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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빛 풍경의 세계
―오하룡의 『몽상과 현실 사이』
강외석
어떤 형태로 존재하든 거의 모든 물질은 제한된 수명이 있다. 그 수명을 다하면 종명한다. 그의 시 「삼색 볼펜 한 자루의 명상」은 볼펜의 사용을 통해 종명에 대한 무거운 인식을 잔잔하게 드러내고 있다. 밤에 깨어 일어나면 곧잘 ‘유령’이 되는 체험을 하곤 해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사후세계의 예행연습’(「유령 체험」)이라고 간주하는, 1940년생인 그 역시 종명에 가까운 나이가 되었기 때문일까. 종명의 나이가 되면 대체로 앞으로 가는 일은 중지되고 뒤로 돌아서 자신의 걸어온 흔적을 더듬기 마련이다. 하긴 그것만도 다행이고 축복이다. 얼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바람에 인간의 존엄이 파탄이 나고 마는 끔찍한 경우에 비하면 축복 이상이다. 최근에 상재된 『명상과 현실 사이』는 「머리말」에 기술된 자신의 표현대로, ‘삶의 흔적’이고, 그 흔적을 더듬는 시집이다. 「저 물빛」은 그의 그런 의도적 지향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시편이다.
이제 빌어볼거나
손바닥 닳도록
무르팍 뭉개져 남아 남지 않도록
내 파닥이며 꾸중거린 물빛
맑아지게 빌어볼거나
빌지 않아도 될 지점에 이르러
드디어 보이는 저 물빛
―「저 물빛」전문
자신의 물빛을 ‘파닥이며 꾸중거린 물빛’이라고 말하지만, 누구의 물빛이라도 꾸중거려지지 않을까. 아니, 물빛은 꾸중거려지기 마련이다. 비단 그것이 더러움과 추함과 부끄러움을 함의하는 것이라 해도, 여기서는 꾸중거림이 문제가 아니라, 꾸중거림을 일으킨 그 주체의 생의 움직거림이, 그 움직거린 생의 영역이 관심의 초점이 된다. 그러니까, 그가 몸소 들어가 움직임으로써 꾸중거린 물빛의 그 세계가 어떤 세계이냐가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꾸중거림에는 생의 주체로서의 그의 고뇌와 번민, 격정과 분노와 함께 그의 사랑이 섞여 용해되어 있을 것이고, 나아가 그 꾸중거림이 그가 움직거린 생의 세계를 규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표현대로 ‘드디어 보이는 저 물빛’에서, 그 물빛 세계는 어떤 세계를 되비치어 보이게 할 것이다. 물빛은 영상적 기법이 추가된 시적 기능으로 보이기도 한다. 일종의 겹치기(O․L) 기법인데, 장면 전환용이다. 그래서 물빛에는 최소한 두 개 이상의 장면이 예비되어야 한다. 그 장면들이 어떤 내용의 장면이냐는 것을 밝히는 것이 이 글쓰기가 노리는 목적일 것인데, 그 목적 달성을 위해서 우리는 그의 눈에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저 물빛’ 속으로 직접 들어가서 그 물빛을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면에서 이 시는 읽기 서열에서 가장 먼저 읽혀질 무게를 가지고 있으며, 그 다음에 그의 다음 시로 넘어가야 마땅하지 않을까, 하는 읽기 수순을 가정해 보는 것이다. 순전히 내 착각이지만, 침묵 수행 중인 이 시도 그것을 암묵적으로 바라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의 눈을 따라가면, 저 물빛 속을 되비치며 나타나는 풍경은 가장 먼저 사람 혹은 삶의 흔적들이다. 그 중 하나는 그에게는 고통스러운 기억이 될 수도 있을 유년의 흔적이다. 그 기억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에 결부되어 있다. 그 기억과 그리움은 「사모곡」에서 절절하게 되비친다.
(…) 스물 몇 젊은 여자 아들 하나 어찌되던 키우려고 벽촌 중벽촌 한 호부라비에게 재취가던 날 그 여자 어떤 표정이었을지 멀찍이 그 여자에 비친 어린 아들은 어떻고 그 아들에 비친 여자는 어 떻고 아무리 쥐어짜도 상상 닿지 않을 뿐이나니 그리하여 그 아들 열 몇 살 되어 넓은 세상 나서 던 날 어두운 새벽 찬바람 부는 상남역 저쯤에서 여자 얼굴 점점 더 작아지느니 그 얼굴에 비치는 아들 얼굴은 어떻고 그 아들에 겹치는 그 여자는 어떤지 그 모습 지금도 어른거려 아련해지느니 지금 그 아들 칠순 넘었어도 그 여자 생각하면 이리 눈물이 마르지 않느니
―「사모곡」에서
‘그 여자 생각’은 지금도 마르지 않는 ‘눈물’의 아주 오래된 출처이다. 그는 일곱 살 때 재취한 어머니를 따라 고향 구미를 떠나 창원에 정착, 초등학교와 고등공민학교 1학년을 보내고 부산으로 옮겨가서 그곳의 한 고아원에서 생활하면서 중등구락부라는 대안학교에서 중학과정을 마친 것으로 되어 있다. 삶의 아픈 곡절과 신산함이 눈에 밟히는 그의 신상 정보이다. 어머니의 재취는 어떤 이유에서건 일곱 살 나이의 그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것. 생면부지의 낯선 가족의 일원으로 편입되었을 때의 어린 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난감하고 곤혹스러운 감정이 그로 하여금 열 몇 살의 나이에 상남역을 떠나게 했을 것인데, 그는 그런 자신의 심사에 대해 일체 내색하지 않는다. 그것은 곧 그의 안으로의 삼킴이고 혹독한 견딤이 아니었을까. 개인사는 간혹 드러내기 곤혹스러운 부분인데, 그것에 짙게 배인 부끄러움과 슬픔의 질량 때문이다.
위 따옴시의 형태로 개인사를 담담하게 공개한 그의 인품은 선하고 넉넉해 보인다. 「김경윤」에서 그는 의붓아버지의 실명을 공개하고, 무려 서른 살 차이의 두 분 사이에 대해 어색해 했던 일에 대해 이미 고인이 된 그분에게 사과를 표한다. 그리고는 ‘나와 동행이어서 그의 발걸음이 허둥거리지 않았기를 바라’는 바람을 띄운다. 동행은 아름답고 의미 있는 풍경이지만, 의붓아버지와의 ‘동행’은 ‘의붓’이 환기하는 낯설고 서먹한 사이 때문에서도 그런 풍경은 기대하기 어렵다. ‘몽상’과 ‘현실’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만큼이나 어렵다. 그러나 그가 그 동행의 실현을 이행하고 있는 데에서 몽상과 현실의 거리는 크게 좁혀진 것으로 보인다. 몽상과 현실의 거리를 좁힌 그이기에 새 밥과 데운 밥을 서로에게 밀어놓으려 벌이는 고부간의 아름다운 실랑이(「아름다운 실랑이」)를 놓치지 않는 눈을 보유했을 것이다. 그런 그의 눈은 선하고 따뜻해서 신뢰할 만한 눈이다.
또한 그런 그이기에, 20년 넘게 고된 노동의 연속인 식당 일을 하는 아내에 대한 헌사라는 생각이 드는 「아내 생각」은 소재의 사유화라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수긍이 된다. 그의 「시인이란」은 읽을 만한 시인데, “시인이 뭐지요” 하는 질문에 박종해 시인이 답하기를 “잘못을 순순히 시인是認하는 사람이 시인이지요” 했다던 그 물음과 답변이 이 시의 핵심인데, 그 물음은 우문인 데 반해 그 답변은 현답이다. 그도 그런 시인일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시인이다. 의붓아버지를 서운하게 헸을지 모른다며 뒤늦게나마 사과를 바치는 데에서 그는 잘못이 있으면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는 그런 시인일 것 같은, 또 아름다운 실랑이를 눈여겨보곤 그 실랑이가 아름다운 것임을 시인할 줄 아는 그런 시인일 것 같은, 그리고 가족을 위해 오랜 동안 고된 노동에 시달리고 있는 아내에게 측은함과 미안함을 표하고 자신의 못남을 시인할 줄 아는 그런 시인일 것이다.
일렁이는 물빛 속에 나타나는 또 하나의 풍경은 타인들의 흔적이다. 결국 지나고 보면 남는 것은 사람뿐이라는 세간의 말을 입증하기나 하듯 그의 시에는 유별나게 문학적 교유가 집중되고 있다. 이 시편들을 읽으면―『몽상과 현실 사이』의 대부분의 시편이 그렇지만, 이시영의 시편들이 문득 나타나 겹쳐진다. 흔히 서술시라고 일컬어지는, 산문과 시의 접경에 드는 시편이 압도적이다. 산문은 운문에 비해 언어 기능의 층위에서 덜 정교한 담론 형식으로, 언어 선택과 구성이 대체로 자유롭고 조작적이지 않다. 그러니까 산문으로 된 그의 시의 언어는 시적 상호 작용의 요소로 기능하기보다는 의사전달과 소통의 기능에 충실한 의미체계로 기능하고 있는 것인데, 그가 “시의 본령에 매달리기보다는 삶, 존재 등 본능적 감성에 충실했던 것 같다. 그래서 산문에 가까운 형식을 많이 취했다.”(「머리말」)고 했던 문맥이 그것을 확인해 주고 있다. 하긴 오랜 동안의 교유를 통해 발견한 지인들의 인간적 면모를 부각시키려는 의도를 고려하면 시적 진술보다는 산문적 진술의 형태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거칠게 보아도 그의 시는 이시영의 시와는 한두 가지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주관적 개입의 유무와, 시의 길이의 길고 짧음이다. 오하룡의 시는 이시영에 비해 주관적 개입이 스스럼없고, 시의 길이는 아주 긴 편이다. 그의 다수 교유시편에 대한 배후가 되는 시가 한 편 있다.
라디오 방송을 들으면서도 감동할 때가 있다니 관람객 200만을 넘겼다고 떠들썩한 다큐멘터리 영 화 <워낭소리>를 만든 이충렬 감독 음악을 담당한 아나야의 허후 감독과 해금을 연주한 민소윤이 다 같이 입을 맞추기나 한 듯이 “이 영화가 이렇게 사랑받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행 복합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듣는 것도 예사로울 수 없는 사건이긴 하지만 늙은 농부 내외의 사이에서 진짜 가족 같은 끈끈한 사랑으로 끝까지 버티어 자연사로 귀결되었다는 40년을 산 소 한 마리의 사실 하나가 나를 못 견디게 감동하게 하느니
―「워낭소리」전문
삶은 허구가 아니다. 허구가 아니므로, 특히 사람들과의 맺은 관계는 반드시 아름다운 관계로만 끝나지는 않는다. 깨어지거나 틀어지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아니, 그런 파탄이 부지기수이다. 그러니까 그때 그 당시에는 그에게 중요한 사람과 관심사이었던 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의 삶과 생각에서 영영 떠나버리거나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콰이강의 다리를 건너는 경우가 빈번한 것이다. 여차하면 깨어지고 틀어지는 성마른 이 세계에서 그의 오랜 교유는 의외다. 그러나 그 의외는 신선하다. 그의 시에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대개 문단 인사들이다. 그들과의 만남과 교유는 그들의 글 속 세계만큼 소박하고 순수하다. 그 소박하고 순수한 만남과 교유에서 우리는 워낭소리를 듣는다. 그 워낭소리는 늙은 농부와 소의, 믿기 어려운, 삶의 아름다운 동행을 함의한다. 소의 가치는 대체로 환금성에 있다. 이 ‘대체로’는 ‘일반적’과 ‘상식적’과 같은 개념으로 십중팔구는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늙은 농부는 이 ‘대체로’의 질서를 따르지 않는다. 더 엄밀하게 말하면 ‘대체로’의 질서를 엎어버린다. 놀라운 일이다. 그는 환금성보다는 40년 동안 ‘함께 산 것’에 더 중한 가치를 부여한 것일 것인데. 오랜 교유를 통해 자양되어 생성된, 그의 무수한 교유시편은 워낭소리의 맥락에서 그것의 연장선상에 있다.
언제나 앞장서고 본다 특히 내 일에는 궂은일이나 좋은 일이나 우선 나서고 본다 그와의 우정 사 십 년을 헤아린다《작은문학》만드는 일이나 출판사의 사소한 듯한 일도 뭔가 도움이 되겠다 싶 으면 전화하고 달려온다 정의의 투사 같다 내가 혹시 모순된 세상일에 흔들리기라도 하면 중심 잡는 일도 그가 도맡는다 동화작가답게 동심에 찬 천진스러운 표정으로 어떤 때는 형님처럼 시집 여러 권 낸 시인답게 날카롭다 비뚤어진 현실과 맞부딪칠 때에는 찬바람이 일 만큼 맵고 싸늘하나 부드러울 때는 솜털처럼 한없이 부드럽다 뒤돌아보면 내 약력상의 몇 항목도 그가 챙겨 가능한 것 이다
―「동화작가 임신행」2연
거의 특정 인물의 ‘傳’에 가까운, 상당히 느슨한 그냥 산문이다. 그래서 시로서 읽기에는 곤혹스럽다. 그러니까 ‘傳’에 가까운 이런 시가 압도적으로 포진해 있다는 것인데, 이시영의 시가 이미지를 활용하여 대상의 특징적 면모를 느슨한 듯 미학적으로 포착한 기법의 시라면, 오하룡의 시는 이미지에 의거하지 않고 진술 위주의 일상 담론 형태로 기술하고 있는 수준이다. 그의 시의 공간에 불리운 그의 지인은 방창갑, 의사 박병래, 박경수, 지율스님, 이종환, 이선관, 강신률, 변상봉 화백, 김호년, 윤상운, 유자효, 조남훈, 전종진, 김성춘, 김용길, 박종해, 이재금, 이상개, 강준희, 이준웅, 오인문 등이다. 이들만이 아니다. 단편적으로 소개된 인물 또한 무수히 있다. 이들을 대거 자신의 시적 공간에 불러내어 모습을 드러내게 한 그의 저의는 무엇일까. ‘몽상과 현실 사이’라고 했을 때, 그 둘 사이는 서로 닿을 수 없는 엄청난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데, 이들에 대해 그가 한 줄 한 줄 서술하고 그 서술이 진전되어 가는 즈음해서 그 둘 사이에 걸쳐 있던 아득한 거리감은 조금씩 사라지거나 없어지거나 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들기도 한다. 그래서 이들을 대거 불러냄에 대한 이런 가정을 해 볼 수 있다. 이들은 그의 몽상 속에서 현실로, 또는 그의 현실 속에서 몽상으로 사는 존재들이 아니었을까.
물빛의 또 하나의 세계는 ‘몽상과 현실 사이’에 있는 접점을 찾기 어렵거나 극단적인 대립으로 인해 그 둘의 양립이 불가능한 세계이다. 그 하나는 통일과 분단의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과거 불합리한 모순의 세계가 빚어낸 상처의 세계이다. 그 상처는 유전되고, 그 유전된 상처는 대를 이어 계속 헤집어서 아물지 않는다. 그 상처는 지루한 장마만큼 지루하다.
지난 밤 몽상하였네
양쪽에게
이러지 말고 우리 통일하자
멋지게 중개 맡을 그런 사람
만나는 몽상하였네
그가 나서면
양쪽이 그냥 마음 열게 되어
이산가족 상봉 때처럼
서로 얼싸안는 그런 만남
이루어지는 몽상하였네
그가 나서면
양쪽 지도자는 그 무엇도 꾸밈없이
서로 환하게 웃는 얼굴로
“이제 우리 평범한 백성으로 돌아갑시다.”
시원하게 선언하는 모습 보이는
―「몽상」전문
이 시의 ‘몽상’은 ‘현실’이 되기 어려운 까닭에 몽상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인상이 짙다. 이 몽상은 바슐라르의 시적 몽상과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몽상이 현실의 따분하고 답답한 휘장을 걷고 아름다운 세계로 진입하려는 상상 작용이라는 점에서 그 두 몽상은 서로 맞닿는 부분이 있다. 몽상은 현실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 현실은 몽상을 헛되다고 빈축거리지만, 몽상이 부재하는 현실은 삭막하고 앙상하고 가난해질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몽상을 하고 몽상 속을 살기도 한다. 분단은 현실이고, 통일은 몽상이다. 백두 혈통이 절대지배체계인 북쪽 체제를 고려하면 통일은, 통일에 대한 몽상은 망상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몽상에 장애가 걸리는 것은 아니다. 과부하가 걸리는 것도 아니다. 한편, 몽상은 비논리적이다. 비논리적 무한대, 그것이 몽상일 것인데, 그러니 통일은 비논리적 무한대로 몽상해야할 대상이다. 그런데 그가 몽상하는 ‘그’는 누구일까. 아니 무엇일까.
그는 「그리운 사람」에서도 ‘그’를 몽상하고 있다. 통일을 앞당겨줄 백범과 같은 ‘그’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기실 백범도 3․8선을 넘어 북쪽의 절대 권력과 마주 앉아 민족 통일의 길을 타진했지만 허사로 끝나지 않았던가. 문익환 목사 역시 그 절대 권력과 손잡고 통일을 앞당길 줄 알았건만, 악성 소문의 덫―‘문익환 목사는 안기부의 프락치다’(「문익환 목사, 그」)―에 걸려 불의의 최후를 맞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가 있을까. 그러니까 ‘그’는 몽상이다. 혹은 ‘그’는 그의 몽상이 만든 낭만적 허구일 수도 있다. ‘그’에 대한 그의 간절한 기다림만큼이나 그의 몽상은 깊어진다. 그런데 그는 몽상과 현실이 비례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을까.
그의 몽상은 비단 통일에만 걸쳐 있는 것은 아니다. 친일문제로 인해 갈등과 오해를 빚고 있는 노산 이은상에게서도 그의 몽상은 이어진다.
노산 선생 친일 행적 있는 양 혐의 씌우더니
문맥 무시하고 3․15 폄하했다 억지 부리더니
이승만 독재정부 나팔수 노릇했다 떼쓰더니
박정희 정권까지 싸잡아 독재 부역했다더니
한평생 양지 지향 기회주의적 삶 살았다더니
그 모두 진실이 아니자 노산문학관 안된 것을
마산의회 결의 무슨 평가 결정판인 양 몰더니
―「억지」전문
인간이 범한 죄 가운데 기독교의 원죄 말고는 씻을 수 없는 죄는 없다. 그러나 이 민족에게는 꼭 하나, 예외가 있다. 바로 친일 행적이다. 이 그물에 걸려들면 구원은커녕 그 어떤 해명도 용납되지 않는다.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다. 주홍글씨와 같은 것. 문제는 친일 행적이 있다고 주장하는 쪽과 그것은 ‘진실이 아’니라 ‘억지’라고 주장하는 쪽이 서로 강경하게 맞선 가파르고 날선 충돌이다. 이 충돌의 끝에는 끝없는 소모 논쟁만이 무단 횡행할 뿐, 타협점은 없는 것이다. 지리멸렬한 현실이다. 그래서 그는 몽상을 한다. 그의 몽상은
“여보게들, 그대들이 문제를 삼기에 나도 노산 선생의 행적에 의구심을 갖고 있었네. 그런데 이번 에 마산문협 사람들이 해명한 자료를 보니 곡해한 부분이 있는 걸 발견했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주장을 접고 지나친 부분이 있었다면 사과하고 노산 선생이 제대로 지역에서 대접받도록 협조하는 것이 어떻겠나?”
―「몽상」에서
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큰 어른(을) 그’리워하는 몽상이다. 이 어른은 바로 그의 시적 자아라고 할 만한데, 평소 그가 그렇게 주창해오지 않았던가. 그 주창을 반대쪽에서 흔쾌히 수락해 왔던가. 따라서 이 몽상은 그의 소박한 바람에 그치고 마는, 현실화되지 못할 몽상이다. 그의 몽상이 애처롭고 안타깝다. 간혹 어떤 싸움은 끝이 없는 싸움도 있다. 싸움도 대를 물려가는 싸움도 있다. 이 싸움이 그 싸움이 아니라는 보장이 없다는 불안감이 엄습하지만, 그렇게 될 것으로 예측되는 싸움이다. 다음 세대는 이미 이 싸움을 너무 익히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도 익숙한 싸움이 되었다. 물려받기도 했지만, 눈만 뜨면 눈앞에서 벌어지던 싸움이다. 그러니 그 싸움을 스스럼없이 보고 배울 수밖에. 할喝!
꾸중거림이 걷히면서 담담한 관조의 물빛 풍경이 나타난다. 「반가사유상」이 그것. 오하룡 이름을 가리어도 오하룡 이름이 선하게 보이는 시이다. 이 글의 맨 꽁무니에 이 시를 세우지만, 이 시는 이 시집의 맨 선두에 있다. 그의 사유의 시작이면서 그의 사유의 마무리가 되는 시라는 뜻이다. 거기에 꾸중거림이 가라앉은 차분한 물빛 세계가 있다. 자애로운 표정과 미소를 짓는 할아버지가 존재하는 세계, 곧 반가사유상의 세계이다. 내 바람이 시읽기에 개입했는지 모르지만, 반가사유상은 종명의 아름다운 태도를 담담하게 보여준다. 아니, 그런 세계의 모습을 약한 듯 강한 어조로 보여준다. 그 반가사유상이 그의 지척에 있다고 했는데, 그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할아버지 한 분
자애한 표정이었습니다
자꾸 그에게 눈이 가는 걸
어쩌지 못했습니다
할아버지는 가끔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반복하며 조는 것 같기도
미소 짓는 것 같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순간 나는 움직이는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이
내 지척에 있어
깜짝 놀랐습니다
―「반가사유상」전문
경남펜문학 2014년(10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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