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3. 20. 수요일(1)
그동안 일한 것이 무리가 된 모양이다. 손목과 손마디가 몹시 아프다. 어제는 비 예보가 있어 날씨가 흐렸다. 비가 내리기 전에 안동 시내에 다녀왔다. 농사에 쓸 비닐도 사고, 씨감자도 사고, 옥수수와 도라지 씨앗을 사 왔다. 안동 시내에는 벌써 꽃(매화?)이 피었다. 여기보다 확실히 온도가 높은 모양이다. 시내에 나간 길에 여기저기 돌아볼 생각이 있었으나, 아침에 우유를 먹어서 그런지 설사할 것 같아 급한 마음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바람이 강하게 불어 바깥일을 하지 못하고 어제 사서 가지고 온 작약 5개를 심고 실내에서 쉬었다. 아침에는 눈이 와서 땅이 눈으로 덮이었었다. 그러나 기온이 올라가며 눈이 녹아 흔적 없이 사라졌다. 홍매화가 눈 속에서 특별했다. 그래서 홍매화를 雪中梅(설중매)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홍매화가 항상 설중매가 되는 것은 아니다. 봄에 홍매화가 피었을 때 눈이 내려야 그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설중매를 보았으니, 앞으로는 설중매를 실제로 보지 못해도 설중매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겠다.
오늘 아침은 며느리가 보내준 전복죽과 깻잎으로 했다. 지난 토요일 아들이 출장을 마치고 귀국할 때 며느리가 공항으로 마중 가는지 물었다. 며느리가 아들이 차를 가지고 갔기 때문에 집에서 환영한다고 했다. 여독이 풀리도록 잘해주라고 했더니, ‘남편이 좋아하는 전복죽과 깻잎지를 준비하겠습니다’라고 했다. 그 조합이 그럴 뜻 해서, ‘나도 그것을 좋아할 것 같은데’라고 했더니 다음에 기회 주시면 대접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당장 기회 줄게! 더 더워지기 전에 죽 만들어 냉동해서 깻잎하고 보내라고 했더니, ‘네’ 하고 답이 왔다. 내가 ‘정말 하려면 죽 만들어 비닐에 잘게 나눠서 냉동하면 된다. 그리고 깻잎과 함께 우체국 택배’라고 카톡을 보냈다. 어제 며느리가 보낸 택배가 와서 아침에 죽을 먹어보았다. 나는 비닐봉지에 음식 넣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며느리가 편하도록 비닐에 넣어 보내라고 했는데, 며느리는 그것을 아는지 플라스틱 용기에 죽을 넣어 보냈다. 나는 냄새 때문에, 전복죽에 내장을 잘 넣지 않는데 내장을 넣었다. 죽에 물을 더 부어 묽게 하고 참기름을 넣어서 깻잎과 같이 먹었다. 내 생각대로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며느리는 오랜 투병 생활로 보양식이라기보다는 할 수 있는 대로 건강식을 하려고 하는 중일 것이다. 우리도 그렇게 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런데 건강식은 보통 사람의 입맛에는 안 맞을 수 있다. 내 입맛에도 며느리의 음식을 안 맞는다. 그래서 거의 며느리의 집에서 식사하지 않는다. 한 번은 며느리 집에서 식사한 다음 네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서는 환자식 말고 별도의 음식을 해주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남편이나 아이들이 엄마가 해주는 음식을 맛있게 먹고 기억해야 외식하지 않게 된다고 했다. 엄마가 해주는 ‘집밥’이 남편이나 아이들에게 각인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좋은 사람과 좋은 음식을 좋은 환경에서 먹은 일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 일은 별일이 아니다. 가정에서 엄마가 정성껏 해주는 음식을 식구가 모두 모여 감사하며 먹는 일이다. 가족 곧 식구가 나에게 좋은 사람들이고, 정성껏 만든 음식이 좋은 음식이며, 이렇게 식구들이 음식 앞에 모일 수 있는 집이 좋은 환경이다.
나의 아내도 음식을 잘할 줄 모른다. 나와 둘이 일했기 때문에, 평생 일을 했기 때문에, 음식을 할 기회도 배울 기회도 없었다. 음식을 만들고 요리할 시간에 일을 하는 것이 효과적이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면 돈을 벌어 음식을 사 먹는 일이 더 낫다고 생각했었다. 아내는 요리를 전혀 하지 못한다. 그래도 안동을 왕래하면서 깍두기, 오이소박이, 동치미를 담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나에게 귀한 반찬이 되었다. 내 생각에 아들이 좋아하는 엄마의 음식은 새우튀김이나 꽃게찜 정도일 것이다. 아들이 엄마와 함께 삼겹살을 구워 먹는 일도 즐거워할 수 있다. 나는 냄새 때문에 먹지 않지만, 아들이 아주 어릴 때부터 일부러 엄마와 돼지고기를 먹도록 했었다. 아내는 시집와서 아들과 둘이 돼지고기를 먹기까지 돼지고기는 먹지 못했었다. 나는 지금도 어머니가 해주시던 집밥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음식은 지금 맛볼 수 없다. 특히 어머니와 함께 직접 만든 청국장의 맛은(우리는 담북장이라고 불렀다) 잊을 수 없다. 그 맛은 요즘 청국장처럼 꼬리 꼬리 한 냄새도 나지 않고 오히려 구수하고 담백한 맛이었다. 청국장 하나면 충분히 맛있는 식사가 되었다. 나는 食道樂을 싫어한다(식도락: 맛있다고 소문난 음식을 일부러 찾아다니며 먹고 즐기는 행위). 음식점에서 줄 서서 기다리며 먹는 일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머니가 만들어 주시던 청국장의 맛을 재현하는 음식점이 있다면 식도락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꽃게국의 맛도 기억한다. 보온밥통이 없던 시절 늦은 밤까지 밥이 식지 않도록 방 아랫목 이불속에 간직했다 내주시던 그 정성 어린 모습도 기억하고 있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내가 그 모습을 일부러 추억하며 기억하지 않아도 어머니를 생각하면 자동으로 기억된다.
나는 맛과 멋을 같은 개념으로 생각한다. 모든 음식과 과일이 제각기 고유의 맛이 있듯이 모든 사람의 멋도 제각기 다르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멋은 옷을 잘 입고, 행색을 잘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외모에서 취하는 것이고 그 사람의 고유한 멋은 그 사람의 내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다. 사람의 멋은 개성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개성보다 한 차원 더 높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생각으로 요즘 사람들을 보면 멋있는 사람을 만나보기 어렵다. 요즘은 모두 다 같은 외모를 취하려고 하는 것이 유행이다. 사람들이 보통 예쁘다고 하는 어떤 모양으로 외모를 만들려고 한다. 예쁘다고 만들어진 모습이 나의 눈에는 그 사람에게, 또는 그 모습 그 자체로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고 더 나아가 추한 모습일 때도 있다. 예쁜 사람들이 있다. 어린아이는 모두 예쁘고 귀엽다. 그런 어린아이들은 제각기 멋지게 자랄 수 있다. 그러나 시대는 그렇게 멋지게 자랄 수 있는 어린아이들을 점점 이상하게 자라게 요구한다.
나는 예쁜 여자와 아름다운 여자를 구분한다. 과거에는 아주 가끔 아름다운 여자들이 보였었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나의 눈에 멋있는 사람, 아름다운 여인은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감사한 것은 내 아내가 세월이 지나며 잘 늙어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나의 아내는 예쁜 여자도 아니었고, 멋있는 여자도 아니며, 아름다운 여인도 아니지만, 지금 나의 눈에는 잘 늙어가고 있는 한 여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