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계>
-제임스 톰슨 지음/윤준 譯/(주)나남 2023년판/377page
18세기 영국의 사계로 빠져들어 보는 시간
1
모든 종교는 인간의 욕심을 절제시키면서도 은연중 키운다. 그 욕심이 인류를 현실에서 생존케 하고 문명을 일구어온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2
인간이 깨어나, 나태의 침상에서 뛰쳐나와
명상과 성스러운 노래에 걸맞은
서늘하고 향기로운 침묵의 시간을 즐기지 않는다면
그릇된 호사를 누리는 게 아닐까?
(중략)
집 바깥에서 온갖 시신(詩神)들과 피어나는 온갖 즐거움이
빙 돌아가는 아침 산책을 축복하려고 기다리는데,
자연이 필요로 하는 것보다 더 긴 시간 동안
그런 음울한 상태에 누가 남아 있으려 하겠는가?
(본문 중 ‘여름’편 67~80에서)
3
제임스 톰슨은 장문의 시집 <사계>에서 전원에 대한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시구를 많이 남겼다.
하늘에서 소나기가 내릴 때 봄을
푸릇푸릇하게 만드는 건 무엇이건, 아니면 여름이 얼굴을 붉히고
가을이 환하게 미소 지을 때 나뭇가지를 휘게 만드는 건 무엇이건,
아니면 겨울의 밭에 감춰져 있으면서
가장 자양분 많은 수액으로 통통해지는 건 무엇이건―
이들이 부족하진 않다. 또한 음매 울음소리 들리는
계곡 위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숫한 젖소들도,
양들의 매애 소리 들리는 산들도, 개울물의 시끌벅적한 소음도,
벌들의 잉잉거림도 부족하진 않아, 나무 그늘 밑이나
향긋한 건초 사이에 대자로 드러누운 순결한 이의 작은 숲이나
노래나 흐릿한 동굴들이거나 어렴풋이 빛나는 호수들이나
맑은 샘들 중 그 어느 것도 부족하진 않다.
여기에도 소박한 진실, 꾸밈없는 청순함,
때 묻지 않은 아름다움, 고된 노동을 잘 견디며
적은 것에 만족할 줄 아는 꺾이지 않은 건전한 젊음,
늘 꽃피는 건강, 야심을 모르는 노력,
차분한 심사숙고, 시적(詩的)인 안락이 산다.
(본문 중 ‘가을’편 1260~1275에서)
4
시인은 궁극적으로,
시신(詩神)들이 어쩌면 불멸의 시에서
노래했을 법한 내용을 읽거나
시신이 구술하는 내용을 받아 적고, 종종 주위를
흘낏 둘러보며 활기찬 한 해를 기뻐한다.
(본문 중 ‘가을’편 1318~1321에서)
와 같이 영감이나, 시신이나, 자연이 불러주는 아름다운 시구를 그냥 받아 적는 존재이기도 하다.
5
시인 제임스 톰슨은 자연에서 무궁무진한 영감을 얻는 모양이다.
조촐한 개울가에 겸손하게 나를 눕혀,
내 꿈에 속삭여 다오. 너에게서 시작해,
너에 관한 모든 걸 곰곰 생각하고, 너로 내 노래를 마무리하고,
내가 결코 결코 너를 놓쳐 헤매지 않게 해 다오.
(본문 중 ‘가을’편 1370~1373에서)
6
공정하고 선한 품성, 건전하고 고결한 인격,
타락해 가는 시대 한가운데에서 확고하고 의연하고 청렴하고
조국의 번영을 위해 뜨겁게 불타오르면서도
헛되이 이글거리지는 않는 영혼,
원칙을 따르면서도 자유로운 차분한 정신―
이런 미덕들이, 각각 서로를 북돋우며, 정치인을
애국자로 끌어올린다. 이런 미덕들이, 대중의 희망과
눈길을 그대에게로 돌리게 하면서, 시기심이
감히 아부라고 부르지 않는 바를 시신에게 기록하도록 명한다.
(본문 중 ‘겨울’편 32~40에서)
7
시인은 자연의 사계인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계절의 특성에 맞게 표현하는데 각 장문의 시에는 계절의 파노라마적인 변화를 한 폭의 정물화나 풍경화를 그린 듯 작품 속에 정밀하게 혹은 느낌들을 추상적으로 드러낸다.
예를 들면 요즘 우리의 계절인 ‘가을’과 관계해서는 수확 준비가 된 들판의 경관, 근면을 찬양하는 사색, 보리 베기, 그와 관련된 이야기, 수확기의 폭풍, 사격과 사냥의 야만성, 여우 사냥에 관련된 이야기, 과수원 풍경, 늦가을에 자주 나타나는 짙은 안개, 샘들과 개울들의 발생에 관한 조사, 서식지를 옮기는 철새, 변색되고 시들어 가는 숲의 경관, 온화하고 어스레한 낮이 지나간 뒤의 달빛, 가을의 유성들, 아침, 늘 가을을 마무리하는 평온하고 맑고 볕바른 날, 수확물을 거두어들이고는 기쁨에 겨운 농민들, 철학적인 전원생활에 대한 찬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8
자연의 사계를 적은 책들은 모두 알지는 못하지만 찾아보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장문의 시(詩)로 적어 내려간 시집은 드물다. <사계>는 영국의 사계절을 시인이 노래한 것으로 좀 더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는 우리에게도 많다. 하지만 아예 작정하고 자기가 살고 있는 땅의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모두 시로 표현한 경우는 우리에게도 드물다. 얼마나 애정이 깃든 행위인가.
장문의 시 중간 중간에는 영국의 위정자들에 대한 칭송도 간간이 나온다. 그들 대부분은 문필가이자 시인으로 각주에서는 소개하는데, 의회정치가 일찍 시작된 영국에서는 당시 정치가들에게 있어 글을 잘 쓰고 연설을 잘 하는 것이 당연시되었던 모양이다. 지금 우리 국회에서 대정부 연설을 하는 정치가들에게서 명문장이라고 일컬어져 소개되는 미덕이 없음은 유감이다. 정치도 예술처럼, 시처럼 엮어가는 여유를 지금의 우리 현실에서 구하기란 어불성설일까.
(2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