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지 않고 어이 견디리
-김나현론
백남오
1.수필 〈동백꽃 지고〉
김나현은 수필전문지 《수필과 비평》이 배출하고 키운 수필가다. 수필과 비평의 수많은 인기작가 중 한사람이다. 월간 《수필과 비평》은 2022년 9월호를 기점으로 통권 251호를 발행하며 한국 수필계를 선도적으로 이끌어 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출판사측의 의욕적인 투자와 지원, 작가회의의 열정적이고 왕성한 활동이 결합되어 시너지효과를 발휘하며 우수한 작가들을 지속적으로 배출해내고 있다. 이들 작가들은 서로 선의의 경쟁을 통하여 문학적인 역량을 키워가고 있다. 특히 신곡문학상, 황의순문학상, 수필과비평문학상을 통해 배출한 인기작가들은 높은 자존감을 바탕으로 창작에 몰입하고 있다. 몇 해 전 김나현의 수필 〈동백꽃 지고〉를 읽고 이 작가를 주목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 인용문을 보자.
그물 주인이 흥건한 꽃물에 소스라쳐 놀라겠지. 서둘러 옷을 추스르며 일어섰다. 주변이 신경 쓰여 뒤쪽으로 고개를 막 돌렸을 때다. 딱 시선이 닿은 그곳에 ‘난 다 보고 있었다.’라는 듯, 막 흘린 생명 같은 동백꽃 몇 송이가 그리도 붉게 피어있는 게 아닌지. 그 나무가 애기동백인지 겹동백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서둘러 돌아설 때 눈에 담은 동백꽃은 여태 색 바래지 않고 그대로 피어있다. 그런 사연 때문일까. 망울을 편 동백꽃을 보면 숨이 잠시 멎는다. 사춘기 시절 마음에 둔 남학생과 달빛 훤한 고샅에서 단둘이 마주쳤을 때처럼.
-〈동백꽃 지고〉부분
20대 새댁시절, 섬 생활을 하던 때 둘째 아이를 잃은 내력을 매우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태기를 안지 두 달쯤, 갑자기 배가 아파 배를 대절해 병원으로 이송 중 부두 뱃머리에 도착 즉시 배가 터질 듯 소변이 마려웠다. 급하게 해안가로 내달려 쪼그리고 앉은 곳은 머리도 가릴 수 없는 거물더미 뒤였다. 인적이 없는 것만으로 다행이었다. 차가운 봄바람에 허옇게 드러낸 속살의 아픔도 느끼지 못할 만큼 흥건하게 꽃물을 토해냈다. 그렇게 아이는 지워졌다. 그 순간에 꽃물처럼 붉은 동백꽃 몇 송이 피어있는 모습을 어찌 평생 잊을 수가 있으랴. 화자는 동백꽃을 바라보며 해안가에서 아들을 낳은 새댁의 모습과 슬픈 역사의 주인공 덕혜옹주의 모습을 읽어낸다. 그때나 지금이나 동백꽃은 무던히 붉다. “꽃피는 춘삼월에 후드득 떨어져 더 애타는 꽃. 요즘 성급한 동백은 꽃 필 시기도 모르고 속절없이 피기도 하더라만. 꽃 피우는 일이란 자연의 흐름을 따르는 법 아니던가. 겨울에 꽃핀다고 하여 붙은 동백이란 이름처럼 추위를 뚫고 꽃 피우는 동백이 장하다. 크게 될 사람은 늦게 이루어진다는데 동백꽃도 꽃 중에 대기만성 꽃이다. 꽃을 보며 앞날의 희망을 본다.” (「동백꽃 지고」)며 스스로를 위무한다. 한 젊은 새댁과 붉은 동백꽃과 아픔이 겹치며 알싸하고 육감적인 여운을 주는 작품이다. 한편의 수필이 주는 힘을 생각하며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던 기억이 생생하다.
2. 여행 산문집 《비가와도 좋았어》
그 후 몇 년이 더 지난 다음 김나현은 여행 산문집 《비가와도 좋았어》를 펴냈다. 이 책은 그야말로 여행만을 주제로 한 수필 32편을 모아 예술적이고 섬세한 사진과 함께 편집해 세상에 내놓았다. 목차를 보니 사계절을 소주제로 하여 배치했는데 그냥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아니라 여름, 겨울, 가을, 봄 순서로 배열한 것이 매우 이채롭게 보였다. 아마도 작가가 좋아하는 계절의 순서가 아닐까 상상을 해 보았다. 그렇다면 김나현은 여름을 가장 좋아하는 개성적인 작가라는 의미가 아닌가.
그의 국내 여행지로서는 무섬마을, 경북 영덕의 삼벽당, 부산에서 동해남부선을 타고 종점인 포항역에 내려서는 죽도시장, 구룡포, 보경사 일대를 거닐었다. 이어 창녕 우포늪, 눈 내리는 전주의 한옥마을, 경주시의 모화마을과 통일전, 지리산 쌍계사, 더 내디딜 곳이 없는 전남 보길도, 설악산 백담사, 제천 정방사, 꽃피는 포구 화포로 이어진다. 그리고는 안동의 임청각에서 끝을 맺는다. 물론 김나현의 여행지는 국내에서만 머물지 않는다. 그의 관심은 오히려 저 무진무궁한 지구촌 전체다. 그렇게 무한정 시공간을 확대해 나간다. 미국서부의 모하비사막을 필두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하바롭스크와 우수리스크에서 고려인 통한의 역사를 생각한다. 동남아시아의 푸껫과 씨엡립, 치앙마이, 방콕의 밤거리를 걷는다. 지구의 끝자락인 유럽으로 진출하여서는 인류문화의 발상지인 유적을 둘러보면서 인간과 세월을 회고한다. 특별히 이웃나라인 일본에는 수십 번을 왕래하며 역사와 문학과 삶의 본질에 대하여 사색한다.
여행은 문학작품을 탄생시킨다. 여행과 문학은 상호 필연적인 관계라 할 수가 있다. 여섯 살 소년은 집 앞 슈퍼마켓에 혼자 심부름을 다녀오면서 거대한 세상을 만나고, 열일곱 소녀는 보고픈 바닷가에 혼자 다녀오면서 정신의 크기가 한 뼘 자라며, 집과 남편밖에 몰랐던 마흔 살 아줌마는 혼자 기차여행을 하면서 비로소 자신의 본모습을 대면한다. 순간 이들은 모두 자기 삶의 작은 영웅이 되며, 세상은 모두 나를 중심으로 돌아감을 알게 된다. 이렇게 우리는 끊임없이 죽음의 일상을 탈출하여, 새로운 생명을 얻어 귀환한다. 우리는 여행을 통하여 끊임없이 성장하고 거듭 태어나는 것이다. 여행 가방을 싸고 지도를 펼쳐볼 때, 낯선 풍물과 만날 때마다, 잠 못 이루는 타관의 객사에서, 짧은 시간 인연을 맺은 사람과 헤어지며 뒤돌아보는 순간, 집에 돌아와 꿈만 같았던 지난날을 추억하는 가운데, 문학은 꿈틀거리며 몸속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미적 황홀감에 빠져드는 순간이다. 그 순간은 누구에게나 이미 작가이다. 사마천은 약관의 나이에 역사의 현장을 두루 찾아보았는데, 뒷사람들은 장강대하 같은 그 문장의 동력을 그의 여행에서 찾곤 했다. 옛사람들은 흔히 창작의 조건으로 만권의 책을 읽고 만 리 길을 다녀야 한다며 독만권서讀萬券書, 행만리로行萬里路를 들었는데, 어떤 이들은 그중 만 리 여행이 더 중요하다며 독만권서讀萬券書, 불여행만리로不如行萬里路로 고쳐 말하기도 했다. 김나현은 이에 충실한 지독한 여행마니아다. 김나현의 여행 산문집을 펼치며 맨 먼저 일본 교토 여행기이자 표제작인 〈비가와도 좋았어〉를 찬찬히 읽었다.
홀로 간 교토의 여운이 깊다. 황궁이 있던 천년 수도였고, 스필버그 감독이 영화 <게이샤의 추억>을 찍은 아라시야먀 대나무 숲도 있다. 여행에서 돌아와 이 영화를 보며 여행한 흔적을 더듬었다. 나무 난간이 있는 도월교 주변 벚꽃이 하늘대는 봄 풍경은 평화로웠다. 민박 같은 곳에서 한 이틀 자고, 그 마을 사람처럼 동네를 소요하고 작은 가게를 기웃대며 강변을 거닐었으면 했다. 뽀얀 달빛 아래서 도월교 아래로 가츠라강을 건너는 달을 보고도 싶었다. 이런 생각은 여행에서 돌아와 곱씹을수록 새삼 그립고 그러고 싶어진다.
교토는 우리 시골의 이끼 낀 돌담길 정서만큼은 아니어도 그곳만의 정서가 있다. 세계문화유산인 청수사로 가는 길에서 만난 휘영청 늘어진 수양벚꽃을 본 것만으로 만족스럽다. 좁은 계단으로 내려가는 골목에 이층 주택 지붕보다 높이 뻗은 벚나무에서 가지가 수양버들처럼 골목으로 늘어졌다. 그 가지마다 분홍빛 꽃이 조롱조롱 달렸는데 먹색 전통가옥과 어울린 색의 대비와 구도가 멋스러움의 극치를 이룬다. 이 풍경을 보려는 외국인과 본국인이 어깨가 스칠 정도로 몰려든다.
- 〈비가와도 좋았어〉부분
벚꽃이 분분하는 봄날, 2박 3일 일정으로 혼자 떠난 여행이다. 여행지에서의 풍경과 정서도 만족스럽지만 여행지에서 돌아와 그곳을 곱씹으며 음미하고 그리워하는 것을 즐기는 작가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벚꽃이 만발한 이국땅에서 먹색 전통가옥과 어울린 색의 대비에 멋스러운 정감도 느끼지만, 그 풍경을 보려고 먼 타국에서 달려온 외국인과 본국인과의 하나 됨의 염원이 압권이다. 그것은 서로 어깨가 스칠 정도로 몰려든다, 로 표현된다. 아무리 사람이 모이고 몰려들어도 절대로 어깨가 스치지는 않는 법이다. 개인끼리의 친밀감도 중요하지만 국가끼리도 서로 오순도순 사이좋게 지내기를 소망하는 작가의 평화주의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짧은 여행이 끝나는 날, 비가 올까 걱정한 건 아니지만, 아라시야마 대나무 숲길을 돌아 나오는 길에 봄비가 후드득 뿌렸다. 비를 맞으며 뛰는 모습이 처량해 보였던가. 어느 부부 일행 팀이 말차라테를 사 주는데, 비가 온 덕분으로 돌린다. 비를 잠시 피해 앉은 사이에 서먹하던 사이도 풀렸으니 그도 비 덕분이라 여긴다. 그리하여 오히려 비가 여행의 발목을 잡는 것이 아니라 비가 와서 좋았다고 강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는 여행에서 돌아오니 사람이 남았다고 말한다.
건강할 때 갔다 온 캘리포니아 모하비사막이 환영처럼 어른거렸다. 라스베이거스의 휘황한 불빛이나 그랜드캐니언의 장엄함도 아니었다. 푸른 바다를 가로지른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도, 태평양을 낀 아름다운 해안도 아니고 온종일 달린 모하비사막 길이 줄곧 떠올랐다. 해발 천 미터, 차로 몇 시간을 달려도 끝나지 않을 듯 펼쳐지던 황량한 땅, 물기라고는 없이 바짝 마른 대지에 내리쬐던 고도로 뜨거운 볕과 투명한 햇살, 벌레를 미라로 만들 만한 건조한 날씨….
문명이 방치한 것으로 보이는 그곳에도 생명체는 있었다. 눈길을 뗄 수 없었던 건 죽은 듯 살아 메마른 땅을 잠식한 덤블링트리였다. 언뜻 보아 가시덤불 같기도 한 이 나무는 살아가는 방식이 유목민을 닮았다. 뿌리내리지 못하면 바람 따라 뒹굴며 새 터전을 찾는다. 물기가 있는 적당한 장소를 만나면 뿌리를 내리는 식물. 그 여름에 동시다발한 질병으로 고통받을 때 이 나무가 떠오른 건, 나무의 생존방식이 동병상련 애틋함 때문이었을까.
-〈모하비 사막〉부분
김나현은 미국 서부를 다녀와서는 캘리포니아 모하비사막만이 환영처럼 어른거린다고 고백한다. 라스베이거스의 휘황한 불빛이나 그랜드캐니언의 장엄함도 푸른 바다를 가로지른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도 뇌리에서 지워진다고 말한다. 태평양을 낀 아름다운 해안도 아니고 온종일 달린 모하비사막 길이 줄곧 떠오른다고 적고 있다. 메마른 땅을 잠식한 덤블링트리의 살아가는 방식 때문이었다. 뿌리내리지 못하면 바람 따라 뒹굴며 새 터전을 찾고, 물기가 있는 적당한 장소를 만나면 뿌리를 내리는 식물의 생명력. 그 나무의 생존방식이 화자와 닮아있는 동병상련의 애틋함 때문이었을까. 필자도 한때 그 모하비사막을 달린 적이 있다. LA를 떠나 그랜드캐니언으로 가면서 그 사막을 지나야만 했다. 그때의 느낌을 이렇게 썼다. 서부의 사막은 죽음과 절망의 땅이 아니었다. 폐허의 공간도 아니다. 사막은 스스로 부서지는 척박한 자리가 아니라 희망이며 자유의 땅이었다. 사막은 새롭고 영원한 세계로 진입하기 위한 과정이었으며 인류의 미래를 위한 강력한 약속의 터전이었다. 나는 사막을 지나며 황량감과 고독보다는 한없는 자유를 만끽하는 역설을 감지할 수가 있었다고. 그 폐허의 땅에서 느낀 공통점이 생명력이라는 데서 묘한 신뢰와 동질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다음 작품을 보자.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이는 기차가 두 고장을 잇는 터널을 빠져나올 때 딴 세상처럼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을 압축한 소설 『설국』의 첫 문장이다.
문학의 힘은 대단하다. 소설 첫 문장이 이만큼 설레게 하고 여행을 부추기는 글이 또 있을까. 이 문장으로 하여 오랫동안 눈의 고장을 꿈꾸었다.(중략)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쓴 『설국』의 고장 유자와는 높은 산맥에 둘러싸였다. 눅눅한 바닷바람이 산맥에 부딪혀 초겨울부터 이른 봄까지 눈을 쏟아붓는다. 터널 전과 후의 지역 기후가 이렇듯 다른 연유는 바로 높은 산맥 때문이었다. 기차가 터널 이전 역을 출발했을 때만 해도 차창밖엔 벚꽃이 한창 만개하고, 들판에는 보리가 새파랗게 자라거나 아지랑이가 보일 듯 봄빛이 완연했다. 그런데 고장이 바뀌는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소설 첫 문장에서처럼 하얀 겨울이 열리고, 눈에 덮인 묵직한 산이 햇살에 부시게 반짝인다. 터널 저쪽 지역과 판이한 눈[雪] 세상에 눈[目]이 동그래진다. 이 고장의 특이한 정취가 소설 첫 문장으로 탄생했음을 생생하게 확인한다.
-〈문장을 따라간 설국의 고장, 에치코유자와〉부분
노벨문학상 소설이 탄생한 현장에서 작가가 조곤조곤 들려주는 문학 강의를 듣는 기분이다. 《설국》이 출간된 1937년 당시 한적한 분위기를 잘 전해 준다. 생소한 언어, 사뭇 다른 정서, 이색 경치와 문물, 여행자는 이런 낯선 곳에서 다른 형태의 삶을 보며 더 넓은 세계를 향유하고 있다. 여행이야말로 진정한 체험의 장이며, 행복의 기준을 재정립하게 되는 수단과 통로가 되는 것이다. 갈망했던 곳일수록 만족도도 높다. 소설 속 문장을 따라서 오래 마음 두었던 설국의 고장에서 화자는 더욱 설레고 행복해지며 그리운 사람들을 초대까지 하고 싶어 한다. 그가 문학작품을 창작하는 작가이니 오죽하겠는가. 그리하여 그는 수많은 여행지 중에서도 문학작품의 배경지에서 가장 들떠 있다. 에치코유자와역을 여행한 시기는 사월 초인데도 적설이 도로변에 작은 동산처럼 쌓여있고, 곳곳에 빨간 눈금이 표시된 막대기를 보며 눈의 고장임을 실감한다. 마을 뒷산에는 스키어가 탄 리프트가 쉼 없이 오르내리고, 계곡에는 눈석임물이 비 온 후처럼 콸콸 흐른다. 눈처럼 해맑은 감성을 담담한 문체로 쓴 소설 《설국》의 배경답다. 화자는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를 모신 마을 사람들을 몹시도 부러워한다. 소설의 핵심은 순간순간 덧없이 타오르는 여자의 정열에 있다. 개통한 지 얼마 안 된 시미즈터널 밖으로 나오면 설국이 열린다. 그 한갓진 곳의 온천장에서 게이샤로 살아가는 고마코에게서 발산되는 야성적 정열과는 대조적으로 순진무구한 청순미로 시마무라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요코. 이 두 여자를 도쿄에서 온 무위도식하는 여행자 시마무라가 허무의 눈으로 지켜본다. 이제 국내를 여행한 작품 한편을 살펴보기로 한다. 보길도에서다.
땅과 하늘이 맞닿은 보길도는 하늘이 광활하다. 건물에 가려 조각나지 않은 온전한 하늘이다. 그 하늘이 멀리 수평선에 닿아 있다. 먼 듯 가까이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바다가 지척에 있다고 신호를 보낸다. 이 그립던 정취를 눈앞에 두고서 잠이 올 리야. 자리를 털고 일어나 파도 소리를 따라나선다. 바람에 묻어오는 바다 냄새를 맡으며 어둑한 길을 얼마나 걸었을까. 치마폭 같은 해안이 희미한 모습을 드러낸다. 어둠 속에서 뽀얗게 부서지는 포말이 바다가 거기 있다고 일러준다.
-〈내디딜 곳 없는, 보길도〉 부분
소금기 밴 채 돌아와 잠을 청해보지만 잠이 올 리가 없다. 마음은 온통 문밖을 향한 채 말똥하다. 보길도의 휘영청 밝은 달빛이 이 밤에 잠이 오냐고 창 두드리는 소리까지 요란하니 말이다. 뒤척이다 일어나 마당으로 나가보지만 정작 잠 못 들게 한 달은 없다. 달인가 싶던 붉은 가로등만 시치밀 떼고 마당을 훤히 내려다볼 뿐이다. 주위를 둘러봐도 겨울바람 소리 같은 파도 소리와 몸을 감싸는 가로등 불빛뿐. 고적한 쓸쓸함이 파도처럼 덮쳐와 보길도의 밤에 갇힌 작가의 마음을 못내 아리게 한다.
바다가 아닌 산에서는 이렇게 감회를 적는다. 설악산 봉정암에서 계곡 길을 따라 백담사로 내려오면서다. 오세암 이정표 앞에서 잠시 멈추고서는 만해 선생이 밤 좌선 중에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마음의 문을 열어 의심하던 마음이 씻은 듯이 풀렸다는, 오도송悟道頌을 남긴 오세암을 생각한다. “밤은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설악산의 무거운 그림자는 엷어갑니다. 새벽종을 기다리면서 붓을 던집니다.”라는, <님의 침묵>을 탈고하면서 남겼다는 말을 가슴에 서늘하게 새긴다. 인연 있는 중생이 아니면 발길 닿지 못한다는 오세암 이정표를 그냥 지나오며 아쉬움에도 젖는다. 역시 문학작품의 배경지를 곁에 두고 다가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이다.
서머싯 몸은 《달과 6펜스》에서 여행을 떠날 수밖에 없는 예술가의 운명을 말했다. 몸은 낯선 곳에 대한 그리움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고, 여행은 오래전에 떠난 고향을 찾아가는 과정이고, 일상에서 잃어버린 자아를 만나러 가는 행보라 했다. 토마스 만도 《마의 산》에서 새로운 공간이 어떻게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속인까지도 손쉽게 방랑자로 만드는가를 말한 바가 있다. 저 멀고도 깊은 곳에서 신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무당은 명산대천을 찾아 신의 기운을 얻으려 하듯, 일상과 관습의 무력함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여행 가방을 꾸린다. 지금 이국의 낯선 거리를 어슬렁거리고 있거나, 인터넷에서 여행지의 정보와 교통편을 검색하고 있거나, 지난 여행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기고 있는 이들은 모두 문학의 알을 품고 있는 중이다. 그 잠 못 이루는 보길도의 밤에서, 깊은 설악산의 산중에서 김나현도 수필 한 편을 건진 것이다.
3.작가 김나현은
김나현은 1959년 경남 거창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했다. 지금은 부산에서 다양한 문학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04년 《수필과 비평》에서 수필로, 2014년 《여행문화》에서 여행 작가로 등단했다. 수필집으로 《바람의 말》 《화색이 돌다》 《다독이는 시간》과 수필선집 《풍경 한 폭》, 여행 산문집 《비가와도 좋았어》를 펴냈고 수필과비평문학상, 문정수필문학상, 부산가톨릭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는 국제신문 오피니언 필진으로 작품을 발표하고, 《수필과 비평》에서는 전통한옥마을 답사기를 꾸준히 연재하고 있다. 그야말로 여행 작가로서의 충실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김나현에게 여행의 의미란 무엇일까. 책 곳곳에서 여행의 이유를 선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에게 여행의 이유는 참으로 많다. 짧으나마 여행한 시간이 있어 추레한 삶을 견딜 수가 있다. 여행은 새로운 땅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사람이 남는다. 여행은 여행이 끝나고도 일상으로 이어진다. 여행은 처진 마음에 생기를 채워주는 통로이다. 여행이란 세계라는 책 중 한 페이지를 읽는 것이다. 그곳의 향기를 기억하고 원시의 품속 같은 아늑함을 그리워한다. 여행이란 그곳에 있는 것, 나는 지금 파르테논 신전 앞에 있다. 돌무더기 널린 아크로폴리스에서 몸살도 잊고 흥분지수가 올라 뭘 해야 될지 허둥댄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여행한다. 살아가며 통과해야 하는 엄청난 고독 속에는 어떤 각별한 장소와 순간들이 위안이다. 고통스러운 여행일지라도 여행한 기억은 고통스럽지 않다. 혼자만의 섬이 될지라도 여행은 할 만한 것이다. 결국 여행이란 어떤 장소에서 찍은 결정적 순간 앞에서 앵글을 잡았던 초롱한 시선과 그 안의 충만을 불러와 다시 내일을 살게 하는 것이다. 참 대단한 여행광이다. 이쯤 되면 그에게 여행은 만병통치약이다. 아니, 삶의 전부일지도 모른다. 내일을 살게 하는 힘의 원천이니 말이다. 그러니 그는 떠나지 않고서 어이 삶을 견딜 수가 있으리.
김나현의 여행수필은 서점가에 쏟아져 나오는 여행안내서와는 확연히 구별된다. 일반수필가들이 쓰는 여행기와도 차원이 다르다. 그는 여행을 소재로 하여 문학작품을 쓰고자 한다. 여행지의 유적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본 후의 내면의 움직임과 떨림에 대하여 묘사하고 형상화하고자 한다. 루카치식으로 말하자면 미세한 영혼의 풍경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이런 태도야말로 작가로서의 본령이고 자존심이 아닌가 싶다. 또한 문학작품 창작에 대한 강렬한 열정이라 믿는다.
김나현은 현재의 삶을 인정하면서도 들뢰즈적인 새로운 삶을 탐구하는 사유 여행을 떠나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하다. 새로운 세계로 떠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개척자적 정신에 의한 것이다. 상해를 출발해 오키나와로 향하는 크루즈 아틀란티카호 위에서, 슬로베니아의 고요하고 평화로운 호수 마을 블레드에서, 하바롭스크의 아무르강에서, 영화와 소설 「글루미 선데이」의 무대인 헝가리의 부다페스트, 시베리아 횡단 열차 간이역인 우수리스크 라즈돌리노예역 등을 여행하면서 진정한 삶의 본질과 실존이 무엇인가를 확인하고자 한다. 그야말로 그에게 문학이란 정녕 삶이고 사랑이며 먼 길 떠나는 여행이다. 그 머나먼 길 걸어가자면 부단히 고독해지고 고독에 친숙해야 한다. 그 안에서 진솔한 자신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여행길에서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알려고 하라’고 했다. 우리가 새로운 풍경을 찾는 것, 그것은 그것을 찾고 있는 나를 찾아가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아는 것, 또한 그로 인해 내가 가는 곳이 어디인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여행이다. 김나현의 여행은 새로운 세상과 자아와의 만남이다. 그 바탕에는 작가의 유목주의적 방랑의 욕망도 자리하고 있다.
문학작품은 자신과 세상에 대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탐색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태어난다. 진정한 사유란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개척자적 정신에 의해서 심화된다. 김나현은 삶과 문학과 여행을 통해서 끊임없이 새로운 세계를 탐색고자 하는 탐구정신을 지닌 작가이다. 우리는 그의 문학을 통해 나의 자리를 되돌아보고 삶의 정체성을 새롭게 확인하는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이런 사실만으로도 그의 수필을 읽을 가치는 충분하다. 김나현의 여행산문집 《비가 와도 좋았어》의 일독을 권한다. 그의 수필이 독자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고 새로운 삶의 세계로 초대해줄 줄 것임을 믿는다.
*백남오: 2004년《서정시학》수필, 2015년《수필과 비평》 평론등단. 수필〈겨울밤 세석에서〉 전문이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 수록. 2014년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 공동저자. 수필집《지리산 종석대의 종소리》등 4권, 수필선집《겨울 밤 세석에서》. 제2회 수필미학문학상. 제13회 김우종문학상, 제5회 시대의에세이스트상 수상. 경남대초빙교수. *E-mail: jilisarang1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