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 운조루와 타인능해 쌀뒤주
전남 구례군의 운조루(雲鳥樓)라는 고택이 있다. 이 고택은 지리산 자락의 산과 연못으로 둘러싸여 있어 풍수지리학상 남한의 3대 길지(吉地)라고 말하는 금환낙지(金環落地) 즉 하늘에서 옥녀가 금가락지를 떨어뜨리는 형상이라는 명당자리에 당시 대규모의 국가건축의 책임자로 경험이 많은 조선 영조 52년(1776년) 삼수부사를 지낸 낙안군수 류이주(柳爾胄)공이 지은 99칸의 전통양식의 양반 가옥이다.
그 고택의 운조루(雲鳥樓)라는 이름은 중국의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귀거래혜사(歸去來兮辭)에서 따온 글귀인데 “구름 위를 나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이라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이 집이 단순히 300년 가까이 된 고옥이라는 것뿐만 아니라 멋과 철학 그리고 따스한 온정이 흐르는 집이다.
1. 류이주와 운조루
류이주씨 선조들은 본디 대구직할시 동구 입석동 지금의 비행장 가까이서 살았다.문화유씨 곤산군파 (崑山君派) 30대 영삼(1675~1735)과 영천최씨사이에서 세아들중 둘째로 1726년에 태어난 그는 힘이 장사였다.청운의 꿈을 품고 서울에 올라간 그는 당시 훈련도감 김성응 (1699~1744)눈에 띄어 스물여덟살 나던 해인 1753년(영조29)에 무과에 급제했다.《조선실록》의 기록을 보면 영조 31년(1755·2월)홍봉한(1713~1778)의 천거로 특채되었다. 그는 '새재'에서 호랑이를 채찍으로 쳐 잡은 장사로 알려져 있었다.마흔 두 살의 나이에 1767년 수어청 파총 성기별장이 되어 남한산성을 쌓는 일에 동원된다.
그는 이듬해 전라도 병마우후가 되어 1771년(46살)낙안군수가 되었다.그는 금주령을 위반한 죄목으로 1773년삼수(三水)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 가족을 거느리고 구례군 문척면 월평으로 왔다가 토지면 구룡정리로 이사했다고 구전되어 있다.《조선실록》의 기록을 따르면 그는 낙안군수 때 낙안세곡선이 한양으로 가던 길에 침몰한 책임 때문에 귀양갔던 것으로 나타난다.영조말엽 사색당쟁에 휘말려 유배형을 당했던 것 같다.유이주를 추천했던 홍봉환이 시파로 세손인 정조를 옹호하다가 벽파에 몰려 1771년 청주로 귀양을 갔다.홍봉한의 천거로 출세한 류이주도 그 영향을 입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영조가 죽고 정조가 등극하던 1776년 다시 벼슬길에 오른 것은 홍봉한의 재기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1776년 함흥 오위장(五衛將)으로 재등용되어 함흥성을 쌓는데 그의 능력을 발휘한다.
그는 구례로 몸을 피해 살던 시절인 1775년 그의 조카인 덕호(1756~1815)와 이곳 토호였던 이시화(1725~1784)의 딸과 성혼시켜 사돈간이 된다.처음 그가 살던 '구룡정'은 오늘날 금환락지의 중심지라는'용정'을 뜻한다.그는 15년 뒤인 1790년 삼수부사 재직때 조카인 덕호를 양자로 입양시키고 구례 토지면의 토호였던 재령 이씨 이시화와 인척관계를 맺으면서 이씨의 땅이었던 지금의 '운조루'자리를 집터로 양여받는다.1776년 산자락에 자리잡아 사태의 위험이 있고 고인돌마저 널려 있어 이곳 사람들은 개간을 꺼리던 자리에 집을 짓기위해 땅을 파던중 거북처럼 생긴 돌이 나왔다.길이 25센티미터,높이12센티미터,머리3.5센티미터의 이 돌은 집을 완성하고 1782년 함을 만들어 가보로 전해왔으나 1989년 도둑이 들어 훔쳐갔다.이 집은 1776년 9월 16일 상량식을 가졌고 6년만인 1782년 유이주가 용천(龍川)부사로 있을 때 완성했다.
집을 착공하자마자 정권이 바뀌면서 류이주는 바로 사면이 되어 정삼품인 오위장에 발탁되었다.함흥에 부임한 뒤 이듬해 상주 영장을 거쳐 82년(57살) 평안북도 용천부사로 전직되어 근무하였으므로 집을 짓는 일은 그의 조카인 덕호가 맡아했다. 물론 설계는 류이주가 해 털끝만큼도 차이가 없도록 엄명을 내렸다.덕호는 류이주의 사촌인 류이익(1737~1792)의 9남1녀중 차남으로 그의 아버지와 함께 종백부인 유이주를 따라와 구례에서 살다가 결혼도 하고 집짓는 감독을 맡은뒤 뒷날 양자가 되어 재산을 물려 받았다.
류이주는 운조루 터를 닦으면서 <하늘이 이 땅을 아껴두었던 것으로 비밀스럽게 나를 기다린 것>이라고 기뻐했다. 류이주는 운조루 곁에 사촌동생인 유이익 집뿐아니라 그의 맏형인 이혜(1721~1790)의 집도 지었다.
이 집에 남아있는 문서에 따르면 구례로 처음 옮겨왔을 때 노비는 5명이었으며 용천부사를 지내고 경상도중군으로 있던 1786년 그 집 노비수효는 11명으로 늘었다.풍천부사를 지내던 시절인 1792년의 노비는 9명이었고 이듬해 재산상속 문서에는 21명으로 늘었다.당시 재산은 집이 78칸,밭이2.5결,논이26결이었다.<당시 전답 1결은 1등전일 때 2,753.1평,3등전일 때 3,931.9평,6등전일 때 11,035.5평으로 수확량에 따른 과세의 기준이다.>
오늘날 이 집안의 가대를 지키고 있는 유홍수씨가 경작하는 밭이 12필지 3,004평(15두락),논이 11필지 7,897평(39두락)임야가 18필지 96,292평(32정보)대지가 4필지 1,772평이므로 전답이 조금 줄었다고 하겠다.
류이주는 그가 처음 이사와 살았던 '구만들'의 지명을 따 호를 귀만(歸晩)이라 했으며 그의 집을 '귀만와'(歸晩窩)라고도 불렀다.여러 채가 연결되어 점 자 모양을 갖춘 이 집은 안채,사랑채,행랑채,누마루채 및 방마다에 당호와 방의 별칭이 붙어 있으나 전체를 일러 '운조루'라 한다. 후손들은 류이주를 '삼수공'이라 부른다.
이 택호는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이란 뜻과 함꼐 「구름 위를 나르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이란 뜻도 지니고 있다.본디 이집의 이름은 중국의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귀거래혜사(歸去來兮辭)에서 따온 글귀이다.
도연명이 41살 나던해 평택 현령 벼슬을 살고 있었다.부임 80일만에 때마침 군에서 행정시찰을 온다고 하자 현의 관리로 관복을 차려입고 나가 독우를 맞이할 처지가 한스러웠다.도연명은 '나는 오두미의 녹을 위해 허리를 굽혀 시골의 소인배들을 섬길수는 없다'고 선언,관복을 벗어던지고 고향에 돌아가면서 <돌아가자!전원이 황폐해가고 있거늘 어찌하여 돌아가지 않는가>로 시작되는 귀거래혜사를 읊었다.
류이주는 이글 가운데서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오르고 새들은 날기에 지쳐 둘우리로 돌아오네>(雲無心以出岫 鳥倦飛而知還의 문구에서 첫머리 두 글자를 취해 그의 집 이름을 삼았다.
벼슬을 버리고 오미동을 찾은 그의 심정을 읽을 수 있는 작명이라 할 수 있다.
귀거래혜사
돌아가자!
전원이 황폐해지고 있거늘 어짜하여 돌아가지 않는가?
이제껏 내 마음 몸 위해 부림 받아 왔거늘
무엇 때문에 그대로 고민하며 홀로 슬퍼하는가?
이미 지난 일은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달았고
장래의 일은 올바로 할 수 있음을 알았으니,
실로 길 잘못 들어 멀어지기 전에
지금이 옳고 지난날은 글렀었음을 깨우쳤네
배는 흔들흔들 가벼이 출렁이고
바람은 펄펄 옷깃을 날리네.
길가는 사람에게 갈 길을 물으면서
새벽 빛 어둑어둑함을 한하네.
멀리 집을 바라보고는
기쁨에 달려가니,
하인들이 반겨 맞아주고
어린 자식들 문앞에서 기다리네.
오솔길에 풀이 우거졌으나
수나무와 국화는 그대로 있네.
아이들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니
술통엔 술이 가득하네.
술병과 술잔 가져다 자작하면서
뜰앞 나뭇가지 바라보며 기쁜 얼굴 짓고,
남창에 기대어 거리낌 없는 마음 푸니
좁은 방일지언정 몸의 편안함을 느끼네.
뜰은 날마다 돌아다니다 보니 바깥 마당 이루어지고
문은 있으되 언제나 닫혀 있네.
지팡이 짚고 다니다 아무데서나 쉬면서
때때로 고개 들어 먼 곳 바라보니,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오르고
새들은 날기에 지쳐 둥우리에 돌아오네.
해는 너웃너웃 지려 하는데도
외로운 소나무 쓰다듬으며 그대로 서성이네.
돌아가자!
세상 사람들과 사귐을 끊자!
세상과 나는 서로 등졌으니
다시 수레를 몰고 나가야 무얼 얻겠는가?
친척들의 정다운 얘기 기꺼웁고
금(琴)과 책 즐기니 시름 사라지네.
농군들이 내게 봄 온 것을 일려주며는
서쪽 밭에 씨뿌릴 채비하네.
포장친 수레 타기도 하고
조각배의 노를 젓기도 하며,
깊숙한 골자기 찾아오기도 하고
울퉁불퉁한 언덕 오르기도 하네.
나무들은 싱싱하게 자라니고
샘물은 졸졸 흘러내리니,
만물이 철 따라 변함을 부러워하며
내 삶의 동정(動靜)을 배우게 되네.
아서라!
천지간에 몸 담았으되 다시 얼마나 생존하리?
어찌 본심 따라 분수대로 살지 않겠는가?
무얼 위해 허겁지겁하다가 어데로 가겠다는 건가?
부귀는 내 소망이 아니요,
천국은 가기 바랄 수 없는 것,
좋은 철 즐기며 홀로 나서서
지팡이 꽂아 놓고 풀 뽑기 김매기 하고,
동쪽 언덕에 올라 긴 휘파람 불어 보고
맑은 시냇물 대하고 시를 읊기도 하네.
이렇게 자연 변화 따르다 목숨 다할 것이니,
주어진 운명 즐기는데 다시 무얼 의심하랴!
2. 타인능해 쌀뒤주
이 집의 가장 핵심이자 필수 코스는 곳간 채 앞에 있는 쌀뒤주이며 그곳에 새겨져 있는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씨이다. 타인능해라는 말은 다른 사람 누구나 마개를 열 수 있다는 뜻으로 양식이 없는 이는 쌀뒤주 아래편에 직사각형의 마개를 열어 언제든지 쌀을 퍼 갈 수 있는 뒤주라는 뜻으로 써 놓았다고 한다.
또한 이집의 주인인 유이주 공은 쌀을 가져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해 뒤주의 위치도 집주인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둬 주인의 따스함을 엿볼 수 있었다. 이 집에서 한해에 쌀을 200가마를 수확했는데 이 쌀뒤주를 통해 나갔던 쌀이 대략 36가마 정도 이고 밥 짓는 연기가 배고픈 이웃에게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굴뚝 높이도 1m도 안되게 아주 낮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다시 한번 감탄하지 않을 수 가 없었다.
각종 민란과 6·25전쟁 등이 휩쓸고 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운조루가 오늘날까지 그 모습을 고이 간직하고 지금도 그 후손이 잘 살고 있는 것은 집주인의 나눔의 마음도 훌륭했지만 받는 이의 마음까지 배려했던 아름다운 이야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최근 수원시 영통구 매탄2동 사무소에서도 ‘365 나눔 쌀통’이라고 적힌 쌀통을 본 적이 있다. 동 소속 주민자치 단체나 인근 지역 상인들이 십시일반 모아서 어려운 이웃들이 자유스럽게 가져다 먹을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것인데 쌀통을 만들고 매일 쌀을 채워준 후원자들과 동 직원들께도 경의를 표한다. 비교적 중산층이 많이 살고 있는 동네지만 어려운 이웃을 돕는 따스한 마음이 아마도 아주 오래전 운조루 유이주공 정신에서부터 전해져 온 듯 해 추운 겨울이지만 마음이 훈훈함을 느꼈다.
먼 옛날 유이주공이 연말에 쌀뒤주에 쌀이 남아 있으면 손님 접대를 소홀히 했다면서 하인들에게 꾸중을 했다고 한다.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독거노인, 소년소녀가장 등 어렵고 힘겹게 사는 많은 이웃들이 있다. 가진 자든 그렇지 못하든 지금이야말로 운조루의 사랑을 나누는 쌀뒤주의 지혜를 가슴에 새겨서 나눔과 배품의 삶을 함께 누릴 수 있는 쌀뒤주가 사방팔방에 널려있어 항상 쌀과 정이 차고 넘치는 아름다운 사회를 항상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