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사순 제2주간 토요일
루카 15,1-3.11ㄴ-32
며칠 전입니다. 묵주 반지가 바지 주머니에 있었는데, 깜빡하고 세탁기에 돌릴 뻔했습니다.
부랴부랴 주머니에 있던 묵주 반지를 꺼냈습니다. 빨래하기 전에 주머니를 꼭 확인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잃어버릴 뻔 했던 묵주 반지를 보니 반갑기도 하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돌아보니 그런 경험이 몇 번 있었습니다. 외국 여행 중에 화장실에 지갑을 흘린 적도 있었습니다.
다시 화장실을 찾아갔고 지갑은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핸드폰을 물에 빠트린 적도 있습니다. 다행히 핸드폰에 저장된 주소록을 복구한 적이 있습니다.
소중한 분들의 연락처를 잃어버릴 뻔 했습니다. 노트북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적도 있습니다.
노트북에 있던 자료를 다 날릴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 자료를 다시 살려냈던 적도 있습니다.
살면서 이런 경험은 한두 번씩은 있을 겁니다.
어릴 때의 기억입니다. 호기심이 많았던 저는 겁도 없이 버스를 탔습니다.
버스에서 내렸는데 세상에는 다른 버스들이 많았습니다. 제가 탔던 버스의 번호를 몰랐고,
돌아가는 길을 몰랐던 저는 그만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저는 파출소에서 하룻밤을 지냈고,
다음 날 아버지께서 저를 찾으러 오셨습니다. 50년이 훌쩍 지난 일입니다.
저는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어머니께서는 지금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그때 입었던 옷, 그때 신었던 신, 그때 저의 머리 모양까지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어머니에게 저는 세상 무엇보다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하루였지만 어머니의 가슴은 새카맣게 타들어갔다고 하십니다.
돌아왔을 때의 일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머니께서 저를 야단치시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의 마음은 다 같을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이라고 여겨졌던 ‘세리, 과부, 고아, 장애인’들과 가까이 하셨습니다.
아무도 가까이 하지 않았던 나병환자의 손도 잡아 주셨습니다. 여인의 죄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강도당해서 쓰려졌던 사람을 치료해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칭찬하셨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은 예수님의 이런 태도를 문제 삼았습니다.
죄인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율법의 정신에 맞지 않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런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오늘 ‘돌아온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비록 죄를 지었어도, 뉘우치고 돌아오기만 하면
용서해 주시는 분이라고 하십니다.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돌아온 아들을 위해서
잔치를 열어주시는 분이라고 하십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머물 곳이 많으니 언제든지 돌아오면 된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회개하기만 하면, 잘못을 진정으로 뉘우치기만 하면, 하느님께로 돌아오기만 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진홍같이 붉어도 양털처럼 희게 하고,
눈처럼 희게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돌아온 둘째 아들을 대하는 큰 아들을 봅니다.
큰 아들의 가장 큰 잘못은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동생을 받아들이고 아낌없는 사랑을 주시는 것, 그와 같은 판단을 하는 분도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큰 아들처럼 하느님을 우리의
기준으로 규정하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와 행복은 하느님을 따르면서
나의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선하심에 맡겨드릴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분은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다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들을 모르는 체해 주시리라.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ㅡ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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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광수 야고보 신부
사순 제2주간 토요일
루카 15,1-3.11ㄴ-32
아버지
램브란트의 "탕자의 비유" 그림은 매우 유명하다.
그 그림을 보면 아버지가 돌아온 작은 아들을
껴안고 있는 모습이다.
늙은 아버지의 눈은 지긋이 잠겨 있고
아들을 껴안은 아버지의 한 쪽 손은
아버지의 손이요 다른 한쪽은 어머니의 손이다.
아버지 품에 안긴 작은 아들의 신발은
다 달아서 낡아 떨어졌고 발뒤꿈치는
굳은살이 박혔다.
옷은 남루한 옷차림에 아버지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껴 우는 모습이다.
아버지는 우는 작은 아들의 등을
아버지의 손과 엄마의 손으로 어루만져 주며 감싸주고 있다.
아버지의 재산을 가져다가 다 낭비하며
방탕한 생활을 했던 아들을 나무라는
엄한 아버지의 모습도
그리고 돌아온 아들을 꾸짖는 모습도 없다.
오직 돌아온 아들을 반갑게 반기며
그 동안 아버지 곁을 떠나 고생했던 아들을 위로해주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처음과 똑같이
아들을 사랑해 주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조금도 변함 없이 한결같다.
늘 넉넉함과 포근함이 아버지의 품이고
언제나 반겨주고 안아주는 분이 아버지이시다.
작은 아들의 잘못을 보지 않으시고
오직 돌아온 것만으로도 감격해서
잔치를 벌이시는 아버지이시다.
아버지 앞에 작은 아들의 모습은
정말 가난하고 나약한 모습이다.
얼마나 많이 방탕한 생활을 하며 돌아다녔던지
신발이 다 달았고 맨발로 돌아왔을까?
아버지 집을 떠날 때 그처럼 당당하고
의기 충전했던 모습은 어디 가고
마치 젖떨어진 어린이처럼
아버지 앞에 무릎꿇고 아버지 품에
안기는 어린이의 모습이다.
이 그림의 중심은 방탕한 아들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그의 낭비 생활 또는 그의 귀향에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비유의 중심은 아버지이시다.
아버지 곁을 떠난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아버지,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려버리고
빈 털털이로 돌아오는 아들을 보고 달려가서
입맞추고 안아주며 반가워하시는 아버지,
예전의 아들의 권리를 되찾아 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이 중심이다.
바로 이 아버지가 하느님이시다.
아버지는 유산을 나누어 달라는
아들의 청을 즉각 거절하거나
적어도 바보 같은 짓을 하지 말도록
충고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재산을 나누어주고
작은 아들이 자기 가고 싶은 대로 가도록 놓아주었다.
아마도 아버지는 아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즉 아들이 아버지 집을 떠나는 것은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젊음의 충동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
그리고
멀리 있는 미지의 것에 대한 야망과
새로운 경험에 대한 욕망이었다.
시골에 있는 젊은이들이 답답하게
시골에 틀어 박혀있기 보다는 서울에 올라가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해보고 싶어하는 그런 충동이
바로 작은 아들에게도 있었다는 것을
아버지는 알고 계셨는가보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을 말릴 수도 있었을 것이고
꾸짖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미리 막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작은 아들을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두신다.
왜 그러셨을까?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자유를 주셨다.
일단 자유를 주신 이상
하느님은 인간의 자유를 보장해주신다.
자유를 위해 창조된 이상 인간이 제 마음대로
만사를 결정해 가도록 방임해 두신 것이다.
자유를 주고 나서 일일이 간섭을 한다면
그것은 자유를 주신 것이 아니다.
비유에서 작은 아들은
점점 더 깊은 구렁으로 빠져든다.
처음에 아들은 약간의 돈을 소비하는 사람이었고
실패를 몇 번 맛본 사람에 불과했다.
그러나
다음에는 주색에 빠져 흥청거리기 시작했고,
최악의 비참한 지경이 되어
돼지를 돌보다 굶어 죽게 될 신세가 되었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 돼지란 가장 더러운
동물로 취급하였다.
하느님은 인간이 자기가 선택한 길로 가는 것을
그대로 놓아두시며 그 행동의 결과로
밑바닥까지 떨어지도록 그냥 놔두신다.
인간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하고
혼자 서 있을 수 있다고 확신할 때,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이
제 마음대로 결정하게 놔두신다.
그래서 자신의 힘으로만 위로 오르려 할 때
그의 의지와는 반대로 깊은 곳으로
거꾸로 떨어지는 절망을 경험하게 하신다.
이상한 것은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하는 일이 잘 될 때
하느님께 구원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혼자서 모든 것을 결정하려드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결정대로 행해져 화를 당할 때
그 탓을 하느님께 돌리려 한다.
작은 아들은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을 때까지
깊은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 비로소
자기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하고 말하리라 생각하고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아들은 자기가 아버지께 어떤 것도 요구할 수 없도록
모든 권리를 상실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아버지께 돌아 온 아들을
아버지는 사랑스럽게 받아주셨다.
비유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기다리고 있다가
먼저 방탕한 아들에게 달려가
그를 불쌍히 여겨 아들이 자기 죄를
고백하는 것을 채 끝내지도 못하게 했다.
그리고는 아들이 돌아왔다 하여
잔치를 준비하게 했다.
하느님께서도 회개한 죄인을 이렇게 대해 주신다.
사람이 제정신을 차리고 반성하여
다시 돌아 올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의 은총 덕분이다.
하느님께서 다시 받아들이신다는 것은
인간이 지은 죄를 모르시거나 잘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 덕택일 뿐이다.
하느님께 뉘우치고 집으로 돌아온 죄인을
당신의 사랑으로 덮어 주시는 것,
과거의 모든 일을 잊으시고 죄로 생긴 빚을
헤아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죄인을 전보다
더 잘 대해 주신다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의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이다.
아버지의 관대한 성품은
곧 하느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게 해주는 것이다.
무한한 사랑, 사랑으로 돌아온 아들을
감싸 안아주시고 새 옷으로 갈아 입히시고
가락지를 껴주고 돌아온 아들을
축하해주기 위해 잔치를 벌이시고
음악으로 흥을 북돋아 주시는 것에
하느님의 사랑이 묻어 있다.
ㅡ 성바오로회 유광수 야고보 신부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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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찬란 임마누엘 신부
사순 제2주간 토요일
루카 15,1-3.11ㄴ-32
구원의 보편성
작은아들이 유산으로 받은 재산을
흥청망청 쓰고 갈 곳을 찾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오히려 아버지는 버선발로 달려나가 맞이하고
살찐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입니다.
이 소리를 듣고 집으로 돌아오던 형이
분개하여 집을 나갑니다.
이에 대해 철학적 인간학을 전공하신
한 신부님이 강론으로,
큰아들도 작은아들이 갔던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는
재미있는 상황을 물음표로 던지며
묵상거리를 주셨던 때가 떠오릅니다.
큰아들 역시도 세상이라는 곳에서
온갖 고생을 하고 죄를 짓고 다 탕진하여
작은아들이 걸어 들어왔던 그 집,
그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를 떠올릴 때
비로소 큰아들도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방에 대해서 비난하고 욕을 하지만
사실 내가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는
그 사람에 대해 전체를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런 각양 각색의 사람들 무리 속에서
인간 구원을 바라시는 주님의 사랑,
또한 인류를 보고 계시는 너그러우신
하느님 앞에서 우리도 죄를 많이 짓고 삽니다.
작은아들처럼 방탕한 죄,
큰아들처럼 하느님의 현존을
감사할 줄 모르는 죄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판관이신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 보편성을 통해 우리는 다시 한 번
사랑 지극하신 하느님께로 나아가게 됩니다.
ㅡ 제주교구 허찬란 임마누엘 신부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