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3일(주일) 오전예배
말씀 : 마태복음 23:1~12
제목 : 섬기는 그리스도인이 되라!
도입 : 바리새인들과 논쟁 후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예수님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논쟁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제자들에게 바른 신앙을 가르치셨습니다. 그 신앙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신앙을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신앙은 외식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는 정직한 신앙, 진실된 신앙, 헌신된 신앙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주님의 제자는 어떤 삶을 사는지 주님이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은 외식하는 자와 대조되게 참된 성도는 어떻게 살아가는지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바리새파 사람들을 말합니다. 바리새파는 스스로 구별된다는 신앙을 가지고 자기들이 가장 훌륭한 신앙을 가졌다고 여겼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수백 년 전에 실제로는 훌륭한 성도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그들이 타락하여 외식된 신앙을 하게 된 것입니다. 헬라제국 시대에 그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죽어도 우상숭배를 하지 않고 하나님만 섬기려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다고 하여 바리새인이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바리새인이라는 뜻이 ‘구별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서기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필사하던 사람들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기록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오히려 부패하여 외식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당부하시기를 그런 외식하는 자들의 신앙을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성도가 되라는 것입니다. 아멘
첫째, 외식하는 성도가 되지 말라!
23:2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율법 말씀을 전한 지도자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전한 자입니다.
즉 종교지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백성들의 지도자가 되어 백성들을 인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종교적 의식을 하고 성전을 관리하고 성도들을 지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최전선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실상 그들이 부패하고 타락했다는 뜻입니다.
물론 당시에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아 사회지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을의 장로가 교회의 장로입니다. 사회공동체가 종교공동체였습니다. 그래서 마을에서 사회에서 지도자이면 교회에서 지도자인 것입니다. 사회의 지도자인 그들이 부패하였다는 것입니다.
지도자의 부패가 사회에서 제일 문제이기도 합니다. 지도자의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도자가 타락하면 엄청난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매우 조심을 해야 합니다.
그들의 문제가 무엇인가? 주님이 그들의 잘못된 신앙을 말씀하셨습니다.
1) 외식된 신앙은 행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3절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지적하신 그들의 문제는 그들이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사회에서 정의를 행하고 올바른 삶을 살아야 될 것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말과 행함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외식입니다. 외식이라는 말은 겉으로 보이는 신앙을 말합니다. 속은 그렇지 않은데 겉으로 보이기만 번지르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신앙을 제일 싫어하십니다.
우리 성도는 겉과 속이 같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말과 행동이 같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말은 그런 듯하게 하는데 실제로 행동은 전혀 딴 판이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므로 우리 성도는 정직한 믿음생활을 해야 합니다.
물론 사람이 다 나약합니다. 완벽하지도 않습니다. 실수도 많이 하고 때로는 범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늘 회개하고 또 부족한 것을 매꾸어 나가며 신실한 삶을 살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신앙성장도 있고 열매도 맺게 되는 것입니다. 아멘
그들을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4절에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무거운 짐을 지고 가게 만듭니다. 즉 그들은 모세가 전해준 율법에다 6백 여가지의 규칙을 정하여 엄격하게 지킬 것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본이 되어야 합니다. 말이 본이 되어야 하지만 행함이 본이 되어야 합니다. 믿는 대로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믿는다고 말은 하는데 행함이 없으면 그것은 죽은 믿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야고보서에서는 영혼 없는 사람이 죽은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했습니다. 정말 살아 있는 믿음은 행함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아멘
2) 외식하는 신앙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합니다.
외식하는 자의 신앙의 특징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선행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도적으로 하는 행동입니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의 행동을 모두 감출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은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그들은 이미 상을 받았기 때문에 하늘의 상급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5절에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경문 띠를 넓게 한다는 것입니다. 경문은 모세가 가르친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양피지에 적어서 통에 넣어 이마나 손목에 달고 다녔습니다. 처음에 그들이 이 말씀이 들은 통을 매고 다닐 때는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자 하여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퇴색하여 그들의 본 뜻은 온데간데 없고 그 경문을 차는 띠를 넓게 하여 잘 보이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볼 때 와 하나님의 말씀을 아주 가까이 모시는 사람인가보다 하고 보이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없고 사람들이 경건하게 봐주니 그 때문에 차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옷술을 길게 한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옷자락 겉에 실로 매듭을 하여 길게 달도록 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옷을 품위 입고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마치 제사장의 옷이 화려하게 입듯이 경건한 사람들의 옷은 옷술을 달았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마음이 방종하여 죄악으로 빠지지 않고 경건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바르게 살아가며 품위를 지키기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하나님을 경건하게 섬기는 마음은 없고 사람들에게 내가 이렇게 경건한 사람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 옷술을 길게 매달고 다니는 것입니다. 이것이 외식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신앙을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에게 보이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눈동자같이 우리를 아끼시며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아멘
3) 외식하는 신앙은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합니다.
외식하는 자의 신앙은 사람들 앞에 높임을 받으려고 합니다. 높은 자리에 앉아 상석을 차지합니다. 6절에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라고 했습니다. 사회에서 큰 행사가 있으면 그 배석된 자리에서 상석에 앉으려고 합니다. 오늘날에도 어떤 행사에 자리를 미리 잘 정하여야 합니다. 만일 자리 잘못 정하면 큰 실례를 하게 됩니다. 그 위치가 다 정해져 있습니다.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앉고자 사람들은 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교회에서도 그런 일이 있습니다.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하고 높은 직을 차지하려고 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직분자 투표를 하면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직분자를 세우려 하는 것은 주의 일꾼을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신앙과 인품과 지도력과 헌신하는 것이 제대로 된 자를 뽑아서 직분을 주어서 주의 일을 하게 해야 됩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 주를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은 별로 없고 그 직을 받기 위해 애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직을 받지 못하면 서운해서 심지어 교회를 떠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7절에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시장에 많은 사람들에게 인사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높여주기를 좋아합니다.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랍비라 칭함을 받기를 좋아합니다. ‘랍비’는 ‘스승’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스승으로 여김받기를 좋아합니다. 그 때에는 사회의 스승이 교회의 스승이었습니다. 그들은 높임받기를 좋아해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8절에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선생으로 존경받는 것을 좋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다 형제처럼 행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다 형제입니다. 영적인 형제입니다. 그래서 남자를 부를 때 ‘형제님’이라 부르고 자매를 부를 때 ‘자매님’이라고 부릅니다. 목사도 청년을 부를 때 ‘형제님’이라로 잘 부릅니다.
9절에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땅에 아버지로 부름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가정에서의 부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위대한 사람을 부를 때 민족의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교회에서 아버지라 부름을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 한 분 뿐입니다. 아멘
10절에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라고 했습니다. 스스로 지도자로 높임을 받으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참된 지도자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교회의 목회자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이고 그리스도를 성도들에게 전하는 자이며 성도는 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입니다. 교회의 직분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직분자로 세운 이유는 그리스도를 높이고 그리스도를 따르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멘
오늘날 우리의 신앙도 잘 점검을 해보야 합니다. 나는 외식하는 자의 신앙과 다르다고 할 수 있는가?
예화)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가 한 말 중에 위대한 말이 있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 그런데 대게 사람들은 자신을 잘 모릅니다. 다른 사람을 보는 것은 잘하는데 자기 자신은 잘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요즘 테니스를 치면서 자세를 많이 수정을 합니다. 잘 치는 고급 회원들이 자세를 바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듣기는 들었는데 좀처럼 수정이 잘 안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습관대로 굳은 행동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공을 잘 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잘 모르고 다른 사람의 폼을 보면 눈에 띕니다. 이것이 잘 되었고 저 품이 잘 못 되었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정작 자리 폼은 잘 모릅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지 않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잘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다른 사람이 나를 보면 문제점이 많이 보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자기 자신은 잘 모른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거울을 보면 우리의 얼굴에 검정이 묻었는지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신앙적으로 보면 성경을 보면 우리 자신의 검정을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아 잘 못된 점이 있으면 고쳐야 합니다. 아멘
둘째, 헌신된 성도로, 섬기는 자가 되라!
그러면 참된 성도는 어떤 성도인가? 우리 주님이 가르쳐주셨습니다. 헌신된 성도, 참된 성도는 섬기는 자가 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11절에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너희 중에 큰 자는’ 이 말씀은 주의 제자들을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예수 믿는 성도들입니다. 우리 중 큰 자, 큰 자는 믿음이 앞서거나 큰 믿음을 가진 자를 말합니다. 교회로 치면 중직자와 같이 앞선 자를 말합니다.
이들은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섬긴다는 것은 원래 종들이 하는 것입니다. 종이 주인을 섬기듯이 헌신하는 것을 섬긴다고 합니다. 그런데 큰 자가 오히려 작은 자를 섬기라고 했습니다.
원어에는 ‘디아코노스’입니다. 이 말은 ‘봉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원래 이 말의 유래는 종이 앞치마를 하고 주인을 섬기는 일을 말합니다. 교회에의 봉사자는 주님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영어로 하면 ‘디컨’ 우리나라 말로 ‘집사입니다. 교회의 집사는 섬기는 자들입니다.
성경예화)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
예수님이 공생애 마지막 때에 성찬식을 행하신 후에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 때에는 제자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위대한 스승이신 주님이 제자들이 발을 씻기시니 당시 사회풍습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처음에 절대로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가르치신 대로 주님이 다 제자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교훈하셨습니다. 스승이 된 내가 너희의 발을 씻긴 것처럼 너희도 서로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교회 역시 오래된 성도가 먼저 섬깁니다. 교회의 직분자가 먼저 섬깁니다. 차량운행도 하고 청소도 하고 밥도 하고 섬깁니다. 왜 그렇게 하겠습니까? 주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멘 마치 부모가 자녀들을 위해 헌신을 하듯이 교회는 직분자가 새가족을 위해 봉사를 하는 것입니다. 아멘
12절에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서로 높아지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높아지려고 하는 자는 오히려 낮아지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종이 되고 섬기는 자가 되면 높임을 받게 됩니다.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을 하면 존경을 받듯이 섬기고 희생하는 자가 귀중하게 여김을 받습니다. 교회는 그런 곳입니다. 교회는 서로 섬기는 자가 되는 공동체입니다. 아멘
우리 주님은 본체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이 되셔서 낮아져 오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희생시키고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마지막까지 주님은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셔서 섬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아멘
결론) 참된 성도가 되라!
참된 성도는 어떤 성도인가? 주님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먼저는 외식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자는 거짓된 사람들입니다. 속과 겉이 다른 자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사람들 보기에는 거창하고 화려합니다.
반대로 참된 성도는 하나님 앞에 진실된 성도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헌신하고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주님을 따르는 자의 자세입니다. 주님의 제자는 주님을 따르는 자입니다. 주님처럼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신앙의 갈 길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