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碧梧桐벽오동을 심은 뜻은?
고전에는 벽오동이 많이 등장한다.
오동의 한자로는 梧(오) : 벽오동. 거문고. 악기(어) 桐(동) : 오동나무. 거문고.
梧桐(오동) : 1) 현삼과에 속하는 낙엽 활엽 교목. 2) 벽오동과에 속하는 활엽 교목.
오동은 꽃이 피고 잎이 난 데 비해
벽오동은 잎이 나고 꽃이 핀다
오동은 현삼과이고 벽오동은 벽오동과란다.
오동과 벽오동은 생김새가 비슷하지만
사돈네 팔촌마냥 먼 관계이다.
오동은 자연에서 자라고 벽오동는 정원에서 자란다
이로 보면 사람들은 벽오동을 선호함을 알 수 있다.
왜 그럴가? 이유가 있을가?
작자 미상인 시조 한 수를 본다.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려터니
내 심은 탓인지 기다려도 아니 오고
밤중에 일편명월一片明月만 빈 가지에 걸렸에라.
봉황을 오라 벽오동을 심었는데
오라는 봉황은 오지 않고 조각달만 떠있다 한다.
벽오동의 심은 뜻이 봉황이었단 말인가?
하나 더 보자.
鳳非梧不棲 봉비오불서 非靈泉不飲 비예천불음 非竹實不食 비죽실불식
봉황은 벽오동이 아니면 앉질 않고(
영천(靈泉 : 신령스러운 우물)이 아니면 마시질 않고
죽실(竹實 :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질 않는다.
옛부터 봉황은 상서스러운 새(鳥)로 숭앙되어 왔다.
물론 가상의 새이다.
시경(詩經)에서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시경집전詩經集傳에 나와 있는 글이다.鳳凰鳴矣 봉황명의니 于彼高岡 우피고강이로다.
봉황이 우는구나!
저 높은 산등성이에서.
梧桐生矣 오동생의니 于彼朝陽 우피조양이로다.
벽오동이 자라는구나!
저 산 동쪽 기슭에서
朝陽(조양) : 아침 햇살. 山之東曰朝陽 : 산지동왈 '조양'
산의 동쪽을 '조양'이라한다.
菶菶萋萋 봉봉처처하니 雝雝喈喈 옹옹개개이로다.
벽오동이 무성하게 우거지니
봉황새 소리가 옹옹 개개하는구나.
[傳 : 전]
鳳凰之性 봉황지성은 非梧桐不棲 비오동불서하고 非竹實不食 비죽실불식이라.
봉황의 성질은
오동나무가 아니면 깃들지 않고
죽실(대나무 얼매)이 아니면 먹질 않은다.
菶菶 萋萋 봉봉처처는 梧桐生之盛也 오동생지성야요
봉봉 처처는 벽오동이 무성히 자란 모습이고
雝雝 喈喈 옹옹 개개는 鳳凰鳴之和也 봉황명지화야라.
옹옹 개개는 봉황이 울음으로 화답하는 정경이다.
菶菶 萋萋 봉봉 처처와 雝雝 喈喈 오옹 개개는
모양을 흉내내는 의태어나 소리를 흉내내는 의성어이다.
화투에 똥광은 재물을 상징한다
이유가 무언지 궁금하다.
오동을 한자로는 桐(동)이라 쓴다.
桐光(동광)의 상단 이미지는 닭머리 같은 그림이 있다
그건 닭머리가 아니라 봉황새이고
아래 나무가지 잎사귀는 벽오등이다.
벽오동에 봉황새가 날아들었으니
얼마나 상서스러운일인가?
쓰리고로 판돈을 거두어 드릴 패다.
이래서 똥광이 재물을 상징한다.
고도리가 안 될 때는 정화수(井華水)래도 떠놓고
봉황이 날아오도록 정성껏 빌고 기다려야 한다.
하다보니 너무 샛길로 빠젔다.
학어집(學語集)이란 어린이용 자연과학 서적이 있다.
조선 후기 고종 5년(1868년 朴載哲)에 편찬된 책이다.
여기에 수록된 내용이다.
丹山之上有鳥 名曰鳳凰
단산(丹山) 정상에 새가 사는데
이름하여 봉황이라 한다.
非醴泉不飮 非竹實不食 非梧桐不棲
봉황은 예천의 감로수가 아니면 마시지 않고
죽실(대나무 열매)이 아니면 먹지 않으며
벽오동이 아니면 살지 않은다.
天下 有道則來 無道則去
이 세상에
도가 있으면 날아오고
도가 없으면 떠나간다.
이처럼 봉황은 옛부터
길조 새로서 여겨저 왔었다.
봉황이 널리 사람들 가슴에 자리잡은 것은
장자(莊子)에서 영향을 받아 토작화 된 것으로 봐진다.
장자는 전국시대 사람으로 이름이 주(周)이다.
생몰연대는 미상이다.
오늘 봐야할 글 속에
[惠子相梁 혜자상양]이란 구절이 있다.
[혜자가 양나라 재상이 되었다]란 뜻이다.
당시 양나라를 추산해 보면 시기를 대략 짐작할 수 있다.
梁即魏。 公元前361年魏國國都由安邑遷到大梁 此後魏又稱梁。 -출전 aijianggu.com-
양나라는 곧 위나라이다.
BC361년 위나라가 도성을
안읍에서 대량으로 천도하였다.
이후부터 위나라를 양나라로 부른다.
맹자를 보면 맨첫구절이
孟子 見梁惠王으로 시작 된다.
맹자께서 양나라 혜왕을 알현했다.
이 때의 양혜왕이 바로 그 분이다.
양혜왕이 수도를 BC 361년에 옮겼다는
기록은 지금부터 2,383년 전이다.
이 무렵에 장자가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장자와 혜자는 친구지간으로 알려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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