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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본 . 대 만 스크랩 경상도 일본 여행기2(06.12)
김석환1 추천 0 조회 452 07.01.01 22:53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아침에 일어나 아침을 먹은 후 친구가 바쁜 관계로 모도꼬의 안내로 비가 질척이는 시내 구경을 나섰다. 먼저 골동품 가게에 들렀다. 나는 전혀 살 것이 없었지만 구경하기에는 재미났다. 같이 간 김 선생은 도자기 하나를 손에 들고 엄청 고민을 하더니 가격 흥정까지 마쳤지만 내려놓는다. 이어 한국의 친구가 부탁한 골프채를 사러 상점에 들르니 그게 바로 몇 개월 전에 단종이 돼서 살 수가 없단다. 귀찮은 부탁을 본의 아니게 거절하게 돼서 그 친구한테는 미안한 노릇이지만 다행이다 싶었다.


이어서 어느 시골의 절간을 들렀다. 그 곳은 평야지대인 이곳에서 그 옛날 수나미가 왔을 적에 사람들이 그 위로 피했다는 구릉처럼 솟아 있는 조그만 산에 있는 절로 좀 특이한 모습니다. 여러 개의 격자로 엮어진 높은 빨간 기둥들 위에 세워진 그런 절로서 앞모습과 뒤모습이 달랐다. 앞은 팔작지붕 형태인데 뒤는 평지붕 형태인 아주 특이한 구조다.


우리는 지붕을 ‘ㄱ’ ‘ㄴ’ ‘ㄷ’자로 꺾어서 대칭을 피하기는 하지만 이처럼 한 지붕을 앞뒤로 다르게 하는 경우는 멋대로 지은 내 작업실 말고 전통가옥에서는 못 본 것 같다. 언뜻 보면 사무라이의 모자 같은 느낌이 드는 그런 모습이다. 빨간 색으로 칠한 기둥의 모습도 특별하다. 이 잔잔한 곳에 무슨 귀신 쫓을 일이 그리 많아서 빨간 색으로 칠을 했단 말인가?

주지라도 만나 물어보면 좋으련만 이 조용한 공간에 사람이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설령 만나서 물어 본다고 해도 하루 종일 걸려야 할 노릇일 것이다.


모도꼬가 5시에 ‘딸래미’를 데리러 가야한다고 하기에 우리를 큰 슈퍼 앞에 내려 달라고 하고 김 선생과 나는 그 곳에 들어가 쇼핑을 했다. 김 선생은 털모자를 한 개 사고 나는 ‘100엔’짜리 가게에 들어가 대부분이 중국제인 그 쓸데없는 것들을 이것저것 주워들었다.

나중에 돌아 온 모도꼬와 저녁거리 시장을 봐서 집에 돌아와 맛있는 저녁을 먹고 잠에 떨어졌다.


역시 오늘도 친구는 바빠서 어제 저녁에 남은 고기를 먹고 부인의 안내로 역사박물관에 들렀다. 차를 주차하고 공원을 가로 질러 가는데 역시 공원은 잘 가꾸어져 있었다. 우리가 걷는 길보다 낮은 쪽에 곡선 진 바닥에 붉은 색 단풍이 떨어져 있는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늦은 가을 나무에 붙어 있을 때도 색과 그 생명의 절박함으로 아름다웠겠지만 이처럼 바닥에 떨어져 쌓여 있는 모습도, 더 이상 추락할 수 없고 변 할 수는 그 생명의 끝을 알리고 있기에 더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한창 때인 젊음이 아름답지만 나뭇잎은 왜 그 끝이 아름다운 것일까?

우리 인생도 그 끝이 아름답다면 지금은 눈물을 삼켜도 좋을 텐데.....  


소풍 나온 듯한 남자 중학교 아이들이 서로 무리를 지어 깔깔대면 놀고 있다. 자연의 유한함과 겨울날의 스산함을 배경삼아 날리는 그들의 웃음소리가 왠지 가짜 같은 느낌이다.

그 길을 조금 돌아 잘 가꾸어진 정원수 담을 지나니 나무 밑에 고양이 한 마리리가 웅크리고 있는데 10미터 앞에는 비둘기가 열심히 잔디위에서 먹이를 쪼고 있다. 고양이는 자기 쪽으로 좀 더 가까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비둘기는 더 이상 가까이 안 오고 그 언저리만 얼쩡거릴 뿐이다.


생과 사의 기로에 선 비둘기지만 그런 절박한 상황을 전혀 눈치 못 채고 있는 듯하고 호시탐탐 기회만을 엿보는 고양이는 오로지 시선을 한 곳에 박고만 있는 모습이 감동적인 한 폭의 그림이다. 결과보기를 포기하고 우리는 박물관에 들어갔다.


카운터에서는 한국말 안내 녹음기가 있었다. 자상한 배려에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가만히 보니 역에도 한국말 표지 말이 있던 기억이 난다. 한국의 위상이 많이 높아진 건지 한류의 영향인지 잘 모르지만 전에는 없던 모습들이라 묘한 기분이 안들 수가 없다. 나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그 큰 박물관을 빙 돌아 봤다. 다양한 전시물에 놀라웠다. 섬나라라고만 생각했던 일본도 이처럼 나름의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 또한 놀라웠다.


5시는 돼서야 점심을 위해 일본식 햄버거 식당에 앉았다. 쌀로 만든 햄버거에 ‘모찌’를 곁들여 먹고 시장을 보고 집에 돌아와 이야기를 나누다 늦은 저녁을 우동으로 대신하고 잠을 잤다.


여섯째 날 목요일.
아침을 먹고 다께우찌와 골동품 가게를 다시 들러 김 선생이 사려던 도자기를 다시 확인하니 일본친구도 그 도자기의 가치에 대해 갸우뚱거리고 내내 그 도자기가 맘에 짚였다는 김 선생도 오늘은 막상 느낌이 별로라면서 결국 구매를 포기한다.

이어서 우리는 차를 몰아 동경의 ‘야나기 무네요시 민예관’으로 향했다. 나는 전부터 이 박물관을 꼭 보고 싶었다. 야나기라는 사람은 한국의 문화재를 이해하고 깊이 있게 연구한 최초의 일본인이었다는 평과 일본의 한국문화침탈의 앞잡이였다는 평이 엇갈리는 인물로 그가 모아놓은 우리의 문화재들이 오롯이 간직되어 있는 곳이라서 꼭 한번 보고 싶었는데 오늘이 그날이다.

아쉬운 것은 일부는 다른 곳에서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어서 모두를 다 볼 수는 없다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일부라도 볼 수 있다는 것이 여간 기쁘지 안했다.

 

동경대 근처의 골목을 겨우 찾아서 가니 고급 주택가에 박물관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역시 우리의 골동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대부분은 전에 봄 직한 것들이지만 어떤 것들은 전혀 새로운 것들도 있었다. 나는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는데 여직원이 오더니 촬영금지라고 하더니 관장을 소개 시켜주는 것이 아닌가? 그 관장은 아예 사진 찍어도 좋다는 완장을 차주는 것이 아닌가? 작은 배려지만 그 문화재들을 만든 사람들의 고향사람에 대한 배려려니 생각하니 고맙기도 하면서도 어쩌면 당연한 대접인 듯 했다.


선인들의 채취를 맘껏 누리고 우리는 점심을 위해 이상한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말하자면 폭주족 카페 같은 곳이다. 폭주족 용품을 팔면서 차와 음식도 파는 그런 독특한 곳에서 우리는 스프와 스파게티를 먹었는데 아주 별스런 맛이다.  보통의 일본 음식과 달리 내 입맛에 잘 맞아 떨어졌다.


식사 후 화랑근처에 주차하고 친구는 화랑으로 가고 나와 김 선생은 큰 서점에 들렀다. 나는 거기서 일본의 캠핑장 안내서를 샀다. 대충 보니 일본도 캠핑장 시설이 잘 되어 있고 그 가격도 싼 곳은 쌌다. 다음에 기회를 봐서 일본 오토캠핑을 할 마음으로 그 책을 가지고 나오는 발길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일본을 여러 번 와봤지만 그 놈의 물가 때문에 여행을 제대로 한 적이 없는데 이처럼 캠핑장이 많다면 유럽처럼 캠핑여행을 하면 비용도 적게 들고 한국과도 가깝고 기후 문화도 비슷하니 아주 잘되었다 싶었다.


차에 도착하니 다께우찌가 어떤 나인 든 분을 친구라고 소개 시키는데 대충 한 80은 되 보였다. 일본서는 80도 친구인가보다. 아니면 달리 소개할 말이 궁해서 그냥 ‘후랜드’라고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와 대충 인사와 작별을 하고 우리는 밤길을 달려 지바에 도착해서 부인이 해준 게탕을 맛있게 먹고 어제 장을 본 칵테일 캔에다 맥주를 섞어 마시니 나는 아주 기분이 좋았다. 거기다 내 작품의 판매이야기도 있었다는 말에 기분이 한껏 고무되었다.


하지만 11시 쯤 되니 졸음이 쏟아졌다. 김 선생하고 다께우찌는 각자의 방으로 올라가고 나는 나답지 않게 끈기로 버티니 그 다음부터는 오히려 정신이 말짱해져서 모도꼬와 1시까지 떠들다 잠에 들었다.


집에 가기 전날.

오늘은 날이 좋다. 우리는 아침을 먹은 후 모도꼬의 차를 타고 그녀가 잘 안다는 재미난 가게에 들렀다. ‘보아밥’이란가게다. 그 가게 주인은 한 60세는 되 보였는데 그녀는 전 세계를 여행을 하면서 토산품을 사 모아서 이처럼 가게를 내서 판매하면서 산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취미가 생업인 아주 이상적인 삶을 사는 그런 사람이다.

가게 안에 가득 찬 물건들은 역시 아프리카 인도 남미 등의 외국 토산품들뿐이다.

그녀가 직접 만들었다는 유리 목걸이를 모도꼬가 권하기에 몇 개를 집어 드니 자기 선물이란다. 목걸이 중에 산호로 만든 것이 맘에 들어 만지작거리고 3000엔이나 깎았지만 정작 주인이 될 와이프 맘을 몰라 망설이다 가격도 만만치 않아서 그냥 놓고 말았다.


이어서 우리는 빵집에 들렀다. 점심시간이고 워낙이 유명한 곳이라서인지 사람이 붐볐다. 내가 그저께 늦은 점심으로 뒤집어 지는 것을 본 그녀가 오늘은 아예 미리 먹을 것을 챙기는 거다. 그것들을 주워 들면서도 오늘은 배고파도 걱정을 말란다. 그녀의 따뜻한 배려에 어찌 감동먹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곳을 나와 메탈 박물관이라는 곳을 찾아 갔는데 그 곳은 논바닥 한가운데 외롭게 지어진 건물로 무슨 길쭉한 사각형 상자를 엎어 놓은 것 같은 조립식 건물이었다. 생긴 모습이나 크기와는 달리 입장료가 제법 되었고 안을 들어가니 어떤 이의 전시가 계속되고 있었지만 별로 보잘 것은 없었다.


조금 있으니 그곳 주인이란 노인네가 까치머리를 해가지고 나온다. 우리가 한국인이라고 해서인지 먼저 거기서 전시를 했던 한국인의 팜프렛을 몇 개 보여주더니 자기 찻집이란 공간으로 우리를 안내하는데 그것은 꼭 컨테이너 박스로 만든 집 같은 곳인데 아마 차를 마시는 공간인 모양이다.


자리에 앉으니 한국서 30년 전에 샀다면서 다완 한 개를 들고 나오는데 보니 유약이 제대로 안 묻어서 생긴 약간의 흠집이 있는 그릇이지만 모양이나 색깔이 보기 좋았다. 그 옛날 경주에 여행 갔을 적에 흠집이 있다고 해서 특별히 싼 가격 3000엔에 사 온 것이란다. 참으로 별스런 주인이다 싶었다. 거기를 나오면서 그 앞뜰을 보니 또한 그 상자 같은 집만큼이나 특이했다.


화랑 한 가운데에 탁자와 의자가 있고 그 전면에 커다란 유리문이 있어서 뜰과 그 넓은 농작지대를 내다 볼 수 있게 되어있는데 그 시선이 뜰을 지나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게 둑이 가려져 있다. 앉으면 그 너머가 안 보이고 서서 꼭 까치발을 해야 그 너머의 확 트인 공간이 보이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그 건물의 길이만큼만 둑이 쳐져 있어서 시야를 딱 알맞게 가리는 것이다. 우리 같으면 당연히 그 둑을 무너트려서 시야를 확보할 텐데 이상하다 싶었다. 


아마 그 둑을 헐을 수 없을 수만큼 넓거나 무슨 사정이 있겠지 하면서 궁금한 마음에 그 둑에 올라서니 그 둑은 인공으로 일부러 만든 둑이었다. 탁 트인 공간의 시원함보다 갇혀진 공간이 주는 아늑함을 선택한 주인의 강력한 의지에 의해서 만들어진 둑이었던 것이다.

다 헤진 검정 구두에 허름한 차림의 옷차림으로 그저 어느 건물의 수위정도로나 보일 이 노인의 심성이 그처럼 섬세하다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가 안했다.


이어서 그 화랑 한 가운데의 탁자로 우리를 인도한 그가, 그와는 전혀 달리 서구적인 풍모의 딸이란 여인이 무엇인가를 받쳐 들고 나오는데 보니 우리나라의 전이다. 화상무늬가 아름답고 보존상태가 좋고 사방 30센티 정도에 두께가 5-6센티는 될 정도의 아주 멋진 통일신라시대의 전이다.


그가 김 선생한테 의견을 구하니 도자기 작가인 김 선생 의견은 진품인 것 같다는 것이다.

하지만 말을 듣고 있던 노인은 그것을 전에 3만 엔을 주고 샀는데 자기는 모조품으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모조품이라도 그처럼 크고 두꺼운 전을 만들기가 쉽지 않다고 김 선생이 부언한다.


모도꼬 말로는 예전에는 어느 회사의 사장이었는데 은퇴해서 이처럼 자기가 수집한 금속제품 만 전시하는 공간을 만들어서 상설전과 기획전을 하면서 노년을 보낸다는 것이다.

사람이 이처럼 늙기가 쉽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저절로 났다. 적당히 생업에 종사하면서 돈을 벌고 또한 취미를 즐기다가 그 취미를 살려 노년을 자기도 즐기고 남도 즐겁게 하는 일이 운도 따라야 하고 뜻도 깊어야 하니 여간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감동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아까의 그 ‘바오밥’에 들려 와이프 의견을 나중에 물어 볼 양으로 그 산호 목걸이 사진을 찍고는 또 다시 딸래미를 데리러 가야한다며 모도꼬가 우리를 어떤 중고 가게에 내려 주었다. 여러 물건들이 있었지만 대개가 가격이 만만치 않아서 나는 구경만 하고 있는데 김 선생은 210엔짜리 세모가방을 그의 딸래미를 위해 샀다며 좋아하는데 아주 탁월한 선택이어서 배가 좀 아팠다.


집에 돌아와 나는 오랜 만에 컴퓨터를 잡았다. 하지만 한국말이 안 돼서 그냥 여기저기 들락거리다 저녁을 먹는데 김 선생이 이가 아프단다. 아마 계속된 여행에 피곤이 누적 되서 잇몸이 뜬 모양이다. 대충 저녁을 ‘끄적이는’ 그와 달리 나는 상 위에 있는 타이 스프를 위시한 먹을 거란 먹을 거는 모두 ’아작‘을 냈다.


저녁 늦게 들어온 다께우찌와 우리의 미래도 과거처럼 여전하게 끈끈함을 유지하자는 맹세를 거듭 강조하다 11시에 잠에 드니 이번 여행의 마지막 밤이 슬쩍 넘어 가고 있었다.


마지막 날 아침 우리는 비교적 일찍 일어났다.

여자를 도와주는 의미에서도 우리가 그간 덮은 이불보를 모두 걷어내야 한다는 김 선생의 제안에 모든 이불보를 분리해서 한쪽에 쌓아 놓고 화장실에 쪼그리고 앉아 다께우찌의 일본 책 중에 한국의 도자기 특집이 나와 있는 책을 봤다. 그 많은 작품들이 다 일본에 흩어져 있고 대부분이 나로서는 처음 보는 작품들이다.


이런 것도 한국의 골동품이 맞을까 싶은 것도 많았다. 드러난 것도 이러니 그냥 묻혀 있는 것들은 얼마나 많을까 싶었다. 그저 안타까운 심정으로 열심히 책을 보며 일본에서의 마지막 ‘밀어내기’ 행사에 열중하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김 선생이 기겁을 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나 답지 않게 하도 조용하게 책을 보고 있으니까 밑에서 샤워하고 있는 중 알고 무심코 화장실 문을 열었다 머리를 산발한 귀신같은 놈이 쪼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에 기절초풍한 모습이다.

남을 놀라게 한다는 것이 미안한 한편 통쾌하기도 한 것은 왜일까?

내가 마음이 못되서 일까?


아침을 먹으면서 다께우찌는 김 선생한테 선물 받은 다완과 함께 그가 만든 작품들을 쭉 늘어놓고 말차 시연을 하잔다. 그 각각의 작품에 이름도 다 지었단다. 그는 김 선생처럼 원래는 도자기를 전공한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연구를 하고 애를 써서 독특한 작품을 만들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도자기를 오래 한 김 선생도 사뭇 감탄할 정도니 그 나름으로 작업에 대한 집념이 대단한 친구란 생각이 절로 든다.


아침 후 모도꼬가 주먹밥을 ‘무빙라이스’라며 내 준다 혹시 모르니 가지고 나가란다. 나의 배고픔을 못 참는 얄팍함에 대한 또한 자상한 배려다. 그녀의 주먹밥은 맛있다는 것을 익히 아는 터라 내 것은 물로 김 선생 거 까지 챙겨 넣고 아침에 챙긴 짐을 차에 싣고 집을 나서 동경으로 향했다.


가는 중에 지바 전통 먹을거리를 파는 곳에 들러 우리에게 선물을 사주는 다께우찌의 따뜻한 마음과 함께 동경 역에 들러 공항 가는 급행열차 표를 예매하고 화랑에 들르니 화랑 주인이 나를 불러 누군가 내 작품을 사려하는데 가격이 문제란다. 가격은 적당히 알아서 하라고 하고 그 작품을 생각하니 내가 가장 최근에 한 검정색 단색 작품 연작 중에 작은 것이다.


작품이 팔리고 안 팔리고를 떠나서 마지막 시도 작품이 일본 콜랙터에게 어필 되었다는 점이 희망적이다. 내가 여기까지 힘들게 날라 와서 가지고 가는 선물치고는 작다면 작은 것이지만 다음 작품의 연결고리가 될 것은 확실하기에 그나마 그것으로 이번 여행의 수확을 건진 셈이다.

 

시간이 돼서 그림 포장과 배송을 다께우찌에게 맡기고 우리는 동경 역에서 급행열차를 탔다. 공항까지 단 한 번도 안 쉬고 달리는 거의 ‘신간센’ 수준의 초특급열차다. 덕분에 우리는 비행기 출발 시간 세 시간 전에 도착해서 남은 시간을 주체치 못하면서 공항을 얼쩡거릴 수밖에 없었다.


별 망설임 없이 찍어 주는 출입국관리 직원의 선명한 날짜 박힌 도장이 그려진 패스포트를 받아들고 무관세 지역을 또 다시 얼쩡거렸다. 일본 떠나기 전의 마지막 우동이 간절해서 우동점을 찾으려 하니 복잡한 건물에 물어도 가기가 힘들어 겨우 비슷한 가게에 엉덩이를 붙였지만 컵라면밖에 없다. 할 수 없이 컵라면에 피자 한 쪼가리를 먹고 비행기에 올라 야경을 두 번 보니 한국이다.


출발이 30분이나 늦은데다가 돌아오는 것은 역풍이라서인지 갈 때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인천공항에 도착을 하니 한참을 기다리던 김 선생의 아들 수동 씨가 우리를 반가이 맞는다.

그리고 건물 밖으로 나오는 우리를 너무나 반갑게 맞는 것이 또 있었으니 우리가 제 시간에만 왔어도 내내 뒤에 두고 갔을 폭설이다.


분당은 눈이 안 온다고 하기에 공항만 벗어나면 눈이 없을 줄 알았더니 딱 우리가 늦게 도착한 시간 만큼에 알맞게 우리가 잘 아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계속 폭설이 우리의 길을 안내한다. 궁내동 톨게이트에 도착하니 1시 반. 무려 네 시간 가까이 걸려서 도착한 것이다. 이제 안성도 폭설이라니 김 선생이 갈 길이 걱정이다.


우리 집에서 같이 자자는 제안을 뿌리치고 안성으로 내려가야 하는 김 선생을 보니  집으로 향하는 내가 괜 실히 죄송하다. 비상식량으로 집에서 가지고 온 고구마와 피자를 건네고 나는 전 선생이 모는 택견 차를 타고 일본 간 사이 이사를 한 새집으로 향했다.


이래서 7박 8일의 일본 여행은, 다께우찌와의 20년간의 우정과 앞으로 최소한 20년은 계속 될 김 선생과의 우정을 확인하고 내 경력에 한 줄을 더할 전시를 소득으로 하고 그 끝을 맞았다.


*우리 여행 중에 건강하시던 분이 갑자기 병원에 입원하시어 우리가 도착 후 결국 유명을 달리하신 김 선생님의 어머님의 명복을 빕니다.


 

 이상하게 생긴 절.

 긴선생과 모도꼬.

 

 

 절간 내부.

 일본의 신세대 가옥?

 

 역사박물관의 공원

 

 

 

 

 역사 공원에서-비둘기를 노리고 있는 고양이.

 

 역사 박물관 내부.

 종이에 특별한 감성을 가진 일인들.

 

 야나기 무네요시 민예관에서의 한국 항아리- 그 옛날 우리의 항아리를 이처럼 알아 줬다는 것이 대단한 안목이란 생각.

 이 소반은 특별히 휴식용 탁자로 확대해서 이미테이션 한 것.

 내부.

 

 백자호.

 문자도.

 자수.

 

 민예관 앞에서.

 폭주족 카페.

 야채와 스프.

 폭주족 카페에서의 스파게티.

 모도꼬의 아침 3.

 보아밥에서.

 메탈 뮤지엄의 화장실 창에 놓인 꽃병.

 뮤지엄 앞의 뜰과 일부러 만든 둑.

 통일신라의 전.이미테이션?

 관장과 함께.

 보아밥의 목걸이들.

 와이프 의견을 들어 보려고 찍은 산호목걸이.

 모도꼬의 아침 4.

 마지막으로 친구의 집을 떠나기 전에 착깍!

 동경에서 공항가는 직행고속열차 내부.

 바로 날개 밑에 좌석에서 나리따를 바라봄.

 궁내동 톨게이트에 선 김선생-내리는 눈하고 앵글에 달라붙은 눈이 뒤범벅이 되서......

 톨게이트의 설경.

 나도 한장!

 분당 시내의 설야경.

 이상한 효과의 분당 설야경.

 일본 여행 중에 이사 간 집에서 하루를 자고 아침에 일어나서 바라다 본 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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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7.01.02 13:55

    첫댓글 여행후기 잘 읽었습니다.꼼꼼하고 자세하게 설명하시어 제가 두루 살펴본 느낌입니다.감사합니다

  • 07.01.07 17:12

    사진을 곁들인 후기 잘 보고 갑니다. 역사 박물관 정원의 사진은 갓 시집온 새악시 볼처럼.... 너무 아름답네요.

  • 07.02.06 15:44

    일본에 대해 관심이 많았는데 이렇게 자세한 후기 남겨 주어 너무도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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