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먹고 사는 여자
서른 다섯. 결코 작은 나이는 아니다. 해가 뜨고, 해가 지고, 달이 뜨고, 달이 지고, 꽃이 피고, 꽃이 지고…… 그녀가 서른다섯 해를 살아오는 동안에도 서른 다섯 번의 새해가 찾아 왔고, 140번의 계절이 바뀌었다. 한때 그녀에게도 최신 컬러 립스틱을 바르고 친구들과 대학교정을 거닐며 커피를 마시던 시절이 있었으리니. 커피를 마시고, 동그란 입술 모양으로 종이컵 가장자리에 번진 립스틱을 보며 '어머, 좀 조심했어야 했는데'라며 입술을 오물거리던 이십대가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한번쯤 픽 웃고 지나칠 수 있는 일들이지만, 번진 립스틱 자국을 보며 조심했어야 했다는 후회는 지금 그녀의 일상 위에 그저 둥둥 떠있다. 세탁을 마친 세탁기에 안에 한웅큼 세제를 다시 넣었을 때처럼 말이다.
가늘게 한숨이 세어 나왔다. 질긴 고무풍선 바람 빠지듯 늘어지는 한숨 대신 탄식 섞인 숨소리는 힘주어 한번에 끝내야 한다. 휴우. 어쩐담. 내가 왜 이러지. 주절주절 했던 말을 또다시 반복하는 어리석음은 힘주어 내쉰 한숨에 묻어 버리기로 했다. 다시 세탁기 동작 스위치에 명령을 주고 쇼파 가장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예전엔 그녀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아기자기한 소궁전과도 같았는데…… 어제 달다 만 오렌지빛 커튼이 균형을 잃고 한켠으로 쓰러져 있었다.
'참, 또 깜빡했네.'
온통 분주하기만 했던 시간이 금세 지나갔다. 지윤이 올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웬만한 또래보다 훨씬 어른스럽고 커보이는 지윤은 언제고 품안 가득 안고 싶은 9살짜리 딸이다. 물론 동생인 지훈이가 있긴 하지만, 연년생이라 그런지 두 아이가 크는 동안 아이의 뒷바라지에 그녀는 허리가 휘청거렸다. 유독 병치레가 많았던 딸에 비해 엄마의 관심이 조금 덜했어도 지훈은 탈없이 씩씩하게 자라주었다. 그래서일까. 그녀가 가지는 지윤에 대한 사랑은 남달랐다. 결혼 승낙은 커녕 양가에 교제 사실도 알리지 않았기에 남산만한 배를 앞세우고 인사를 간 시댁에서는 그녀를 탐탁케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똑똑하고, 티없이 맑은 그녀의 모습에 시아버지의 허락은 의외로 쉽게 떨어졌다. 그와는 신입생 환영회 때 처음 만나 3년을 사랑이란 묘약에 취해 지냈었다. 복학생이었던 그는 다른 사람들이 가지지 못하는 무던한 용기와 줏대가 있어 보였고, 진한 눈썹에 커다란 눈망울은 그녀의 맘을 설레게 만드는데 충분했었다. 장래에 대한 비전과 가정환경, 가치관을 파악하기에 23살이라는 그녀의 나이는 너무…… 어렸었다.
- 엄마, 나 왔어.
- 어, 지윤이 왔니? 엄마 막 마중 나가려던 참이었는데.
- 엄마 또 시간 잊었잖아.
떨어진 커튼을 달기 위해 분주해 하던 그녀를 뒤로 지윤이 들어왔다. 그리고, 질타 아닌 질타를 하고 있다. 자신이 돌아올 시간을 잊고 나오지 못한 엄마에게.
- 간식거리라도 줄까?
- 우유 한잔 줘. 엄마.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미술학원에 갈 준비를 하는 지윤이 분주하게 준비물을 챙기며 말했다. 그녀의 재능을 닮아서인지 학교를 가기 시작하자 지윤이는 제일 먼저 미술학원에 등록하겠다고 말했고, 못마땅해하는 남편의 말투를 애써 막으며 그녀가 미술학원에 등록을 해 주었다. 잠시 식탁 옆에 두었던 커튼을 집어 든 그녀가 분주히 커튼 핀을 꽂아 댔다. 까만 미술학원 가방을 들고 나온 지윤이 그녀 앞에 우뚝 섰다.
- 우유는?
- 어, 맞다. 우유. 금방 줄께.
- 엄마 왜이래. 정말 짜증나 죽겠어. 갈래.
긴 생머리를 나풀대며 새침스레 돌아서는 지윤을 쫒아 기어이 200미리 우유팩 하나를 건네주었다. 급히 닫히는 엘리베이터를 돌아서 그녀가 긴 복도를 걸어왔다. 지난번 야시장에서 산 2000원짜리 꽃무늬 슬리퍼 한짝과 남편의 고동색 고무 슬리퍼가 뚜벅거리며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처음엔 그저 산후 건망증으로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훈을 낳은지 벌써 7여년이나 지났다. 영아였던 두 아이를 키우는 동안에는 느끼지 못했지만,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그녀의 그 건망증은 정도가 심해져 가고 있었다. 항상 탁자에 놓여있는 무선전화기는 벌써 세 번째 새것으로 사온 것이다. 물론 남편이나 아이들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세월을 좀먹는 병마 아닌 병마는 남편과 아이들에게서 그녀를 멀찌감치 떼어 놓고 있었다. 잊어 버리기가 일쑤니 남편이고, 특히 지윤이 좋아할 리가 없었다. 외모나 재능은 그녀를 닮은 듯 해도 어투나 말할 때 입을 씰룩거리는 모양은 아빠를 빼닮았다. 그래서 가끔 그녀의 눈에 지윤이 무서워 보일때가 있다. 짐짓 화가 난 듯 훽하니 돌아설 때면 자신도 모르게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오는 것이었다.
가족들이 불편을 느끼는 정도이긴 해도 건망증으로 생겨난 일들에 대해 가만히 혼자 생각하고 있노라면 말벗 하나 해주지 않는 집안에서 그녀는 피식 피식 웃곤 했다. 그나마 다정다감하게 말을 걸어오는 살가운 지훈이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까지는……
딸이 튀듯이 뛰어나간 현관 앞에 서서 그 수명을 다해가는 그날의 햇살에 몸을 맡겼다. 눈동자에 가득 차 오르는 그의 손길, 그 부드러움. 생이 끝나는 날까지 그저 함께 할 수 있어도 그 얼마나 서로의 사랑에 대한 위대한 가치인가. 하던 그의 말투.
하지만, 엷은 조소를 띄며 퉁명스레 말을 내뱉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 당신 정말 미쳐가는 거야? 왜그래. 사람이…… 아침부터 정말 짜증나는군. 쯧.
깜빡 잊고 속옷 빨래 삶은 통에 와이셔츠를 넣었다는 그녀의 웃음 섞인 말에 그는 그렇게 답해 주었다.
더 이상 말을 섞기 싫다는 듯 혀를 차는 소리가 그가 출근한 아침부터 해 넘어가는 오후시간까지 그녀의 가슴속에 메아리치고 있었다. 쯧. 쯧. 쯧.
- 엄마.
장난스레 그녀의 허리를 감싸는 지훈이었다. 23살 그녀가 보았던 그의 짙은 눈썹과 큰 눈망울로 서글서글하게 그녀 앞에서 웃고 있었다.
- 우리 아들 왔네. 오늘은 학원 안 갔어?
잠깐 아주 잠깐이긴 해도 지훈의 얼굴에 망설이는 기색이 스쳐갔다. 그녀는 이미 알아 버렸다. 참, 아니지.
- 참, 엄마두…… 이번 주에 학원 끝났잖아요. 기억 안나요?
이런 지훈의 표정에 그녀는 미치도록 눈물이 차올랐다. 처음부터 학원이라고는 다닌 적이 없는 아들이 학원이 끝났다며 엄마의 실수를 감싸 안는다. 말하고 나서야 기억이 났지만, 지훈에게 학원 안갔냐고 물어본 기억이 대여섯번은 더 되는 것 같았다.
이유야 어찌됐건 원인은 단순히 지훈 때문이 아니었다. 하지만, 남편은 줄곧 그녀의 이런 건망증이 지훈에게서 비롯되었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지훈이 초등학생이 되도록 부자간에 목욕탕 한번 가는 일이 없었다. 아들이 없는 집에서는 참 부러워하는 광경임에도 그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줄곧 지윤을 데리고 다녔다. 단연 지훈은 그녀와 여탕을 다녀야 했다. 하지만, 어른스러운건지 태어날 때부터 아빠에게 받은 눈치 때문인지 불평 한마디하지 않았다. 가끔 그녀가 생각해보면 지훈이 꼭 자신의 남동생이나 친구 같다는 생각이 문득 문득 들때도 있었다.
지윤을 3시간만에 자연분만으로 출산한 것에 비해 지훈은 17시간 산통 끝에 결국 재왕절개를 거쳐 태어났다. 그때도 딸은 병치레 중이었고, 지훈을 낳고 산후 회복이 쉽지 않았던 그녀가 병원에 누워 있는 동안 그는 장기 휴가까지 내고 지윤을 키웠다. 아들이라고 좋아하는 다른 산모의 남편들과는 달리 아이를 보는 그의 표정은 병원을 찾는 내내 시큰둥했다. 이틀 만에 아이를 처음 안아보며 그가 불만 섞인 투로 한마디 던졌다.
- 지 엄마 잡아 먹을 뻔 한 놈이라 그런지 엄마랑 쏙 빼닮았네. 넌 아프지나 말아라.
면회시간 단 10분을 다 채우지 않고, 소아과에 잠시 데려다 놓았던 지윤을 데리고 그는 집으로 가 버렸다. 그날은 그녀가 결혼하고 10여년의 세월을 살면서 가장 많이 울었던 날로 기억이 되는 날이었다. 그는 아직도 지훈을 낳을 때 했던 전신마취에 대해 걸고 넘어지고 있었다. 마취를 하면 사람이 멍해지고, 기억세포가 마구마구 죽는다는 것이 그의 이론이다. 듣다 듣다 이제는 거의 외울 정도가 되어 버린 그의 기억세포 강의에 그녀는 넌더리가 나고 있었다. 며칠 전에도 신경과를 찾았지만, 간단히 주는 약 몇봉지와 긴장과 스트레스를 풀고 즐거운 생활을 영위하라는 말들 뿐이었다. 어쩔수가 없다. 그녀가 그저 그녀인 것처럼 이젠 자신의 일부로 받아 들여 살아가는 수 밖에……
모처럼 그가 일찍 퇴근을 해 들어왔다. 학원이 끝나자마자 들어온 지윤은 숙제를 위해 방안에 틀어 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느 때처럼 엄마를 거들어 준다며 지훈이 식탁 주변을 서성대고 있었다. 그 역시 쇼파에 앉아 신문을 펼쳐든 채 한순간의 미동도 허락하지 않은채 신문 읽기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평소에도 그렇지만, 식탁에서도 대화는 거의 없었다. 그가 말수가 적기 때문이라 생각이 들다가도 캠퍼스에서의 그의 모습에 대해 기억을 더듬어 보면 그녀는 괜시리 서글퍼졌다. 얼마나 화통하고, 시원시원한 그였던가. 무엇이 그토록 그를 침묵케 한 것인지 그녀의 마음이 어지럽다.
- 빨리 나와. 당신 아직 준비 안됐어?
그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앙칼지게 변해가고 있었다. 모자를 썼다가 아까 꺼내둔 스타킹을 찾지 못한 그녀가 허둥대기 시작했다. 대답은 진작 해두었는데, 꺼내둔 스타킹을 찾기 전까지 방문을 나설 수가 없다. 그의 재촉이 계속되자, 스타킹을 포기한 그녀가 맨발로 방문을 나섰다. 곱게 접어둔 스타킹이 화장대 위에서 목을 빼고 앉아 있었다.
모처럼 휴일인데 피크닉이나 산책을 가기에 좋은 날씨였지만, 며칠 전 병원에 입원한 시이모님을 뵙기 위해 온가족이 동원되었다. 그녀에게 좀 모진 남편이긴 해도 시댁이나 친정 어느 쪽에도 소홀히 하지 않는 그였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그런 면에 있어서 그는 가정생활을 하는데 있어 50%는 충분히 자격을 갖추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병원에 들어서자마자 담당주치의를 만나러간 그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녀에게 오라는 손짓을 했다. 어디서 본 사람이던가. 하얀색 까운이 잘 어울리는 호남형의 남자가 그녀를 향해 활짝 웃는가 싶더니 꾸벅 인사를 했다.
- 당신…… 기억나지? 내 후배. 정호식.
- 네?! 네. 기억 나죠. 호식씨. 지윤이 아빠랑 같은 동아리……
- 저기, 여보. 지훈이 기다리는 것 같네. 곧 병실로 갈께.
보이진 않았지만, 그의 표정은 엉망으로 일그러져 있을게 분명했다. 단번에 형수님이라며 집으로 놀러가도 되냐고 묻는 그 후배를 뒤로 하얀 복도를 걸어 지훈에게로 걸었다.
난소암 수술을 받은 어른은 다행히 수술경과가 좋다며 밝은 표정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분의 미소에서도 느끼는 것이지만, 근래 들어 부쩍 그의 환한 미소가 그리웠다.
- 당신 정말 왜 그래?
한산한 복도에서 자판기 커피를 뽑아든 그가 핀잔 섞인 불만조로 말을 꺼냈다.
- ……
그의 따지는 듯한 말투에 그녀는 다시 말문이 막혔다. 어쨌든 실수는 그녀가 먼저 했을테고 실수에 대한 만회를 위해서라도 내가 뭘? 이라고 사납게 따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 정호식이 몰라?
대답을 기다리는 듯 애써 억양을 내리는 그에게 무슨 말이든 해줘야 했다.
- 사실 잘 모르겠는데……
- 바보같이. 우리과 입학했다가 관두고 의대 간 후배잖아. 기억 안나? 나중에 우리 아이 낳으면 탯줄 끊어 준다고 말하던 녀석. 아직도 기억 안나?
아, 비로소 기억이 나기 시작했다. 그와 무척이나 우애가 깊었던 친구같은 후배로 지윤을 가져 불룩한 배로 결혼식장을 걸어 들어가야 하는 그녀 앞에서 긴장을 풀어준답시고 허접한 농담으로 그녀를 웃게 만들어 줬던 그의 후배였다.
- 잘 모르겠어요. 난.
- 어이구. 관둬.
그가 신경질적으로 자판기 옆 의자에 노란 봉투하나를 던져놓고 서둘러 병실로 들어갔다.
그렇게 열을 내며 바락바락 기억을 상기시켜주려는 그의 앞에서 아, 기억났어요. 하며 아는 척을 하기가 싫어졌다. 보나마나 그는 '그래도 아주 바보는 아닌 모양이군.'하며 조소를 날릴게 분명하니깐. 그가 던져놓은 봉투를 꺼내 들었다. 깜빡 잊고 있던 여성 질환 검사 일정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병원에서 연락이 온건 거의 3주가 지나서였다. 1주일후면 바로 결과가 나올거라 사무적으로 대답하던 간호사의 말과는 달리 전화통보가 불가능하니, 직접 방문을 요청하는 전화였다. 병원에 다녀온 이후 메모하는 습관을 하려 노력중인 그녀는 황급히 냉장고에 붙혀둔 메모판에 오후3시 xx병원 산부인과라고 적어 두었다. 아직 2시간이나 여유가 있어서였다.
계절이 바뀌는 것을 항거하며 증명이라도 하듯 햇살이 알맞게 농익어 가고 있었다. 오랜만에 스카프까지 메고 외출하는 그녀의 기분은 하늘을 날 듯 조금은 들떠 있었다. 별도의 대기절차 없이 정호식이라 적힌 Dr. RM 앞에 섰다. 약간의 미소를 띠며 앉아 있는 그는 지난번에 기억해 내지 못했던 그의 후배 정호식 이었다.
- 결과 보러 오셨죠? 형수님.
푸웃 하고 웃음을 터트릴 뻔 했다. 그와 결혼해 살면서 그토록 살갑게 형수님이라 불러주는 후배나 동료들이 없었기에 그녀는 은근히 좋아진 기분 탓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별로 걱정 하실 건 없겠는데요.
찬찬히 그의 얼굴을 살펴보니, 미소를 지으려 애쓰려는 모양세가 영 안쓰럽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저 선배의 부인으로 온 자신에 대한 반가움에 짓는 미소만은 아니라는 걸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 어디가 안 좋은가요?
하마터면 난 서른 다섯이예요. 라고 말할 뻔 했다. 시이모님은 이미 연세가 50이 넘으신 분이셨다.
- 생리통이 심했다거나 비정상적인 출혈이 있었다거나 하는 일 없었어요? 많이 아프셨을텐데, 이정도면……
- 그래서 지금 뭐예요?
완전히 웃음을 잃은 그녀의 얼굴에 가늘게 경련이 일어났다.
- 아직 확실한 건 아니거든요. 그래서……
- 그냥 말해요. 그냥. 뭐예요.
덤덤히 말하는 그녀 앞에 늘 차갑게 내리치던 그의 말만큼이나 싸늘한 문장이 쏟아졌다.
- 정말 아프다거나 출혈이 있다거나 하지는 않았나요?
- 잘 모르겠어요. 아마 잊고 있었을 거예요.
집까지 데려다 준다며 까운을 벗어 던지는 호식을 뒤로 그녀가 천천히 방을 걸어 나왔다. 막상 그 큰 병원문을 나서고도 갈 곳을 찾지 못한 그녀 앞에 소형차 한대가 멈춰섰다. 호식이 손짓을 보내고 있었다. 조수석에 올라탄 그녀가 얼어 있는 동안 호식이 멀찌감치 간격을 두고 안전벨트를 둘러메 주었다.
호식이 차를 멈춘 건 가까운 공원 분수대 앞이었다. 그녀가 먼저 차문을 열고 내렸다. 천천히 안전밸트를 풀고 그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내렸다.
- 난 서른 다섯이에요.
- 형수님!
- 이렇게 젊은데? 그리고, 이렇게 잘 걷고, 잘 뛰는 걸?
반항이라도 하듯 그녀가 두 손을 으쓱해 보이고는 그의 앞을 몇 발자국 걷더니 제자리에서 몇 번을 뛰어 보였다.
- 드물긴 해도…… 일찍 출산을 경험한 여성분들은 주기적으로 검사를 해줘야 하거든요.
- 잊고 있었어요.
세상 가운데 세워진 법칙 그대로 사실만을 말하는 의사 앞에서 잊었다는 말 한마디가 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의 전부였다.
헝클어진 실타래가 매듭에 매듭을 거듭해 더 이상 풀어낼 수 없을 정도로 엉켜버린 듯 그녀의 일상 자체가 엉망으로 엉켜버리는 것 같았다. 검사결과가 담긴 노란 봉투를 꺼내들었다. 빠른 시일 내 수술 날짜를 잡자던 호식의 얼굴이 떠올랐다.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왜 하필이면 나야? 그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이면…….
며칠째 달다 만 커튼이 엷게 먼지를 뒤집어 썼고, 아무렇게나 놓아둔 커튼 핀에 지훈의 발이 여러번 찔렸다. 그녀의 어수선함에 여전히 남편은 신경질적이었고, 지윤은 더 이상 그녀에게 우유 달라는 부탁도 하지 않았다. 일단 그녀는 남편에게 알리지 말 것을 신신당부했다. 더 이상의 질책, 질타는 싫었다. 바보같이…… 그런 걸 잊고 살수가 있나? 당신 정말 정신적으로 문제가 심각한거 아냐? 가슴 한가운데를 갈라 놓을 듯한 그의 냉랭한 눈빛이 금세 그녀의 고개를 떨구어 놓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는둥 마는둥 거실 청소가 끝나자 그녀가 그의 회사로 전화를 걸었다. 사무적인 어조의 그가 그녀인 것을 알자 외마디로 반문을 했다.
- 왜?
- 오늘 저녁에 시간 되겠어요?
- 갑자기 무슨 일이야?
의외라는 그의 목소리는 예상 외로 그렇게 차갑지 않았다.
- 우리 저녁 먹으러 가요.
그래도 그와 데이트를 즐기던 때엔 제법 그의 팔에 매달려 이것 저것 사달라고 애교를 부리던 기억이 떠올랐다. 좀더 성의있게 좀더 그가 마음으로 예전의 그녀를 느낄 수 있게……
기대감 없이 신청한 그와의 저녁식사가 약속을 만들어냈다. 몇 년에 만에 가져보는 데이트지? 그녀의 손길이 바빠졌다.
그가 말한 레스토랑은 일반 경양식집 치고는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를 하고 있었다. 시집올때 그가 해주었던 진주목걸이를 걸고, 까만 투피스를 차려 입었다. 잘 닦여진 거리의 쇼인도 속에서는 자신의 모습이 낯선 듯 머쓱해 하는 여자가 이리저리 거울삼아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고 있었다.
먼저 온 그가 앉아 있었다. 번뜩이는 금테안경을 끼고, 송글송글 물방울이 맺힌 물잔을 가볍게 잡아 올리며 물을 마시고 있었다.
- 일찍 왔네요.
일부러라도 더 크게 더 환하게 웃어 보이고 싶었다. 여전히 표정이 없는 그가 대답대신 앉으라며 눈짓을 보냈다.
- 무슨 바람이 분거야?
시비조는 아닌 것 같았다. 가끔 이렇게 엉뚱하게 주문을 할때면 그는 항상 시비조로 싸움을 걸곤 했다. 물론 훅 한방 날리지 못하고, 늘상 그녀가 KO패를 당하긴 하지만…….
그는 평소 그녀가 노래를 부르다시피 하던 랍스터 정식 코스를 주문해 주었다. 물론 그녀가 데롱데롱 목에 메달려 졸라댄건 아니었다. 평소 모습이 좀 다르긴 했어도 그 냉랭한 표정 만큼은 바뀌지 않았다.
- 당신 웬일인지 물어봐도 되요?
한입에 들어갈 정도의 하얀 속살을 포크로 집으며 그녀가 눈을 들었다.
- 오늘 호식이한테 전화가 왔더라구.
쿵. 그녀의 가슴이 와장창 내려앉았다. 뭐야.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는데, 그에게 전화를 해댄거야. 비열한 자식. 자기 일 아니라고 이렇게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 수 있나.
- 당신 ! 그것도 병이래.
그녀가 쨍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나이프를 집으려 의자 밑으로 허리를 숙였다.
- 그냥 놔둬. 여기 나이프 하나 더 주세요.
그가 접시에 눈을 박은 채 큰소리로 주문을 했다. 그녀는 자꾸 눈앞이 흐려졌다. 눈물이 나려는 것 같기도 하고, 정신을 잃으려는 것 같기도 했다. 이제 그의 입에서 떨어질 얼음장 같은 문장들과 조소 띤 얼굴을 봐야만 할 것 이다.
- 호식이 녀석 말이야. 내가 당신 건망증 얘기를 했더니 치료에 도움이 된다며 메일로 자료를 넣어주지 뭐야. 마침 오후에 있던 미팅이 취소되는 바람에 찬찬히 읽어 봤는데……
웨이터가 무디긴 해도 조명에 번뜩이는 나이프 하나를 접시 옆에 놓아 주었다. 학교 운동장 한켠을 우두커니 지켜주는 무슨 무슨 위인의 동상처럼 표정없는 얼굴의 그녀가 포크와 나이프를 잡고 접시로 손을 옮겨 놓았다.
그는 아직 모르고 있다.
분명 싱싱하고, 부드러운 소스로 만들었을 바닷가재 요리가 그녀의 목구멍을 단번에 막아 놓았다. 아무리 씹고 넘기려 해도 넘어가지가 않았다. 그가 주절주절 두서없는 말을 꺼내 놓았다.
- 나도 그렇고, 애들도 그렇고. 당신한테 좀 소홀히 했던 건 사실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구. 이런 얘기 하는 것도 좀 우스운 것 같다. 그래도 당신이랑 8년을 부부로 살았는데 말이야. 어쨌든 나도 신경 쓸께.
오랜만에 그가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전히 접시에 음식을 썰며 먹는데 열중했지만, 세상 가운데 세워진 불변의 법칙을 설명했을 호식으로 인해 그가 웃음을 보였다.
그걸 이제야 알았어요? 좀 빨리 깨닫지 그랬어요.
가슴 속에서 길게 메아리치던 말들이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파장을 일으키고 있었다.
자리에 앉은 그녀에게 처음으로 눈을 맞춘 그가 대수롭지 않은 듯 물어 왔다.
- 저번에 한 검사. 결과는 나왔어?
- 아니. 아직…….
그가 싱긋 웃으며, 와인잔을 눈높이로 들어 보였다. 대답이라도 하듯 잔을 들어 주었다.
그가 계산을 하는 동안 그녀는 화장실 거울 앞에 서 있었다. 번들거리는 얼굴에 꼼꼼이 파우더를 발랐다. 잊지 말아야지. 내 가방, 내 파우더, 내 손수건…… 그와의 저녁식사 후 그녀는 잃지 않아야 하는 것에 대한 집착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앞에 그가 서있었다. 부드러운 인상. 그가 그 도톰한 입술만 실룩대지 않는다면 호남형의 얼굴에 전혀 손색이 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살짝 웃어 보였다.
딩동. 종소리가 나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가 먼저 올라타고 열림 단추를 꾹 누르고 있었다. 어서 타라는 듯 눈짓을 보내는 그의 앞에서 잠시 머뭇하던 그녀가 까만 세미구두를 벗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 지윤아, 너 정말 왜 이러니.
그녀의 어깨를 잡아 흔들며 말하는 그의 목소리엔 한숨과 원망스러움이 가득 묻어 있었다.
- 난…….
무더운 여름 한순간에 후두둑 떨어지는 소낙비처럼 그녀의 눈가에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일으키던 그 물빛 파장은 그쳐지지 않았다. 조용히 엘리베이터를 내린 그가 곱게 신발을 가져와 그녀의 발 밑에 내밀었다.
- 신자.
굳어버린 석고처럼 경직된 그녀의 발등을 그가 잡아 올렸고, 평범한 정장차림의 여자로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줄곧 차를 타고 가는 동안 그들은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아니, 그 어색한 침묵을 깨보려 그는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건망증은 그저 기억의 실수라는 둥, 앞으로 서로 많이 신경을 써야 한다는 둥. 이야기 끝에 그가 학교에 가보겠냐고 물어왔다. 교문을 들어서도불이 켜진 곳이라는 그가 거의 매일을 코를 박고 지내던 도서관뿐일 것이다. 그녀가 종이컵에 묻힌 립스틱 자국을 보며 수다를 떨어대던 잔디밭도 그와 만나 일상을 얘기하던 연못앞 벤취도 모두 어둠 속에 잠겨 있을 것이다.
잠시 창밖만 바라보던 그녀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볕이 따가웠다. 아파트 앞 도로에는 학원차들이 즐비하게 서있었다. 학교 통학버스 같이 제 시간, 제 때 주차를 해두고 아이들이 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쩜 학교가는 것보다 더 철저한 시간개념을 심어주는 본보기가 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이들 돌아올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들 앞에 서기 위해 오후 3시면 즐비한 학원차들 틈에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올 아이들을 기다렸다.
- 엄마.
변함없는 아들 목소리. 지난 주말에 아빠와 함께 외출을 하고 돌아온 두 아이들은 한층 밝아진 표정으로 그녀를 맞아주었다. 그가 어떤 말로 아이들을 설득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할 만큼 그녀의 머릿속은 비어 있지 않았다.
- 오늘은 일찍 오네.
- 우리 기다린거야. 엄마? 엄마 집에 먹을 거 있어?
여전히 시선은 제대로 맞추지 않았지만, 밝아진 지윤의 목소리에 덩달아 신이 났다.
- 엄마가 사과파이 해놨어. 가자. 가방 엄마한테 주고.
소라색, 하늘색의 작은 가방이 양손에 들여졌다. 타닥타닥 신발소리를 내며 아이들이 앞서 뛰어갔다. 저 소리를 앞으로도 들을 수 있어야 할텐데……. 앞길이 구만리 같은 서른 다섯 이후의 삶을 살아갈 희망이 될텐데…….
아이들이 사과파이를 먹는 사이 그녀가 호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확히 열흘 후. 흔적 없이 불어나는 두려움의 바다를 건너야 한다. 빠져들지 않고 견디기만 해도 탁탁 소리를 내며 뛰어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다시 볼 수 있으리라. 하루 하루 그녀는 그렇게 자신을 위로해 주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의 일 이후 그는 의도적이리만큼 그녀에게 친절해졌다. 그가 인사치레로 건네는 출,퇴근 인사도 잘 익은 모닝빵처럼 말랑말랑해졌다. 모처럼 그가 집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날씨도 찌부둥 한 것이 매콤한 아귀찜이 먹고 싶다고 했다. 서둘러 나갈 채비를 하며 그녀가 냉장고 메모란에 기억나는 대로 적어대기 시작했다. 아귀 2마리, 대파 1단, 양파 1망, 마늘…… 지갑을 챙겨들고 나가려던 그녀가 메모해둔 쪽지와 장바구니를 옆구리에 끼고 현관을 나섰다.
웬일인지 시장에 나온 물건이 싱싱하지가 않았다. 시장에 다니러올 때마다 싱싱한 물건으로 가득 찼던 어물전이 그날 따라 어지러워 보였다. 10여분을 걸어 백화점 식품매장으로 향했다. 다행히 갓 잡아 올린 듯 싱싱한 아귀 두 마리가 장바구니에 채워졌다.
시간이 7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너무 늦어 버렸어. 종종걸음으로 현관을 들어선 그녀 앞에 어둠과 침묵만이 내려앉아 있었다.
- 지윤아, 지훈아 !
아이들 방과 거실에는 빛 한줌 없었다. 세어 들어오는 빛에게 시위라도 하듯 꼼꼼하게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조금 열린 서재로 길게 빛이 세어 나왔다. 책상 스텐드를 켜고, 그가 등을 보이며 의자에 앉아 있었다.
- 아이들 어디 갔어요? 불이나 켜고 있지 그랬어요.
그라도 있다는 안도감에서 인지 그가 앉아 있는 의자 옆에 장바구니를 놓으며, 투정부리듯 말을 건냈다. 반쯤 비워진 양주병이 덩그러니 책상위에 놓여져 있었다.
- 왜 말 안했니. 왜 그랬어?
그와 저녁식사를 했을 때처럼 다시 한번 그녀의 가슴이 와장창 무너져 내렸다. 방망이질을 하는 듯 가슴이 쿵쾅거렸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 무슨 말이든.
- 잊고…… 있었어요. 깜빡 잊어 버렸어요.
- 뭐라구?
그가 후배인 호식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키려 했던 때처럼 그녀는 아는 척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입술을 씰룩이며 말할 것이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라고.
장바구니를 들며 돌아서는 그녀의 등 뒤에서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왜 이렇게 사람 가슴을 서늘하게 만드니. 정말…… 니 앞에서 칼이라도 물고 쓰러져 버리고 싶을 만큼. 왜 이렇게 사람을 아프게 만드냐구.
그의 목소리가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두 눈을 꼭 감았다. 약속이라도 한 듯 두 줄기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고개를 들지 못하고 넋을 잃고 구겨져 앉은 그 앞에 섰다. 눈두덩이부터 하얀 눈자위까지 빨갛다 못해 핏발이 서 있는 그의 얼굴은 온통 물자국이 번져 있었다.
- 지윤엄마. 내가 지금 어떤 줄 알아? 너무 두려워. 당신 없다는 걸 상상만 해도 난 너무 두려워진다구.
- 미안해요. 당신 이렇게 서글프게 만들어서……
참았던 울음이 봇물 터지듯 터졌고, 그녀는 소리 높여 가슴 속 뜨거움을 토해 냈다. 급하게 그녀의 얼굴을 매만져 주는 그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에게 두려움이란 엉뚱하고, 잊어버리기를 밥 먹듯 하는 그녀를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야멸차게 조소를 보낼 그를 상상했고, 그는 두렵다며 안겨줄 그녀를 상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지윤의 병치레로 그 곁을 지쳤을때 처럼 그는 장기휴가를 냈다. 가까이 사는 고모댁에 데려다 놓은 아이들마저 집에 없자 그녀는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그의 처사에 지금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오죽했으면 그렇게까지 했을까 하는 마음이 앞섰다. 살아가며 한번도 눈물을 보인 적이 없었던 강인한 그였는데…… 지금은 그런 그가 두려움에 못 이겨 하고 있다.
하루 하루 날짜는 다가오고 수술날짜를 이틀 앞두고 그가 외출준비를 서둘렀다. 장소를 정하라는 그의 얘기에 무작정 지난번 갔었던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했다.
정식코스에 은은한 화이트와인이 준비되었고, 지난번과 달라진 점이라곤 화려한 촛대에 두개의 촛불이 켜져 있다는 것이었다. 그가 눈높이만큼 잔을 들어올렸다. 애써 웃으며 그녀도 잔을 들어주었다. 부딪힌 잔들 사이에서 은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음식이 나오자 그가 하얀 속살만 남기고 껍질을 모두 벗겨 주었다. 한편으로 변한 그가 고맙기도 했지만, 그녀의 몸을 좀먹는 단지 그 세포 때문에 그가 변했다는 생각에 조금 서글퍼졌다.
- 맛이 어때? 괜찮아?
그가…… 아닌 것 같다. 찬찬히 그녀의 얼굴을 살피는 그의 얼굴이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나이프를 든 그가 천천히 음식을 썰어 입으로 가져갔다. 여느 때처럼 그는 식사를 하고 있다. 그녀 앞에서 만큼은 무덤덤하고, 당당한 한 남자로.
- 당신 잘 잊잖아. 침침한 안개같은 흐리고 나쁜 기억은 적당히 먹어 치워 주면 돼. 이렇게!
입속의 음식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듯 간간이 말을 끊으며 그가 게걸스레 포크질을 했다.
- 그리고는요?
어떤 대답을 기대해서가 아니었다. 그가 보여주는 자연스러운 그 분위기에 그녀도 호응해 주고 싶었다. 그것이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안정된 모습일테니까.
- 그리고? 응. 그리고, 알맞게 익은 햇살 앞에 당당히 설 준비를 하면 되는 거야. 한뼘 한뼘 커가는 아이들의 뒷모습. 술 취해 들어오는 남편의 흐트러진 모습. 가끔 엘리베이터 앞에서 신발을 벗는 자신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며 말이야.
- 그런 얘기는 다 어디서 들었어요?
- 호식이 한테.
서로 눈이 마주친 둘의 눈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그에게는 아쉬움으로 그녀에게는 고마움으로 두드리면 텅하고 소리가 날것 같은 가슴이 서로의 미소로 가득 채워졌다.
그가 계산대로 나갔고, 그녀는 다시 화장실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조금 번들거리는 얼굴에 꼼꼼이 파우더를 발랐다. 이번에도 잊지 말아야지. 내 가방, 내 손수건. 아참, 엘리베이터도…… 화장이 들떠 허옇게 일어 버린 얼굴 표면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눌렀다. 한참을 멍하게 거울 앞에 서있는 여자에게 말했다. 난 이제 서른 다섯이에요.
아침부터 짙은 안개가 낀 모양세가 그다지 좋은 것 같지는 않았다. 정확히 아침 9시에 호식이 병실을 찾아 왔다. 처음 봤던 때처럼 여전히 그는 근사한 미소로 기분이 어떠냐고 물어왔다. 그녀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의 눈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도 오늘이 어떻게 될런지 잘 모르겠어요.
마취과로 들어갈 시간이었다. 복도 끝에서 뛰어다니는 아이. 지훈이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문화강좌에서 배운 퀼트로 만들어준 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지윤이 오고 있었다. 그는 미처 다리지 못한 구겨진 체크무늬 남방을 입고 있었다. 그녀가 먼저 발견하고 옷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다려 보려고 했는데,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고 했다.
- 엄마.
왜 그랬냐며 절규하던 그의 목소리처럼 지윤의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 그래. 지윤아! 엄마 괜찮아. 이거 맹장수술 하는거 보다 더 간단한거래. 지윤이 맹장수술이 뭔지 알지?
- 알아…… 엄마, 이리와 봐.
고사리 같은 작은 손이 그녀의 한쪽 뺨을 쓸었다. 앵두같이 작고, 보드라운 입술이 그녀의 뺨에 오래토록 기대어 있었다.
- 고마……워. 고마워. 지윤아!
바퀴가 달린 간이 침상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가 침상 옆에서 따라왔다.
- 당신…… 당신은 이제 당신은 햇살 앞에 당당하게 설 준비만 하면 되는 거야. 당신이 나오면 안개도 걷히고 없을 거야. 지윤아. 지윤아.
수술실 문 앞에서 발길이 묶인 그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 그 기억. 다 잊어 먹어 버려. 다신 우리 앞에 찾아 들지 못하게…… 당신 잊어 버리는거 하나는…… 잘 하잖아.
문이 닫힐 즈음 그녀는 보았다. 여전히 씩씩하게 손을 흔들고 서 있는 지훈과 울먹이며 그의 손을 꼭 붙잡고 있는 지윤. 그리고, 입꼬리를 올려 웃고 있는 그의 가슴 속의 두려움을…… 그녀가 다시 이 문을 나설 즈음 이 흐린 안개 같은 기억이 모두 잊혀질 것이다.
아니, 그녀는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처음부터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끝>
첫댓글 결국 병명은 나오지 않았네요...궁금했는데. 글 흐름으로 보면 자궁질환 같은데, 자궁질환이 기역력감퇴와 관계가 있나요? 궁금궁금~ 소재가 아주 좋네요^^ 그리고 제목과도 딱 맞아 떨어지구요~ 그런데 거의 단편 분량의 글임에도 불구하고 산만한 느낌이 드는 건 왜 인지......ㅠㅠ
품평 글을 올리려고 하다가 짧게 꼬리말로 달아요.우선 구성을 다시 뜯어고치셔야겠어요.시간의 흐름을 쫓아 시건진행을 그대로 엮어 놓다보니 다분히 어수선할 수밖에 없어요.그만큼 취사가 안 되고 일일이 그 흐름에 맞추어 쓰여져야 할 내용들만 늘어나게 되거든요.병원에서 수술을 앞두고 벌어지는 짧은 상황 속에서
주인공의 과거회상을 조금씩 끌어내세요.단편소설은 그 생명이 시간배경이 극히 짧아야 한다는 특징이 있어요.그렇게 하면 많은 문장들이 걸러지고 극도의 극적 긴장감이 진행되어 독자의 정서와 호흡을 빨아들일 수 있어요.덧붙여 문장에 실수가 많으니 더 다듬어 내시고요.좋은 소재인데, 구성과 문장이 몹시 아쉽군요.
많이 읽고...또 많이 느끼고... 많이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꼼꼼이 봐주시고 지적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단지 쓰고 싶다는 성급함 때문에 실수도 오류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처음으로 올린 제 글을 누군가 성의껏 읽고 평해준다는 것에...행복하네요. 좀 더 단단해질 수 있도록 노력하렵니다.
큰 마음으로 받아들이시니, 좋은 결실이 있으리라 믿어요. 개작해서 다시 올리세요. 기회가 되면 다시 짚어드리지요. 그리고 '소설이론' 게시판에 있는 단편소설의 작법이나 특징들을 두루 파악하세요. 또 되도록 문장연습을 통해 단문쓰기에 매달려 기초 문장력 강화에 주력해 보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