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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2.성결교단의 기원과 발전 3.성결교단의 교리와 신학적 정체성 4.사중복음의 성서학적 비판과 문제의 제기 5.잊혀진 전통의 발굴 그리고 대안의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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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들어가는 말
다른 교단들과 달리 유독 한국인 자신의 손으로 시작된 기독교대한성결교회(이하 성결교회)는 올해로써 창립 90주년을 맞았다. 한 세기 가까이 한국 사회에 정착한 성결교회는 지나온 세월만큼이나 역사의 질곡을 살아왔다.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유독 성결교회는 일제에 의하여 강제 해산되었고 6.25 전란에도 가장 크게 피해를 입은 교단이 되었으며, 1961년에는 교단이 분열되는 아픔을 겪었다. 그 역사의 질곡은 밖으로는 일제와 북한에 의한 교회의 '환란'으로부터 그리고 안으로는 사상적/신학적 '혼란'과 정치적 시행착오로부터 왔다. 성결교회의 지나온 날들은 실로 '고난의 가시밭길'이었다.
이제 성결교회는 교단적으로 선교 제 2세기를 눈 앞에 두고 있으며, 역사적으로는 새로운 천년기(millenium)에 진입하고 있다. 물론 성결교 기원의 때나 선교 초기의 사정과 비교할 때, 성결교 제 2세기의 한국 사회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른 상황을 맞을 것이 분명하다. 한국 성결교회는 민족이 개화되기 전 봉건사회에서 기원하였고 일제 치하에서 일제의 멸망과 그리스도의 재림을 선포하며 성결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그동안 한국 사회는 교육수준이 극단적으로 향상되어 봉건적 사고가 무너졌고, 소비 자본주의가 정착되며 놀라운 경제부흥을 이룩했으며, 기성세대의 사고구조로는 포용하기 힘든 신세대가 등장하여 엄연한 소비주체로 자리를 잡았다. 사회 곳곳에는 다원적 사고와 포스트모더니즘적 징후들이 나타나고, 유교적 가치 이념은 이제 그 실효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생태계 파괴의 재난은 이제 인간에 도달하여 남녀 성비의 파멸적 불균형을 가져올 정도가 되었다. 앞으로는, 자본주의 시장논리와 컴퓨터과학이 지배하는 국경/국적없는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교회가 존속해야 한다.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온 성결교회는 이 과격한 사회 변화의 복판에서 앞으로의 한국 역사와 인류문화에 백합처럼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을까? 신앙인이면 누구나, 자신의 살아온 경험(biography)이 자신의 신학을 창출하고 그것은 삶의 모본(script)이 되어 다시 자신의 삶을 결정짓는다. 예수의 고난이 있어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듯 그리고 가시에 찔려 백합화가 향기를 내듯, 혼란과 환란의 질곡을 살아온 성결교회는 새 시대를 열어갈 새 원동력을 잉태할 수 있을까?
이 연구는, 성결교회 역사적/신학적 정체성을 일반적으로 규명한 다음 나름대로 객관적/비판적인 입장에서 성결교 신학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고 그 대답을 추구하고자 한다. 이 연구의 목적은, 그렇게 함으로써 성결교회 선교의 제 2세기를 위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일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지나간 90년 동안 성결교회는 언제나 보수적/수구적/배타적 신학을 추구해 왔다. 그러나 미래 세대의 선교와 관련하여 문제의 관건은, 진보적/발전적/포용적 신학을 추구하되 성결교회의 전통과 함께 얼마나 성서적/역사적 정당성을 확보하느냐이다.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성결교회 선구자들의 좋은 전통을 계승하면서 또 현대인들에게 설득력을 가지고 미래 사회의 책임적인 지도세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연구는 먼저 교단의 역사를 개괄한 후, 사중복음을 중심으로 교단의 신학적 정체성을 고찰할 것이다. 이 때에는 '서술적'(descriptive) 방법을 사용하여 교단의 역사와 신학에 대한 소개가 되도록 할 것이다. 역사를 서술할 때에는 평이한 서술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성결교회가 핍박과 고난 속에서도 하나의 교단으로 형성/정착되어 가는가에 대하여 주목할 것이고 또한 순수 구령주의적 보수신학을 자처한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진보적 갱신을 위한 단서들이 발견되는가에 주안점을 둘 것이다. 신학을 소개할 때에는 사중복음(四重福音)을 중심으로 하여 전통적으로 강조되어 오던 교단신학의 특징을 지적하되, 요한 웨슬레로부터 19세기 미국 성결운동과 일본 동양선교회를 경유하여 한국 성결교회에 이르는 신학사적 전통 위에서 하도록 할 것이다.
다음으로 연구의 후반부에서는 역사적/신학적/성서학적 차원에서 사중복음의 성결교 신학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문제를 제기한 다음, 여기서 제기된 문제들에 대한 대답이 되고 장차 성결교단의 새로운 활로 모색이 될 수 있도록, 90년 성결교 역사의 잊혀진 단편들과 전통들을 찾아 재해석할 것이다. 이 단편들은 성결교회가 근대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과 관련되어 있다. 물론 그 잊혀진 단편들은 전통적으로 성결교 신학의 특징이라고 알려진 것들과 상당히 거리가 멀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전제가 있다. 성결교 지도자들의 신학적 저술이나 신학적 성명 그리고 신학화 작업이 없었어도, 단 한 번도 그 단편들이 교단신학이라고 말해진 적이 없었어도, 성결교회 신도들의 삶에 누적되어 나름대로 전통이 되고 역사가 되었으면 그때는 성결교 신학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이 모든 작업은 가급적이면 '설명적' (explanatory) 서술이 되도록 노력한다. 그리고 모든 면에서 성결교회를 대상화하여 제 3자적/객관적인 입장을 견지할 것이다.
II. 성결교단의 기원과 발전
1.성결교회의 기원과 '동양선교회 예수교 복음전도관' 시대(1907-1921년)
동경성서학원은 1901년 동양선교회(O.M.S.)의 카우만(Charles E. Cowman) 선교사 부부와 나까다 쥬지에 의해 일본에서 설립되었다. 이듬해엔 길보른(Ernest Albert Kilbourne) 선교사가 합류하였으며 특히 1904년에 건물을 새로 건축하여 이전한 후 동양의 여러 나라 출신의 학생들이 입학하게 되었다. 1904년 나까다의 설교에 감화를 받은 김상준과 정빈은, 나까다의 안내와 한 한국인 의사의 권유로 동경성서학원에 입학하였다. 1907년 3월 동경성서학원을 수료한 이들은 곧바로 귀국하였고, 5월 2일에는 '동양선교회 예수교 복음전도관'(경성복음전도관)을 설립하여 전도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의 거리 전도는 서울 장안의 화제가 될 만큼 성공적이었고, 결심자가 생기면 반드시 방문하여 신앙의 성장을 꾀하였다. 처음 6개월 동안 경성복음전도관은 272명의 구령자를 내었고, 1908년 말 집회에는 3,000여 명이 운집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리고 1909년에는 이미 4,000명의 신자를 갖게 되었다.
1910년 4월 조선 내의 모든 사역자들은 경성에서 성결총회를 참석하며 교제를 나누었다. 이 모임은 다음과 같이 지역별 담당자를 임명하였다:
진남포 지방 김혁준
송 도 지방 김두엽, 강태온, 최부인
경 성 지방 정빈, 이장하, 김상준, 박부인,안부인
안부인은 경성에서의 순회사역자로 임명한다.
여기에는 몇 가지 특기할 만한 사항이 있다. 첫째, 선교의 조직은 지역별 균형을 중시하고 있다. 둘째, 남성 지도자들과 함께 여성 지도자들을 책임자로 임명하고 있다. 선교적 역할은 서민층과 여성들에게 개방적이었고, 특히 여성들의 사회 참여는 타교단보다 훨씬 이른 시기부터 적극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셋째, 무엇보다도 이 모임은 성결교회의 첫 총회가 되었다.
1911년의 경성 성서학원 설립은 중요하다. 성결교회의 기원이 동경성서학원에서 수학한 정빈과 김상준에 의한 것이라면, 이들은 처음부터 조선에도 조선인을 위한 성서학원이 필요함을 절감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1907년 5월에 경성 복음전도관을 설립한 후 8월에 성경공부반을 개설하였고, 1908년 11월에는 비공식 성서학원을 개교하여 40명의 학생을 가르쳤다. 그러나 정식 성서학원은 1911년 3월 13일에 설립되었다. 경성 무교동 복음전도관 안에 임시로 교사를 정하여 경성 성서학원을 개원한 것이다. 조선성결교회 감독인 토마스(John Thomas)가 초대 원장이 되었고, 교수에는 정빈, 통역에는 이장하가 맡았으며, 10여 명의 남녀 학생들이 입학하여 3년 동안 집중적인 성서 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 후 1912년 6월에는, 죽첨정 3정목 35번지(지금의 충정로 3가 35번지, 애오개 마루터)에 새로이 건축/봉헌된 건물로 이전하였다. 그리하여 1912년 이명헌을 첫 졸업생으로 배출하였고, 이듬해 제 2회 졸업식에서는 남자 1명과 함께 여자 1명을 배출하였다. 최초의 여성 졸업생이 탄생한 것이다. 그 후 경성 성서학원은 1920년까지 43명의 남자와 19명의 여성 졸업생을 배출하고 있다.
1912년에는 최초의 성결교 예배당이 건축되었다. 카우만의 부인 레티(Lettie B. Cowman)가 친정 아버지의 유산으로 받은 1만환을 바쳐서 80평 정도의 벽돌건물을 지어 무교정 예배당을 봉헌한 것이다. 또한 1914년 4월 21일 '전국 교역자 수양대회'(제 5회 성결총회)에서는 처음으로 교역자에게 목사 안수를 거행하였다. 당시 성결교회는 "전도자"나 "전도사" 칭호로 만족하였지만, 교역자들과 신자들은 "선생," "교역자," "복음사," 또는 타교단처럼 "목사"라 호칭하기도 하였다. 그 후 왓슨(G. D. Watson), 길보른, 토마스, 라센(羅順)이 김상준, 이장하, 강태온, 이명직, 이명헌 등 5인에게 안수를 베풀었다. 이 때부터 성결교회는 교역자들을 정식으로 "목사"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성결교회의 선교와 타교단과의 관계도 특기할 만하다. 당시 교회협회는 장로교와 감리교로 조직되어 있었다. 이들은 서로 중복되지 않게 국토를 분할하여 선교 지역을 담당하였다. 이들은 동양선교회의 선교를 침입자로 여기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동양선교회는 그 결정이 해가 된다고 여겨 그들의 지역 분할을 따르지 않았다. 이들은 되도록이면 미전도 지역에 전도관을 설립하였다. 그래서 1915년 12월 당시에는 10곳의 전도관과 여러 곳의 순회 전도소가 있었다. 그러던 것이 1921년에는 획기적으로 32곳의 전도관으로 성장한다.
2.'조선 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 시대(1921-1943)
성결교회는 1921년 9월 제 12회 성결 수양대회에서 이름을 "동양선교회 예수교 복음전도관"으로부터 "조선 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로 바꾸고 드디어 하나의 교단으로 조직화하였다. 1907년에 설립된 "동양선교회 예수교 복음전도관"이 성결교회의 전신이었다면, 이제 비로소 하나의 교단이 되어가는 셈이다. 같은 해 동양선교회 본부조차 일본으로부터 경성으로 옮겨왔다.
1925년에는 드디어 {교리(敎理)와 조례(條例)}를 제정하였다. 이 책은 서문에서 "동양선교회가 주창하는 교리는 새로 만든 교리가 아니라 요한 웨슬레와 감리교회의 초시대 성도들이 주창하던 성경 중의 단순한 진리일 뿐이다"라고 천명한다. 이 책은 동양선교회의 신조를 토대로 하여 제정된 것인데, 후자는 1922년 미국 만국성결교회의 헌장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이 책은 (1) 교리편, (2) 정치편, 그리고 (3)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교리편에서는 "교회의 정치를 제정하는 이유," "동양선교회의 목적," 그리고 "신앙개조"를 천명하였다. 정치편에서는 "정치기관," "지교회," "봉사론"을 다루었다. 마지막으로 부록인 예문(禮文)에서는 혼례식, 세례식, 헌아식, 성찬식, 장례식, 안수식 등 각종 예식의 예문을 제시해 놓았다.
{교리와 조례}의 제정은 교단 발전에 크나큰 의미를 갖는다. 그동안의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신앙과 관행을 정리해주었기 때문이다. 이제 성결교회는 지방조직을 확대할 뿐만 아니라 개교회의 직원회 구조를 통일시킬 수 있었다. 직원회는 주임 교역자와 남녀 교역자로 구성되는데, 그 안에 교무, 서무, 재무, 회계를 두어 모든 교회 행정을 직원회 결의로 집행하는 체제이다.
{교리와 조례} 때문은 아니어도 개교회는 1920년대초부터 부인회와 주일학교를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주일학교를 위하여는 비슷한 시기에 교단 차원의 교육 재료인 {주일학교 독본}과 {주교지남}(主校指南)이 발행되었다. 교단 차원의 이러한 현상은 개교회의 조직들을 묶어 연합회가 조직되도록 하였다. '부인회 전국연합회'(1934년)와 '경성 주일학교연합회'(1943년)가 그 경우이다.
교회의 조직화는 개교회 차원만이 아니라 교단 전체에도 해당되었다. 1932년 연회에서는 정체 변경, 지방자치제 실시, 성서학원 학제 변경(6년제 3개월 수업, 9개월 현장실습), 장로제도 시행 등의 문제를 다루었다. 무엇보다도 성결교회는 교단의 정치구조를 감독제도로부터 지방자치제도로 바꾸었다. 이는 조선을 급속히 복음화하자는 '급속교화운동'의 취지에서였다. 1933년 총회에서는 전도사에게 장로 자격을 줄 것과 출판 서무부를 설치할 것을 결의하였고 또한 남녀전도사에게 총회 대표권을 허락하였으며(이상 법제부), 지방 성서학원을 설치하도록 하였고(교육부), 그 외에도 예배당 신축의 건(건축부)과 목사 후보자 추천의 건(인사부) 등을 활발히 토의하였다. 1936년에는 교단 헌법을 개정하여 의회정체인 총회가 감독정체인 연회로 바뀌고 이사회가 통치기관이 되었으며, 성서학원의 학제도 6개월 수업 및 3개월 실습으로 바뀌었다. 정치체제에 대한 교단 차원의 활발한 논의는, 성결교회가 하나의 교단으로 조직화되어갈 뿐 아니라 자기 정체성을 확립해 나아간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과정은 성결교회의 주도 세력이 선교사들로부터 한국인 지도자로 서서히 전환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경성성서학원 교수의 비율을 보면, 1924년에는 전체 8인 중 오직 2인만이 한국인이었으나 1926년에는 이명직 교수가 성서학원의 부원장으로 취임하면서 자국민 선교 시대를 열었고 1928년에는 전체 교수 11인 가운데 5인이 한국인이었으며 마침내 1935년에는 이명직 교수가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1929년 동양선교회의 주요 인사였던 길보른이 상해로 떠나고 또 동양선교회 본부조차 상해로 이주하면서, 재정을 제외한 각 분야에서 성결교회는 한국인이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교단의 양적 성장도 괄목할 만했다. 1918년의 18개소 전도관이 1921년에는 32개의 교회로 증가하였다. 나아가서 1928년에는 교회 63곳, 기도소 43곳, 성인 신자 3,726명과 주일학생 4,357명으로 증가하였다. 이 기간 동안(1921-1943년)의 급속한 교세 성장의 배후에는 {부표(符標) 신약성경}, {활천}, {기쁜 소식}, {부흥성가}, {주교지남} 등으로 대표되는 매우 활발한 문서 선교가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문서선교 활동에는 성서학원 교수들이 앞장섰다. 교단의 양적 성장은 국내에만 국한되지 않고 오히려 해외선교로 이어갔다. 1924년 이원근 전도사를 용정에 파송하여 교회를 세우게 한 것을 필두로 만주 선교가 시작되었고, 윤낙영 목사가 1927년 동경에 동경성결교회를 창설하여 일본 선교를 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성결교회에게 '조선 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 시대(1921-1943)는 또한 일제에 의한 수난의 시기였다. 성결교회에 대한 일본 제국주의의 박해도 더욱 심해져서, 일제 통치 하에 순교 또는 순직한 사람들이 많았다. 김동훈 전도사(조치원교회), 김은규(경성신학교 신학생), 박봉진 목사(철원교회), 정태희 장로(군산교회), 김 호 목사 및 김하석 목사(함흥교회), 한성과 목사(신의주교회), 손갑종 목사(은산교회), 김종율 전도사(석동리교회), 임용환 전도사(군위교회), 김안봉 집사(신안주교회), 전도부인 김묘생(진주교회), 전도부인 서순학(부산교회) 등이 바로 그들이다.
성결교회에 대한 일제의 압박은 교단 폐쇄로 이어졌다. 1943년 5월 24일 이후에는 저항이 심했던 서선(西鮮) 지방에서 예배를 금지하도록 했고, 같은 해 9월에는 전(全)성결교회에 폐쇄령을 내렸다. 이어서 동양선교회 재단법인의 적산 처리를 명령하였고, 그 결과 모든 성결교회의 토지와 건물이 처분되었다. 그래서 결국 성결교회는 1943년 12월 29일에 해산되고 말았다. 물론 신학교도 이때 함께 폐쇄되었다.
일제에 의한 성결교회 폐쇄는 타교단에 대한 일본의 처사와 대조되었다. 당시 천주교에는 '신체제'를 성명하였고, 구세군에는 '조선 구세교단'으로 명칭을 바꾸도록 하였으며, 감리교는 일본적 감리교를 창건하고자 일본 감리회와 합동할 것을 선언하는 정도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다.
일본 제국주의가 유독 성결교회에 대하여 극단적 조치를 취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신학적인 측면에서 찾아야 한다. 성결교회의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사중복음과 성서적 창조론 및 신론 등 교리가 일본 국체와 맞을 수 없었다. 특히 성결교회가 강조했던 재림사상은, 일본인이 세계의 심판자를 자처한 것과 모순되었다. 이 재림 교리는 일본 천황의 존엄성을 침해하고 일본의 국체를 손상시키는 것이라 판단하여 정죄한 것이다. 그러므로 재림사상이 강한 성결교회는 변화시킬 수 없으므로 아예 교단을 해산시켜버린 것이다.
3.'기독교 대한 성결교회' 시대(1945-현재)
1945년 8월 15일 조선이 일제로부터 해방되자 성결교회는 9월 첫주일 서울에서 300여 명의 신자가 신학교 강당에 모여 뜨거운 눈물로써 재흥예배를 드렸다. 같은 해 11월 9일에는 교단의 재흥 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고, 신학교 강당에서 '기독교 조선 성결교회 재흥총회'(제 1회)를 개최하였다. 실로 교단이 해산된지 2년만에 성결교 대표들이 모인 최초의 모임이었다. 이 역사적인 모임에서는 처음으로 교단 이름에서 "동양선교회"라는 단체명을 삭제하고 "기독교 조선 성결교회"라 하였다. 완전히 민족 독립교회로서 새로이 출범하는 순간이었다. 이제야 성결교회가 하나의 진정한 독립 교단이 된 것이다. 물론 성결교회는 1921년부터 전도관 형태에서 교단 형태로 바뀌었지만 지금껏 동양선교회의 지도와 감독 아래 있었고 재정적으로도 예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948년 국호가 대한민국으로 확정됨에 따라 "기독교 대한 성결교회"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참고로, 교단 명칭의 변천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1907 동양선교회 경성 복음전도관
1921 조선 야소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
1940 동양선교회 기독교 조선 성결교회
1945 기독교 조선 성결교회
1948 기독교 대한 성결교회
광복과 함께 신학교도 재건하였는데, 당시 수도의 이름이 "서울"로 불리움에 따서 신학교의 이름도 "서울신학교"로 하였다. 그리고 각 지방회의 성경학교를 여자 신학생 양성기관으로 활용하였다. 교단 재흥은 연합기관에도 나타났다. 부인회는 1946년 4월 그 명칭을 "성결교회 신생부인회"로 개칭한 후 총회 산하 '부인회 전국연합회'를 조직하고 각 지방회에는 지방연합회를 그리고 개교회에는 신생부인회를 조직하였다.
1947년 제 2회 총회를 전후로 하여는 야심적인 "기독교 조선 성결교회 4개년 계획안"을 마련하여 일천 교회 신설을 목표로 설정하였다. 그러나 이 운동은 "결코 교파 확장이나 사업적 허영심에서가 아니라 순구령적 정열로써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음을 겸손한 마음과 간절한 마음으로 전할 것"을 기본 동기로 하였다. 이 총회에서는 총리제도를 총회장제도로 바꾸어 대의정치를 따르도록 하였다. 이듬해 총회(제 3회)에서는 헌법 수정에 들어가 일제 하에서 신사참배 등의 문구나 반역자로 규정한 문구 등을 수정하였다.
그러나 일제에 의한 오랜 수난 끝에 온 재흥의 기쁨도 잠시였다. 6.25 전란에 의하여 수많은 목회자와 신자들이 총살 당하거나 납북되었는데, 성결교회는 그 중 가장 크게 피해를 입은 교단이었다. 순교자, 납북자, 체포 후 행방불명자, 남한이나 북한에서 투옥된 자 등 수난의 규모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병촌교회, 진리교회, 두암교회의 사건에서만도 137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집단 학살되었다.
6.25 전란 중에도 성결교회는 각 기관별로 꾸준히 활동하였다. 교육기관으로는 서울의 균명중고, 인천의 인천영화중학교, 여주의 대신중학교를 세워 선교의 기지로 사용하였다. 사회사업 기관으로는 대전의 영생양로원 외에 12곳의 고아원을 세웠다. 또 은퇴한 여교역자를 위하여 성락원을 세워 운영하였다. 전후에는 복구와 재건을 위한 사업이 활발하였다. 1957년에는 교단창립 50주년 기념으로 희년 기념관 등 희년 기념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교단 안으로는 전국장로회,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남전도회 전국연합회, 청년회 전국연합회, 교회학교 전국연합회 등 기관별 연합활동이 매우 활발하였다. 교단 밖으로는 국군을 위한 군목제도가 시작되자 교단의 많은 중진들이 군목으로 참여하였다. 특히 조선기독교연합회와 그 산하 기구인 재건연구위원회 등 기독교 연합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특히 조선기독교연합회(NCC) 활동은 성결교회는 물론 장로교와 감리교 등 여러 가맹 교단의 역사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해방 후 기독교의 큰 쟁점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강제적으로 만들어진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기독교교단)의 문제였다. 이것을 그대로 유지하자는 사람들이 '남부대회'를 조직하였다면, 이를 반대하며 교파 환원주의를 주장하던 사람들은 교파 사이의 이해 증진과 교파들 사이의 연합 및 공동 사업의 추진을 위하여 1946년 '조선기독교연합회'를 조직하였다. 성결교회는 장로교, 감리교, 각 선교사회 및 기관대표, 그리고 구세군 등과 함께 여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래서 조선기독교연합회는 성결교단의 박현명 목사를 제 3대 회장으로 선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미 장로교권에서는 신학적으로 보수와 진보의 진영으로 분열하고 있었다. 한편 6.25 전란 후 구호물자를 보내오던 미국의 복음동지회(NAE) 구제위원회는 1954년부터 국내에서 적극적으로 조직을 확대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김재준 교수의 진보적 교육에 반대하던 보수 진영은 여기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고 1954년 이후에는 감리교, 성결교, 하나님의 성회, 침례교 등도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성결교회는 조선기독교연합회(NCC) 가입 후 9년만에 1955년 총회에서 복음동지회(NAE)에 교단적으로 가입하였다. 그러나 복음동지회는, 회원이 기독교연합회나 국제 기독교연합회(ICCC)의 임원 혹은 중앙위원을 겸임할 수 없다는 행동지침을 결의하였다. 성결교회는 신학적 노선이 서로 다른 기독교연합회와 복음동지회 두 단체에 모두 가입되어 있었으므로, 교단 분열의 씨를 잉태하는 순간이 되었다. 그래서 1960년 제 15회 총회부터는 이 문제가 노골화되었고, 이윽고 1961년에는 교단이 분열하여 기존 서울신학교 측의 '기독교대한성결교회'(기성)와 성결교신학교 측의 '예수교대한성결교회'(예성)의 두 교단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III. 성결교단의 교리와 신학적 정체성
1.성결교회의 신학적 전통
성결교회의 신학적 정체성은 영국 요한 웨슬레로부터 19세기 미국 웨슬리안 성결운동으로, 웨슬리안 성결운동으로부터 일본 동양선교회로, 동양선교회로부터 한국 성결교회로 이어지는 흐름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동양선교회는 중생과 성결의 복음을 각 나라에 전하게 하려고 하기 위하여 조직되었다. 동양선교회가 내세웠던 신조는 다음과 같다:
1. 성경의 영감설(靈感說)을 믿는다.
2. 삼위일체(三位一體)의 하나님을 믿는다.
3. 인간의 타락에서 하나님의 은총으로 거듭남을 믿는다.
4. 그리스도의 보혈로 속죄함을 믿는다.
5.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믿는다.
6. 중생한 뒤에 믿음으로 순간적 성결과 원죄가 씻어짐을 믿는다.
7. 기독자의 신유의 특원을 믿는다.
8. 몸의 부활을 믿는다.
9. 천년전 재림을 믿는다.
10. 구원받은 자의 영생과 구원받지 못한 자의 영멸을 믿는다.
동양선교회의 선교를 받은 한국 성결교회는 1925년 드디어 {교리(敎理)와 조례(條例)}를 제정함으로써 신학적 정체성을 확립하여 나가기 시작하였다. 이 책은 서문에서 "동양선교회가 주창하는 교리는 새로 만든 교리가 아니라 요한 웨슬레와 감리교회의 초시대 성도들이 주창하던 성경 중의 단순한 진리일 뿐이다"라고 천명한다. 이 책은 동양선교회의 신조를 토대로 하여 제정된 것인데, 후자는 1922년 미국 만국성결교회의 헌장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교리와 조례}의 첫 부분인 교리편 중 특히 "신앙개조"(信仰個條)는 성결교회 신학의 골자를 형성하고 있다:
제 1절. 하나님. 오직 한 분이시고, 진실하시고 영생하시며, 권능과 자비가 무한하시고, 만물을 창조하셨고, 삼위일체의 제 1위이시다.
제 2절. 예수 그리스도. 성자(聖子)는 성부(聖父)의 말씀이시고 성부로 더불어 일체(一體)이시다. 복된 동정녀의 몸에서 잉태하시고 고난을 받아 죽으신 후 장사되었다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 그 안에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모두 가지셨고 그 둘은 분리할 수 없다. 그의 죽음은 인류의 자범죄를 사할 뿐 아니라 원죄까지 구속하신다.
제 3절. 성신(聖神). 성신은 성부와 성자께로부터 나오신 일위(一位)로서, 그 본체(本體)와 능력과 위엄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하나이시다. 칭의(稱義)는 성신으로 나고 성결은 성신으로 충만함이다. 성신은 은사와 열매를 주신다. 사람의 마음을 의롭게도 하시고 성결케도 하신다. 우리의 거듭남과 성결함을 증거하신다.
제 4절. 성경. 성경은 구원함에 필요한 모든 조건을 기록한 책이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인데, 이는 교회에서 작성한 책이나 영구히 의심할 것이 없는 책이다.
제 5절. 원죄(原罪). 원죄는 아담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유전된 육(肉)의 성질로서 죄악의 경향성이다.
제 6절. 자유의지(自由意志). 아담의 범죄 이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값없이 주셨으니 그를 믿고 아니믿는 것은 사람의 자유로 결정한다.
제 7절. 칭의(稱義).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옳다 함을 얻는 것은 자신의 선행(善行)이나 공로(功勞)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우리의 신앙으로 말미암는다.
제 8절. 성결(聖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성신의 세례로서 순간적인 경험이다. 그것은 원죄를 정결하게 씻는 것이고, 사람을 성별하여 하나님의 성지(聖旨)를 이룰 능력을 받는 것이다.
제 9절. 칭의 후 범죄. 사람이 의롭다 함을 받은 후 죄를 범하면 성신을 거역하는 죄는 아니요, 따라서 회개로써 다시 사함을 얻을 수 있다.
제 10절. 교회. 교회는 하나님께로 부르심을 받아 세상과 분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구주로 받아 믿는 산 믿음 받은 자들이 모여 조직된 단체이다. 교회의 사명은 순복음(純福音)을 본국과 외국에 전하는 것이다.
제 11절. 성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거룩한 예식은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 신자에 대한 거룩하신 뜻으로 은연중에 역사하시는 표로서, 이로써 우리의 신앙이 더욱 새롭게 되며 굳세게 되며 견고케 된다.
제 12절. 세례. 세례는 신자가 성신의 역사로 그 심령이 거듭난 것을 표시하는 예식으로서 이 예식은 성경에 의하여 침례(浸禮)로 행해야 한다. 부득이한 경우엔 약식(略式)으로 할 수 있다.
제 13절. 성찬(聖餐). 성찬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그의 재림하실 때까지 기념하기 위해 세운 예식이다. 이 성례는 그리스도께서 피로 우리를 구속하심과 그의 살로 우리의 영혼에 자양이 되는 것을 표시함이다.
제 14절. 신유. 하나님의 자녀들이 믿음으로 기도하여 병고침을 받는 특권이다. 그러나 의약을 의지하는 자를 비판해서는 안된다.
제 15절. 재림. 주께서 육체를 가지고 친히 천년시대 전에 재림하실 것이다. 그는 공중에 오셔서 성도들을 영접하시고 그 성도들과 함게 지상에 임하실 것이다. 그가 지상에 임하시기 전에 이스라엘인들이 한 곳에 모이고, 거짓 그리스도가 나타난 후에 오셔거 천년왕국을 건설하실 것이다.
제 16절. 운명(運命). 그리스도의 구원을 참으로 아는 모든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그 영원한 나라에서 영원한 영광에 참예할 것이다. 성도들은 심판을 면하고 영원한 쾌락을 누리며, 회개치 아니한 죄인들은 심판을 받아 정죄함과 형벌과 고통을 받을 것이다.
한국 성결교회는 1925년의 {교리와 조례} 이후 이같은 신앙을 유지해왔다. 이는 성결교회 헌법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그리고 그 중심 구조는 사중복음(四重福音)이다.
전통적으로 한국 성결교회의 신학적 정체성을 대표할 만한 사상으로는 사중복음을 든다. 사중복음은 원래 19세기 말 미국의 심슨(A. B. Simpson)의 부흥운동에 의해 처음 제기되었다. 심슨의 부흥운동이란 사회복음 운동에 반대하여 일어난 미국교회의 일종의 쇄신운동이다. 부흥사 심슨이 부흥회에서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사중복음을 강조하였으나, 이것은 교리 체계라기보다는 전도나 부흥회 설교의 강조점이었다. 그리고 그가 강조한 것은 바로 그리스도였다. 다시 말하여 그의 사중복음은 기독교 교리 중에서 다음과 같이 기독론적 구원론을 강조한 것이다:
1) 구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Jesus Christ our Savior--중생)
2) 성화케 하는 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Jesus Christ our Sanctifier--성결)
3) 치유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Jesus Christ our Healer--신유)
4) 재림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Jesus Christ our Coming Lord--재림)
비슷한 연대에 카우만과 길보른은 일본에 동양선교회를 설립하여 사중복음을 가르쳤고 이것이 한국 성결교회에 전승되었다. 사중복음은 부흥회 설교에서 강조되던 주제였고 소박한 전도표제였지만, 한국 성결교회 초창기인 복음전도관 시대부터 한국 사회의 상황에 적절한 순복음(full Gospel)이었고 성결교회의 대명사로 인식되었다. 길보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第一의 目的은 罪人으로 重生하게 하고, 重生한 자로 聖潔케 하되 또한 神癒의 權能을 나타내며 再臨하샤 千年王國을 建設하실 것과 全世界에 福音을 傳할 일을 가라칠 것이니라."
그러나 사중복음이 성결교회의 교리체계라기보다는 전도표제라 하더라도, 교단의 신학적 정체성을 규정할 만한 별도의 체계를 갖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성결교회 헌법}은 교단의 신학적 정체성을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사중복음으로 규정한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 성결교회는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개념(성결)을 택하여 교단의 이름을 정하였다. {성결교회 헌법}은 교단의 신학적 정체성을 다음과 같이 천명한다:
사중복음(四重福音)
본 교회의 기초교리는 기독교 개신교가 일반으로 믿는 복음주의니 그 교리의 요제는 본 헌법 제2장 제13조 이하에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창립 당시로부터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4대표제를 들어 강조(强調)하여 왔으니 이는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이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는 말씀에 부합되는 복음이다.
그러므로 성결교회의 신학적 정체성을 논할 때 사중복음을 떠나서는 불가능하다.
2.중생에 대한 강조
요한 웨슬레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롬 4:25) 만인을 위한 구속을 마련해 놓으셨다고 믿는다. 그러나 새로 태어나는 것 곧 중생은 사람의 선행이나 공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요한 웨슬레의 중생관은 또한 전례주의를 배격한다. 한 개인이 세례를 받았다는 것으로 자동적으로 거듭날 수 없다. 중생은 온전히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세례받음이 문제가 아니라, 세례받을 때의 고백이 문제이며 지금 그때의 그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느냐가 문제이다. 이러한 신념 위에서 웨슬레는 개인전도에 앞장섰고 큰 성과를 보았다. 그러나 개인 구령(救靈)을 향한 웨슬레의 열정이 교육이나 사회사업을 버리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이 문제에 대하여도 대단히 적극적이었다.
성결교회 형성에 신학적으로 크게 영향을 끼친 심슨은, 구원의 사건은 성삼위 하나님(Trinity)의 역사로서 그 자비하심과 사랑을 통하여 시작된다고 가르쳤다. 구원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전생애를 통하여 마련되었으며,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성령의 은혜의 역사로 말미암는다. 성부 하나님은 구원의 전체 계획을 세우시고 준비하셨으며, 성자 하나님은 이 땅에서 인간의 몸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성령님은 성부와 성자의 구원 계획과 역사를 성도의 마음 속에 와 닿는 사건으로 현실화시킨다. 이러한 구원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얻을 수 있다. 여기에는 죄를 깨달음,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이해함, 회개함,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감,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함, 예수를 구주로 믿음,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함,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살아감의 과정을 포함한다. 심슨은 칼빈주의 입장을 고수하면서도 알미니안-웨슬리안 구원관을 수정하여 수용하였다. 책임적 존재인 인간이 은혜 안에서 주어진 구원의 선물을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에 강조를 두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은 누구에게나 값없이 보편적으로 주어지지만, 개인의 구원은 이 은총을 자유의지로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에 따라 달려있다.
심슨이 칼빈주의 입장에선 성결운동을 대표하는 이였다면,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칼빈주의나 심슨과 비교할 때 중생에 대하여 조금 다른 가르침을 주었다. 물론 웨슬리안 성결운동도 정통 칼빈주의처럼 인간의 전적 타락을 인정하며 중생을 인간 본성의 급격한 변화라 본다. 그리고 그 변화는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는다고 본다. 그러나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인간의 전적 타락과 함께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인간은 타락했지만 '선행적 은총'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할 수 있다. 이것이 중생이다. 그러나 중생으로 말미암는 인간 본성의 급격한 변화로서의 중생은 하나의 '시작'이다. 중생한 자는 한 단계 더 높은 은혜를 체험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성화(聖化) 또는 성결(聖潔)의 은혜이다. 이들의 의인론(중생론)은 인간의 부패성을 부인하는 낙관주의에 빠지지도 않고 또 인간의 부패성을 너무 운명적인 것으로 보는 비관주의에도 빠지지 않은 채, 은총의 낙관주의로 나아갔다.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전통은 동양선교회를 통하여 한국 성결교회에 전수되었다. 나까다 쥬지는 사중복음의 첫 주제를 "신생"(新生)이라 부른다. 그의 신생이란 '영적인 생명을 부여받음'(요 3:3-7; 5:21; 고전 5:17; 엡 1:11)이며, 성결의 사역을 통하여 인간이 의로운 새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영적 변화를 뜻한다. 길보른은,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것으로 중생을 정의한다. 이는 사실상 신령적(神靈的) 중생으로서, 이로 인하여 구원을 받고 죄와 악한 교제에서 분리된 신생(新生)에 들어가는 것을 뜻한다.
1907년 한국이나 일본의 감리교 선교사들은 중생을 강조하는 개인 구령의 전도보다는 교육이나 사회사업 등을 통한 간접 선교에 더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성결교회는 심슨의 부흥운동에서 그랬듯이, 그 초창기부터 계몽주의적 성격을 띤 교육사업이나 사회사업 등을 권장하지 않고 직접전도에 의한 개인 구령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신학적인 면을 보면 웨슬리안 성결운동이나 동양선교회의 전통을 벗어나지 않는다. 한국 성결교회의 기원에 영향을 끼친 길보른과 그 창시자인 김상준은 중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이 하나님 압헤 올타함을 엇는 것은 우리의 善行과 功勞로는 엇을 수 업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功勞와 우리의 信仰으로 말매암아 義롭다 하시을 엇나니 이것이 明白한 敎理도 되고 마암에 眞正한 安心도 엇나니라.
죄인이 하루 아침에 그 죄로 퍼진 마음을 眞實하게 悔改하고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주신 新生命의 주 예수를 自己의 救主로 받아들여 믿으면 하나님께서 또한 그 約束하신 말씀과 같이 그 靈魂에게 永遠한 生命을....
성결교회의 사중복음 가운데 중생의 교리를 오늘날 {성결교회 헌법} 제 6조 1항은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중생(重生) 혹은 신생(新生)
주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가르치신 중생의 도리는 실로 기독교의 입문이며 천국시민의 자격을 갖추는 유일한 도리이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중생은 곧 영으로 나는 일이니 신비에 속한 영적 변화이며 모든 사람이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십자가에 달려 속죄의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성령의 역사로 새 생명을 얻어 그 사람의 심령과 인격 전체에 근본적 일대 변혁을 일으키는 것이니 이는 진실로 천국복음이다.
3.성결에 대한 강조
전통적인 웨슬레 신학자 조종남 교수는 성결교회의 성결 교리를 웨슬레의 성결과 동일선상에서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보다 현대적 교육을 받은 박명수 교수는, 한국 성결교회의 성결론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19세기 미국에서 형성된 웨슬리안 성결론이 과연 18세기 영국에서 형성된 웨슬레의 성결론과 동일한가를 물으며 다음과 같이 그 차이점을 밝힌다. 첫째, 웨슬레에게 성화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이요 타락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회복이며 근본적으로 그것은 인간 내면의 변화이다. 이에 반해 19세기 웨슬리안들은 성화를 원죄와 관련하여 이해한다. 즉 성결이란 인간 내면에 있는 '부패성의 제거'(eradication)라는 것이다. 둘째, 웨슬레도 성결을 성령의 역사라 보긴 하였지만, 성결의 체험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며 성령세례와 관련지운 사람들은 다름아닌 19세기 웨슬리안들이었다. 그들은 적어도 다음의 세 가지 측면에서 성결을 성령 체험과 관련시켰다: (1) 부패성의 제거는 인간적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성령의 순간적인 역사로 이루어진다. (2) 성령의 세례는 말세의 징조로서 특별한 종말론적 역사이다. 웨슬레는 성령론을 이런 세대주의적 방식으로 보지 않았다. 웨슬레에게 성령의 역사란 그리스도의 사역을 신자에게 전하여 주는 것이므로, 그의 성령론 이해는 삼위일체적 구조 안에 있다. (3) 웨슬리안들의 이같은 체험적 성령 이해는 경험의 신학과 관련되어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와 같이 감정이 의지를 지배한다고 본 그들에게, 종교 생활이란 성령의 역사에 의한 감정의 변화를 체험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박명수 교수는 나아가서 한국 성결교회 성결론의 뿌리를 제공한 19세기 말 미국 웨슬리안 성결론의 시대사적 배경을 '미국적 현상'으로 규명한다. 그 요체는 인간본성에 대한 칼빈주의 내의 신학논쟁이다. 칼빈이 인간의 전적 부패에 기초한 예정론을 주창하였고 이 교리는 결정론(determinism)으로 전락할 소지가 있었다면, 19세기 미국은 '새로운 미국 건설'의 꿈을 가졌고 예일의 신학자들은 오히려 이에 부응하여 인간의 자유의지와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면서 인간의 전적 타락을 부정하였다. 반면에 19세기 미국의 웨슬리안들은 한편으로는 이 신학자들을 따라 인간의 자유의지를 중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자유주의적' 입장을 반대하여 성결의 교리를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19세기 미국 웨슬리안들은 인간의 죄를 원죄(유전죄)와 자범죄로 나누어 생각하였다.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인간의 본성 안에는 '부패성'이 생겼고 이것이 아담의 후손 즉 모든 인간에게 전가되었다. 이를 "원죄"라고 부른다. 웨슬리안들의 관심은 외적인 죄 즉 자범죄에 있지 않고 내적인 죄 곧 부패성에 있다. '용서의 은총'은 인간의 자범죄에 한한다. 그러나 인간은 죄의 뿌리(원죄)를 제거하지 않고서는 결코 죄로부터 자유할 수 없다. 죄로 말미암아 부패성이 인간 마음 속에 들어왔다면, 인간의 부패성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제거될 수 있다. 그래서 '용서의 은총' 이외에도 '정결의 은총'이 필요하다. 이는 인간의 부패성을 씻어 죄의 뿌리를 제거해버리는 은총이다. 용서의 은총을 칭의라고 한다면, 정결의 은총은 성결(또는 성화)이다. 인간의 부패성이 '심령의 병'이라 한다면 이는 중생과 성결의 두 단계로써 치유될 수 있다. 중생은 인간 내면의 부패성이 깨어지고 "성령의 새로운 법"이 우리 속에 거하기 시작하는 성화의 첫 단계이다. 우드(Robert D. Wood)는 말한다: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근본적으로 거룩한 행위(holy actions)가 아니다. 오히려 행위를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거룩한 마음(holy heart)이다. 착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착한 일을 한다.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악한 일을 한다."
웨슬리안들의 이같은 신학전통에 입각하여 성결교회는 {성결교회 헌법} 제 6조 2항에서 사중복음 가운데 성결의 교리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성결(聖潔)
이는 성도가 받을 성령 세례를 가리킴이니 주 예수께서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행 1:5)고 약속하신 대로 오순절에 제자들은 성령의 세례, 즉 성결의 은혜를 체험하였으니(행 2:1-4) 우리도 모든 사람을 중생으로 인도하고 중생한 처지에 있는 신자들은 성결의 은혜를 체험하도록 인도한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히 12:14).
성결교회의 성결론은 기독교 여러 종파들의 가르침과 비교된다. 첫째, 예일대학의 테일러 신학이나 보스턴 인격주의(Boston Personalism) 등 진보적 감리교 가리침과 대조된다. 이들은 인간의 원죄를 부정하면서 인간 자아는 죄성의 근원이 아니라 존귀의 근원이며 성결이란 부패성의 제거가 아니라 인간성의 회복 즉 자아의 완성이고 성결한 삶은 사회 안에서 책임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이들이 도덕의 준수를 강조했다면 성결교회는 인간 내면의 변화에 강조점을 둔다. 둘째, 정통 칼빈주의와 대조된다. 이들에게 중생은 성령에 의한 인간 본성의 급격한 변화이고 성화는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자의 완전이란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는 것이고, 이에 비하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육체성과 관련된 부패성을 가지므로 온전한 성화가 이 세상 안에서는 불가능하다. 이에 반하여 웨슬리안 전통에 입각한 성결교회의 성결론은 부패성이 인간의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고 함으로써 인간 육체를 죄악시하지 않는다. 기독자의 완전 즉 온전한 성결도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완전이 아니다. 그것은 육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부패성을 제거한 후 온전히 이루는 성화이다. 셋째, 오순절파와도 다르다. 오순절운동을 이끈 자들은 성결 체험 이후 새로운 체험을 추구했고 그 결과 방언과 입신의 체험을 했다. 이들은 이를 제 3의 축복 또는 불세례라 하면서, 성령세례는 성결이 아니라 방언이라 하였다(Benjamin H. Irwin, Charles F. Parham 등). 그러나 성결교회는 성결을 강조하지 않는 종교체험이 비도덕적인 데로 흐르는 것을 경계한다. 방언, 입신, 신유가 중요하지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이러한 체험이 아니라 성결이다. 성령의 역사는 인간 내면의 변화 즉 새 사람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운동이 성결운동으로 이어질 때에만 건전하다.
박명수 교수는 웨슬리안 전통을 따른 한국 성결교회 성결론의 신학적 특색을 다음의 네 가지로 규정한다. 첫째, 개신교의 구원론을 보다 깊은 차원에서 다루었다. 기존의 죄론과 칭의론이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추구하도록 하는 면에서 소극적이었다면, 성결교회의 성결론은 바로 이 점에서 한 차원 높은 구원의 교리를 펼친 것이다. 둘째, 인간의 죄성을 심각하게 인식하면서도, 이들의 강조점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은 죄성에 대한 승리이다. 셋째, 이들은 성결을 윤리적인 것으로 제한시키지 않는다. 성결교회 헌법은 성결을 성령세례로 정의함으로써 성령을 통한 하나님 체험(성령세례)이 성결한 삶(윤리)의 조건임을 분명히 한다. 마지막으로, 성결운동은 신자의 참신자화이다. 전도운동이 불신자를 신자로 구원하는 것이라면, 성결운동은 이미 구원받은 자를 참신자로 만들게 하는 운동이다.
4.신유에 대한 강조
본래 요한 웨슬레는 신유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주된 관심은 약을 통한 치료였다. 그래서 그는 진료소를 세우고 직접 병자들을 치료하였다. 19세기의 웨슬리안 성결운동가들도 신유에 대하여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신유가 중요하기는 해도 성결과 같이 모든 신자에게 필수적인 체험으로 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9세기 웨슬리안 성결운동 가운데 만국성결연맹은 성결과 동일하게 신유를 강조하였다. 미국 남부 성결 집회에서 성결의 체험과 신유의 기적이 동시에 체험되었기 때문이다. 심슨은 신유의 신학을 기독론적으로 발전시켰다. 아담의 타락으로 죄와 질병이 세상에 들어왔다면 그리스도의 사역은 사죄와 신유를 가능케 하였음을 그는 주목하였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인간 육체의 귀중함을 드러냈고, 그의 부활은 신유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인간의 몸은 하나님의 아들이 취할 만큼 귀중하다. 한마디로 '몸을 위한 그리스도'의 신학인 것이다.
신유를 성결과 관련시켜 이해한 사람은 카터(Kelso Carter)와 갓비(William Godbey)였다. 카터는, 질병의 뿌리가 인간의 부패성에 있다면 성결은 신자에게서 이 부패성을 제거할 뿐만 아니라 질병으로부터 해방시키기도 한다고 주장한다. 죄악의 정복은 본질적으로 질병의 정복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갓비의 신유론을 따르면, 중생이 죄책(guilty)을 제거한다면 성화는 부패성(depravity)을 제거한다. 반면에 영화는 인간의 연약성(infirmity)을 제거한다. 영화는 부활을 통하여 완성되지만, 현재의 신자는 부활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부분적으로 연약성을 정복할 수 있다. 그러다가 마침내 주의 재림이 이루어지면 지상의 성도는 죽음을 맛보지 않고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될 것이다.
이러한 신유론은 동양선교회에 전달되었다. 나까다 쥬지는 신유를 사중복음 가운데 세 번째 주제로 삼았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병자가 일어나는 것이라 가르쳤다. 길보른은, 신유란 예수 사역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으로 이것이야말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 중 하나라고 강조하였다. 그는 복음의 단순성으로 돌아가 현재에도 주께서 질병을 고치신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신유를 구원의 결과와 연관시키지는 않았다.
신유에 대한 동양선교회의 전통은 초기 한국 성결교회에 영향을 끼쳤다. 그들에게 신유는 의약을 사용하지 않고 오직 믿음과 기도로써 병 고침을 받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성결교회의 창시자 김상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信者가 病이 나거든 그 罪過를 깊이 살펴보아 悔改해야 됨을 認定하고, 祈禱하면 醫藥을 쓰지 않더라도 主께서 주님의 能力으로 鬼神이 나가게 하고 罪過와 不治의 病을 勿論하고 한 번 按手하심과 한 마디 말씀으로 낫게 함을 이른바 神癒라 한다.
그렇다고 김상준이 의약품의 사용을 전면적으로 부인한 것은 아니었다. 신유란 세상의 의약을 사용치 않고 치료의 은총을 입는 것이지만, 병든 자의 신앙을 따라서 의약을 사용하는 것도 죄가 되지는 않는다고 보았다.
이러한 전통 위에서 한국 성결교회는 {성결교회 헌법} 제 6조 3항에서 성결교회의 사중복음 가운데 신유의 교리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신유(神癒)
이는 신자가 하나님의 보호로 항상 건강하게 지내는 것과 또는 병들었을 때에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나음을 얻은 것을 가리킴이니 이 은사는 우리 육신을 안전케 하는 복음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께서 모든 신자들에게 이적이 따를 것을 언명하였으니(막 16:17-18) 병 낫기 위하여 기도한다든가 안수하는 일은 당연한 특권이다. 그러나 신유를 믿는다 하여 의약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신유의 복음은 하나님께서 그의 선교에서 신령한 은사와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것을 힘있게 증거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선교가 마귀와의 영적 대결이라면 신유는 놀라운 계시 사건이 된다. 그래서 성결-전도를 능력 선교(power evangelism)로 변모시킨다. 신유는 또한 하나님의 구원 즉 성결이 육체에까지 구체적으로 임하는 것으로서 '육체적 성결'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유는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맛보는 것이다.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롬 8:21).
5.재림에 대한 강조
한국 성결교회 재림론을 한마디로 규정하면 그것은 다비(John N. Darby)에 의해 시작된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라 할 수 있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은 다비에 의해 처음으로 체계화되었다. 다비는 영국 국교회가 영국이라는 국가체제의 한 기관에 불과함을 깨닫고, 이런 제도적 교회가 아닌 신도들의 참된 공동체가 바로 참교회라 하며 플리머드 형제단에 가입하였다. 그는 스코틀랜드 글라스고우의 맥도날드라는 한 소년이 입신하여 본 휴거 환상을 성서적으로 뒷받침하였는데, 그의 이 휴거론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공중재림과 지상재림으로 나누어 이해하는 근거가 되었다. 여기에서 발단한 세대주의 종말론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을 보이고 있다:
1. 인류 역사의 전과정을 몇 세대로 구분한다.
2. 각 세대에 일어날 사건들을 정교한 순서와 시간표 안에서 이해한다. 그것은 공중재림--7년 대환난--지상재림--천년왕국--백보좌 심판--'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으로 마무리된다.
3. 무엇보다도 천년왕국은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4. 세대주의적 종말론은 해석학적으로 성서 특히 요한계시록을 문자주의적으로 해석하며, 이것은 미래주의적 해석(futurist interpretation)으로 귀결된다.
즉 계시록 등에 예언된 사건들은 아직 발생하지 않았고 앞으로 이루어질 일들이라는 것이다.
5. 세대주의적 종말론은 무엇보다도 인간과 역사에 대한 비관적 입장 위에 기초하고 있다.
요한 웨슬레와 웨슬리안들은 본래 '은총의 낙관주의'에 근거하여 후천년설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19세기말 웨슬리안들의 일부와 특히 만국성결연맹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받아들였고, 이것이 동양선교회에 들어왔으며, 여기에서 수학한 김상준과 정빈 그리고 이명직 등은 이 종말론적 사조를 한국 성결교회에 이식(移植)시켰다. 한국 성결교회의 창립자이며 경성 성서학원 초대 교수였던 김상준은, 요한계시록에 대한 한국 최초의 체계적/학문적 저술 {묵시록 강의}에서, 자신의 종말론에 끼친 영향에 대하여 이렇게 밝히고 있다:
저자가 여기에 기탄하고 애석하게 여기는 심정을 금할 수 없어서, 겨자씨와 같은 작은 믿음을 품고, 깊이 기도하는 가운데에 예수의 피에 마음을 씻으며, 성령의 빛에 눈을 떠서, 동서양의 영적 大家 곧 미국의 사이스와 와쓴 두 박사와 사사오 데쯔사부로우의 해설을 고루 채택하여(세속적인 해설은 하나 같이 떼어 버리고) 외람됨을 불구하고, 대략을 풀어 설명하오니....
김상준은 후천년설을 버리고 전천년설을 택하였다. 천년왕국에 예수께서 재림하시고 이미 재림하시기 전에 모든 사건이 끝난 상태에서 새로운 역사 가운데 시작하리라는 것이다.
{성결교회 헌법} 제 6조 4항은 성결교회의 사중복음 가운데 재림의 교리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재림(再臨)
구약성경의 예언의 중심이 그리스도의 수육탄생(受肉誕生)이라면 신약성경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재림이라 할 수 있나니 우리는 공중재림(살전 4:16-18)과 지상재림(행 1:11)을 믿는다. 요한계시록은 재림을 전적으로 계시한 성경으로 마지막에 [내가 속히 오리라] 한 말씀이 세번이나 거듭 기록되었다(계 22:7,12,20). 재림은 신앙생활의 요소이며(살전 3:13) 소망이요(살전 2:19-20) 경성이 된다(마 24:44; 25:13).
헌법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공중 재림과 지상 재림으로 이해하는 등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특징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목창균 교수는 김상준, 이명직, 김응조 등 성결교회 초창기 신학자들의 재림 사상을 자세히 연구한 후 한국 성결교회의 재림론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밝히고 있다:
1. 미래주의적 해석
2. 세대 개념의 수용
3. 미래주의적 전천년설의 주장
4. 환난 전 휴거의 주장
5. 천년왕국의 유대적 성격
이러한 특징들은 전형적으로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에서 나타나는 특징적 현상이다.
목창균 교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성결교회가 문자적 해석을 강조하면서도 영적 해석을 거부하지 않은 점, 그리고 세대주의가 환난시 지상교회의 존재를 부정한 데 반하여 성결교회는 그것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은 점 등 세대주의와의 차이점을 발견하면서, 한국 성결교회가 세대주의의 영향을 받긴 하였으나 세대주의를 신봉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1918년 김상준의 {묵시록 강해}로부터 1941년 이건의 마지막 글까지, 성결교회 신학자들의 재림론이 일관되게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입장에 서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성결교회의 재림론은 한국 성결교회의 확장과 관련하여 의미가 크다. 예수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에 대한 신앙과 대망 그리고 선포는 신자에게 성결한 생활을 유지하게 하는 명령(imperative)이 되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는 전도의 긴박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한국 성결교회의 재림론은 교단의 수난과 관련하여서도 그 역사적 의미가 크다. 김상준의 {묵시록 강의}가 최초의 학술적인 종말론 연구서인 것을 보면, 성결교회가 타교단에 비하여 종말론에 얼마나 예민하였는가를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성결교회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4대 전도표제 가운데 하나로서 전파하되, 일반대중을 직접 만나 전하였다. 당시 일본은 국수주의에 입각하여 신도(神道)를 중심으로 한 천황제를 일제 식민통치의 이데올로기로 삼았고, 이것은 신도와 천황제를 그밖의 종교들 위에 두는 국가신도체제였었다. 그러므로 한국 성결교회의 재림론과 일제가 갈등을 일으킨 것은 당연하였다. 따라서 전자는 후자의 끊임없는 감시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고, 마침내 교단해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1.중생: 케리그마와 신앙 지상주의의 문제
성결교회의 구원론 즉 중생관은 전체적으로 개신교 신학의 전형적인 경향성을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1) 인간의 전적 부패, (2) 죄로 부패한 인간을 위한 그리스도-케리그마(죄인을 위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승리의 부활), (3) 이신칭의(以信稱義)의 신앙지상주의('오직 믿음으로' 사람이 의롭게 됨)이다. 중생은 "자신의 선행이나 공로로써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우리의 신앙으로 말미암아" 얻는 의이다. 즉 "십자가에 달려 속죄의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중생은 또한 "하나님께로 부르심을 받아 세상과 분리"하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이것을 인식하고 선택/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른바 '선행적 은총'이다. 그리스도-케리그마에 대한 극단적 신앙지상주의로 나아갈 때 나타나는 문제점은 극단적 배타성이다. 기독교 신앙 및 관행과 다르면 타종교는 물론 심지어 한국의 전통문화조차 언제나 '우상'이 되고 척결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배타적 태도는 신앙인의 사회적 미숙성을 낳고 선교의 장애로 기능한다.
이 중생의 복음은 성결교 선교의 초기부터 한국적 상황에서 매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비판적으로 고찰할 점이 있다. 그것은 성결교회가 처음 이 중생의 복음과 구원론을 설파하던 당시 한국의 역사적 상황이며 한국내 성결교회의 사회적 상황이다. 당시 한국은 일제 치하에 억눌려 있었으며, 성결교회는 후발 단체로서 그 사회학적 유형은 하나의 소종파주의(sectarianism)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입장에서의 중생과 구원이란 배타적/독선적 대결 구도에서의 회심 체험일 수밖에 없었다. 부정적 역사관 그리고 비관적 인간관이 전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기류의 선포는 당시의 억눌린 청중들을 향하여 놀랍게 적중할 수 있었다.
현재 국내에서 성결교회가 차 지하는 위상에 대한 사회학적 접근은 중생의 성결교 신학에 대하여 한 가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선교 대상으로서의 현대인들은 어떠한가? 일제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됨으로써 그 '비관적' 역사관의 뇌관은 이미 해제되었고, 또한 성결교회는 이미 장로교 및 감리교와 함께 한국 개신교의 주요 교단으로 성장함으로써 더 이상 소종파라기보다는 엄연한 기성(established) 교단으로 정착되어 있다. 이러한 마당에서 성결교회는 첨예한 대결구도에서의 회심 체험만을 진정한 중생이라 이해하고 또 전파해야 하는가? 전적으로 변화된 상황에서 성결교회는 과거 한 세기 전의 신학 전통에 집착해야 하는가?
성서신학적 분석도 성결교 신학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성결교회의 {헌법}은 중생을 설명하면서 요한복음 3장 3절을 인용하지만, 이같은 신앙구조 기저에는 오히려 바울신학이 흐르고 있다. 케리그마는 분명 바울 이전의 전승에서 왔지만 바울에서 정형화되어 교회의 신앙과 관행에 적용되고 있다. 지적 우월성을 뽐내던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꾸짖음(고전 1:18-31)에서도 그렇고, 교인들 간의 판단과 정죄의 문제를 다루는 바울의 처방(롬 14:1-23, 특히 9절)에서도 그렇다. 고린도교인들의 범죄 문제를 다루던 바울의 권면에서도 그렇고(고전 6:1-23, 특히 3-11절), 고린도교회의 성만찬 관행에 대한 바울의 해석과 지침(고전 11:23-26, 특히 26절)에서도 그렇다. 어디에서든 바울은 교회의 현장과 신자 개인의 문제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케리그마로써 접근하고 있다. 행함이 아닌 '오직 믿음' 즉 바울의 그 신앙 지상주의조차 예루살렘교회 유대주의자들과의 극한적 대결구도에서 비롯된 산물이다(갈라디아서 이후의 서신들에는 갈라디아서에서와 같은 독설과 단호함이 보이질 않는다). '오직 성서로' 돌아가자던 루터는 '오직 바울에게로' 돌아가 바울의 '오직 믿음'을 외치면서 종교개혁을 일으켰다.
그러나 신약성서에서 바울의 서신들은 넓게 보아도 1/4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바울의 의도와 상관없이 읽혀져야 한다. 바울의 케리그마에 나타나는 '죽음'의 그리스도가, 복음서들에서는 한결같이 '삶'의 예수(예수의 생애)로 나타난다. 바울신학에서의 그리스도-케리그마에 대한 믿음 및 신앙제일주의가, 복음서 예수전승에서는 예수에 대한 인간의 또는 인간에 대한 예수의 조건없는 신뢰로 등장한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주시는 구원은 사후영생(死後永生)이라기보다는, 사회체제와 절절한 민생 문제로부터의 자유함이다. 그것은 케리그마와 무관하게 발생하고 있다. 바울이 지중해 연안 헬레니즘 세계(소아시아와 유럽)에서 활동하던 당시, 유대와 갈릴리 그리고 시리아에 존재했던 예수운동들에서는 한결같이 케리그마와 무관한 신학이 발전하는 양상을 보인다.
또한 현실적으로 인류를 공멸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 개인의 정신적/영적 죄이기에 앞서 자연계의 오염과 생태계의 파괴가 아닌가? 그렇다면 이론적으로, 신학적으로 말하여 구원의 여망은 어디에 있는가? 끊임없이 영과 육, 정신과 물질, 인간과 자연을 이원론적으로 나누어 생각하던 헬레니즘적 사유체계에 있는가? 아니면 그 모두를 하나로 생각하던 동양적 사유에 있는가? 바울의 신학과 거기에 기초한 개신교 신앙이 전자의 유형이라면, 후자의 유형은 복음서 예수전승 그리고 예수운동의 신학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새로운 시대를 맞는 성결교회의 구원론은 기로에 서 있다.
2.성결과 신유: '초월' 신앙의 문제
성결교회의 성결론과 신유론은 개신교 신학의 중심적/보편적 쟁점이 아니다. 이는 다른 여러 성결운동들과 성결교단의 독특한 신학적 강조점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신봉하면서도, 개신교의 다른 교단들처럼 성결교회의 인간관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전적 부패를 전제한다. 그러나 이 부패성은 사회의 구조나 인간의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 그래서 인간은 "마음의 변화"를 받아야 하고, 이 내면적 변화를 가리켜 "성결" 또는 "성화"라 한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이며, 인간 내면의 부패성이 깨어지고 "성령의 새로운 법"이 우리를 지배함으로써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는 것이다. 이 성결은 인간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성령의 순간적 역사에 의해 가능하다. 그러나 성결을 사회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로만 국한할 때에는 성결교회가 '심령화'의 길로만 나아갈 수 있다. 실제로 성결은 윤리가 아니라 "성령세례"라 함으로써 신앙구조가 탈윤리화, 초월화로 가는 시발점이 되게 한다. 또한 성결교회는 이 성령세례를 윤리적 성격이 강한 예수전승보다는(막 1:8; 마 3:11) 신인사상(神人思想)의 사도행전 본문(1:5; 2:1-4)과 관련시킴으로써, 성결교회의 성결은 자연 신유론과 은사주의로 흐를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장착하고 있다.
성결교회의 성결이 마음의 성결이라면 성결교회의 신유는 육체의 성결이다. 하나님의 구원 즉 성결이 인간의 육체에까지 구체적으로 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질병의 정복'이란 일종의 '죄악의 정복'이다. 그래서 성결교회의 지성적 선구자 김상준의 말대로, "信者가 病이 나거든 그 罪過를 깊이 살펴보아 悔改해야" 한다. 신유의 은총이란 "主께서 주님의 能力으로 鬼神이 나가게 하고 罪過와 不治의 病을 勿論하고 한 번 按手하심과 한 마디 말씀으로 낫게 함"이다. 이같은 신유의 신학 배후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성결교회의 신유론은, 질병의 심층엔 귀신이 있고 질병의 원인은 인간의 죄 때문이라는 전제 위에 서 있다. 그래서 이명직은 "신유와 속죄하심이 연결됨을 생각하면 죄로 인하야 발생되는 질병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하신 공로로 말매암아 치료함을 받나니라"고 말하며, 또한 "이상의 모든 원인을 고찰하면 직접으로든지 간접으로든지 모든 질병의 원인은 죄라는 것을 알 수 있나니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신유의 방법과 관련해서는 "한 번 按手하심과 한 마디 말씀으로 낫게" 한다고 말함으로써, 주술적 치유와 유사한 형태를 취한다. 그래서 성결교회는 신유가 미신적 행위라는 비난을 받았고, 김상준은 이에 대하여 변증론을 펴야만 했다.
성결교회의 성결론과 신유론은 한결같이 초월적 신앙의 경향을 보인다. 성결론은 일상적인 것을 세속으로 보며 그것을 초월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때때로 세계를 부정하며 현세를 무시하는 경향을 가질 수 있다. 이들은 속되기 때문이다. 신유의 신학도, 현상의 배후에는 영적 차원 그리고 영적인 힘의 세계가 놓여 있다는 사고구조를 갖는다. 즉 몸의 질병이라는 현상 배후에는 악령(인간의 죄와 그 원인이 되는 귀신)이 있고, 질병의 치유 이면에는 성령의 역사(악령을 물리치고 죄를 소멸하여 육체를 성결케 하는 힘)가 있다는 것이다. 성결교 신학이 지나치게 초월화의 경향을 보일 때에는 특히 재림 신앙과 결합하여 교단의 신앙과 관행을 타계주의로 빠뜨릴 우려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 성결론과 신유론은 그 심층구조에서 신학적인 모순을 노정한다. 성결론은 인간 마음의 일상성과 보편성을 세속으로 여기고 그것을 초월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신유는 초월적 신앙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또한 '몸'의 긍정이며 현실의 긍정적 수용이다. 달리 말하면, 몸의 정상성/평균성을 부정하지 않고 이를 긍정하며 오히려 이상적 형태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구조는 하나의 역사적 산물일 수도 있다. 몸의 정상성(wholeness)을 성결로 여기는 것은 구약성서의 정결체계와 및 예수 시대의 유대교 전통과 일치한다. 후자에서 예루살렘 성전과 그 제사제도가 정치와 종교 그리고 생활의 전부를 지배하던 성전국가 체제(temple state)의 모든 현상(status quo)은 '정상적'이며 따라서 '정결'(거룩)하다. 체제와 구조를 성결하게 보는 '현실 긍정의 해석학'인 셈이다. 성결교회의 신유론은 구조적으로 여기에 기초한다. 반면에 초창기 한국 성결교회의 세계관은 어떠했는가? 교회에게 일제의 모든 억압적 구조는 악마적이다. 이를테면 '현실 부정의 해석학'이다. 성결교회의 성결론은 구조적으로 여기에 기초한다. 그래서 양자는 서로 모순적인 전제 위에 서 있다.
성서신학적으로 분석하면, 성결교회의 성결론은 (1) 전통적으로 레위기 19장 2절의 "너희는 거룩하라 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거룩한 것과 같이"의 명령을 기초로 하여, (2) 로마서 7-8장에 있는 바울의 실존적인 고뇌와 투쟁을 모범(script)으로 하는 신학이다. 바울신학은 지나간 이천 년 동안 개신교 신학을 지배해 왔고, 성결에 대한 그의 고뇌와 투쟁은 성결교회 성결의 정의가 되었으며 궁극적 지향점으로 설정되어 있다. 특히나 개인적 성결을 이루기 위한 바울의 그 실존적 고뇌와 투쟁(롬 7-8장)을 모범으로 하여 웨슬레가 고뇌했고, 그의 계승자들과 성결교인들이 웨슬레처럼 되고자 바울처럼 되고자 투쟁하였다. 바울은 하나님의 계시도 구원의 여망도 역사의 지평을 넘어 외계로부터 온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가르침은 모든 것을 이원론적으로 생각하는 전형적인 헬레니즘적 사고구조에서 온 것이다. 바울의 세계관과 종교적/신학적 표현양식은, 하나의 무시적/무조건적 진리라기보다는 그가 헬레니즘 세계에서 헬라인들을 대상으로 목회하였기 때문에 차용하고 있는 수단에 불과하다.
그러나 초기 예수전승은 뜻밖에도 바울의 세계관과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진리가 자연계 안에 내재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구원도 삶의 지평 안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복음서 예수전승은 바울의 세계관과 정반대의 양상을 보이는 것이다. 구약성서나 예수 동시대의 유대교에서 종교적/신학적 지배 이념은 레위기의 성결 명령처럼 언제나 성결이었다(19:2). 그것은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를 구심점으로 하는 '중심'의 신학이었고, 제사제도를 통하여 하늘의 여호와께 도달하며 그의 거룩을 부여받으려는 '높음'의 신학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세리와 죄인 등 가장 '부정한' 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음으로써 가장 거룩해야 할 식탁을 더럽힌다. 그의 치유 기적은 거의 예외없이 부정한 자들과의 신체적 접촉을 통하여 발생한다. 심지어 이미 죽어있는 사체(死體)와의 접촉도 마다하지 않는다. 좋은 일을 위해서라면 가장 거룩해야 할 안식일조차도 무시해버린다. 예수 말씀들도 이같은 것을 '삶의 자리'로 하고 있다. 예수의 말씀을 보존하고 있는 말씀전승에서나 치유 기적과 식탁교제 등을 보도하는 행위전승 전체에서, 예수야말로 일관되게 '낮음'과 '주변'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성결의 명령'을 '자비의 명령'으로 바꾸셨기 때문이다: "너희는 자비하라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같이"(눅 6:36). 예수와 관련된 이같은 현상의 결과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당시 체제에서 '부정'하다고 여겨지던 여성들의 해방이다. 예수께서 구약성서나 유대교의 성결체계를 붕괴시켰다면, 성결교회의 성결론은 어디에 근거하는가?
복음서 예수 이야기들에서 신유가 예수 사역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하는 것은 물론 올바른 관찰이다. 그러나 기적 이야기들에 대한 심층적 해석의 결과는, 성결교회의 선구적 신학자들과 다른 결과를 가져다 주기도 한다. 예수의 기적은 신비한 능력의 행사 자체를 목표로 하지 않았다. '몸의 성결'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당시의 정결 체계로 볼 때 부정하게 여겨지던 사람들을 거룩하다고 인정한 것이다. 즉, 한결같이 사회적 경계 너머에 있던 그 자격없는 자들에 대하여 예수는 과격하게 개방적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을 향한 예수의 치유는 '몸'의 치유였으면서도 그 핵심은 언제나 사회적 치유였다. 방법에 있어서 예수는 그 정결체계를 유지하면서 그 안에서 그들을 성결하게 인정한 것이 아니라 그 체계를 폐지함으로써 그렇게 하였다.
신학적으로 분석하자면, 몸의 긍정 그리고 사회적 치유는 초월적 사고구조가 아닌 내재적 사고구조에서 온 것이다. 초기 예수전승 가운데 예수의 비유들은 그 전형이다. 비유들을 통하여 나타나는 예수는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시는 사람의 아들도 아니고, 죄많은 인생들을 위해 대신 죽고 다시 사는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도 아니다. 반대로 그는 기막힌 시상(詩想)을 가진 이야기꾼이며 이야기로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이다. 그러나 그 모든 신학적 전거는 비밀스런 이상도 아니고 천사를 통한 계시도 아니다. 오히려 팔레스틴의 시골 환경이며 농경의 생활이고 자연이며 그 과정이다. 하나님의 뜻은 초월적인 묵시나 계시를 통해 오질 않는다. 그것은 오직 자연과 인간의 일상사에 대한 관찰을 통해 온다. 거기에 하나님의 섭리가 '내재'되어 있다.
해석학적으로 말하여, 현대 교육을 받고 최첨단 과학으로 무장한 현대인들에게는, 인간 마음의 보편성에 대한 부정적/비관적 인간관보다는 인간의 몸을 긍정하고 그 평균성/보편성을 이상적 형태(ideal type)으로 하는 긍정적/낙관적 인간관이 오히려 설득력을 가질 것이다. 그것이 선교에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역사적/정치적으로도 한국 성결교회가 현체제와 구조를 사탄적이라고 규정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일제 치하의 성결교회와 달리 대한민국은 해방되어 자주국가를 이루었고, 이제는 군사독재를 뒤로 한 채 문민정권을 이뤄냈으며, 나아가서 최초의 정권교체를 실현하였기 때문이다. 초창기 한국 성결교회가 처해있던 상황과는 정치적으로 아주 다른 상황에 놓여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문화적 측면에서 볼 때 분명 인간 환경은 향락과 퇴폐로 더욱 부패해 있다. 몸과 마음의 성결뿐 아니라 사회적 성결과 문화적 성결을 주창하는 것이 현대인들에게는 더욱 호소력을 가질 전망이다.
3.재림: 묵시종말적 내세주의의 문제
외형상으로 드러나는 바 성결교회 재림론은 인간과 역사에 대한 비관적 입장 위에서 요한계시록에 대한 문자주의적/미래주의적 해석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그 전체적 골격은 각 세대에 일어날 사건들을 정교한 순서와 시간표 안에서 이해하는 이른바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다. 이 선포는 일제 치하의 극단적 억압 속에서 놀라운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성결교회의 재림론에 대하여 역사적/사회학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성결교회가 재림의 복음을 전하던 것은 일제의 만행으로 우리 나라가 말할 수 없이 고통을 당해야 하던 시기였다. 그 사탄적 제국에 대한 신적 심판의 선언과 억눌린 동족의 해방에 대한 희망적 선언은 크게 환영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묵시종말론적 내세주의는 오늘날 중산층화되어 있는 대부분 현대 한국인에게 환영받기가 어렵다. 설교를 통하여 성서를 통하여 종말과 재림의 신앙으로 의식화되긴 하지만, 이제 살 만해진 현대 그리스도교인들 가운데 몇 사람이나 현실을 포기하고 어서 속히 죽어 종말을 맞으려 할까?
성결교회 재림론에 대한 역사신학적 접근은 몇 가지 비판적인 문제점을 제기한다. 배덕만은 1907년부터 1943년까지 한국 성결교회의 재림사상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물으면서 그 대답을 당시 한국의 정치적/사회적 상황 안에서 구하려 하였다. 그의 치밀한 분석에 의하면 한국 성결교회의 재림사상은 대체로 정교분리(政敎分離)를 꾀하던 일제의 종교정책과 맥을 같이 했고, 1920년대의 공산주의적 반기독교운동이나 1930년대의 고등비평 그리고 1940년대의 전쟁문제 등 당시의 다양한 사회적/정치적/종교적 문제들에 대하여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또한 신학적 자유주의, 민주주의, 여성운동, 진화론 등 진보적 사조에 대하여는 이들을 종말의 징조로 보는 등 철저히 보수적인 태도를 보였다. 예를 들어 이건 목사는 여성해방운동을 사탄의 사상이요 반성서적 사상이라 하며 매도하고 있다({활천} 1934/12). 재림론에 입각한 지나친 신학적 보수성이 인류 역사의 발전을 반대한 셈이다.
성서적/신학적으로도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첫째, 묵시종말적 내세신앙은 기본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탈역사화/비정치화/타계주의화로 이끄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그리고 성서적으로 종말론은 눌린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에 대한 비존으로써 이 세상을 극복하며 살아가도록 힘을 북돋아주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둘째, 성서적 종말론에 대한 세대주의적 해석에는, 지금까지 언제나 그래왔듯이 많은 이단적 요소가 잠재한다. 나름대로 계산하여 종말의 시점을 확정하는 등 종말론과 관련된 이단들은 늘 세대주의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서는 결코 종말의 일들을 정교한 순서와 시간표 안에서 말하려 하지 않는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고 함으로써 성서는 종말의 때를 비밀에 부치고 있다. 과연 성결교회는 전통적으로 가르쳐오던 재림론으로부터 그리고 성서의 종말론적 가르침으로부터 어떤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을까?
우선적으로 유념해야 할 점은, 역사적 예수와 맞닿아 있는 가장 이른 예수전승(예수의 비유, Q문서 가운데 초기층 등)에는 묵시종말론이 없다는 사실이다. 비유 등 예수전승에서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사건은 예수 자신의 인격과 사역에 관련되지도 않으며, 그것은 역사가 끝나고 이 세계가 증발한 후 갑작스레 임하는 묵시종말론적 사건이 아니다. 그 나라는 역사의 '단절'이 아닌 '연속성' 안에 있으며 인과관계를 중시한다(마가복음 4장에 있는 씨의 비유들을 보라). 신앙인의 윤리란 기다림과 인내 그리고 자연을 따르는 삶으로 요약될 수 있다. 예수운동의 예수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 세상 안에서 참되게 살아가야 할지를 가르친다.
물론 문제는, 신약성서가 묵시적 종말론을 가르치는 데에도 교회가 그것을 기각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성서적 종말론의 진정한 목적은 종말에 관한 비밀한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고 신자의 시선을 역사의 지평 너머로 고정시킴으로써 현재적 삶에 대하여 무관심/무책임하게 하는 데에 있지 않다. 종말론이란 지금을 종말처럼 충실하고 성실하게 그리고 진지하고 진실되게 살아 마침내 종말을 준비하게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성서신학적으로 말하여, 종말론은 진정 현재론으로 완성된다(마태복음 24-25장을 보라). 현세를 종말론적으로 충실하게 살아가라는 가르침이야말로 중산층화 되어가는 한국민 대다수에게 호소력을 가질 것이다. 다행히 성서의 이러한 종말론적 전통과 일치하게, 성결교회의 재림론에는 '삶에 대한 강조'가 있다. 성결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재림의 임박성을 강조함으로써 신자에게 성결한 삶을 살게 하고자 하였다. 다시 말하여, 성결교회의 종말론은 종말론적 삶을 살게 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성결교회의 {헌법}도 재림을 설명할 때 그것은 "신앙생활의 요소이며(살전 3:13) 소망이요(살전 2:19-20) 경성이 된다(마 24:44; 25:13)"고 말한다.
다음으로 유념해야 할 사실은, 사회-구조적 차원에서 말하여 성서적 종말론의 심층 심리에는 예외없이 '변화'의 희구가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것은 많은 위험부담을 포함한다. 여인이 낳을 아이가 그리스도인지 적그리스도인지 누구도 알 수 없다(계 12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래에는 하나님이 승리하시고 역사와 우주를 다스리신다는, 미래를 향한 낙관주의인 것이다. 성결교회의 재림론에도 이러한 변화의 희구 그리고 반구조적/반체제적 전통이 뚜렷하게 존재한다. 성결교회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단히 강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타교단보다도 훨씬 더 예민한 종말론적 기대를 가졌다. 당시 일본은 국수주의에 입각하여 신도(神道)를 중심으로 한 천황제를 일제 식민통치의 이데올로기로 삼았고, 이것은 신도와 천황제를 그밖의 종교들 위에 두는 국가신도체제였으므로, 한국 성결교회의 재림론과 일제가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성결교회는 마침내 교단해산에까지 이르게 되도록 강렬한 종말론적 신앙을 유지하였다. 변화의 희구 그리고 미래적 낙관주의가 역사적으로 성결교회의 반구조성, 반체제성, 그리고 교단해산을 가져온 것이다.
이 부분에서는 근대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을 서술하면서, 앞 부분에서 제기한 문제들에 대하여 대답을 구하려 할 것이다. 성결교회 역사에는 여러 가지 전통이 혼재하며 때로는 혼란을 연출한다. 역사적으로 지도자들의 친일과 변절이 있는가 하면 반일의 저항과 투쟁이 분출하기도 한다. 신학적으로 체험 위주의 구령주의가 지배하는가 하면 그 기저에는 기층 민중을 돌보는 사회적 치유가 흐른다. 가부장적 유교 남성 사회에서 여성 해방운동을 사탄적 사상으로 매도하는가 하면, 성결교회야말로 여성 해방과 여성 지도력 개발에 가장 앞서있기도 하다. 문제는 이 혼란스런 역사적 전통으로부터, 미래 시대의 성결교회와 한국 사회를 이끌어갈 건설적인 요소들을 찾아내는 일이다. 이러한 역사적 편린들은 대체로 90년 성결교 역사의 밑바닥으로 함몰된 채 '이야기'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1.고난 속에 꽃핀 민족주의
친일의 반민족주의. 성결교회 역사 면면에는 이 교단이 과연 민족주의적이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있다. 성결교회의 교단지인 {활천}에는 일제의 집요한 강요로 "황국신민의 서사"(皇國臣民の誓詞)가 실렸다. 그 직후 최석모 목사와 김응조 목사가 서대문 경찰서에 호출되어, 강제로 일제에 의해 조직된 '기독교교단'에 가입하도록 하였다. 이명직 목사는 교단지 {활천}에 "교적, 사상적, 정적(敎的, 思想的, 政的) 3종 오해"와 "조상숭배"라는 글을 실어, 정치적으로 순응하는 의사와 태도를 조상숭배 정신이라 하였다. 그는 또한 세기말 환란시에도 복음의 대승리를 위해 국가의 지도에 순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국내 주요 교단들이 신사참배를 공식적으로 가결하던 1938년 당시 이명직 목사는 장로교 및 감리교 대표들과 함께 일본으로 이세신궁(伊勢神宮) 신사참배 길에 올랐다.
초창기 한국 성결교회가 동양선교회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은 또다른 문제를 야기하였다. 1907년 정빈, 김상준 양인이 귀국하여 복음전도관을 세웠을 때 {대한매일신보}는 이렇게 비판하였다: "동양선교회는 조선사회를 망하게 하는 단체이며 친일당인데 그 전도자들은 남산의 여호같은 자들이다." 그들이 이러한 의혹과 비판을 받은 것은, 그 선구자들의 유학에 영향을 끼친 일본 목사들이야말로 나까다 쥬지 등 일본의 대륙 침략에 앞장 선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대한매일신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동양선교회의 배후에는 조선 침략에 대한 일본인들의 계교가 숨어있다고 보았다. 당시 일반적 정서로는 일본을 이기기 위하여 서양의 세력과 손을 잡아야 했고 그 통로가 바로 서양 선교사였다면, 일본에서 시작된 동양선교회야말로 서양 선교단체들과 반대되는 단체로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대한매일신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심하도다. 일본 사람들이여! 단지 종교를 말하더라도 불교의 절을 확장하여 불교도 일본식 불교가 되게 하려 하였으며, 대동학회를 창립하여 일본식 유교가 되게 하였으며, 또한 신관회 등으로 어리석은 백성을 꾀어내어 일본의 동화력에 흡입코자 하였으며, 오늘날 예수교회를 향하여 그 괴상한 말을 휘젓는도다. 아, 슬프다."
성결교회는 초창기부터 전통적으로 사회봉사, 사회참여, 사회구원보다는 개인전도에 의한 개인구령(救靈)에 매진하였다. 그러나 일제로 돌아선 후 이명직 목사는 사회참여로 돌아서자고 주장하였다. 세기말 환란시에도 복음의 대승리를 위해 염세적인 태도를 취하지 말고 사회참여를 통한 사회구원을 위해 국가의 지도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활천} 검열제가 시작된 4월 이전의 일이었다. 그 후 1940년 11월 국민총력성결교회연맹을 결성할 때에 이명직은 이사장이 되었고 {활천}에는 신도실천이 게재되었으며 218호(1941년 2월)부터는 각교회의 실천보고가 실렸다. 성서에는 비전론(非戰論)과 고용병 제도가 없고 오직 정병제만 있음을 주목하면서 따라서 기독자는 영적 영역에 매진할 뿐 아니라 국가 봉공에도 전력을 발휘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성서해석학상으로 주목할 만한 변화이다. 사회참여를 반대하던 극단적 심령주의로부터 일제에 협조하기 위한 이른바 '사회구원'으로의 과격한 전환을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사회구원이란 예수의 방식대로 사회의 구조와 체제를 바꾸어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자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그 기능은, 일제의 침략을 허용할 뿐만 아니라 그 식민 통치가 한반도 안에 구현되도록 하는 것이다.
위에 소개한 바 이명직 목사 등의 반민족적 변절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물론 그 원인을 한편으로는 일제의 잔악한 압박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의 존재 및 신앙의 자유를 보장받으려는 정치적 측면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외형적인 원인일 뿐이다. 그 이면에는 신학적 관점의 문제가 있다. 한국 성결교회가 초창기에 체험적 구령주의로 흐른 것도, 그리고 보다 후기에 이른바 '사회구원'을 표방한 참여로 흐른 것도 모두다 성서 전체에 흐르는 심층적/구조적 측면을 보지 못하고 피상적 현상에 집착하였기 때문이다.
반일의 민족주의. 그러나 성결교 역사의 이러한 부끄러운 과거 뒤에는 자랑스러운 면모가 있다. 성결교회의 역사에는 민족을 사랑하고 민족과 함께 운명을 나누면서 민족을 위하여 헌신하기 위하여 남들보다 더 큰 고난을 자처한 숭고한 민족애의 유산이 있다. 첫째, 한국 성결교회는 한국인에 의하여 기원하였다.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주로 북미 출신의 선교사들에 의하여 유래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한국성결교회는 동양선교회의 후원 아래 한국인 전도자에 의하여 기원하였다. 나중에 이명직은 성결교회의 기원을 이렇게 말한다:
주강생 一千九白七年에 김상준, 정빈 양인이 일본 동경 성서학원에서 졸업하고 환국(還國)하야 동양선교회복음전도관이라는 간판(看板)을 붙이게 된 것이 조선에 동양선교회가 비로소 탄생된 때다. ... 그 명칭을 복음전도관이라 함은 동양선교회의 창립자인 카우만, 길보른 총리들의 정신은 따로 교파(敎派)를 세운다던지 ... 순연(純然)히 구원의 복음을 미신자에게 널리 전하여야 되겠다는 정신으로 좇아 잇게 된 명칭이었나니라. ... 一千九白二十一년 九월에 ... 교회의 명칭을 성결교회라 하엿느니라.
한국 성결교회는 일본 성결교회처럼 그러나 일본 성결교회와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기원하였다. 특히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성결교 기원의 시기를 생각하면, 성결교회가 한국인에 의하여 시작하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정빈, 김상준 두 사람은 일본의 동경성서학원에서 수학한 후 1907년 귀국하여 복음전도관을 열어 전도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동경성서학원에 간 것은 동양선교회의 초청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신의 구도적 의지에서였다. 그들은 졸업 즉시 귀국하여 고국 선교를 시작하였다. 그 후 1910년이 되어서야 동양선교회 선교사인 영국인 토마스 목사가 초대 감독으로 와서 한국 선교를 도왔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한국 성결교회의 국내 선교가 한국인 자신의 손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한국의 천주교가 기독교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이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한국인 자신의 손으로 전래되었다면, 한국 개신교 가운데 성결교회가 바로 그 경우이다. 한국 성결교회는 외국 선교사에 의해 이식된 교회가 아니라, 한국인 스스로 유학하여 기독교 복음을 국내에 전래시킨 교회이다. 한국 선교의 주동자(主動者)는 동양선교회나 그 선교사들이 아니라 한국인 자신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1911년 토마스 감독이 성서학원을 개원하기 이전에 이미 전도관에서는 25명 가량의 신학생들에게 성서 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다. 벌써부터 한국인 선교를 위한, 한국인 교육자에 의한, 한국인 목회자 양성의 꿈을 실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 3.1 운동과의 관계에서도 성결교회는 자랑스러운 과거를 가지고 있다. 송기식 목사의 증언에 의하면 김상준(성결교회의 창시자)과 강시영(밀양교회 창설자)은 경남 밀양에서 3.1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다가 크게 형벌을 받았다. "3.1 운동이 일어난 1919년은 강목사가 경남 밀양교회를 개척한 다음 해였다. 고향인 평남 용강에서 애국지사들이 밀양으로 내려와 3.1 운동에 대하여 의논할 때, 당시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하여 방 안에 볏섬을 둘러 쌓은 다음 촛불을 켜놓고 모의를 진행하여 향리에 3.1 운동을 봉기케 하였다. 이때에 김상준 목사도 이에 동참하여 두 사람은 주모자로 체포되었다. 평양 형무소에 수감되고 가혹한 문초를 받았다. ... 그후 강시영과 김상준 뒤에는 항상 형사들이 미행하였고 가족들도 종종 시달렸다고 증언한다." 1917년 경성 성서학원에 입학한 김응조는 3.1 독립운동을 성서학원에서 맞았다. 성서학원 학생들은 연전, 고전, 이전, 감신 등과 함께 3.1 운동에 참가하였다. "우리는 미리 여행자의 차림을 하고 8시에 남대문역에 모여서 일제히 태극기를 휘날리면서 파고다 공원을 향하여 돌진하였다." 이 시위로 여러 학생들이 체포되었고 학교는 방학하였다. 김응조는 선언서를 가지고 고향 영해로 내려갔다. 경찰은 그를 주동자로 여기고 그곳에서 대기하다가 체포하여 대구 형무소에 수감하였고 4년 구형에 1년 반의 언도를 받았다. 3.1 운동 당시 아현교회를 담임하며 설교로써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던 이명직이나, 현풍, 유가 고령 구지 일원과 대구지역에서 독립투쟁을 주도한 빛나는 애국지사 이상철 목사나, 민중의 선봉에서 만세 사건에 참여하던 강태온이나, 당시 여성 지식인이자 전도부인으로서 혈성애국부인회와 대한애국부인회를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하던 백신영이나, 모두 민족주의적 기독교운동에 앞장선 사람들이다. 그리고 한도숙, 천세봉, 토마스 등의 활약도 성결교회의 역사를 빛내고 있다. 그외에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였거나 유사한 이유로 심한 고초를 당한 사람들로는 신공덕교회의 윤판석, 군위교회 최헌, 만주의 장두원 등이 있다. 독립운동에 이같이 열심히 참여했다는 것은, 현재의 역사적 경험에 대하여는 비관적이었지만 미래를 향한 낙관주의적 입장에 입각하여 변화를 희구했다는 것을 뜻하고, 종국적으로는 긍정적 역사관을 가졌다는 것을 뜻한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성결교인들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이 한국민의 역사와 그들의 '현실 세계 안에서' 발생하길 바라는 염원이 있었던 것이다.
셋째, 신사참배 거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장로교 평북지방노회가 처음 신사참배를 가결한 1938년 2월을 깃점으로 하여, 10월에는 감리교단 제 3차 연회가 스스로 신사참배할 것을 결의하고, 같은 해 천주교도 자진 형식으로 신사참배를 가결하였다. 이런 와중에 성결교회에는 두 종류의 반응이 있었다. 하나는 시대 상황에 순응하여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으로 받아들이면서 신앙생활을 하자는 사람들이었다. 다음으로는 오로지 성서적 복음에 집착하면서 부흥전도운동에만 전념하던 사람들이었다. 북선지방의 이건, 남선지방의 배문준, 남덕규, 천세복, 김규호, 손갑종, 박봉진, 김정호, 황경찬, 오열필, 이진우, 황성주, 김용은, 정재학, 최헌, 김창근, 김유연, 백신영, 일본의 김기삼, 만주의 장두원 등이 그랬다. 여기서 한 가지 비판적으로 고려할 만한 점은, 신사참배 거부의 주요 동기가 결국은 철저한 심령주의적 신앙이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한 것은 세속의 역사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연속적인 과정의 결과가 1943년 5월 24일엔 성결교회 목회자 검거령으로 나타났다. 성결교회의 목회자 전원과 장로, 전도사, 집사까지 전국 각 경찰서에 연행 감금한 것이다. 검거된 사람들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혹독한 심문과 설득에 굴하지 않고 신앙의 절개를 지켰다. 한 예로, 이때 체포된 철원교회의 박봉진은, 주리를 틀며 천정에 매달고 매질을 하는 온갖 고초에도 굴하지 않고 항거하다가 "헛된 세상 오래 살면 뭘하나? 나는 지금 천국으로 간다"라는 말과 함께 1944년 8월 15일 순교했다. 그 외에도 경성신학교 김은규, 함흥의 김호, 김하석, 신안주교회의 김지봉 집사 등 많은 사람들이 일제에 항거하다 장렬하게 순교하였다. 급기야 1943년 12월 29일 유독 성결교회에 교단해산을 명하여 전국의 교회들은 문을 닫았고, 성결교인들은 인근의 장로교회나 감리교회로 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성결교회의 역사적 전통에는, 초기 예수전승에서 드러나는 반구조적/반체제적 요소가 있다.
2.기층적 민간대중에 대한 개방성
성결교회 초창기 역사에 대한 사회계층적 분석은 성결교 전통의 새로운 면을 드러낸다. 사회봉사와 사회참여에 대한 거부 및 지나친 심령화와 구령주의적 경향에도 불구하고, 초기 한국 성결교회는 사회 저변의 기층적 민간대중에 대한 개방성과 돌봄이 혼재하고 있다. 20세기 초 한국 기독교의 양상은 서북지방과 서울지역이 대조적이었다. 서북지방이 중산층의 상인 계층을 중심으로 하여 비정치적 신앙운동으로 나아간 것에 비하면 서울지역은 양반관료를 중심으로 하여 일제에 대한 방어수단으로 기독교를 이해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전자가 1907년의 평양 대부흥운동으로 대표되는 바 체험적 부흥운동으로 나아갔다면, 후자는 주로 병원이나 학교를 설립하여 사회봉사에 치중하였다.
그러나 양적 성장이나 사회계층 및 접근 방법 등에 있어서 성결교회는 정반대의 두 가지 양상을 보이면서 오히려 서울지역에서 더 큰 성장을 이루고 있다. 그 두 가지 양상이란 서민 계층을 중심으로 한 선교와 성결복음에 의한 영적 도전이다. 첫째, 성결교회는 서울지역에서도 식자층을 대상으로 전도하지 않았다. 초창기의 성결교회는 과감하게 서민계층에게 접근하였던 것이다. 둘째, 본래 서울지역의 상인(常人) 계층 선교에 앞장선 사람은 북장로교 선교사 무어(S. F. Moore)였다. 정빈은 그의 전도를 받아 연동교회 신자가 되었다. 그런데 양반과 상인이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연동교회에 문제가 발생하였다. 1909년 노름꾼 출신 이명혁이 장로로 장립되자 "상놈의 새끼들"과 함께 양반의 자녀들을 교육시킬 수 없다 하여 약 100여 명의 양반 출신들이 연동교회를 나와 묘동교회를 설립하였다. 연동교회 출신 가운데 많은 이들이 또한 성결교회의 부흥집회를 참석하고 정빈의 경성 복음전도관으로 이명하였다. 결국은 성결교회가 서울지역의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던 영적 목마름을 해소하며 급속도로 성장하는 결과가 되었다.
성결의 복음에 의한 영적 도전과 기층적 민간대중을 향한 사회적 돌봄의 이 두 가지를 결합하는 것은 18세기 영국의 요한 웨슬레로부터 19세기 미국의 성결운동을 거쳐 일본의 동양선교회에 이르도록 일관된 역사적 전통이었다. 요한 웨슬레는 온전한 성화를 외쳤지만, 그것은 산업혁명으로 인한 영국사회의 과격한 변화와 급격한 도시화 현상 때문에 형성된 도시 빈민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그의 노예 폐지운동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 19세기 초에 감리교회가 가장 비약적으로 부흥한 것도 서부 개척의 시대에 파송제도를 통하여 그곳으로 민첩하게 목회자를 보내 아직 정착되지 않은 새 주민들을 맞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19세기 후반 성결운동들은 전통적인 교회들이 버리고 간 슬럼화된 도시에서 빈민들을 대상으로 하여 선교하였다. 동양선교회의 설립자 카우만도 성결과 빈민 선교를 연결시킨 성결운동 출신이었다. 그가 속했던 Metropolitan Church Association은, 시카고의 가장 가난한 지역에서 빈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성결운동 단체였다. 이같은 전통 위에서 한국 성결교회는 기원의 시간 복음전도관 시대부터 가난한 천민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과연 "서울시 한복판인 무교동에 세워진 전도관은 곧 무교동의 문제를 복음으로 치유하려고 했던 하나의 시도"였던 것이다. 요한 웨슬레나 이후의 웨슬리안 성결운동들 그리고 한국 성결교회 모두에는, 기적 이야기 등 예수전승에 드러나는 바 약자들을 향한 과격한 개방성이 하나의 매우 두드러진 역사적 전통으로 확립되어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성결교회는 이에 걸맞게 사회봉사를 도외시하지 않았다. 은퇴한 여교역자를 위하여 성락원을 설립한 것 외에 대전의 영생양로원과 성육원(인천)이나 성대원(원주) 등 전국 12곳의 고아원 설립 등이 그 예이다. 특히 이러한 사회사업이 본격화된 것은 6.25 전쟁으로 전쟁 고아와 미망인 그리고 장애인의 생활이 사회문제로 대두된 이후이다. 그뿐 아니라 영화중학교(인천), 성청농업기술학교(부여), 균명중고(현 환일, 서울), 대신중학교(여주), 평성여자중학교, 백암중학교, 성만여자상업학교(현 경복여상), 한영중고, 은산고등공민학교, 부여불량배청소년선도고등공민학교, 상지대학교(원주), 대명중, 숭의중고, 정의여고, 원의중학교, 부산의 덕원중고를 설립하여 교육에도 관심을 갖는 면모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서울 수복 후 1954년 5월엔 성결교회 사회사업 유지재단을 설립하였고 가맹 시설이 20개소에 달했다. 성결교회가 사회참여를 통한 간접 선교보다는 개인전도를 통한 직접 선교에 매진하긴 하였지만 결코 사회봉사를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이같은 현상은 성결교회의 신앙적 유산과 일치한다. 1934년에 창설된 부인회가 1946년 성결교회 신생부인회로 개칭하면서 5대 신앙강령을 제시했다. 이는 (1)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신구약성서에 대한 믿음, (2) 기독교 교화운동의 실천, (3) 예수를 본받아 이웃 사랑과 포용의 덕성 함양, (4) 의뢰심, 나태, 무지, 질병의 4대 적을 퇴치하고 자주, 근면, 문맹퇴치, 보건운동을 실천함, (5) 생활 속에 도덕적/문화적 가치를 결여한 풍속, 습관, 제도의 타파 또는 개선이다. 여성들의 신앙선언 가운데 절반 이상이 사회적/실천적 쟁점들을 골자로 하였다. 그것은 봉건사회의 사람들을 위한 개화의 성격이 강하다. 이 신앙선언은 성결교인들로 하여금 현실 삶을 포기하며 내세적인 것과 심령적인 것만을 추구하도록 하지 않았다. 오히려 초기 예수전승이나 성서적 종말론에서처럼 '현실 삶의 긍정'을 전제하였고, 여기에는 건실한 '삶에 대한 강조'가 있다. 바울 신학이 역사 초월의 헬레니즘적 전통에 서 있다면, 현대 개신교가 배타적으로 여기에만 의존하며 또한 바울 전통조차도 오해함으로써 발생하는 그리스도-케리그마의 역기능적 양상이 아니다. 여기에는 오히려 신앙을 삶으로 현실로 돌이켜주는 종교적 성숙이 있다. 성결교회의 신학사에도 이렇게 건전한 개방적/진보적 전통이 있었다. 성결교회가 체험 위주의 구령적 '순복음'을 전하는 배후에는 이렇게 사회적/문화적 성결을 추구하는 전통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숭고한 신학적 유산은 성결교회의 지도자들보다는 '여성들'에 의하여 주창되었다.
3.여성 해방과 여성 지도력의 개발
기층적 민중에 대한 성결교회의 개방적 입장과 관련하여 가장 두드러진 것은 여성의 문제였다. 성결교회에는 이건 목사처럼 여성해방운동을 반성서적 "사탄의 사상"으로 매도하는 전통이 있었다. 그러나 여성을 해방하고 그들의 지도력을 높이 평가하는 전통은, 마치 정결체계를 무너뜨리며 여성을 해방하던 예수의 사역에서처럼, 미국의 성결운동과 특히 한국 성결교회의 역사 저변에 흐르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었다. 19세기 미국 부흥운동들은 여성들에 대하여 대단히 개방적이었다. 그들은 교회 안의 여성들의 지위향상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하바드대학조차도 여성 입학을 거부할 때 오벌린(Oberlin) 대학은 처음으로 남녀공학을 실시하였다. 19세기 전반 웨슬레 전통 안에서 성결운동을 주도해가던 사람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인 팔머 여사(Mrs. Phoebe Palmer)였다. 그는 1836년 성결의 은혜를 체험하고 자신의 집에서 화요 성결집회를 개최하여 점차 남성들도 참여하게 되었다. 이 모임은 햄린(Leonidas L. Hamline)과 제인스(E.J.Janes) 등 감리교 감독들을 배출할 만큼 유명한 집회가 되었다. 또한 메릿(Timothy Merrit)과 함께 정기간행물Guide to Holiness를 만들어 1873년에는 4만여 명의 독자를 확보할 만큼 그 영향력이 확대되었다. 팔머 여사는 요엘서의 예언과 이를 인용하는 베드로의 설교에 근거하여, 말세에는 남종과 여종이 하나님의 성령을 받을 것이므로 중요한 것은 여성과 남성의 구별이 아니라 성령을 받았는지의 여부라 하였다. 따라서 성령을 체험한 사람은 여성이든 남성이든 설교할 수 있고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한국 성결교회는 처음부터 남자에게 놀음, 술타령, 싸움, 아내 구타, 축첩, 성 천대, 자녀 소홀을 금지하였다. 그리고 1909년 즈음에는 교회의 개방과 여학교의 개설을 통하여 1,200명 이상의 여신도를 만들어 점진적으로 여성들을 집 안으로부터 사회로 이끌어 내는 조용한 여성해방을 이루었다. 여성들의 사회적 외출을 금하던 당시, 김상준의 모친 박부인은 회심한 후 대문가, 우물가, 빨래터에 있는 여자들에게 혐의를 받으면서까지 전도하여 듣고 믿게 하는 구령사역에 몰두하였다. 박부인은 또 먼 곳에 있는 딸을 방문하여 가족을 예수께 인도하였고 근처 이웃 사람들과 어린이들에게 전도관이 세워지기까지 일했다.
남자보다 어린이를 동반한 부인이 많았다. ... 여자의 출입을 금하던 당시 문화권에서 볼 때 여자들이 남자와 한 방에서 성결공부를 하고 기도하는 일과 고을마다 다니며 불신자에게 전도하고 가르친다는 것은 모험이었다.
성결교회는 타교단보다 여성 지도자 양성에 앞서 있었다. 성결교회는 그 기원의 때부터 적지않은 수의 여성들이 성서학원에 와서 지도자 훈련을 받았다. 1908년 11월의 경성복음전도관의 성경공부반에는 40여 명이 출석하였다. 최씨와 안씨라는 전도부인은 오전에는 성경공부반에 참석하였고 오후에는 전도하였으며 밤에는 부흥집회를 도왔다. 1909년에는 전도부인들의 열심있는 전도로 서울의 안동원과 일본 유학 중이던 이명직이 동경성서학원에 입학하였다. {하늘의 전보} 곳곳에는, 성결교회가 초기부터 신학교와 교회에서 여성 목회자의 역할을 크게 인정하고 이들의 활동을 적극 권장한 사실이 보도되고 있다.
경성 성서학원이 계속해서 열의를 가지고 여성 목회자를 양성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남녀 간의 내외 풍습이 엄격한 때에 여성들을 만나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는 전적으로 여성 목회자들이 요청되었기 때문이다. 첫째, 남자들은 옥외집회나 각종 예배를 통해 접근할 수 있었지만, 여성들은 전도부인의 방문과 초청으로 교회에 나왔다. 이 여성 지도자들은 복음적이고 구령열에 불탔다. 그래서 부흥운동을 일으킨 결과 여성들을 영적으로 부흥시켰다. 그들의 이러한 활동으로 전도부인과 목회자 부인들이 활기차고 능동적으로 사역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만일 훈련된 전도부인이 없었다면 여성들을 위한 사역은 힘들었을 것이다. 둘째, 이 때는 교회의 예배조차 예배당 한가운데 휘장을 치고 드리던 때이다. 설교자는 마루의 중앙에 위치하고, 남자는 마루의 오른쪽에 그리고 여자는 마루의 왼쪽에 앉고 그 사이에는 칸막이나 커텐을 쳐 서로 볼 수 없게 하였다. 그러므로 여성 신도들을 위한 설교자, 성경교사, 그리고 지도자 역할을 할 만한 여성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타난 사람들이 전도부인이다.
전도부인들은 아주 초기에는 선교사의 보조자로서만 역할을 하였지만 점진적으로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들은 부인회를 조직하여 전도와 봉사에 힘쓰는 등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담당한 것이다. 이 여성 지도자들은 나아가서 금주와 금연운동에 힘썼고 또한 일상생활에서의 생활 개선과 문맹퇴치 등 여성 해방운동에 앞장섰다.
한국 성결교회에는 점차 여성지도자들의 역량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1918년말 교단의 상황은 경성에 2개처의 전도관, 24명의 남성 목회자와 아내, 14명의 전도부인, 대거 부락전도운동에 사역하는 7명의 남성 목회자와 2명의 전도부인, 성서학원의 남녀 35인, 16개처의 지방전도관과 많은 순회예배처가 있었다. 이러한 교세확장에 "가장 돋보이는 것은 여성 목회자들의 활약이었다." 중앙에서만도 남성 목회자의 부인들 말고도 16명의 여성 목회자가 활약했다는 것은 그들의 비중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준다. 정빈의 사모 류부인, 경성 무교정의 최홍은, 홍산전도관의 최재은, 경성의 나영은, 엿바위(부여 규암)의 손은숙, 김천의 허순성, 홍산 바야웨(부여 금천리) 곽재근 전도사의 사모, 철원의 곽진근, 경안(광주)의 유에스더, 그리고 손경애, 백신영, 신현숙 등은 초기 성결교회사에 길이 남을 여성 지도자들이다. 특히 백신영은 정신여학교에서 수학하고 나중에 성서학원에서 공부하여 1917년 개성복음전도관에서 전도부인으로 일했다. 그 후 1919년 정신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해 10월 대조선애국부인회와 혈성애국부인회를 합하여 대한애국부인회를 결성하였다. 여기서 회장 김마리아와 함께 주요 인물로 활약한 끝에 11월 26일 검거되어 3년 구형에 1년 언도를 받았다. 그는 성결교회의 전도부인으로서 지성적/민족주의적 여성 지도자였다. 성결의 신앙으로 응집된 영적 지도력과 민족주의적 사회 참여로 형성된 사회적 지도력을 겸비한 여성이었던 것이다.
이 기간 동양선교회 기관지에 '전도부인'이란 제목 하에 기고된 내용만도 15건 이상이나 된다.
존 토마스 부인의 글에 따르면 전도부인은 (1) 글을 일고 쓸 줄 모르고, (2) 남녀혼실을 하지 못하고, (3) 가부장적인 남자인척으로부터 압제받고 있다가 글을 배우는 것은 물론 생각과 행동의 자유를 교육받고, 남녀간의 칸막이라는 장애없이 여자교수들로부터 온전한 구원의 진리를 배우고, 기도회를 인도하는 법과 다른 사람을 구도시키고, 구원시키는 법을 배웠다 (밑줄은 필자의 것).
이 여성들이야말로 집 안에서의 격리, 압제, 그리고 문맹으로부터 집 밖에서의 교제, 자유, 그리고 복음진리에 대한 눈뜸에로 나아간 사람들이다.
여성 지도력에 대한 성결교회의 진보적 입장은 시간이 경과되어서도 변하지 않았다. 그것은 우선 부인회의 조직과 {기쁜 소식}의 발간을 통해서 입증된다. 1920년대초부터 서대문교회(현 독립문교회), 대전교회, 인천교회, 김천교회, 무교정교회 등에서부터 부인회가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목표는 "믿음과 기도와 열심과 물질로 하나님 나라의 사업을 공동으로 협조"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기도와 전도로써 소속 교회들을 현저히 부흥시키는 것은 물론 성미 활동을 통하여 예배당을 건축하는 등 실로 그 활동이 놀라왔다. 그 후 1934년에는 지교회 부인회로 구성된 부인회 전국 연합회가 구성되었다. 9월 10일 아현교회에서 발기인 33인이 모여 부인회 전국연합회 조직을 결의하였고, 9월 29일부터 이틀간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1948년에는 명칭을 '성결교회 신생부인회'로 바꾸었다.
부인회 전국연합회는 같은 해 11월부터 이명직 목사의 후원 아래 순 한글로 {기쁜 소식}을 발간하여 {활천}과 함께 문서선교나 교육 및 교단 연합사업의 양대산맥을 이루었다. 그 내용은 주로 교회 여성의 신앙문제와 성경공부, 설교, 감상문, 기행문, 인물소개, 교육문제, 교계소식 등만이 아니라, 여성 지위의 향상에 관한 것들이다. 1939년에는 성결교회의 여신도들은 물론 장로교나 감리교에 속한 많은 여성들도 구독자가 되어, 전체 구독자가 1,700여 명에 이르렀다. 이 단체는 {기쁜 소식} 발행 외에도 부인 심령수양대회의 개최, 교회개척 등에 매우 활동적이었다.
1933년 4월의 성결교단 제 1회 창립총회는 11일부터 16일까지 엿새 동안 성서학원 대강당과 독립문교회에서 카우만 여사와 여성 선교사 메기를 강사로 모시고 수양회를 개최하였다. 주강사였던 메기는 기도, 전도, 재림, 성령세례에 대하여 설교하였는데 1,400여 명의 목회자 및 신도들이 모여서 경청하였다. 모든 대의원이 두 명의 여성 지도자에게 설교를 들은 것이다. 동총회 특히 법제부에서는 남녀 전도사에게 총회 대표권 허락의 건을 토의하였다. 여성 목회자에게도 남성들과 차별 없이 총회 대의원권을 주자는 취지였다.
이상의 관찰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1907년 이후 서울과 경기 지방을 중심으로 성결교회가 크게 성공한 이유가 서민층을 타겟으로 한 체험적 부흥운동이었고 또한 이에 걸맞게 여성 리더쉽을 적절히 개발하였기 때문이라면, 그 심층적 구조는 실용주의 즉 '효용성의 해석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일제에 항거하게 하기도 하고 또 '사회구원'을 주창하며 친일행각을 하도록 만들기도 한 것이 결국 성서와 기독교전통에 대한 단편적 이해에 기초한 체험적 신앙과 구령주의적 전도열이었다는 사실만큼이나 중요하다. 지나간 거의 1세기 동안 한국 사회의 바뀌어진 현실을 직시할 때, 이제 예수 이후 세 번째 밀레니움에 진입하는 성결교회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변화된 상황에도 불구하고 체험적 신앙과 구령주의적 전도열을 집착할 것인가, 아니면 변화된 상황에 적중할 새로운 '효용성의 해석학'을 개발할 것인가? 예를 들어, 성결교 기원의 때에 국민의 절대다수가 빈민층이었던 것에 비하면, 오늘날은 전국민의 70% 이상이 중산층화되어 있다. 중산층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물론 그 이상이다. 그리고 지식 수준과 교육열은 극단적으로 제고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효율적인 선교방식은 어떠한 것일까? 사회현실과 유리된 초월적/체계적 구령주의인가? 아니면 인간의 내면적 변화를 중시하면서도 기층 민중들 및 여성들의 인간화에 역점을 둔 사회봉사와 사회참여를 등한시하지 않는 포괄적 선교인가?
여성권익과 여성 지도력의 문제에 대해서도 성결교회 역사의 관찰은 작금의 현황에 대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최근의 현황을 보면 성결교회는 여성 목회자들에게 목사 안수는커녕 지방총회나 전국총회의 대의원권도 허락하지 않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안수집사 제도가 생겨, 교회 안에서 남성들은 목사, 장로, 안수집사를 독점하고 여성들은 고작 권사와 집사 직위를 차지할 뿐이다. 그것도 집사직은 남성들과 공유한다. 교회에서 주역은 언제나 남성들의 몫이다. 더욱이 전체 회중 앞에서 여전도사가 설교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거나 매우 이례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오고 있는 세 번째 밀레니움이야말로 정교한 지성과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들이 주도하는 시대가 될 것이고 이미 사회 각 분야에서 여성들의 진출이 대단히 괄목할 만하게 현실화되는 이 때에, 더욱이 일반 사회에 비하여 현저히 진보적 입장에서 여성들을 개화시키고 해방시키던 전통의 성결교회가 이제 교회 안에서 여성들을 불평등의 구조로 억압하는 것은 시대정신에도 맞질 않고 성결교 전통에도 부합하질 않는다. 이제 막 여성 안수 문제가 교단의 쟁점으로 떠오른 때에, 성결교회의 여성사적 관찰은 그 의미가 매우 크다고 본다.
VI. 나가는 말
이상 성결교회의 역사와 신학을 개괄적으로 소개한 후, 신학적 정체성을 새로이 정립하기 위하여 사중복음에 대하여 성서적/신학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였고 나아가서 성결교회 역사의 잊혀진 전통들을 발굴하고자 하였다. 성결교 신학의 새로운 구조 조정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성결교회 역사의 잊혀진 전통들에 대한 새로운 발견 그리고 성서 해석의 새로운 발전이 전제되어야 한다.
첫째, 사중복음이든 성결교 신학이든 성서의 뒷받침을 받으려면 성서에 대한 역사비평적 해석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지금껏 성결교 신학은 기계적 영감설에 기초하여 성서를 하나님의 무흠한 말씀이라 고백하면서, 문자주의적 해석/심령주의적 해석을 고집하였다. 그 결과는 앞서 개진한 바 자체적 모순과 시대착오성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성서관의 가장 큰 특징은 성서의 모든 부분들(저자들)이 '단 하나의 통일된' 세계관 안에서 '단 하나의 통일된' 진리를 말하고 저자나 독자의 '상황'과 무관한 무시적/절대적 진리를 전하고 있다는 믿음의 전제이다. 이러한 해석의 결과 18세기 영국의 요한 웨슬레, 19세기 미국의 성결운동들, 20세기 초 일본의 동양선교회, 그리고 21세기와 세 번째 밀레니움으로 진입하는 한국 성결교회에 이르기까지 사중복음과 특히 성결론은 이렇다 할 발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웨슬레보다 크게 퇴보하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현재의 지성적 기독교인들은 '인간의 경험과 자연세계로부터' 생의 진리를 배우라는 잠언의 가르침과 하나님의 진리와 구원이 '철저히 외계로부터' 온다는 다니엘서 및 요한계시록 사이에서 혼란을 경험하고 있다. 인간의 모든 질병이 자신의 죄에서 비롯되었다는 세계관과 욥기에서처럼 그렇지 않은 경우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 구약성서도 예수의 적들도 성결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지만, 예수는 성결의 제도를 폐기하고 있다. 성결교회의 신학자들은 이제 인정해야 한다. 역사의 경우처럼 성서 안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전통이 있으며, 이들이 때로는 서로 조화를 이루기도 하지만 때로는 서로 충돌하기도 한다. 미래 시대의 교회와 사회를 이끌어갈 신학자에게는, 성서의 여러 전통들 가운데 미래 사회의 구체적 정황들에 어떤 전통이 보다 더 건전한 길잡이가 되는지를 분별하는 혜안이 있어야 한다. 성결교회의 역사적 전통을 살리고자 하는 순수한 의지와 건실한 사회적 지도력을 정직한 역사비평적 성서 해석과 통합시켜야 하는 것이다.
둘째, 성결교 역사에 대한 비판적 연구는 잊혀진 전통들의 소중한 측면들을 발견하게 하였다. (1) 초월적/심령주의적/내세주의적 신앙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향한 낙관주의적 입장에서 변화를 희구하며 하나님의 구원이 역사 안에서 발생하기를 염원하였다. (2) 기독교 신앙의 비정치화를 주장하면서도, 일제에 항거하여 교단이 해산되도록 반구조적/반체제적 입장에 섰다. (3) 사회참여를 거부하며 오직 체험에 근거한 구령주의의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영국의 웨슬레와 미국의 웨슬리안 성결운동들에서처럼 약자를 향한 과격한 개방성을 보이면서 결코 사회봉사를 포기하지 않았다. (4) 보수적/심령주의적 신앙을 천명하면서도, 신생부인회의 신앙선언은 '관념'의 차원에 머물던 신앙을 '삶'의 영역으로 돌이켜 주며 사회적/문화적 성결을 추구하도록 그 실마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5) 근본주의적/가부장적 남성 사회에서 남성중심적 체제를 유지하고자 여성해방운동을 정죄하긴 하였지만,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예수나 초기 예수운동에서처럼 여성들을 해방하며 가장 빨리 여성 지도자들을 육성/활용하는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서로 어울리지 못하는 전통의 단편들, 그리고 그들의 혼란스런 병존. 미래를 향해 열려진 성결교회의 새로운 가능성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될지도 모른다. 고난의 가시밭에서 백합이 꽃피고 흐드러진 백합이 가시에 찔려 향기를 내듯, 환란과 핍박으로 역사의 질곡을 살아온 성결교회는 바로 여러 전통들의 혼란 속에 형성되었기로 새 시대를 열어갈 새 원동력을 잉태할 것이다.
신약성서의 여러 전통들에 대한 역사비평적 분석 위에서 성결교회의 네 가지 신학적 강조점을 살펴보면, 성결교 신학의 정체성에 대하여 새로운 구조조정을 가능케 한다. 그것은 기존의 사중복음과는 다른 새로운 신학적 성찰을 전제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느 하나를 배타하고 하나를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포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1) 그 새로운 체계 안에서 중생의 복음은 회심 체험에 근거한 종파주의적 배타성에서 벗어나, 개인구원뿐 아니라 민족구원과 사회구원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태계 파괴의 우주적/전인류적 재난으로부터의 구원을 포괄하도록 해야 한다. (2) 성결의 복음은 정신의 성결일 뿐 아니라 사회적 성결과 문화적 성결을 포괄하도록 한다. (3) '몸'을 긍정하는 신유의 복음은 개인의 건강뿐 아니라 사회의 건강을 추구하고 '약자를 위한' 개방적 치유가 되도록 사회봉사의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 (4) 재림의 복음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편협성을 탈피하여, 실험정신을 숭상하는 가운데 건설적인 변화를 희구하며 미래를 향한 진취적 낙관주의에 부합하도록 하고 끊임없이 교회를 변혁/갱신하여 역사발전에 기여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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