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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 (28)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 제12구간 (구미→왜관) ① [구미 감천→매학정]
2020년 10월 29일 (목요일) [독보 30km]▶ 백파
* [구미역]→ [감천] (방초정)-(직지사)→ [매학정]→ 숭선대교 도강(해평습지)→ 구미 [산호대교] 도강→ 낙동강 서로(西路) 제방길 → 구미대교(↔동락서원)→ [구미공단] 박정희 대통령 기념비→ 남구미대교(도강)→ 칠곡 동화연 q턴→ (남구미대교) 교각-칠곡 [낙동강 수변공원 길]→ (경부고속도로) 낙동강교 교각→ (강변)석적 파크골프장→ 덕포대교 교각→ [칠곡보]→ 고속철교→ 경부선 철교→ 왜관교→ 왜관(이상배 대장)→ M7호텔→ 새진실식육식당
* [구미시 선산읍 원리] ← 서쪽에서 감천 합류(백두대간 삼도봉, 수도산에서 발원, 김천 경유)
☐ [구미]→ [감천] 방초정 직지사 매학정
오늘은 종주 제12구간, 구미(시) ‘감천’에서 시작하여 ‘칠곡보-왜관(읍)’까지 걷는다. 오늘의 종주 이야기는, 구미시 선산읍 원리에서 낙동강에 유입되는 감천에서부터 시작한다. 낙동강의 지천인 감천은 서쪽의 김천(金泉)에서 흘러드는 하천인데. 감천은 김천의 서쪽에서 남하하는 백두대간의 방대한 산곡에서 발원한 모든 물이 김천(金泉)에서 합류한다. 감천의 상류에는 경부고속도로가 넘어오는 백두대간 ‘추풍령(秋風嶺)’이 있고, 백두대간 황학산(1,111m) 품안에는 천 년 고찰 ‘직지사(直旨寺)’가 있다. …그리고 감천의 중상류, 김천시 구성면에 유서 깊은 ‘방초정(芳草亭)’이 있다. … 그리고 감천 하구(河口)의 낙동강 남쪽, 구미시 고아면 예강리 낙동강 강변에 ‘매학정’이 있다. 매학정은 구미시 도심(구미역)에서 북쪽으로 10km 떨어져 있다. 오늘의 이야기는 방초정에서 시작하여, 백두대간의 산봉과 직지사를 둘러보고 감천 하구의 낙동강 매학정 탐방기를 쓴다. 그리하여 오늘의 본격적인 트레킹은 매학정에서 숭선대교를 건너, 낙동강 동안(東岸)의 해평 바이크로드를 타고 시작할 것이다.
감천
구미보(龜尾洑)는 동쪽의 해평(면)과 서쪽의 선산(읍) 사이에 건설된 보(洑)이다. 구미보 아래 1km 지점에는, 김천(金泉)을 경유하여 내려오는 감천이 낙동강에 유입된다. 감천은 김천의 서쪽에서 남하하는 백두대간의 산곡에서 발원하여 김천을 경유, 선산 원리의 낙동강에 유입되는 지천(支川)이다.
상주의 속리산에서 남하한 백두대간(白頭大幹)은 추풍령을 지나 김천의 진산 황학산을 경유하여 우두령-삼도봉-백수리산(1,034m)-덕산재-대덕산을 지나 초점산에서 서남쪽 방향으로 뻗어나가 삼봉산-신풍령(빼재)를 경유, 전라북도 무주의 덕유산으로 이어진다. … 그런데 초점산에서 동남쪽으로 합천(수도산)지맥이 분기하는데, 이 지맥은 백두대간 초점산에서 분기하여 수도산-가야산을 경유하여 남쪽의 우두산을 지나 (대구-광주간 고속도로) 가야터널을 넘어 남쪽으로 오도산-우무산-인덕산으로 이어지다가 합천의 소룡산에 와서 황강-합천호를 만나 그 맥을 다한다.
감천은 백두대간 황학산~대덕산과 합천 가야산지맥의 수도산 그리고 지례의 삼봉산 사이의 여러 산곡에서 발원한 모든 물줄기가 김천(金泉)에서 합류하여, 서쪽의 구미시 선산읍 원리의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것이다. 감천의 본류는 대덕산-수도산 사이의 산곡이다. 그리고 황학산에서 발원하는 지류인 직지사천은 김천에서 본류에 들어온다. 감천의 중류에 유서 깊고 아름다운 정자 ‘방초정(芳草亭)’이 있다.
김천(金泉) 방초정(芳草亭)
방초정(芳草亭)은 낙동강의 지천인 감천의 중류에 위치해 있다.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구성파출소를 지나 원터마을 입구 상원리에 있다. 방초정(芳草亭)은 1625년(인조3년) 이곳 출신의 유학자 연안 이씨(延安李氏) 이정복(李廷馥, 1575~1637)이 지은 정자이다. … 이정복(李廷馥)은 정양공(靖蘘公) 이숙기(李淑琦)의 5대손으로 이곳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호를 ‘방초(芳草)’로 삼아, 벼슬은 부호군(副護軍: 종4품)을 역임하였으나, 초야의 풀과 같은 생을 살고자 했다.
공(公)이 18세에 성묘를 갔는데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지례 능지산(陵旨山) 중에 있는 선영하(先塋下)에서 피난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선조(宣祖)가 북쪽으로 피난길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곧 현지로 달려가 임금을 모시려 했지만 이미 적이 사방에 가득한지라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난리가 끝나자 그는 십오공신 희맹록(十五功臣會盟錄)에 공신으로 기록되었고, 그의 충의를 가상히 여긴 나머지 나라에서는 ‘김천승(金泉丞)’이란 보직을 내렸으나 사양하였다. 그러나 후에 벼슬길에 잠시 나갔고, 귀향한 후에는 오직 유학(儒學)에만 전념하였다. 방초정은 이런 와중에 지어졌고 그는 이곳에서 석학들과 교류하며 학문에 전념하고 제자를 가르쳤다.
방초정(芳草亭)은 김천시 구성면 상원리 원터 마을에 있다. 조선시대의 관영숙소인 상좌원(上佐院)이 있었던 데서 마을 이름이 비롯되었다. 조선중기인 1519년(중종3) 연안 이씨 부사공파 일가가 처음으로 터를 잡고 마을을 이룬 이래 세거지(世居地)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 연안 이씨는 시조가 ‘이무’ 공이다. ‘이무’는 신라 태종 무열왕 7년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정복할 때, 나당 연합군 사령관을 맡았던 소정방의 부장으로 왔다가 신라에 귀화(歸化)했다. 무열왕은 중국 노자의 후손인 그를 연안후(延安侯)로 봉하고 식읍을 내렸다. 연안 이씨는 그렇게 이 땅에 뿌리를 내렸다.
보물 2047호로 지정된 방초정(芳草亭)은 마을 입구에 성문처럼 서 있다. 특이하게도 마을 입구에 있는 수호신처럼 보이기도 한다. 누각처럼 생긴 정자가 마을의 입구에 서 있는 이유는 마을 공동체의 공공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집안의 대소사를 논하기도 하고 문중 자식들을 가르치는 학교 역할도 했다. 연안이씨(延安李氏) 집성촌인 원터마을에서 방초정의 본제(本第)는 정양공 종택(靖襄公宗宅)으로 마을입구에서 안으로 쭉 들어가 산자락 아래에 있으며, 지금도 후손 이철응(李哲應) 선생이 종택을 지키고 있다.
방초정(芳草亭)은 가마를 탄 2층 누각의 팔각지붕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장방형 건물이다. 2층에 문을 달아 이를 걷어 올리면 마루가 되고 내려 닫으면 방으로 쓸 수 있게 온돌을 넣었으며, 정자사방에는 난간이 둘러져 있다. 정자의 아래층은 자연미를 살린 통나무 기둥에 2층 온돌방의 불을 지피는 아궁이, 굴뚝의 기능을 하는 호박돌을 붙인 벽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기단 네 모서리 지붕 추녀에는 가느다란 둥근 활주(闊柱)가 서 있어 건축적으로도 매우 아름답다. 정자 앞 연못가[최씨담]에는 수백 년은 되었을 뚝버들이 물가에 깊게 드리우고 있고, 여름철 배롱나무에 꽃이 피면 화사한 붉은빛이 연못에 비쳐 아름답기 그지없다.
1736년 대홍수 때 유실된 것을 1788년(정조 11년) 조선후기 예법을 집대성한 「가례증해(家禮增解)」를 저술한 후손 이의조(李宜朝: 1727-1805)가 지금의 자리에 다시 건립하여 중건기문을 남겼다. 진암 이수호(進庵 李遂浩, 1744-1796)가 상량문을 지어 칭송하였으며, 현판은 김대만이 쓴 것이라고 한다.
방초정(芳草亭)은 당나라시인 최호(崔顥)의 싯구에서 따왔다. 이정복의 호 방초(芳草)는 중국 문학의 거장 최호(崔顥)의 시를 흠모하여 차음(借音)하였는데, 차음한 시는「등황학루(登黃鶴樓)」에 나오는 ‘芳草萋萋鸚鵡洲’(방초처처앵무주) 즉 ‘향긋한 풀 무성한 저곳은 앵무주로다’란 시이다. 향긋한 풀이 무성한 앵무가 사는 곳, 자연 속에 유유자적하며 살겠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등황학루(登黃鶴樓)」는 당나라 7언율시 가운데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된다.
정자 안에는 방초정과 그 일대의 가경(佳景)을 노래한 제영시(題詠詩) 38편이 걸려있다. 우암 송시열의 9세손인 송병선의 시와 이만영의 ‘방초정 10경’이 눈길을 끈다. 이 시는 방초정을 시점으로 하는 당시 그 일대의 풍경을 엿볼 수 있는 자료다. 정자 안 사방 귀퉁이에 주련(柱聯) 형태로 걸려 있다.
1경 ‘一帶鑑湖’(일대감호)는 난간 밖 감호일대의 물가 풍경과 봄에 고기잡이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2경 ‘十里長亭’(십리장정)은 우뚝 솟아 여행길의 이정표 역할 정자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3경 ‘金烏朝雲’(금오조운)에서는 금오산 아래 구름이 깔릴 때 선경이 그려져 있고
4경 ‘修道暮雪’(수도모설)은 인근 수도산의 해 저무는 설산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5경 ‘螺潭漁火’(나담어화)은 연못에 불 밝히고 고기 잡는 풍경이다.
6경 ‘牛坪牧笛’(우평목저)는 들판에서 부는 목동의 피리소리를 정자에서 들으며 읊는 노래다
7경 ‘窟臺丹楓’(굴대단풍)은 굴대 주변의 붉은 단풍의 아름다움을,
8경 ‘松岑翠林’(송잠취림)은 푸른 송산의 수풀에서 들려오는 새소리, 잠
9경 ‘鷹峰落照’(응봉낙조)는 응봉 아래의 해떨어지는 풍경이다.
10경 ‘眉山半輪’(미산반륜)은 미산 위에 뜬 반달을 노래했다.
방초정은 1625년에 방초(芳草) 이정복(李廷馥 1575~1637)이 지었다. 지었다. 1689년에 손자 이해가 중건하고 1737년 홍수로 누정이 유실됐다. 1788년 5대후손인 이의조가 현재의 위치로 이건(移建)했다. 원래는 감천 가까이에 있었으나 수해를 피해 마을 쪽으로 옮겨왔던 것이다.
방초정과 최씨담(崔氏潭)
이정복이 세운 정자와 ‘최씨담’에는 조선의 쓰라린 역사와 연안 이씨 집안의 슬픈 가족사가 담겨 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제3번대와 모리와 시마즈가 인솔하는 제4번대가 성주, 지례, 개령, 김산을 지나 추풍령을 향했다.
그때 이정복은 원터에 있었다. 1년 전 하로마을의 화순 최씨에게 장가를 들었던 그는 처가에서 혼자 본가로 돌아와 있었다가 전쟁이 터지자 선영이 있는 능지산 아래 피신했다. 친정인 하로 마을에 남아 있던 부인 최 씨(崔氏)는 왜군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죽어도 시집에서 죽겠다며 여종 석이를 데리고 시댁으로 향했다. … 40여리 산길을 걸어 도착했으나 시댁 식구들은 모두 피난을 가고 없었다.
시댁식구들이 있는 능지산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중 왜적들과 마주쳤다. 최씨는 왜적에게 겁탈을 당하느니 깨끗하게 죽겠다며 웅덩이에 몸을 던졌다. 최 씨를 따르던 여종 석이도 뒤따라 자결했다. 최 씨의 나이 17세였다. 사람들이 이 웅덩이를 ‘최씨담(崔氏潭)’이라 불렀다. 이정복은 부인이 자결한 웅덩이를 확장해 연못을 만들고 그 옆에 자신의 호를 따 ‘방초정(芳草亭)’을 세웠다.
1632년(인조10)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정려문은 1764년 세웠으며 현재의 여각은 1812년에 증축했다. 정려각 안에 있는 ‘節婦副護軍李廷馥妻贈淑夫人和順崔氏之閭’(절부 부호군 이정복 처 증 숙부인 화순 최씨지려)라는 정려문은 인조(仁祖)의 친필이다. 정려각 앞에는 ‘충노석이지비(忠奴石伊之碑)라는 비석이 있다. 최씨 부인과 함께 자결한 여종 석이의 비석이다.
백두대간 추풍령 … 황학산 그리고 직지사
감천의 지류에 직지사천(直旨寺川)이 있는데, 백두대간 추풍령-황학산에서 발원하여 김천에서 감천에 유입된다. 예로부터 김천(金泉)은 삼산이수(三山二水)의 고장으로 알려져 왔다. ‘삼산이수’란 세 개의 산과 두 개의 물이라는 의미로, 산과 물이 대표하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비유한 것이다. 삼산(三山)은 김천(金泉)을 감싸고 있는 백두대간에 솟은 세 개의 산, 황악산(1,111m), 삼도봉(1,176m), 대덕산(1,290m)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리고 이수(二水)란 김천의 서쪽 대덕산-삼도봉 산곡에서 발원한 감천과 황학산 산곡에서 발원한 직지사천을 말한다.
* [백두대간 황학산(黃鶴山)]▶ 직지사를 품고 있는 백두대간 황악산(1,111m)은 김천시 대항면과 영동군 매곡면에 걸쳐있는 산으로, 옛날 학이 많이 찾아와 황학산으로도 불렸다. 최고봉인 비로봉은 비로자나불의 공덕을 지닌 산봉에서 유래된 말이다. 비로자나불은 높은 곳에서 세상을 밝게 비춘다는 뜻을 가지고 있어 설악산, 지리산, 치악산, 소백산, 오대산, 금강산 등 주로 큰 절을 가지고 있는 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의 이름으로 많이 쓰인다. 황학산은 산은 멀리서 봤을 땐 크고 펑퍼짐한 육산(肉山)처럼 보이지만 막상 산행을 해보면 산세는 평평하고 완만하지만 계곡길이 가파른 탓에 예상외로 험난하다.
직지사에서 서쪽으로 200m 지점으로 가면 천룡대로부터 펼쳐지는 능여계곡은 이 산의 대표적인 계곡으로 봄철에는 진달래와 벚꽃이 가득하고 가을철의 오색단풍은 좋은 볼거리를 선물해준다.
* [백도대간 삼도봉(三道峰)]▶ 삼도봉은 경상북도 김천시, 충청북도 영동군 그리고 전라북도 무주군이 만나는 정점(頂點)이다. 삼도봉, 세 개의 도(道)가 접해있는 산봉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삼도봉 정상에는 높이 2.6m의 ‘삼도봉 대화합 기념탑’이 우뚝이 솟아있다. … 1989년 9월 19일에 경상도·충청도·전라도 사람들이 지역 간 대립과 불신의 벽을 없애고 삼도의 화합과 발전을 위해 기념탑을 만들자는 의견이 나왔고 그해 10월 10일을 ‘삼도봉 만남의 날’로 정해서 행사를 개최했다. 이후 매년 10월 10일이 되면 삼도가 만나는 그 지역의 주민이 하나가 되어 행사를 진행하여 지금까지 진행하고 있다.
「삼도봉 대화합 기념탑」은 동양화가인 안병찬 화백의 작품인데, 대리석으로 만든 거북이의 기단석 위에, 대리석 용(龍) 조각과 오석(烏石)의 원구(圓球)를 얹은 모습이 아주 특이하다. 탑의 북쪽에는 ‘삼도봉’ 이름이 새겨져 있고, 서쪽에는 삼도봉의 유래(由來)가, 동쪽에는 건립 취지문이 새겨져 있다.
둥근 해와 달을 표시하는 원구는 해와 달처럼 밝은 마음으로 하나가 되는 영원한 화합을 상징하며, 용 조각의 청룡은 승천하는 모습을 통해 영원한 발전을 상징한다. 또 받치고 있는 기단석의 거북이는 머리 방향이 3개의 시·군을 향하고 있고 청룡 세 마리도 같은 방향을 보고 있는데, 이는 3개의 도가 하나가 되어 빛을 발하는 지역의 화합을 상징하는 것이다.
삼도봉 주변에는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삼도봉 오미자 농장이 있으며 찾아보면 과거 금광을 캤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다 내려오면 부항면 근처에 김천 흑돼지가 유명한 지례면이 있고 부항댐에서 오토캠핑장 또한 즐길 수 있다.
* [백두대간 대덕산(大德山)]▶ 김천의 산중 제일 서쪽에 위치한 대덕산은 해발 1,290m로, 초점산을 옆에 둔 중부의 명산이다. 이름처럼 덕(德)이 많은 산이다. 남서쪽의 덕유산, 북쪽의 삼도봉과 민주지산 등 백두대간의 산줄기로 연결되는 영·호남의 분수령이다. 많은 즐거움을 준다 해서 ‘다락산’으로, 산의 형상이 투구 같다 해서 ‘투구봉’으로도 불린다. 대덕산의 명칭은 한 도인(道人)이 예전 이 산에서 백일기도 후 공덕을 쌓고 도가 통했다고 하며 정상에는 기우단이 있어 가뭄이 들면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는데, 그 영험이 있어서인지 제(祭)를 지내고 나면 비가 내렸다고 한다.
‘방아골 암벽’ ‘얼음골 폭포’는 낙동강(←감천)의 발원지이며, 대덕산 서쪽의 계곡물은 금강의 발원지이다. 이 지역에서 흐른 강물이 한반도의 중남부로 가서 토양을 기름지고 비옥하게 하니 이름 그대로 인심과 덕이 많은 산이라 할 수 있다. … 또한 이 지역은 3도 3면이 만나는 지역이기도 하다. 경북 김천의 대덕면과 경남 거창군 고제면, 전북 무주군 무풍면의 주민은 상호화합을 위해 ‘대덕산 만남의 날’ 행사를 하고 있다. 행사는 지난 1998년 처음 실시한 후 인접한 3개 면의 물적·인적교류와 화합의 장을 위해 지금까지 진행하고 있다.
황학산 직지사
직지사(直指寺)는 418년(신라 눌지왕 2년)에 고구려에서 내려온 아도화상(阿道和尙)이가 세운 천 년 고찰이다. 아도화상이 신라로 내려와 선산에 ‘도리사(桃李寺)’를 세우고, 이어 황학산 아래 ‘직지사’를 세웠다. 그러므로 직지사는 신라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사찰이다. 지금 직지사의 장대한 산문에는 ‘東國第一伽藍黃鶴山門’(동국제일가람황학산문)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직지사가 지금의 거찰이 된 것은 고려의 왕건(王建)이 후삼국을 통일한 뒤였다. 왕건은 팔공산에서 견훤에게 크게 패해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해 황급히 도망했는데, 이때 직지사에 있던 능여선사가 왕건을 도와 무사히 개성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왕건은 그 은혜를 잊지 않고 후삼국을 통일한 뒤 직지사를 크게 중수했다고 전한다.
직지사(直指寺)는 또 임진왜란 때 승병장으로 큰 활약을 한 사명대사(四溟大師)를 배출한 사찰로도 유명하다. 사명대사는 1556년 15세에 직지사로 출가해, 30세에 직지사 주지(住持)를 지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강산 표훈사에 머물고 있다가, 스승인 서산대사(西山大師) 등과 함께 각종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특히 1605년에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적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포로 3천명을 데리고 귀순하는 등 조선인의 희생을 최소화하면서 실익을 챙기는 협상의 달인이기도 했다. 직지사는 이러한 성사의 호국(護國)사상을 대중들이 함께 호흡하기 위하여, ‘호국성사 사명당 문화대제전’에 개최하고 있다.
김천 직지사 대웅전(金泉 直指寺 大雄殿)은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직지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2008년 9월 3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576호로 지정되었다. 김천 직지사 대웅전은 일주문, 금강문, 사천왕문까지는 좌측의 계곡을 끼고 지형에 맞추어 휘어져 올라온 북쪽에 위치하며, 만세루(萬歲樓)에서 대웅전에 이르기까지는 일직선상에 놓여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선당(禪堂)이 위치해 있으며, 대웅전 앞뜰에는 2개의 삼층탑이 놓여 있는 2탑식 중정형 가람배치를 가진다.
직지사의 중요문화재로는 석조약사여래좌상(보물 제319호), 대웅전 앞 삼층석탑(보물 제606호), 비로전 앞 삼층석탑(보물 제607호), 청풍료 앞 삼층석탑(보물 제1186호), 대웅전 삼존불탱화(보물 제 670호) 및 괘불도(보물 제2026호), 석조나한좌상(천불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96호) 등이다.
추풍령의 시인, 백수 정완영
백수(白水) 정완영(鄭椀永)은 추풍령-황학산이 낳은 시인(詩人)이다. 시인은 1919년 경북 금릉군 봉산면 예지동(1994년 금릉군이 김천시에 편입)에서 태어나 2016년, 97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 정완영이 시조(時調)를 쓰기 시작한 지 20년이 되어서야 문단에 등장했다. 등단 전 수백여 편의 작품을 갖고 있었음에도 ‘누가 감히 내 시를 심사할 수 있느냐’ 생각하며 늦깎이 시인으로 등장했다. 정완영이 시조를 쓰기 시작한 때는 그의 나이 23세 때인 1941년부터라고 한다. 일제 핍박이 날이 갈수록 가혹했던 시절, 한글로 시를 짓는 일은 사상범에 해당되는 죄로 간주되는 시기다. 조선어사전과 이태준, 이용악 등의 문학 서적이 집에 쌓여 있어 정완영 시인 역시 일제하에서 심한 고문을 받아 그 후유증으로 손과 팔이 저려오는 고통을 안고 살았다. 그의 대표작 「조국(祖國)」의 가락이 절절하다!
행여나 다칠세라 / 너를 안고 줄 고르면
떨리는 열 손가락 / 마디마디 애인 사랑
손닿으면 애절히 우는 / 서러운 내 가얏고여.
둥기둥 줄이 울면 / 초가삼간 달이 뜨고
흐느껴 목 메이면 / 꽃잎도 떨리는데
푸른 물 흐르는 정에 /눈물 비친 흰 옷자락.
통곡도 다 못하여 / 하늘은 멍들어도
피 맺힌 열두 줄은 / 구비 구비 애정인데
청산아 왜 말이 없이 / 학처럼만 여위느냐. — 「조국(祖國)」(전문)
해방을 맞이한 조국은 좌우익의 갈등으로 혼란스러울 뿐 시인의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주지 못했다. ‘신탁 반대’, ‘대구 폭동’ 등으로 어수선한 시국에서 그는 이 ‘조국’을 지었다. 조국에 대한 사랑과 슬픈 역사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짙게 배어있으면서 미래의 조국에 대한 비원(悲願)을 담고 있다. 조국에 대한 남다른 사랑이 시로 승화한 것이다. …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도 실린 작품이다.
‘김천(金泉)을 금릉군이 뺑 둘러싸고 있었는데 참 가난했던 곳이다. 산업시설은 전무했고 다들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평야지대가 아니다. 척박한 땅에 고작 심어야 과실나무다. 추풍령(秋風嶺) 아랫마을인 봉산면 사람들의 궁핍한 삶이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한다. 가난을 길들이고 살았다고 하면서도 이상하게 작품이 전반적으로 아프다.’ 정완영 시인은 가난과 눈물의 시인이었다. 2000년 4월 29일 노년의 일기에, “눈물 속에 바라보면 부처 아닌 사람 없고, 부처 아닌 산천 없다. 부처 아닌 초목도 없다. 눈물로 정화한 땅이 부처 사는 불국토다”라고 쓰고 있다.
1919년 추풍령 아래 산골마을에서 태어난 시인은 일제 치하인 1941년 처녀작 「북풍」을 발표하고 1947년 동인지 「오동」을 창간했다. 1960년 국제신보 신춘문예에 「해바라기」로, 196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조국(祖國)」으로 당선됐다. 이후 시조집 『채춘보’(採春譜)』 『묵로도’(墨鷺圖』 『산이 나를 따라와서』 『세월이 무엇입니까』 『시조100인선』 산문집 『나비야 청산 가자』 『차 한 잔의 갈증』외에도 시조 관련 서적과 수필집이 있다.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1995)을 받았다. …
직지문화공원의 가까운 거리에 백수문학관(白水文學館)이 있다. 시립 문학관으로 2008년 개관하였다. 김천 출신 시인 백수(白水) 정완영의 삶과 현대 시조 작품을 소개하는 공간으로, 서각, 시집, 사진, 일기장 등 관련 문학 자료와 유품을 소장 및 전시하고 있다. 직지문화공원에도 그의 시 '고향생각'을 새긴 시비(詩碑)가 있다.
구미(龜尾) 매학정(梅鶴亭)
감천이 낙동강에 유입되는 선산읍 원리 남쪽, 구미시 고아면 예강리 보천탄 언덕 위에 ‘매학정(梅鶴亭)’이 있다. 매학정의 주인 황기로(黃耆老)는 조선 초·중기의 4대 명필(名筆) 중 한 사람이다. 매학정(梅鶴亭)은 이름 그대로 ‘매화(梅花)’와 ‘학(鶴)’을 벗삼아 자연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는 삶을 누리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북쪽으로는 야트막한 고산(孤山)이 병풍처럼 둘러서고 동·서·남쪽 3면으로 강이 한눈에 들어오는 절경이다. 지금도 매학정 입구에 매화 7그루가 서 있다. 이른 봄이 되면 매화가 화사한 꽃을 피운다. 정자 앞 보천탄(낙동강)에는 학이 와서 노닐었다. 보(洑)가 건설되고 난 후 요즘은 학 대신 물오리가 유유히 강물 위를 오간다.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 1521~1575)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제자이다. 조부의 뜻에 따라 정자를 지었다. 정자 앞마당에는 매화나무를 심고 학과 더불어 노닐었다고 한다. 그는 14세에 사마시에 합격하는 뛰어난 재능을 지녔으나 평생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매학정에서 유유자적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면서 은둔의 삶을 살았다. 매학정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불에 타 버렸으나, 1654년(효종 5년)에 다시 지었고 1862년(철종 13년)에 화재가 발생하여 소실됐다가 1970년에도 크게 보수를 했다.
황기로(黃耆老)는, 정자 뒤의 언덕을 ‘고산(孤山)’이라 하고 정자를 ‘매학정(梅鶴亭)’이라 하였다. 중국 서호(西湖) 고산에서 살았던 북송의 시인 임포의 삶을 동경해서 그렇게 지었다. 임포는 ‘梅妻鶴子’(매처학자), 즉 ‘매화는 아내, 학은 자식’이라고 하며 평생 은둔생활을 했다.
황기로(黃耆老)는 조선 초기와 중기를 통털어 4대 명필(名筆)로 꼽힌다. 안평대군 이용, 자암 김구, 봉래 양사언, 고산 황기로이다. 특히 황기로는 초서(草書)가 뛰어나 중국 한나라의 장지와 당나라의 장욱과 어깨를 겨룰 정도라고 해 ‘초성(草聖)’이라 불렸다. 미수 허목(許穆)은 “신라부터 천 년 가까이 내려오는 동안 글씨로 후세에 이름난 사람으로는 학사 최치원, 김생, 탄연, 시중 이군해, 안평대군, 근세의 양사언, 황기로, 한호, 백광훈 등을 들 수 있다”고 극찬했다.
황기로는 앞마당에 매화를 심고 보천탄 강물을 유유히 날아다니는 학을 보며 초서에 몰입했다. ‘광초(狂草)’로 불렸던 장욱의 거칠고 호방한 필획을 베이스로 받아들였다. 장욱은 술을 좋아하여 대취한 상태에서 미친 듯이 돌아다니다가 머리에 먹을 묻혀 휘갈겨 ‘장전’이라고도 했다.
황기로는 장욱의 필획에다 소회의 가늘고 유려한 운필을 섞었다. 또 명대에 초서로 이름을 떨쳤던 장필의 변형된 획법을 더해 자신만의 독자적인 서풍을 이루었다. 점획을 과감하게 생략한 감필법(減筆法), 획간의 공간을 좁거나 짧게 처리한 속도감 있는 운필(運筆), 중록으로 쓴 맑고 깨끗한 선질은 장필의 초서풍과 뚜렷이 구분되는 특징들이다. 황기로의 초서풍은 16ㆍ17세기에 걸쳐 폭넓게 유행했다. 16세기에 그의 초서풍을 따른 대표적 서예가가 제자 이우(李瑀)이다.
이우(李瑀)는 율곡 이이(李珥)의 동생으로 황기로 문하에서 글씨를 배운 문인이다. 그는 스승 황기로의 사위가 되어, 황기로의 글씨를 직접 전수받았다. 이밖에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가 크게 영향을 받았으며, 오운, 서일은 황기로가 주로 활동했던 안동을 포함한 인근 지역에서 그의 서풍을 계승한 대표적 서예가이다. … 해평 구미보 아래 수변공원의 시비 ‘매학정’이 바로 이우의 작품이다.
황기로의 초서(草書)는 보물 제1625호로 지정된 ‘차운시(次韻詩)’를 비롯하여, 풍기 소수서원 ‘景濂亭’(경렴정) 편액,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고산도첩(孤山圖帖)’등이 있다. 금오산 바위에 새겨진 ‘금오동학’ 산 정상 군부대 안에 있는 후망대 음각글씨도 황기로가 썼다.
황기로의 소수서원 ‘景濂亭’(경렴정) 현판 초서
소수서원 입구에 있는 ‘景濂亭’(경렴정) 현판을 쓸 때의 일화가 있다. 황기로는 스승 이황(李滉)으로부터 ‘경렴정’ 현판 글씨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이황 자신은 해서(楷書)로, 황기로는 초서(草書)로 글씨를 써서 걸어두겠다는 것이다. 스승이 지켜보는 앞에서 손이 떨려 도저히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이를 눈치 챈 이황이 자리를 비켜주자 일필휘지(一筆揮之)로 현판 글씨를 써나갔다. 지금 영주 소수서원 진도문 입구의 경렴정에 퇴계의 해서와 황기로의 초서 현판이 걸려 있다.
황기로는 율곡과 사돈을 맺었다. 율곡 이이의 동생 이우(李瑀)와 황기로의 딸이 혼인을 맺었던 것이다. 여기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1558년, 23살의 이이(李珥)는 당시 성주목사이던 노경린의 딸과 결혼한 뒤 6개월 동안 처가에서 살았다. 6개월이 지나자 율곡은 강릉에 있는 외할머니를 보러가게 됐다. 강릉 가는 길에 이황을 만나 가르침을 얻을 작정이다. 이에 앞서 구미에 있는 황기로를 만나러 매학정으로 갔다. 이이의 천재성을 알아본 황기로는 이이를 붙잡고 밤늦도록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황기로는 이이의 동생 이우와 자기의 딸을 혼인시키고 싶다는 뜻을 비치고 아버지를 비롯한 집안어른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달라고 했다. 이이는 매학정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그 소회를 긴 시로 적었다. [사진] 매화정에서 바라본 숭선대교.
동녘이 밝을 무렵 수레에 기름 치고,
산에 오르기 몇 번이며 물은 몇 번 건넜던가
외로운 산은 넓은 들 앞에 맞대어 있고
낙동강 뿌연 연기는 온 물가에 둘러 있네.
덤불 헤치고 길을 찾아 대 사립문을 두드리니
동자가 문에 나와 날 반가이 맞아주네
으리으리한 붉은 누각 먼지 한 점 없어
간소하면서 누추하지 않고 화사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네.
빈 뜰에 매화송이는 아직 피지 않았는데
깊은 못의 학 울음소리가 가끔 귀에 들려오네. (중략)
맹세코 고기 잡고 나무하며 한 평생 늙을지언정,
흐리멍텅하게 취생몽사는 하고 싶지 않네.
오늘 밤 술잔을 사양치 않음은
인간만사 털어버리길 여기에서 시작하려고.
— 이이(李珥)의 시 「매학정을 방문하다」
아들이 없었던 황기로는 매학정을 비롯한 전 재산과 초서체를 제자이자 사위인 이우(李瑀)에게 물려줬다. 황기로가 죽고 이우가 정자를 물려받자 전국에서 시인 묵객이 몰려왔다. … 정자 안에는 이이(李珥)의 매학정기문과 시판, 이황(李滉)과 임억령, 조임도 등의 시들이 걸려 있다. 면앙정 송순(宋純)도 1552년 선산부사로 부임해 있을 때 이곳에 들러 시를 남겼다. … 황기로의 조부 황필은 매학정 원운시를 썼는데 황기로가 조부의 시를 차운했고 이황(李滉)도 제자를 위해 황필의 시를 차운해 시를 남겼다.
백세 전 임포의 풍류를 사모하여
평생토록 호반에서 매화와 학을 벗하였네
매화향기 이로부터 깨끗한 기운 함께 하고
눈처럼 날리는 꽃잎 오는 봄을 사양하네
그대가 아름다운 이름 사모하여 좋은 땅 차지 했으니
나는 빼어난 경치 구경하려 배를 띄운다오
학아, 매화꽃이 야위어 간다고 애태우지 말라
장욱의 필치로 앞으로의 세상 즐기게 해 주리라
— 이황(李滉)의 「梅鶴亭次韻詩(매학정차운시)」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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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박사님...어저께 구미 금오산을 댕겨 왔습니다 아도화상이 지었다는 태조산 도리사는 늦어서 들리지 못햇습니다
장문의 글 꼼꼼히 정독을 해보니 배움이 큽니다..대단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