)의 보고서를 보고
그 사실을 알았다.) 내가 있는 우리 수도원의 원장님께서는 내 샹송의 단 하나의 가사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발육부진아처럼 나 자신이 위축되어 있었기 때문에 괴로웟는데 다른 사람들마저도 나를
미숙아로 취급했다. 그것이 사실임을 다음 이야기가 밝혀준다.
1958년 4월, 나는 오토바이를 타고 장거리 여행을 했기 때문에 지쳐 있었다. 밤, 비, 바람, 눈이
나는 지긋지긋 했었다. 나는 두 번이나 오토바이와 넘어지는 바람에 기타를 두 개나 부숴 먹었다.
어느 날 식탁에서 나와 같이 앉아 있는 동료들에게 말했다.
"2마력짜리라도 좋으니 자동차를 한 대 살 수 있으면 좋겠는데..."
전부 침묵. 한 형제수사가 커피를 따라준다. 모두 말없이 설탕을 넣는다. 나는 내 자랑을
하려던 것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기 때문에 한마디 더했다.
"디스크가 팔릴 것인데, 그 돈이며..." 거의 전부가 왁 하고 웃음보를 터뜨렸다. 커피를 따라주던
형제수사가 바로 내 코앞에서, 금빛 송곳니를 드러내며 입술에 조소를 띄는 것을 내 눈으로
목격했다. 내 머리 속이 수모와 슬픔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당신은 대항할 수 없었소?"
"아니오. 바로 그것이, 그것이 나의 병이었소."
"그렇지만 당신은 돈을 많이 벌었었지요?"
"거의 백억 프랑*(역주.십조 원 이상에 해당할 것임)이 될거요."
"당신은 그것을 알고 있었소?"
"아니오. 내게 계산서를 주지 않았소."
어디즘 왔는지 모르고 있었는데 디조으이 톨게이트가 눈앞에 있다. 표를 내느라 차창 밖으로
손을 내미니 차가운 북풍이 손 끝에 느껴지낟. 유리로 된 감방 같은 통 속에 앉아 있던 아저씨가
햇빛이너무 부시니까 눈을 반쯤 감는다. 매표소 지붕은 응달진 북쪽으로 깨끗한 가루눈이 덮여
있다. 다시 출발한다. 오후 2시 10분. 아직도 245킬로미터가 남았다. "나의 하느님, 내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일들을 조용히 받아들이게 해수소서."
여러 해를 두고 곰곰이 잘 생각해보았는데(물론 에이.에이. 그룹과 함께) 내 직업, 노래부르는
이 일은 내 병의 원인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명백하게 알게 되었다. 여행의 피로도
물론이요. 콘서트 때문에 긴장하는 신경의 피로도 물론 상관이 없었다.
사람들 역시 나의 병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명백하게 알게 되었다. 수도원 원자으이
이해부족이나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내 후원자(디종에서)나 금빛 송곳니의 내 동료의
조소(낭시에서) 모두 상관이 없었다.
평온을 찾지 못한 환자는 때때로 자기의 병을 합리화하려고 이유를 찾는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원인은 나에게 있다. 나는 나를 방어할 줄 모른다. 나는 용기가 부족하다. 나는 내 권리를
모른다. 잽싸게 말대꾸할 줄도 모른다. 나는 좋지 못한 직업을 택했다. 등등..." 이와 같은 자기
비난은 사람을 자살로 이끌고 갈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비난한다.
"내 주인 때문이다. 내 마누라 때문이다. 내 의사 때문이다, 상황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페르노*(역주. 싸구려 술의 하나) 술 광고 때문이다, 등등." 이런 식의 타인에 대한 비난이나
원망은 사람을 살인으로 끌고 갈 수 있다. 이런 일은 매일 일어나는 일이다.
사실상 이 병에는 죄인이 없다. 나, 뤼시엥. 내가 행복한 세상을 꿈꾸는 것은 죄가 아니다. 내가
꿈꾸는 그 세상을 이룩할 수 없는 것도 죄가 아니다.
"지금의, 있는 그대로의 이 세상에 만족하십시오."
"내가 만약 행복한 세상을 꿈꾸지 않는다면 나는 그런 세상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
"어째서 당신은 그런 행복한 세상을 만들고 싶어하시오?"
"내가 그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 일 이외에는 하고 싶은 일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요. 나는
그런 인간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