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위키백과의 보호 정책에 따라 잠겨 있습니다. (기한: 2010년 6월 14일 (월) 15:57 (UTC)까지) 편집 분쟁의 지속을 이유로 보호된 문서로서 현재 문서의 내용이 정확하거나 중립적임은 보장하지 않습니다. 제한 기준은 정책 규정을 살펴봐주세요. 이 문서에 대한 의견은 토론 문서에 적어주시기 바랍니다. 만약 관리자에게 토론에 따라 결정된 편집을 요청하려면 {{보호 문서 편집 요청}}을 이용하세요. |
이 글은 인물에 대해 서술하고 있습니다. 개인에 대한 명예훼손이나 이에 따르는 출처불명의 내용은 논쟁이 될 수 있습니다. 특히 현존 인물의 경우, 비판적·논쟁적인 내용은 반드시 확인 가능한 출처에 의해 뒷받침되고 중립적인 방식으로 서술해야 합니다. 이러한 점을 충족하지 못하는 내용을 발견하셨다면 출처 틀을 사용하지 말고 즉시 내용을 제거한 후, 토론을 통해 작성자에게 출처를 요구하세요. |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김대중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
김대중(2001년) | |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 | |
---|---|
임기 | 1998년 2월 25일~2003년 2월 24일 |
국무총리 | 김종필 (1998 ~ 2000) 박태준 (2000) 이한동 (2000 ~ 2002) 김석수 (2002 ~ 2003) |
전임: 김영삼(14대)
후임: 노무현(16대)
| |
출생일 | 1924년 1월 6일(1924-1-6) |
출생지 |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 |
사망일 | 2009년 8월 18일 (85세) |
사망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세브란스 병원 |
정당 | 민주당, 신민당, 통일민주당, 평화민주당[1], 새정치국민회의, 새천년민주당 |
종교 | 천주교 |
배우자 | 차용애 (사별), 이희호 |
자녀 | 장남 김홍일, 차남 김홍업, 삼남 김홍걸 |
김대중(金大中, 약칭 DJ, 1924년 1월 6일(양력)(호적상으로는 1925년 12월 3일(음력)) ~ 2009년 8월 18일, 전라남도 신안군 출생)은 대한민국의 정치인, 사업가이다. 1998년부터 2003년 까지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을 지냈으며,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다.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 하의도에서 태어나 제5대 민의원과 제6·7·8·13·14대 국회의원(5선)을 지냈으며, 군사정권의 위협으로 5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김영삼과 함께 국내외에서 오랫동안 민주진영의 지도자로 활동하며 군사 정권에 항거하였다. 이 과정에서 납치사건등 으로 인해 국내·외에 충격을 주었다.[2] 6월 항쟁 이후에는 평화민주당 총재로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구성해 민주진영을 구축했다. 그는 민주화의 선구자라는 평가와 함께 해외에서는‘아시아의 넬슨 만델라’로 불리었다. 인권 향상과 남북관계의 진전에 기여한 공로로 한국인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본관은 김해(金海), 호(號)는 '후광'(後廣)이다. 추운 겨울에도 온갖 풍상을 참고 이겨내는 ‘인동초(忍冬草)’라 비유되며 불려졌다. 일제하에 창씨개명한 이름은 '도요타 다이쥬'(일본어: 豊田大仲), 천주교 세례명은 '토마스 모어'(Thomas More)이다.
연설에 능하며[3][4][5], 대한민국 국회에서 가장 오래 연설한 기록으로 기네스 증서를 받았다.[6] 6.15 남북공동선언을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과 직접 만나 발표하였다.
목차[숨기기] |
1924년 전라남도 목포 앞바다에서 뱃길로 2시간 거리인 남서쪽 해상 약 57.6킬로미터 거리의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 하의도에서 한두 척의 어선을 가진 농어민 김운식과 장수금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당시 하의도는 인구 1만 이내의 섬이었다. 구한말 덕혜옹주가 일본으로 시집갈 때 이 섬 한덩어리를 일본에게 팔아넘겨 하의도 섬은 섬 전체가 동양척식회사의 소유가 되었고 주민들은 일시에 소작농으로 전락해 버렸다.[7]:76
아버지 김운식은 소작인들을 대표하여 일인들에게 항의나 진정을 내곤 하였다. 설산 장덕수가 잠시 피신하러 하의도로 내려왔다가 김운식과 가깝게 친교가 있었고 설산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한다.[7]:76 김대중은 "내가 태어난 이러한 토양이 민족과 같이 불의에 항거하는 힘을 주었다"고 추억하곤 하였다 [7]:77 증조부 김태현은 헌종 때 한성부좌윤을 지냈고, 조부 김제호는 오위장을 지냈다.[7]:78 이후 천주교 신자가 되어 "토마스 모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7]:86
때꺼리에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돼는 집안환경탓이지 김대중은 공부하기를 좋아했고 성적도 항상 상위권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지만 아직 하의도에 학교가 들어서지 않아, 일단 그는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수학하였다. 일년남짓 다닌 이 서당에서 그는 장원을 두번이나 했다.[8] 마을 이장이었던 아버지에게 일본의 매일신보가 무료로 배달됐는데 그는 8살 때부터 꼭 신문의 1면과 정치면을 주의 깊게 읽었다.[9]
1936년 아들의 재능을 눈여겨 본 그의 부모는 전라남도 목포로 이사를 했고, 중학교 진학을 위해 국민학교 4학년 때 하의도에서 목포북국민학교로 전학해 왔다. 교육열이 남달랐던 어머니가 하의도의 집과 농토를 다 팔면서까지 아들을 목포로 유학시킨 것이다. 부모는 여관을 운영하면서 공부 뒷바라지에 나섰다.[7]:78 그 뒤 목포제일보통학교를 일본인 학생들의 따돌림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학업에 전념하여 37년 수석으로 졸업, 목포일보 사장상을 받았다. 39년에는 당시 전국 10대 명문 안에 들었던 5년제 목포상업고등학교에 일본인학생들까지 제치며 1등으로 합격하여 모친의 기대에 부응했다. 학생의 절반가량이 일본인인데도 입학해서 3학년 때까지 줄곧 반장을 할 정도로 뛰어난 통솔력을 보였다. 이때의 죽마고우로 뒷날 신민당 국회의원이 되는 임종기를 만나 평생의 벗으로 지내게 된다.[7]:78~79
그는 독서광이면서 정치와 영어에 관심이 많고 작문과 역사 성적이 뛰어났으며 웅변에도 소질을 보였다 한다. 목포상업학교시절 학적부에는 김대중에 대하여 "언변은 늘 정확,명료,하다"라고 기재되어있다. 이 탓인지 훗날 그는 서울에서 웅변학원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웅변학원에서 정치적 동지인 김상현과 만나게 된다. 그의 한 동창생의 말에 의하면, 한번은 일본인 교관이 전교생을 모아 놓고 시국에 대한 강연을 한 일이 있었다. 강연이 끝나자 교관은 질문이 있으면 하라고 하자 김대중만이 입을 열었다. 질문은 제2차 세계 대전과 관련된 유럽 정세에 관한 질문이었던 것인데 교관도 답변을 하지 못하자 어물어물하여 창피를 당하고 말았다.[7]:79 김대중은 민족의식이 뚜렷했다. 그러나 학년이 높아지면서 일본인 학생들과 갈등을 빚으면서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한데다 반일작문이 문제가 돼 계속 맡아오던 반장마저 그만두게 되었다.[10]
1944년 3월 목포상업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일제의 강제 징집을 피하기 위해 목포상선회사에 입사하여 이후 회사 관리인으로 회사를 경영하는 등 청년 사업가로 활동 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몽양 여운형이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였으나 좌경화 움직임이 보이자 곧 탈퇴하였다.
1946년 4월 목포 신민당 지부에 참여하였으나 좌경화 움직임이 보여 탈퇴하였고, 1945년 차용애와 결혼[11], 슬하에 김홍일·김홍업 두 아들을 두었다. 1959년에 차용애와 사별하였고, 1948년 10월 목포일보 사장으로 1950년 10월까지 활동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당시 사업관계로 서울 출장중에 6.25를 맞아 걸어서 목포로 귀가하였다.
1950년 9월 우익반동이라는 이유로 인민군에 체포되어 목포형무소에서 총살 직전에 탈출 하였다. 1951년 3월 목포해운회사(흥국해운) 사장에 취임했고, 같은해 전남해운조합 회장, 한국조선조합 이사로 취임하였다.[12][13]
김대중은 해방 후에 다니던 회사에서 종업원 대표로 추대되고, 종업원단체가 조직한 회사 경영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회사 직원들로부터 신망이 높았던 것 같다. 한편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이 해 조선건국준비위원회목포지부에 참여하여 선전부원으로 활동하였다. 김대중은 건준 목포지부에 이어 9월 경에 결성된 목포청년동맹에도 가입했지만, 건준관계 일을 주로 하고 청년동맹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김대중은 이 해 하반기에 동생 김대의와 건준 명의의 벽보를 붙이다가 미 군정 경찰에 의해 포고령 위반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이틀 밤을 지새운 뒤에 석방되었다. 그의 생애에서 첫 번째 투옥이었다. 1946년 초에는 좌우합작 노선을 내세우는 조선신민당 목포시지부 조직부장이 되었다. 그러나 소련을 추종하는 세력과 갈등을 빚게 되면서 여름에 당을 떠났다.[14] 민족주의 성향의 중도좌파 정당인 조선신민당에서 반년 쯤 활동하다가 좌익세력의 반민족적인 성향에 크게 실망하고 뛰쳐나왔다.[15]
김대중은 이 무렵 회사의 관리문제로 서울에 올라가 군정청 운수부 해사국을 방문하여 회사관리권이 서울 거주 강 모씨에게 넘어간 것을 확인하고, 강씨를 만나 모든 선원을 그대로 고용하겠다는 안을 제시받았다. 회사로 돌아온 김대중은 이 방안을 놓고 사원들과 협의했으나 좌익동맹에 가입한 선원들이 반대하고 자치를 주장하면서 1946년 말 더 이상 회사 경영위원회에 관여하지 않고 회사를 떠났다. 1946년 9월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가 주도하는 전국 총파업이 단행되고, 10월 1일 대구를 중심으로 대규모 시민항쟁이 일어났다. 대구항쟁 이후 목포에서도 파출소 습격사건이 발생했다. 김대중은 밀고자에 의해 20일간 경찰서에 유치되었으나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1947년, 김대중은 장인의 권고에 따라 한민당 목포지부에 입당하여 시당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김대중은 한민당에 들어가 활동하는 한편 연안운행의 화물선 1척을 구입하여 해운업을 시작하였다. 앞서 일했던 선박회사의 경험을 살려 선택한 해운사업이었다. 사업관계상 해안경비대 목포기지 사령부의 장교들과 자주 접촉을 갖게 되고, 이것은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해상 방위대에 참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친구 형의 부탁으로 그의 상경 여비를 도와주었는데, 그가 좌익활동을 이유로 구속되어 조사받는 과정에서 김대중은 자금제공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해군 목포경비부대 정보대장 오세동 중위와 헌병대장 박성철 소위의 신원보증으로 수일 만에 석방되었다. 이즈음 목포지역의 정치적 불안정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오중위는 6ㆍ25전쟁 때 전사하고, 박소위는 해병소장으로 승진하고 예편하여 뒷날 김대중대통령후보 비서실 차장에 임명되었다.[16]
김대중은 1949년 봄 해방 뒤 부산에서 건립된 건국대학교(동아대와 합병) 정치과에 편입했으나 이듬해 전쟁으로 인하여 학업을 중단하였다. 1950년 초 대한청년단 목포해상단체가 조직되어 김대중은 부단장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는 동안 해운사업이 번창해졌다. 전국 양곡 연안수송을 일괄 계약하고 있던 서울 소재 조선상선주식회사의 목포지구 수송을 전담하는 하청 계약이 이루어진 것이 사업 번창의 계기가 되었다. 1950년 6월 15일이면 6ㆍ25전쟁 발발 열흘 전이다. 전쟁을 예상하지 못했던 김대중은 이날 회사 목포출장소장 한도원과 양곡 수송 운임을 수령하기 위해 상경했다. 서울에 머물러 있는 동안 6·25전쟁이 터졌다. 경기여고 뒤쪽에 있는 여관에 투숙하고 공산치하의 서울에서 인민재판의 모습을 생생하게 지켜보게 되었다.[17]
한국 전쟁 이후 다시 해운업에 손을 댔고, 해군 소령급의 신분으로 해상방위대 부단장, 목포일보사 인수, 노조관계 관여 등의 사회활동을 하였다.[7]:82 그뒤 목포일보사 사장 등을 역임[출처 필요]하고 1954년 목포에서 무소속 후보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낙선 이후, 해운회사를 처분하고 서울에 상경한 그는 잡지 《태양》을 발행하면서 웅변학원을 운영했고, 1955년 10월에는 당시 대한민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사상계》에 노동문제에 관한 글을 기고하면서 정계진출의 꿈을 키운다.[18]
이때 김대중의 행적에 대해선 김대중 측과 노태우 정부 당시 안기부가 작성한 조사 조사 자료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1988년 당시 안기부에 의해 작성된 문건에 따르면 해방이 되자 여운형이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의 선전책인 임영춘의 추천으로 건준 목포시 지부에 가입해 선전책에 종사하는 한편 목포청년동맹에 가담하여 활동했다고 한다. 그해 9월 건국준비위원회가 인민공화국 수립으로 발전적 해체라는 이름하에 해체되자 이채현의 추천으로 조선신민당에 입당하여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민주청년동맹 목포시 지부에 가입하여 부위원장으로 활동을 병행했다고 한다. [19] 1946년 10월 31일 목포 경찰서 남교동 파출소를 습격하여 경찰관을 살해하고 파출소를 방화한 목포시민 항쟁의 날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체되어 10일 정도를 구속 수사받던 중 한민당 목포시 부위원장인 장인 차보륜의 신원보증으로 사상 전향 서약서를 제출하고 훈계 방면되었다고 한다.[19] 사상 전향 서약서를 쓴 후 보도연맹 목포시 지부에 가입하여 운영위원으로 활동하였으나, 1949년 2월 남로당 섭외부원 겸 민주주의민족전선 부위원장으로 암약중이던 유재식에게 활동자금을 제공한 혐의로 전남도 경찰국에 체포되었다고 한다. 체포되어 10일 정도를 구속 수사받던 중 당시 해군 목포헌병대장인 박성철의 신원보증으로 방면되었다고 한다.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보도연맹에 붙잡혀 미국 CIC에 의해 아군 후퇴시 사살 대상자로 지명되었으나 목포상고 선배인 김진하의 호명 착오로 구명되었고 6월 25일 당시엔 목포인민위원회 창설 활동, 부채 및 체불 노임 횡령 사건으로 목포 교도소에 수감되었으나 9.28 수복시 탈옥했다고 한다.[19]
이 문건에 대해 북풍을 노린 안기부의 조작된 문건이라며 신뢰성이 없다는 지적이 있다. 지난 1987년 대선당시 가장 큰 이슈였던 북풍사건은 김대중후보의 당선을 저지시키기 위해 안기부와 북한이 공조한 사건이었다는 것이 검찰 수사에 의하여 밝혀진 바가 있다. 또한 ‘오익제 편지’ ‘김병식 편지’ ‘이대성 파일’ 등 선거 때면 언론은 김대중과 관련해 사상 의혹들을 봇물처럼 쏟아내곤 했다.[20] 그 의혹들은 거의 국가안전기획부의 공작으로 밝혀졌다. 북풍 공작에 뒷돈을 댔던 권영해 전 안기부장을 비롯해 안기부 전 1차장, 대공수사실장 등 안기부 고위 간부가 줄줄이 구속된 바가 있다.[21]
그러던 중 1956년 9월 28일 민주당 전당 대회에서 장면 저격 사건을 목격하게 된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장면과 인연을 맺은 그는 민주당에 입당하였고, 장면 전 총리를 대부로 삼고 노기남(당시 서울대교구장) 대주교 집무실에서 천주교 영세를 받는다. 이후 강원도 인제에 출마해 연거푸 두 차례(4대, 5대)[22]의 낙선을 맛보았고, 조강지처인 차용애의 사망(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쇼크사[23])으로 힘겨운 정치 초년기를 보낸다.
1957년 8월에는 민주당 중앙상임위원으로 지내고, 노농부 차장이 되었다. 1959년 7월 민주당 강원도지구당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59년 11월 민주당 강원도 인제군 지구당 위원장이 되었다. 이어 부통령 장면의 서울 순화동 공관을 방문하였다.
1960년에는 민주당 기획위원 겸 대변인이 되었다. 이철승이 조병옥과 장면으로 양분된 민주당에서 장면을 찾아 신파의 소장 실력자로 데뷔하자 김대중도 장면을 찾아 민주당 신파로 정치적 인연을 쌓았다.[7]:86 1960년 4월 6일 민주당 강원도지구당 부위원장 겸 민주당 강원도 인제군지구당 위원장 자격으로 민주당의 3·15 부정선거 규탄시위에 참여하였다. 선거부정 규탄시위는 가두시위로 발전했고 그도 서울시청까지 야당 및 학생 시위대와 동행하였다.
1961년 5월 14일, 자유당 소속 현역의원의 공민권 박탈로 강원도 인제 재보궐선거에서 승리하여 민의원에 당선 되지만 이틀 뒤에 5.16 쿠데타가 일어나 국회가 해산되는 바람에 의원 선서도 해보지 못한 채 첫 임기를 허무하게 마친다. 5.16 이후 이철승 등 일부가 정치정화법에 묶여있을 때 민주당 선전부장, 당 대변인 등을 역임했다.[7]:86 이후 이희호를 만나 재혼했고, 1963년에 민주당 소속으로 고향 목포에서 제6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면서 재선 국회의원이 된다.
1964년 야당 초선 의원인 김대중은 본회의 연설에서 필리버스터를 해 국민들에게 적지 않은 인상을 남겼다. 김대중의 필리버스터는 동료를 돕기 위한 것이었다. 1964년 당시 야당인 자유민주당 김준연 의원이 국회 본회의에서 "공화당 정권이 한ㆍ일협정 협상 과정에서 1억3000만달러를 들여와 정치자금으로 사용했다"고 폭로했다. 당연히 정국이 발칵 뒤집혔다. 공화당 출신인 이효상 국회의장은 회기 마지막 날인 4월 20일 김 의원 구속동의안을 전격 상정했다. 이때 김대중이 의사진행 발언에 나섰다.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은 채 이어진 발언은 회기 마감인 오후 6시를 넘겨 5시간19분이나 이어졌다. 그는 원고 없이 한ㆍ일 국교 수립 과정의 잘못된 점, 김준연 의원 구속의 부당성 등을 조목조목 지적했고, 결국 구속동의안 처리는 무산됐다. 당시 의사진행 지연 발언은 세계 최장이라는 기록을 인정받아 기네스 증서를 받았다.[24]
1967년 2월에 신민당 창당에 참여하여 신민당 정무위원 겸 대변인으로 취임했다. 이후 1967년 6월 8일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그는 1968년 6월 3일 당수 유진오로부터 원내총무 후보자로 지명을 받았으나 동료의원들의 인준을 받지 못해 김영삼에게 패배하기도 했다.[7]:88 이때 의원총회에서 재석 41명 중 가 16, 부 23명으로 결국 원내총무 자리는 김영삼에게 돌아갔던 것이다. 그해 1968년 신민당 정무위원에 선출되었다.
1970년에 치러진 신민당 내 대통령 후보자 경선에서 이철승, 김재광 등과 제휴해 김영삼을 40여표 차이로 꺾고 과반수선을 얻어 역전승, 대통령 후보자에 지명되었다. 1970년 1월 24일, 신민당 대통령후보 지명전에 출마할 것을 선언하면서 만일 71년 선거에서 또다시 박정희의 대통령 당선을 허용한다면 이 나라는 영원히 선거 없는 총통시대가 올 것이다라고 주장했다.[7]:89 1971년 4월 18일 서울 장충공원 유세에서 총통제 가능성을 다시 폈다.[7] 이 유세로 인하여 뒷날, 허위사실 유포 등 선거법 위반사범으로 입건도 되었다. 그러나 같은해 10월에 10월유신이 발생하자 "이처럼 되었는데도 내가 선동가냐"며 반문하였다.[7]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539만표를 얻어 634만표를 얻은 박정희에게 근소한 차이로 패배하였으나 당시 정치환경으로 볼 때 대단한 선전이었다. 민주화를 바라는 여론 때문에 사실 그는 박정희를 압도했다. 4월 18일 장충단 유세에서는 선거 사상 가장 많은 인파가 몰렸다. 당시 서울 인구 500만 중 100만에 가까운 인파가 운집했다. 중앙정보부와 국세청 등 권력기관을 동원한 야당세력 탄압, 금품 살포, 지역감정 조장, 흑색선전, 선거 부정 등의 관권개입이 아니었다면 7대 대선의 승자는 김대중 이였을 것이다. 예컨대, 전남의 무효표가 유권자가 가장 많은 서울에서의 무효표보다 두 배 넘게 많았다. 그는 “나는 국민의 지지를 도둑맞은 것이 분명하다”라고 말했다.[25]대선 후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하는 최대 정적인 김대중에게 박정희는 위기감을 느꼈다. 선거 얼마 뒤에 김대중은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하여 골반 관절 부위에 부상을 당했고, 골반 부위를 다쳐 다리를 절게 됐다.[26]
1971년 5월 6일 신민당 당수 유진산이 5·25 국회의원 총선 후보등록 마감일인 1971년 5월 6일 갑자기 자신의 출신지역구인 서울 영등포 갑구를 포기하고 전국구 1번으로 등록하였다.[27] 이에 불만을 품은 당내 소장층과 영등포 갑구 당원 등이 강력하게 반발하여 당수직 사퇴를 요구하는 사태로 벌어졌다.
1971년 5월 7일 신민당 중앙당사에서의 난동사태로까지 이어졌고[27] 신민당 비주류인 김대중은 6인 수권위원회의 구성원 중 고흥문, 홍익표, 정일형 등 3인과 협의해 유진산을 당에서 제명하고 총선 기간 동안 자신이 당수 권한대행을 맡는 수습안을 발표했다.[27] 그러나 운영위원회 소집에 앞서 김영삼, 이철승, 이중재, 김재광, 김형일 등은 비공식적인 의견교환을 통해 김대중의 당수권한대행직 장악을 저지키로 하고 당헌에 따라 운영위원회 부의장에게 당수 권한대행을 맡기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27] 일부 당원들의 난동으로 일시 행방을 감추었던 유진산은 71년 5월 8일 성명을 통해 "나는 이미 당수직 사퇴 뿐만 아니라 정계은퇴도 각오가 되어 있지만, 당수에게 선거구를 팔아 먹었다는 누명을 씌워 당권을 가로채겠다는 행위를 먼저 규명하고 제재를 가해야 한다."[27]고 선엄하면서 김대중의 당수권한대행 취임 기도를 강하게 비판했다.[27]
유진산의 공격이 있자 이에 김대중도 즉각 기자회견을 가졌다.[27]
"책임을 지겠다고 한 당수가 이제와서 태도를 바꾸어 당의 혼란이 마치 당권투쟁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당을 사지(死地)에 몰아넣는 것으로서 이는 국민을 우롱하는 것"이라고 비난하면서 "당 운영위원회의 권한을 위임받고 있는 6인위의 결정은 합법적인 결정"이라고 맞섰다.[28] 그러나 이러한 유진산과 김대중간의 공방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이 당수권한대행직을 차지할 수 없었다. 유진산이 자진해서 사표를 내지 않는 한 합법적인 당수권한대행에의 취임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28]
결국 사태는 제3자에 의한 중재를 통한 수습을 하게 되었다. 이에 김영삼, 이철승, 김재광, 김형일, 이중재, 박영록 등 당 중진들의 중재로 유진산을 당수직에서 물러나게 하기는 하였으나 김홍일 전당대회의장을 당수권한대행으로 한다[28]고 결의하여 김대중의 신민당 당수권한대행직 취임을 저지하였다. 김대중은 이 중재안에 대해 처음에는 거부의사를 나타냈으나, 더 이상의 별다른 수습안이 없는 상태에서 결국 이를 받아들였다.[28]
71년 5월 11일부터 당수권한대행 김홍일이 전국 지원유세에 나섰고.[28] 5·25 총선을 대비해 김대중, 김영삼, 이철승은 전국에 파견되어 선거유세를 하였다.[28]
1970년 11월 19일 신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은 “현 향토예비군은 이중병역의 의무를 강요한 위헌적인 것이며, 경찰의 보조기관으로 전락되고 지휘계통이 국방장관과 내무장관에 이중으로 되어 있어 정치적으로 악용될 우려가 있고 생업에 지장을 초래할 뿐 아니라 민폐를 조성, 부정부패를 가져올 뿐”이라며 향토예비군 폐지를 공약했다.[29] 이후 1971년 대통령 선거 유세에서 그는 예비군 폐지 공약으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1971년 5월 25일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소속 전국구로 당선된 김대중은 이듬해인 1972년 10월에 일본에 체류하던 중,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후 미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등을 결성하여 언론과 교포사회를 통해 유신반대 민주화운동을 진행하였다.[30]
1972년 일본 도쿄에서 유신 반대 첫 성명 발표, 미국 워싱턴에서 국민투표 무효선언을 발표하였다. 1972년 10월 19일 귀국 비행기표를 예약해놓고 10월 17일 오전에 일본인 후쿠다 다케오를 만나고 오후에 참의원 의장 고노 겐소를 접견했다.[7]:43 그해 11월 미국으로 건너가 연설과 기자회견을 하고 12월 미국을 출발하여 이듬해인 1973년 1월 1일 하와이에 도착하였다.[7]:44 1973년 1월 3일 일본 도쿄에 도착하여 조윤형, 김상현의 구속 소식을 접하였다.[7]:44
김대중은 도쿄에서 피랍된 뒤 129시간 만에 서울 동교동 자택 근처에서 풀려난 사건이다. 1973년 8월 8일 그는 도쿄의 히비야 공원에서의 반(反)박정희 집회 참가를 앞두고 호텔 그랜드팰리스 2212호에 투숙하고 있었다. 1973년 8월 8일, 같은 호텔에 머물고 있던 양일동 한국 민주통일당 대표의 초청을 받아 가진 회담을 끝내고 나오던 도중 누군가에게 습격을 당했고, 비어 있었던 2210호실에 감금되었다. 한국 정보기관원에 의해 납치되어 129시간 만에야 서울 자택 부근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일본 경찰청은 현장에서 주일 한국대사관 김동운 일등서기관의 지문 등을 채취하고 관련자 출두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이 사건은 한국 공권력의 일본국의 주권침해라는 한·일 양국간의 외교문제로 비화되었다. 김 서기관의 해임, 김대중의 해외체류 중 활동면책,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의 사과 방일 등을 약속 받고 물러섰다. 그러나 미국의 조정 및 한일간의 막후절충으로 김동운 해임, 김대중의 해외체류중 언동에 대한 면책, 김종필 국무총리의 진사방일(陳謝訪日) 등이 합의됨으로써 양국 관계가 정상화되었다. 도쿄에서 납치된 후 동교동 자택에 귀환하면서 귀국하자마자 가택연금과 동시에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당하였다.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미국 의회에서 "김대중 납치 사건은 한국 중앙정보부의 범행"이라고 발언하면서 사건이 다시 불거졌다.[31] 이어 1977년 7월 1일에 일본 교토통신과의 회견에서 증언을 두고 신빙성이 의심스럽다고 발언한 후쿠다 다케오 일본 총리를 비난하면서 "한·일 두 정부가 반성하지 않고 계속해서 나의 명예와 신뢰성에 상처를 입혀 김대중 납치 사건의 진상에 대한 양국 국민의 눈을 가리려 한다면, 더욱 상세한 사실을 밝혀 양국 정부의 죄상을 고발하겠다"라고 밝혔다.
2006년 2월, 대한민국 외교통상부는 1947년부터 1974년 사이의 비공개 외교문서를 공개하였고, 이로 인해 당시 납치 사건과 관련된 많은 내용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32][33]
1974년 8월 22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반독재 선명야당 체제’의 구축을 위해 김영삼 총재의 당선을 적극 지원하였고, 11월 27일에 가택연금 속에서 재야 반유신 투쟁의 결집체인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참여하였다. 1976년 3월 1일에는 윤보선, 정일형, 함석헌, 문익환 등 재야 민주지도자들과 함께 ‘명동 3.1 민주 구국선언’ 주도하여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면서 1심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았고, 1977년 3월 23일에는 대법원에서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형을 확정(긴급조치 9호 위반) 받은 후 옥고를 치렀다.
1977년 5월 7일에는 진주교도소에서 수감 중 접견 제한에 항의하며 단식투쟁을 했으며, 같은해 10월 31일에 진주교도소 수감중 격려차 찾아온 김수환 추기경과 면담하였고, 이후 12월 22일에는 서울대학교병원으로 이송되어 수감 되었다. 1978년 9월 6일 서울대병원 이송후 교도소 때보다 제한(접견 차단, 창문 봉쇄, 서신제한, 운동금지)이 더욱 심하자 항의 단식하면서 같은해 1978년 12월 27일에 옥고를 치르면서 2년 9개월만에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된 후 장기 가택연금을 당했다.
1979년 4월 4일에는 윤보선, 함석헌, 문익환 등과 함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결성 주도하여 공동의장으로 반독재투쟁에 앞장, 3차례 연행당하였다. 1979년 12월 8일, 박정희가 김재규에게 암살 당하여 사망한 후 10.26 사태로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되고 가택연금에서 해제 되었다.[34]
김대중은 1979년 12.12 군사정변 발생 이후 12월 14일 아침 강원용과 만났다. 강원용은 김대중에게 당신 이번에 대통령 할 생각 절대로 하지 마라며 대통령을 김영삼에게 양보할 것을 노골적으로 요구하였다. 그러나 그는 강원용에게 “이미 끝났다. 강 목사님이 군(軍)이란 세계를 모르고 하는 말씀인데, 군은 통수권자에게 절대 복종한다. 박정희가 있을 때는 박정희가 통수권자니까 거기에 충성했지만 이제 박정희는 죽었다. 장군들이 그 다음엔 내가 된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내게 충성하고 들어올 것이다”라며 거절했다고 한다.[35]
1980년, 12·12 군사 반란으로 실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정치활동 금지를 주요내용으로 한 포고령10호를 발표함과 함께 김대중을 포함한 재야인사 20여명을 사회혼란 및 학생, 노조 배후조종 혐의로 전격 연행하였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김대중이 "이 땅의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먼저 죽어간 나를 위해서 정치보복이 다시는 행해지지 않도록 해달라"고 한 법정 최후진술이 국제사회에 알려지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도날드 그레그 전 주한대사를 비롯 레이건 행정부, 세계 각국 지도자와 인권단체들이 구명운동에 나선 덕분에 이듬해인 1981년 1월 23일 무기징역으로 감형 되었다. 다시 20년형으로 감형과 함께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아 구속된지 2년 7개월 만인 1982년 12월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36]
에드워드 케네디 미국 상원 의원은 71년 당시 신민당 대선후보로 미국을 방문한 김대중에 대해 “당신은 한국의 존 F 케네디”라며 지지를 표명했다. 그는 80년 김대중이 신군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자 구명운동에 앞장섰고 미국 망명 생활과 귀국 때도 큰 도움을 줬다. 케네디 의원은 84년 4월 26일 김대중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신과 나는 민주와 평화를 지지하는 입장을 공유하고 있다. 한국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지지한다”고 썼다. 85년 2·12 총선 전에 귀국을 결심한 김대중은 84년 6월 “84년 말까지 귀국하기로 결정했다”는 뜻을 서신에 담아 전했다. 케네디 의원은 86년 5월 한국에서 민주화를 위한 김대중의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37]
레이건 대통령은 와인버거 미 국방부 장관과 그레그 전 대사를 한국에 급파했고, 이들은 전두환 신군부를 상대로 김대중 구명운동에 나셨다. 이들의 노력 때문이었는지 김대중은 신군부에 의해 가까스로 사면을 받아 미국 망명길에 오를 수 있었다. 김대중 구하기에 혁혁한 공로를 세운 그레그 CIA 지부장이 89년 주한대사로 부임하게 되자 김대중은 감사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 서한에서 김대중은 "나는 개인적으로 귀하가 대사로 오게 돼 기쁘다. 왜냐하면 귀하는 1973년, 1980년 두 차례에 걸쳐 나의 목숨을 살려줘 내가 깊이 신세를 졌기 때문이다"라며 은인에 대한 깊은 감사의 뜻을 나타내기도 했다. [38]
독일 사민당의 1980년 9월 17일자 보도자료에 따르면 빌리 브란트 당시 사민당 총재는 “김대중씨에 대한 사형 선고는 우리 모두에게 큰 도전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며 “조국의 사회적 발전과 인권수호를 위해 헌신한 애국자의 노력이 이런 판결로 귀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또 “이번 판결이 집행된다면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막대한 손상을 입으므로 대통령이 판결이 수정되도록 조치할 것을 긴급히 요청한다”며 “김대중씨 구명에 모든 힘을 발휘해 줄 것을 미국 정부에도 긴급히 요청한다”고 말했다.[39]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편지가 김대중의 사형 집행을 막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40] 1980년 12월 1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서울 주재 로마 교황청 대사관을 통해 전두환 대통령에게 1차 편지를 발송해 김대중의 선처를 당부했다. 김대중의 형량이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직후인 이듬해 2월 14일 2차 편지를 보내 전 대통령에게 감사의 뜻을 전달했다. 1983년에는 1월 31일에는 ‘뉴스위크’지 회견에서 한국 민주화와 인권 상황에 대한 입장 표명을 했고, 미국에서 유니언신학대 구제위원회 고문, 국제고문희생자구원위원회 고문과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활동하고,[41] 재미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창설해 미주 지역에서 한국의 민주화에 관심을 기울이다가 1985년 2월 8일 귀국하였다.
그러나 불과 1년 6개월 전인 1983년 8월, 필리핀의 야당 인사 베니그노 아키노가 미국 망명길에서 돌아오다가 마닐라 공항에서 암살되는 사건이 있었기에, 당시 김대중의 귀국 결정에 대해 주변 인물들은 물론이고 미국 정부까지도 만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은 조국의 상황을 외면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귀국을 강행하였다. 당시 전두환 정부는 김대중이 귀국할 경우 남아있는 형을 집행하기 위해 교도소에 재수감하겠다고 경고하였고, 이에 미국 정부는 전두환 정부가 김대중의 무사 귀국을 보장하지 않으면 당시 논의중이던 전두환의 방미를 백지화시키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케네디 의원과 당시 테네시주 상원의원이던 앨 고어 전 부통령 등은 김대중의 안전한 귀국을 보장하라며 전 대통령에게 편지 등을 보냈다.
이에 전두환 정부는 한발 물러서서 김대중에 대해 가택연금 외에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으며, 그래도 전두환 정부의 김대중 암살을 우려한 미국 하원 의원 토머스 폴리에타와 에드워드 페이언을 비롯한 여러 저명인사들이 김대중을 에워싸고 김포공항 입국장까지 동행한 덕분에 별다른 불상사는 없었다. 하지만 김대중은 김포공항 입국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안기부 요원들과 경찰들에게 강제 연행되어 동교동 자택에 연금되었다.[42] 1985년에는 김영삼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에 취임했다. 1986년 신민당 상임고문으로 추대됐으나 당국에 의해서 취임이 저지되었다.[36]
리처드 앨런 미 전 안보보좌관은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김대중 구명운동에 관한 비화를 공개했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며 한국에서 이와 관련해 잘못 알려진 사실과 전두환 신군부의 역사왜곡은 놀라울 정도라고 밝혔다.[43]
2004년, 이 사건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79년 12·12사태와 80년 5·18을 전후해 발생한 신군부의 헌정파괴범행을 저지하거나 반대함으로써 헌법의 존립과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행한 정당한 행위이므로 형법 제20조의 정당행위에 해당, 범죄가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44]
1986년 11월 5일 13대 대통령 선거 불출마 선언을 하였다.[45] 1987년 4월에는 통일민주당 상임고문으로 있다가 7월 9일 사면복권되었다.[45] 7월 10일 이중재·노승환·이용희·정대철 등이 함께한 동교동 자택 기자회견에서 '나는 대통령이 되는데 관심 없다. 현재로서 불출마 선언은 변함이 없다.'라고 발표하였다.[45] 그러나 하루만에 불출마의사를 번복하게 된다.
1987년 7월 11일 '신동아'와 가진 인터뷰에서 '작년의 불출마 선언은 전두환대통령이 자발적으로 대통령직선제를 하면 불출마 한다고 한 것이지, 이번처럼 국민의 압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전두환대통령은 4·13 호헌 선언으로 이미 내 제의를 거부한 것이다. 그런데 왜 그 약속에 내가 묶여 있어야 하느냐는 논리가 나온다.[45]'고 하였다.
7월 17일 김대중을 지지하는 단체인 민권회가 '11·5 불출마 선언' 백지화를 결의함으로써 김대중의 불출마선언 무효를 공식화한다.[45] 한편 통일민주당에서는 김대중의 입당을 요청하였고, 김대중계는 김대중의 통일민주당 입당여부를 놓고 의견이 둘로 나뉘게 되었다.
이중재 등 원내 세력을 주축으로 한 입당론자들은 '김대중 의장 자신이 만든 당에 빨리 입당하는 것이 순리이며 그 안에서[45] 대통령 후보를 단일화 하는 것이 국민적 바람이다. 두 김씨의 정면대결은 민주화의 전망을 어둡게 하는 것이며 김의장의 입당 지연이 이러한 정면대결의 전조가 아닌가 하여 불안요소가 되고 있다.'며 김대중의 조기 입당을 주장했다.[46]
반면 한화갑 등 비서진과 김종완 등을 중심으로 한 민헌연 등 원외인사들은 '아무런 보장 없이 입당할 경우 민주당 테두리 안에 갇혀 행동반경이 좁아질 뿐만 아니라 일단 칼자루를 쥔 김영삼총재가 끝까지 후보를 고집할 경우 당내에서는 다른 방법이 없게 된다.'며 김대중의 조기입당 반대를 주장했다.[46] 김대중은 계보 내의 민주당 입당 반대 주장을 물리치고 결국 입당을 결심하게 되며, 8월 6일 김영삼과 만나 입당문제를 합의한 후, 8월 8일 통일민주당사에서 입당식을 갖고 고문에 취임한다.[46]
8월 11일 김영삼과 회동을 갖고 대통령후보 단일화 문제를 협의햇으나, 김영삼의 조기 단일화 주장과 김대중의 개헌 협상 후 조정 주장이 맞서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46]
1987년 9월 9일 전라남도 목포를 방문하였다. 광주-목포 순방이 기대 이상의 열기를 보였다고 판단한 김대중은 9월 14일 김영삼과 만나 36개 미창당 지구당 결성을 요청한다. 김영삼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총선에서의 조직책 선정이나 다름없는 36개 지구당을 창당하는 것은 적전 분열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경선을 하지 않을 바에는 굳이 잡음의 소지가 있는 36개 지구당 창당은 필요없는 것이다.[46]'라고 주장하며 김대중의 주장을 일축한다.[46] 계속된 토론에도 김영삼과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였다.
9월 30일 13대 대선후보 출마를 놓고 김영삼과 야당 후보단일화 협상을 벌였으나 양자간의 시각차이만 확인하고 결렬되었다.[47] 10월 10일 통일민주당을 장악한 김영삼은 대통령 선거 출마를 발표하고 나서자 당내 경선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여있던 김대중은 10월 18일 통일민주당을 탈당하였다.[48]
11월 12일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대표 겸 13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이후 야당 후보였던 김영삼과 후보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채 1987년 12월 16일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611만 표를 얻고 낙선했다. 1988년에는 제13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1990년에는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의 3당합당 때 3당 야합 반대 투쟁을 선언하며 규탄하였다.[49] 1991년 4월 15일에 평화민주당을 신민주연합당으로 재창당한 뒤 총재에 취임했고, 곧 이기택이 총재로 있던 민주당과 합당하여 통합 민주당을 출범시켰다. 이어 1992년 5월 15일의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제14대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어 12월 18일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804만 표를 얻었으나 190만여표 차로 낙선하였다. 그는 선거 결과에 승복하며 12월 19일에 정계 은퇴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1993년 1월에 영국으로 출국하여 케임브리지 대학교 객원교수로 활동하다가 1993년 7월 귀국, 1994년 12월 아시아·태평양 민주지도자회의(FDL-AP, 통칭 아태재단)를 설립하고, 상임공동의장에 취임했다.[36] 3당통합이라는 태생적 한계와 김영삼 정부의 철학과 비전의 부족은 은퇴를 선언했던 김대중의 정계복귀를 수월하게 하여, 정계 은퇴를 번복하게 된다.[50]
1995년에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이후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 새정치국민회의 비례대표 14번으로 출마하였으나 13번까지만 당선되어 낙선하게 된다. 1997년 10월에는 자민련의 총재였던 김종필과 후보 단일화에 합의하고 1997년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1033만 표를 획득해 이회창을 누르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국민의 정부 출범하기 전 김영삼 정부 말년에 발생한 IMF 외환위기로 한국은 사상초유의 국가 부도에 직면해 있었다. 금융, 기업, 노동, 공공 4대분야에 일대 개혁을 단행하여 2001년 8월, 예상보다 3년을 앞당겨 IMF차입금을 전액 상환했다.
국민의 정부시절 안기부는 야권인사 및 반정부인사들을 상대로 휴대전화 상시도청을 했으며, 일부 여권인사도 포함되었다.[51]이 사실은 한나라당 정형근의원에게 처음으로 의혹이 제기되었으며 정부는 부인하였으나 끝내 사실로 확인되었으며, 당시 국정원장이었던 임동원, 신건 에게 징역형이 선고되었다.[52]
2000년 6월 15일에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 정상 회담을 통해 6·15 남북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같은해 분단 이후 최초로 선편을 통한 금강산 관광 사업이 시작되었다. 정주영 회장이 정부와 남북협상을 협조하기위해 현대아산을 설립하여 소떼 방북 등으로 대북 사업의 중심에 섰지만, 불법적인 외환 송금은 문제가 되기도 했다.[53] 1999년 5월에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 50인' 중 공동 1위에 선정되었고,[54] 2000년에는 햇볕정책을 통해 남북간의 관계를 진전시키고, 한국의 인권에 헌신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이를 두고 야당에서는 "노벨상 로비설"을 제기하며 김대중 노벨상 수상을 저지하기 위해 야당 의원들이 노르웨이를 방문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위원회는 김대중의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일생의 투쟁과 평화를 위한 노력의 공로로 노벨상을 수여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노벨위원회의 군나르 베르게 위원장은 노벨상 로비설에 대해 “매우 무례하며, 위원회의 심사 절차 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김대중 측이 아닌 오히려 김대중의 정치적 반대자 등으로부터 상을 주면 안된다는 로비가 있었으며, 한국 내 특정지역으로부터 노벨상 수상을 반대한다는 편지 수천 통이 전달되었다”고 했다.
동티모르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 조제 하무스 오르타는 로비설에 대해 집요하게 묻는 월간조선 기자에게 “멍청한 소리 하지 말라”고 대답했다.[55] 이후 김대중은 2003년 2월 24일에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였다.
2004년 1월 29일, 재심을 청구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판결에서 무죄가 선고되었고, 3월 대통령 노무현이 탄핵당하자 심각한 사태라며 우려를 표명하고 위기국면 극복을 위한 노력을 주문하였다. 반면 김영삼은 사필귀정이라며 냉정한 반응을 보였다.[56] 5월 10일 유럽 3개국(프랑스, 노르웨이, 스위스)에서 순방과 함께 OECD, 노벨위원회, WHO에서 연설을 했다.[36]
8월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김대중에게 박정희 시절의 정치탄압에 대한 사과의 뜻을 전했다. 이에 대해 한 방송과 인터뷰에서 박 대표의 사과에 "마음 속 응어리가 풀어지는 것 같아다"고 회상했다.[57]
11월 14일, 그는 8박 9일 동안의 유럽 순방 일정을 마치고 낮 인천 공항을 통해 휠체어를 탄 모습으로 귀국했다. 유럽 방문 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초청으로 11월 18일 아칸소주 리틀록에서 열리는 클린턴 도서관 개관식에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순방 일정에 따른 피로 누적으로 미국 방문계획을 취소하고 조기 귀국했다. 6일 스웨덴 스톡홀름을 방문한 데 이어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노벨평화상 수상자 정상회의》에 참석해 기조연설을 했고, 로마에 본부를 둔 세계식량계획(WFP)을 방문했다. 김대중은 로마에서 열린 노벨평화상 수상자 정상회의에서 "북핵 문제가 평화적으로 해결돼야 하고 핵문제에 있어서 이중잣대는 안된다는 점 등 우리가 기대했던 것이 모두 반영된 최종 선언문이 채택됐다"고 말했다.[58]
1983년부터 현재까지는 미국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위원회, 국제고문희생자 구원위원회 고문과 미국 피츠버그 La Roche 대학교 이사로 있다.
자신이 지도자로 있었던 새천년민주당이 2004년을 기점으로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으로 분열하였고,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민주당을 떠나 열린우리당에 입당한다. 민주당은 김대중의 지지를 기대하였지만 오히려 그는 열린우리당을 자신의 “정치적 후계자”로 인정하였으며, 그를 지지하던 많은 세력은 민주당을 떠나 열린우리당으로 둥지를 옮긴다. 열린우리당이 대통합민주신당으로 바뀐 뒤에는, 대통합민주신당을 지지하였다.
2008년 10월,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이 100억 원대 CD를 비자금으로써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이에 대해 박지원 의원이 의혹이 있으면 즉각 수사하라며 반박했다.[59] 검찰 관계자는 이에 대해 "자금 추적 결과 김 전 대통령과 무관한 것으로 밝혀졌다"고 말했다. [60]
2009년 6월 11일 저녁 7시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열린 6·15 남북공동선언 기념행사에 특별강연자로 참석해 북한의 2차 핵실험으로 시작된 한반도 위기와 노 전 대통령 사망, 민주주의의 위기 등에 대한 생각을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전 대통령과 같은 '독재자'에 비유하며 이명박 정부를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북핵 위기와 관련해서는 이명박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을 동시에 비판했다.[61]
2009년 8월 12일, 최경환 비서관은 DJ의 비자금 조성과 재산 해외 도피 의혹을 제기한 중앙일보의 《문창극 칼럼》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명예와 인격을 훼손"했다면서 "중앙일보와 문창극 대기자에게 깊은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다. 중앙일보는 이날 37면에 김대중 전 대통령 측이 최경환 비서관 이름으로 낸 반론보도문을 실었다. 이 반론문에서 최 비서관은 "김 전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 전, 대통령 재임 시, 대통령 퇴임 후를 막론하고, 어느 시기 어느 경우에도 불법 비자금을 가진 적도 만들어 본 적도 없다"며 "문 대기자의 주장은 어떠한 근거도 없는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의 명예에 심각한 해악을 끼칠 뿐이다"라고 주장했다. 특히 최 비서관은 "문 대기자가 김 전 대통령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기 위한 근거로 삼은 월간조선의 기사나 일부 인사들의 발언 등은 이미 언론들 스스로의 사과와 확인을 통해, 법원의 판결과 검찰의 공식발표를 통해 전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면서 그 '허위보도 확인 사례'를 조목조목 밝혔다.[62]
2009년 8월 18일, 도널드 그레그 코리아소사이어티 이사장은 KRB 한국라디오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북핵 문제로 얼어붙은 북미관계를 풀기 위해 오바마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냈고 이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클린턴 전 대통령이 북조선 방문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올해 초 오바마 대통령에게 난항을 겪고 있는 북미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도록 조언하는 편지를 써 달라고 김 전 대통령에게 요청했고, 이에 따라 지난 5월 북조선을 방문한 빌 클린턴 전 대통령에게 편지가 전달됐다는 것이다.[63][64] DJ 사후 이희호 여사와 클린턴 전 대통령과의 통화 내용에 의하면 김대중은 클린턴 전 대통령이 방북하기 전 "미국의 (대북) 정책을 바꿔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을 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이희호 여사에게 전화를 걸어 "나는 김 전 대통령께서 늘 하셨던 일을 발판 삼아 했을 뿐이고, 제가 할 수 있었다는 건 큰 영광이었다"며 최근 방북으로 억류됐던 여기자 2명을 데려온 것이 김 전 대통령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강조했다. 이어 클린턴 전 대통령은 "그는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나를 지원해준 친구였다"고 애도를 표하고는 "김 전 대통령을 평생의 친구로 생각할 것"이라고 말했다.[65]
2009년 9월 23일, 미국 시사주간 뉴스위크에서 조국의 정치,경제,사회적 변혁을 이끈 11인 지도자 '트랜스포머'로 김대중을 선정했다.
2009년 12월 19일,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 인터넷판이 올해 세상을 떠났지만 잊혀지지 않을 저명인사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포함해 전 세계 36명의 명사를 선정해 소개했다. 뉴스위크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삶을 시작할 수 없다"는 미국의 성직자 헨리 반 다이크의 말을 인용하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해 정.재계, 연예계, 학계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저명인사 36인은 올해 세상을 떠났지만 사람들의 뇌리 속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특히 뉴스위크는 김 전 대통령은 1997년 한국의 대통령에 당선될 때까지 군부 독재에 항거하고 망명과 투옥, 납치, 암살 위협 등 고난의 세월을 이겨낸 야권 지도자였다고 소개했다. 또 김 전 대통령은 재임시 남북 화해를 증진시킨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고 덧붙였다.[66]
2009년 8월 20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한국·미국·일본의 지식인들이 남북화해와 동북아의 평화를 촉구하는 3개국 지식인 110명의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평화선언을 제안한 와다 하루키 도쿄 대학 명예 교수는 “성명서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 후퇴는 있을 수 없다는 김 전 대통령의 유지를 이어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와다 교수는 당시 북한의 로켓 발사와 유엔 제재 등 악순환이 이어지자 3국의 지식인들에게 공동선언을 제안했다. 지식인들이 호응했고 곧바로 문안 작성에 착수했다. 그러나 문안 합의를 위한 지식인들의 토론이 길어지면서 문구 수정 작업에 반년 이상 걸렸다고 한다. 와다 교수는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 당시 구명운동을 벌인 후 꾸준히 한반도 평화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온 대표적인 지한파다.[67]
2009년 7월 13일, 흡인성 폐렴 증세로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였다.[68] 이명박 대통령, 김영삼, 전두환 전 대통령과 박근혜, 박희태 한나라당 전·현직 대표,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 민주당 정세균 대표, 창조한국당 문국현 대표,반기문 UN 사무총장, 마틴 유든 주한 영국 대사, 캐서린 스티븐슨 주한 미 대사, 청융화 중국 대사, 여성 인권운동가 시린 에바디,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 등 각계의 인사들이 문병을 왔으며, '쾌유기원' 촛불 집회가 열리기도 했다. [69][70][71]
초기엔 병세가 호전되기도 했으나 점차 악화되어 결국 2009년 8월 18일 오후 1시 43분 1달여에 걸친 투병 끝에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사망하였다.[72][73][74][75][76].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서거한 김 전 대통령의 영혼을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맡기시며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는 모든 대한민국 국민에게 평화와 힘을 주시도록 하느님의 축복을 진심으로 간구한다"고 밝혔다.[77]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애도 성명을 통해 "용기있는 민주화와 인권 투사인 김 전 대통령의 서거로 슬픔에 빠졌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그는 "김 전 대통령은 한국의 역동적인 민주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 정치운동을 일으키고 이끌어 오는데 목숨을 바쳤다"면서 "그의 조국에 대한 헌신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지칠줄 모르는 노력, 자유를 위한 개인적인 희생은 고무적이며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 국무부도 김 전 대통령의 서거에 애도의 뜻을 표명했다. 이언 켈리 대변인은 정례브리핑에서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한국 국민들과 함께 애도한다"면서 "유가족과 한국 국민에게 조의를 전한다"고 밝혔다. 켈리 대변인은 이어 "김 전 대통령은 한국 국민의 민주주의 열망에 영감을 일으킨 지도자이자 상징이었다"면서 "한반도 평화에 대한 기여로 2000년에 노벨상을 수상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부인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과 함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에 애도를 표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빌 클린턴재단 홈페이지에 올린 성명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용감하고 강력한 이상을 가진 지도자였다"며 "한국이 심각한 경제위기를 넘어서게 하고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길을 닦고 국제적으로 인권을 보호하는데 앞장섰다"고 김 전 대통령의 업적을 기렸다. 그는 "김 전 대통령이 대통령이 된 후 나는 남.북한의 화해를 위해 그와 함께 일하는 영광을 누렸다"며 "햇볕정책이 한국 전쟁 이후 어느 때보다도 영속적인 평화에 대한 희망을 제공했다"고 평가했다. 이어 그는 "부인 힐러리와 나는 우리의 좋은 친구였던 김 전 대통령을 그리워할 것"이라고 애도의 뜻을 전했다.[78]
미국 보수주의를 대표하는 워싱턴 싱크탱크인 헤리티지 재단의 대표 에드윈 퓰너는 "김대중은 진정 역사적인 인물이었다. 오늘 한국은 거인을 잃었고, 나는 절친했던 벗을 잃었다."며 애도를 표했다. 잭 프리처드 한미경제연구소 소장은 "김 전 대통령은 무엇보다도 한국 민주주의의 얼굴로 기억될 것"이라며 "비단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는 사실뿐아니라 한국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통찰력을 지녔다는 점에서 그의 비범한 삶 전체가 기억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프러처드 소장은 또 "아시아 금융위기 당시 보여준 김 전 대통령의 리더십과 역사적인 평양방문은 그가 남긴 현란한 유산 가운데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고인의 업적을 기렸다. 전 주한 미국대사인 도널드 그레그 코리아소사이어티 이사장은 "그의 서거 소식에 큰 슬픔을 느낀다"면서 "50여년간 아시아와 관련된 일을 해오면서 내가 만난 가장 위대한 아시아인 3명이 바로 김 전 대통령과 중국의 덩샤오핑, 싱가포르의 리콴유였다"고 말했다. 또한 “김 전 대통령은 한국에 강력한 민주주의를 가져왔고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남북의 화해를 향한 중대한 진전을 이뤄냈다.”고 평가했다. 그는 시간이 갈수록 그의 업적에 대한 평가와 명성은 더욱 높아질 것으로 확신한다고 덧붙였다.[79] 제임스 레이니 전 주한 미국대사는 "평생을 민주화와 한국의 발전 그리고 한반도 문제의 해결을 위해 헌신해온 분"이라며 "노벨 평화상을 충분히 받을 자격이 있는 분이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어 "김 전 대통령은 삶 자체가 민주주의와 인권향상을 위해 헌신한 삶이었으며, 특히 수십년간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 싸우며 투옥도 당하는 등 민주화 투쟁의 상징이었고, 영웅이었다"고 평가하면서 "매우 슬픈 일"이라고 추모했다.[80][81]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은 조문에서 "김 전 대통령의 1998년 런던 방문과 그다음 해 이뤄진 저의 공식 방한 당시의 행복한 기억이 떠오른다"며 "김 전 대통령은 세계 민주주의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중요한 분이고,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노력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해 정말 기뻤다"고 밝혔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마틴 유든 주한 영국대사는 이날 이희호 여사에게도 개인적인 위로 메시지를 전달했다.[82]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는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에 비통한 마음 금할 길이 없다"며 "김 전 대통령은 격동의 시기에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아시아 금융위기 시에는 한국의 빠른 경제 회복을 위해 국내외적으로 평생을 헌신하신 분"이라고 애석해했다. 브라운 총리는 또 "김 전 대통령은 2000년도에 한반도 평화 조성에 기여한 점을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고, 최근에도 김대중 평화센터를 통해 세계 인권수호를 위한 노력을 지속해 왔다"며 "영국 정부를 대신해 이명박 대통령과 한국 국민들에게 깊은 애도를 표한다"고 말했다.
아소 다로 일본 총리는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하며 "김 전 대통령의 업적에 깊은 존경심을 표한다"고 말했다. 아소 총리는 이어 김 전 대통령과 일본 정계 지도자들이 합심해 2002년 월드컵 한일 공동 개최를 포함해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한일 협력관계 구축을 위해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평가하며 김 전 대통령의 영면을 기원했다. 가와무라 다케오 관방장관은 "한일 관계를 비약적으로 진전시킨 대통령"이라고 애도하며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한일 파트너십을 선언하고 문화교류를 진전시켰다"고 회고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총리는 애도사를 통해 "한국의 현대 정치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김 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해 일본 국민을 대표해 심심한 애도의 뜻을 전한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남북통일에 대한 염원을 바탕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에는 역사에 길이 남을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고, 이를 계기로 노벨 평화상을 받는 등 아시아를 대표하는 지도자로서 손색이 없을 만큼 훌륭한 업적을 남겼을 뿐 아니라 한일 양국의 외교관계 개선에도 큰 기여를 했다"며 거듭 애도를 표했다. 제1야당인 민주당의 하토야마 유키오 대표는 성명을 내고 "한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며, 한국 근대화에도 큰 공헌을 하신 분"이라며 "김 전 대통령의 비보를 듣고 놀라움과 슬픔을 가눌 수 없다"고 애도했다. 고노 요헤이 전 중의원 의장은 담화를 통해 "국내외를 통틀어 가장 존경하는 선배이자 친구였다"면서 "서거 소식을 들으니 매우 유감이다"라고 애도했다.[83]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은 친강 외교부 대변인을 통해 김 전 대통령을 “중국 국민의 가까운 친구”라면서 “중국 정부와 국민은 그가 한·중 관계 개선을 위해 쏟았던 노력을 잊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은 조전을 보내 "김대중 선생님은 나의 오랜 벗으로 중한관계 발전을 위한 그분의 공헌을 잊지 못할 것"이라고 애석해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조전을 통해 애도를 표시하며 "김 전 대통령은 한국의 국경을 넘어 국제적으로 존경받는 정치인이자 민주주의자였다"면서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 그리고 동북아의 평화와 안전을 위한 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업적은 잊히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메르켈 총리는 이어 "독일과의 오랜 인연으로 독일인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져 있는 김 전 대통령의 서거로 독일연방공화국은 좋은 친구를 잃었다"면서 "그는 대통령 재임기간 양국관계의 심화와 교류강화를 통해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고 평가했다. 김 전 대통령의 40년 지기인 리하르트 폰 바이체커 전 독일 대통령은 김 전 대통령의 서거에 '쓰라린 아픔'을 느낀다고 밝혔다. 폰 바이체커 전 대통령은 김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 연합뉴스에 "나의 오랜 친구인 김대중 전 대통령과 쓰라린 아픔으로 작별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김 전 대통령은 불굴의 용기, 자유 민주주의를 위한 사랑, 그리고 무엇보다 한민족 전체의 평화를 위한 탁월한 기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모범이 됐다"고 강조했다.
프랑스 정부는 베르나르 쿠슈네르 외교부 장관 명의의 성명을 통해 김 전 대통령의 서거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했다. 쿠슈네르 장관은 성명에서 "김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해 평생을 바쳐 지칠줄 모르고 투쟁한 용기있는 정치인이었다"면서 "또한 인권과 평화를 위해서도 헌신한 고인의 명복을 빈다"라고 애도했다. 인권 운동가 출신의 쿠슈네르 장관은 "김 전 대통령은 한국에서 뿐만 아니라 이 같은 중요한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헌신하고 있는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지도자"라고 밝혔다.[84]
국장 기간 중 각국 지도자들과 42개국이 조전을 보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기남 조선노동당 비서를 단장으로 한 특사 조의조문단을 비롯 미국, 중국, 일본 등 11개국이 영결식에 고위급 조문단을 파견하였다. 세계 언론들도 서거 및 국장 소식을 비중 있게 다루었다.[85] 이에 대해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문정인 교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제적 비중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라며 “한국이 아니라 전 세계가 큰 지도자를 잃었다”고 말했다.
삼성, LG, 현대자동차, 포스코 등 주요 대기업들은 김 전 대통령이 외환위기 이후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춘 자율적인 구조조정 시스템을 도입, 기업의 체질개선 등에 큰 역할을 했다고 고인을 회고했다. 경제 단체들도 외환위기 극복에 공헌했던 김 전 대통령의 서거에 일제히 깊은 애도를 표했다.[86]
한편 생전에 김대중을 강하게 비난했던 김동길 전 연세대 교수가 DJ 사후 잇달아 온건한 추모의 변을 내놓았다. 김 전 교수는 21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김대중 선배님 전상서’라는 제목의 글에서 “저승길을 떠날 때 별로 고생하지 않고 편안하게 가는 것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다섯 가지 복중에 하나라고 들었습니다”라는 말을 시작으로 DJ 서거에 대한 느낌을 적어나갔다. 김 전 교수는 “덕스러운 삶이었기에 한나라의 대통령자리에도 올랐고, 만인이 부러워하는 노벨평화상수상자도 되셨을 것 아닙니까. 우리나라의 전직 현직 대통령들이 모두 병문안 가서 쾌유를 빌었다는 것도 사람 사는 세상에 흔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라며 DJ의 삶을 기렸다. “서거의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미국의 대통령을 비롯하여 영국 수상, 독일수상이 앞을 다투는 듯 먼저 애도의 뜻을 표하였고, 이웃나라 일본의 국영방송 NHK는 다른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선배님의 서거소식을 국민에게 알렸다고 들었습니다”면서 세계적 명성을 얻은 DJ에 대한 존경의 마음도 표현했다. 개인적인 인연을 강도하면서 애도를 나타내기도 했다. 김 전 교수는 “군사정권하에서 여러 동지들과 함께 민주화의 투쟁을 하던 때에는 (DJ가) 불러서 점심 또는 저녁을 사주신 적도 있고 저도 후배로써의 도리를 다하노라고 최선을 다 한 것도 사실”이라며 “그 때(죽은 이후)에는 다시 만나게 될 것으로 믿고 싶습니다. 아무렴 깊은 인연을 가졌거늘, 영영 다시는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밝혔다. 그는 마지막으로 “언젠가는 다시 만나서 흉금을 터놓고 따져야 할 일도 있습니다마는 오늘은 그런 마음이 되지가 않습니다. 선배님은 통일된 조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고 싶으셨을 텐데, 그 뜻을 이루지 못해 유감이시겠습니다”라며 글을 끝맺었다. 그는 이어 22일에는 ‘김대중 형님께’라는 더욱 살가운 제목의 글을 올렸다. 김 전 교수는 “한 시대의 풍운아 김대중 형을 ‘형님’이라고 부르고 싶은 사람은 부지기수이었을 것입니다. 저도 그런 자들 중의 한 사람이 되어 그렇게 불러보고 싶은 것뿐이니 너그럽게 받아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앞서 그는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직후인 19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는 우리 모두에게 착잡한 심정과 인생의 무상함을 절실히 느끼게 한다”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고 이제 평화롭게 그 생이 막을 내렸으니 당장에 할 말을 찾기 어렵다”고 말했다.[87]
2009년 11월 13일, 김 전 대통령의 추모행사가 일본 도쿄 아사히신문사에서 열렸다. 김 전 대통령의 민주화운동 시절과 대통령 재임시 인연을 맺은 일본 정계, 학계, 종교계 인사와 교포 등 200여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한 ‘김대중 대통령을 추모하는 모임’이 주관했다. 한·일 양국의 정·관계, 학계, 종교계 인사 400여명이 참석한 이날 행사는 김 전 대통령 추모영상 상영과 추도사, 성경 낭독과 기도, 헌화 순으로 3시간 동안 진행됐다. 일본 측에서는 고노 요헤이 전 중의원 의장과 센고쿠 요시토 행정쇄신상이 인사말을 하고, 와다 하루키 도쿄대 교수와 이토 나리히코 주오대 교수가 추모사를 했다.[88]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정해졌으며, 영결식은 23일 여의도 국회광장에서 거행되었다. 장례를 주관하는 장의위원장은 한승수 국무총리가 단독으로 맡았다. 이상은 사망 이튿날인 2009년 8월 19일 오후 8시에 열린 임시 국무회의에서 결정되었으며 유족측과 이명박 정부는 서로 합의하여 국장으로 치루되 경제위기를 고려해 6일장으로 결정하였다.[89]
장지는 국립서울현충원으로 결정되었다. 당초 국립대전현충원, 국립 5∙18민주묘지, 고향인 신안군 하의도, 용인의 가족묘 등이 거론되었는데, 유족들의 뜻에 따라 국립서울현충원으로 결정된 것이다.[90]
2009년 10월 5일에는 그의 비석이 세워졌는데 충남 보령의 오석(烏石)으로 제작된 묘비에는 전면과 측, 뒷면에 각각 `제15대 대통령 김대중의 묘'란 문구와 고인의 주요 공적, 경력, 가족사항 등이 기록돼 있다.[91]
노무현은 1994년 발간된 그의 자서전에서 김대중에 대해 정치 지도자가 갖춰야 할 '권력 장악 능력', '살림 살이 솜씨', '역사의식'을 두루 갖춘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또 그는 김대중은 끊임없이 배우고, 노력하고, 발전을 거듭하며, 정말로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이런 평가와 함께 노무현은 그가 김구 선생과 필적할만한 '지도자'로써 존경한다는 뜻을 나타내기도 했다.[92]
또 김대중은 군사 정권에 대항하며 납치당하기도 하고 사형 선고를 받으면서도 신민당과 평민당 등의 야당의 지도자로서 권력에 대한 끊임없는 견제를 통해 민주화의 결실을 이뤄내는데 큰 역할을 했다.[93]
대통령직에서 김대중은 과감한 재정·금융 긴축과 대외개방, 금융 및 기업의 구조조정 등의 경제개혁으로 1997년 11월부터 시작된 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의 외환위기를 당초 계획보다 조기에 극복했다는 평가가 있다. 흡수통일을 파기하고 햇볕정책이라는 이름의 대북포용정책을 견지하여, 분단이 고착화되고 군사적대치관계에 있던 기존의 남북관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이를 토대로 2000년 한국인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해 한국의 위신을 높였다. 에이펙이나 아셈처럼 세계 강대국들이 모두 참석하는 국제회의에서도 김대중은 거의 언제나 첫 번째의 발언권을 부여받았고, 참모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의 공식일정은 전임 대통령들의 두 배가 넘었다.[94]
2001년 국가인권위원회를 설립해 여성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인권을 증진하였다는 평가가 있다.
역대 정권 중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 재임 시절에 우리나라의 경상수지 흑자가 가장 많이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김대중 정권은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국란이라는 외환위기 직후 취임했지만, 대외 지급능력을 의미하는 외환보유액 확충과 물가 관리 측면에서도 선전했다. 그러나 경제가 파탄 난 외환위기 직후에 출범했기 때문에 경제성장률과 고용 측면에서는 높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저성장 기조 탈피 등 미완의 과제가 있기는 하지만 국가적인 재앙인 외환위기를 극복한 점만으로도 김대중 정권이 경제 측면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19일 한국은행과 통계청 등에 따르면 김 전 대통령 집권 시기인 1998~2002년 경상수지 흑자는 906억달러 증가했다. 연평균 증가액은 181억1천400만달러로 가장 많았다.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경상흑자에 따른 외화 유입 증가로 외환보유액도 많이 늘어났다. 김영삼 정부 말기인 1997년말 204억600만달러에 불과하던 외환보유액은 김대중 정부 말기인 2002년말에는 1천214억1천300만달러로 늘어나면서 5년간 1천10억700만달러 증가했다. 이로 인해 세계 4대 외환보유국이 되었다. 연평균 증가액은 202억100만달러로 노무현 정부의 281억6천200만달러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규모다. 김대중 정부 때는 물가도 비교적 안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김대중 정부 시절 연평균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연평균 3.5%로 노무현 정부 때의 3.0%에 이어 두 번째로 낮았다. 물가 상승률은 노태우 정부 때 7.4%로 가장 높았고 전두환 정부 6.1%, 김영삼 정부 5.0% 등이었다. 외환위기에 따른 기업 부도 등의 여파로 경제성장률과 고용률은 이전 정권들보다 크게 낮았다.
김대중 정부 시절 국내총생산 증가율은 연평균 4.5%로 노무현 정부의 4.3%보다 높았지만, 전두환 정부(8.7%), 노태우 정부(8.4%), 김영삼 정부(7.1%) 등에 비해서는 낮았다. 그러나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성장률이 -6.9%에 이르렀다는 점을 감안하면 성적이 좋았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1998년 이후 성장률은 1999년 9.5%, 2000년 8.5%, 2001년 4.0%, 2002년 7.2% 등으로 4년 평균 7.3%였다. 연평균 고용률은 58.1%로 전두환 정부의 47.2%보다 높았을 뿐 김영삼 정부(60.3%), 노무현 정부(60.0%), 노태우 정부(58.4%)보다는 부진했다. 하지만 연간 고용률 추이를 보면 1998년에는 외환위기 여파로 56.4%까지 떨어진 후 2000년 58.5%, 2001년 59.0%, 2002년 60.0%로 매년 조금씩 회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윤덕룡 국제거시금융실장은 "김대중 정부 시절 외환위기 이후 달라진 경제 환경에 대응해 대외적인 안정에 신경을 쓰면서 순채무국에서 순채권국으로 전환될 수 있었으며 고금리 여파로 물가도 비교적 안정됐다"며 "외환위기 이후 개방을 확대한 여파로 경기 변동성이 커지자 기업의 투자가 위축되면서 성장 잠재력이 줄어들고 고용이 감소한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김 전 대통령의 경제적 성과를 꼽으라면 단연 '국가 부도' 직전까지 몰렸던 외환위기를 조기 극복했다는 점으로 평가된다. 김 전 대통령은 정보기술 산업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육성, 역대 정권 중 가장 큰 규모의 국제수지 흑자를 기록함으로써 우리나라는 IMF에서 빌린 차입금 195억 달러를 3년8개월 만에 말끔히 갚을 수 있었다. 삼성경제연구소 황인성 수석연구원은 "중화학 공업과 IT로 산업 포트폴리오를 구성, 고환율과 선진국 경기 호조라는 유리한 여건을 십분 활용한 게 IMF 조기졸업의 비결"이라고 설명했다. 현대경제연구원 유병규 경제연구본부장은 "IT 발전의 전기를 마련했을 뿐 아니라 우리 경제를 지식경제 시스템으로 전환해 IMF 졸업 이후의 경제 발전이 가능했다"며 "외신들이 한국을 'IMF 모범생'이라고 극찬했을 정도"라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 시절부터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한 외환보유액은 지난해 전 세계를 휩쓴 금융위기에서 큰 버팀목이 됐다. 한국 경제에 대한 각종 위기설이 불거질 때마다 막대한 외환보유액은 루머를 일축할 수 있는 근거가 됐다. 황 연구원은 "당시에 외환보유액을 확보하지 못했다면 지난해 금융위기 때 다시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최악의 국면에 처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외환위기로 혹독한 감원과 구조조정으로 고통이 극에 달했을 때 국민이 이를 감내하고 위기 극복을 위해 힘을 한 데 모을 수 있도록 했던 점도 빼놓을 수 없다. 한국경제연구원 허찬국 선임연구원은 "기업과 은행이 줄도산하고 순식간에 150만명이 일자리를 잃는 '재앙'이 덮쳤는데도 사회적인 파장을 최소화하면서 조기에 수습한 것은 김 전 대통령 특유의 '설득의 리더십' 덕분이었다"고 평가했다. 이 밖에 기업 재무구조, 고용 유연성, 공공부문 개혁 등 우리 경제의 구조를 개선한 점도 김 전 대통령이 거둔 큰 성과로 꼽혔다.[95]
이명박 대통령은 월스트리트저널에 실은 특별기고문을 통해 김대중 정부의 업적을 극찬했다.[96] 이 대통령은 이 기고문에서 지난 97년 한국이 IMF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한 경험담을 자세히 국제사회에 소개했다.[97] 중앙일보는 '경제고비마다 직접 뛴 DJ'제목으로 10년전 외환위기를 맞아 당선 사흘만에 데이비드 립튼 미국 재무부차관을 만나 정리해고가 포함된 IMF협약 플러스 개혁추진을 약속하는 면접 시험을 통해 미국의 지원을 이끌어낸 점이 외환위기 극복의 전기가 된 것으로 분석하였다. 또한 국민과의 대화를 마련,진솔하게 국민을 설득시켜 개혁동참과 금모으기 운동을 벌이는등 국민적 힘을 결집시키는 한편 코드 상관없이 이규성 재정 경제부 장관,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등 능력위주 경제팀을 구성하고 금융,기업,공공,노동등 4대부문 개혁을 전투처럼 밀어 붙여 취임1년 반만인 1999년 8월15일 외환위기를 조기 극복하였다며 김대중의 리더십을 높게 평가하였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주말 발행된 중앙 선데이에 '97년 외환위기때 이회창 도운 과거 안묻고 코드 버렸던 DJ'제목으로 된 장문의 기사를 통해 97년 외환위기 진행및 극복과정과 관련하여 김대중이 보여준 뛰어난 환란극복 리더십을 높게 평가했다.[98]
또한 문화산업 발전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국내 연예인 뿐만 아니라 해외 스타들도 만나 대중문화의 발전에 관해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특히 서태지의 음악성을 비롯해 그가 청소년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을 높이 평가하며 공개석상에서도 역사에 길이 남을 가수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김대중 정부 당시 문화예산 비중이 역대 정권 중 가장 높았고, 그 예산을 통해 김대중 정부 시기를 지나면서 문화산업의 각 분야는 크게 발전했다. 그리고 문화산업진흥기본법은 지난 10년간 한국의 문화산업이 발전하고 한류라는 이름으로 세계로 뻗어나가는 데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특히 재임 당시 일본 영화 및 음악 등 대중문화 개방을 단행해 한일 관계 개선에도 기여했다. 또 김 전 대통령은 스크린쿼터를 잘 지켜내 영화인들의 작품 활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99]
미국의 정치학자 마이클 그린은 “DJ는 주변 4강과 모두 친하면서 대북관계를 개선하는, 한국에 꼭 필요하나 실현하긴 힘든 난제를 풀어낸 전무후무한 지도자”라 극찬했다. 워싱턴포스트 기자였으며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교 국제관계대학원 교수이자 한미관계연구소장를 맡고 있는 한국 전문가인 돈 오버도퍼는 그의 저서 《두 개의 한국》에 "1980년 필자의 대담에서 일부 고위 군 관련 인사들은 김대중이 과거에 북한의 사주를 받았거나 현재까지도 사주를 받는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 중 대다수는 김대중을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김대중과 여러 차례에 걸쳐 인터뷰해온 필자로서는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주장을 믿지 않았다. 1980년대 말 CIA 전문 요원 출신인 제임스 릴리 주한 미 대사는 김대중의 과거 행적을 면밀하게 조사한 뒤 그가 공산당에 가담했다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라고 기술하였다.
미국의 작가·미래학자인 앨빈 토플러는 전화를 통해[모호한 표현] “아내 하이디와 저는 대통령께서 최근에 아프시다는 소식에 마음 아파하고 있다. 대통령께서 쾌차하셔서 내외분과 저희 부부가 다시 만찬을 할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했다. 수년전 대통령과 가진 첫 만남 이래 대통령님을 계속 깊이 존경해 왔다. 김 전 대통령은 한국을 세계의 모범국가로 변화시키신 분이다. 무슨 일이든 저희 부부가 도와드릴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주저 없이 불러주시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MIT 언어학과 교수 노엄 촘스키는 “오래 기간 존경해왔다”며 “그는 남다른 용기를 갖고 일관되게 한 생을 산 사람이었다. 그의 삶은 한국과 세상 모두에 위대한 공적을 남겼다.”고 평가했다. 에즈라 보겔 하버드 대 명예교수는 “햇볕정책을 만들어낸 비전, 남북한, 중국, 일본, 그리고 서구 세계와의 화해 추구 노력을 존경한다. 김전 대통령은 우리시대의 진정한 위인 가운데 한 분이다”고 강조했다.
로버트 루빈 전 미 재무장관은 “한국이 1997년말 외환위기를 극복한 것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리더십이 큰 역할을 했다”고 극찬했다. 최근 미국의 어려운 경제상황을 타개하는데 정치 시스템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1998년 IMF 외환위기 당시 김대중의 리더십을 상기하며 “미국 대통령에 출마하면 어떻겠느냐?”는 말도 했다.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은 김대중을 “위대한 비전, 위대한 상상력”을 가진 인물로 평가했다. 다이안 파인스타인 미 상원의원은 “역사 속의 인물인 김대중 대통령과 같은 비전을 가진 분을 지도자로 가진 한국민은 행복하다”고 말했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 국무장관은 “김 대통령은 비전이 있고 그것을 조직적 방법으로 추진하는 뛰어난 인물로 자신의 업적 위에 우리가 대북관계를 쌓을 수 있도록 허락했다”고 평가했다.
제임스 울펀슨 전 세계은행 총재는 김대중에 대해 “엄청난 탄압에도 좌절하지 않고 마침내 자신의 뜻을 이뤄낸 김대통령은 만델라의 삶을 연상시킵니다. 민주화뿐 아니라 경제의 재구축에 성공하고 있는 김대통령은 세계를 감동시키는 지도자 입니다”라고 평가했다. 미셸 깡드시 전 IMF 총재는 고별기자 회견에서 “한국은 김대중씨를 대통령으로 두고 있다는 자체를 행운으로 받아들여야 할것입니다. 경제위기를 맞아 몇가지 고비가 있었지만 IMF와 미국 그리고 국제사회 전반은 김대통령을 믿고 한국을 밀어준 측면이 적지 않은게 사실입니다”고 밝혔다. '레이건 신화' 주역 마이크 디버 전 대통령 특보는 “김대통령은 메이크 업이 필요 없는 논픽션 드라마의 인생을 살아왔다”며 “이름 석자만 갖고도 국제사회에 영향을줄 수 브랜드”라고 극찬했다. 미국 망명 시절에 하버드대학교에서 펴낸 《대중경제론》과 《3단계통일론》는 하버드대학 교재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리오넬 조스팽 전 프랑스 총리는 "김대통령은 나에게 살아가야 할 힘, 살아가야 할 도덕적 스승이자 길잡이다"라고 극찬했다. 요하네스 라우 전 독일 대통령은 "김대통령에 대한 존경심이 독일이 한국의 금융위기 때 한국을 돕는 동기가 됐다"고 밝혔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한미 정상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대북정책에 대해 “김대통령은 지금 한반도의 정세를 본질적으로 변화시키는 전주곡을 연주하고 있습니다. 김대통령의 일관된 비전과 강인한 의지는 이를 성공작으로 만들것이라 믿습니다. 그렇게 되면 국방예산을 줄여 사회복지를 늘릴 수 있겠지요”라고 평가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이 김대중에게 “나에게 1년이라는 시간만 더 있었다면 한반도의 명운이 달라졌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고 밝혔다. 한종우 시라큐스대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은 민주화에 가장 큰 공헌을 하셨고, IMF 경제위기를 극복하시고, 북한과의 교류를 탄탄대로에 올려놓으셨다”고 평가했다.
일본 경제평론가 오마에 겐이치 미국 UCLA대학 교수는 "김 대통령처럼 한국 경제에 공헌한 대통령은 없기 때문에 한국민은 떠나가는 김대중씨를 마음으로부터 감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세계에서 단임 5년에 지금처럼 많은 변화를 이뤄낸 대통령은 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며 "5년사이에 한국경제를 V자 회복 시킨 김 대통령은 희대의 명대통령"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그는 이어 한국과 일본 경제를 비교, “한국은 혼미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일본을 뒤로 하고 여러 분야에서 전망이 좋아졌다”면서 “장거리 트랙경기로 친다면 일본보다 2 바퀴정도 뒤쳐졌던 한국이 거의 어깨를나란히 할 정도로 다가온 느낌”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살아남아 더욱 강해진 재벌의 총수들은 결코 김대중씨에게 감사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100] 세계적 경제전문 통신인 블룸버그는 "김 대통령은 경제ㆍ정치ㆍ외교 분야에서 이룬 업적으로 반세기 역사상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남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에 앞서 블룸버그는 "77세의 김대중씨는 한 세대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지도자의 업적을 이뤘다"며 극찬했다.
조지프 바이든 미국 부통령이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는 김대중이다. 바이든 부통령은 햇볕정책의 열렬한 지지자이기도 하다. 호콘 망누스 노르웨이 황태자는 “김 전 대통령이야말로 민주화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그 자체를 살아오신 분”이라고 평가했다. 에리크 손하임 노르웨이 환경개발부 장관은 “저의 개인적 영웅이다. 다른 나라에서 하지 못했던 평화에 대한 많은 일을 하셨다”고 평가했다. 평화학자 요한 갈퉁 교수도 “그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중도’이며 대단히 인도주의적인 인물이다”라고 평가했다. 리하르트 폰 바이체커 전 독일 대통령은 “친구를 넘어 인류애를 갖춘 인격자”라고 김대중을 평하곤 했다. 노르베르트 람머트 독일 국회의장은 김대중을 만난 자리에서 “독일에서 당신만큼 영향력 있는 한국인은 없다”고 거듭 밝힌바 있다.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대사는 "한국 국민과 유가족들이 김 전 대통령의 삶에 대해 큰 자부심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 그는 용감했고 민주주의를 위해 계속 투쟁했으며 한국 민주주의를 위해 많은 기여를 하는 한편 햇볕정책을 통해 대북관계에 큰 진전을 이뤘다고 평가했다.
에곤 바르 전 독일 경제협력부 장관은 “김대중 대통령이 지구 상에 마지막 남은 최악의 분단을 극복해 냉전시대에 종말을 고하고, 평화와 긴장완화, 교류협력을 강화하는 대북정책을 추진해온 것이 한국인들에게는 커다란 행운”이라고 평했다. 그는 이어 “남한과 북한에서 제기되는 수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국 민족에게 미래의 희망을 주는 정책을 끝까지 추진하는 김대통령의 끈기에 탄복했다”면서 노벨 평화상 수상은 이에 대한 국제적 인정의 증표라고 덧붙였다. 하르트무트 코쉭 독일 연방하원의원은 김 대통령의 개혁 성과, 남북화해를 위한 기여를 기리고자 책자를 발간하게 됐다면서 퇴임 후 적절한 시기에 독일과 유럽을 방문해 강연 등을 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이 책에서 김 대통령에 대한 평가 글을 쓴 필자들에는 요하네스 라우 현 대통령, 리하르트 폰 바이체커 전 대통령을 비롯한 독일의 정치, 경제, 학계, 언론계 등의 주요 인사들이 망라돼 있다. 곧 퇴임해 권력을 잃게 될 한국 대통령의 생애와 철학, 정치 등에 관해 평가하는 글을 이토록 많은 유명 인사들이 원고료도 받지 않은 채 기고한 일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독일 국방장관을 지낸 폴커 뤼헤 하원 외무위원장은 “유럽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비교될만한 인물은 하벨과 바웬사 정도일 것”이라면서 “그러나 이들보다 더 큰 고통을 받은 김 대통령이 일관된 원칙을 세워놓고 꾸준히 추구해온 김 대통령의 인생에 관해 엮은 이 책을 젊은이들이 꼭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 뮌헨 대학교 정치학과의 고트프리트 카를 킨더만 교수는 “지난 2000년의 역사적인 첫 남북 정상회담이 남북한 간의 긴장완화, 교류 및 공동사업을 위한 희망찬 전기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킨더만 교수는 “최근 한국 내에서 김 대통령이 이 획기적 계기 마련을 위해 물질적 수단을 투입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으나 과거 서독 정부도 동서독 관계를 완화하고 생활수준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다양한 경로를 통해 동독에 물질적 지원을 했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싶다”고 강조했다.
김대중을 만나 대화를 나눴던 울리히 벡 독일 뮌헨대 교수는 김대중에 대해 “분명한 분석, 설득력 있는 주장에 놀랐다. 많은 정치가들을 만나보았으나 이렇게 명확한 비전을 가진 분은 만나지 못했다” “완전히 설득당했다”다고 평가했다.[101][102][103][104][105]
이내영 고려대 교수는 “DJ 정권은 최초의 개혁정권”이라며 “생산적 복지라는 개념을 통해 소외계층, 서민들을 위한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는데 주력했다”며 “그 전까지만 해도 복지문제는 유럽처럼 생산성이나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일방적 개념에 머물렀다”며 “복지증진을 경제성장, 경쟁력 향상과 동시에 추구, 과거와 차별화한 정책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이정희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고인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할 만큼 세계적 반열에 선 지도자였고 한국의 위상을 높였다”고 평가했다. 성균관대 김성주 교수는 “전직 대통령을 포함,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는 상황에서 DJ는 국가파산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국난 극복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 결과 2년 만에 외환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이는 IMF 관리체제 극복을 정책의 최우선으로 한 김대중 정부와 노사 간 화해 노력으로 가능할 수 있었다. 또한 DJ는 국민화합을 위해 용서와 화해의 정치를 폈다.”고 평가했다.
2009년 9월 23일 미국 시사주간 뉴스위크에서 조국의 정치,경제,사회적 변혁을 이끈 11인 지도자 '트랜스포머'로 김대중을 선정했다. 그는 계속된 암살 위협에도 불구, 평생 민주화에 헌신한 인물로 소개됐다. 1997년 대통령에 당선돼 한국 정치사상 처음으로 여야간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뤄냈으며, 재임 때 아시아 금융위기의 나락에서 한국을 구출했다고 덧붙였다.'햇볕정책'으로 남북관계 개선에 기여해 200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업적도 높이 평가했다.[106]
먼저 후보 단일화 실패와 정계 은퇴 번복에 대한 비판이 있다.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로 직선제 개헌을 통해, 정권교체에 대한 국민적 기대가 높았으나, 대선후보 자리를 놓고 김영삼과 갈등을 빚다가 야당 후보 단일화 실패로 김대중과 김영삼이 각기 출마해서 결과적으로 노태우가 어부지리로 당선된 것에 대한 비판이 있다.
대북 정책에 대한 비판이 있는데, 일부 보수언론과 보수단체에서는 햇볕정책에 의해 이루어진 대북 원조는 1998년 대포동 1호 미사일 실험, 1999년 제1연평해전, 2002년 제2연평해전 발발로 인해 실효성이 떨어진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북측에 5억달러가 송금된 대북 송금 사건에 대해서도 정상 회담의 대가로 북측에 현금이 건네진 것으로 햇볕정책에 투명성이 부족했다는 주장이 있다.[107]
김대중 정권때 발효된 신한일어업협정로 인해 발생된 한일간의 독도 영유권 문제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이 존재한다. 1999년 양국간에 신한일어업협정을 체결할 때 자원의 공동관리가 이루어지는 중간수역내에 독도가 포함되었고, 이 협정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논리에 법적인 근거를 부여하여 일본측 주장을 획기적으로 강화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108] 독도를 대한민국의 영토인데도 이를 중간수역으로 설정하면서 일본의 독도강탈 시도를 그대로 받아 들였다는 주장이다. 제성호 교수는 "현재 한일어업협정은 영토 훼손의 우려가 포함돼 있고 특히 일본학자들에 독도가 다케시마라는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이런 중간수역은 일종의 '분쟁수역'이라고 평했다.[109] 독도를 한일중간수역에 놓이게 한 신 한일어업협정을 수정해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 최낙정 전 해양수산부 장관은 "실효성이 없다"고 일축했다.[110] 협상을 다시 한다고 해도 일본이 독도를 우리 땅으로 인정해주지도 않을 것이고, 또 다른 마찰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실효성이 없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신 한일어업협정은 김영삼 정부 때부터 5년 간 진행되다 김대중 정부 들어 마무리 된 것"으로 "독도 영유권을 훼손했다고 보지도 않는다"고 말했다.[111] 또, 독도가 배타적 경제수역이 아닌 한일중간수역에 놓인 것이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빌미를 준 것 아니냐는 질의에 "어업협정은 영토 영유권 문제와는 무관하다"고 설명했다. "신 한일어업협정 조문에서 이 협정은 영유권에는 전혀 영향이 없다고 밝히고 있고, 헌법재판소나 국제사법재판소 역시 어업협정은 어업 문제에만 국한됨을 판시했다"고 덧붙였다. 오히려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이루어진 독도밀약과 한일협정이 독도가 우리땅임을 사실상 포기한 것이라고 밝혔다.[112][113][114][115][116][117]
김대중은 자유민주연합의 김종필과의 연정을 통해 집권했다. 그러나 곧 이은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원내 1당을 차지했고 연정상대였던 자유민주연합은 17석으로 원내교섭단체 요건인 20석을 확보하지 못했다. 이로인해 김대중이 총재(1995.09~2001.11)였던 여당은 의회 과반수를 점유하지 못하자 자유민주연합에 의원 3명(배기선, 송석찬, 송영진)을 입당시키는 이른바 의원 꿔주기를 통해 원내과반수를 확보했다. 이 때문에 "의회 민주주의의 왜곡", "정치후퇴" 라는 비판을 받았다.[118]해외에서까지 화재로 가십거리가 되기도 했다.[119]이에 자유민주연합의 강창희의원이 꿔주기에 반발하여 출당당하게 되자 장재식의원을 추가로 자민련에 입당시켜 끝내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였다.[120] 김대중은 의원꿔주기에 대한 비판에 대해 “인기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말했다.[121]
한편 집권기간 중 차남 김홍업과 3남 김홍걸이 뇌물수수죄로 구속되어 비판이 제기되기도 한다. 김홍업은 2003년 5월 기업체로부터 이권 청탁 명목으로 25억여 원을 받고, 정치자금 명목으로 22억여 원을 받은 후 증여세를 포탈한 혐의로, 김홍걸은 2001년 3월 체육복표 사업자 선정관련 로비와 공사수주 로비 대가 등으로 36억9000여 만원을 뇌물로 받고 2억2000여 만원의 증여세를 포탈한 혐의로 수감되기도 했다. 국민의 정부’ 시절 아·태평화재단 부이사장을 지낸 김홍업은 기업으로부터 금품을 받고 증여세를 포탈한 혐의로 징역 2년이 확정돼 1년6개월간 복역 중, 우울증 등의 증세로 형집행정지 결정을 받고 석방됐다. 홍걸은 '최규선 게이트'와 관련해 체육복표 사업자 선정 청탁 등의 대가로 기업에서 금품을 받은 혐의로 2007년 8월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는 등 집권기간 중 아들들이 비리혐의로 수감되어 청렴성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122]
2005년 4월 19일 SBS 뉴스추적에 의해 숨겨둔 딸이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방송은 2000년 한국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진승현 게이트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취재를 시작했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이 김대중의 딸이라는 김씨를 만나게 됐고, 결국 김대중이 국정원을 동원해 진승현에게서 돈을 받아 그들에게 전달한 것이 진승현 게이트라고 보도했다. 김씨는 SBS와의 인터뷰에서 “어머니로부터 당신이 1960년대 말 한정식 집에서 일하다 김 전 대통령과 만나 1~2년 연애하다 나를 낳았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자신의 출생에 얽힌 비밀과 그 동안 김대중측으로부터 받은 도움을 털어 놓았다. 뉴스추적은 방송 마지막에서 “안타깝게도 진승현의 돈이 문제의 모녀에게 전달됐다는 확실한 증거는 찾지 못했다”고 밝힌 것처럼 진승현 게이트와 ‘숨겨놓은 딸’의 직접적인 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결정적 물증을 확보하지 못했다.[123][124] 여야 정치권은 김대중에게 숨겨진 딸이 있었고, 이를 감추기 위해 국가정보원 관계자들이 개입한 의혹이 있다는 요지의 보도에 대해 다소 엇갈리는 반응을 보였다.[125] 김대중측은 부인했다. 최경환 비서관은 “진승현씨 측의 일방적인 얘기만 듣고 마치 뭔가 있는 것처럼 보도했다”며 “이것이 과연 정확하고 공정한 보도라고 할 수 있는지 정말 유감스럽다”고 반박했다. 2001년 진승현 게이트를 수사했던 검찰 관계자는 “당시 국정원의 정성홍씨는 진씨로부터 현금을 받았는데 무슨 계좌추적이 필요하느냐”며 “당시 정씨는 돈을 부 운영비 등으로 썼다고 진술했다”고 말했다. 2006년 3월 김씨는 문화일보와 인터뷰를 통해 "박정희 정권 고위인사가 시켰다"며 "김 전 대통령이 자신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김대중측으로부터 생활비를 지원받은 사실에 대해서는 지난해 증언과 같았다. 김씨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어머니가 자신에게 돈을 받아오게 시켰다고 했다. 그는 “김 전 대통령 집에 가면 아주머니(이희호 여사)가 ‘너 우리집 자식 아닌데 왜 또 왔니? 제발 오지마’라며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곤 했다”고 말했다. 그는 “어린 꼬마였던 나에게 이런 일을 시킨 어머니가 지독하다고 생각한다”며 어머니에 대한 원망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놀랍게도 박정희 정권 당시 고위인사 A씨의 이름을 꺼냈다. 김씨는 직접 메모지에 그의 이름을 적으면서 "이 사람이 의심스럽다"고 했다. 그는 "(이 사람이) 어머니에게 (자신을 DJ딸이라고 주장하라고) 시켰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126]
신한일어업협정과 함께 일왕 히로히토의 장례식 때 참배한 것이 논란이 되고 있다. 1989년 1월 9일 히로히토가 사망하자 당시 평민당 총재를 역임 중이던 김대중은 주한 일본 대사관을 찾아가 분향소에 머리를 숙여 조문했고 이 사실은 경향일보에 단독 보도되어 오늘날까지도 친일 행적이 아니냐는 논란을 낳고 있다.[127]
차용애에게서 2남, 이희호에게서 1남을 각각 뒀다.
위키인용집에 이 글과 관련된 인용문이 있습니다. |
제15대 대한민국 대통령 | ||
---|---|---|
전 임 김영삼 |
1998년 2월 25일 ~ 2003년 2월 24일 | 후 임 노무현 |
이승만 · 윤보선 · 박정희 · 최규하 · 전두환 · 노태우 · 김영삼 · 김대중 · 노무현 · 이명박 |
전 임 전형산 |
제5대 국회의원(인제군) 1961년 5월 14일 ~ 1961년 5월 16일 민주당 (보궐선거) |
후 임 (홍천군·인제군) 이승춘 |
전 임 김문옥 |
제6대 국회의원(목포시) 1963년 12월 17일 ~ 1967년 6월 30일 민주당 |
후 임 김대중 |
전 임 김대중 |
제7대 국회의원(목포시) 1967년 7월 1일 ~ 1971년 6월 30일 신민당 |
후 임 김경인 |
[보이기] 신민당 제8대 국회의원 비례대표 (전국구) | ||||||||||||||||||||||||||||||||||||||||||||||||||||||
---|---|---|---|---|---|---|---|---|---|---|---|---|---|---|---|---|---|---|---|---|---|---|---|---|---|---|---|---|---|---|---|---|---|---|---|---|---|---|---|---|---|---|---|---|---|---|---|---|---|---|---|---|---|---|
|
[보이기] 평화민주당 제13대 국회의원 비례대표 (전국구) | ||||||||||||||||||||||||||||||||||||||||
---|---|---|---|---|---|---|---|---|---|---|---|---|---|---|---|---|---|---|---|---|---|---|---|---|---|---|---|---|---|---|---|---|---|---|---|---|---|---|---|---|
|
[보이기] 민주당 제14대 국회의원 비례대표 (전국구) | ||||||||||||||||||||||||||||||||||||||||||||||||||||||||||||||||||||||||||||||||||||||||||
---|---|---|---|---|---|---|---|---|---|---|---|---|---|---|---|---|---|---|---|---|---|---|---|---|---|---|---|---|---|---|---|---|---|---|---|---|---|---|---|---|---|---|---|---|---|---|---|---|---|---|---|---|---|---|---|---|---|---|---|---|---|---|---|---|---|---|---|---|---|---|---|---|---|---|---|---|---|---|---|---|---|---|---|---|---|---|---|---|---|---|
| ||||||||||||||||||||||||||||||||||||||||||||||||||||||||||||||||||||||||||||||||||||||||||
¹사퇴 ²제명 ³탈당 †승계 |
[보이기] 1976년 3·1명동구국선언 참가자 (총 20명) | |||||||
---|---|---|---|---|---|---|---|
구속 기소 | 문익환 · 함세웅 · 김대중 · 문동환 · 이문영 · 서남동 · 안병무 · 신현봉 · 이해동 · 윤반웅 · 문정현 | ||||||
불구속 기소 |
|
[보이기] 노벨 평화상 수상자 |
---|
1976: 베티 윌리엄스 / 메어리드 코리건 | 1977: 국제 사면 위원회 | 1978: 안와르 사다트 / 메나헴 베긴 | 1979: 테레사 수녀 | 1980: 아돌포 페레스 에스키벨 | 1981: UN 난민고등판무관실 | 1982: 알바 뮈르달 / 알폰소 가르시아 로블레스 | 1983: 레흐 바웬사 | 1984: 데스몬드 투투 | 1985: 핵전쟁방지국제의사회 | 1986: 엘리 위젤 | 1987: 오스카르 아리아스 | 1988: 국제 연합 평화유지군 | 1989: 달라이 라마 | 1990: 미하일 고르바초프 | 1991: 아웅 산 수 치 | 1992: 리고베르타 멘추 | 1993: 넬슨 만델라 / F.W. 데 클레르크 | 1994: 야세르 아라파트 / 시몬 페레스 / 이츠하크 라빈 | 1995: 퍼그워시 회의 / 조지프 로트블랫 | 1996: 카를로스 벨로 / 조제 하무스 오르타 | 1997: 지뢰 금지 국제 캠페인 / 조디 윌리엄스 | 1998: 존 흄 / 데이비드 트리믈 | 1999: 국경 없는 의사회 | 2000: 김대중 |
전체 목록 | 1901년 - 1925년 | 1926년 - 1950년 | 1951년 - 1975년 | 1976년 - 2000년 | 2001년 - 2025년 |
첫댓글 많은 자료를 첨부한 긴 글 잘 보았습니다. 김영광님께 두가지만 질문 올립니다. ( 1 ) 김대중의 친부가 정말 김해 김씨 맞습니까 ? ( 2 ) 김해김씨 안경공파 종친회에서 최근에 발행한 족보의 첫 페이지에 김대중의 사진이 있습니다. 그 후 족보가 시중에 풀리고 난 다음 안경공파 싸이트가 폐쇄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 답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맞다고 생각합니다! 하의도 생가와 선산도 다녀왔었고요!!!
벌써 서거 1주기입니다!
이는 김대중을 음해할려는 정치적인 의도로 날조된 정치공작입니다. 모 정보기관 과장의 증언에 의하면 신안군 하의도도 다녀오고 목포도 다녀왔는데 그 어떤분이 그랬다는거에요. 뭐 김대중은 성이 김가가 아니다라는 얘기가 있다고? 호적이 날조되었다고? 그래서 김대중은 김가가 아니다라는것입니다. 그런데 그 증인들은 하나같이 다 죽고 없다는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카더라의 전형적인 정치공작입니다. 만약 이말이 사실이라면 정적 박정희가 가만히 두었겠습니까? 우리 김해김씨를 비하할려는 세력에 동조하는 누를 범해서는 아니됩니다. 명예훼손 및 허위사실 유포죄로 법적인 책임을 묻는 뽄보기를 보여야합니다.
안산님~좀 무섭네요.님이랑 다른 의견이 나오면 쉽게 설명해서 납득시키셔야지요.자신과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강제추방 시켜라.신상공개해라.헛소리다.우리 김해김씨가 잘못되기를 바라는놈일거다. 님의 지식이 얼마나 높은지 모르겠지만 님의 생각이 정답은 아닐수도 있는건데.현재 김대중대통령이 대통령 되기 이전 어느 김해김씨족보나 안경공파 세보에도 김대중대통령의 가계가 실려있는 문헌은 없는걸로 압니다.남들이 잘못된 의견 제시하면 자세히 설득 좀 해주세요.님의 생각대로 너무 몰아 붙이지만 마시고.모르는 사람에겐 가르쳐야죠.화만 내시지말고...
그리고 윗글은 전세계인이 모두 검색해서 볼수있는 위키백과에 실려있는 글입니다...
말로만 그러지 마시고 윗글 고칠수 있도록 노력하신적 없죠.... 진정 김대중대통령을 사랑하신다면 쓸데없는 논쟁보다는 저런글 부터 고치시는데 더 힘써 주시길 바랍니다.
그저 하는 말마다 어마어마한 말씀만 하시네요. 우리나라 역사와 족보에 대해서 그렇게 자신있으세요. 선생님은 누구 직계손이신지 모르지만 남 흠집 낼려고 하지말고 그쪽 집안 족보나 한번 잘 살펴보시지요. 아마 어느 할아버지의 장손으로만 장손으로만 내려오신 분이라서 선생님만 사람이고 다른 사람은 사람으로도 안보이는 모양이지요. 존경하고 존중할때 존경받고 존중받는것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세계는
중조 금녕군 휘목경 (牧卿), 2세 김해부원군 휘보(普), 3세 도문(到門), 4세 근(覲), 5세 효분(孝芬), 6세 진손(震孫), 7세 안경공 영정(永貞), 8세 세균(世鈞), 9세 익수(益壽), 10세 희효(希孝), 11세 상직(尙直), 12세 수만(守萬), 13세 광성(光聲), 14세 우장(宇章), 15세 정희(挺熙). 16세 익조(益祚), 17세 태현(台鉉), 18세 제호(濟皓), 19세 운식(雲植), 20세 현중(顯中:大中)...
이렇게 족보내용을 훤히 잘 아시는분이 왜 남들한테 오해받고 집안을 비하하고 흠집내는 결과를 초래하는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제가 너무 지나치게 반응한면도 있습니다. 부종(扶宗)정신으로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해야할 일은 많은데 쓸데없는 족력을 소모하는 일이 없도록 서로 노력합시다. 재희 선생님의 건승을 빕니다.
족보에 관해 쓸말은 많은데...그냥 접겠습니다...
족보에 관해서 할 말씀은 다 하시지요. 아주 자신있는것 같습니다. 얼마나 훌륭한 집안의 자손이신지 한번 들어봅시다. 왕의 손자도 우리 회사원이면 내 통제받는세상인데 그래 왕의 아들이면 뭐 대수아니겠습니까? 족보에 관한 금기사항도 모르시는 분은 아닐텐데
이 양반 더 이상 상대 못하겠네....내가 언제 나 잘났다고 한적 있나?? 자기 의견이랑 자기 생각이랑 틀리면 상대를 아주 몹쓸놈 취급하네...난 내가 알고있는것 말한거고 당신은 당신이 알고 있는것 말하는것 뿐인데 왜 당신 뜻이랑 틀리면 몹쓸놈이 되야하는거야~~~ 내가 보기엔 당신은 김대중대통령을 광적으로 좋아하는것같은데... 당신에게는 그저 네~ 하고 굽실거릴 사람만 곁에 있어야 될듯싶네..당신과 뜻이 같고 당신의견에 동조하는 그런 사람들하고만 사시요... 집안 핑계대고 당신의 우상을 남들에게도 떠받들게 하지말고... 김종필씨에 대해서는 어찌 생각하시는지???
@재희 재희님 말씀이 옳으신 말씀이고
안산님은 너무나 비관적으로 일관적으로 사람을 몰아붙이는군요
@김병수 어느 집안은 없는 인물도 아닌 인물도 있다고 기다고 만들어내는데 이래서야되겠습니까?
가야 500년 10조 이후 처음으로 천오백여년만에 대통령에 오르신분을 우리가 아껴야하지않을까요.
금녕김문에서 김문기를 사육신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사육신은 여섯분이 아니고 일곱명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쓸데없는 논쟁으로 날새워서는 안되지않는가 그리 생각합니다. 죄송합니다.
당신과는 더 이상 얘기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단 잘하고 잘못한것만큼은 그냥 넘어갈수 없습니다. 당신이 잘못했다면 그만한 댓가는 꼭 치뤄야한다고 봅니다. 제가 생각하고 한 말이 당신 맘에 안든다고 그렇게 반말짓꺼리로 말씀하시면 됩니까? 김대중을 좋아하건 말건 웬 시비입니까? 당신이 뭔데 내가 당신 허락맡고 김대중을 좋아해야됩니까? 저는 싸우는것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고 집안의 누가되는 행위를 나무라는 생각에서 그리고 집안의 자존심을 지키는 취지에서 드린 말씀입니다. 이판에 무슨 김종필 타령입니까? 어디 애들 데리고 작난하십니까?
그러니까 김대중대통령에 대해 당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사람을 나쁜놈으로 매도하지 마시라요.....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나쁜놈으로 매도하는것이 아니라 잘못된것을 바로잡아주는 노력을 한것뿐입니다. 말도 아닌소리로 짜증나게 하는데는 일가견이 있는 선생님이십니까? 보아하니 집안이 아주 훌륭하고 내놓을 만한 뼈대있는 분이신것 같은데 어디 집안자랑한번 해보시지요.
화합과 축제의 장이 되어야 할 모두 모두의 장소 장소마다 쫓아다니면서 반말짓거리로 인신공격을 자행하고 흠집내고 사실을 왜곡하고 똥 찌끄리는 의도가 무엇인지? 말 같지 않는 말로 김해김씨를 슬프게 하고 비참하게 만드는 이유가 무엇이냐? 남은 사람도 아니고 오로지 재희 당신만 사람인 양 하는 기고만장함에 고개가 절로 숙여집니다. 얼마나 잘난 분이고 얼마나 집안이 좋아서 그렇게도 위세를 떠시는지? 그 잘난 당신네 집 족보 한번 들여다봅시다. 족보자랑 한번 들어봅시다. 시조 대왕님 이후 재희님까지의 졸기는 분명하겠지요. 사람이 아닌 사람이 그 잘난 사람네 족보자랑 한번 들어보고싶소. 종손이면 한달에 한 오백 나오나
재희님과 안산님 두분 글 잘 읽었습니다. 두분께 공통으로 문의 합니다. 1799년 기미보,10세 희효 11세 상직 12세 무사(无嗣) 1802년 임술대동보, 10세 없음, 1824년, 갑신보,10세 없음, 1850년 경술보 1858년 무오보 (통합보) 10세 희효 11세 성직, 여기 까지는 11세 상직 나오지 않음. 1865년 을축보, 1910년 고갑자, 1960년 경자보, 1964년 갑진보에는 11세 상직 있음 . 족보 자료실을 열람하니 각각 다르게 기재되어 있으니 어떻게 해석 해야됩니까 ?
첫 글 2 번째 질문, 답을 아시는 분 몇자 적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안경공파 사이트 폐쇄와 김대중대통령과는 전혀 관련없는걸로 알고 있으며, 보첩별로 상계가 다른 것은 99퍼센트가 해당되오니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역사와 족보는 믿을수도 없고 안믿을수도 없는것이라고합니다. 그래서 남에게 누가 되지 않는 범위내에서 발전시켜나가면 시비걸어서는 안된다는 족보의 금기사항을 먼저 언급하고 싶습니다. 명문 가문의 족보도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의문 투성이이기때문에 족보자랑은 안한다는 말씀을 올리고 싶습니다. 집안의 누가되는지도 모르고 연못에 돌을 던지는 우를 범하지않기를 간절하게 호소합니다.
이조의명신영정후손도정치계에두각을나내고있다
김대중대통령님을 존경합니다.
김대중대통령님은 장손파의 자손으로 알고있습니다..
김해김씨 종친의 장손파로서 김해 본관관향에 유지를 받들 유적지가 남아있습니까?
타성의 명문가문들은
장손문중이 본관관향에 대대로 세거하면서 지손 후손들을 위하여 호혜와 봉사를 하는데 우리 김해김씨 는 그렇지 않고있는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장손문중이라고 문중자랑을 할것이
아니라 종친들의 화합과 단합을 이끌 좋은 방법을 고민해야할 것입니다.
한가지 덧 붙이자면
시조왕님의 가락국 김해를 시조왕님부터 지금까지 지키고 보존해온 문중이 어느 문중입니까?
김해관향을 지금까지 지켜온 문중이 실질적인 김해김씨의 제1의 문중입니다.
국가부도의 김영삼정부 이후에 김대중정부는 국가환란의 극복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많은 국민들은 환란이 끝나면 형편이 좋아질거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구조조정 이라는 명분하에 직장에서 강제퇴직을 당하고
비정규직이 대량으로 허용되어 전례없이 산업재해가 폭증하였습니다.
빈부 경제양극화가 극대화되고 자본권력이 국가사회를 통치하는 실질적인 권력이되었습니다.
국민은 라면으로 끼니를 때울때에 김대중 동교동인사는 신라호텔
중국요리점 칠선에서 상어지느러미와 샴페인을 곁들인 한끼식사에 4~50만짜리의 식도락을 즐겼습니다.
이렇게 붕당패들이 자신들을 위해 자금을 치부하여 관직을 획득하는 것을
매관매직이라하고 이런 것을 무리지어 작당하는 것으로도 분경이
라합니다.
자당의 호화호식을 위한 정치가 명백한 분경정치로서 패권정치입니다.
제가 김대중정부의 규제개혁으로 인한 노동개악으로 산업재해를 당한 직접적인 피해당사자입니다.
투표때마다 김대중당을 지지하였는데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더니 희생당하였습니다.
제가 분경치죄를 단죄받으라는 고소장을 동교동자택으로 (등기우편) 보내드리고 해명을 요청드렸는데 지금까지 어떠한 조치가 없습니다.
분명한것은 재벌기업에 굴복굴종하는" 비열함을 보이고 수용해 국정에 적극적으로 시행하였다."입니다.
김대중재통령님이 민주화등 잘 하셨지만
마지막에 재벌에
굴복하는 "국민들에게 비열함을 보였습니다"
역사의 평가는 이처럼 엄중합니다.
경각심을 삼으시라고
이 글을 올려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