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과 무기교에서 얻은 맛과 감명
오하룡의 시세계
정목일 수필가
오하룡 시인으로부터 청을 받고, 처음에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나는 시를 잘 모르는 사람이고, 수필을 쓰는 사람한테 시평을 부탁한 연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시집에 발문을 쓴 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찍이 외우(畏友) 이영성 시조집엔 우정으로 발문을 썼고, 정규화, 최명학 시인의 시집에 발문을 쓴 일이 있다. 이우걸 시인의 서평을 쓴 일이 있기는 하다.
솔직히 시를 잘 모른다. 시에 대한 견해를 말할 처지도 그럴 생각도 없지만 사람 좋은 오하룡 시인이 생각 끝에 청을 하는 것일 테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그 일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고장에서 서로 마음 편하게 마음을 나누며 살아온 정리를 봐서도 못하겠노라고 잡아뗄 수 없는 노릇이다.
어떤 식으로 쓸까, 잠시 고민했다. 격식을 갖추고 인용 시를 많이 넣어서 부풀려서 쓸까, 하고 싶은 말만을 하고 말까 하는 것이다. 필자는 수필을 쓰는 사람이기에 평론, 평설, 작품론과 같은 규격적인 글보다는 수필체로 격식없이 써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다.
오하룡 시인은 1940년 일본에서 태어나 구미와 창원, 부산 등지에서 성장하였다. 1964년 시동인지 <잉여촌> 동인으로 참여하고 1975년 처녀시집 <母鄕>을 내면서 본격적으로 문단 활동을 시작하였다. 시집으로 <모향> 외에 <잡초의 생각으로도>(1981), <별향>(1985), <마산에 살며>(1992)와 시선집 <실향을 위하여>(1987)가 있다. 마산시문화상, 경상남도문화상을 받았고 마산문인협회장(1989-1991)을 지냈다. 마산에서 도서출판 경남(1985년 창립)을 운영하고 있으며 계간 종합문예지 작은문학(1996년 창간)의 발행인이다.
호박꽃 같은 순박한 시
사실대로 말하면 나는 오하룡 시인의 시에 감탄하거나 현혹된 기억이 거의 없다. 평범하고 수수하여 눈길이 가지 않았다. 너무 쉬운 시여서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다. 언어 구사나 기교가 없는 시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화장하지도 않은 맨얼굴의 시이고, 꾸밈이 없는 너무나 평범한 표정이다.
오하룡 시의 특징은 바로 이런 평범의 표정 속에서 우러나고 피어난다. 평범 속에서 발견하는 삶의 깨달음과 여운이다. 그는 시류나 사조를 좇는 시인이 아니다. 그의 시를 꽃에 비유하자면 ‘호박꽃’이 아닌가 한다.
호박은 농촌의 자갈밭이나 경사지, 담벼락 등 어떤 땅이든지 잘 자라는 채소이고 황금빛 꽃을 피운다. 농촌 어느 곳에서나 쉽게 볼 수 있어서 꽃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 그래서 ‘호박꽃도 꽃이냐’ 는 말이 있을 정도이지만, 호박꽃은 이른 아침에 농부들의 집 담장과 밭두렁과 산비탈에 샛별이 내려온 것인 양 눈부시게 피어나는 농촌의 대표적인 꽃이요, 농부들의 꽃이다.
호박꽃만큼 순수하고 천진스런 꽃도 없을성 싶다. 남들이 보아주든 보아주지 않든 상관없이 푸른 생명력을 뻗쳐 황금별 같은 꽃을 피우고 가을이면 커다란 황금빛 호박을 매단다. 말라버려 끊어질 듯한 줄기에 큼직한 호박들이 달려 있는 것을 보면 새삼스러이 호박꽃의 후덕함과 평범 속에 깃든 눈부심을 떠올리게 된다.
오하룡의 시에서 ‘호박꽃’을 연상하게 하는 것은 보기 드물게 농촌시(農村詩)를 써오고 있는 시인이고, 시작(詩作)의 자세가 농부와 농촌을 떠나지 않고 대지 속에 뿌리박고 있다.
시의 터전은 다름 아닌 대지(大地)이며 농부들의 애환과 서민층의 삶에 닿아있다. 그의 시는 정직하고 올곧다. 요령이나 눈치를 살피지 않고, 구수한 퇴비 냄새를 풍기며 사투리 섞인 어조로 말한다.
요즘의 시는 차별성과 개성을 드러내는데 안간힘을 쏟고 있다. 자극성 선정성을 넘어 엽기성 괴기성을 보이고 있다. ‘낯설게 하기’가 새로움을 보여주는데 이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오하룡은 현대의 현란한 수사학을 빌리지 않는다. 비유, 상징, 패러독스 등 시적인 기교의 구사를 염두에 두지 않고 대상과의 정직한 교감을 통해 빚어낸다.
호박꽃이 그러하듯 오하룡의 시에는 설명이 필요 없다. 가령 보석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반지를 끼더라도 그것은 ‘의미’를 동반하고 암시하는 장치가 된다. 화장과 옷차림도 때와 장소에 따라 예와 격식을 갖춘다. 오하룡의 경우엔 그런 치장과 허세엔 관심이 없다. 어떻게 진실된 모습으로 다가가느냐 하는 것이며, 숨김없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진실을 발견하고 토로하는데 주안점을 둔다.
절창의 시, 별이 되는 시를 꿈꾸는 시인이 아니라, 들판의 호박꽃이 되길 원하는 소박한 꿈을 가진 시인이다. 시인이라면 누구라도 절창의 시, 하늘의 별이 되는 시를 꿈꾸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는 요란하고 기상천외한 아이디어와 놀라운 상상력과 현란한 시어를 구사하는 시인이 아니다. 감각적이고 기교적인 시들과는 거리가 멀다.
시가 독자에게 다가가기 위해선 참신성과 개성 독자성이 필요하다. 시인이란 지상의 언어 중에 적절한 게 없으면 천상의 언어를 구해 와야 한다. 이것은 상상력을 통한 창조행위를 말한다. 낯익은 얼굴로서는 식상하기 때문에 어떻게든지 낯이 설게 만들어 독자들의 마음을 끌어들이려 한다.
그런 과정에서 자칫 정체성을 잃는 경우도 생기며 형식미에 치우치다가 공소한 시가 되고 마는 경우를 목격한다. 새로움이란 문득 생기는게 아니라, 전통과 정서에서 피어나는 것이다. 국적 불명, 사상부재, 형식과 내용의 불일치를 이룬 작품들은 오히려 난해, 공소, 혼란을 가져올 뿐 아니라, 독자들의 관심을 멀게 하는 요소가 되기 싶다.
그는 수십 년을 지난 흑백사진을 보는 듯한 눈에 익은 사진이지만, 어쩐지 어설퍼 보이고 우리네의 삶의 풍경 중에 저런 모습도 있었구나, 생각하게 만드는 시를 쓰고 있다. 세계화 개방화로 농촌이 황폐화 되는 때에 농경문화를 끌어안고 있는 자체가 우직하고 미련스럽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흑백사진이라고 해서 시대 감각이 떨어지고 현대에 뒤졌다고 판단해선 안 된다. 컬러 시대에 놓치기 쉬운 삶의 뒤안길과 소외 공간을 표현하는 데는 흑백사진이 더 적절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색채가 필요 없이 오히려 빛과 어둠, 흑백만으로도 더 진실에 근접할 수 있는 세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흙, 대지, 농촌은 이제 우리 삶의 터전이 되지 못하고 물질과 도시화, 편리와 저소득에 밀려나 황폐화되고 있다. 흙이야말로 생명의 터전이고 생명체가 태어나서 돌아갈 모향(母鄕)이건만 물질적 가치로만 인식하려는 데 문제가 있다. 농촌은 이농(離農), 도시화, 농산물 개방으로 인한 적자 영농, 빚더미에 신음하는 농가, 쌀 개방문제로 인한 진통, 축산농가의 어려움, 농촌 환경의 파괴 등 가장 심각한 삶의 현장이고 많은 문제점과 현상을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각종 공해로 흙은 오염돼 생명력을 잃어가고 아울러 마실 물도 없어지고 있다. 알게 모르게 많은 생명체가 환경오염으로 멸종돼 가고 있는 현실이다. 이제 농촌문제는 삶의 환경과 서정의 터전이라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이 생존과 환경을 위한 생명의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그럼에도 농촌과 땅의 죽음을 예견하고 이를 지키며 부활시키는 참다운 농촌 시가 드물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농촌의 삶과 환경에 대한 참담한 실패와 비관, 또 한탄만이 아닌 삶의 성찰과 자각, 또 생명의 파수꾼과 인간주의를 위해서 체험의 육성을 토해내는 흙의 시인이 있어야 한다.
오하룡의 농촌 시, ‘母鄕’을 위한 시작들은 퇴비 냄새와 황토 빛깔을 가지고 있지만 변함없는 황소의 눈망울처럼 신뢰를 준다. 읽히고 인기를 얻는 번쩍거리는 시가 아닐지라도, 외지에 나가 출세하거나 돈 벌지도 못해 괴죄죄하게 보일는지 모르겠지만, 고향 땅을 지키는 종손처럼 든든해 보이는 시를 쓰는 드문 시인이다.
2. 평범 속의 깊은 울림
그의 시는 쉽다. 쉬워 싱겁다는 인상마저 든다. 난해 시를 쓰는 시인에겐 어리둥절할지 모른다. 삶의 이야기, 짧은 서사 구조를 지닌 시인듯하고 말하는 듯 토로하는 듯 하고 느낌을 그대로 전해주는 메시지인 듯도 하다. 복잡하거나 함축적인 비유를 사용하지도 않고, 상상력에 기대지도 않는다. 화려한 수사나 눈부신 비유는 오히려 진실의 실체를 드러내는 장애 요소가 될 수도 있다. 그는 순진하고 투박하게 농부의 어조로 그가 발견하고 깨달은 진실을 전하고 싶어한다. 과장이나 치장으로 순수한 모습이 가려지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나는 오하룡의 시에서 보이는 평범이 무상무념의 경지와 달관에서 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평범 속에 깊은 울림과 친근한 맛이 있다. 평범을 그대로 놓아두는 것, 비워두고 보는 법을 보여준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보고 있질 못하고 온갖 빛의 색채를 사용하여 자신의 수사력을 과시하려 든다. 너무 세밀하고 완벽한 것보다 미흡하고 부족한 면이 있어도 두고 보노라면 얼른 볼 때엔 알 수 없던 시, 공간적인 여유와 맛을 느끼게 한다. 이것이야말로 백자처럼 고즈녁하고 깊은 맛이라 할 것이다.
모두가 하늘의 별이 되는 시, 절창의 시를 바라지만 그는 이슬 맺힌 대지의 풀꽃 같은 시를 원한다. 절창을 바라지 않고 농부와 논두렁에 앉아 막걸리를 한 사발 마시고 둥둥 떠가는 흰 구름을 바라보며 읊어보는 농민 시가 되길 원하고, 직장 잃고 한숨을 내쉬는 근로자들의 마음을 달래주며 희망의 씨앗을 심어주는 시를 꿈꾼다.
알면서도 아는 체하지 않고 눈부시지 않고 은근하게, 되바라지지 않고 어리숙하게, 평범하면서도 지혜로운 법을 보여주는 것이 오하룡의 시다. 자신의 모습을 시로써 그대로 보여줄 뿐이지 시도(試圖), 기법, 전략과 같은 것을 동원하지 않는다.
오하룡 시는 남을 의식하지 않은 무기교의 시이고 꾸밈없는 시이기에 막사발 같은 투박함이 느껴진다. 청자, 백자처럼 귀족이 사용하던 생활용구이던 자기(瓷器)와는 달리 서민들이 사용하던 막사발은 부엌데기처럼 칙칙하고 거무튀튀하다. 남의 눈치를 살필 필요도 없이 잘 만들겠다는 의식 없이 마음 가는대로 주물러서 빚은 자기이건만 시원스럽고 독특한 개성을 지녀서 보면 볼수록 마음을 끄는 매력이 있다.
3. 주제의식이 선명한 시
오하룡의 시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다.주제가 강한 시이고 시를 쓰는 목적이 선명하다. 이런 점에서 시 정신이 철저한 시인인 것이다. 기교로 언어유희만 능란하여 공소한 느낌이 드는 시, 주제성이나 시대정신, 현장성과 삶의 치열성, 체험의 깊이가 느껴지지 않는 관념성의 시와는 달리 세태에 대한 냉철한 비판이 있고, 사회 전반을 통찰하는 날카로운 눈이 있다.
그의 시는 우직하고 천진스러운 면만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남들이 하기 어려운 소리를 당당하게 할 줄 알고, 시인으로서의 책무를 저버리지 않는다. 불의와 부정에 대한 준열한 꾸짖음과 시비를 가리는 논리를 펼치기도 한다. 그냥 녹녹하게 봐서는 안 되게 쓴소리를 할 줄 안다.
그의 시 정신은 가난하고 고통받는 자의 편에서, 그들의 어둠과 고통을 함께 겪으면서 한(恨)과 설움을 벗겨주려는 애정으로 가득 차 있다. 편안하고 행복한 자들을 위한 시가 아니고, 민초의 소리를 듣고 한과 분노를 삭여주고 위로와 용기를 북돋워 주는 시이다. 오하룡의 시를 읽으면 유머가 있고 마음을 정화하고 순치하는 힘이 있음을 느낀다. 대도(大道)와 정의의 편에 서며 서민의 호소와 저항과 육성을 대신 전하는 고발의식이 엿보인다. 인간관계와 삶에 있어선 순리에 따르고 겸손과 양보로서 화합과 완만함을 이끌어내지만, 부조리와 불의에 대해선 단호한 비판을 서슴치 않는다.
오하룡의 시가 지닌 주제는 향토애, 올곧은 삶, 건전한 공동체 의식, 인간다운 삶의 길과 도리, 다 함께 잘 살 수 있는 세상 만들기이다. 서민들의 평범한 꿈인 것이다.
4. 향토문학의 성취, 방향제시
특히 오하룡의 시는 향토문학의 한 전형을 이루고 있을뿐 아니라 방향을 제시해 준다. 처녀시집 <母鄕>을 비롯하여 5권의 시집과 시선집 ‘실향을 위하여’에서 보여주듯이 시집의 표제 명이 모두 고향과 지역성을 띄고 있다. 지역에 살고 있는 시인들이 지역성과는 상관없이 서울의 눈치를 보는 경향과는 달리 자신이 살고있는 지역과 향토에 뿌리박고 관심을 투입한다. 시집 <창원별곡> <마산에 살며> <母鄕> <실향을 위하여> 등이 이를 말해준다. 그는 온몸으로 그가 살아온 땅에서 삶의 체험으로 빚은 생활 시를 읊고 있다.
친구여 지금도 우리 만나면
서로 안부 묻고 사는 상황묻고
그래그래 고개 끄덕거리는 것
그리운 버릇 아니고 무엇인가
공단되기 전 한 동네
울타리 넘나들며 살던 우리
어느 날 갑자기 뿔뿔이 흩으져
너는 옛날처럼 시골로 들어가
농사꾼으로 여전하고
너는 딴 사람처럼 공단에 그냥 남아
이 직업 저 직업 전전하다가
지금은 부동산 거간꾼으로
눈빛마저 돈독 올라 충혈되어 있고
친구여 우리 만나면 하는 인사
아침먹었는가, 저녁먹었는가
들에 나가는가, 이제 돌아오는가
아침저녁 듣던 정겨운 인사말
자주 듣지 못하는 것 조차
왜 이리 허전한지
그래 그래 잃어버린게
어디 인사뿐이겠는가마는
-‘인사’전문
훗날 어느 날에
이 시대 산 사람들
들먹거리겠지
어쩌다 요행 이름 남겨
어디서는 생생한기록으로
어디서는 똑똑한 비문으로
선명히 남는 것 찬찬히 살피겠지
어떻게 태어나고
어떻게 살았던가
자기가 쓴 것은
자기가 써서 믿기 어렵고
남이 쓴 것은 남이 써서
얼마나 진실되게 썼으랴
믿기 어려운 이 현실
무엇이 명쾌히 밝히랴
정 하나면 다 된다는
사람도 있고
돈이면 다 된다는
사람도 있는 이 시대
무엇이든 그럴싸 꾸미는데
능통한 명작문 거사들이
도처에 많은 것도
한 특징인 이 시대
무엇이든 기록으로 남는 건
그대로 읽히고 잘 전달된다는
이 엄연한 사실이 무섭구나
그 무엇보다 나 먼저
철저히 벗고 나서야 하는걸
용기여!
-‘훗날 어느날에 1’ 전문
그는 평소 글 쓰기를 좋아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글은
늘 자기를 만족스럽게 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측근이나 부하에게
대신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렇게 쓴 글이 제법 신문에도 나고
잡지에도 나곤 하였다
어떤 때는 큼직막한 사진까지
곁들여 났다
조금 캥기는 게 있어 혼자일 때
기를 쓰고 원고지와 씨름해보지만
여전히 마음들게 써지지 않았다
그래서 또 측근이나 부하에게
부탁할 수 밖에 없었다
그가 해마다 펴내는 각종 간행물의
머리말 축사 격려사 따위도
그가 중요한 행사때마다
명문이다 칭찬 받으며 하는 연설문도
실은 꼬박꼬박 다른 사람이
밤 새워 쓴 글이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써 모은 것도 세월흐르면서
한 권의 두툼한 책이 되었다
그는 이 책의 훌륭한 저자가 되어
책 맨 앞장에 원색으로 웃고 있었다
-‘어떤 자서전’ 전문
‘인사’는 시집 <창원별곡>에 수록된 작품이다. 농경지였던 창원이 계획도시로 건설되어 기계공단이 들어서게 되자, 원주민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하여 농사를 짓거나 공단에 남아 근로자가 되거나 부동산 거간꾼으로 직업을 바꾸는 변화의 과정과 삶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인정과 서정이 있던 삶의 환경과 인간관계가 퇴색되고 물질에 물들어가는 시대상과 삶의 모습을 ‘인사’를 통해 잘 드러내고 있다.
‘훗날 어느 날에 1’은 시집 <마산에 살며>에 수록된 작품이다. 진실의 왜곡, 사실의 허위, 명문(名文)의 허실을 비꼬며 한탄한 시이다. 역사와 기록은 얼마나 가면을 쓰기 쉬우며 위장과 허위로 포장되기도 한다. 날카로운 역사의식과 진실에 입각한 기록의 중요성에 대한 성찰과 의식을 보여준다.
‘어떤 자서전’(시집 <마산에 살면서>)은 이 시대의 우리 삶의 한 모습을 생생히 전해온다. 물질 만능으로 정신 가치 체계가 붕괴 됨을 알려주는 고발이며 사회상의 실태를 풍자하고 있다.
‘훗날 어느 날에 1’과 ‘어떤 자서전’은 진실의 오도와 역사의 왜곡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으며, 역사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진실의 모습을 갈망한다. 불순과 허위로부터 진실 찾기를 위한 강한 정신을 보여준다. 그는 경남지역에서 유수한 출판사를 경영하는 출판인으로서 체험을 통한 현실비판과 시인으로서의 통찰력이 돋보이는 시를 쓴다.
5. 시도(詩)를 걷는 시인
오하룡은 시를 잘 빚는 기능을 가진 시인이라기보다 시도(詩道)를 아는 사람이다. 잔재주나 기교에 능한 사람이 아니라, 시의 길을 아는 사람이다. 일찍이 공자(孔子)가 사양(師襄)이라는 사람에게 거문고를 타는 법을 배웠다. 공자는 거문고를 배우는 것은 기술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배우는 것이 라고 말한 바 있다.(‘史記’ 孔子 世家) 또 음악의 태도를 말할 때 군자와 소인이 다른 것은 군자는 악도(樂道)를 얻으려는 것이고 소인은 악음(樂音)을 욕심내는 것이다.(‘禮記’ 樂記)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옛 선비들이 거문고를 즐기는 뜻은 단순한 기예의 연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도를 배우고 터득 하는데 있었다. 또 자연 속에서 악도(樂道)를 얻으려 했다. 거문고를 연주하는 목적은 기예의 연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연마를 통해 깨달음의 경지를 얻고자 하는 것이며, 곧 무현금(無絃琴)을 갖고자 하는 것이다. 오하룡의 시법(詩法)은 악음(樂音)을 취하려는 것이 아니고, 악도(樂道)를 얻으려는데 있다.
무기교의 무현금이 오하룡이 얻고자 하는 시의 깨달음이자 오묘한 세계라 할 것이다.
계간<경남문학> 통권 66호 집중조명 평설/ <경남문학가연구> 3호(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