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유럽과 북아프리카의 애련한 가교 / 시인 김윤자
-포르투칼, 모로코, 스페인
바다를 향한 열정과 고독, 포르투칼
유럽을 향한 뜨거운 발돋움, 모로코
피카소와 세르반테스 그리고 성지, 스페인
포르투칼은 유럽 최서단 국가다. 대항해 시절 바다를 향한 열정과 고독으로 무수한 역사를 쌓아오며 아직도 털어내지 못한 바다에 대한 고혹의 향수, 그리운 우수에 젖어 산다. 스페인은 피카소와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의 나라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며 또한 이슬람과 카톨릭의 성지 보고였다. 스페인에서 페리호를 타고 건너간 북아프리카의 가난한 땅 모로코는 한국의 고전을 보는 듯한 때묻지 않은 순수로 깊은 정이 느껴졌다. 워낙이 가난하여서 유럽으로의 탈출이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며 아이도 어른도 유럽을 향해 뜨거운 발돋움을 하고 있다.
남유럽은 빛스런 풍경이고 북아프리카는 목마른 풍경으로 지브롤터 해협은 이 두 대륙을 이어주는데 참으로 애련한 가교 역할을 한다. 대륙과 대륙의 벽, 국가와 국가의 벽은 높은 울타리임을 가르쳐준 여행이었다. 아울러 내 조국의 높은 위상에 감사하며, 헐벗지 않음에 감사하며 소중한 행복을 품고 왔다. 여행을 통해 얻는 세계 여러 나라에 대한 지식은 언제나 신비롭고 큰 감동을 준다.
바다를 향한 열정과 고독, 포르투칼
포르투칼은 리베리아 반도의 나라, 대서양과 접하여 자외선이 강한 태양의 나라, 바람이 많은 해변국이다. 국경이라고는 유일하게 스페인 밖에 없다. 바다만을 바라보며 닫힌 땅에서 살아서 성격이 소극적이다. 건물도 거의 미색이며 분홍과 살색으로 연한 색상이다. 영국과 교역하고 영국의 도움을 받아왔다. 나폴레옹 침입 때도 영국이 도와줬다. 포르투칼은 수많은 외국의 침입을 받았다. 로마에서 보았던 아치형 수로가 있고, 프랑스 파리에서 보았던 샹제리제 모방 거리도 있다. 모두 아린 역사의 유적이다.
수도 리스본은 대서양과 접한 해변도시로 한때는 큰 지진으로 도시의 반이 물속에 잠겼던 재해의 아픔을 품고 있다. 대서양 가까이로 다가가자 모래언덕이 보이더니 점점 확산된 황막한 땅이 즐비하다. 강수량이 적어 사막화되고 있다. 주변에 빈 땅이 많다. 인구가 적어서 그냥 둔다. 아파트를 지어도 살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한때는 아프리카 남쪽 희망봉까지 진출했다. 브라질을 식민지로 소유했던 15세기에는 아프리카 노예 5천명을 해마다 배 10척에 5백명씩 태워 데리고 가서 사탕수수밭, 탄광에서 일을 시키던 강국이다. 포르투칼의 찬란했던 역사의 한 단면이다. 나라는 부자이나 국민은 가난한 나라, 결국 생산 없이 생활하다가 몰락했고, 스페인에게 80년간 지배당했다. 질곡의 역사는 흘러 포르투칼은 1974년에 독재가 종식되었고, 1986년에는 EU에 가입했다. 그 후 급속으로 성장했다고 1910년부터는 포르투칼 제1공화국이 시작되었다.
포르투칼 국민은 이혼이 많다. 이혼이 많은 이유로는 항해시대부터 혼자 살아온 포르투칼 여인들이 강해서다. 바다만을 바라보는 섬 같은 나라에서 남성들은 항해의 깃발에 자존을 세웠다. 아직도 잠들지 못하는 그날의 그리운 우수가 국민성으로 형성되어 슬픈 정서다.
포르투칼의 전통예술인 파두는 슬픈 노래다. 스페인의 전통예술이 플라멩고라면 포르투칼은 파두다. 바다의 노래, 눈물의 노래로 기본 정서가 이룰 수 없는 사랑, 그리움이다. 13세기까지 이슬람 정복 때 탄생한 노래로 바다만 바라보고 사는 포르투칼의 고독한 국민성이 담겨있다. 포르투칼에서는 어려울 때마다 풋볼(축구), 파두(노래), 파티마(성모마리아 발현지), 이렇게 3F 정책으로 나라를 다스려 왔다고 하니 그 만큼 파두는 포르투칼에서 큰 역할을 해온 노래다. 내 조국에서 생각했던 포르투칼과는 또 다른 면을 본다. 강하고, 화려하고, 도전적인 이미지는 그 옛날 대항해시대에 존재했던 것이고 오늘날은 그 피만이 흐르고 있어 붉은 회억으로 바다를 향한 열정과 고독이 애절하다.
* 리스본 에드와르도7세 공원
영국 에드워드7세가 1902년 리스본을 다녀간 기념으로 세운 공원이다. 프랑스 공원문화로 조성되었다. 잔디와 잘 정돈된 나무, 조각상들이 빼어난 비경이다. 리스본 시내의 전경이 보이는 조망 언덕에 올라서 바라보니 저 아래로 흐르는 처연한 테조강과 리스본 중심부에서 오롯하게 솟은 퐁발후작의 동상이 포르투칼의 시린 역사의 마디를 속삭이는 듯하여 오늘의 평화는 포근하지만 내 조국의 역사를 떠올리며 가슴이 서늘했다. 퐁발후작은 포르투칼의 정치 개혁가이며, 대지진을 복구한 영웅이다. 퐁발후작 광장은 에드와르도 7세 공원과 나란히 위치하며 리스본의 훌륭한 명소다.
우산 소나무 가로수도 이색풍경이다. 우산 소나무는 스페인이 포르투칼을 침공했을 때 자국의 병사들에게 그늘을 제공해주기 위해 우산 같은 역할을 하라고 옮겨 심은 것이다. 이것도 겉으로 보기는 아름답지만 속으로는 슬픔이 배어 있는 정경이다. 유럽의 물결이 공원을 타고 흐른다.
포르투칼 리스본 에드와르도7세 공원
* 유럽 최서단 땅끝 까보다로까 언덕
까보다로까는 해발 40m 해변 절벽 위 언덕으로 리스본에서 35Km, 30분을 달려간 서쪽 바닷가 최단 땅끝이다. 바람 한점 막아주는 곳이 없는 평평한 땅이 대서양을 향해 목을 내밀고 그 땅의 끝점에 포르투칼의 민족시인 까몽이스의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이라는 십자가 표상의 시비가 푸른 입술로 높이 서 있다. 까보다로까는 미래로 간다는 뜻이다. 바다로, 바다로 진출했던 콜롬버스의 숨결이 출렁인다. 유럽 세번째 등대라는 18세기의 빨간 등대도 포르투칼 전성기의 뜨거운 역사를 증명하는 한폭의 수채화다.
대서양을 바라보며 유럽 최서단 땅끝에 섰다는 황홀함에 시선이 분주한데 정말 바람이 많은 나라임을 증명하듯 온몸을 심히도 흔든다. 바다와 땅 사이를 오가며 강하게 자란 바람이 사람의 호흡 앞에서 흥겨운 춤사위다. 우람한 절벽도 고요하고, 낭만적인 카페도 포근하고, 언덕 마을에는 소박한 민가도 보이고, 대항해시대의 거친 갈망이 잠든 평화로운 정경이다. 위도 38도인데 한국보다 포근하여 3월의 식물들이 짙푸르다. 해변의 키 작은 풀과 고운 야생 꽃들이 정반대의 최동쪽 먼 나라에서 온 외인의 발길을 보듬는다.
포르투칼 유럽 최서단 땅끝 까보다로까 언덕
* 리스본 로시우 광장
리스본의 가장 중심으로 광장 주변은 한국의 명동거리다. 금의 거리, 은의 거리 등 모두가 웅장하다. 테조강 1800Km가 스페인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가 끝나는 곳이다. 스페인과 포르투칼은 떨어질 수 없는 이웃 나라로 아직도 스페인의 잔재가 많다. 항해시대부터 들어온 주유소와 백화점 등 스페인의 큰 회사가 있다.
13세기부터 종교재판을 비롯한 모든 행사가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대부분 퐁발후작의 계획으로 지어진 18세기의 건물이다. 퐁발후작은 포르투칼의 정치 개혁가이며, 대지진을 복구한 영웅이다. 초대 총독 페드로4세의 동상과 분수, 꽃을 파는 아담한 가게, 대리석 의자, 물결 모양 바닥 등 넓은 로시우 광장은 그야말로 장엄하다.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는 평화로운 사람도 있고, 주변도로에는 차와 사람이 많이 왕래한다.
식민지를 많이 소유했던 나라여서 인종도 다양하다. 포르투칼 국기에도 그런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녹색과 적색인데 즉 녹색은 희망이고, 적색은 여러 민족의 피를 상징한다. 주변의 거리와 광장의 곳곳을 둘러보며 리스본의 문화를 접했다. 이곳에서는 화려했던 포르투칼의 면모가 그려진다. 지금은 경제사정이 좋지 않지만 한때는 해양강국이었던 나라, 그 훈훈한 정경이 이곳 거리에서, 주상복합 상가에서, 시민들 표정에서 읽혀지고 있다.
포르투칼 리스본 로시우 광장
* 파티마 성모 마리아 발현지
리스본에서 북쪽으로120Km 떨어진 도시 파티마는 모하메드의 딸 이름이다. 훌륭한 일을 많이 한 여성이다. 영화 [파티마 Fatima]를 보며 갔다.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 발현지에서 양치기하던 세 아이들이 예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의 6번 출현을 목격한 이야기다. 1917년 5월에서 11월까지 매월 13일에 1번씩 나타났다는 것이다. 8월에는 그런 사실을 전하는 아이들을 감옥에 가두었다.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라, 고행하라는 계시를 받고 붉은 밧줄을 몸에 감고는 더운 날씨 속에서도 물 한모금 먹지 않은 채 고행한 이 세 어린이에게만 성모 마리아가 보였다. 어른들은 믿지 않았지만 10월 13일에는 구름을 가르고 해가 나와 돌더니 성모 마리아가 발현된 기적을 40Km의 거리에서까지 7명이 보았다. 후일에 모두 사실로 확인된 사실적 이야기를 영화로 제작한 것이다. 영화도 보다가, 포르투칼의 넓고 고요한 초지 들녘을 보다가, 일기 변화가 심한 포르투칼의 해와 웅장한 검은 구름을 번갈아보며 지루하지 않게 파티마로 갔다.
13년 세월을 거쳐 1930년에 교황청으로부터 발현을 인정한다는 공정을 받았다. 고행을 실천했던 그때의 어린이들에게 1917년의 러시아 혁명과 1914년부터 1918년까지의 1차 세계대전의 종말을 예고했다는 것이다. 또한 여러가지 기적이 나타났는데 1981년 5월 13일 행사 때 참석했던 요한 바울에게 총알이 날아올 때 성모 마리아의 빛으로 고개를 숙였는데 총알이 그냥 지나감으로 그 빛이 살려줬다. 태양의 기적이 일어났는데 태양이 빙글빙글 돌자 장애자들이 일어났다. 매년 5월 13일이면 여러 사람들이 이곳에 모인다.
넓은 광장이 있고 양쪽 끝에는 성당이 있다. 가장자리에는 울창한 나무들이 서 있다. 장엄한 바실리카 성당이 있고, 바로 앞에 성모 마리아가 발현했다는 그 지점에 세운 조그만 유리벽의 예배당도 있다. 1917년에 발현하고 1919년에 예배당 짓고, 1928년에 바실리카 성당을 크게 지었다. 하얀 대리석 길 150m를 카톨릭 신자들이 무릎 꿇고 걸어서 내려와서 예배드린다. 맞은편에는 성삼위 일체라는 뜻이 담긴 트리달 돔식 건물의 성당이 있다. 2004년에 지은 현대식 건물의 성당이다. 저격으로 죽을 뻔 했던 요한 바울 동상도 있다. 그 후부터 로마 교황청은 방탄차를 승차한다. 독일인이 조각했다는 가로 170m, 세로 340m의 거대한 예수 십자가상이 하늘 높이 솟아 있다.
성모 마리아 발현 예배당에서는 신도들이 모여 예배드리고 있었다. 바실리카 성당은 거대하다. 예배당을 찾는 이가 너무 많아서 지은 성당이다. 내부도 웅장하고 근엄하다. 성모 마리아의 발현을 보았던 세 아이인 루시아, 하신다, 프란체스코 중 두 명, 하신다와 프란체스코의 무덤도 성당 안에 있다. 시신이 그대로 성당 안에 안치 되어 있었다. 스페인 독감으로 발현 2년 뒤 성모마리아의 발현을 보았던 두 명의 아이가 사망했다. 그 당시 스페인 인구 30만명이 죽었고, 세계적으로는 1억명이 사망한 무서운 독감이었다. 한참 후인 1989년 두 아이, 하신다와 프란체스코는 바울에 의해 가경자로 공식 선언 되었고 루시아는 21세기까지 살다가 나이 들어 얼마 전에 사망했다. 내부를 둘러보고 나왔을 때 비가 많이 오고 있었다. 로마의 바티칸 시국에 있는 바울 성당을 본받아 지었다는데 규모만 조금 작을 뿐 외형의 건축모양은 바울 성당과 아주 동일하다. 차츰 어두워지고 비가 흥건히 고인 파티마의 성지를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떠나왔다.
성모 마리아의 발현지 울타리에 커다란 코르크 나무가 있다. 포르투칼의 주 수출 품목인 코르크가 이 나무에서 생산되는 것이다. 병마개를 생산하는 코르크 나무가 신기하여 바싹 다가가 살펴 보았다. 코르크 나무 껍질을 벗겼는데 그 자리에 숫자 7를 적어 놓았다. 그것은 2007년에 코르크 껍질을 생산했다는 표시고, 9년마다 자르므로 다음은 2016년에 생산한다는 뜻이다. 다시 재생되는 나무의 껍질이 대견하고 아름답다.
포르투칼 파티마 성모 마리아 발현지
* 테조강변의 벨렘탑과 발견의 기념비
리스본의 중심을 흐르는 크고 아름다운 테조 강가에 귀부인이 치마를 펼치고 앉은 모양이다. 나비가 앉은 것 같기도 하다. 밧줄 등 자연물도 건축했다. 1515년부터 1518년까지 지었는데 마누엘 양식의 3층 건물이다. 아름다운 3층은 왕족의 거처로 사용되기도 했고, 2층은 포대로, 1층은 감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원래는 강물 속에 세웠는데 물이 빠지면서 형상을 드러내고 있다. 1983년에 제로니모스 수도원과 함께 문화유산으로 지정 되었다. 테조강을 바라보며 앉은 벨렘탑은 정말 아름다운예술의 건축물이다.
조금 위에는 1960년에 항해 성공 기념으로 세운 범선 모양의 발견의 탑 기념비가 있다. 지구의 서편으로는 포르투칼, 동편으로는 스페인이 지구를 반씩 나누어 갖자고 하던 시대가 있었다. 포르투칼의 바스코다가마는 동쪽으로 가서 아프리카와 인도양을 발견한 개척자다. 콜롬버스는 서쪽으로 가서 스페인을 개척했다. 콜롬버스는 이사벨 여왕의 도움으로 항해했다. 탑의 아래 양 옆에는 항해시대 때 바로 진출하던 사람들의 용감한 동상이 있다. 금방이라도 바다로 뛰어들 듯하다. 대리석 바닥의 조각 문양 하나하나도 항해에 대한 깊은 의미가 부여된 것 같다. 포르투칼 왕자인 마젤란과 바스코다마 등에 대한 기록이 적혀있다. 건너편에는 우람한 제로니모스 수녀원이 있다.
포르투칼 테조강변의 벨렘탑
포르투칼 테조강변 발견의 기념비
* 리스본 제로니모스 수도원
대단히 크고 웅장하다. 300m의 폭으로 건물 끝에서 끝이 아득하다. 1502년에 건설 되었다. 원래는 항해사들이 출발하기 전 무사하기를 기원하던 기도원이었는데 그후 왕의 거처로 쓰이다가 현재는 박물관이다. 마누엘 왕이 유명하여서 그의 이름을 딴 마누엘 양식으로 지어졌다. 16세기에 발달한 건축양식으로 포르투칼에만 있다. 아랍으로부터 800년 동안 지배 받았던 나라여서 아랍 문화가 많이 남아 있다. 건축물은 인도쪽에서 도입된 마누엘 양식으로 벽면에 기하무늬 예술이고, 나뭇잎, 꽃, 밧줄, 조개, 노끈 등을 조각한 자연물 장식으로 수도원 건물의 외벽에 그 문양이 붙어 있다.
수도원 내부 입구에 시인 까몽이스와 바스코다가마의 무덤이 안치되어 있다. 원래 이 수도원은 1498년 바스코다가마의 인도항로 발견을 기념하기 위해 건축된 것이다. 바스코다가마는 반듯이 석관에 위에 누워 항해의 무사귀환을 빌던 그날의 모습으로 아직도 두손 모아 기도하고 있다. 포르투칼인의 거룩한 주검 앞에서 한참 동안 머물렀다. 무덤이라기보다 아직도 살아있는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두었다. 까몽이스의 손에는 칼이 들려있는데 포르투칼에서는 칼이 정의의 표상이다. 시인은 정의의 칼을 죽어서도 놓지 않고 있다. 아래 부분에 그의 육신이 누워 있어 창살만 열면 정담을 나눌 것 같은 착각이 든다. 포르투칼 민족시인 까몽이스와 창살을 마주하고 산 자와 죽은 자의 대면이지만, 같은 시인으로서 한동안 동일한 상념으로 마음을 교류했다.
포르투칼 리스본 제로니모스 수도원
유럽을 향한 뜨거운 발돋움, 모로코
포르투칼에서 스페인 남부 항구도시 타리파로 가서 페리호를 타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모로코로 갔다. 유럽의 국경선은 언제나 환상적이다. EU국으로 통합되면서 아주 쉽게 국경을 넘어간다. 포르투칼과 스페인 국경도 그렇다. EU국기가 걸린 곳이 국경선이고 국경다리를 건너면 된다. 강을 반씩 나누어 소유하고 있다. 스페인에서 모로코 갈 때의 국경선은 지브롤터 해협이다. 배로 40분 정도 건너서 아프리카 북부 도시 탕헤르로 갔다.
아프리카에 속한 나라지만 피부가 완전히 검은 것은 아니다. 아랍민족이 섞여서 거무스름한 인종이다. 외적 침입이 잦았던 나라여서 적응을 잘 한다. 그래도 스페인과는 나쁜 감정 없이 산다. 스페인도 이웃사촌으로 생각한다. 모로코 사람들은 스페인에 와서 1년을 벌면 10년을 살기 때문에 아이들은 버스의 타이어에 끼어서라도 목숨 건 탈출을 시도한다. 비참한 현실이다. 한국의 7배, 사하라 분쟁지역까지 합하면 9배의 나라인데 참으로 가난한 나라다. 프랑스 식민지여서 프랑스식 문화가 공존하기도 한다. 모로코는 화장실, 음식 등 모든 것이 열악한 환경의 나라지만 인간적인 아주 정겨운 나라다. 모든 생활을 '인샬라', 즉 '하나님의 뜻대로' 그렇게 한다. 그런 사고방식으로 사는 나라가 모로코다.
소박한 농촌 풍경이 한국의 60~70년대의 삶 모습이다. 드넓은 땅의 농작물과 양떼들, 얕으막한 집들이 이색풍경이다. 우리나라의 눈부신 발전에 감사한다. 폐허 속에서 일어선 내 조국이 아닌가. 모로코의 농촌에도 빛이 보인다. 부지런히 일구는 농작물과 목장이 풍요롭다. 농촌마을에 말, 당나귀, 마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보인다. 들녘의 교통수단이다.
농가주택은 중산층이 살고, 천막은 빈민층이 산다. 교육은 초등은 의무교육인데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학교에 가서 공부해야 할 아이들이 목동으로 양을 키우고 있다. 그 아이들은 우리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환경에 따라서 살아가는 방법이 다름을 본다. 교육은 거의 카사블랑카에서만 가능하다. 부유층은 캐나다, 프랑스로 유학 보낸다. 모하메드 대학에 진학하기도 한다. 농촌일수록 학교가 멀어서 차가 없으니 도보나 나귀 타고 학교에 가야하는데 거의 못 간다. 특히 여자는 집밖에 못 나가서 문맹이다. 적당한 나이 18세쯤 되면 가정부 노릇한다. 이 가난한 나라의 고리를 어찌 끊을까. 무심히 보면 낭만일 저 초지 위 주거지 막사가 생의 아픈 현실이기에 어서 툭툭 털고 일어서길 빈다. 도로변인데도 동물도 목동도 눈길을 돌리지 않는다. 그들만의 고요하고 평화로운 정적에 행복이 깃들어 있다. 다른 세상을 모르는 천진한 사람들, 그러나 어깨에 행복을 지고 산다면 축복의 삶이다.
* 페스 미로도시 메디나
페스는 모로코의 도시 중 세번째 큰 도시다. 카사블랑카가 제일 크고 다음은 라바트다. 페스의 인구는 100만 명이다. 1200전 년 건설된 도시로 아랍권 나라 중 가장 오래된 도시다. 이슬람 왕조의 역사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서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페스 메디나는 허술하고 좁은 길이 많다. 1~2m의 좁은 도로에는 차량 통행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당나귀로 물건을 운반한다. 페스에는 미로 전문 가이드가 있다. 그 사람을 잘 따라 다녀야 한다. 조금 큰 골목이 300~400개, 소로의 좁은 골목이 1000개가 넘는다. 돌고 돌아도 끝나지 않는 미로는 대단했다. 두팔을 벌리면 닿는 협소한 골목에서부터, 구불거리는 미로의 골목길이 계속 이어진다.
메디나 구시가지 미로에서 왕의 무덤 건물을 만났다. 그 안에 실제 무덤이 있다. 현재 왕의 아버지인 핫산 왕 때까지는 독재였다. 닫힌 사회로 가택연금과 숙청도 했다. 그런 일 없애고 뿌리 뽑자고 숙청 풀어주고 망명자들을 회복시켰다. 현재는 외화유치 노력으로 영화사업을 육성한다. 왕의 무덤을 도심에서, 그것도 건물 속에 있는 현장을 본 것은 우리에게는 낯설지만 모로코의 면면히 이어오는 역사의 탄탄한 끈이라 여겨졌다.
미로의 도시에 2만명 수용하는 사원도 있다. 당시의 이슬람의 센 영향력을 본다. 비무슬림인은 사원 안에 못 들어온다. 문이 열려 있으면 볼 수 있으나, 닫혀 있으면 우리도 못 본다고 알고 왔는데 역시 문은 닫혀 있었다. 정오의 기도시간이 끝난 것이다. 아쉽지만 이슬람 문양의 아름다운 아치형 사원의 문만 보았다. 모로코인 97%가 무슬림이다. 2~3%만 카톨릭, 기타 종교다. 종교의 힘은 참으로 위대하다.
모로코 페스 미로도시 메디나
* 페스 가죽염색 작업장
페스에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가죽염색 공장이 있어서 여행객들이 많이 찾아온다. 페스의 구시가지 미로를 수없이 돌고 돌아 찾아왔다. 골목의 짐승 분유물 악취도 역겨웠고, 수많은 상점들의 호객행위도 체험했고, 그리고 높은 2층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서 가죽염색 작업장을 볼 수 있었다. 주변은 온통 가죽제품을 파는 상가들이다. 상가의 난간에서 아래로 염색장을 내려다봤다. 염색장은 화려한 색상을 풀어놓은 그릇들이 많다. 처음에 가죽을 담그는 비둘기 뽀얀 똥물도 있었다. 모로코의 광활한 들녘 초지에서 자라는 양, 소, 말 등의 동물이 많아서 발달한 산업이다.
가죽 원단을 어깨에 메고 가는 사람도 보았다. 무거운 가죽을 메고, 또 곁에서 부축하고 가는 모습이 안타까운데 저것은 이곳 사람들의 행복한 일상이다. 미로여서 차가 들어오지 못해 저렇게 물건을 운반한다. 상가마다 가죽제품이 많다. 그 옛날 건물 그대로 역사가 배인 메디나의시장이다. 조금은 어수선하고, 불편하고, 지저분한 여정이었지만 이 시대에는 볼 수 없는 연민의 도시다. 모로코에서 역사가 잘 보존된 도시기에 그 만큼 많은 것을 배운 소중한 체험이다.
모로코 페스 가죽염색 작업장
* 라바트 모하메드5세 왕릉과 핫산탑
라바트는 모로코의 수도이며 프랑스 식민지 때부터 현대까지 초대의 왕에서 현재의 왕이 사는 도시다. 왕이 사는 수도라서 잘 정리된 도시다. 수도로서 큰 역할은 못했으나 무역항 도시로 기여했다. 잘 가꾸어진 모로코의 수도 라바트는 현대적 향기가 감돈다. 현대와 과거의 풍경이 함께 있는 도시 로 1956년에 독립했다.
모로코는 왕권제다. 왕이 있고, 수상, 상하 양원 내각제다. 현재 왕은 모하메드6세다. 왕의 아버지는 핫산이다. 핫산은 1952년부터 시작된 독재자다. 공공장소에서는 반드시 왕의 사진을 걸어야 한다.
모하메드5세는 1962년에 사망했고, 왕릉은 아들이 건설했다. 길 이름에도 모하메드가 있다. 현재 왕의 아버지는 핫산2세이고, 이곳은 할아버지 무덤이다. 천정과 벽면의 예술장식 아름답고 실내 정경이 엄숙하고 웅장하다. 아래층에 왕의 무덤관이 있다.
외경도 왕의 무덤이라기보다 수려한 예술 건축물처럼 곱다. 이슬람 상징의 초록색 지붕이 인상적이다. 1912년부터 프랑스 식민지였던 모로코를 1956년에 독립시킨, 독립의 아버지다. 왕위 계승이 장자 상속인데 모하메드5세는 셋째 아들인데 왕이 되었다. 프랑스에서 고의로 무능할 것 같은 셋째 아들 모하메드5세를 왕으로 세웠다. 그런데 그 모하메드5세 왕이 독립운동하여 모로코를 해방시켰다. 그 왕릉 앞 광장에는 핫산의 탑이 높이 서 있다. 핫산 탑은 66m높이인데 미완의 탑이다. 쌓다 멈춘 탑이 오롯하다. 핫산 왕이 사원을 짓다가 죽어서 그냥 멈춘 것이다. 핫산 왕이 성벽을 쌓고 백성을 이주시키고 독립하려 했는데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사망했다. 수많은 기둥들이 열을 지어 올곧게 서서 핫산 타워를 받들고 있다. .
현대와 과거의 풍경이 함께 있는 도시 라바트를 양분하는 강이 멀리 보인다. 해적이 많다. 1700년대 중반부터 해적을 적출했다. 1956년에 모로코가 독립했다. 바라만 보아도 아름답다. 나무와 도시의 조화가 환상이다. 넓은 들녘도 평화롭다.
카사블랑카에는 1925년 건설된 모하메드5세 광장도 있다. 모하메드는 모로코 독립의 아버지여서, 그가 생전에 얼마나 모로코의 큰 존재였는지 말해주는 대목이다.
모로코 라바트 모하메드5세 왕릉
모로코 라바트 핫산탑
* 카사블랑카 핫산2세 모스크
카사블랑카는 하얀 집이라는 뜻이다. 유럽의 가까운 나라 스페인에서, 포르투칼에서 이곳에 들어올 때 하얀 집들이 많아 그렇게 이름이 탄생된 도시다. 카사블랑카는 모로코에서 가장 큰 도시로 인구 500만 명의 경제중심지다. 대부분 건물은 식민지 시절에 건설된 것들이다.
핫산2세 모스크는 항구도시 바닷가에 비경으로 솟아 있다. 세계에서 세번째 큰 모스크로 10만 명을 수용한다. 모스크 곁에 세워진 핫산2세 타워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210m의 거대한 첨탑이다. 그곳은 이슬람 교인이 올라가서 기도의 부름을 외치는 곳이다. 모스크 탑이 높은 것은 바로 이런 이슬람 사원의 전통적인 특징 때문이다. 모든 문이 아치형이고 건물 또한 아치형으로 둘러서 있다. 해안의 타워와 모스크, 광장의 비둘기 등이 고운 정경이다. 핫산2세는 현재 왕의 아버지인데 독재자였다. 대서양 끝 해변가의 오롯한 첨탑이 예술이다.
이곳 주변 주택단지는 은퇴자들의 부촌이어서 참으로 깨끗하고 아름답다.
모로코인들은 아프리카의 유럽인이라고 자칭한다. 모로코는 중산층이 없다. 극부자 아니면 극가난자로 양분되어 있다. 카사블랑카 도심의 높고 웅장한 빌딩들을 보며 이곳이 아프리카냐고, 그 가난한 나라 모로코냐고, 물을 만큼 눈과 가슴이 놀란다. 아프리카 모로코의 거대한 명소다.
모로코 카사블랑카 핫산2세 모스크
* 모로코와 스페인 사이 지브롤터 해협
탕헤르는 지브롤터 해협을 바라보고 있는 모로코 북쪽의 항구도시다. 유럽 스페인 땅에서 아프리카 모로코 땅에 올 때 지브롤터 해협 바다를 건너 첫번째 발을 딛는 아프리카의 관문이다. 여객선을 타고 모로코와 스페인을 왕래한다. 모로코에 들어올 때는 밤이었고, 아프리카를 떠나는 날은 한낮이어서 배가 움직이자 탕헤르 도시가 더 선명하게 큰 폭으로 보인다. 해안의 건물들이 비경이다. 높은 건물 숲이 아프리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아프리카 모로코가 점점 멀어지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지브롤터 해협이 이어졌다. 광활한 바다를 페리호 홀로 쾌속 질주한다. 이 바다는 14Km 정도로 그리 긴 항로는 아니다. 승선 시간도 40분 정도다. 망망대해가 잠시 이어지더니 금새 스페인 영토가 보인다. 산줄기가 처음에 드러나더니 곧 스페인 항구도시 타리파에 다다랐다. 날이 맑으면 타리파에서 모로코가 보인다고, 오늘 같은 쾌청한 날은 가능하다. 아프리카 모로코를 떠난 페리호는 스페인 타리파에 안전하게 우리를 데려다 주었다. 지브롤터 해협은 아프리카와 유럽을 잇는 애련한 가교 역할을 한다.
모로코와 스페인 사이 지브롤터 해협
피카소와 세르반테스 그리고 성지, 스페인
스페인은 지중해와 접해 있는 정열의 나라로 피카소와 돈키호테의 작가인 세르반테스를 탄생시킨 나라다. 피카소의 고향 말라가와 돈키호테의 풍차가 있는 콘수에그라는 지부심이 대단한 도시다. 그리고 스페인은 이슬람과 카톨릭 종교의 유적이 아주 많은 성지의 나라다. 스페인은 침략이 잦아서 여러 민족이 섞여 있어 복잡한 국가다. 로마가 500년~600년 지배하여 그 영향이 크다. 한때는 로마 시민이 되어 로마어를 사용했다. 스페인 하이웨이는 로마시대 때 건설된 것이고, 로마 유적지도 많다. 모든 학교에서 카톨릭 교리를 배운다. 로마가 쇠퇴하면서 게르만족이 들어왔다.
스페인은 18세기부터 왕조였다. 스페인 국왕 알폰스 13세가 1931년에 추방당하여 망명 갔다. 1936년~1939년까지 내전이 일어났다. 프랑코 독재정치가 1939년~1975년까지 36년간 이어졌다. 스페인을 가난하게 몰아부친 자다. 사후에는 멋있는 계곡에 왕 같은 무덤을 만들었다. 전사자들의 계곡을 마련하고 마지막으로 프랑코 총독의 무덤이 들어갔다. 2천Kg의 돌을 덮어두었다. 다시는 일어나지 말라는 뚯이다. 1,2차대전에 스페인은 불참했다. 그래서 버려진 나라, 고립된 나라였다. 포르투칼, 중남미 정도만 교류했다. 1969년 왕위를 조치하여 아버지 돈까를로스 백작으로 끝냈다. 1975년 11월 20일 프랑코 총독이 죽고 안정되기 시작하여 선진국으로 도입했다. 2002년 EU 가입 후 보조받아 성장했다.
스페인과 포르투칼은 같은 이베리아 반도인데 전혀 다르게 산다. 포르투칼이 소극적이고 흐린 색상의 건물인데 반하여 스페인은 적극적이며 원색 건물이 많다. 리베리아 반도의 스페인은 유럽에서 탐내는 땅이다. 1년 농사지으면 4년을 먹고 산다. 그 만큼 옥토다. 그래서 로마가 오랫동안 정착했다. 아랍인이 711년에 와서 1250년 퇴출할 때까지 500년간 머문 땅이다. 스페인은 선진국으로 시민은 가난해도 나라는 부자다. 버블건축 파동이 나서 실직자가 많아지고 그래서 상당히 불안한 사회다. 그러나 사회보장 복지제도가 잘 되어 있어 노후의 생활은 안정적이다. 스페인의 경제규모가 2008년에 세계 8위였다. 그래도 참 검소한 나라다. 세금을 월급의 20%~50% 거둔다. 부조금이 없는 나라다. 보험제도가 잘 되어 있어서 장례식도 모두 보험으로 치른다. 죽을 때까지도 모두 보험으로 생활한다. 잠시 머문 외국인에게도 적용된다니 사람을 위한 현실적인 법이 잘 마련된 살기 좋은 나라다.
* 세비야 황금의 탑
세비야는 1992년에 만국박람회가 열렸던 곳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강변에 엑스포관람장도 있고 여러 건물들이 아름답게 들어서 있다. 강폭도 상당히 넓다. 황금의 탑은 스페인 세비야의 도심을 흐르는 과달기비르 강가에 세워진 정12각형 건축물이다. 1220년대에 강을 타고 들어오는 적군을 지키기 위해 세워졌다. 즉 13세기, 강의 통행 기념으로 세운 탑이다. 처음에는 지붕 위가 황금이었는데 오늘날에는 오랜 역사로 벗겨져서 잘 안 보인다. 지금은 스페인 항해 역사를 담아놓은 해군 박물관이다. 도로변에 있는 탑은 웅장했다. 바로 마주 보는 과달기비르강에는 큰 배가 떠 있다. 야자수를 비롯한 여러 열대 식물들이 울창하여 깊은 향수를 더해준다.
세비야는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 집시들이 살던 낭만의 도시다. 횡단보도를 건너 인도를 걷는데 당나귀 똥이 있었다. 당나귀나 노새가 자가용처럼 이용된다는 말이 입증되는 분비물이다. 시가지의 건물은 유럽풍이다. 웅장하고 조각미가 흐른다. 아름다운 왕궁이 그렇고, 주상복합 상가들이 그렇다. 오렌지 나무는 가로수로 거리에서도 열매를 노랗게 맺고 있다. 남국의 정취를 멋스럽게 드러낸다.
스페인 세비야 황금의 탑
* 세비야 스페인 광장과 마리아 루이사 공원
광장에 들어서는 순간 그 장엄함이 온 시선을 당겼다. 높은 첨탑은 하늘을 찌르고, 아치형의 건축물에 아치형의 문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그 아래 스페인 각 도시들의 지도와 대표 그림, 문장들이 천연색상으로 그려져 있다. 사람의 손으로 제작된 것 같지 않을 만큼 섬세하고 웅장하다. 이슬람 건물의 예술양식이다. 1929년 엑스포개장을 기념하며 조성되었다. 스페인이 하나로 통합되기 전 나뉘어졌던 4개의 왕조를 뜻하는 4개의 다리도 있다. 다리 아래로 연못의 물이 흐르고 고전의 엄숙함과 미술작품의 향기에 발길이 돌아서지지 않는다. 마리아 루이사 공원이 바로 곁에 있어 걸어서 갔다.
이사벨 여왕의 동생인 마리아 루이사를 위해 지은 공원이다. 스페인 광장의 바로 앞에 있어 오롯한 첨탑이 담장의 무성한 식물줄기 사이로 보인다. 한참을 다시 걷다보니 대서양을 항해하던 범선조각상도 높이 솟구쳐 있다. 공원 곳곳에 풍성하게 열린 오렌지 나무가 많다. 세비야는 축제의 도시다. 그래서 행사 때는 전통의상도 볼 수 있다. 마차도 볼 수 있다. 마리아 루이사 공원을 돌다가 경찰과 말을 보았다. 정말로 말을 타고 순찰하는 경찰이다. 가끔씩 세계여행 중에 만나는 풍경이지만 오늘 스페인에서 만나는 말과 경찰도 나의 눈에는 신비롭게 다가온다. 공원을 돌며 관리하는 고풍스런 풍경이다.
세비야 스페인 광장
세비야 마리아 루이사 공원
* 세비야 대성당과 히랄다 첨탑
오랫동안 머물러 살았던 아랍인의 잔재인 유태인의 거리를 걸어서 갔다. 좁은 키스 골목과 꽃과 줄기 식물들이 살아서 창문과 집의 벽면으로 타고 흐르는 생물의 거리, 유태인 마을은 그 옛 정취로 살아서 스페인의 한 골목을 지키고 있다.
세비야 대성당은 세계에서 가장 큰 고딕 양식의 건축물이다. 유럽에서는 세번째로 큰 성당이며 기네스북에 등재되어 있다. 콜롬버스의 무덤관, 대성당의 그림들, 조각품들, 스테인드 글라스 유라창 등 돌고 돌아도 멈추지 않는 성당의 역사적 정취가 장엄하다. 1401년부터 1519년까지 120년 동안 건축되었다. 26명의 장인들이 1천명이 넘는 목재 동상을 만들어 금을 입혀 세웠다. 44개 소성당이 있어 실제로 예배도 드리고 있다. 우리도 잠시 앉아 종교의식을 보았다. 스러지지 않고 옛 모습 그대로 존재하는 대성당은 비록 타국의 유물이지만 세계적 보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당의 맨 꼭대기 청동 히랄다 첨탑이 오롯하다. 세비야에서 가장 높은 98m의 탑으로 시내 어느 곳에서나 보인다. 로마의 돌을 기초로 만든 전망탑이다. 상단에는 2천Kg의 청동 조각상이 있다. 34층의 오르막길을 숨 막히도록 돌며 걸어 올랐다. 정상에 오르고 보니 아름다운 스페인 4위 도시 세비야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해맑은 태양과 색색의 고운 주택과 건물들이 태양의 나라에서 보는 하나의 예술적 명화다. 천정에는 르네상스식의 거대한 종이 매달려 있다. 12세기에 이슬람의 영향력으로 건축되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기독교 양식으로 바뀌어 풍향계를 설치한 종탑으로 개조되었다. 히랄다는 스페인어로 바람개비란 뜻이다. 너무 높아서 바라보기조차 아득한 첨탑이다.
세비야 대성당 정원의 오렌지 나무는 외인을 반긴다. 호텔에서나 식당에서도 오렌지는 마음껏 먹을 수 있도록 풍성하게 베풀어준다. 그 맛은 달고 상큼하여 우리나라에서 먹던 맛과는 차이가 난다. 싱싱하고 당도가 높다. 이곳 세비야 대성당에서는 오렌지 나무로 꾸민 정원을 보았다. 줄지어 늘어선 오렌지 나무가 한국의 감나무 농장, 또는 사과나무 농장 같다. 덩실덩실 맺힌 열매와 땅에 떨어져 뒹구는 오렌지들, 내 조국에서는 볼 수 없는 진풍경이기에 두 손으로 가득 주워 오렌지의 숨결을 느끼며 이국의 과일향기에 물씬 젖어본다.
스페인 세비야 대성당
세비야 대성당 히랄다 첨탑
* 코르도바 메스키타 회교사원
코르도바는 인구 33만명의 아담한 도시다. 다리를 사이에 두고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나누어져 있다. 과달기비르강의 다리 끝에 유사시 경보 초소용 건물로 망루였던 라깔라오라 탑을 보며 다리를 건너 구시가지로 갔다. 비가 많이 와서 강물은 흙을 풀어놓은 것 같은 황토물이다. 2000년의 역사를 지닌 도시다. 한 도시를 지키기 위해 세웠던 작은 성을 보는 것이다. 시민들은 여유롭게 강변을 걷고 있다. 과달기비르강은 세비야에서도 보았다. 길이도 130Km로 길고 광폭의 강이다. 여기서 만난 강도 우람하다. 2100년 전의 다리를 건너고 있다. 코르도바에서는 라파엘이라는 이름의 소유자가 70%다. 수호천사라서 그렇다. 다리의 중앙에도 라파엘 천사 동상이 서 있다. 지진 났을 때 도와줬다고 세운 것이다. 이것 말고도 곳곳에 수호천사 라파엘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 도시는 이슬람 왕국의 수도였던 곳이다. 그후 기독교 세력으로 쇠퇴하였지만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로마 유적지가 많은 나라가 스페인이다. 이탈리아와 별 차이가 없다. 땅을 파다가 로마 유적이 나오면 공사를 중단한다. 그런 곳이 많다. 과달기비르강 다리를 건너 구시가지에 들어서자 육중한 건축물이 오랜 역사의 향취를 풍긴다. 마차도 달리고 시대를 거슬러 역사를 재현하고 있다.
메스키타 회교사원은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접목된 사원이다. 그래서 이름도 회교사원과 대성당 두가지로 부른다. 현재는 성당으로 아랍인의 입장을 불허한다. 그 옛날 2000여년 전, 코르도바의 전성기를 그대로 품고 있다. 정원에는 아랍인 상징인 오렌지, 사이플러스, 올리브, 종려나무(야자나무)가 골고루 심겨져 있다. 예배드리기 전에 모인 곳이다. 사원 안에는 야자나무를 상징하는 야자나무 모양의 기둥이 850개 있다. 기둥 숲이다. 코르도바 번성기 때의 무늬가 곳곳에 남아 있다. 회교사원 안에 기독교 성당이 있어 두 종교의 조화를 이룬 모습이 아름답다.
오랜 역사를 품은 도시 코르도바의 메스키다 사원 주변은 모두 유태인 마을 지구다. 세비야의 유태인 거리는 너무 꾸며서, 코르도바의 유태인 거리가 진짜로 인정받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곳 거리는 정통 유태인 마을의 거리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좁은 골목과 건물 외벽에 매단 꽃화분이 아기자기 하면서 참으로 아름답다. 아랍인의 체취가 배인 도시다.
스페인 코르도바 과달기르비강변의 메스키타 회교사원
* 그라나다 알함브라 궁전
그라나다는 해발 770m 지역으로 아름다운 안달루시아 지역이다. 그라나다 주 전체의 인구는 100만명이고 도심의 인구는 23만 4천명으로 안달루시아 17개주의 수도 역할을 하는 도시다. 시에라네바다 산맥의 일출이 비경이다. 산정 설경도 장관이다. 눈 덮인 시에라네바다 산맥 기슭에 위치한 그라나다(Granada)는 700년경부터 스페인을 8세기 동안 다스렸던 이슬람 왕국의 최후 거점지였다. 그때의 역사 유적이 도시를 빛내고 있다. 그라나다는 석류란 뜻의 이름으로 선택받은 도시다. 석류가 많이 생산된다. 480m의 높은 산이 있다. 얼음이 녹지 않는 산정이다. 지중해도 50Km의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다. 산과 바다를 공유하여 스키도 타고 배도 탄다.
아침 일찍 알함브라 궁전으로 갔다. 멀리 보이는 산이 우람하고, 구름도 우람하다. 그라나다의 새벽 풍경은 그렇게 열리고 있었다. 알함브라 궁전(나사렛 궁전)은 9시 30분까지 입장해야 한다. 그라나다는 세계인이 많이 찾아오는 관계로 명소가 예약제도다. 알함브라 궁전 관람을 예약하지 않으면 입장불가다. 알함브라 궁전은 스페인을 지배하던 최후의 이슬람 왕조가 스페인 국민들에게 1492년 1월 콜롬버스의 신대륙 발견이 있던 해, 카톨릭 왕에게 넘겨준 궁전이다. 1200년대부터 8세기 동안 지배당한 이슬람에서 벗어나 기독교를 국교로 하는 스페인이 탄생된 것이다.
알함브라 궁전은 아랍어로 붉은 성, 빨간 궁전이란 뜻이다. 석벽이 붉은 철을 포함하고 있어서 그렇다. 14세기에 지어진 이 건물은 세 개의 정원을 중심으로 정원 형식의 건축물이다. 1800m의 망루 탑이 32개가 있고 알카사바 성채, 왕궁, 카를로스5세 궁전, 나사렛 궁전으로 구성되어 있고 헤네랄리페 정원, 천국의 정원, 흰색 여름궁전이 주변에 있다. 그라나다의 상징이자 이슬람 문화의 최고 걸작품이다. 1492년 이사벨 여왕과 그 남편 페르난도가 그라나다를 정벌했다. 그 당시의 수도는 똘레도였다. 콜롬버스가 왔을 때 항해 지원을 중시했기 때문에 이사벨 여왕은 자신의 보석함을 주었다. 콜롬버스는 이탈리아 제노바 사람이다. 직물을 짜던 가장이었다. 20세 때 항해를 시작하였는데 편지를 쓸 때 로마 글이 아니라, 스페인 글씨로 바르셀로나 언어를 사용했다. 포르투칼 귀족처녀와 결혼했다. 콜럼버스가 이사벨라 여왕의 후원으로 신대륙을 발견한 시점과 맞물려 있고 이때부터 무적함대로 불리는 근대 스페인이 시작되었다.
알함브라 궁전은 30분 동안 400명 이상 입장금지다. 하루에 6000명만 입장시킨다. 궁전 안에는 여러 개의 방이 있다. 이사벨 여왕이 지은 방도 있다. 옛생활 유적지, 왕가의 집기들, 왕이 사용하던 방, 아름다운 이슬람의 벽면 문양, 물이 고인 정원 등등 잘 보존된 궁전이다. 돌고 돌아 궁전에 들어갔다. 미로를 만들어 적군이 들어올 때 분산시켰다. 할렘과 사랑했다하여 36명을 죽인 방도 있다. 할렘 궁전은 여자만 출입이 가능했으며 24개의 기둥이 있다. 목욕탕, 귀대고 속삭이던 비밀의 방도 있다.
현재 알카사바 성채에는 병사들이 지키고 있고 망루에 올라가 그라나다의 전경을 본다. 이슬람인들은 돈이 있어도 없는 듯한다. 겉은 허술해도 속은 화려하다. 문양이 곱다. 대리석 가루와 석회 가루를 섞어서 벽면의 무늬를 조각했다. 이슬람 역사의 산실이며 스페인의 기름진 명소다.
그라나다 도시의 산자락 아래 알함브라 궁전과 여름 궁전 사이 하얀 마을이 알바이신 유태인 지구다. 알함브라 궁전과 마주보는 언덕에 위치하고 있는 알바이신 지구는 13세기에 처음 지어졌으며 30여개의 회교사원이 있다. 도시의 교회 대부분은 이곳에 만들어졌다. 자갈이 깔린 골목에는 집시들이 있다. 바깥세상으로부터 은둔시키는 높은 벽들은 이곳의 특징이다. 알함브라 궁전에서 바라본 마을은 청초하고 아름다웠다. 곳곳에 우람한 사이플러스 나무가 솟구쳐 있어 더욱 고운 풍경이다.
스페인 그라나다 알함브라 궁전 전경
* 그라나다 헤네랄리페 정원
헤네랄리페 정원은 14세기 초 그라나다 성주의 여름궁전이 있는 곳이다. 알함브라 궁전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고 입구에서부터 사이프러스 나무의 길이 웅장하게 뻗어있다. 작은 운하 주위에서 뿜어내는 크고 작은 분수와 흐르는 물이 한결 시원함을 느끼게 한다. 계절에 따라 아름다운 꽃들이 번갈아 핀다. 매일 아침이면 신선한 생선 시장이 열리고 있다. 높은 언덕 위에 있어 그라나다 시내가 다 내려다보인다. 저 건너 알함브라 궁전도 비경으로 보인다. 여행의 여독을 풀어주기에 충분한 명소였다.
여름궁전과 헤네랄리페 정원, 알함브라의 궁전 분수는 대단하다. 시에라네바다 산맥의 물줄기가 우물을 많이 형성하고 분수대의 물을 대준다. 알함브라 궁전은 오아시스처럼 물과 뗄 수 없다. 직사각형의 연못에서 분무하는 분수는 헤네랄리페 정원의 백미다. 왕이 산책하던 정원이다. 타레가는 아름다운 이 분수 앞에서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작곡했다. 사랑을 속삭이는 애절한 곡이다. 이 분수에서 또르르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에서 영감으로 탄생시킨 명곡이다. 아직도 멈추지 않는 사랑의 물방울은 이곳을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평화와 행복을 선사한다. 버스로 이동할 때 귀에 낮은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들으며 갔다. 분수의 물방울 소리를 상징하는 아름다운 선율이 환상적이었다.
알함브라 궁전과 헤네랄리페 정원은 서로 마주보며 비경을 선사한다. 언덕에 위치하여 저 아래로는 그라나다 시가지가 또한 비경으로 다가온다. 헤네랄리페 정원에서 본 알함브라 궁전은 상당히 큰 면적의 성으로 둘러싸여 있다. 건축물도 웅장하고 앉은 폭도 넓다. 세월을 거슬러 이슬람 왕조의 전성기를 바라보고 있다.
시에라네바다 산맥의 줄기가 걸쳐 있는 그라나다의 들녘은 비경이다. 구름 드리운 산정의 얼음과 빙원도 멀리서 한껏 명화를 그려낸다. 산과 마을의 조화가 정겹고 아름답다. 그라나다에서 론다로 떠나고 있다. 그라나다 도심을 벗어나자 잘 가꾸어 놓은 농토와 아몬드 나무 울타리, 거대한 올리브 농장이 전개된다. 또한 종이를 만든다는 올곧은 나무가 아직 잎을 피우지 않은 채 농장에서 군락을 이루며 하늘로 솟구쳐 있다. 스페인은 각 지역마다 들녘에 심은 나무 종류가 다양하다. 산을 떠나지 않는 풍경이 어쩌면 내 조국의 어느 산촌 마을과 유사하여서, 참으로 사랑스런 그라나다의 들녘이다.
그라나다 헤네랄리페 정원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분수
* 론다 투우장과 누에보 디리
론다는 스페인 남부도시로 인구 3만 7천명, 해발 740m에 위치한 말라가주의 작은 도시다. 로마가 지어준 협곡 사이의 절벽 도시로 길이 험해서 잘 찾아오지 않는 도시다. 론다 시가지를 한동안 걸어 내려갔을 때 절벽 위에 함성 같은 다리가 있었다. 따호강 협곡의 누에보 다리로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를 잇고 있다. 깊은 연륜을 말해주는 늙은 절벽의 살점과 절벽을 타고 오르는 이끼와 풀들, 선인장이 새로운 세계를 이루고 있다. 그 주변에 투우장이 있다.
스페인은 투우로 유명한데 그 유래는 농사 풍년 기원에서다. 이곳 론다 투우장은 18세기 말에 건축한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스페인 최초의 투우장이다. 1572년에 필립이 기마학교를 세운 것이 투우장의 탄생 동기다. 3월에서~10월까지 매주 일요일에만 투우장을 개장한다. 스페인, 포르투칼, 중남미에서 투우를 즐긴다. 리베리아 반도 모양도 소가죽 모양이다. 소에서 머리와 꼬리를 떼면 똑같다.
스페인에서 투우는 스포츠가 아니라 문화예술로 취급한다. 투우사 3명이 20분 동안 소 6마리를 사망시킨다. 소 한마리가 500~600Kg이다. 60Kg의 인간이 거대한 소와 대결한다. 말이 소를 무서워하므로 눈을 가리고 갑옷을 입혀서 타고 들어가 소에게 접근한다. 첫번째 투우사가 투창을 하면 다음 투우사가 나와 투창하고 이런 식으로 소를 쓰러지게 한다. 가장 빠른 시간에 죽여주는 것이 투우의 예술이다. 투우장의 정문과 후문 등을 자세히 들러보았다. 커다란 소동상이 금방이라도 투우장으로 뛰어 들어갈 기세로 서 있다.
마드리드에도 유럽 제1의 가장 큰 투우장이 있는데 24000명을 수용한다. 매우 웅장하다. 론다 투우장보다 훨씬 건물의 미적 감각도 뛰어나고, 웅장하다. 도로의 한 블록을 다 차지한 것 같다. 투우시즌이 아직 아니어서 내부에 들어가진 못했지만, 그 곁을 지나는 것만으로도 스페인의 투우가 얼마나 사랑받는 게임인지 알 수 있었다. 소들은 어차피 한번은 죽어야 하는 운명이기에 장렬히 사람의 손에 죽는 것을 명예로운 죽음으로 여기고, 사람은 가장 짧은 시간 안에 소를 죽여주는 것이 소의 마지막 고통을 덜어준다고 여긴다. 스페인에서는 투우장에서 소가 죽는 것을 결코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종의 재미난 경기로 여긴다. 스페인의 고유한 문화다.
스페인 론다 투우장
스페인 론다 따호강 누에보 디리
* 피카소의 고향 말라가 예쁜 산언덕 마을
말라가는 피카소의 고향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오기도 한다. 또한 휴양지로 유럽의 부호들이 많이 온다. 산이 없어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춥다. 인구 85만 명의 작은 도시지만 고속철 아베가 있어서 마드리드까지 2시간 걸리는데 출퇴근이 가능하다. 휴양지라서 영어, 불어까지 소통이 잘 된다.
말라가는 예쁜 도시다. 산언덕 예쁜 마을이 더욱 화가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피카소는 1885년에 탄생하여 91살까지 살았다. 말라가 중산층의 자식으로 말라가에서는 10년 살고 떠났다. 프랑스 파리에도 거주하였다. 아버지가 미술교사였다. 파블로 피카소는 아버지 그림을 죽은 거라고 했다. 어려서부터 특이한 기법으로 그림을 그렸다. 피카소가 8세 때 투우장에 갔다가 소에 칼이 찍히는 투우 장면을 그림으로 그렸는데 너무 잘 그려서 아버지는 피카소를 미술교육 시켰다. 이름이 파블로 루이 피카소인데 다 떼어내고 어머니 성인 피키소만 사용했다.
피카소는 살아서부터 유명해져서 생시에 돈을 많이 벌었다. 거부였다. 바 르셀로나에서도 살았다. 피카소의 가장 유명한 그림은 '게르니카'다. 거대하게 큰 그림이다. 프라도 미술관 피카소 그림 전시장에 있다. 게르니카 작은 마을에 장이 섰는데 프랑코 총독이 폭격하여 2천명이 부상당했다. 이 분노를 '게르니카'라는 마을 이름을 붙여서 그림으로 그렸다. 말, 남자, 병사, 도망가는 여자, 소(스페인 상징), 꽃, 칼이 그림 속에 있다. 프랑스 전시에서 유명해지자 현재는 마드리드 미술관에 전시하고 있다. 영국, 미국을 거쳐서 본국에 온 것이다. 흑색과 백색만 사용해서 그렸다. 스페인 작은 마을 말라가, 피카소가 나고 자란 마을을 밟고 떠난다. 줄기차게 늘어선 산언덕의 하얗고 예쁜 마을이 가슴에 꽃처럼 들어앉아 기억되고 있다.
피카소의 고향 말라가 예쁜 산언덕 마을
* 콘수에그라에 있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풍차
말라가에서 콘수에그라 가는 들녘은 한국의 풍경과 유사하다. 계속 산길로 달린다. 언덕 위에 소동상도 자주 만난다. 스페인 상징 동물이다. 스페인은 산은 산 끼리, 평지는 평지 끼리 모여 있다. 남부는 대부분 산이고 중북부는 들이다. 중부에 들어오니 점점 산이 없다. 초지와 농토의 평원이 이어진다.
스페인은 소설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의 나라다. 학창시절에 읽으며 참 많이 웃었던 그 소설을 탄생시킨 풍차 마을 콘스에그라에 왔다. 버스가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멀리 얕으막한 산능선에 풍차가 줄지어 서 있다. 풍차는 한 대가 아니고 여러 대가 거대한 모습이다. 세계여행은 책 속에서 간접 체험했던 것들을 실제로 눈앞에서 보는 산교육을 체험시킨다. 돈키호테를 만나는 가슴 벅찬 순간이다.
세르반테스는 마드리드에서 30Km 떨어진 곳에서 태어났다. 가난하고 계급이 낮은 선비 가문이다. 기사에 대한 책을 많이 읽다가 하인 기사를 데리고 나가서 돈을 벌자고 했다. 돈키호테에는 600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세르반테가 사랑했다는,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돌시니아 여인(귀족부인)이 있다. 그 여인상이 마드리드 스페인 광장의 돈키호테 동상 곁에 있다.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콘수에그라의 풍차 마을이다. 그래서 이곳에 오는 것이다. 풍차를 보고 괴물이라고, 풍차에게 '네가 마법에 걸려서 풍차로 보이는 거야'라고 달려가서 풍차에 부딪히는 장면이 나온다. 농사꾼 하인 산쵸 판사의 판사는 멧돼지라는 뜻의 성이다. 세르반테스는 왼손을 잃는다. 그의 동상마다 반드시 망또로 손을 가려 손이 오그라들어 있다.
버스가 산언덕까지 올라와 우리를 내려주었다. 바람이 심하게 분다. 풍차는 상당히 크다. 날개가 부러진 것도 있다. 풍차가 옛날에는 밀을 찧는 방아 역할을 했는데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풍차 앞에서 명작 소설을 다시 음미한다. 한사람의 작가가 남긴 작품으로 콘수에그라의 풍차는 세계인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
돈키호테 풍차마을 콘수에그라는 산이 없다. 산이 없는 지역이어서 들녘은 광야다. 돈키호테가 이 마을을 지날 때는 매우 더웠을 것이다. 그러니 풍차가 괴물로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괴물이라고 달려들어 부딪쳐 넘어졌다는 풍차들이 산능선에서 그날을 전시하고 있다. 돈키호테가 로시난테 말을 타고, 산쵸를 당나귀에 태우고 우스꽝스럽게 걸었을 마을 전경을 바라본다. 이곳에서는 사방이 다 보인다. 기름진 땅의 농토와 군락을 이루고 사는 붉은 지붕의 마을, 뽀얀 길, 저 멀리 우람하게 앉은 산 등등 탁 트인 정경이 풍요롭다.
스페인 콘수에그라에 있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풍차
* 똘레도 구시가지 대성당
똘레도 시가지에 들어왔다. 스페인의 가장 중부지방으로 동에서 500Km 지점이다. 스페인은 남과 북의 거리가 1000Km다. 필립2세가 수도를 똘레도에서 마드리드로 이동시켰다. 똘레도는 언덕 위 성을 쌓은 곳이 구시가지고 그 밖은 신시가지다. 눈으로 보아도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는 구분된다. 따호강을 경계로 보아도 강 밖은 신시가지다. 똘레도는 경주 같은 도시다. 똘레도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도시다. 건물 하나하나에 역사의 향기가 물씬 배어 있다. 상가도 화사한 기념 물건들로 거리를 밝힌다. 이곳은 도로가 좁아서 차량진입이 불가능하여 구석구석 많이 걸으며 보았다. 스페인의 한 영토를 마음껏 걷는다는 것도 뜻깊은 여정이다.
구시가지 광장은 시장이 열리던 곳이다. 그래서 시장 광장이라 불렀다. 현재는 여러가지 행사를 하는 곳이다. 거리의 악사들도 흥에 겨워 연주하고 있고, 돈키호테의 명장면을 대리석 의자에 그려 놓았다. 복권의 나라 스페인을 상징하듯 상가 앞에서 복권을 몸에 주렁주렁 붙이고 마네킹처럼 서 있는 남자도 있고, 산책 나온 시민들도 있고, 이 광장은 아름다운 풍경이 이어진다. 주상복합상가 건물이 중세의 육중한 자태를 드러내며 시선을 이끈다. 똘레도의 정감어린 광장이다.
똘레도 구시가지 산토토메 교회에는 똘레도 출신의 화가 엘 그레꼬의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라는 그의 대표 명작 진품이 있다. '천지창조', '최후의 만찬'과 함께 세계3대 성화인 이 그림은 1586년 작품으로 5백년이 넘었는데도 색상이 그대로다. 상하 2단의 그림으로 윗부분은 천상계, 아랫부분은 지상계를 상징하여 그렸다. 중앙에는 천사가 팔을 감싸 안은 것이 있는데 이것은 오르가스 백작의 영혼을 상징한다. 세계인들이 이 그림을 보기 위해서 모여든다.
똘레도 대성당은 프랑스 고딕양식으로 1226년~1493년까지 267년 동안 건설된 가장 큰 성당이다. 1493년에 완공된 스페인 카톨릭의 산실이다. 화려하면서도 장엄한 아름다움이다. 길이 113m, 폭 57m, 높이 45m의 거대한 성당이다. 내부는 18세기까지도 계속 건설되었다. 대성당과 소성당이 28개다. 대성당은 종탑 아래 보물실로 성직자 회의실이다. 똘레도 대성당 내부에 똘레도 역대 추기경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스테인드 글라스와 큰 기둥들이 웅장하다. 내전 때 스테인드글라스의 유리창이 일부 파손되었는데도 투명유리창으로 달아 놓았을 뿐 보수를 안 하고 그대로 두었다. 성모 마리아는 예수의 운명을 예견한듯 모두 슬픈 표정인데, 여기는 웃으며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가 있다. 성녀가 사제실에서 사제복을 선사하는 부조상도 있다. 왼쪽은 시계의 문, 중앙은 면죄의 문, 오른쪽은 사자의 문으로 입구에서부터 독특하다. 높은 구시가지의 중앙에서 빛나는 건축물로 깊은 역사를 품고 있다.
높은 성벽이 예사롭지 않은 도시임을 암시한다. 윗부분은 뾰족하게 스페인 곳곳 성벽에서 본 것과 같다. 똘레도성 곁을 버스가 지날 때 입구에 알폰세6세가 하얀 옷을 입은 동상으로 서서 성을 지키고 있다. 성문을 들어설 때, 수백년 세월을 거슬러 오르는 환희였다. 성을 좀더 쉽게 오르고자 성벽 밖에 에스컬레이터를 세웠는데 홍수로 벽이 무너져 훼손된 모습을 보았다. 스페인의 홍수가 얼마나 심했는지 말해주고 있다. 성벽을 따라 차들이 달리는 현대적인 모습과 함께 비경이다.
똘레도 성 전망대에 가서 성의 전경을 모았다. 따호강 물줄기가 성을 휘감아 흐른다. 따호강과 함께 요새의 도시 똘레도는 비경이다. 구가지에서는 전경이 다 보이지 않던 똘레도 성당이 넓은 폭으로 높은 첨탑으로 자리하고, 멀리 산토토메 교회도 보이고 단단하게 성을 지키며 모여 사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버스가 이곳에 한동안 정차하여 내려서 세계문화유산의 도시 똘레도 구시가지를 가슴 깊이 담아왔다.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는 역사의 도시 스페인 똘레도, 그 안과 밖을 다 보았으니 참 행복한 순간이다.
전망대에서 본 똘레도 구시가지 대성당
*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에 진입하자 스페인에 오로지 1개뿐인 엘꼬트레 국영백화점의 초록색 광고판이 보인다. 서울의 한강격인 만사다레스강도 지난다. 마드리드는 스페인의 수도다. 마드리드 7개주의 인구가 600만 명이다. 수도권에는 350만 명이다. 스페인에서 가장 큰 도시다. 스페인은 하늘이 높다. 공해로 지상 가까이는 뿌옇다. 날이 건조해서 꽃이 만발하면 알레르기가 심하다. 마드리드는 도심과 연결되는 순환도로가 3개 있다. M30, M40, M50 도로다. 우리는 지금 M30 순환도로를 타고 시내로 들어가고 있다.
2004년 알카에다 폭탄테러 사건이 났던 기차역이 있는 곳이다. 기차 폭발로 민간인 198명이 사망했고 1200여명이 부상당한 큰 사건이었다. 이라크 전쟁에 동조하거나 미국을 협조하는 전 세계국가에 대한 무슬림의 보복 사건으로 보고 있다. 이곳에서 스페인 사람들은 자주 데모한다. 그래서 차량진입 금지로 걸어서 식당에 갔던 것이다. 기차역을 지나며 소슬했다. 지구상에 다시는 이런 처참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길 빌었다.
프라도 미술관은 관람이 까다로워서 배낭이나 긴 우산은 입장 불가다. 2004년 알카에다 폭발사고 후부터 사진촬영 금지구역이 많아졌다. 미술관 입구에 스페인의 대표화가 고야 동상이 있다. 외부는 사진촬영이 가능하여 고야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후 카메라는 깊이 넣고 입장했다.
프라도 미술관에는 소장된 그림이 많다. 찰스3세가 자연 미술관으로 하려고 했는데 왕의 그림을 전시했다. 현대와 고전 2관으로 19세기에 개관했다. 유럽의 대영박물관과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과 함께 세계3대 미술관이다. 대영과 루브르는 자국의 작품이 아닌 것이 많은데 프라도는 자국의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어 가치가 크다고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레꼬, 고야 등 유명화가 그림을 수집해서 5천점의 그림과 2천점의 판화, 7백개의 조각상을 소장하고 있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현지 가이드 카르멘 여인과 함께 관람했다. 그림들과 조각상들이 참 많다. 성부, 성자, 성신(비둘기)의 그림도 있다. 이 나라 사람들의 머리는 어려서는 금발이다가 은발, 흑발로 변화하는데 그런 모습이 그림에 잘 나타나 있다. 동일한 사람의 그림이 어린 시절의 그림에는 금발로 그렸고 성장한 시절에는 은발, 흑발로 변화 모습을 잘 묘사해 놓았다. 그 당시의 가난한 아이들의 모습 그림도 있다.
고야 그림이 많다. 까를로소4세 가족 초상화도 있다. 화려한 궁중생활상, 그것을 지켜보는 증인격의 고야 자신도 그림 속에 항상 있다. 나폴레옹 살해 장면도 있다. 고야의 초기 그림은 흐리고, 말기 그림은 어둡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림이 있는데 피를 그대로 재현했다. 그 당시에는 혼혈결혼으로 난쟁이들이 많았는데 그런 그림도 있다. 역대왕 그림, 카드놀이, 하층계급의 직녀들, 상층계급의 예술가의 그림도 있다. 프라도는 푸른 잔디의 정원, 푸른 대지란 뜻이다. 옛날 궁중정원으로 프라도의 귀족들이 산책하던 곳이다. 역사적으로 뜻 깊은 장소에 지은 훌륭한 미술관이다.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 마드리드 스페인 광장의 세르반테스 기념상
여기는 강북이 부자, 강남이 가난하다. 스페인은 다 그렇다. 서울과 반대다. 도심의 건물들이 높고 좋다. 마드리드의 건물은 고풍스럽다. 내부만 수리하며 산다. 마드리드는 어머니와 물이란 뜻이다. 물이 그만큼 많다. 카를로스3세 전에는 초라했던 도시였는데 그후 도시계획으로 도시가 성장했다. 지하철이 무조건 1유로다. 공항행만 2유로다. 눈이 오면 아이들은 학교에 안 간다. 바르셀로나는 눈이 와서 오늘 학교에 안 간다. 마드리드 역사가 담긴 풍요의 여신상 분수대를 지나고 데모광장도 지났다. 19세기에 만든 도시로 갑부동네다. 마드리드 도심의 세르반테스 어학원도 보고, 마드리드 상징의 문도 보고, 방송타워도 보았다.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는 장엄한 도시다.
마드리드의 스페인 광장은 1916년 세르반테스(1547년~1616년) 사후 300주년을 기념하여 만든 광장이다. 스페인 역사 기념광장인 셈이다. 직사각형의 큰 연못 앞에 말을 타고 있는 돈키호테 동상과 당나귀를 타고 있는 그의 하인 산쵸판사 동상이 있다. 그들 곁 조금 떨어진 곳에 돈키호테의 가장 이상적인 여인 돌시니아 동상도 있다. 그녀는 알려지지도 않았고, 소설에도 없지만 세르반테스가 사랑했던 여인이다.
스페인 광장은 스페인 곳곳에 있다. 우리는 세비야의 스페인 광장과 마드리드의 스페인 광장을 보았다. 세비야에 있는 스페인 광장은 이슬람 건축물이 웅장하여서, 마드리드의 스페인 광장은 돈키호테의 동상이 유명하여서 찾는 곳이다. 우스꽝스런 장면을 수없이 연출하는 소설 돈키호테는 그 당시 기사사회에 대한 시대풍자 소설로 수백년이 지났어도 세계인의 가슴에 살아있다.
마드리드 스페인 광장의 세르반테스 기념상
마드리드 스페인 광장의 세르반테스 기념상 근경
* 마드리드 마요르 광장과 태양의 문
마요르 광장은 규모가 장엄하고, 건축물이 빼어난 아름다움이다. 펠리페2세가 스페인의 수도인 마드리드의 중앙에 광장을 짓도록 하였으나 그의 아들인 펠리페3세 때 지어졌다. 1602년에 스페인의 다섯 성인을 기리는 행사를 하면서 마요르 광장을 세상에 알렸다. 이곳은 17세기~19세기까지 사형집행, 왕가결혼, 투우장 등의 행사장이었다. 1970년부터 차량통행 금지다. 광장 중앙에는 펠리페3세 기마동상이 있다. 시민들이 모여 휴식하고 있다. 주변에 아름다운 아파트 건물이 많다. 주변 아파트가 예술적으로 아름답다. 바로 앞에는 왕궁이 있어 문 앞에서 내려다보인다.
태양의 문은 마요르 광장에서 걸어서 갔다. 경찰도 많이 배치되어 시민의 안전을 지켜주고, 무질서 속에서도 질서가 아름답게 흐르고 있다. 반원을 그리며 건물이 빼어난 건축미로 늘어서 있다. 건물 사이로 문이 7개다. 열린 골목길이 상당히 크다. 한국의 명동격인 거리로 사람들의 행렬이 빼곡하다. 스페인 각 방면의 도로기점 표식이 있다. 카를로스3세 동상이 광장 중앙에 있다. 가장 인상적은 것은 거리의 예술가들이 자신의 행위예술 등을 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몸에 진흙을 칠하여 조각상처럼 앉아있는 두 사람이 시선을 끈다. 마드리드의 아름다운 명소다.
스페인 마드리드 마요르 광장
스페인 마드리드 태양의 문
* 사라고사 필라르 대성모성당
스페인 북부로 가는 길은 멀리 설산이 보이고 점점 우리나라와 땅 모습이 유사하다. 다르다면 너른 평원과 초지, 올리브 나무, 고속도로변의 소동상 그리고 풍력계가 많다는 것이다. 스페인은 유럽의 동양이다. 지붕의 기와형태, 생활모습 등이 묘하게 닮은 나라다. 도로가 구도로여서 좁다. 주택, 건물을 그대로 두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도 작은 차를 선호한다. 한국과 유사한 산줄기, 산능선이 계속 이어진다. 스페인에서 보는 한국은 대단한 나라다. 그 작은 나라에서 경제가 세계12위라는 것에 대하여 놀라고 있다. 여행 중에 버스 안에서 그 나라의 풍경을 보는 것은 그 나라의 풍습과 문화까지도 알게 하는 것이라서 소중한 시간이다. 나는 지금 마드리드에서 사라고사로 가며 남유럽의 스페인을 눈으로 배우고 있다.
스페인에는 검은 소 동상이 많다. 모두 92마리가 있는데 대부분 안달루시아 지방에 광고용으로 세워져 있다. 맨 처음 본 것은 말라가 휴게소 언덕의 맥주 광고용 소였다. 관광객에게는 투우 광고, 자국민에게는 술 광고가 많다. 기타를 든 소동상도 있다. 포르투칼은 정의, 믿음을 상징하는 전설의 닭동상이 많은 것과 스페인은 투우의 나라를 상징하는 소동상이 많은 것이 인상적이다.
사라고사는 화가 고야의 고향이다. 또한 바실리카 필라르 대성모성당이 사라고사에 있다. 다른 성당은 그 지역 대표성당인데 이 성당은 스페인 대표성당으로 세계3대 성당이다. 스페인의 몬세트라. 산티에고, 사라고사는 3대 성지다. 그리스 로마시대 성벽 잔재도 있다. 로마가 711년부터 1400년대까지 스페인을 700년간 지배했기 때문이다.
에브로 강변에서 성모 마리아가 발현했다. '내가 세상 끝날 때까지 여기 있겠노라, 성당을 지으라'는 뜻을 받들어 예수 사후, 야보고가 이 성전을 에브로 강변에 지었다. 사라고사에 들어서자 에브로강과 함께 성당은 비경이다. 첨탑이 오롯하고, 성당도 상당히 아름답다. 고야 그림인 천청 벽화가 유명하다. 포탄 2개가 성당을 뚫고 들어 왔는데도 천정 벽화는 무사했다. 필라르는 기둥이란 뜻이다. 17세기~19세기까지 고딕양식으로 웅장하게 건축했다.
내부를 둘러보고 나왔을 때, 저녁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했다. 성당 앞에는 드넓은 필라르 광장이 있다. 그것은 필라르 대성당의 크기를 나타내기도 한다. 광장의 끝에서 끝이 성당 건물이기 때문이다. 사라고사가 그리 큰 도시가 아닌데 성당도, 광장도 상당히 크다. 사라고사는 이 성당 하나만으로도 세계인을 다 부른다. 광장도 대단히 아름답다. 물 폭포도 조성해 놓고, 곳곳에 조각품도 전시해 놓아 그윽한 정경이다. 로댕의 조각전 안내문과 생각하는 사람 조각상이 광장 앞 상가 거리에 있어 예술 향기를 더욱 짙게 발한다.
사라고사의 도심거리에는 동상들과 꽃, 웅장한 건물들이 유럽의 향기를 마음껏 발하고 있다. 이곳 사람들은 영어는 못 알아듣고 하지도 못한다. 슈퍼를 찾는데 영어로 물었더니 못 알아듣는다. 고개를 저으며 그냥 간다. 또 우리는 가게에서 물건을 살 때 주인의 말을 못 알아듣는다. 그냥 손으로, 표정으로 말하고 느끼며 소통한다. TV방송을 켜도 이해하기 힘 든다. 영어방송은 없다. 스페인은 CNN, BBC 방송도 모두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다. 스페인어에 가깝다. 세상에는 참 언어라는 그 나라의 특징이 있어 아름답다. 이질감이 있지만 그래도 다 통한다. 느낌과 감정은 동일하다.
사라고사 도심 거리를 잊지 못하리라. 조각상이 수없이 늘어서서 중세 유럽으로 이끌던 고풍스런 환상의 거리, 꽃화분이 총총 걸려 저녁 무렵 짙은 낭만을 가슴 절절히 안겨주던 거리를 내 늙어 감성이 시들어질 때, 나는 오늘을 회억하며 행복하리라.
스페인 사라고사 에브로 강변의 필라르 대성모성당
* 바르셀로나 몬주익 언덕 황영조 기념비
바르셀로나에 가서는 몬주익 언덕, 구엘공원, 상가족성당, 람블라스 거리, 카사밀라를 보았다. 스페인 바르셀로나는 지중해와 접해 있다. 지중해 바다가 비경이다. 바르셀로나는 지중해성 기후라서 겨울에도 영하가 없다. 연평균 온도가 12도다. 그런데 금년은 이상기후로 눈이 없는 도시에, 눈까지 많이 왔다. 며칠 전에는 눈이 무척 많이 내려 교통마비였단다. 스페인은 제설차가 없어서 저절로 눈이 녹기 전에는 대책이 없단다.
바르셀로나 도심을 가로지르며 점점 높은 곳으로 간다. 유태인 무덤이 있던 언덕이 몬주익 언덕이다. 몬주익은 유태인 무덤이 있는 곳이란 뜻이다. '몬'은 '산', '주익'은 '무덤'이다. 173m의 산언덕이다. 1929년에 짓기 시작하여 1982년 수리를 거쳐 1992년에 올림픽을 치른 주경기장이다. 1936년 내란으로 경기를 못 치르고 독일에서 치른 올림픽에서는 손기정 선수가 금메달을 땄고, 몬주익 주경기장은 1992년 올림픽에서 황영조가 금메달을 딴 곳이다. 한국교민들은 너무 기뻐서 심장마비를 일으킬 뻔한 감격한 곳이란다. 내 조국 한국인의 자랑스런 숨결이 배인 경기장을 보며 흐뭇했다.
몬주익 올림픽 주경기장 바로 맞은편에 황영조 기념비가 있다. 몬주익 언덕 한자락 넓게 차지하여 한국을 빛내고 있다. 이곳 사람들은 무심코 보겠지만 우리는 그날의 벅찬 감격으로, 끓는 피로 본다. 바르셀로나는 한국과 자매결연을 맺었다. 경기도 임창렬 도지사가 바르셀로나와 손잡고 2001년 10월 5일, 이곳에 황영조 기념비를 세웠다. 황영조의 뛰는 모습과 두 발바닥이 부조상으로 새겨져 있다. 또한 대한민국 태극기, 바르셀로나와 경기도가 손잡은 모습, 두 나라의 우정 예찬시 등이 눈시울을 붉힌다. 훈훈한 정경을 한동안 큰 눈으로 바라보고 떠나왔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몬주익 언덕 황영조 기념비
* 바르셀로나 구엘공원
스페인의 구엘공원은 인터넷에서 그 조경의 아름다움을 수없이 보아서 기대되는 곳이었다. 가장 보고 싶은 것은 모자이크 작품이었는데, 그 뿐만 아니라 수많은 조각품과 미적 구성의 공원은 환상적이었다. 구엘공원은 스페인의 유명한 건축가 가우디의 작품으로 해발100m의 위치에 있다. 타일로 모자이크, 곡선 건축, 종려열매, +자 모양, 파도 모양 등으로 돌집을 지었다. 1878년 파리 엑스포시 건축물을 출품했다. 가우디는 1852년 출생하여 1926년까지 살다가 74세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가우디는 부모가 일찍 죽어 외롭게 살았다.
구엘 백작은 가우디의 후계자다. 가우디는 쓸모없는 돌산을 공원으로 가꾸다가 미완으로 사망했다. 구엘이 1926년에 사망하자, 시에서 그 자손에게 구엘공원을 사들여서 시민공원으로 관리하고 있다. 구엘 백작은 전원 주택지단지로 꾸미려 했는데 실패해서 공원이 되었다. 가우디는 루마티스 환자여서 자연과 친화하려 했다. 우리 집 닭은 날지 못하고 걷기만 잘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직선이 아니고 곡선을 사용했다. 초현대적 세계유일의 천재적 건축가다. 완전해야 건축했던 자다. 도로, 종려나무 벽, 회오리 바람, 물줄기 모습 등을 돌로 표현했다. 60여 채의 집을 지으려고 했는데 2채만 지었다.
공원 부지도 상당히 넓고, 야자수 등 나무도 울창하고, 높은 고지에 있어서 바르셀로나 시가지가 내려다보이고, 공원은 여러 면에서 큰 관광지로 바르셀로나에게 큰 힘을 부여하고 있다. 이것을 보기 위해 세계인들이 오기에 충분하다. 어느 것 하나 무심히 지나칠 수 없다. 웅장한 돌기둥이 받들고 있는 건축물은 천정까지도 모자이크로 조각하여 눈부시다. 거북이 모자이크상은 흐르는 물과 함께 비경이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스페인의 문화를 보는 행복한 여정이다.
가우디가 설계한 유명한 가로등도 도심에 있다. 철제 조각품인데 곡선을 이용한 빼어난 작품이다. 가로등이라기보다 예술 작품이다. 한 시대를 살다 간 스페인의 위대한 건축가 가우디에 대하여 곳곳에서 배우고 있다. 도심 풍경도 아름답고 그윽한 정경의 가로등은 더욱 남유럽의 낭만을 자아낸다. 바르셀로나 도심에는 가우디의 건축물 유산이 많다. 그 중에서 도심을 장엄하게 수놓은 카사바요트와 카사밀라 두 건축물을 보았다.
바르셀로나 도심의 건물들이 눈부시게 아름답다. 유럽여행에서 항상 느끼는 진한 중세문화의 꽃불이 스페인에서 내 가슴을 흔든다. 단단하고, 구성미가 뛰어나고, 예술적인 웅장한 건물들 앞에서 역시 유럽은 유럽이구나, 동일한 문화가 흐르고 있구나, 부러움으로 감탄한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구엘공원
* 바르셀로나 성가족성당
성가족 성당은 예수, 성모마리아, 요셉의 가족 성당이다. 1882년 빌라르 건축가가 성당을 짓기 시작하여 1년 짓다가 그만두자 가우디가 31세 때 선택받아 성당을 짓기 시작했다. 1883년~1926년까지 44년간 지었다. 가우디는 멋쟁이로 마차 타고 와서 임무를 지시했다. 성당 짓기에 몰입하다가 자신을 돌보지 못하였다. 그는 마지막 죽는 순간에도 성당 짓기에 빠져 그 성당 앞에서 1926년 전차에 치여 74세에 사망했다.
가우디는 이 성당을 종교와 자연을 테마로 건축했다. 종교만이 아닌 것이 특색이다. 예수 탄생의 문은 일생의 아침이고, 고난의 문은 일생의 정오이며, 부활의 문은 일생의 저녁을 상징하다. 이 세 문이 20년 후에 완성될 예정이다. 탄생의 문에서 중단되었다. 처음에는 자료부족과 자금난이 심각했다. 현재는 건축료를 관광객이 많아져서 관광객으로부터 75%, 기여금으로 25%를 확충한다. 앞으로 20년 후 완성하면 세계최대의 성당이 될 것이란다. 지금도 석고모형을 만들어 계속 짓고 있다.
바르셀로나 도심에서 만난 성가족성당은 놀라웠다. 하늘로 솟구친 첨탑이 아득하다. 성당 외벽에 새겨진 조각품들이 빼어난 예술성의 극치다. 물 정원 앞에서 조망한 후 가우디가 심혈을 기울였던 탄생의 문에 먼저 갔다. 가우디가 43년간 심혈을 기울여 생시에 만든 문이다. 예수 탄생을 축복하며 동쪽으로 난 문이다. 사람의 일생에서 아침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사도의 탑 4개가 100m의 높이로 솟구쳐 비상하며 전면에는 비둘기들과 펠리칸 새, 등 예수 탄생을 축복하는 조각상들이 온통 새겨져 있다. 자연물을 조각하여서 야자수도 있고, 꽃모양도 있고 그 섬세함이 아기자기하면서도 우아하다. 그 문으로 들어가서 내경을 관람하였다.
가우디가 계획했던 모형도가 전시되어 있는데, 참으로 치밀하고 거대한 구상이었다. 그는 완전하지 않으면 건축하지 않았다. 석회로 미리 본을 떠서 만들어 보고 옳다고 판단이 되면 그대로 지은 것이다. 그의 작업 장면들이 곳곳에 있다. 거울을 달아 위와 아래를 정확히 보기도 했다. 성당의 내부는 아직 공사 진행 중이어서 엉성하다. 일부 완성된 천정은 야자수를 상징하는 모형도 있다. 곳곳에서 자연의 숨결이 숨 쉬고 있다. 그가 죽기 마지막까지 공사를 지휘하던 사진도 걸려 있다. 그것이 가우디의 마지막 모습이다. 스페인이 낳은 위대한 조각가 가우디, 그의 숨결이 배인 공간에서 숙연해진다.
탄생의 문으로 들어가서 내경을 관람하고 고난의 문으로 갔다. 이곳은 가우디 사망 후 조각한 문이다. 그래서일까. 탄생의 문과는 차원이 다르다. 단조롭고, 웅장함이 덜 하다. 한낮 정오의 상징이니 탄생의 문보다는 화사하다. 그러나 그에 담긴 뜻은 비통하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그의 어머니 성모와 제자들이 슬픔에 잠겨 있고, 동아줄이 기둥을 휘감아 있고, 일생의 고난을 예고하는 처절한 조각상들이 새겨져 있다.
성가족성당의 동문으로 입장하여 서문으로 퇴장했다. 탄생의 문으로 들어가서 내부를 보고, 고난의 문을 보고 나온 것이다. 퇴장문 또한 아름다운 조형이다. 가우디로 인하여 스페인 바르셀로나는 다른 도시와는 다른 예술적 향기를 분무한다. 퇴장도 아름답게 하고 길을 건너 공원에 잠시 들렀다. 석양빛에 물든 쉼터를 바르셀로나 시민들이 거닐고 있다. 가우디의 족적을 따라 입구에서 서성이며 함께 호흡했다. 앞으로 성당이 완공되면 주변이 모두 공원화 된다. 이 공원은 시민들이 모여 쉬기도 하고 산책하기도 하고 고요하다. 고난의 문 건축물과 함께 비경이다.
고난의 문에서 나와 남쪽의 부활의 문으로 갔다. 아직 공사 중인 건축물은 온통 철제 구성물로 엉성하다. 그런데 바로 그 곁에서 아베 고속철 공사 중이다. 성가족 성당에 지장을 주어 못하게 하는데도 계속 공사하고 있다. 부활의 문이 완공되면 그 앞 건물들은 무너지고 고난의 문 앞 공원처럼 부활의 문 앞 공원을 조성할 예정이다. 다음에 이곳에 올 때는 없어질지도 모르는 길이라는 생각에 애잔하여서 걷고 또 걸었다. 성가족성당은 많은 것을 시사하며 주변까지도 그렇게 성스럽게 물들이고 있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성가족성당 고난의 문
* 바르셀로나 람블라스 거리와 까달루니아 광장
바르셀로나 최고의 광장인 까달루니아 광장과 람블라스 거리는 가까이 있다. 람블라스 거리는 서울 명동과 같은 거리다. 차가 다니지 않는 넓은 폭의 거리에 사람으로 꽉 차 있다. 거리 상점도, 휴식 의자도 소중한 한 몫을 한다. 스페인의 토속 상품을 보며 기념품도 살 수 있고 쉴 수도 있다. 스페인 유일의 백화점 엘고르떼 잉글리쉬에는 화려한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노변 의자에 앉아 길거리 풍경도 보았다. 바르셀로나 시민들의 생활상을 그대로 본다. 젊은이들의 활기찬 모습과 노변 거리 상인이 눈길을 끈다.
람블라스 거리 앞에 있는 까달루니아 광장은 바르셀로나 최고의 광장이다. 분수대와 동상들이 큰 위상으로 먼저 눈에 들어온다. 광장 주변에는 노란 택시들이 많다. 지붕 위 녹색 불이 켜진 택시는 빈차, 지붕 위에 번호가 있는 택시는 손님을 실은 차다. 시민들이 주말이나 금요일은 대부분 시외로 나기가 때문에 도심이 한산하다. 광장 주변에 세워둔 오토바이와 자전거도 많다. 바르셀로나에서는 차도 혹은 거리에서 오토바이와 자전거를 많이 볼 수 있다.
광장 곁 대로변에 한국의 삼성전자와 기아모토 큰 건물이 자랑스럽게 우뚝 서서 내 조국의 위상을 드높이고 있다. 지금은 저녁 무렵 석양이 촉촉하게 내리고 퇴근하는 바르셀로나 시민들의 걸음이 분주하다. 람블라스 거리와 까달루니아 광장은 유럽의 향수를 듬뿍 머금고 있다. 사방이 대로로 둘러싸여 있어서 도로변 어느 곳에서 보아도 참으로 아름답다. 여기까지가 스페인의 여행이며, 이것으로 남유럽과 아프리카의 여행을 마쳤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람블라스 거리
스페인 바르셀로나 까달루니아 광장
* 여행을 마치며
유럽은 이번 남유럽을 마지막으로 동서남북 유럽 전역을 다 돌았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유럽은 하나로 연결되었다는 것이다. 문화와 삶의 색깔은 조금씩 달라도 중후한 중세의 건축물과 역사 유적지가 동일한 형상으로 큰 대륙을 동그랗게 하나의 띠로 묶고 있다. 유럽은 정녕 유럽이라는 감탄의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아프리카 모로코는 가난하지만 아프리카의 다른 나라에 비하면 축복 받은 나라다. 유럽과 가까이 있어서 아프리카보다 유럽 문화에 더 젖어 있고 그들 스스로 유럽을 향해 목을 늘이고 동경하며 산다. 그러나 대륙과 대륙의 벽은 높아서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유럽은 유럽이고 아프리카는 아프리카다. 결코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운 두 대륙은 지브롤터 해협을 공유하며 애련한 가교를 맺고 있다. 결국 세계는 어떤 형태로든 연결되어 산다. 동그란 링 위를 무지개 빛으로 구르며 도란도란 사는 아름다운 지구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공항을 떠나 네덜란드 암스텔담 공항을 경유하여 내 조국 인천공항으로 간다. 바르셀로나 공항을 이륙하자 해변도시의 시가지와 지중해가 비경이다. 조금 지나자 피레네 산맥 설봉이 또한 비경이다. 바르셀로나 공항을 이륙한 비행기는 네덜란드 상공에 진입했다. 지상에 보이는 장면들이 참으로 아름답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농토가 반듯, 반듯하게 정리된 풍경이다. 인천공항에 들어섰을 때는 그 위상도 대단하고 육안으로도 그 훌륭함이 드러난다. 자랑스런 내 조국의 공항에 발을 밟을 때면 언제나 큰 자부심을 갖게 된다. 나는 잠시 휴식기를 거쳐 또 다른 곳으로 세계여행을 떠날 것이다. 오대양 육대주 50여개국을 돌았지만 크루즈 여행을 포함한 지구 곳곳의 미여행지가 나를 부르고 있다. 가장 적은 투자로 가장 큰 교육효과를 거둔다는 여행, 나는 여행을 사랑하고 거듭하며, 참으로 많은 것들을 배우고 깨닫는다.
남유럽과 남아프리카의 애련한 가교-보령문학 2010년 제8호 기획특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