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 명성산 억새
◇ 포천 명성산 억새는 가을이 되면 봉우리를 하얗게 은빛으로 도배하지만 석양을 받으면 황금빛으로 물든다.ⓒ 끼뉴스
주변의 산하는 홍조빛인데 홀로 은빛을 뿜어대고 있다. 경기도 포천 명성산. 수만 평의 산 구릉을 온통 억새가 뒤덮었다. 봄, 여름에 외면 받던 흉물스런 산이 늙수그레한 수염을 흩날리며 가을 관광객을 사로잡고 있다. 한때 울창한 숲이었던 명성산은 한국전쟁 때문에 대머리가 됐다.
정선 민둥산이 겨울이면 산나물을 얻기 위해 불을 놓은 뒤 억새로 유명해졌듯 명성산 역시 포화가 쏟아진 벌거벗은 상처 위에 억새를 피워냈다. 그 폐허의 땅에 몸을 맞대고 핀 억새들은 가을 봉우리를 하얗게 은빛으로 도배하며 또 다른 숲을 이뤘다.
명성산에 얽힌 슬픈 사연은 구구절절 이어진다. 명성산은 예전에는 ‘울음산’으로 불렸다. 신라의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향하다가 이곳에서 설움을 토해냈다고도 하고, 궁예가 왕건에 쫓겨 도망치다 이곳에서 울었다는 사연도 전해 내려온다. 기구한 운명을 지닌 사내들과 함께했던 산은 요즘도 포화소리 속에서 머리를 풀어헤치고 울고 있다.
풀섶에 누우면 누가 알까!
명성산 억새군락지로 오르는 가장 평이한 코스는 산정호수 주차장에서 비선폭포와 등룡폭포를 지나 오르는 길이다. 메마른 계곡길이지만 산정호수와 산을 에둘러 올라가는 길은 경사가 완만해 가족 산행에 좋다.
“아아∼, 으악새 슬피 우는∼.” 등산객들이 읊조리는 노래를 벗삼아 산행 1시간 30분이면 어느새 억새 숲에 다다른다.
길 끝에 모습을 드러낸 삼각봉 동쪽 구릉은 온통 억새 천지다. 사람 얼굴을 간지럽히는 이 억새 초지가 끝없이 펼쳐진다. 4∼5m 앞서가던 일행이 사라지면 엉뚱한 생각이 든다. ‘이대로 풀섶에 누워도 아무도 모르겠다’는.
명성산 억새 구릉은 포근하면서도 아늑하다. 펑퍼짐한 능선이 풍만한 젖가슴 같은 느낌이다. 억새 숲을 거니는 등산객들은 백발 속 가르마를 걷는 듯하다. 숨바꼭질하는 꼬마들은 “까르르” 웃음을 뿜어댄다.
석양 받으면 황금빛 찬란
명성산 산행은 코스뿐 아니라 시간에 따라 변화무쌍한 재미가 있다. 억새는 위치와 시간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는데 해를 등지고 치켜보는 억새는 짙은 갈색을 띠고 있다. 정상에서 해를 마주하는 억새는 은빛으로 부서진다. 석양의 억새는 찬란하다. 황금빛으로 물들며 가을을 화려하게 수놓는다.
궁예의 사연을 전하듯 억새밭 가운데에 궁예가 마셨다는 궁예약수터가 있고, 명성산 정상과 산정호수로 향하는 갈림길에는 억새군락을 내려다볼 수 있는 팔각정이 있다. 팔각정에 서면 멀리 한탄강까지 눈앞에 들어온다.
억새군락에서 내친김에 정상(923m)까지 오를 수도 있는데 이곳에서 자인사를 거쳐 하산하는 길은 가파르고 돌계단으로 돼 있으나 여유롭게 산정호수를 감상하는 재미가 있다.
늦가을에 호젓하게 감상
억새를 테마로 한 축제는 10월 중순에 막을 내렸지만 억새감상은 본격적으로 머리를 풀어헤치는 11월 중순까지가 적기다. 더구나 올해는 여름이 길어 억새꽃 피는 시기 역시 넉넉해졌다. 호젓하게 늦가을 억새를 감상할 수 있다.
하산길에는 올해 문을 연 평강식물원에 들러도 좋을 듯. 산정호수 옆에 위치한 평강식물원은 12개 테마정원에 5,000여 종의 식물을 갖춘 우리나라 최북단의 식물원. 가을이면 예쁘게 가꿔진 포천구절초와 들국화 구경 외에도 습지원 나무데크를 거닐며 데이트를 즐길 수 있다.
여행 팁
베어스타운을 지난 뒤 47번 국도를 이용해 포천 이동방면으로 진입한다. 산정호수 매표소를 거쳐 직진하면 산정호수, 명성산이고 좌회전하면 평강식물원 가는 길이다.
명성산 산행은 비선폭포-등룡폭포-억새-등룡폭포-비선폭포 코스가 3시간 30분 가량 소요된다. 비선폭포-등룡폭포-억새군락을 거친 뒤 자인사로 내려오는 4시간 코스 역시 아기자기한 재미가 있다.
이동 근처는 포천에서 유명한 두부요리집들이 늘어서 있으니 이곳에서 배를 채워도 좋을 듯. 돌아오는 길에는 한화리조트 온천(534-5500)이나 신북온천판타지움(535-6700)에서 산행의 피로를 풀 수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