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간요 상권 표지-
-사례간요 하권 표지-
사례간요서四禮簡要序(1)
사례간요 서문/ 完山 柳止鎬 序
(주)柳止鎬1825-1904 본관은 전주. 호는 洗山.
안동출신이며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의 아들이다.
1873년(고종 10) 음직(蔭職)으로 가감역(假監役)에 제수되었다. 이후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를 거쳐,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종묘서령(宗廟署令) 등을 지냈다. 외직(外職)으로 신창(新昌)‧간성(干城)‧연천(蓮川)‧장기(長耆) 등의 현감(縣監)을 지냈다.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발생하자 안동(安東)에서 일으킨 의병대에 참여하였다. 단발령에 반대하여 안동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권세연(權世淵)을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문집으로 『세산집(洗山集)』이 전한다.
사례간요서四禮簡要序(2)
사례간요 묵암공 서문
金海後人 裵克紹 書
사례간요발四禮簡要跋
사례간요 발문/ 星州后人 都國成 謹跋
사례간요도四禮簡要圖(6면)
권 1/冠禮/婚禮
권 2/喪禮
권 3/喪禮
권 4/祭禮
-원문출처/국학진흥원-
이 '사례간요四禮簡要'는 묵암默庵 배극소裵克紹1819-1871 선생이 편찬한 예서로 관혼상제冠婚喪祭 네 가지 예禮를 실천함에 있어 간단하고 요긴하게 쓰일 수 있도록 편찬한 예서禮書이다.
그간 사례간요는 기록으로만 그 존재를 알고 있었을 뿐 실물을 보지 못했는데 최근 선대의 자료를 찾던 중 국학진흥원에 소장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례간요는 편찬 당시 간행 부수가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이로 인해 소장처를 알수 없었으며 개인 소장본을 제외한 공공기관 소장본은 국학진흥원 소장본이 지금까지 유일하다.
국학진흥원에 소장된 사례간요는 2종으로 필사본 1종과 목판본(혹은 석인본) 1종이다.
필사본 사례간요는 4권 2책(上下), 선장본으로 장책되어 있으며 서문 2편과 발문 1편이 실려있는데 서문은 세산洗山 유지호柳止鎬1825-1904의 서문과 편찬자인 묵암 선생의 서문이며, 도국성都國成의 발문이다.
묵암 선생과 동문이며 스승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의 아들인 세산 유지호의 서문은 간기가 없어 쓰여진 시기는 알 수 없으며 묵암 선생의 서문은 1863년 쓴 것이며 도국성의 발문은 1873년 쓰여진 것이다. 이로보아 1863년 이전 편찬이 완료되었으며 1873년 무렵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내용을 살펴보면 첫 장에 四禮簡要圖 3장(6면)의 도식이 있으며, 이어 四禮簡要告祝書疏式 24장(48면)이 실려있다.
권1은 현대의 성인식에 해당하는 관례(冠禮)와 결혼식인 혼례(婚禮), 권2~3은 장례식인 상례(喪禮), 권 4는 조상을 기리는 제례(祭禮)로 구성되어 있다.
목판본 사례간요는 4권 1책으로 선장본으로 장책되었으며 필사본과 내용은 동일하나 족손族孫 배기호裵基鎬 공의 1899년 쓴 발문이 추가되어 있다. 이로 보아 필사본이 간행된 이후 1899년 경에 목판본으로 재간행하면서 발문을 추가한 것으로 보인다.
사례간요는 기존의 방대하고 번거로운 예서에서 관혼상제, 사례四禮에 관한 여러 예설禮說을 수집하고 편집하여 실용에 용이하도록 편찬한 완성도 높은 예서로 주목된다.
최근 이와 관련하여 성공회대학교 한재훈 교수의 논문 '묵암 배극소의 예학禮學 -사례간요四禮簡要를 중심으로-' 발표하여 사례간요가 예서로서의 완성도와 중요성을 언급하였다.
이번 사례간요의 발견과 한재훈 교수의 논문을 기회로 사례간요의 존재가 널리 알려져 활발한 연구가 이어지기를 바라며 아울러 사례간요의 국역이 이루어져 실용적인 예서로 세상에 오래도록 전해지기를 기대한다.
배극소(裵克紹) 1819-1871
자는 내휴(乃休), 호는 묵암(默庵).
분성군 20세. 선무원종공신 훈련원정,운계(雲溪)공 응남(應男)의 8세손. 효성과 우애로 명성이 있었던 효우당(孝友堂) 세두(世斗)의 6세손이며 하양 낙산입향조 낙서(樂墅)공 찬경(燦褧)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처사 상관(相觀)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 항돈(恒敦)의 따님이다.
어려서 가학으로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글을 배웠으며, 처음 동향(同鄕)의 학자 직재(直齋) 김익동(金翊東)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후일 안동의 정재(定齋)유치명(柳致明)의 문인이 되었으며,성주의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 대구 칠계의 지헌(止軒) 최효술(崔孝述)에게도 가르침을 받았다.
1834년 아버지의 명에 따라 직재(直齋)김익동(金翊東)에게 나아가 학문을 배웠으며 1845년 안동 대평의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을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았다.
1850년(철종1) 철종 즉위 기념으로 치러진 증광시에서 생원시에 장원하여 스승과 동문들의 많은 기대를 받았으나 출사에 뜻을 두지 않고 향리에 은거하여 효산서사(孝山書社)를 짓고 오로지 위기지학의 학문에 힘썼다.
1853년 스승 직재 김익동이 편찬한 예서(禮書)인 ‘상제의집록(喪祭儀輯錄)’을 교정하고 편집하였으며, 1857년 후서(後序)를 지어 간행하였다.
1854년 하양향교 육영재(育英齋)의 재규(齋規)를 지었으며, 1855년 스승 유치명이 지도(智島)에 유배되자 방문하여 한 동안 그곳에 머물며 스승을 모시고 학문을 연마하였다.
1858년 봄 만산(萬山) 류치엄(柳致儼1810~1876)과 주왕산을 유람하였으며 遊周王山記를 남겼다.
1860년, 1861년 스승 김익동과, 유치명이 연이어 돌아가시자 조문하고 제문을 지어 애도하였다.
1863년 기존 예서(禮書)의 번거로움을 줄이고 실용성을 높이기 위해서 예서 중 관혼상제(冠婚喪祭)에 관한 여러 예설들을 수집하고 편집하여 필사본 ‘사례간요(四禮簡要)’ 4권 2책을 편찬하였다.
1868년 아동들의 초학 입문서 ‘개몽자학이천자(開蒙字學二千字)’를 짓고 편찬하였다.
1870년 정헌 이종상(李鍾祥)을 애도하여 만장을 지었다.
당대의 석학 직재 김익동(金翊東), 정재 유치명((柳致明), 지헌 최효술(崔孝述), 봉촌 최상룡(崔象龍), 응와 이원조(李源祚), 등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이돈우(李敦宇), 이만각(李晩慤), 류치엄(柳致儼), 권연하(權璉夏), 조성교(趙性敎), 유지호(柳止鎬), 이광로(李光魯), 등과 교류하였으며 학문(學文)과 행의(行誼)로 사우(師友) 들의 추증을 받았다. 문장과 시에 능하였으며 특히 예학(禮學)에 밝았다.
사후 학문과 덕행으로 사림의 모범이 되어, 200여 명의 동문과 후배 사림들에 의해 1902년(고종39) 문집이 간행 되었다.
저서에는 묵암문집 6권 3책, 사례간요(四禮簡要) 4권 2책, 개몽자학이천자(開蒙字學二千字)1책, 만제록(輓祭錄) 등이 있으며 유물로는 친필 간찰, 1850년 생원시 장원급제 교지와 시권, 묵암문집 목판(110판) 등이 있다.
배위(配位)는 창녕조씨(昌寧曺氏) 선국(善國)의 따님이며 슬하에 2男1女를 두었다.
묘소는 처음 경북 경산시 진량에 모셔졌다가 경북 영천군 대창면 용전리 약목곡으로 이장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