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캐나다 토론토를 연고로 창단한 팀이다. 몬트리올 엑스포스가 2005년 미국 워싱턴 D.C로 연고를 옮겨 ‘워싱턴 내셔널스’로 새로 태어나면서 토론토는 메이저리그 30개 구단 가운데 유일하게 미국 외에 연고지를 두고 있는 팀이 됐다.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에 소속돼 창단 초기에는 최하위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1980년대들어 서서히 치고 올라간 뒤 1985년 첫 지구 우승을 차지하고 1992~1993년에는 2년 연속 월드시리즈 챔피언에 오르며 최고의 구단으로 거듭났다. 그러나 이후로는 기세가 뚝 떨어져 2014년까지 한 번도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하고 있다.
블루제이(Blue Jay)는 북미에 서식하는 새로 토론토가 위치해 있는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상징 동물이다. 원래 구단 명칭을 공모하면서 선정된 이름은 ‘블루스’(Blues)였다. 그러나 같은 이름을 가진 토론토 대학에서 이의를 제기해 ‘블루제이스’로 변경했다.
홈구장 이름은 원래 ‘스카이돔’이었다. 그런데 2000년 로저스 커뮤니케이션스가 구단을 인수하며 스카이돔까지 아예 사들인 뒤 2004년 ‘로저스 센터’로 개명했다. 1989년 개장 당시 세계 최초의 개폐식 지붕을 설치한 원형 경기장으로 이름을 널리 알렸다. 날씨가 좋을 때는 지붕을 열고 경기한다. 이 구장은 일본 프로야구 소프트뱅크의 홈구장인 후쿠오카 야후오크돔의 모델이 됐다. 좌우 펜스까지 각각 99.97m, 중앙 펜스까지는 121.92m이고 펜스 높이는 3.38m다. 파울 지역도 넓어 투수에게 비교적 유리한 구장이다. 야구 경기 때는 5만516명, 풋볼 경기 때는 5만3000명을 수용한다.
신생팀은 한계를 경험하게 마련이다. 창단 첫 해인 1977년에 54승107패로 최하위를 기록한 토론토는 1979년까지 3년 연속 100패를 기록하며 1982년까지 6년 연속 최하위에 처졌다.
좀처럼 침체기를 벗어나지 못하던 토론토는 1982년 바비 콕스 감독이 취임하면서 조금씩 올라섰다. 콕스 감독 취임 2년째인 1983년에 처음으로 승률 5할을 넘어 지구 4위로 시즌을 마친 토론토는 1984년에는 2위로 상승했고, 1985년에는 99승62패를 기록하며 창단 후 최초로 지구 우승을 차지했다. 첫 챔피언십시리즈에서 만난 상대는 캔자스시티였다. 토론토는 3승1패로 아메리칸리그 우승을 눈앞에 뒀으나 이후 3연패를 당해 역전 우승을 내줬다. 이 시즌을 끝으로 콕스 감독이 물러나고 지미 윌리엄스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토론토는 또 1988년까지 3년 동안 4위, 2위, 3위를 기록하며 우승하지 못했다.
1989년에는 개막 이후 12승24패로 부진하다 사령탑이 교체됐다. 시토 개스톤 감독이 취임했고 6월에는 새 홈구장 스카이돔(현 로저스 센터)이 개장했다. 새 기분으로 다시 출발한 토론토는 진격했고 그해 89승73패로 시즌을 마치며 창단 후 2번째 지구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챔피언십시리즈에서는 다시 오클랜드에 1승4패로 져 월드시리즈 진출에는 실패했다.
그리고 1990년, 지구 2위로 시즌을 마친 토론토는 샌디에이고와 역사적인 트레이드를 실시했다. 토니 페르난데스와 프레드 맥그리프를 내주고 조 카터와 로베르토 알로마를 데려오는 대형 트레이드였다. 이 트레이드를 통해 토론토는 1990년대초 중흥기를 맞았다.
1991년 91승71패를 기록하며 3번째 지구 우승을 차지한 토론토는 챔피언십시리즈에서 미네소타에 밀려 역시 리그 우승을 놓쳤다. 그러나 최초로 400만 관중을 돌파한 시즌이었다. 토론토의 인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즌이기도 했다.
창단 뒤 15시즌 동안 세 차례 진출한 챔피언십시리즈에서 모두 탈락한 토론토는 이후 딱 두 번 월드시리즈를 치렀다. 네 번째 찾아온 기회에서는 실패하지 않고 우승했다. 그리고 2년 연속 우승까지 이뤘다.
1992년 토론토는 잭 모리스와 데이브 윈필드를 영입했다. 모리스는 21승(6패)을 거뒀고, 윈필드는 타율 2할9푼에 26홈런 108타점을 올리며 로베르토 알로마(3할1푼 8홈런 76타점)-조 카터(2할6푼4리 34홈런 119타점)와 함께 중심타선을 이끌었다. 이 성공적인 전력 보강을 통해 4번째 지구 우승을 차지한 토론토는 챔피언십시리즈에서 오클랜드를 만났다. 1승2패로 뒤져있던 4차전에서 4-6으로 밀리다 9회 로베르토 알로마의 2점 홈런으로 동점을 만든 토론토는 연장 11회 접전 끝에 7-6으로 역전승을 거둬 2승2패 동률을 만들었다. 이후 상승세를 탄 토론토는 2연승을 보태 처음으로 월드시리즈에 진출했다.
최초의 월드시리즈 무대 상대는 애틀랜타였다. 1승1패로 만난 3차전에서 2-2로 맞선 9회말 1사 만루에서 캔디 말도나오의 끝내기 안타로 3-2 역전승을 거둔 토론토는 4차전에서 톰 글래빈이 완투한 애틀랜타를 2-1로 누르고 3승1패를 만들었다. 5차전에서는 선발 잭 모리스가 로니 스미스에게 만루홈런을 맞는 등 무너져 3승2패로 쫓겼다. 토론토는 6차전에서 연장 11회까지 대접전을 벌인 끝에 4-3으로 승리하고 사상 첫 월드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1992년 월드시리즈를 마친 뒤 윈필드는 팀을 떠났지만 폴 몰리터와 데이브 스튜어트가 합류했다. 1993년 토론토는 더 강해졌다.
타선에서는 리키 헨더슨(2할8푼9리 21홈런 59타점), 디본 화이트(2할7푼3리 15홈런 52타점), 로베르토 알로마(3할2푼6리 17홈런 93타점), 조 카터(2할5푼4리 33홈런 121타점), 존 올러루드(3할6푼3리 24홈런 107타점), 폴 몰리터(3할3푼2리 22홈런 111타점)가 최강 화력을 과시해 팀 타율(2할7푼9리)과 팀 도루(170개) 1위로 올려놨다.
마운드는 전년도 에이스 모리스가 7승에 그치며 부진했지만 팻 헨트겐(19승9패), 후안 구즈먼(14승3패), 데이브 스튜어트(12승8패)와 45세이브를 거둔 마무리 드웨인 워드가 굳게 지켰다. 그해 토론토는 95승67패를 기록하며 2위 뉴욕 양키스에 7경기 차로 앞서는 압도적 전력으로 2년 연속 지구 우승을 차지했다. 인기와 실력 모두 절정에 오른 토론토는 챔피언십시리즈에서 시카고 화이트삭스를 4승2패로 꺾고 2년 연속 월드시리즈에 나갔다.
1993년 월드시리즈 상대는 필라델피아였다.
1승1패로 맞선 3차전에서 폴 몰리터가 1회 2타점 3루타와 3회 솔로홈런 등으로 활약하며 10-3 승리를 이끌었다. 4차전에서는 역사적인 타격전이 펼쳐졌다. 양팀 선발 토드 스토틀마이어와 토미 그린이 일찍 무너진 채 불펜 싸움을 하던 중 9-14로 뒤지던 토론토가 8회 6점을 올리며 15-14로 역전했다. 양팀 합산 29득점은 월드시리즈 최다 득점이었다.
3승1패를 만든 토론토는 6차전에서 상대 선발 커트 실링에게 9이닝 동안 5안타밖에 치지 못해 완봉승을 내줬다. 그러나 6차전에서 5-6으로 뒤지던 9회말 1사 1·2루에서 조 카터가 상대 마무리 미치 윌리엄스를 상대로 좌월 3점 홈런을 날렸다. 8-6 역전승. 경기뿐 아니라 시리즈까지 끝내버린 카터의 홈런으로 토론토는 1977~1978년 우승한 뉴욕 양키스 이후 처음으로 월드시리즈 2연패에 성공한 팀이 됐다.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1992, 1993년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 <출처: flickr.com>
최고의 성적과 인기를 누린 토론토는 이후 점점 하락세를 탔다. 1994년 메이저리그 선수노조 파업 이후 고액 연봉 선수들을 잇따라 내보낸 결과 성적도 흥행도 내리막길을 탔다. 1998년부터 2003년까지 6년 연속 지구 3위를 기록하며 약 10년 동안 양키스와 보스턴에 이어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의 3인자에 머물렀다. 물론 훌륭한 선수들은 등장했다. 카를로스 델가도, 숀 그린 등 젊은 선수들이 성장했고 1996년에는 팻 헨트겐, 1997년에는 보스턴에서 영입한 로저 클레멘스가 사이영상을 수상해 토론토는 2년 연속 사이영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그러나 팀 성적과는 별개였다.
2000년 로저스 커뮤니케이션스가 구단을 인수해 또 한 번 변화를 맞은 토론토는 2004년 67승94패를 기록하며 지구 최하위로 떨어졌다. 이후 투수 A J 버넷과 야수 트로이 글로스 등 대형 선수들을 영입한 토론토는 2006년 양키스에 이어 2위를 기록하며 오랫동안 지속되던 양키스-보스턴 2강 체제를 깼다.
그러나 2007년 다시 선두 보스턴, 2위 양키스에도 11경기 뒤진 3위로 떨어졌고, 2008년에는 선두로 올라선 탬파베이의 반란을 지켜보며 4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시즌 중 존 기븐스 감독을 경질하고 과거 월드시리즈 2연패 당시 사령탑 시토 개스톤을 다시 영입했지만 2009년 마운드에 부상 선수가 속출하면서 2년 연속 지구 4위에 머물렀다.
2010년 30개 구단 중 가장 많은 257홈런을 치고도 지구 4위(85승77패)에 머문 토론토는 개스톤 감독이 물러난 뒤 존 패럴 감독을 맞았다. 그러나 역시 2012년까지 2년 연속 4위에 그쳤다. 2013년에는 존 기븐스 감독이 취임했으나 그해 74승88패로 지구 최하위로 처졌고, 2014년에는 83승79패로 볼티모어의 지구 우승을 지켜보며 3위에 머물렀다.
• 로베르토 알로마(Roberto Alomar) -12번
푸에르토코리고 출신 알로마는 메이저리그 최고 2루수로 불렸다. 메이저리그 올스타를 지낸 2루수였던 아버지 샌디 알로마 시니어는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했고, 형 샌디 알로마 주니어도 1990년대 포수로 빅리그에서 활약했다.
1985년 샌디에이고에 입단한 뒤 스무살이던 1988년 주전 2루수를 차지한 알로마는 통산 17시즌 동안 빅리그에서 뛰며 2루수로는 최다인 골드글러브 10회 수상을 기록했다. 그는 2루수로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수비력을 보여줬다. 수비에 비해 공격력은 과소평가 받았지만 실버슬러거 역시 4차례 수상했다.
샌디에이고는 1990년 시즌을 마치고 알로마를 조 카터와 함께 토론토로 보내고 프레드 맥그리프와 토니 페르난데스를 받는 2대2 트레이드를 실시했다. 결국 이 트레이드는 샌디에이고 구단 역사상 최악의 트레이드로 평가받았다.
2011년 명예의 전당 헌액 퍼레이드 하는 알로마 <출처: flickr.com>
알로마는 이적 첫 해인 1991년 생애 첫 골드글러브를 수상하며 전성기의 문을 열었다. 1992년에는 타율 3할을 달성했고, 1992년에는 두 자릿수 홈런을 치는 등 갈수록 성장세를 탔다. 토론토가 월드시리즈 2년 연속 우승할 때도 맹활약했다. 1992년 챔피언십시리즈에서는 타율 4할2푼3리를 기록하며 MVP로 선정됐고, 1993년에는 월드시리즈에서 타율 4할8푼을 치며 6타점을 팀에 안겼다. 1995년에는 104경기 연속 무실책으로 아메리칸리그 2루수 신기록을 세우는 등 완연한 전성기에 접어든 알로마는 대형 스타가 됐다. 시즌을 마치고 자유계약선수(FA)가 된 알로마는 토론토가 리빌딩에 들어가면서 볼티모어로 이적했다.
여성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당대의 테니스 스타 마리 피에르스와 열애하는 등 스타 기질이 풍부한 선수였다. 그러나 1996년 시즌 막바지에 심판과 언쟁을 벌이다 얼굴에 침을 뱉는 등 무례한 행동으로 많은 지탄을 받으며 인기와 성적이 추락했지만, 이후 클리블랜드로 이적해 다시 완벽하게 부활했다. 그러나 2001년 시즌을 마친 뒤 뉴욕 메츠로 다시 트레이드되며 기량이 떨어진 끝에 2005년 탬파베이에 입단했으나 스프링캠프에서 은퇴를 선언했다. 통산 성적은 타율 3할에 210홈런 1134타점이다.
2010년에는 캐나다 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로베르토 알로마는 2011년에는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90.0%의 득표율로 헌액됐다. 전 구단 영구결번인 재키 로빈슨의 42번을 제외하면 토론토에서는 알로마가 달았던 12번이 유일한 영구결번이다.
1995년 1라운드 전체 17번으로 토론토에 지명돼 1998년 빅리그에 데뷔했다. 통산 16시즌 동안 416경기에 등판해 203승105패, 통산 방어율 3.38을 기록했다. 그 중 토론토에서 2009년까지 12년 동안 뛰며 148승76패를 기록했다. 대표적인 이닝이터로 빅리그 생활 중 8시즌 동안 220이닝 이상을 던져 통산 2749.1이닝을 기록했다. 통산 67번 완투를 기록한 ‘철완’의 상징이다. 2002년~2011년 사이에 2004년과 2007년을 제외하고 총 8차례 올스타에 선정됐으며 토론토에 있던 2003년에는 아메리칸리그에서, 필라델피아 소속이던 2010년에는 내셔널리그에서 사이영상을 수상했다.
’철완’의 상징 로이 할러데이 <출처: flickr.com>
토론토를 사랑한 할러데이는 지역 사회 봉사에도 앞장섰고 FA 계약에서도 과한 요구를 하지 않는 등 팀을 먼저 사랑했다. 그러나 2010년을 마치면 다시 FA가 되는 할러데이를 토론토 구단 측은 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2009년 시즌을 마친 뒤 삼각트레이드를 통해 필라델피아로 보냈다.
그는 이적하자마자 11경기만인 2010년 5월30일 플로리다전에서 메이저리그 통산 20호 퍼펙트 게임을 선보였다. 그해 10월6일에는 내셔널리그 디비전시리즈에서 신시내티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달성하고 그해 사이영상을 수상해 게일 로드, 로저 클레멘스, 랜디 존슨, 페드로 마르티네스에 이어 역대 5번째 양대 리그 사이영상 수상자가 됐다.
2013년 어깨 수술을 받은 할러데이는 그해 13경기에 등판해 4승5패, 방어율 6.82를 기록했다. 시즌을 마친 뒤 할러데이는 가족에게 돌아가겠다며 은퇴를 선언했다. 필라델피아에서도 여전히 친정팀 토론토를 그리워했던 할러데이는 토론토 소속으로 은퇴하기 위해 12월10일 친정팀 토론토와 단 하루짜리 계약을 맺고 마운드와 작별을 선언했다.
버논 웰스의 타격 모습 <출처: flickr.com>
통산 타율 2할7푼에 270홈런 958타점을 기록했다. 토론토의 2000년대를 책임진 외야수다. 1997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전체 5번으로 지명됐다. 1999년 빅리그에 데뷔했고 2002년부터는 풀타임 주전으로 출전해 2003년, 2006년, 2010년 3차례 올스타에 선정됐고 2004년~2006년 3년 연속 골드글러브를 수상했다. 첫 올스타로 선정된 2003년 타율 3할1푼7리에 33홈런 117타점을 기록해 ‘커리어 하이’를 찍으며 정상급 외야수로 올라섰다.
그러나 2007년 시즌을 마친 뒤 7년‧1억2600만달러 대형 FA 계약을 체결한 뒤 기록이 점점 떨어졌다. 결국 2010년 시즌을 마치고 LA 에인절스로 트레이드된 웰스는 2할 초반대 타율을 기록하며 부진에서 회복하지 못했고 2012년 시즌을 마친 뒤 뉴욕 양키스로 다시 트레이드됐다. 이후 2014년을 마치면 은퇴하겠다고 선언했으나 2013년 타율 2할3푼31리 11홈런 50타점에 그친 뒤 양키스에서 방출됐다.
도미니카공화국 출신으로 2000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피츠버그에 20라운드 지명받아 입단한 바티스타는 초창기 여러 팀을 떠돌아다닌 ‘저니맨’이었다. 2003년 룰5 드래프트를 통해 볼티모어로 이적한 뒤 2004년 메이저리그에 데뷔했다. 그러나 고작 16경기를 뛴 뒤 웨이버 공시돼 탬파베이로 이적했고 이후 캔자스시티, 뉴욕 메츠를 거쳐 피츠버그로 다시 트레이드돼 한 시즌에 5개 팀 유니폼을 입는 메이저리그 최초 기록을 세웠다.
토론토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한 홈런왕 호세 바티스타 <출처: flickr.com>
산전수전을 겪은 바티스타는 2008년 트레이드를 통해 토론토 유니폼을 입으면서 그 빛을 내기 시작했다. 1루수·2루수·3루수는 물론이고 좌익수‧중견수‧우익수까지 내야와 외야를 모두 경험한 바티스타는 2009년 내야수 스캇 롤렌과 외야수 알렉스 리오스의 백업으로 경기에 나섰다. 그러나 그해 시즌말 우익수로 고정돼 선발 출전하기 시작하면서 9월 나선 28경기 동안 10홈런을 쳐내 존재감을 과시했다. 재계약에 성공한 바티스타는 2010년에 완전히 폭발했다.
그전까지 통산 홈런 58개뿐이던 바티스타는 2010년 161경기에 출전해 타율 2할6푼을 기록하며 54홈런 124타점을 올렸다. 아메리칸리그 홈런왕은 물론 메이저리그 전체 홈런 1위이기도 했다.
깜짝 스타가 된 뒤 토론토와 5년‧6500만달러 계약을 맺은 바티스타의 한풀이는 이후에도 계속됐다. 2011년 전반기에만 30홈런을 넘기며 타율 3할2리 43홈런 103타점을 기록했다. 2년 연속 실버슬러거와 행크애런상을 수상했다. 이후 2년 동안 20홈런은 넘기면서도 부상 등으로 주춤했던 바티스타는 2014년 다시 타율 2할8푼6리에 35홈런 103타점을 기록하며 다시 일어섰다.
로이 할러데이가 팀을 떠난 이후 딱히 내세울 스타 플레이어가 없던 토론토에 홈런왕 타이틀을 안기며 화려하게 ‘대기만성’한 선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