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웅에서 모험가 꿈꾸는 가수 이장희 *
그의 행동반경을 예측하기란 불가능하다.지금쯤 여기 있겠지라고 생각하면 저기 있고,
이젠 이걸 하겠지라고 짐작하는 순간 저걸 하고 있다고 연락이 온다.
서울에서 헤어진 지 며칠 만에 지구 저편에서 전화를 걸어
"여기 알라스칸데 노을 지는 풍경이 죽여,헛헛헛"하고 특유의 너털 웃음 소리를 들려준다
작년 1월에 지인들과 자신의 환갑기념으로 칠레,아르헨티나 등을 경유하는 남극 유람선 여행을 하며
이메일로 남극여행기를 보내더니 2월 초엔 충북 괴산의 농업학교에 입소해 오전 7시부터 밤 11시까지
환경친화 농업에 대한 교육과 농사철학을 공부했단다.
그리고 50년만에 울릉도에 가장 눈이 많이 내렸다는 정월 대보름날,기르던 개 라코가 죽었다는
담백하면서고 애틋한 소식을 전해왔다.
1970년대 청년문화의 상징인 가수 이장희 씨는 5년전 부터 울릉도에서 더덕농사를 짓고 있다.
특유의 콧수염과 장발을 모두 밀어버려 과거의 '청년 이장희'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하지만 낮으면서도 힘있는 목소리에 너털웃음은 변하지 않았다.
가수,작사,작곡가,음반제작자,패션매장 주인,라디오방송국 사장,여행사 대표,그리고 농부....
그 숱한 직업도 규정하기 힘든 남자,이장희 씨는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에서 농사나 지으며 살고 싶다'
'크루즈를 타봐야지'등 많은 이들이 꾸는 꿈들을 일상으로 실천하며 살고 있다.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열매는 달다'란 표어를 벽에 붙여 놓고 밤 늦도록 공부한다며
책을 펴놓아도 심란하기만 했던 청소년 시절,라디오를 틀면 'In the year of 2525'란
시그널 음악과 함께 들려오던 그의 감미로운 목소리>>
7080세대 가운데 이장희와그 노래의 추억에서 자유로운 이들이 몇이나 될까,
'그건 너'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한 잔의 추억' '그애와 나랑은''자정이 훨씬 넘었네'...
이런 히트곡들을 모두 직접 지어 불렀다.
정미조의 '휘파람을 부세요' 김세환의'좋은 걸 어떡해'
록그룹'사랑과평화'의'한동안 뜸했었지''장미'같은 노래들도 그의 작품이다.
소풍 가서 온몸을 훑으며 부르던 CM송 '나만의 알고 있는 사랑의 비너스'도 그가 만들었다.
<<1973년 언젠가 이장희의 '그건 너'가 소리 소문없이 몰고 온 파장을 실감있게 표현하기는 힘들다.
그건 김민기나 한대수의 노래처럼 '지성의 사색'이란 여과도 필요없이 그냥 몸에 꽂히는 효과였다.
구어체의 생생한 가사,필요할 때마다 터져주는 후렴구,음치 같지만 강렬한 가창법 등을 운운하는 것은
시대가 흐른 뒤 맥빠진 음악평론가 해석일 뿐이다.
반항적이고 퇴폐적인 기운을 겉치레 없이 순전히 음악으로만 표현한 것은 이장희에 이르러 비로소 완성을 보았다.
이건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대중문화 평론가 신현준 씨가 이렇게 묘사했듯 그의 노래와 노랫말은 충격이었다
<<어제는 비가 오는 종로 거리를/우산도 안 받고 혼자 걸었네/우연히 마주친 동창생 녀석이/
너 미쳤니 하면서 껄껄 웃더군/....
전화를 걸려고 동전 바꿨네/종일토록 번호판과 씨름 했었네/그러다 당신이 받으면 끊었네/
웬일인지 바보처럼 울고 말았네/그건 너 그건 너...>>
남학생들은 그가 거친 듯한 음색으로 부르는 '그건 너'와 '한 잔의 추억'을 열창하며 스트레스를 풀었고
여학생들은 최인호 씨가 아름다운 노랫말을 지어준 포크송'겨울아이'나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의
달콤한 목소리에 가슴 설레며 사춘기를 통과했다.
그 떨림으로 청소년기를 보낸 이들은 벌써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40~50대 중년으로 고혈압과 퇴직과 황혼이혼의
불안에 시달리는데,그 떨림을 선물한 주인공 이장희 씨는 진갑의 나이에도 청년기를 유지한다.
그는 그 비결을'나를 위해 살고 늘 모험을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동기는 한편의 영화와 몇 권의 책이었다.
경남 마산이 고향인 그는 네살 때 천자문을 배워 신동 소리를 들었다.
서울로 올라와 창신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이 다음에 톱스타가 될 문희,윤여정 등이 같은 학년 여학생이었다.초등학교 5학년 때
<드라큘라>란 영화를 보고 그는 한 달 동안 잠을 못잤다. 죽음의 공포보다 죽기 전에
어떻게 살까 하는 깨우침이었다.
<<드라큘라에 물려 죽지 않아도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언젠가 나도 죽겠지,
그럼 일회뿐인 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그래, 나는 나 살고 싶은 대로 살자.
내게 주어진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내 자유 의지 대로 살자.....>>
겨우 열한살짜리 소년에겐 너무 심오한 인생의 의미를 그는 드라큘라란 영화 덕분에 깨우쳤고 그 후
그의 삶은 단 한 번도 타인의 의지나 권유에 조종되지 않았다.
학교도,직업도,결혼도,여행지도 모두 그 자신의 결정에 따랐다.
서울중 2학년 때,삼촌의 친구인 조영남 씨가 집에 놀러와 기타치며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갔다.음악에 빠져 공부는 뒷전이고 음악을 듣고 노래를 불렀다.그의 노래를 듣고
조영남 아저씨는 "너같은 음치는 절대 노래하면 안돼"라고 했다.
'화개장터'등 빈약한 히트곡을 갖고 있는 조 씨는 숱한 히트곡과 더불어 '70년대 음악계의 신화'로 불리는
이장희 씨에 대해 "내가 유일하게 가치를 못 알아본 인재"라면서도
"그땐 정말 노래를 못 불렀다"고 기억한다.
공부를 통 안하다가 시험에 임박해 교과서 몇번 읽어보고
서울고,연세대 생물학과에 들어가 어머니를 안심시킨 것도 잠깐,
그는 전공이 적성에 맞지 않아 대학을 그만 두고 음악을 시작했다.
홍대생이던 기타리스트 강근식을 만나 듀엣을 결성했고 음악다방'쎄시봉'에서
윤형주,신중현,김세환,김민기,김도향등과 공유했다
남의 노래만 부르다가 71년 인기 DJ 이종환 씨의 권유로 1집 앨범'겨울 이야기'를 냈다.
1972년 2집 앨범에 수록된 '그애와 나랑은''그 여인 그 표정'등이 히트했고
1973년 1월1일 자정에 '0시의 다이얼'DJ를 맡으면서 이장희는 완전히 스타가 됐다.
74년 영화 <별들의 고향>에 쓰인 노래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난 아직 몰라요'등을
담은 앨범은 한국가요계를 평정햇다.
74년엔 3년간 열애 끝에 첫사랑과 결혼햇다.그의 삶은 그저 반짝거리기만 했다.
하지만 햇살이 영원할 수는 없는법,75년 1차 가요 정화운동 때 '그건 너''한잔의 추억''불꺼진 창'
등 히트곡 대부분이 금지곡 목록에 올랐다,'그건 너'는 남에게 책임을 전가 시킨다고
'불꺼진 창'은 창안에 남녀 그림자가 어른거린다는 가사 때문에 불륜을 그렸다는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금지됐다.
6개월 후인 12월3일에는 인기연예인 80여명과 함께 대마초 파동에 연루돼 철창신세를 졌고 노래도 접었다.
친구 권유로 '반도패션'지점을 운영하며 옷장사로 돈을 벌었지만 노래에 미련을 버리지 못해 작곡과
음반 제작을 시작했다.78년 그의 손에서 탄생한 록그룹 <사랑과 평화>1,2집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김수철,김현식, 같은 신인가수들도 발굴했다. 하지만 '대마초 가수'란 낙인에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규제가 심한 무렵이라
그 좋아하는 음악세계 역시 답답하기만 해 탈출을 꿈꾸다 기회를 맞았다.
1980년 김태화가 부른 '바보처럼 살았군요'가 몬트리올에서 열리는 태평양가요제에 초청 받은 것,
작곡가 김도향.가수 김태화와 함께 제작자 신분으로 캐나다에 들른 길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 곳에서 여행 온 소설가 최인호를 만났다.고교 선배이자 친구 형인 그와 함께 미국 자동차여행을 떠낫다.
20대엔 청바지와 통기타,청년문화의 상징이던 두 사람은
서른세살과 서른다섯살 가을에 중고차를 한 대 사서 미국 횡단을 했다.
LA를 출발해 캘리포니아주,아리조나주의 그랜드캐니언,유타주의 자이언 국립공원,
브라이스 캐니언,모뉴먼트 밸리 등을
두 남자는 자동차로 달렸다.황홀하게 아름다운 숲이 보이기도 하고
시속 120km로 달려도 서너시간 동안 차 한 대 만나기 힘든 곳도 많았다.
그가 그후 200번이 넘게 다녀온 그의 영혼의 땅은 캘리포니아주로 돌아오는 길에 들른 데쓰밸리.
국립공원이다. LA에서 차로 6시간 남짓한 거리에 있는 데쓰밸리는 죽음의 계곡,
1949년 서부 금광을 찾아 떠났던 20개 개척팀 300여명이 화씨 120도를 오르내리는 더위와
마시면 죽는 소금물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오묘한 빛깔의 바위산,온몸을 서걱서걱하게 만드는 모래파도,끝이 보이지 않는
대평원에 누우면 금방 떨어질것 같은 커다랗고 반짝이는 별들은 그 후로도 그를 달려가게 만들었다.
두 사람은 그 여행 후 또 다른 문을 열었다.최인호 씨는 당시의 경험을 토대로 쓴 단편소설<깊고 푸른 밤>으로
1982년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죽음의 계곡,아니 미국의 광활한 대자연의 포로가 된 그는
미국에 정착하기로 마음 먹었다.
*영웅에서 모험가로
10여년의 세월이 흐른 90년대,이장희 씨의 근황이 궁금할 즈음,그는 갑자기 미국의 영웅이 되어 나타났다.
미국 취업비자를 얻기 위해 한인 라디오 방송국에서 DJ로 일하던 그는 88년 미디어 사업이 유망하다고 판단.
자본과 인력이 적게 들고 나름의 노하우도 갖고 있는 라디오를 선택했다.
이전에 있던 교민방송은 미리 신청을 해야만 들을 수 있었는데 그는 스튜디오를 빌리고
AM주팟을 사 LA지역이면 교민 어디서나 들을 수 있도록 했다.
교민들의 반은은 폭발적이엇다. 교민사회의 대소사,온갖 민원과 문의와
토론과 오락,나아가서는 교민의 의견까지 라디오 코리아로 모아졌다.
최근 화제의 주인공인 에리카 김이 법률상담코너를 진행했고,주간경향의 박무일 기자가 서울에서
국제전화로 고향소식을 전해 인기를 모았다.
1992년,미주한인 이민 역사상 최대 수난이라고 알려진 LA폭동 기간 중
'라디오 코리아'는 일체의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구조활동을 하며 상황실,대피소,자위대 본부 역할을 햇다.
당시 조지 부시 대통령(아버지 부시)이 직접 라디오 코리아
스튜디오를 방문해 동포들에게 격려와 담화문을 발표했고 미 대통령 공로장을 수여했다.
92년 라디오 코리아의 활약상을 전하기 위해 잠시 귀국했던
그는 검은 정장 수트차림의 CEO모습이 너무 잘 어울렸다.
진지한 태도와 신뢰감 있는 목소리로 미국 현지 상황을 전해준 그가
'그건 너'의 주인공이란 걸 알 수 있게 해준 것은 콧수염 뿐이었다.
94년 LA지진 때는 한인을 포함한 다인종 피해 구조에 앞장섰고
박찬호 선수가 출전하는 야구중계를 처음 실시하기도 했다.
또 1층에는 이민박물관도 열어 교포들의 역사를 한눈에 보는 장소도 마련했다.
라디오 코리아 외에 '스포츠 서울, USA'엘로페이지 사업을 하던 그는
교포사회의 영웅이자 성공신화를 이룬 사업가였다.
그런데 그는 또 우리들의 예측을 보기좋게 배신했다.
2003년 12월 31일로 라디오 코리아를 물러난 것이다.
표면적인 이유는 그가 전파를 임대한 중국계 방송국이 라디오 코리아가 성공하자
전파료를 두 배이상 올려달라고 요구했기 때문.
<<월 18만 달러의 전파료를 35만 달러로 올려달라는 무리한 요구를 하더군요.
그들의 치사한 요구를 들어주기 싫었어요.아니 사실은
그것보다 더 늙기전에 은퇴하고 싶어서 순식간에 접었죠.
그때 또 발목이 잡히면 도저히 일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 같아 핑계 삼아 순식간에 문을 닫았습니다.>>
돈도 많이 벌어 봤고,음악이건 사업이건 손을 대면 성공했다. 하지만 실패도 많았다.
대마초 가수로 쫓기듯 조국을 떠나야했고,
결혼도 파경에 이르렀다.55세가 되었을 때 그는 가만히 생각했다. 난 뭘 할 때 가슴이 뛰고 황홀한가.
여자와 와인 마시며 대화를 나눌 때? 섹스나 마약? 아니었다.
그의 맥박이 빨라지고 피가 뜨겁게 끓는 열기가 느껴질 때는 대자연 속에 있을 때였다.
그 후 그는 전 세계를 여행했다. 미국 전역은 물론 아마존 정글,남태평양의 작은 섬들,유럽의 여러나라,
중국과 일본 등을 모두 섭렵했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에라 네바다 산맥을 타고 요세미티 국립공원까지 이어지는
존무어 트레일 코스는 세번이나 다녀 왔는데,
배낭에 들어있는 음식물 냄새를 맡고 찾아온 곰을 만났다는 말을 마치 동네 골목에서
강아지를 만났다는 이야기처럼 즐겁고 담담하게 전한다.
언제 야생동물이 나타날지 모르는 곳,대체 언제 처음 뿌리를 내렸을지 모를 아름드리 나무가 울창한 곳,
그저 모래소리만 들리는 막막한 사막 한가운데서 그는 완벽한 자유를 만끽하고
가장 진실하게 죽음의 공포와 마주하며
그래도 매순간 황홀한 순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느꼈단다.
작년 1월엔 2007년에 하지 못한 환갑잔치를 겸해 친구들과 함께 남극 크루즈여행을 했다. 이젠 자연의
위대함만이 아니라 인간의 위대함을 발견했단다.
남극 여행을 하며 남극을 발견한 모험가들의 자료를 찾고 그 빙하뿐인 남극대륙 횡단에 성공한
새클턴의 이야기를 친지들에게
이메일로 전했다.
<<아일랜드 출신의 비운의 새클턴 이야기를 아는지,그는 1914년 인가에
'무보수,귀환보장 없음,몸과 마음이 최상의 상태일 것,
엄청난 시련이 예상됨,성공하면 자랑스러움만 남을 것임'이란 광고를 신문에 싣고 남극 탐험대원을 모집한다.
28명의 대원은 1916년,지금 내가 막 가고 있는 남극의 웨델해에 도착한다>>
서울에서 혹은 LA에서 그가 배에서 쓴 편지를 읽은 이들은 부러움과 대견한과 뿌듯한 마음이 교차했다고 한다.
나는 왜 다람쥐 쳇바퀴처럼 살면서 단 하루도 나를 위한 시간을 쓰지 못하는 걸까.
왜 난 이 지긋지긋한 일상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꿈도 희망도 업이 늙어가야 할까, 그래도 내 친구 장희는
용감무쌍하게 자기 의지대로 자기 마음대로 멋진 노후를 즐기지 않는가란 생각들.....
한국을 떠나 전 세계를 돌고돌던 그가 발견한 천국은 울릉도다.
13년전 친구와 함께 울릉도를 찾았다가 절벽에서 바다로 안개를 뿜으며 낙하하는 폭포,태고의 신비를 느끼게
해주는 바위,그리고 가슴이 시원해지는 공기에 반했다. 몇 번을 드나들다 5년전 쯤 집을 마련했다.
그리곤 울릉도에서 가장 어울리는 더덕농사를 짓는다
친구들은 그가 수시로 찾아오는 친구를 차단하기 위해
일부러 머나먼 섬 울릉도를 거주지로 옮겼다고 오해하기도 했다.
그가 더덕농사꾼으로 변함으로써 가장 충격을 받으면서도 가장 구원을 받는 사람은 선배 조영남 씨다.
4년전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쓴 친일선언>이란 책과 발언으로
1년 반 이상 활동을 중지해야 했던 그는 프랑스 파리건, 미국 뉴욕이건 무조건 떠나려고 했다.
어딘가 자신이 오해받지 않고 머물 수 있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유토피아가 있을 것 같아 장소를 궁리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연락도 없이 이장희 씨가 나타나 던진 말에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나 구원을 받았단다.
<<형,이 세상 어디에도 유토피아는 없어.나도 울릉도가 너무 좋아 울릉천국이라 부르지만 더덕농사를 짓다보면
허리가 끊어지는 것 같아. 그렇게 온몸이 고통스러운데 무슨 천국이야 .>>
하지만 이장희씨는 지금도 유토피아를 꿈꾼다.그건 아름다운 풍경이나 근사한 사람들이 가득한 곳이 아니다.
그의 마음 속에 아직도 숨어 있는 소년,모험과 열정으로 가득찬 소년이 감탄사를 발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천국이다.황량한 사막에서 발견하는 신기루,죽음의 공포와 마주할 때만 새롭게 솟아오르는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를 느낄 수 있는 곳이 그에겐 유토피아다.
하지만 자심의 존재에 뿌리를 더 정확히 알고 싶어 성경도 읽고 버르란드 러셀의 <서양 철학의 역사>나
하이데거의 철학책을 읽는다.
울릉도 울릉읍을 보면 현포리의 더덕밭 가운데 놓인 의자에 앉아 철학책을 읽는 62세의 남자.
자연에 대한 호기심,이웃에 대한 배려,그리고 모든 것을 자유의지로 결정한다는 그는 현자의 표정을 가진 영원한 소년이다
- 2009년 경향신문/ 글.유인경 기자 -
첫댓글 더덕농사 접으신지도 오래인데... ㅎ ㅎ
오래된 기사지만
오른쪽 마우스 사용 불가라서 독수리 타법으로 옮겨 적어 보았답니다..
잘 보아 주세요^^
더덕농사도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지요.
정말 모든 농사일은 다 힘들답니다ㅎㅎ
긴글 덕분에 자세히 잘보구 갑니다~~
참 좋은 기사입니다.
늘 좋은 글 올려주시는 블루진님!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잘 보아 주셔서 제가 감사합니다!!.
블루진님!!!
그 왜소한 몸에서 열정이 대단하셔요.
좋아서 하는일은 즐겁답니다.
감사해요^^
세상에... 독수리로...
호감 느끼던 유인경기자가
쓴 장희님에 관한 글이라
더욱 흥미진진하게 보았습니다. ㅎ
그 분 처럼 살고 싶은 우리들에게 설레임을 주는 글 이네요!
블루진님 고마워요!
자판기 두드린지 어언 0 0 년 인데 아직 독수리 수준이라
장편 탈고한 기분입니다. ㅎ ㅎ
저도 고맙습니다!!
장희님에 관해선 늘 먼저...
대단한 관심이지요.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보이면 가져다 놓아야겠기에.....
긴 글이라 배경 음악(겨울이야기)도 올려 보았어요 !!
와~~저 장문의 글을 직접 쓰시다니
암튼 언니의 열정에 존경을 표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장희님에 대한 사랑...
카페에 깊은 애정...늘 변함 없으신것 같습니다
근디 장희님 고향이 오산인데 마산으로 표기가 되어있네요...4살때 마산으로 이사 가셨다구 했는데ㅎㅎ
주소복사 링크로 올리는건
내키지 않았어요~~
나그네님이 고향 부분 놓칠리 없지요!
공식프로필은 어디나
오산이니 서운해 마셔요 ㅎ ㅎ
이렇게 멋진 인생을 실천하면서
생활하시기란 정말 쉽지않은 일인데..........가끔은 부럽습니다
장희님 관련글
읽기만해도 훈훈하고
마음행복합니다
아래 두분한테 감사드립니다
블루진
유인경기자
가끔은...블루진님의 열정이 엄청 부럽습니당..
유인경기자도 부럽습니다.
정년 퇴직한다고
퇴임식을
통크게 조선호텔에서
해주는 절친이 있어서..ㅋ
기분 좋은 리플~~
그저 감사합니다
오늘 같은 날이 많기를...ㅎ ㅎ
조영남님과 절친이시지요?
와 ~~
대단하시네요!!!!
유토피아란 마음속에 열정,모험을 실천할때 너무 멋진글이네요
바로 실천하며 사는분 장희님 !!
멋진글 감사해요 ^*^
정말 멋진 분!!
몇번 읽어 보고 올렸답니다.
고맙습니다!!
늘~~인생은 나그네 길 용감하게 실천하시는 장희님....존경과 사랑을~~~블루진님 글 감사합니다.
오타 투성이(수정했지만) 긴 글 봐주셔서 감사해요^^
좋은 글 또박또박 3번 읽고 음악도 같이 크게 듣고 갑니다.^^
블루진님이 저랑 문중인 거 아시나요?
들
문중이 계셔서 얼마나 다행인지요!!! ㅎ ㅎ ㅎ
지금은7년이란세월이지난2009년의글이
지금도생생하게다가옴은
장희님이저희에게주시는변함없는
메시지입니다.
이추사에서생각을같이하여
항상감사합니다.
오랜 세월 가까이 하시니 더 특별하시겠지요
부럽기도 하구요.
변함 없으신 영남님도 멋지십니다.
블루진님
읽기도 쉽지 않은 글을
식사도 거르며 옴겨 적으신
노고에 아낌 없는 찬사를 보냅니다
블루진님 이시기에 가능함을 인정 하며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읽고 또 읽어도 이장희선생님의
인생 스토리는 늘 감동 으로 다가오네요 ㅎㅎ
데쓰밸리 별 이야기에 감동이 밀려 왔답니다.
감사해요 실비아님!!!
제가,,,
장희님 팬이 되게 된 이유가 잘 적혀 있네요.
1998년.2001년..
두번의 시에라 네바다 산맥을 타고,
요세미티까지~오는JMT~제가 경험한 곰과 야생동물들이 즐비했던곳...
마지막 종주 한인 환영식에서 기자분들이 말씀하시던
장희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왕팬이 되었어요.
기회가 주어진다면 꼭 한번 더 가고 싶구,,,대자연과 동화되어
내자신이 황홀해지고 싶습니다.
장희님!!!
지구상에서 가장 멋진 분이십니다.
그당시 기자들이 했던 말들이 더욱 더 감동으로 느켜지네요...
여행 좋아하시는 북극성님의 남다른 팬심!!
이번 데쓰밸리 여행 때
요세미티 여행에서 곰 만난 이야기를 잠깐 해주셨답니다.
유인경 기자가 적었듯 동네 강아지 만난 이야기 처럼 들려주셨답니다.
대단한 블루진님.
털보님. 감사합니다.
이럴수도 있구나~~감동 입니다~ 블루진 덕분에 아직 어둠뿐인 새벽이 환해지는 느낌 입니다~저도62세쯤 에 자연의 텃밭에서 철학책을 읽는 멋진 사람이었음 하는 바램도 있고요~ 점말 감사합니다~
우리 마음도 담은 듯한 유인경 기자의 글이지요!!
우리 세대가 장희님의 노래와 그 추억에서 자유로울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