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7주간 화요일
제1독서
<청하여도 얻지 못한다면 잘못 청하기 때문입니다.>
▥ 야고보서의 말씀입니다. 4,1-10
사랑하는 여러분, 1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2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3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
4 절개 없는 자들이여, 세상과 우애를 쌓는 것이 하느님과 적의를 쌓는 것임을 모릅니까?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는 자는 하느님의 적이 되는 것입니다. 5 아니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살게 하신 영을 열렬히 갈망하신다.”는 성경 말씀이 빈말이라고 생각합니까? 6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더 큰 은총을 베푸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신다.”
7 그러므로 하느님께 복종하고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 그러면 악마가 여러분에게서 달아날 것입니다. 8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이여, 마음을 정결하게 하십시오. 9 탄식하고 슬퍼하며 우십시오. 여러분의 웃음을 슬픔으로 바꾸고 기쁨을 근심으로 바꾸십시오. 10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어야 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30-37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30 갈릴래아를 가로질러 갔는데,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31 그분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32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33 그들은 카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다. 34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35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36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37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14.02.24
사람에게서 제일 강한 욕심이 명예욕이라고 합니다. 다른 것은 세월이 가면 시들해지지만
자기 얼굴을 드러내고 싶은 욕망은 갈수록 커진다고 하지요.
제자들은 주님을 따라다니면서 말씀도 듣고 배웠을텐데 길가에서 자기들 중에 누가 높으냐고
다툽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스승께서 장차 겪으실 일 미리 말씀하시는 자리였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마르 30,31)
그런데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두려워 스승님께 그 뜻을
질문하지도 못합니다. 그러한 그들은 스승님은 수난의 길을 가실 것이라고 하시는데
제자들은 높은 자리에게 대해서 싸우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다투는 이런 모습을 보면 바로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궤뚫어 보시는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타이르시는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35절)
그래서 교황님의 칭호를 ‘하느님의 종들의 종 servus servorum Dei'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자신을 낯추는 것은 비단 복음에만이 아니라 일반 사람에게도 아름다운 일입니다.
세상에는 많이 갖고 많이 누리려는 욕심으로 차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욕심이
생겨서 많은 부작용의 일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런 세상의 잘못된 길에 대해서
완전히 겸손하신 방법으로 맞서십니다.
야고보 서간은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더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야고 4,1)
야고보 서간의 저자는 이어서 더 강한 표현으로 하느님과 분리되는 세상의 친구에 대해 비판적인
내용으로 강한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절개 없는 자들이여, 세상과 우애를 쌓는 것이 하느님과 적의를 쌓는 것임을 모릅니까?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는 자는 하느님의 적이 되는 것입니다.”(4절)
서간의 저자는 신앙인으로 올바로 사는 것은 하느님을 가까이하며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겸손에 대해서도 너무 강조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사람의 자리에 대해서도 초연하다고
말해서도 안됩니다.
어떤 것이든 강조하다보면 그 반대의 것과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다보면 실제는 그렇지 못한데 자기 자신이 마치 겸손하고 어디에든 초연한 것으로
착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대 중국의 채근담(菜根譚)에 이런 내용의 글이 있습니다.
산림(山林)에 사는 즐거움을 말하는 자는
아직도 자연의 참 멋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명리(名利)에 관한 말을 꺼리는 자는
아직도 명리와 이익에 미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이웃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비판해서도 안되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자랑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중용(中庸)에서 참다운 인생의 멋과 조화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나친 부정은 바로 강한 긍정을 담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되면 위선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부족함을 뉘우치고
타인에게도 너그러울 수 있다면 바로 주님의 모습을 닮는 것이지요.
다시 채근담의 글을 인용해 봅니다.
더러운 땅에서는 초목이 무성하지만
물이 너무 맑으면 항상 고기가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때묻고 더러움도 용납할 도량을 가져라.
깨끗함만 좋아하고 홀로 행하려는 절조는 지니지 말아라.
그러므로 신앙에서 해로운 것은 홀로 열심한 것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의 위선과 독선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는 너그럽고 자신에게는 엄격하라’는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의미를
묵상하며 길에서 제자들의 다툼을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내 안에 작은 것이라도 살펴 다스려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의 부족함에 대해서 주님의 자비를 청합시다.
첫째가 아니라 남을 섬기는 꼴찌의 겸손도 또한 청합시다.
출처: 구름 흘러가는 원문보기 글쓴이: 말씀사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