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아이가 하나 있다. 생긴 건 물론, 하는 짓까지 나를 쏙 빼 닮은...... 성격 형성에는 어렸을 때의 성장 환경이 가장 중요하다는 정신과 의사로서의 내 믿음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녀석은 유전의 위대함을 내게 가르쳤다. 어쩌면 그렇게도 내 성격을 닮았는지. 난 늘 녀석에게서 어릴 적 내 모습을 본다.
난 녀석에게 장난감을 자주 사주는 편이다. 아이들의 발달에는 놀이와 상상이 무척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동안 변신 로봇에 열중하던 녀석은 경주용 자동차를 거쳐 요즘은 포켓 몬스터에 푹 빠져 있는데, 재미있는 건 녀석이 장난감을 고르는 방법이다. 수많은 장난감 중 하나를 고르는 데 대개는 별 망설임 없이 제 친구나 사촌형이 가지고 있는 것, 아니면 TV에서 본 것을 선택한다. 그런 장난감은 녀석과 친구들 간의 동질감을 확인해주는, 일종의 상징적 의미를 갖는 모양이다. 내가 보기에는 다른 것이 더 좋아 보일 때도 있지만, 내 의견에 상관없이 녀석은 요지부동이다. 그럴 때 난 녀석의 확신에 한편 놀라면서, 내 어릴 적의 기억을 떠올리곤 한다. 확실히 그랬다. 나도 어릴 적에는......
어릴 적 나도 한 살 위인 사촌형을 우상처럼 떠받들었었다.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형의 말은 무조건 옳게 들렸고 형이 가진 것은 무조건 좋아 보였다. 어머니를 조르고 졸라 형의 색칠 공부 책을 얻기도 했고, 훨씬 비싼 ‘월드컵 축구화’를 신고도 형의 싸구려 운동화를 부러워하기도 했었다.
물론 그 형만은 아니었다. 동네의 다른 형들과 친구들, 나는 그들의 말을 따라했고, 욕을 따라했고, 몸짓을 따라했으며, 생각을 따라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만의 세상을 만들었고, 그 속에서 우리가 ‘합의’ 본 것에는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마징가 제트보다 센 로봇은 없었고 팽이는 꼭 소금물 먹인 국방끈으로 돌려야 했다. 한양대학교 해부실에는 밤마다 유령이 돌아다녔으며, 복동이(내 기억이 정확하다면)라는 과자 봉투의 그림은 북한이 언제 어디로 남침한다는 암호였다. 미군이 철수하면 이 나라는 불바다가 될 것이었고, 박정희 대통령은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였다. 그렇게, 우린 믿었다. 의심하지 않았다.
그것은 진리요, 신앙이었다.
사람들은 말한다. ‘어릴 때가 좋았다, 철모를 때가 좋았다’고. 맞는 말이다. 아이들은 행복하다. 별다른 고민 없이 그저 아이들은 행복하다. 왜 아이들은 행복할까? 이 엄청난 세상에서,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밥벌이 걱정이 없어서? 인생이 괴로운 거라는 걸 몰라서? 그럴 지도 모른다. 그저 단순하기 때문에, 세상을 모르기 때문에 아이들은 행복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난 다른 생각을 해본다. 아이들이 행복한 건, 그들에겐 ‘진리’가 있기 때문이라는. 모든 것에 확실하게 질서를 부여하는 진리, 혼란스런 이 세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보여주는 진리...... ‘진리’를 가진 아이들은 그들만의 세상에서 행복하다.
모든 것이 확실했을 때, 마징가 제트가 가장 세다고 굳게 믿었을 때, 국방끈 아니면 안 된다는 데 추호의 의심도 없었을 때, 그 때 우리도 행복했었다. 부모님 말씀 잘 듣고 열심히 공부하면 훌륭한 과학자도 되고 외교관도 되고 대통령도 될 거 라고 믿었던 그 때. 미국은 ‘좋은 편’이고 소련은 ‘나쁜 편’임이 분명했을 때, 그래서 헐리웃 영화가 너무 멋졌던 그 때.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다고 믿었던 그 때. 세상에 아무런 불확실성이 존재하지 않았던 그 때, 우리도 우리만의 세상에서 행복할 수 있었다.
그러다 문득, 우린 알게 된다. 세상은 우리가 믿었던 것과는 다른 곳이라는 걸. 마징가 제트는 그림에 불과하고 국방끈은 그냥 싸구려 끈에 불과하다는 걸. 착해도 고통받는 삶이 얼마든지 있고, 정의의 심판 같은 건 영화에서나 있는 거라는 걸. 우린 또한 알게 된다. 세상엔 우리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걸. 결국, 우린 깨닫는다. 우린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했다는 걸. 우리 유년의 확신은 환상일 뿐이었다는 걸.
그렇게, 우리의 행복한 유년은 종말을 맞는다.
유년의 믿음이 사라진 자리에는 수도 없는 의문 부호만이 빼곡히 들어찬다. 세상은 왜 이 모양인지, 왜 인간은 서로를 뜯어먹고 사는지,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아니, 옳고 그른 것이 있기나 한 것인지, 그리고 난 뭔지......
선악과를 먹고 몰라야 좋을 것을 알게 된 아담과 이브처럼 우리는 유년의 낙원에서 쫓겨나 끝없는 회의와 혼란의 세상에 내던져진다. 이제 우리에게 확실한 건 아무 것도 없다. 모든 것에 새로이 하나하나 의미를 묻지만, 유감스럽게도, 의미는 손에 잡히지 않는다. 우린 끝이 보이지 않는 방황을 시작한다.
이제 안주할 곳을 잃어버린 우리는 불행하다. 그 불행을 우린 견딜 수 없다. 외롭고 괴로운 방황을 끝내기 위해, 유년의 가슴을 포근히 채워 주었던 확신의 그림자를 우리는 필사적으로 찾아 헤맨다. 사랑을 찾아 헤매고 이념을 찾아 헤매고 믿음을 찾아 헤맨다. 우리가 닻을 내릴 절대 가치, 모든 것을 확실하게 밝혀 줄 굳은 믿음, 우리의 확신, ‘진리’를 찾기 위해.
그러나, 우리에게 남는 건 실망뿐이다. 어린 날의 확신처럼 우리를 채워 줄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마침내 우린 깨닫는다.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을...... 못 찾은 것이 아니라 애당초 없었다는 것을......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라는 것을......
우린, 절망한다.
절망은 포기로 이어진다. 더 이상 답을 찾아 헤맬 기운이 남아있지 않은 우린, 이제 지친 몸을 누인다. 그리곤 거듭된 실망으로 상처받은 우리의 마음을 마비시킨다. 이제 더 이상 묻지 않는다.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에 대해, 인생에 대해, 인간에 대해. 이제 우린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늘 그래왔던 습관 그대로, 늘 살아왔던 관성대로 그저 하루하루를 버텨낸다.
이제, 우린 ‘살아진다’.
그러던 어느 날 절망에 신음하며 하루하루를 버티던 우리의 마비된 마음, 그 굳어버린 바닥을 뚫고 살그머니 하나의 싹이 돋아난다. ‘동조’라는 이름의......
그 싹은 어린 날의 확신과 무척이나 비슷하다. 아주 단순하다는 점에서, 아주 배타적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채워준다는 점에서, 아니 채워주는 것 같이 느껴진다는 점에서. 싹은 절망의 상처를 가린다. 상처는 감쪽같이 아문 것 같아 보인다. 회의와 혼란을 면해 보려는, 그리하여 다시 행복해지려는 우리의 염원을 빨아들여 싹은 무럭무럭 자란다. 곧, 싹은 우리의 마음을 지배한다.
이제 우리는 다른 이들과의 합의에서 ‘진리’를 찾는다. 스스로의 마음을 마비시킨 우린, 그래서 혼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우린, 이제 서로에게 의지한다. 그렇게 우린 동조를 통해 새로운 진리를 만들어낸다. 마비된 우리의 마음은 그 진리에 대해 더 이상 의심하지 못 한다. 그저, 당연한 것으로, 자명한 것으로 굳게 믿는다. 어린 날의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모든 것에 의문 부호를 메기던 까탈스러움을 벗어 던지고 우리는 동조의 문을 통해 다시 밝은 세상으로 나아간다. 이제 우린 다시 진리를 찾았다. 찾았다고 생각한다.
다시 우린, 행복해진다. 살아갈 힘을 얻는다.
행복해지는 건 좋은 일이다. 비록 그것이 마음의 마비로 얻어진 것일 지라도, 한낱 신기루에 불과할 지라도 그 자체로는 나쁠 게 없다. 이 엄청난 세상에서 주관적인 행복을 추구할 권리마저 없다면, 우리의 비참함을 늘 직시하며 살아야 한다면, 그건 너무 가혹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소박한’ 믿음에 의지하는 게 그리 잘 못 된 일은 아닐 것이다. 더구나, 모든 것이 불확실한, 모든 것이 상대적인 이 세상에서 우리가 애써 찾은 진리의 거짓됨을 누가 주장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진리에서 얻는 주관적인 행복에 안주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어른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아이가 아니라서, 우리와 달리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런 사람들이 있는 한, 우리의 행복은 늘 위태롭다는 것도 안다. 우린 그들을 분쇄해야 한다. 애써 다시 찾은 우리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
어른인 우리의 진리는 어린 시절의 그것처럼 소박한 믿음이 아니다. 어른인 우리에게 진리는 그 자체를 수호할 사명감을 부여한다. 이제 우리는 행동한다. 아주 결연히, 아주 단호히. 굳은 사명감으로......
종교의 맹신자들은 정신병자들이 아니다. 믿음을 나누는 형제들이 있는 한 그들은 외롭지 않다. 세상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며, 믿음 안에서 그들은 진리를 본다. 이성적인 증거를, 설명을 요구하는 자들은 모두 그들의 적이다.
국회에서 주먹다짐을 하는 아저씨들은 교활한 정치꾼들이 아니다. 자신을 선택해준 유권자들이 있는 한, 번쩍이는 금 뱉지가 가슴팍에 빛나는 한, 그들은 이 나라를 짊어진 ‘선량’들이다. 그들이 없으면 이 나라는 곧 망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온 몸으로 그들의 사명감을 실천한다.
80년 광주의 주역들은 일신의 영달에 눈 먼 정치군인들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당시 이 나라는 그들이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조국을 지켜야 한다는 엄숙한 사명감으로 그들은 국민들에게 총구를 들이댔다. 여전한 결속력을 과시하는 그들에게 역사의 평가 따위는 무의미하다.
지존파는 인간성을 저버린 악마가 아니었다. 깡패 소설에 감명 받은 단순함의 표본은 더욱 아니었다. 세상에 대한 증오로 뭉친 그들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의 주인공들이었다. 그들의 삶은 너무도 인간적인 동조의 너무도 파괴적인 결과였다.
‘에쵸티 짱’을 연발하며 괴성을 질러대는 아이들은 다리몽둥이 분질러 놓을 딸년들이 아니다. 같이 몰입하는 또래들이 있는 한, 그들은 다른 사람의 눈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야무지게 세상을 왕따시킬 수 있다.
동조가 있는 한, 한 번 해병은 죽어도 해병이고 문희준은 대한민국 최고의 라커이다. 동조가 있는 한 늘 요즘 세상은 무서운 세상이고 늘 요즘 애들은 골칫거리다. 늘 사상 최고의 불경기이고, 그건 늘 정부 탓이다.
우리를 지켜주는 동조가 있는 한, 더 이상의 생각은 필요 없다. 그저 그렇게 믿고, 그렇게 여기면 된다. 다른 생각은 그저 ‘따’하면 되고 헛소리하는 인간들은 그저 눌러버리면 된다.
어른이 된 우리에게 동조는 진리요 신앙이다. 우린 더 이상을 생각하지 못 한다. 마비된 마음으론......
"동조"는 나쁜 것만은 아니다. 아니, 꼭 필요한 것이다.
단지 아이라는 이유만으로 나는 내 아이의 말도 안 되는 소리(팔씨름을 해서 제가 날 이긴다는 둥의)에 동조한다. 재밌는 얘기라고 뭐라고 쫑알거리면 우습지 않아도 웃어 줘야 한다.
그래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내 아이가 "인정받는 나"로서의 자신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이성적으로 따지고 들고 구박을 하면 그 아이의 마음속이 어떻겠는가? 얼마나 외로울 것이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어른들의 맹목적인 동조를 통해, 친구들과의 "뭔지도 모르면서 이루어 낸" 합의를 통해 우리는 나의 생각이, 나의 감정이 옳다는 확신을 갖게 되고 이 확신을 통해 "나"라는 정체성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내면화되었을 때, 비로소 맹목적인 동조 없이도 나 자신의 가치를 존중하고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람의 어른이 되는 것이다.
어른이 된 후에도 우리는 동조를 필요로 한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우리는 사랑하고, 내가 틀렸더라도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 때 우린 위로를 받는다. 절대적인 가치는 어디에도 없는 이 엄청난 세상을, 동조마저 없이, 우린 살아갈 수 없다. 세상이 다 나를 버려도 누군가가 나를 알아 줄 때 우리는 힘을 얻는다. 그 힘으로 우린 고집을 부릴 수 있게 되고, 뭔가를 이루어낼 수 있다. 회의와 혼란이 엄습할 때 우린 동조의 힘을 빌어 꿋꿋할 수 있다.
동조는 우리의 생명력이다.
동조는 양면을 지녔다. 동조 없이 우린 살 수 없지만, 동조에의 지나친 집착은 우리의 생각을 마비시킨다. 이렇게 되면 맘에 드는 것과 옳은 것, 맘에 안 드는 것과 틀린 것의 경계는 사라져 버린다. 내가 믿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보지 않으려고 우리는 눈을 꽉 감아 버린다.
옳은 것은 옳은 것대로, 틀린 것은 틀린 것대로 놔두어야 한다.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대로...... 감정의 싸움은 감정의 언어로 해야 한다. 맘에 드는 것을 옳은 것이라고, 맘에 안 드는 것을 틀린 것이라고 우기기 시작하는 순간, 동조는 우리를 삼켜버린다. 주체로서의 우리가 소멸해버리는 그 순간, 동조의 노예만이 남게 될 것이다.
1998년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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