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8:1-4
M. div 장정진(1814090)
고려신학 대학원
서론
오늘날 칭의와 성화의 관계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로 남아있는 듯하다. 이 문제가 대두되면서 많은 교회는 뒤늦게 성화에 초점을 맞추며 성화에 대한 삶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강조점을 오해한 몇 교회들은 ‘인간의 의로움 혹은 선행’이라는 또 다른 미궁 속으로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구원’을 이해하기 쉽게 논리적인 순서로 구분을 하자면, 칭의가 성화보다 앞선다. 먼저 의롭다함을 받아야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어떻게 거룩하게 사는지 가르치지 전에 칭의의 복음을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대로 칭의를 성화에 근거해서 이해하면 문제가 생긴다. 인간의 행실에 따라 칭의에 영향이 간다면 이 세상에서 누가 완전한 칭의를 받을 수 있으며 누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겠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죽으셨고, 부활하셨다. 우리는 이것을 은혜로 믿음으로써 단번에 의롭다함을 받았다. 따라서 참 신자는 구원의 확실성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 비록 여러 가지 죄로 인해 쓰러지고 또 쓰러지겠지만, 거기서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더 이상 우리에게 정죄함이 없다고 선언해주신 칭의의 복음에 전적으로 의지하기 때문이다. 날마다 실패하고 쓰러져도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나서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내용이 오늘 본문 주제에 잘 녹아져 있다.
로마서 8장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의 사역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다룬다. 또한, 8장은 “기독교 신앙의 성소 중에 지성소”라고 불린다.1) 많은 책에 의하면 로마서 전체는 신약 성경 가운데 구원의 교리를 가장 심오하게 다루는 서신으로 알려져 있다. 이 보고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성령 하나님의 내주하시는 사역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해방되고, 더 이상 정죄함 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기를 소원한다.
본문 번역
1 그러므로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 정죄함이 없다.
2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너를 해방하였기 때문이다.
3 그 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해서2) 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은 하셨다. 곧
자기 아들을 죄로 가득 찬3) 육신의 모양을 가진 속죄 제물로 보내시고 그가 육신 에 죄의 선고를 내리셨다.
4 그리하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 안에서 율법의 요구가
성취되게 하려 하신다.
본문의 역사적 상황
AD 49년경, 로마에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았던 것 같다.
로마의 역사가인 수에톤에 의하면 그 해에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크레스투스Chrestus에 대한 소동 때문에” 로마에 있던 유대인들을 추방했다고 한다. 이 “크레스투스”는 Χριστός크리스토스, 그리스도를 의미했다.4) 그리스도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모든 유대인이 추방을 당했는데, 몇 해 지나지 않아서 이 유대인들은 많은 이방인 신자들과 함께 큰 세력을 형성해서 다시 로마로 돌아왔다.5) 로마서는 다시 로마로 돌아온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충돌했던 문제들을 배경으로 한다. 그것은 이방인들이 지켜야할 율법들 즉, 할례(롬 2:25-3:1; 4:9-12), 안식일 준수 그리고 음식법(롬 14:1-23)과 관련해서 생각을 달리했기 때문이다.6)
3.1. 저자
로마서는 바울이 로마에 있는 교회에 보낸 서신 즉, 편지이다(1:1). 그러나 성경은 이 편지를 직접 손으로 쓴 사람은 ‘더디오’라는 것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16:22). 저자와 실제 기록자가 다른 이유는 고대에서는 일반적으로 편지를 대필자 혹은 서기에게 대서시키는 관례가 있었기 때문이다.7) 19세기와 20세기 초반에는 몇 학자들이 바울의 저작을 부인했으나, 오늘날 로마서는 데살로니가전서, 갈라디아서, 고린도전·후서, 빌립보서, 빌레몬서와 함께 바울이 저작한 편지들임을 인정한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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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더글라스 무, 『로마서』, 채천석 옮김 (NIV; 서울: 솔로몬, 2011), 305.
2) 율법 자체가 약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약한 것이었다. 조나단 에드워즈, 『로마서 주석』, 김귀탁 옮김 (서울: 복 있는 사람, 2014), 234.
3) ‘죄 있는’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NASB 역본에서는 sinfull로 번역했다. 이 의미를 살려서 필자는 “죄로 가득 찬”으로 번역하였다.
4) 마크 A. 포웰, 『신약개론』, 이승호 옮김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14), 285-86.
5) F. F. 브루스, 『신약사』, 나용화 옮김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78), 335-36.
6) 고든 D. 피·더글라스 스튜어트, 『책별로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길성남 옮김 (서울: 성서유니온선교회, 2003), 401.
7) 더글라스 무, 『로마서』, 손주철 옮김 (NICNT; 서울: 솔로몬, 2015), 27-28.
8) 조셉 A. 피츠마이어, 『로마서』, 김병모 옮김 (Anchor; 서울: CLC, 2015), 68.
3.2. 수신자
로마서의 수신자는 어느 특정한 ‘로마 교회’가 아니고, 로마에 거주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이다(롬 1:7, 15)9). 로마에 있는 교회는 아마도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온 로마의 유대인 성도가 세웠을 것이다.10) 로마 교회의 구성원들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섞여 있었다(롬 1:16; 2:17; 11:13; 16장).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롬 11:13)는 말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로마에 거주했던 그리스도인 중에 유대인들보다 이방인들의 비율이 더 높았을 것이다. 또한, 같은 장 20절부터 30절 사이에서 유대인들에 대해서는 ‘그들’이라고 표현하고, 이방인들에 대해서는 ‘너’ 또는 ‘너희’라고 표현했다.11)
3.3. 기록 시기
로마서의 기록 시기는 바울이 3차전도 여행을 마칠 즈음인데(행 20:1-3), 3차전도 여행을 마치는 시기가 언제인지에 따라서 그 연도는 약간씩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로마서는 바울이 고린도에서부터 마게도냐로 떠나기 전에 고린도에 머물고 있었던 57년 말 또는 58년 초에 쓰였을 것이다.12) 더글라스 무 는 “로마서의 기록 연대는 아마 57년일 것이며, 전후로 1, 2년의 오차는 허용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한다.13) 그러나 기록 시기가 언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3.4. 기록 목적
로마서의 기록 목적은 여러 가지 목적이 있다. 이와 관련해서 여러 논쟁이 있었지만, 로마서의 여러 기록 목적 중, 으뜸가는 목적은 하나님의 복음을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설명하고자 하기 위함이 단연 앞설 것이다.14) 이는 비단 로마서뿐만 아니라 전全 성경의 ‘제일 저자’primary author이신 하나님의 목적이자 바람일 것이다.
두 번째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차별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로마서가 쓰였다. 바울이 전했던 복음의 특징은 차별이 없는 복음인데, 이것은 혈통에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기 때문이다.15) 롬 8:1 말씀 역시 이에 대한 충분한 근거 구절이 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라는 말은 혈통을 불문하고 모두에게 해당이 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바울이 로마와 서바나를 방문하고자 하는 계획을 알리기 위해 로마서를 기록했을 것이다(롬 15:22-29). 바울은 수신자들에게 서바나로 가기 전에 로마를 경유해서 가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또한 서바나로 가는 전도여행에 필요한 재정적인 부분들을 후원해 주기를 요청하고 있다.16) 그러한 마음에 바울은 15:24에서 προπέμπω보내다17)라는 동사를 사용했다. 이는 로마서를 바울이 자신을 후원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로마 교회로 보내는 ‘자기소개서’로 볼 수도 있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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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안드레아스 J. 쾨스텐버거 외2, 『신약개론』, 김경식 외2 옮김 (서울: CLC, 2013), 623.
10) 송영목, 『신약의 키』 (서울: 생명의 양식, 2015), 82-83. 마크 A. 포웰은 기독교가 언제 로마로 들어왔는지, 로마에서 선교활동의 시초는 누구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이에 덧붙여서 다른 지역들로부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로마로 이동해 오면서 교회들이 점점 생겨난 것으로 추정한다. 마크 A. 포웰, 『신약개론』, 285.
11) 변종길, 『로마서』 (서울: 고신총회출판국, 2014), 19.
12) 변종길, 『로마서』, 17. 조셉 A. 피츠마이어, 슐리어(Schlier), 샌데이와 헤드람(Sanday and Headlam) 역시 같은 시기로 보고 있다. Anchor, 137.
13) 무, 『로마서』(NICNT), 29-30.
14) 변종길, 『로마서』, 19.
15) 변종길, 『로마서』, 19-20.
16) 변종길, 『로마서』, 20.
17) 여기서 사용된 동사는 단순히 보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음식과 물질적인 수단으로 동역자를 돕는 것을 함축한다.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hird edition, edited by F. W. Danker (BDAG;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2000), 873.
18) 무, 『로마서』(NICNT), 48.
본문의 전후 문맥
4.1. 로마서 전체의 흐름
서문과 맺음말을 제외한 로마서의 몸통은 교리적인 부분과 실천적인 부분으로 구분된다. 따라서 전반부의 교리적인 부분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는 방법을 배운다.19) 그것은 우리의 행위가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안에 내재한 (일말의) 선한 것이 의로움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운 신분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전가 되고, 우리 밖에 있는 낯선 타자 곧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로우심이 우리에게로 전가 된다. 이를 뒷받침 해주는 교리적인 논증들이 롬 1-4장에 증명되고 있다. 이것을 5-11장에 더 확장하여 설명하고 있다.
교리적인 부분에서 복음을 듣고 배웠다면, 실천적인 부분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로마서 전체의 전반부에서 말하는 이러한 교리들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교회와의 관계에서, 사회와 정부와의 관계에서, 성도들과의 관계에서 즉, 삶에서 ‘어떻게’ 구현해 내며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12장에서부터 차근차근 제시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무가 제시한 로마서의 전체 구조를 간략하게 소개한다.20)
Ⅰ. 편지의 서문(1:1-17)
Ⅱ. 복음의 핵심: 이신칭의(1:18-4:25)
Ⅲ. 복음이 주는 확신: 구원의 소망(5:1-8:39)
Ⅳ. 복음에 대한 변론: 이스라엘의 문제(9:1-11:36)
Ⅴ. 변화시키는 복음의 능력: 그리스도인의 품행(12:1-15:13)
Ⅵ. 편지의 끝맺음(15:14-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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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매튜 풀, 『사도행전·로마서』, 정충하 옮김 (파주: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15), 330.
20) 무는 그의 책에서 로마서 전체를 세밀하게 분석했다. 그의 책을 참고하라. 무, 『로마서』(NICN T), 70-72.
4.2. 본문의 전후 문맥
본문의 전 문맥인 롬 7장에서는 죄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 즉,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그것으로부터 자유하지 못하는 인간의 고뇌에 대해서 역설하고 있다. 이에 관해서 오랫동안 논쟁이 되어왔던 것은 롬 7장은 구원받지 못한 불신자를 위해 쓰였는가, 아니면 신자들을 위해 쓰였는가, 아니면 둘 다를 위한 것인가? 라는 의문이다. 문맥의 흐름상 7장은 성화를 다루는 문맥(롬 5:1-8:17)이라는 것을 고려할 때, 신자들을 대상으로 기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전 문맥에서는 율법이 우리를 구원하는 문제나 구원받은 후에 살아가는 문제에 있어서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구원을 받기 전과 후 모두 그리스도의 능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21)
성령님께서 공급하시는 능력이 없이는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발버둥이 헛수고라는 것을 계속 강조하고 있다. 즉, 성령님의 도우심 없이는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마음과 죄에 의해 지배받고 있는 모습이 항상 충돌될 수밖에 없다.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사실 때, 이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 롬 7:24에서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했던 바울의 질문은 자연스럽게 다음 구절에 이어서 본문에까지 답을 제시하고 있다. 죄와 사망의 몸에서 죄인을 건져내시는 분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롬 7:25a)와 성령님이시다(롬 8:1-4).
본문의 후 문맥인 5절에 ‘육신을 따르는 자’가 등장한다. 이에 대해 교부들의 의견은 통일되지 않았다. 일부 교부들은 이 사람을 기독교에 갓 입교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고 반면에 일부 교부들은 이 사람을 유대인들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교부들은 ‘육’의 실체가 비난받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말하는 육신은 영적인 원칙을 가리킨다고 확신했다.22) 5-8절에서 ‘육신’과 ‘영’의 대조를 강조한다. 그것은 ‘σάρξ’(육신)는 사망을 가져오고, ‘영’은 생명을 가져옴을 의도하기 위함이다(6절). 이어서 7절에는 육신의 생각이 사망을 가져오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한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지 않는다. 따라서 육신에 거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8절).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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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프란시스 쉐퍼, 『로마서 강해』, 조계광 옮김 (서울: 생명의말씀사, 2000), 269.
22) 제럴드 브레이, 『로마서』, 장인산·한동일 옮김 (교부들의 성경주해; 왜관: 분도, 2016), 313.
23) 무, 『로마서』(NIV), 309.
본문의 구성과 구조
로마서 전체에 관한 구조는 교리적인 단락의 구분과 연관되어 있다. 보통 학자들은 교리적인 단락으로 보면 크게 1-8장과 9-16장으로 구분할 수 있다는 데에 동의한다. 본문인 롬 8:1-4는 로마서의 주요 본문 가운데 속한다고 할 수 있다.24)
해당 본문의 구문론적인 특징으로는 2절에서 νόμος/νόμος가 비교된다는 것이다. 이 율법의 두 가지 측면(생명의 성령의 법과 죄와 사망의 법)은 인간의 육신으로 인해 약해졌지만, 성령님을 통해서 성취되었다. 또한, σάρξ육신라는 용어가 지배적으로 사용된다.25)
3절의 구조는 구문론적으로 명확하지 않다. 첫 번째 절인 τὸ γὰρ ἀδύνατον τοῦ νόμου ἐν ᾧ ἠσθένει διὰ τῆς σαρκός을 주절에 어떻게 연결시키는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이것을 독립 주격절로 간주해서 2절 말미에서 말하는 ‘해방이 율법으로서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고, 독립 목격절로 보고 이 절을 본동사에 병렬시켜서 ‘율법으로서 할 수 없는 것을…하나님이 죄로 정하셨다’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 구조는 바울이 의도한 대로 해석해야 한다. 그것은 ‘율법이 할 수 없었던 것’과 ‘하나님은 하신 것’을 대조시키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해져서 할 수 없는 일을 하셨다’라고 해석하는 것이 좋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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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안드레아스 J. 쾨스텐버거 외2, 『신약개론』, 635.
25) 제임스 던. 『로마서』, 상. 김철 외1 옮김 (WBC; 서울: 솔로몬, 2003), 705.
26) 무, 『로마서』(NICNT), 654.
내용분석
1절: Οὐδὲν ἄρα νῦν κατάκριμα τοῖς 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
(그러므로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 정죄함이 없다.)
ἄρα ‘그러므로’의 의미를 지닌 이 접속사는 전 문맥(7:14-25)에 나오는 내용과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즉, 인간은 본질적으로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에 죄악으로 인해 괴로워하고 고민하는 모습은 중생하기 전뿐만 아니라 중생하고 나서도 여전히 존재하는 인간의 연약함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인간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셨는데(7:25), 그것에 대한, 내용으로 8장에서 구체적으로 말해주고 있다.27) ἄρα νῦν의 형태는 강조적인 결합으로써 다음으로 나오는 말이 중요한 결론이라는 것을 내포한다.28)
Οὐδὲν……κατάκριμα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정죄 될 만한 것이 전혀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단지 실제로 정죄 받을 것이 없다고 말할 뿐이다. 그 주체는 오직 하나님이시며 다른 사람들이나 자신의 양심으로부터 여전히 정죄를 당할 수 있다. 이 구절에서 함축하는 중요한 의미는 “부정적인 것(정죄함이 없나니) 안에 긍정적인 것(의롭다 함과 영원한 구원)”이다. 29)
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 이 문구는 주로 바울이 자주 사용했던 공식이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의 회원 자격을 나타낸다.30) 매튜 풀 은, 이 표현을 그리스도와 신자들 간의 영적인 연합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즉,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해서 신자들 안에 거하시며 신자들은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31) 또한, 이 표현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누구든지’ 정죄함이 없다는 큰 위로를 얻을 수 있다. 비록 ‘징계’는 받겠지만,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완전히 끊어지는 ‘정죄함’(단죄, 저주)은 없다는 것이다. 32)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정죄함이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는 율법의 마침이 되시기 때문이다(롬 10:4).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율법의 성취 즉, 율법이 지향했던 바로 그분이며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시는 분이시다.33)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정죄함이 없다고 해서 마음 놓고 죄를 짓고 살 수 없다.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기 때문이다(롬 14:10). 그러나 여기서 신자와 불신자의 극명한 차이점이 있다. 불신자들은 이 거룩한 심판대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서서 세상에서 지었던 죄를 근거로 영벌을 받을 것이다. 이와 반대로 신자들에게 심판대 앞은 두려운 심판이 아니고,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찬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 잔치의 자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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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변종길, 『로마서 연구』 (대구: 말씀사, 2017), 179-80.
28) 무, 『로마서』(NICNT), 647.
29) 매튜 풀, 『사도행전·로마서』, 427-28. 이에 대해 변종길도 히 12:6-8을 위시하여 같은 입장을 취한다. ‘정죄함이 없다’라는 것이 ‘징계’가 없다는 뜻이 아니고, 영원한 지옥 형벌에 처하는 결정적 형벌의 의미로써 정죄함을 의미한다. 변종길, 『로마서 연구』, 180.
30) Kittel, G., Friedrich, G., & Bromiley, G. W.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TDNT; Grand Rapids: W.B. Eerdmans, 1985), 233.
31) 매튜 풀, 『사도행전·로마서』, 427.
32) 변종길, 『로마서 연구』, 181.
33) 마크 A. 포웰, 『신약개론』, 284.
2절: ὁ γὰρ νόμος τοῦ πνεύματος τῆς ζωῆς 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 ἠλευθέρωσέν σε2 ἀπὸ τοῦ νόμου τῆς ἁμαρτίας καὶ τοῦ θανάτου.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너를 해방하였기 때문이다.)
γὰρ “이는”으로 번역된 이 단어는 1절에서 선언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라는 사실의 근거임을 알려준다.34)
νόμος ‘법’과 ‘명령’의 차이점은 법은 사회로부터의 제재에 의해 시행되는 반면, 명령은 명령하는 개인의 제재만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고 시행할 규칙으로 받아들였을 때, 이것이 그들의 법이 되었다. 이 본문에서 두 번의 νόμος가 등장하는데 이는 번역과 해석의 특정 문제를 제기한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우리를 죄와 사망으로 이끄는 법에서 해방시켜 주셨다.35)
첫 번째에서 말하고 있는 νόμος 즉, ‘생명의 성령의 법’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있어왔다. 제임스 던 은 3절의 γὰρ가 이 구절들에 등장하는 νόμος가 토라를 의미한다는 결론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36)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νόμος는 모세의 율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성경에서 모세의 율법을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무 역시 ‘생명의 성령의 법’이 모세의 법을 가리킬 수 없다고 주장한다.37) 그리고 그 율법이 성령에 의해서 바르게 사용된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줄 수 없다. 3절에서 율법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할 수 없다”고 명백하게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생명의 성령의 법’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크리소스톰은 그것을 ‘성령’이라고 옳게 지적하였지만,38)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것은 ‘성령께서 지배하시는 능력 또는 권세’를 의미한다. 39)
같은 원리로 두 번째에서 말하고 있는 νόμος 즉, ‘죄와 사망의 법’ 역시 ‘죄와 사망의 능력 또는 권세’로 해석하는 것이 일관성이 있다. 따라서 2절의 뜻을 풀어서 설명하면, ‘성령의 권세’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해방시켰다는 것이 된다.40)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율법이 하지 못한 것을 이루시는 성령님은 신자의 삶을 평가하시는 기준인 “생명의 성령의 법”이 되심으로서 율법을 대체한다. 신자를 죄와 사망의 법에 얽매였던 죄의 종의 신분에서 해방시켜주셨을 뿐만 아니라 율법의 의로운 요구들을 자발적으로 이루도록 하신다.41) 토마스 슈라이너 는 이 본문이 해당하는 롬 8: 1-17을 그의 주석에서 “성령에 의한 율법의 성취”라고 명명했다.42) 조나단 에드워즈 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영적 원리 곧 생명의 성령의 법은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키는 끈이기 때문에 신자들을 율법에서 해방시킨다.”43)
ἠλευθέρωσέν σε ἀπὸ τοῦ νόμου τῆς ἁμαρτίας καὶ τοῦ θανάτου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죄’는 일차적으로 원죄를 의미한다. 따라서 모든 죄로부터의 해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받은 신자들도 이 땅에서 육신을 입고 있는 한, 계속 죄를 지으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단지 죄의 법과 지배로부터 구원받았다고 말할 뿐이다. 그리하여 죄가 더 이상 신자들을 주관하지 못한다. 이 구절은 1절에서 말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는 명제를 확증하는 증거이다. 44)
σε 신약에서 헬라어는 현대의 구어체 영어처럼 부정 2인칭이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신약에서 발생하지만, 설득력 있는 사례는 없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 사용된 σε는 분명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복수를 위한 단수의 사용인데, 바울은 신자와 불신자 모두에게 보편적인 진술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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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무, 『로마서』(NICNT), 648.
35) Louw, J. P., & Nida, E.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electronic ed. of the 2nd edition., Vol. 1)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1996), 425-26.
36) 던. 『로마서』, 상., 711.
37) 무, 『로마서』(NICNT), 648-52.
38) 요한 크리소스톰, 『로마서 강해』, 송종섭 옮김 (서울: 지평서원, 1990), 262.
39) 로이드 존스는 ‘죄와 사망의 법’을 모세의 율법으로 해석하고, 제임스 던과 토마스 슈라이너는 두 가지 법(생명의 성령의 법, 죄와 사망의 법)을 모두 모세의 율법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석할 경우, 성경과 상충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참고. 변종길, 『로마서 연구』, 183-85.
40) 변종길, 『로마서 연구』, 186-87.
41) 안드레아스 J. 쾨스텐버거 외2, 『신약개론』, 643.
42) Th. R. Schreiner, Romans (Baker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Baker Books, 1998), 395; 변종길, 『로마서 연구』, 175에서 재인용.
43) 에드워즈, 『로마서 주석』, 226.
44) 매튜 풀, 『사도행전·로마서』, 428-29.
45) Daniel B. Wallace, Greek Grammar Beyond the Basics, (Grand Rapids, Michigan: Zondervan, 1996), 392.
3절: τὸ γὰρ ἀδύνατον τοῦ νόμου ἐν ᾧ ἠσθένει διὰ τῆς σαρκός, ὁ θεὸς τὸν ἑαυτοῦ υἱὸν πέμψας ἐν ὁμοιώματι σαρκὸς ἁμαρτίας καὶ περὶ ἁμαρτίας κατέκρινεν τὴν ἁμαρτίαν ἐν τῇ σαρκί,
(그 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해서 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은 하셨다. 곧 자기 아들을 죄로 가득 찬 육신의 모양을 가진 속죄 제물로 보내시고 그가 육신에 죄의 선고를 내리셨다.)
γὰρ 3절 역시 γὰρ로 시작하면서 2절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 예수께서 생명의 성령의 법(권세)으로 어떻게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권세)으로부터 해방하셨는지 소개하고 있다.
ἐν ᾧ ἠσθένει διὰ τῆς σαρκός 여기서 ἐν ᾧ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것을 형태상으로 이해해서 “ 그 안에서”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인과적으로 사용해서 “ 때문에”로 이해할 수 있다.46) 그러나 여기서 사용된 용법은 ‘인과 관계’의 용법으로써 "결과에 따라", "에 따라", "에 기초하여"라는 의미로 해석한다.47) 따라서 육신이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신다는 것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육신으로 번역된 단어 ‘σαρκός’는 여러 가지 의미로 번역할 수 있다. 그것은 ‘몸’body을 말할 수도 있고, ‘죄악된 본성’sinful nature으로도 번역할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이 없는 인간의 연약한 상태를 말하기도 한다. 이처럼 σάρξ는 중립적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문맥에 따라 그 의미가 조금씩 달라진다. 여기서는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연약한 상태를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되거나 죄로 물든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심으로써 죄악이 아닌 인간의 연약함을 공유한 것이다. 48)
ὁμοιώματι 바울은 그리스도의 지상 생활과 관련하여 이 단어를 사용한다. 그는 죄 많은 육신의 “모양”에 들어갔다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인류의 현실을 강조한다. 바울이 단순히“죄 많은 육체로”라고 말했는데, 그리스도께서 암묵적으로는 인간의 죄의 관계에 들어가셨지만, 죄의 힘의 영향을 받지는 않으셨다. 육체와 함께 본질적으로 죄 없는 그리스도는 이 육신을 멸함으로써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상쇄할 수 있도록 죄 많은 인류의 대표자가 되신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단지 외부 인간 형태를 가진 하늘의 존재가 아니다. 그분은 완전하고 진실한 인간이지만, 죄인은 아니다.49)
σαρκὸς ἁμαρτίας 본문에서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그저 모양만 육신을 입고 보내신 것이 아니라 “죄 많은 육신”으로 보내셨다. 재언하면, 죄 없으신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인간과 똑같이 죄가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셨다는 말이다. 그분은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허약함들도 지니고 계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에게 죄는 없으셨다(히 4:15). 하나님은 사랑이시면서 동시에 공의로운 분이시다. 그분의 공의는 죄를 간과하지 않으시고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바로 이 죄에 대한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려고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죄 많은 육신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죄인들의 죄를 모두 담당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고난을 대신 다 받으셨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아들은 죄로 인해 보냄을 받으셨는데, 죄인들을 위해 대속 제물이 되기 위해 보내심을 받으셨다.50)
περὶ ἁμαρτίας 이 구절은 신약에서 중요한 구절이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죄의 사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LXX에서 이 문구는 “죄의 제물”에 대한 생각과 일치한다. 이것은 사 53:10에 있는 주님의 종의 대리 사역과 관련하여 발생한다.51)
칼빈은 율법의 ‘연약성’아스데네이아스을 해석하면서 대수롭지 않은 연약성이 아니라, 완전한 무능력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일말의 의로움도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52)
κατέκρινεν τὴν ἁμαρτίαν ἐν τῇ σαρκί 위에서 살펴본 대로 하나님의 아들은 ‘죄 많은 육신’으로 보내심을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은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공의의 속성을 지키시면서 죄인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죄를 정죄하신 것이다.53) 여기서 육신에 죄를 ‘정죄하였다’라고 할 때, κατέκρινεν 이 단어의 시상은 아오리스트aorist로서 단회적 동작임을 나타낸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을 의미한다. 이렇게 육신에 있는 죄를 정죄하심으로써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해서 자기 몸에 그 죗값을 받으신 것이다.54)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죽음 자체가 파괴되는 종말론적 사건이다(딤후 1:10; 히 2:14). 바로 이 점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독특하다. 그분의 죽음은 죄에 대한 결과로써의 죽음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기 아들을 죄로 가득 찬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지으셨고(고후 5:21; 롬 8:3; 갈 3:13-14),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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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조셉 A. 피츠마이어, 『로마서』, 772.
47) TDNT, 150.
48) 톰 홀랜드, 『로마서 주석』, 최성호·정지영 옮김 (서울: CLC, 2016), 428, 431.
49) TDNT, 686.
50) 스펄전, 『로마서』, 고성대 옮김 (고양: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10), 338-39.
51) TDNT, 827.
52) 존 칼빈, 『로마서』, 존 칼빈성경주석출판위원회 편역 (서울: 성서교재간행사, 1993), 236.
53) 스펄전, 『로마서』, 340.
54) 변종길, 『로마서 연구』, 192-93.
55) TDNT, 314.
4절: ἵνα τὸ δικαίωμα τοῦ νόμου πληρωθῇ ἐν ἡμῖν τοῖς μὴ κατὰ σάρκα περιπατοῦσιν ἀλλὰ κατὰ πνεῦμα.
(그리하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 안에서 율법의 요구가 성취되게 하려 하신다.)
ἵνα τὸ δικαίωμα τοῦ νόμου πληρωθῇ ἐν ἡμῖν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신 또 하나의 목적이다. 그 아들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해 율법의 의를 완전히 이루게 하시는 것이 그것이다. 그의 공로를 바탕으로 자격 없는 우리는 의로운 자로 불린다. πληρωθῇ‘이루어지게’는 아오리스트aorist로서 단회적으로 한 번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율법을 다 지켜 행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위해 ‘단번에’ 이루어주셨다.56) δικαίωμα 이 용어는 의로운 행위, 규제, 요구사항, 계명에 관한 규정을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율법의 요구, 규정 즉, 율법이 이상적으로 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57)
ἐν ἡμῖν 여기서 전치사 ἐνin을 사용한 이유는 율법의 요구를 이룬 것이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노력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통해 이루어주신 일이기 때문이다.58) 전치사 하나가 사소한 것 같지만, 문맥상 ‘ἐν’ 이 한 단어 안에 위대한 복음과 말할 수 없는 위로와 은혜가 흘러넘치고 있다.
τοῖς μὴ κατὰ σάρκα περιπατοῦσιν ἀλλὰ κατὰ πνεῦμα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신자들을 의미한다. 미시적인 관점으로 볼 때, 신자가 중생한 후에도 죄를 지으며 살아가지만, 거시적인 관점으로 볼 때, 참 신자라면 결국은 성령을 따라 행하기 때문이다. 분사 περιπατοῦσιν‘행하는’은 현재 시상으로서 일상적이고 전체적인 모습을 의미한다. 이것이 관사와 함께 사용되면서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 따라서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진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해당한다. 1절에서도 살펴봤듯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누구든지’ 정죄함이 없다는 말씀처럼, 4절에서도 역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든지’ 십자가의 은혜를 값없이 누리는 것이다.59)
πληρωθῇ 이것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성취되도록”이다. 즉, 이 용어는 수동태인데, 신적 수동태이다.60) 전적으로 사람에 의해서 성취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결과로써 성령님을 통해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성취하신 것이다.
성령 안에서 행하려면 하나님의 규범적인 능력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은 믿음의 결정을 암시하지만, 이것 역시 하나님의 행위이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기초하여 성령 안에서 걷는 사람들은 율법을 성취한다. 성령과 육신의 대립은 우주론적 요소가 아니다. 그것은 성령에 의해서 믿음으로 받아드려 지거나 거절될 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행동을 통해 발생한다. 61)‘요구’가 복수가 아니라 단수인 이유는 “이루다”의 수동형과 함께 다른 개념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율법의 요구 전부를 이루신 분이라는 것이다.62)
결론
로마서는 바울이 로마 교회에 있는 신자들에게 보낸 ‘구원’에 대한 교과서와도 같은 서신이다. 다시 말해서, 칭의와 성화 그리고 영화에 이르기까지 위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신자가 얻게 되는 구원을 말하고 있다. 이때, 구원을 얻는 대상은 본문에 의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유대인 신자들과 이방인 신자들 모두 차별 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말한다.
본문의 전 문맥에서 인간은 육체 속에 거하여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는 죄인임을 살펴보았다. 하나님의 구속 사역과 복음의 기본적인 전제는 바로 인간은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로마서의 중간에 해당하는 8장에 들어오면서 대반전이 일어난다. 빚진 채무자에서 모든 채무의 짐으로부터 면제받은 해방자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노력이나 일말의 의로움이 있어서가 아니고 전적으로 삼위 하나님의 사역으로 이루어진 복된 사건이다.
로마서 8장의 주제를 ‘구원의 확실성’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우리 육신이 연약하여 온전하게 성령을 따르지 못하고, 율법을 이루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공로를 의지하여 죄와 사망의 권세가 더 이상 우리를 정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본문의 메시지
8.1. 본인 자신에게 주는 메시지
신자는 주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얻어도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죄를 지으며 끊임없이 죄와 싸우며 살아간다. 죄를 지을 때마다 참 신자는 괴로워하며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이것이 정도를 넘어서 죄를 짓고 그로부터 오는 깊은 절망감과 자괴감에 빠질 때가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의 모든 죄악을 십자가 위에서 해결해 주셨다.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법적으로 의롭다고 선언하시며 더 이상 정죄함이 없다고 말씀해주셨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죄를 간과하시고(롬 3:25),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시는데(사 43:25), 우리가 그 죄에 머물러서 자책만 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죄 사함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권위 있고 효력 있는 이 선언을 의지하여 담대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겠다.
8.2. 오늘의 청중에게 주는 메시지
날마다 깨어서 말씀이라는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아야 한다. 사도 바울이 말했던 것처럼 날마다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고(고전 9:27), 두려움으로 구원을 이뤄나가야 한다(빌 2:12). 본문의 메시지는 과도한 나르시시즘과 자기중심적 사고에 갇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복음의 메시지이다. 본문에서는 충분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그 직전까지의 문맥들을 살펴봤을 때, 그 복음의 전제는 바로 인간은 죄인이라는 사실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자기중심적 사고와 개인주의라는 틀 속에 사는 사람에게 죄를 지적하는 것은 그들에게 매우 불편한 일이다.
이에 대해서 장 깔뱅 선생이 기독교 강요의 첫 장에서 말했듯이, 하나님을 아는 만큼 나 자신을 아는 것이다. 나의 죄를 회개하고 그 죄악이 얼마나 처참하고 끔찍한 것인지 깨닫지 못하고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바로 이 사실이 우리를 십자가로 인도한다.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겸손하게 우리의 약함을 인정하고 고백해야 한다. 복음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죄인 된 우리를 향하신 삼위 하나님의 유기적인 구속 사역을 말씀을 통해서 깨닫고, 그 복음으로부터 오는 참 진리에 의해서 자유하고 참된 기쁨을 누려야한다. 우리는 연약하고 허물과 죄로 죽었던 존재였지만, 삼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고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되어 참 자유를 얻었다.
본문의 개요 및 석의 주제와 설교 주제, 설교 대지
9.1. 본문의 개요
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누구든지 더 이상 정죄함이 없다(1절).
Ⅱ.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령님의 권세가 죄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해방했다
(2절).
Ⅲ. 하나님은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해져서 할 수 없는 일을 하셨는데,
자기아들을 죄로 가득 찬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그 육신을 정죄하셨다
(3절).
Ⅳ. 육신을 따르지 않고, 성령님을 따르는 우리 안에서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신다(4절).
9.2. 주제
석의 주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성령님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누구든지 죄의 권세에서 해방되었고, 우리 안에서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신다.
설교 주제: 우리 자신을 믿거나 우리 안에 의로움을 찾으려고 하는 헛된 시도들을 그만두고, 오직 삼위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통해 구원받았음을 깨달아서 참 자유를 누리고 감사와 송영의 삶을 살아야 한다.
9.3. 설교 대지
(1)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죄의 권세로부터 정죄함을 받지 않는다.
(2) 나의 의로움이 아닌, 성령님의 권세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으로 말미암아 죄의 권세에서 해방되었다.
(3) 따라서 성령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죄의 권세로부터 참 자유를 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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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변종길, 『로마서 연구』, 194.
57) BDAG, 249.
58) 변종길, 『로마서 연구』, 199-200.
59) 변종길, 『로마서 연구』, 201-202.
60) 조셉 A. 피츠마이어, 『로마서』, 779.
61) TDNT, 890.
62) 무, 『로마서』(NICNT), 308.
63) 변종길, 『로마서』, 242.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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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iel B. Wallace, Greek Grammar Beyond the Basics. Grand Rapids:: Zondervan, 1996.
첫댓글 장 정진 전도사님 실력이 상당 합니다. 설교 할 때 이렇게 성경해석과 석의의 과정을 거쳐서 설교 하신다면 앞으로 살아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가 있는 진리가 전도사님의 설교사역을 통해 선포되고 증거 되어 질 줄 믿습니다.
늘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위해 기도 합니다. 항상 응원 합니다. - 염 찬호 목사 -
God bless you.
목사님, 실력이 많이 부족한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발전하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장정진 전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