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과 탈북자
아직은 남한생활이 엉성하기만 하던 때였다. 제 딴(깐)에는 그래도 더 나은 일을 해볼거라고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집에서 놀고 있었다.
어느날 수녀님께서 북한실상에 대해 강연을 할 수 있겠느냐는 전화를 주셨다. 그렇지 않아도 정착금만 까먹으며 어디 쉬운 돈벌이가 없나 하고 두리번거리던 나는 수녀님의 제의를 반갑게 받아들였다.
수녀님을 알게된 것은 정부에서 주선한 탈북자 자매결연 모임에서였다.
강연을 위해 찾은 곳이 마산에 있는 장애인 복지관이었다. 장애인들과 복지관을 운영하는 수녀님들 앞에서 북한실상 강연을 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장애인 복지관 건물은 비교적 조용하고 보기에도 안정감을 주는 곳이었다.
먼저 시설을 둘러보았는데 장애인들을 위한 교육시설과 재활시설, 휴식공간들이 훌륭히 갖추어져 있어 처음보는 나로서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살고 있던 함흥에는 북한 유일의 교정기구 공장이 있었다. 전국의 지체 장애인들이 교정기구 공장안에 있는 여관에서 일정기간 투숙하며 의족과 의수를 맞추었다.
특히, 휴전선의 지뢰에 다리를 잃은 군인들이 많았다. 내 사촌 여동생도 북한 함경남도의 어느 한 광산에서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광차 운전공으로 일하다가 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었다.
한 공장에서 전국을 대상하다 보니 뇌물과 안면이 작용하고 나도 사촌 동생 때문에 여기저기 아는 사람들을 찾아다니기도 한적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북한에서는 장애인을 "불구" 또는 "병신"이라고 부른다. 북한에서 "불구"라는 말의 언어적 의미는 "고칠 수 없다"는 의미인 반면에 "장애"는 극복할 수 있음을 의미 한다.
또 "불구자"라는 표현은 은근히 상대를 비하하는 뜻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나도 북한에서 살면서 장애인들에 대한 인식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장애인들의 손발이 되어주고 부모가 되어준다는 것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처녀인 수녀님들이 장애인들을 보살피는 것을 보고 어느 정도 그들의 정신세계에 대해 뭔가 알 것 같았다.
모두 제 자식에 대한 사랑은 한결같았는데 이곳에서는 그러한 어머니가 수녀님이시라니......
자기희생정신, 봉사하는 마음, 성령으로 순결한 그 마음이 바로 세상 살이의 온갖 유혹을 이겨내고 하느님과 성모의 뜻을 따르는 것이리라.
인간이 인간다움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영혼을 정화할 수 있는 스스로의 배움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어슴푸레 느끼고 있었다.
장애인들에게 북한실상을 이야기 하고난 자리에서 나는 뜻밖의 요청을 받았다.
휠체어를 탄 10대말쯤 되어보이는 장애인이 나에게 싸인을 요청한 것이다. 94년 김포공항으로 입국할 때 어떤 신문사 기자에게서 싸인을 요청받은 후 처음이었다.
그때는 취재의 가치가 있어서, 지금은 나의 무엇이 그에게 돋보였을까.
목숨을 걸고 탈출하여 위험과 고난을 이겨내고 남한까지 온 것이 잘보일지는 몰라도 가족과 혈육을 북에 남겨두고 혼자 탈출한 것은 잘했다고 할 수 없다.
순간 당황했다.
비록 그런 것을 모른다고 할지라도 싸인을 요구한다는 것은 좋아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장애인이 탈북자에게 싸인을 요구한다는 것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얼결에 볼펜과 수첩을 받아들었으나 쓸 것이 없었다. 뭣을 쓴단 말인가. 앞으로 나 같이 장애인을 병신이라고 부르며 멸시했던 사람들을 만나지 말라고 쓰고 싶었다.
하느님의 천사들인 수녀님과 같으신 분들만 만나서 용기있게 열심히 살라고 쓰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써 줄 수 있는 것은 내 이름 석자밖에 없었다. 그 외에 나에게는 자격이 없는 것이다.
나는 그에게 약속했다.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위해 노력하고, 수녀님과 같이 순수한 아름다움의 가치로 정신을 가다듬으며, 낯선 이방인에게조차 믿음과 존경의 싸인을 부탁해준 너의 맑고 깨끗한 마음을 갖고 세상을 살아가겠노라고 굳게 결심하며 마음 속의 싸인을 해주었다.
* 이 글의 내용은 국정원의 공식의견이 아닙니다.
<탈북자 : 김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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