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주의와 잘못된 은혜주의
믿음생활을 하다 보면 은혜와 율법에 대한 많은 오해가 생깁니다. 특히 초대교회 때 거짓 교사들은 은혜와 더불어 어떤 행동이 있어야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골로새에서도 율법주의를 내세우는 거짓 교사들은 먹고 마시는 것 문제와 유대인들의 절기나 성일을 지키는 문제로 신앙과 구원여부를 저울질하며 판단했습니다(1절). 그런 율법주의로 복음 신앙이 흔들리지 않게 하라고 사도 바울은 권고합니다.
왜 먹고 마시는 것 문제나 성일을 지키는 문제로 구원여부와 신앙여부를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까? 그런 문제들은 그림자이고 진짜 실체는 바로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17절). 실체인 그리스도가 오셨기에 율법주의의 그림자에 매달리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 말이 구원받은 성도에게 행위는 전혀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율법도 지키는 행위가 있어야 구원받는다는 것은 율법주의지만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행위를 부정하는 것은 잘못된 은혜주의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은혜롭게 합시다.” 그 속뜻은 “적당히 합시다.”란 말입니다. 그러나 ‘은혜’와 ‘적당’은 같은 개념은 아닙니다. 성도에게도 바른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즉 구원받은 후에는 구원받은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행위를 부정하면 잘못된 은혜주의가 됩니다. 은혜와 믿음을 앞세우되 그 뒤로 행위도 따라오게 해야 합니다.
루터는 성경 야고보서를 행위를 강조했다고 해서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가톨릭교회에서 행위를 강조한 율법주의의 폐단을 깨닫고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행위를 짓밟으면 안 됩니다. 믿어도 행위가 따라오게 해야 합니다. 율법주의자들은 믿음이 없는 행위를 강조해서 잘못된 길로 들어섰지만 은혜주의자가 행함이 없는 믿음을 은혜라고 가르치면 그것도 잘못입니다.
교회가 초법적인 일이 이뤄지게 해달라고 철야기도를 하면 안 됩니다. 예를 들면 논을 사서 논에 건축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철야기도를 하거나 불법으로 무허가 건물을 지어 놓고 철거당하지 않게 해달라고 철야하고 금식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됩니다. 교회가 법도 안 지키면서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교회가 그렇게 빗나가는 원인은 은혜를 강조하면서 행위를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믿는다고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펌
첫댓글 아멘
아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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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글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드립니다.
아멘~!!
아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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