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보성 박팔만 부자가 속발과 속패한 풍수적 원인.
1. 박팔만 부자(富者)와 풍수
* 박남현(朴南鉉, 1864 고종1년~1930 제5대 조선총독부)은 전남 보성 사람으로 8만석지기(1석은 250평)로 소문난 호남 제일의 땅부자이었다. 본명보다는 박팔만이라는 별명으로 더 알려져 있다. 당대에 팔만석을 모았으나 죽고 난 뒤 재산이 흩어졌으므로 당대(當代) 속발.속패하였다고 말한다.
* 그의 발복과 속패에 관하여 조부 묘라는 설이 다수설(김두규)이지만, 그 윗대 선조 묘라는 설(농거), 집터라는 설(필자)이 있다.
2. 일화(逸話)
* 필자는 어떤 풍수의 간산기에 적혀있는 박부자의 생가지라는 곳(덕림리348)을 찾아 갔더니 그 동네는 박부자의 작은 마누라가 살던 집터이었다. 마침 박부자의 증손과 절친한 동네 영감을 만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수편의 간산기가 있으나 모두 김두규선생의 글을 인용하는 수준이고 후손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였기에 미화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 박부자는 재운이 좋아서 7년 가뭄에도 그의 논에는 샘물이 마르지 않는 덕에 농사가 잘되었다. 흉년에 굶주린 농민이 쌀을 빌리려오면 농민에게 농지를 팔도록 유도하여 헐값에 사들여서 많은 땅을 확보하고 머슴을 채용하여 자경하는 토지가 많았다.
* 수년에 걸쳐 대룡산 일대에서 곧게 자란 육송(陸松)을 엄선(嚴選)하고 기와를 주문하여 본가를 건축하였다. 더래마을에 작은 마누라집을 짓고 윗쪽에 하녀들 집 그리고 아랫쪽에 수십채의 초막을 지어 목수와 머슴을 살게 하였다. 지금은 작은 마누라집은 없으나 장독대가 남아 있고 초막은 모두 현대식으로 개조되어 있다.
* 임금(고종?)이 궁궐건축비를 수탈할 의도로 전국 부자를 궁중에 초대하고 환담하면서 각도 부자들에게 들깨를 얼마나 보관하고 있는지 물었다. 부자들은 기껏해야 한가마니를 보관한다고 대답하는데 박부자는 말없이 있다가 임금이 재차 묻자 해묵은 들깨 세가마니를 보관하고 있다. 임금께서 필요하면 묵은 들깨 말고 새 들깨를 보내드리겠다고 아뢰었다. 그 뒤 관에서 독촉하자 새해 들깨를 미처 수확하지 못했다는 핑계로 미루었고 일제의 통치로 바뀌면서 흐지부지 되었다.
* 박부자는 여자를 좋아하여 예쁜 여자를 보면 만금을 아끼지 않고 쓰는 바람에 팔만석을 채우지 못했다. 땅은 보성일대 뿐만아니라 서울에도 상당히 많이 보유하고 있었으나 해방후 관리가 안되어 잃고 일부는 소송으로 찾았다.
* 사람들이 겨우 등잔불을 켜고 지낼 때 박부자는 일본에서 수입한 크다란 석유등을 밝히고 자랑했는데 박부자가 죽고 난 뒤 마나님이 잘못하여 석유등불을 엎지른 탓에 본가의 기와집이 모두 불타고 말았다.
* 이상은 필자가 직접 들은 이야기이고 다음과 같은 일화도 있다. 박부자는 향교건축비를 부담하고 참봉으로 호칭받으며 유지가 되었는데 어느 때 향교에서 제사를 지낼려고 밀주를 마련하자 일본 관리가 밀주단속을 하였다. 박부자는 크게 노하여 일본 단속관원을 잡아 묶고 관청의 사과를 요구하였다. 일본 경찰은 일단 사과하여 관원을 석방받은 뒤 박부자 일당을 체포하고 처벌하려고 하자 전국적으로 밀주단속법 폐지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제사 술은 밀주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박부자는 많은 재산을 독립자금으로 지원했다.
* 이상의 일화를 미루어 보면 박부자는 영민하고 배짱있는 사람이었으나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짐작된다. 독립자금으로 전재산을 내어 놓았다는 이야기는 믿기 어렵다.
김구선생은 일본 경찰에 쫒겨 박부자 동네 뒷산 넘어 삼정리572 친족집에 일시 피신한 적이 있다. 그러므로 김구선생은 박부자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김구선생은 독립자금을 받은 장부를 꼼꼼히 작성해 두었다. 귀국후 경주 최부자를 만나 장부를 펼처 놓고 안희제를 통하여 보낸 독립자금을 대조해본 즉, 한푼도 틀리지 않아서 안희제가 정확하게 전달한 사실에 감탄하였다고 한다. 박부자가 성금을 내었다면 김구선생이 장부에 누락할 리 없다. 보성인근 장흥에 고영완의 무계고택(장흥읍 평화리 89, 1852년 건축)이 있는데 도로개설에 수천평의 토지를 내어놓고 독립자금을 희사하였다. 그 집은 여전히 보존되고 있으며 대문에 “독립유공자의 집”이라는 작은 팻말이 붙어 있어 한층 아름답다.
3. 관련 지도
* 중국---보성강을 경계로 북쪽은 무등상-발산-천운산-계당산에 이르런 다음 화순 증리 산114 오백고지에서 분지하여 남동행룡이 보성강 건너에 멈추고 박부자의 동네인 송림리를 감싸고 있다. 증리산 오백고지에서 분지하여 서행한 룡은 제암산을 거쳐 활성산 –봉화산으로 수백리를 돌아서 주산(主山)인 대룡산으로 왔다. 계속 진행한 룡은 존제산- 광양 백운산으로 행로한다.
* 산은 경계에 개울이나 강을 만든다. 댐의 제방과 같이 인공적인 연결이 아니라면 두 개의 산줄기가 합처져 하나로 되는 일은 없다. 이러한 질서가 산수(山水)의 생리이다. 보성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대룡산과 석호산이 어떤 경로로 와서 대면하는지를 추척해 보면 알 수 있다.
4. 조부 묘(보성 화방리 산258)
* 박부자의 조부 박성환(朴星煥)에게는 큰 아들 박중무와 작은 아들 박회룡이 있었다. 어느 날 박중무의 부인 신씨가 밭을 매는데 밭둑에서 지관일행이 어떤 묘를 가르치면서 비룡망하(飛龍望河)의 명당인데 좌가 틀렸다고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다. 귀가하여 남편과 상의한 다음 매일 밤 지관이 가르킨 묘에 물을 부어서 땅을 질펀하게 만들었더니 묘주가 흉지인 줄 알고 이장하였다. 박중무가 파묘자리를 매수하여 아버지 묘를 이장하였다. 이장 후 박팔만이 태어났다. 박중무는 석호산에서 지관을 따라다니다가 탁목조형(啄木鳥形, 새가 나무를 조는 형)이라는 또 다른 명당을 구하여 썼다.(전남의 전설 참조)
* 대룡산 북쪽에는 비룡망하형이 있는데 박부자의 조부묘이고 남쪽으로는 비룡망해(飛龍望海)형이 있는데 정상 아래에 있는 하동정씨묘라고 한다. 더래마을 노인의 말에 의하면 박부자가 비룡망해를 찾기 위하여 서울에서 유명한 지관을 초청하였더니 대룡산 정상중 김구일가(구 안동김씨)소유지에 있다고 하므로 포기하였다고 한다. 정씨 묘역은 혈처로 진행해 오는 곳을 향하여 앉은 소위 도장(倒杖, 옛날 지관이 재혈할 때 작대기를 사용했는데 작대기를 꺼꾸로 놓는 자리라는 뜻이다)에 해당되는데 안산이 낮아서 진혈이 아니다. 지도로 보면 구 안동김씨 땅에 있는 듯 보인다.
* 재물이 불꽃처럼 피고진 바위명당이고 바위명당은 속발속패하는 특성이 있다는 설(김두규), 조부 묘는 명당이나 뒤에 있는 조모 묘가 대흉지라는 설(김정인)이 있다.
* 조부 묘의 위치---묘의 위치를 덕림리 산3-1라는 간산기도 있다
* 박성환 묘비---간산기에 따라서 장소가 다른데 박성환이라는 비석이 없는
묘는 아니다. 부좌(祔左) 고령신씨 보성선씨라 하였으나 별도로 부인 묘를 쓰지 않았으므로 한개의 봉분에 함께 묻은 합폄(合窆)이 맞다?
* 박성환 묘와 현무---손좌건향. 현무가 사납다.
* 박성환 묘의 앞 전경---우리가 갔을 때 일대를 벌목하고 수종 교체작업을 하여 사방이 잘 보였다.
* 박사현 24세손---최근 화장 이장 묘이다. 박성환 묘 아래 2단으로 후손 묘(맨 아래 박태종)를 설치하였다.
* 조부 묘역은 혈이 되지 않는다. 현무가 험악하고 혼잡스러워서 살기가 있고 전순이 약하여 기운을 잡아주지 못하고 안산이 낮아 공허하다. 허화(虛花)의 비룡망하형이다.
5. 선조 묘역(보성 해평리 산40)
* 진원(珍原)박씨는 고려대장군을 지낸 박진문(朴進文)을 시조로 하고 8세손 박희중(朴熙中, 1368~1446)을 중시조로 한다. 박희중은 세종 때 영암군수를 역임하고 청백리로 록선되었으며 진원(장성군 진원면)군에 봉해졌다. 사마시27, 문과급제1, 무과급제3명으로 관직에 나아간 사람은 적으나 시골에서 교육에 힘썼다. 박희중의 장남 휘생은 보성종파의 파조가 되었고 후손 중 죽천 박광정은 광해군의 사부이었고 임란 때 고령에도 불구하고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고 재란 때 진중에서 졸하였다. 박팔만의 생몰은 1864~1930인데 24세손 박사현의 생몰이 1886~1926인 점으로 보아 24세손으로 추즉할 수 있다.
* 선조 묘역 ---구룡쟁주형이라 한다. 이 묘역에 진사2명, 참봉1명의 묘가 있다.
* 선조 묘에서 본 전경---공허하다.
* 선조 묘역은 주산이 전개한 모습이 웅장하고 강기가 있으나 묘역으로 기운이 내려오지 않는다. 전면에 허허벌판이 전개되고 바다가 시원하게 펼처진 허화이다. 박팔만의 몇 대 선조인지 확인하지 못했다.
6. 본가(보성 덕림리707)
* 더래마을이 있는 덕림리 348은 작은 부인이 하녀와 머슴을 통솔하면서 살림살던 집이다. 평범하다.
* 본가 터에는 박부자의 증손 박형준 가족이 살았데 그는 2022년 죽고 현재는 부인이 살고 있었다. 사람들은 3천5백평에 8동의 기와집과 정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다소 과장된 것 같다. 증손부의 말에 의하면 지금 있는 집 앞 밭에 초가 오두막이 있었고 그 집에서 박팔만이 태어나서 재산을 모우면서 현재 있는 집 위로 집을 짓고 옮겨 살았다고 한다. 특이 한 점은 대문과 본가의 방향이 술좌진향이다. 이 집터에 들어서면 한눈에 부자되는 사격이 들어온다. 그리고 그 옆에 규봉이 장난스럽게 웃고 있다. 부(富)를 이루되 규봉이 장난친다는 뜻이다. 박부자가 근신하지 않고 여자를 좋아 한 것은 이해된다. 박부자의 재산도 농지개혁으로 정부에 뺏겨서 쪼그려 들었겠지만 무엇보다도 흉년에 농토를 사들인 마음 쓰임새로는 재산을 오래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또 다른 진혈은 비어 있는데 좌향을 달리하여 집을 짓고 근신한다면 거부(巨富)를 기약할 수 있지 않을 가?(2024.2)
* 평사낙안 마을---대룡산에서 수십 마리의 기러기가 날아서 보성강변에 내려 앉는 형상이다.
* 태어난 곳---신축가옥과 밭. 밭에 있던 초가 오두막 집에서 출생.
* 부(富)의 사격과 규봉---
* 집터와 사격의 방향---현존하는 집에서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개근상 받으셔야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