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트디즈니 1901 - 1966
월트디즈니는 1901년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그는 여러 직업을 전전했던 아버지 탓에 이사를 거듭하며
미국 각지에서 살았다가 그가 4살이 되던해
미주리 주 마셀린이라는 농촌으로 이주하였다.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이 시절을 자신의 생애 중
가장 아름다운 시기로 추억하였고,
그의 작품속에 목가적인 풍경들도
모두 이 시기의 경험과 그리움 속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시골에서 잘 적응하지 못했던
그의 아버지는 다시 캔자스의 도시로 나와 신문 판매업을
시작하였다.
디즈니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에게 용돈 한 푼 받지 못한 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침 저녁으로 정확한 시간에 신문을 배달해야만 했다.
이때 기억으로 그는 평생 아버지와 소원했고,
어린이들이 따뜻함과 편안함 속에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세계를 꿈꾸었다고 한다.
그 결과가 훗날 그가 건설한 디즈니랜드였다.
1923년 월트디즈니는 젊은 영화 제작자가 자금을 지원한다는
소문을 듣고 캔자스 시를 떠나 할리우드로 향했습니다.
회사의 부도로 미완성된<앨리스의 모험>필름을 챙긴 채
LA에 도착한 그는 로버트 삼촌집에 머물면서
Univercial(유니버셜) 스튜디오를 둘러보았습니다.
촬영장에서 시대 의상을 입은 남녀 배우들 곁을 스쳐 지나가면서 무대 세트가 올려지는 무리 속에서 그는 캔자스시가 얼마나 보잘것 없는 지방이었던가를 깨달았습니다.
할리우드야말로 자신의 필생사업인 영화제작에 뛰어들고 싶은 곳이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직업소개소를 찾은 월트는 연출가 자리를 지원했습니다.
그러나 일주일도 못 돼 모든 영화사가 그의 취업을 거부했습니다.
여러 번 거절을 당한 끝에
그는 '반드시 어떤 스튜디오에 소속되어 일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 그에게는 누구보다 든든한 후원자가 있었는데,
형 로이가<앨리스의 모험>필름과 함께 그의 든든한
'빽'이었다.
"방금 만화영화 분야에서
새롭고 독창적인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살아있는 주인공과 만화를 결합한 영화를 만드는 것입니다."
월트가 자신있게 영화 배급자 Magalet Wingkler(마가렛 윙클러)에게 쓴 편지 내용입니다.
다행이 윙클러는 <앨리스의 모험>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1923년 월트와 로이는
'디즈니 브러더스'라는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차렸습니다.
친구 아이웍스는 계약직 만화가로 사업에 참여했습니다.
사업을 하던 중 그는 스튜디오에서 잉크칠하는 일을 했던 릴리언과 결혼했습니다.
윙클러는 회사의 경영권을 남편 찰스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당시 찰스는 월트와 함께 운 좋은 검은 색 토끼<오스왈드>라는
캐릭터를 만들어 유니버셜사를 통해 배급하여 크게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영악하게도 월트에게는 만화 제작권만을 주고
만화 캐릭터에 대한 판매권은 자신의 소유로 해 놓았습니다.
월트는 제작비만 받을 뿐이고,
캐릭터 판매를 통한 수입은 모두 찰스가 가졌습니다.
고생은 월트가 하고
돈은 배급업자와 판매권을 가진 찰스가 벌어들이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월트는 큰 결심을 합니다.
'다시는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지 않을 거야. 내 자신이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 내지 못하면 스튜디오 문을 닫게 될지도 몰라'
< 오스왈드>의 수입 배분을 늘려 보려고 아내와 함께 찰스가 있는 뉴욕에 들른 월트는, 영화산업의 냉혹한 현실을 경험한 후 발길을 되돌려야 했습니다. 돌아가는 기차 속에서 그의 머릿속은 복잡했습니다. 울프강가의 아버지 농장에서 고생하던 일, 캔자스 시에서의 신문팔이, 광고 대행사 창고에서 수동식 크랭크 카메라를 배우던 일, 그리고 검은 색 토끼<오스왈드>를 탄생시키기까지,
마치 영화필름처럼 돌아갔습니다.
그 때 갑자기 그의 머릿속에 얄미운 생쥐 한 마리가 떠올랐습니다.
"내가 늦게까지 일할 때면 휴지통속으로 쥐들이 모여들었죠. 나는 그 중의 한 놈을 잡아 작은 우리에 가두어 책상 위에 두었죠.
그 후 그 쥐는 나와 특별한 친구가 되었답니다."
5. 그는 머릿속에 떠오른 쥐를 스케치하기 시작했습니다.
<오스왈드>의 얼굴에 쥐의 귀를 붙인 것과
비슷한 모습이 만들어졌습니다.
월트는 아내에게 생쥐 이름을 <모티머>라고 붙일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릴리언은 <모티머>는 너무 연약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미키>가 좋겠다고 응수했습니다.
둘은 이 쥐에게 <미키 마우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 미키 마우스>첫 편은 린드버그의 대서양 단독 횡단을 만화영화라는 환상 속으로 불러들인 것이었습니다. 이 비행을 통해 월트는 언젠가는 미국 최고의 몽상가들이 사는 곳으로 날아들 수 있으리라고 믿었습니다. 이름하여 <정신나간 비행기>.
시사회에 올린<정신나간 비행기>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고, 영화사들은 배급 맡기를 거부했습니다.
이어진 시리즈는 <질주하는 남부 카우보이>, 역시 관객이나 메이저 영화사에서 고개를 저었습니다.
이제 단 한 편 만들 수 있는 돈만 달랑 남았습니다. 혹평 속에서도 월트는 마지막 승부수를 띄웠습니다.
세 번째 작품 <기선 윌리>였습니다.
당시 워너 브러더스는 <재즈 가수>라는 영화로 큰 인기를 모았는데, 이 영화는 음성을 도입한 첫 작품이었습니다.
시사회에서 <재즈가수>를 본 월트는 <미키>도 말을 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 많이 필요했습니다.
형 로이에게 편지를 띄웠다.
"나는 우리 앞에 행운이 기다린다고 확신해.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걸고 이 기회를 잡아야 해."
드디어 미키의 1목소리가 들어간 <기선 월리>는 콜로니 극장에서 첫선을 보였고 <미키 마우스>가 휘파람 소리를 내는 첫 장면이 나가는 즉시 관중들은 환호했습니다.
<미키 마우스>의 '찍찍'소리는 월트의 목소리이기도 했습니다.
우스꽝스런 소리를 내는 귀여운 생쥐가 할리우드의 주인공으로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월트 역시 <미키>와 함께 신출내기에서 인재로 떠올랐습니다.
대형 영화사나 대형 배급상과 제휴한 상태가 아닌 27살 난 독립 스튜디오의 만화영화 제작자로서는 엄청난 성공이었습니다.
월트의 스튜디오가 빚으로 넘어가기 바로 직전이었습니다.
월트는 일을 벌일 때마다 타이밍이 절묘했습니다.
이번 경우가 특히 그러했습니다.
영화산업이 새로운 영웅의 등장을 갈망하던 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미키 마우스는
모든 어린이가 좋아하는 만화영화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인간처럼 행동하는
농장 짐승을 좋아하는 전형적이 촌뜨기이며
<미키>의 창조자인 월트에게 <미키>는 마치 자식과도 같았습니다.
<미키>는 천진난만한 촌뜨기이자 행동가, 모험가,
<미니>에게 구애하는 수줍음을 잘 타는 성격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악의 없는 귀여운 생쥐는 미국 중서부에서 보낸 어린 시절 월트와 비슷했습니다.
<미키>,짐짓 아는 체하는 행동이나 모험에 대한 열정,
과장된 모습은 어린 시절 흠모했던 배우 찰리 채플린의 성격이 담겨져 있습니다. <미니>는 월트를 달래 주었던 이야기꾼,
곧 어머니에 대한 이미지를 불어넣은 것입니다.
많은 영화사들이 배급을 얘기하며 월트를 유혹했습니다.
누가 회사를 인수하겠다는 제의를 하면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내 개성을 지키고 싶다.
메이저 영화사들의 정책에 묶여 창작에 제한을 받고 싶지 않다."라고.
6. 1933년에는 <꼬마 돼지 세마리>가 무대에 올려져
월트에게 부와 명예를 안겨주었습니다.
또 12월에는 다이앤 마리 디즈니라는 예쁜 딸을 품에 안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영화를 상업적인 것 뿐만 아니라 예술로도 발전시키려고 애썼습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영화가<꽃과 나무들>입니다. 월트는 이 영화로 제48회 아카데미상을 수상했습니다.
1934년 월트는 할리우드에서 아무도 하지 못했던 일을 꿈꿨습니다. 영화 전체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첫번째 장편 만화영화인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는
바로 그렇게 해서 탄생한 영화입니다.
1937년에 처음 개봉되어 10개국어로 번역되었으며
46개국에 배급되었습니다.
이 영화의 성공으로 월트 디즈니사의 부사장이었던
형 로이는 캘리포니아의 땅을 사서 스튜디오를 세웠습니다.
월트는 이 스튜디오를 '백설공주가 지어 준 집'으로 불렀습니다.
이 스튜디오에서 월트는 애니메이션 제작을 위해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피노키오, 1940년>,
<판타지아, 1940년>,
<밤비,1942년> 등이 이 때 만들어진 영화들입니다.
월트의 영화에는 두 가지가 들어있습니다.
기본적인 것과 복잡한 것,
어두운 것과 빛을 발하는 세계,
딱딱한 세계와 환상적인 세계를 하나로 통합시켜 작품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백설공주>에서 착한 백설공주와 오만한 왕비가 그렇고,
<피노키오>에서는 착한 제페토 아저씨와
사악한 트롬볼리가 그렇습니다.
1953년은 월트가 할리우드에 입성한 지 30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그 해에 월트는 영화배급을 담당하는 '부에나비스타'라는 자회사를 설립했습니다. 또 월트는 당시 빠르게 성장하고 있던 매체인 TV에도 진출했습니다.
미국 ABC-TV와 계약을 체결하여 <디즈니랜드>라는 텔레비전 제작물을 제작, 공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리즈는 <디즈니의 마술적인 세계> 등 의 이름으로 바뀌면서 TV 역사상 황금 시간대에 가장 오래 방영되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1955년, 월트는 어린이들을 위해 새로운 공간을 기획했습니다.
영원히 막이 내리지 않고 진행되는 3차원적인 '영화'시리즈로 이루어진 공원이 그것입니다.
관람객이 개개의 작품에 발을 들여놓고 그 안을 돌아다니는 공원을 만들 계획이었습니다.
한가운데에 U.S.A.라는 이름의 중심가가 자리잡게 해서,
이 곳을 개개의 테마 공원인 '영화'속으로 들어가는 통로로 삼았습니다. 디즈니랜드 정식 개관일인 7월 17일에 ABC방송은 특별 생중계를 했습니다. 초대권을 1만 5천장 찍었지만 그날 입장한 사람은 3만 3천명이 넘었습니다.
절반 이상이 불청객이었던 것입니다.
말년의 월트는 플로리다의 올란도 외곽에 또 다른 디즈니랜드를 만드는 일에 힘을 썼습니다.
"디즈니 월드는 42년 동안 했던 일들의 성과를 한데 모으는
총 결산이 될 것이다."라고 선언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1966년 12월 14일,
월트 디즈니는 65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습니다.
폐암을 앓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순간의 월트를 아내 릴리언이 꼭 껴안아 주자 월트는 자기 침대 머리맡을 높여 달라고 했습니다. 창 밖으로 스튜디오를 바라보기 위해서였습니다. 형 로이의 지시로 스튜디오의 모든 불을 켜 둔 상태였습니다.
평생동안 7백 개 이상의 표창과 명예학의와 상을 받았으며,
아카데미상 29개와 4개의 에미상,
대통령이 주는 자유 메달,
프랑스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습니다.
귀여운 생쥐와 짖궂은 오리
그리고 그가 탄생시킨 잊지 못할
수많은 인물들의 익살맞은 행동을 통해
어린이들을 즐겁게 해 준 아저씨.
마법의 왕국은 슬픔으로 가득 찼습니다.
다시는 행복한 시절이 오지 않을 것입니다.
왕이 죽었기 때문에. 그의 추모식을 기념하여 그가 아직 다 완성하지 못한 또 하나의 공원 이름을 '월트 디즈니 월드'로 지었습니다. 월트가 죽기 두달 전 그는 올해의 흥행인으로 선정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천성적으로 나는 실험가다. 지금까지 나는 '속편'이 아닌 새로운 작품만 제작했다."
집안일을 돕느라 학업을 제대로 이어갈 수 없었던 디즈니는 아버지의 허락으로 어렵게 캔자스시 예술디자인학교에 입학했다.
시카고로 이주한 그는 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학교 성적은 그닥 좋지 않았다. 학교 신문에 삽화 등을 그리며 청소년기를 보낸 그는 1차대전 발발과 동시에 학교를 그만두고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군대에 자원입대하려 했으나,
당시 16살이었던 그는 입대하지 못하고 미국 적십자(American Red Cross)사 트럭 요원으로 입대해 프랑스와 독일 전선에서 복무하였다.
1년간 유럽생활을 끝내고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상업광고를 제작하는 회사의 도안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애니메이션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된다.
광고도안을 그리면서 초기에 조악한 애니메이션의 세계를 접하게 된 월트디즈니는 하청 받은 작업에 싫증을 느끼고 19살에 아이윅스와 함께 조그마한 스튜디오를 설립해 독립하였다. 그는 지역극장에서 상영할 1~2분짜리 만화 상업광고를 제작하였고, 신문만화에 실린 내용을 옮긴 짧은 시리즈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당시 스케치 형식으로 공개한 시리즈는 'Laugh-O-Gram'으로 불리면서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당시 애니메이션은 새로운 분야였고 드는 노동력과 제작비에 비해 시장이 좁고 이해도가 낮아 재정적으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결국 그는 20세도 되기 전에 파산신고를 할 정도로 궁지에 몰렸다.
그러나 디즈니는 좌절하지 않고 형 로이 디즈니가 있는 서부로 가서 당시 영화의 메카였던 헐리우드에 입성했다. 그가 캔자스에서 만든 필름을 보고 워너브라더스 비서인 마거릿 윈클러가 배급계약을 제의했고 워너브라더스도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해 그의 작품이 워너브라더스를 통해 배급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디즈니의 배급업자가 갑자기 마거릿 윈클러의 남편인 찰스 민츠로 바뀌면서 작품에 간섭을 하기 시작했고, 마침내는 찰스 민츠는 그들이 제작하고 있던 '행복의 토끼 오스왈드'를 제작하는 중에 디즈니형제를 제외한 애니메이터들을 빼돌려 다른회사를 차리고 오스왈드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디즈니는 찰스 민츠로부터 완전히 속고 뉴욕의 배급사로부터 계약이 해지된 사실을 알고 돌아오는 길에 짧은 시나리오 한편을 썼다. 이 시나리오의 제목은 [Plane Crazy]. 시나리오의 주인공은 쥐였다. 이 쥐가 수차례 수정 후 디즈니의 마스코트인 미키마우스가 된다. 그 후 디즈니는 아기돼지삼형제, 백설공주와 일곱난장이, 환타지아, 피노키오, 아기코끼리덤보, 신데렐라, 이상한나라의 앨리스, 피터팬 등등 수많은 명작들을 만들어 냈다.
애니메이션으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던 디즈니는 또 한번의 새로운 계획을 발표하고 이를 실행시켜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것은 디즈니랜드의 건설이었다. 최초의 디즈니랜드의 구상은 그의 딸들과 함께 갈 곳이 그다지 없다는 것, 애니메이션의 인기에 힘입어 그의 스튜디오를 방문한 어린이들이 애니메이션 캐릭터와 만나 함께 놀고 사진도 찍고 싶다는 편지를 보내 오면서부터였다고 한다. 그가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기획에 참여한 디즈니랜드는 그야말로 '꿈꾸던 환상이 지금 바로 여기에'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리드>-필요시
애니메이션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브랜드 ‘월트 디즈니’. 월트 디즈니는 애니메이션과 관련 업계를 주도하는 회사 이름이기도 하지만 이 회사를 만든 전설의 경영자이자 애니메이션 연출가, 제작자, 애니메이션의 스토리와 캐릭터를 구상한 창업주의 이름이기도 하다.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캐릭터 미키 마우스를 탄생시킨 장본인이며, 애니메이션이라는 새로운 문화 장르를 개척했고, 꿈을 현실로 이루어낸 디즈니랜드를 건설한 월트 디즈니는 가장 20세기적인 인물이었다.
<명언>-필요시
All our dreams can come true - if we have the courage to pursue them.
우리의 모든 꿈은 이루어질 것이다 - 그들을 믿고 나갈 용기만 있다면.
If you can dream it, you can do it.
당신이 꿈을 꿀 수 있다면, 당신은 그것을 할 수 있다.
미키마우스의 창조자이자 디즈니랜드와 월트 디즈니 월드의
설립자인 월트 디즈니는
1901년 12월 5일에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미조리주 마르셀린 근처 농장에서 자라난 월트는,
어렸을때부터 미술에 관심을 가져 그의 나이 겨우 7살이었을때,
처음으로 자신의 그림을 이웃들에게 팔기도 하였다.
1918년 가을, 월트는 군대에 자원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이에 월트는 적십자에 가입하여 외국으로 나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그는 1년간 병원 구급차를 몰거나
적십자 고위직들의 운전사로 일했다.
전쟁이 끝난 후, 캔자스 시티로 돌아온 월트는 광고 만화가로서의 경력을 쌓기 시작한다.
1920년 그는 그의 첫번째 원작 애니메이션을 만들었고,
그후 실사영화와 애니메이션을 결합하는
새로운 방법을 완성시켰다
1923년, 월트는 단돈 40달러와
완성시킨 실사영화와 애니메이션의 결합 영화만을 가지고
헐리웃으로 향한다 그리고,
2년후 월트는 그의 첫번째 직원들 중 하나인,
릴리안 바운즈(Lillian Bounds)와 결혼해 두명의 딸,
다이앤과 샤론을 낳는다.
1928년 창조된 미키마우스는 그해 11월 18일
개봉된 세계 최초의 유성 애니메이션
<증기선윌리(Steamboat Willie)>를 통해 영화계에 데뷔하게 된다. 이후, 미키의 <어리석은 교향악단(Silly Symphony)>의 제작기간 동안에 '테크니컬러'가 애니메이션에 도입되기도 하였다.
평생 32번이라는 놀라운 아카데미상 수상 경력의 월트는 1932년에 <꽃과 나무들(Flowers and Trees)>이라는 애니메이션으로,
그 첫번째 아카데미상을 수상하게 된다.
1937년 12월 21일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Snow White and the Seven Dwarfs)>가 로스앤젤레서의 케세이 서클 극장에서 상영되었다.
1백 5십만불이라는 천문학적인 제작비용으로 만들어진
이 만화영화는 지금까지도 영화사에 있어 가장 위대한 작품 들 중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이후 5년간 월트는 <피노키오(Pinocchio)>, <환타지아(Fantasia)>,<덤보(Dombo)>, <밤비(Bambi)>와 같은 장편 애니메이션들을 완성시켰고, 디즈니의 LA 버뱅크 스튜디오가 건설되던 1940년에 이르러서는 미술가, 애니메이터들, 스토리작가 그리고 기술자들로 이루어진 그 직원 수가 1000명을 넘어섰다.
이 스튜지오에서 월트의 평생에 걸친 총 81편의 작품이 완성되었다.
1955년 월트의 꿈이 총망라된 디즈니랜드가 캘리포니아에 개장되어, 전세계 대통령, 왕과 여왕들 및 모든 귀빈을 포함한 2억 50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디즈니랜드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또한 텔레비전 프로그래밍 분야의 선구자로서,
디즈니는 1954년부터 텔레비전용 프로그램제작에 들어갔다.
이에 1961년엔
1965년, 월트는 미국 도시 생활을 질적으로 향상시키는데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여 완성된 플로리다 월트 디즈니 월드는 계획되었던 대로 1971년 10월 1일에 대중들에게 공개되었으나,
1966년 12월 15일, 월트는 43년간의 세월에 걸친 헐리우드에서의 성공을 뒤로 한 채, 안타깝게도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월트 디즈니는 수백만명의 사람들을 감동시키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