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응이 죽어가고 있다. 초췌한 모습으로 앉아서 참선하듯 생각에 잠겨
있다. 문이 열려 있고 뜰이 보여온다. 마지막 남은 낙엽들이 우수수 쏟아
져 흩어지고 있다. 그 뜰 안에 집사가 대령해 있다.
집사 : 나으리, 탕제를 드실 시간이옵니다.
★최응★ : 탕제라.....? 그냥 놓아두어라.
집사 : 약을 치우라 하시옵니까?
★최응★ : 이제 아니 마셔도 되느니라.
집사 : 나으리...?
★최응★ : 햇볕이 아주 따사롭구나. 역시 계절은 어쩔 수가 없어. 이제
곧 눈이 내리고 혹한이 이어지는 겨울이 오겠구나.
집사 : .............?
★최응★ : 유금필 장군이 곡도에서 백제군을 크게 부수었다, 하였느냐?
집사 : 예, 나으리. 그 일로 하여 온 황도가 술렁술렁 하옵니다.
★최응★ : 그래, 그렇게 되어야지. (사이) 햇볕이 참 좋구나. 그만 물러
가거라.
집사 : 약을 드시오소서, 나으리.
★최응★ : 가라 하지 않느냐? 혼자 있고 싶구나. 참, 여기 먹물은 갈아
놓았겠지..?
집사 : 예, 나으리.
★최응★ : (끄덕이며) 어서 가 보거라.
집사가 마지못해 대답을 하며 눈치를 보며 간다. 적막이다. 그 적막 속
에 새 소리와 바람 소리가 들려온다. 꿈꾸듯 그는 먼 곳을 본다. 최승우
의 소리가 에코우로 들려온다.(화면 없이)
최승우 : (소리) 나야 이제 거의 백발이 되어 가는 나이이니 억울할 것
이 없지만 고려의 신동은 너무 안타깝소이다. (사이) 올해... 서른 다섯
이 되시던가...? (사이) 한참 때인데... 하늘이 그런 걸 보면 참으로 야
속할 때가 많아요. 서른 다섯이라... 인생의 황금기인데... 가야하다니..
최응은 힘이 없는 듯 눈을 감고 미소를 짓는다.
최승우 : (소리) 누군가 통일을 할 것이고 이 삼한은 결국 하나가 될 것
입니다. 그렇게 되면 열심히 머리를 싸매고 싸워온 우리의 일은 한낮 기
억에서조차 지워질 것이외다. 결국 인생무상, 제행무상이 될 것이오.
소리에 이어서 서서히 최승우의 지난 표정들이 살아났다가 대사와 함
께 서서히 지워진다. (178회 중)
최승우 : 이 최승우가 한때는 신라의 삼최라 하여 천재로 불렸소이다.
(사이) 허허허... 그러나 훗날 어디서 어떻게 이 구차한 삶이 끝났는지조
차 모를 수도 있소이다. (사이) 그것이 두렵소이다. 도적의 이름으로 남
는 것 말이외다.
갑자기 최응은 눈을 번쩍 뜬다. 그리고 허공을 본다.
★최응★ : 그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다 알고 있었다.... 자신의 끝을
다 보고 있었어.
최응은 천천히 끄덕이고는 조용히 먹에 붓을 찍어 뭔가 써 내려가기 시
작한다.
★최응★ : (소리) 폐하, 신 최응 마지막 목숨을 다하며 아뢰나이다. 신
은 나이 열 넷에 지난 조정에 들어와 지금 서른 다섯에 가니 참으로 오랫
동안 분에 넘치는 인생을 살았사옵니다. 누구보다도 많은 삶을 살았기에
보다 일찍 가는 것이 결코 서럽지 않사옵니다.
최응은 그렇게 쓰기를 계속해 나간다. 담담히 미소지으며 생각하다 쓰
기를 반복한다. 그 위로 지난날의 면면들이 스쳐간다.
★최응★ : (소리) 폐하를 만나 뵈온 것은 신으로서는 생의 영광이었고
복이었나이다. 지난날의 폐주도 그러하였고 더불어 폐하와 그리고 백제국
의 견훤왕은 분명 이 격동의 시대를 주도하는 걸출한 영웅들이시옵니다.
그러나 영웅이 되기에는 쉬우나 지키기는 어렵사옵니다. 폐하께서는 폐하
의 길을 가셔야 하옵니다. 폐주가 제국을 지키지 못하고 간 것은 그가 영
웅이 못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절제를 몰랐기 때문이옵니다. 폐하께오서
는 지금의 그 인내와 덕을 더욱 크게 하시오소서.
최응은 힘에 겨운듯 마지막 힘을 다 모으고 있다. 그리고 더욱 죽어가
며 필사적으로 써내려간다. 그 모습에서...
씬 길 (석양)
왕건일행들이 오고 있다. 복지겸과 박술희, 김행선, 배현경, 홍유, 최
지몽들이 내군들과 함께 오고 있다.
왕건 : 도대체 왜 이리 먼가..? 지난번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왜 이리 길이 먼 것 같은가?
최지몽 : 예, 폐하. 이제 다와 가옵니다.
왕건 : 내가 너무 몰랐어. 내가 너무 박정했어. 어찌 그 지경이 되도록
몰랐단 말인가? 어떻게.......
왕건들은 계속해 가고 있다. 그 초조한 모습 위로 최응의 소리는 계속
되어진다.
★최응★ : (소리-계속) 신 최응은 또 삼가 아뢰옵니다. 삼한을 통일하는
데 있어서 절대로 남의 힘을 빌리지 마시오소서. 한번 외세의 힘을 빌리
면 그 빚을 갚기가 어렵고 벅차 결국은 노예로 전락될 수 있사옵니다. 삼
한을 통일하시는 분은 오로지 폐하가 되실 것이옵니다.
왕건들은 그렇게 어느 골목길을 급히 돌아간다. 최응의 집 가까이에 이
르고 있는 것이다.
씬 최응의 집 사랑
최응이 더욱 더 힘에 겨워하며 마지막 모든 힘을 모으고 있다.
★최응★ : (소리) 신은 알고 있사옵니다. 폐하께오서는 지난날 폐주 궁
예왕이 그랬던 것처럼 저 중원대륙의 대제국을 가슴에 품고 계시옵니다.
그 꿈을 버리지 마시오소서. 그 옛날 우리 선조 고구려가 그러했던 것처
럼 저 만리장성을 넘어 드넓은 중원 모두를 폐하의 영토로 하시어 온 종
일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세우시오소서. 그리하려면 사대주의를 배격하
시오소서. 당나라와 오월, 그리고 글안 같은 오랑캐들에게 무릎 꿇지 마
시오소서. 옛 발해의 후손들을 후히 대하시고 실패한 그들의 꿈을 되찾으
시오소서. 이제 폐하의 세상이 오고 계심이 보이옵니다.
최응의 손이 멈추었다. 안간힘을 쓰던 그 손이 멈추었다. 그리고 그는
미소가 점차 굳어지며 대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있다.
소리 : 문을 열어라. 황제폐하께서 납시었다. 어서 문을 열어라.
최응은 미소를 짓는다. 밖의 소리는 계속 된다. 그 와중에서 최응이는
그리고 마지막 힘을 모아 다시 써 내려간다. 더듬더듬.. 이제 그 글이 흐
려진다. 가득히 미소를 짓는다. 밖의 소리는 더욱 커지고 있다.
소리 : 무엇 하느냐? 문을 열라고 하지 않느냐? 폐하께서 납시셨느니라.
★최응★ : (계속) 폐하, 신 최응은 편안한 마음으로 이제 폐하의 곁을
떠나옵니다. 여타 드릴 말씀은 또 다른 곳에 일일이 다 적어 놓았사오니
살펴 헤아려주시오소서. 이제 그만...... 떠날..... 때가.... 된 것 같
사옵니다. 만년제국의... 위업을.... 이루시오소서,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